천자평/냉전연구2014. 11. 9. 20:39

이 책은 마오의 중국과 냉전을 열쇳말 삼아 전후(戰後) 아시아에서 펼쳐진 중공의 의도와 국제관계를 9개의 주제와 사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새롭게 발굴·번역된 중국과 러시아 자료에 기초하여 1940~60년대 아시아의 냉전 경험을 중국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서술하였다. 서문이 잘 밝히고 있듯,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탐구지점을 설정하였다. 그것은 바로 지난했던 국공내전과 중국혁명, 두 차례의 열전, 미국과의 긴장 완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의 두 번째 질문은 국익과 안보를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국적 자료에 근거하여 사상과 이념이라는 요소를 분석에 도입한 개디스를 필두로 하는 ()냉전사연구의 흐름 속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각주:1] 저자는 이 책에서 상기의 질문에 답하면서 중국의 냉전 경험을 반추했고, 그러한 경험의 유산이 어떠한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가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론과 결어를 포함하여 모두 11장으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마오의 중국이 맞닥뜨리게 된 일련의 사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지도부의 인식 및 행동을 보여주었다. 1~2장은 전후 중국이 다시 한 번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미소갈등이라는 냉전 구도에 포획된 아시아에서 중국의 주도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특히 저자는 2장에서 워드 사건’, ‘-스튜어트 접촉’, ‘일변도 성명에서 드러난 중공의 언설과 행위를 통해 중국에서 미국이 실패한 것은 잘못된 대중(對中)정책 때문이라는 모종의 신화를 비판하였다.[각주:2] 3장은 1956년 열린 20차 소련공산당대회를 기점으로 중소관계가 악화돼가는 모습을 서술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본격적인 중소갈등의 진원(震源)은 이미 고인이 된 스탈린에 대한 태도상의 차이였다. 4장은 6·25전쟁을 끝내기 위한 중국의 생각과 전략을 다루었고, 5장은 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뒤이은 제네바협상의 미봉적 타결을 서술하였다. 6장은 1956년 폴란드 위기와 헝가리 사태에 대한 베이징의 태도를, 7장은 1958년 대만해협 위기를 다루었으며, 8장과 9장은 각각 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와 데탕트에서 중국의 인식과 역할을 설명하였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 중인 냉전사 연구에서 근거가 되는 1차 자료들의 소장처뿐만 아니라 각 주제를 다룬 영어 및 중국어 문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등장한 바 있듯, 이 책 역시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중공 지도부의 사고와 인식을 엿보기 위해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회고록을 비롯하여 선집이나 건국이래마오쩌둥문고, 마오쩌둥군사문집 등 중앙당안관(中央檔案館)[각주:3]에서 펴낸 중공중앙위원회 문서와 마오쩌둥 관련 문서를 자료적 핵심으로 삼았다. 더하여 저자는 구()소련 및 동구(東歐) 자료의 경우,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국가안보문서고[각주:4]와 우드로윌슨센터의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 문서고[각주:5]에서 도움을 얻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자료에 대한 엄밀한 사료비판은 드러나지 않으며, 또한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고 충실한지에 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저자의 서술에서 찾을 수 있었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가 이후 전개될 중소갈등, 조중갈등, 중월갈등의 씨앗을 각기 다른 시간대의 역사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중공 지도부나 중국을 설명할 때 아편전쟁 이후중국이 겪게 된 역사적 굴욕과 피해의식을 계속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 간 관계, 특히 갈등의 역사는 19세기 이전으로 소급하여 서술하지 않았다. 평자는 그 이유가 궁금한데, 아무래도 중국(관변)의 입장에서 냉전기 중국의 경험을 파악한 다수의 사료에 근거하다보니 나올 수밖에 없던 문제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러한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북한·베트남의 냉전사 서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저자가 제기한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이 어떠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따라가 보자. 첫째,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2차 대전이 끝난 세계,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역할은 결코 미소갈등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은 결정적인 주연으로서 냉전의 국제정치에 개입했고 시기별·지역별로 나름의 국내외 정책을 관철시켰다. 6·25전쟁에 참가하여 소련의 불완전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상대로 대등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스탈린의 소련의 눈치를 봐야했으나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소련을 적극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가려고 하였다. 물론 헝가리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제공산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라는 수사를 통해 소련의 진압을 용인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 중소관계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독자는 이 책에서 중소관계의 몰락이나 중월관계의 악화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소제목(Ideology matters)을 할애하여 이념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때 이념은 단일한 결과로 귀결되었다기보다는 그 이념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인 주체의 세계인식 또는 역사·문화적 환경에 따라 변용되고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고, 마오식()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원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별개로 중국의 대내외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이 책은 마오를 비롯하여 중공 지도부의 인식과 생각에 강조점을 두어 계속 드러내려고 하였다.

 

셋째,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 저자는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국제정치에서 중국이 보인 행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마오의 혁명 후의 우려라는 심리적·개념적 요소를 제시하였다. 이는 마오의 계속혁명개념과 쌍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즉 그는 보편적 정의와 평등이 도래하고, 중국이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다시거듭날 때까지 혁명을 계속추구하였고, (실상 불가능에 가까운)이러한 목표들이 달성되기까지 우려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터였다. 따라서 마오 시기의 중국은, 적어도 대외관계상에서 중심성을 추구하였으나 지배는 추구하지 않았고, “항상대내적 동원이라는 목적으로만 물리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또한 자본주의사회와는 구별되는 중공 정치의 독특한 요소들, 이를테면 중국에서의 민주집중제나 광범한 대중 동원을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결어에서 저자는 중국의 냉전 경험의 유산을 설명하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중국의 1당 독재체제라든가 피해의식에 대하여 서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한 듯 보인다. 이렇듯 저자가 영어로 마오의 생각과 중국의 냉전 경험을 서술한 의도는 그 다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중공 정부는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수행(즉 국제사회로의 통합)해야 하고 그것의 관건은 바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성원들이 열심히 중국의 관점과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현실의 정세(중국의 대국굴기와 미국의 쇠퇴)가 역사가의 입지에 고스란히 반영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1. John L. Gaddis(1941~). 이른바 "냉전사가의 수장(Dean)”으로 불리는 미국인 역사가로 냉전과 거대전략을 탐구한다. 2014년 현재 예일대학에서 Robert A. Lovett육해군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조지 케난(George F. Kennan)의 공식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Chen Jian(陈兼),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본문으로]
  3. http://www.saac.gov.cn [본문으로]
  4. http://www2.gwu.edu/~nsarchiv [본문으로]
  5.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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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26. 06:45

 기왕의 625전쟁 연구는,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냉전연구라는 관점 위에서 진행된 측면이 강했고, 이는 연구의 경향을 대별하는 지표에서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전통수정이라는 수식어구가 그것이다. 양자를 대표하는 연구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고저를 달리하며 이어졌다. 전자는 전쟁의 발발원인과 책임을 북··소 등 공산권에서 찾은 반면, 후자는 그것을 남한과 미국 등에서 찾았다. 한편 1990년대 이후부터 전통/수정의 이분을 뛰어넘으려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됐고, 연구주제의 외연도 크게 확대되었다.

 

 1990년대까지의 625전쟁사 연구는 40년이라는 시간을 종축으로 삼고, ‘전통/수정을 가르는 계선의 양편에서 미국/한국’, ‘관변/민간’, ‘내인론/외인론’, ‘국내전/국제전등 각각이 625전쟁을 보는 입장과 분석의 하위 범주를 달리 설정 했다.

 

 미국의 625전쟁 연구의 경우 한편으로 관변의 전통주의적 시각과,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수정주의적(또는 급진적) 시각이 80년대까지 서로 평행을 달렸다. 양자 모두 종합적인 625전쟁사는 쓸 수 없었는데, 자료나 관심의 초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은 포연 가득한 전장의 복판에서 625전쟁의 공식사를 서술했고, 이는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한국에 번역·소개되었다. 이는 전장에서 벌어진 전투와, 개전부터 정전까지의 기간에 집중한 것이었다.

 

 625전쟁에 관한 여러 해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 정책입안자들의 사전지식·행동·의도, ·소의 대한정책, 미국 국내 정치, 다른 국가들의 대미관계, 625전쟁과 냉전의 상관관계 등이 주로 연구되었다. 전반적으로 냉전적 대결의식 위에서, 주요 행위자를 미국으로 설정한 연구들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625전쟁을 설명하는데 있어 한국과 한국인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한편 미·소 자료의 공개로 개인·국가·국제체계 등 여러 층위에서 625전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이러한 흐름은 80년대 초반 커밍스를 시작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전쟁발발 직후부터 개전의 책임을 두고 공방이 오갔고, 정전협상 후 각 국가의 625전사는 이후 각국의 625전쟁에 대한 입장의 골조를 구성했다. 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자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625전쟁의 원인과 발발에 관한 연구는 이론과 가설의 조합인 측면이 강했다. 80년대 미국에서 625전쟁 관련 저작들이 급증했는데, 이들 대다수는 새로이 공개된 미국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각주:1] 9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와 중국의 자료가 빛을 보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625전쟁 연구의 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했다. 한국인 연구자가 급증했고, 외국학계와의 소통도 본격화됐으며, 세부 주제와 해석의 다양성 또한 예비 되었다.[각주:2]

 

 최근 625전쟁 연구 동향의 핵심 단어는 인간일 것이다. 전쟁 50주년과 60년을 맞이하며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었으나, 그것들 대부분은 여전히 국가의 정당성 문제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연구는 정치적·거시적·이념적 차원에서 사회인류학적·미시적·개인적 차원으로 관심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각주:3]

 

자료의 공개

 

 1970년대와 90년대 들어와 공개된 미국과 구소련 자료는 이후 625전쟁 연구의 질적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국외의 수준 높은 연구들이 유입·번역·유통되면서 국내의 625전쟁 연구는 국외의 연구 성과들을 소화하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료의 공개는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구소련과 중국 지도층의 입장·의도·생각을 보여주는 문서 대다수는 묶여있는 상태이고, 현재 공개된 자료들도 위생처리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몇 년 전 공개된 스탈린의 서한은 625전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각주:4] 만일 이 자료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625전쟁의 역사는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향후 러시아문서고의 자료들과 중국공산당 당안(檔案)[각주:5] 등이 추가적으로 공개될 때까지 연구자들은 인내하며 추가로 엄정한 사료 비판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죽음과 공포의 역사

 

 625전쟁은 약 250만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실종자, 피랍자를 낳은 한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이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거나, 자의와는 무관하게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전쟁 이후에도 그 공포는 개인과 사회의 내면에서 떠돌았을 것이다.

 

 향후 625전쟁 연구에서 시급한 것은 첫째, 전쟁 중 죽은 사람들의 규모와 각각의 死因을 규명해야 하고, 둘째, 전쟁 당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광범한 폭력의 메커니즘과 생산주체, 명령주체를 더욱 확실히 밝혀내야 하며, 셋째, 그러한 죽음의 경험과 공포가 사람들의 신체에 어떻게 새겨졌고, 이후 어떻게 해소·변화·강화 또는 권력에 의해 활용되었나를 분석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은 한국인에게 드리워진 국가폭력의 그림자를 규명하고, 이를 걷어내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사료와 사람들이 구술하는 기억과의 교차 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며, 사료로는 일기, 문학작품, 영화, 잡지, 신문, 공보처 등 정부기관 보고서, 구술 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엄연한 실체이지만, 사람들의 공포는 어떠한 실체로서 포착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625전쟁기와 이후 한국인들의 표현방식, 행동양식 등의 표출,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자기)억압·배제를 면밀히 봐야할 것이며, ···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반공 담론의 유포와 메커니즘 등을 추가로 살펴야 할 것이다. 625전쟁기 죽음과 공포의 역사는 국시였던 반공(반북)‘과 닿아 있고, 이는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심성으로 자리 잡았으며 일부가 여태껏 이어진다는 점에서 시급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전쟁으로 형성된 공포의 역사는 625전쟁만의 특질은 아니므로, 625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의 한국·아시아·세계의 전쟁을 살피고, 각각의 전쟁이 남긴 공포의 심리적·사회적 효과와 625전쟁의 그것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1. Rosemary Foot, "Making Known the Unknown War: Policy Analysis of the Korean Conflict since the Early 1980s," Michael J. Hogan ed., America in the World: The Historiograph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since 194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271~272쪽. [본문으로]
  2. 이완범, 「한국 국내의 625 연구 동향」, 『군사』 5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44쪽. [본문으로]
  3. 박명림은 이러한 연구 경향을 ‘인간 문제의 등장’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나남, 2011, 291쪽. [본문으로]
  4.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스탈린의 서한. 스탈린은 서한에서, 소련의 UN 안보리 불참과 복귀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2225 [본문으로]
  5. 중국기록학용어로 국가 기구, 사회 조직 및 개인이 정치·군사·경제·과학·기술·문화·종교 등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직접 생산한 기록 중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자·도표·음향·영상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역사 기록을 말한다. 또한 당안은 1949년을 기점으로, 이전에 생산된 것에는 ‘역사당안’, 나중에 생산된 것에 ‘현행당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네이버지식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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