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국내의 한 공과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대학의 이학계 박사과정 입학을 받아 놓고, 군대에서 2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전역하자마자 도미하신 한 선생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국내에서 석사를 하지 않은 것이 굉장히 현명한 일이라고 말씀 드렸고, 그는 나에게 학부 시절/군복무 시절 겪었던 온갖 부조리와 구역질 나는 일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인류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 및 메사추세츠공과대학 박사과정(주로 이공학 계통)에 재학 중이신 한국인 선생님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결론은, 연구자가 조금이라도 더 역량을 펼치기 위해서는 신속히 탈주변부 해야한다는 것. 이곳 쌀국에는 (갑질도 없진 않지만) 풍성한 재정적 지원, 탄탄한 연구 기반, 훌륭한 연구자들의 연계망, 자유주의적 신제국주의의 환대가 넘쳐난다. 


다만 이러한 탈주변부의 노래는 나처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들보다는 자녀를 위해 큰 돈을 아낌 없이 쓸 수 있는 전문직/관리직/중산층 이상의 계급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는 글로벌 봉건제인 오늘날의 세계에서 부동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주변부의 가난한 청년들을 도우려는 (나같은 사람의) 의도는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매도를 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해답은 뭘까? 해답은 없다. 미국/유럽(중심부)에서의 혁명을 바라느니, 광주 상무가 레알 마드리드를 7:0으로 이기는 걸 바라는 게 더 현실적이다. 다만 새로운 계층으로 거듭난 예의 선생님들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이를 중심부의 관리자/정책결정자들에게 보급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그런 게 가능할까?)를 창출하게 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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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누구인가?

about 2016.07.24 09:06


라라랜드의 조선남입니다. 조선말, 영어, 일어, 노어, 중어 등을 구사하며 미국, 러시아, 영국,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표와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연구 관심사는 사회주의역사입니다. 자본주의에는 답이 없지만, 사회주의에는 더 답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러분의 가르침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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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7일

생각 2015.11.16 07:03

- 석사학위청구논문이 두 차례 심사를 거쳐 통과하였다. 이로써 장장 3년 6학기에 걸친 내 대학원 생활도 마무리로 접어들었다.

- 긴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잘 준비해서 잘 하자.

- 우선 내일부터는 돈줄을 찾아보려고 한다. 풀브라이트가 됐든, 헤리티지파운데이션이 됐든, 아니면 어디가 됐든 찾아보겠다. 

- 내년 이맘때가 되더라도 지원이 끝나지 않으니, 내게는 아직 1년이 넘는 긴 시간이 남아 있다.

- 외국어, 오로지 외국어에 힘을 기울일 수만은 없겠으나, 이를 잘 하자. 한국어,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는 기본이다. 2016년은 뒤의 세 개를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 동시에 연구사 정리에 힘을 기울이자.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아시아의 반제반봉건혁명이 어떻게 '서방'과 부딪혔는지를, 그 속에서 조선혁명가들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위해 싸웠으며, 무엇 때문에 서로를 배반했는지에 주목하고 싶다. 사회주의권의 연대와 상호작용도, 남한의 경제성장사도 언젠가는 다뤄보고 싶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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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ink to the original text is here.

또 다른 링크: http://www.redian.org/archive/80140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43, No. 1, November 3, 2014.

 

홍콩의 세 가지 지역의식[각주:1]

 

훙호펑(孔誥烽, 존스홉킨스대학)

 

첸관중(陳冠中), 중국의 천하주의와 홍콩(中國天朝主義與香港), 홍콩: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2012.

첸윈(陳雲), 도시국가 홍콩에 대하여(香港城邦論), 홍콩: 인리치(Enrich) 출판사, 2011.

챵시공(强世功), 중국의 홍콩: 문화와 정치의 관점(中國香港文化與政治的視野), 홍콩: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2008.

 

최근 홍콩은 혼란스러웠다. 2003년 시위에는 50여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여 23조 반()전복 활동법의 입법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각주:2] 2012년에는 13만 명이 시위를 벌임과 동시에 학생들이 총파업으로 위협함으로써 베이징은 홍콩의 학교에 대한 국가교육과정 시행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시위는베이징이 중국 본토(이하 본토’)에서 되풀이하듯 홍콩의 이의제기를 손쉽게 엄단(嚴斷)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저항의 승리는 홍콩의 반대세력과 베이징이 근본문제에 관해 기꺼이 타협하도록 만들었다기보다, 오히려 양측을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2012년 중국정부는 전통적으로 베이징에 협력하는 일부 홍콩 토호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경파인 렁춘잉(梁振英, 1954~)을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홍콩의 상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중국정부가 이를 다루기 위해 더욱 가혹한 수단을 쓸 준비를 마쳤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연례적인 71[홍콩 반환일-역자 주] 시위와 201211일 시위에서 영국 깃발 또는 영국령 홍콩 깃발이 등장했고 이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깃발에는 본토의 관광객들을 공격하는 표어가 실렸고, 때로는 중국인 식민주의자들이라는 문구도 있었다.

 

베이징과 친()정부 성향의 관측자 대다수는 강한 지역적 정체성, 심지어는 친독립적 성향이 대두했다고 느꼈다. 베이징의 통치를 분명히 거부하는 정치적 선언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의자와 반중(反中) 청년들 또한 직접적이고 전투적인 행동을 주도하였다. 일례로, 지역의 일상용품과 그 중에서도 유아용 유동식(流動食)의 공급을 지켜내기 위해 본토 관광객의 밀반출을 방해하는 시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의 저명한 논문인 “18세기 영국 군중의 도덕경제에 나타난 근대초기 유럽의 식량 폭동을 떠올리게 한다.[각주:3] 지역주의적 시위는 또한 홍콩정부를 압박하여 공공병원체계에 부담을 주는 본토발() 출산 여행을 제한하게 하였다.

 

최근의 여론 조사 결과는 홍콩 거주민,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급증한 반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음을 보여주었다.[각주:4] 홍콩 지역의식 급격한 분출은 베이징을 거슬리게 하지만은 않았다. 이러한 지역의식은 또한 1980년대 이래 홍콩을 중국식 자유화와 민주화의 화신(化身)으로 보는 담론, 즉 홍콩의 반대운동을 역사적으로 지배했던 중국식 민족주의담론에서도 벗어나는 중이다.

 

챵시공(强世功첸관중(陳冠中첸윈(陳雲)은 최근 저서에서 각각 베이징, 중국의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 홍콩의 지역 젊은이의 관점에 입각하여 홍콩의 지역의식 문제를 살폈다. 챵시공의 책은 제국의 중심부인 베이징이 중국인 엘리트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의 핵심으로서의 홍콩에 대하여 점차 발언을 늘려가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첸관중과 첸윈의 책은 챵시공의 명제에 명백히 이의를 제기하며 홍콩에 대한 베이징의 신제국주의적 자세를 강하게 반박하였다. 첸관중의 작품이 본토의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견지에서 쓰였다면, 첸윈의 대답은 홍콩 자체의 관점을 천착하며 밀물처럼 거세지는 홍콩의 지역주의적 이념과 행동을 반영하였다.

 

제국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1990년대 미국의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중국의 신좌파는 최근 수년간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사상,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및 나찌의 법 이론가 칼 슈미트(Carl Schmitt), 유교 등 서로 명백히 상충되는 지적 계보의 결합을 옹호하는 기이한 지적 대형(隊形)을 갖추게 됐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지식인 연합체가 점점 더 억압적으로 바뀌어가는 당국(黨國)체제와 공모하거나 공공연히 협력했다고 비판하였다.[각주:5]

 

챵시공은 바로 이 연합체에 속한 지식인 중 하나이다. 그는 신()마오주의자로,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맹렬히 비판함과 동시에 문혁 기간 수행된 ()민주주의의 실험을 그르게 비난하고, 민주주의에 관한 중국 고유의 담론을 박탈하며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홍보하는 서구 앞에서 벙어리가 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조바심을 쳤다. (챵시공, 2008: 187~8) 동시에 그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실천 및 주권의 절대적 결정이며, 그것들은 또한 법리적 권위와 입법적 권위에 앞선다고 본 칼 슈미트의 법철학을 소개한 핵심 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챵시공은 2004~2007년의 기간 동안 홍콩 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사실상의 본부인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판공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홍콩에서의 근무 중일 때와 그 이후에도 홍콩 문제 및 부흥하는 유교제국 중국에 대하여 홍콩이 가지는 중요성에 관해 논한 일련의 글을 베이징의 월간 잡지 독서(讀書)에 냈다. 앞서의 책 중국의 홍콩: 문화와 정치의 관점은 그의 글들을 모아 펴낸 것이다. 그의 견해는 신좌파 가운데서 그렇게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북경대 법학대학 부학장(Associate Dean)이면서 동시에 주홍콩연락판공실에서의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의 중심부인 당과 긴밀한 관련 속에서 홍콩 문제에 관해 세간의 이목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챵시공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정책이 1997년 홍콩의 반환을 가능케 한 뛰어난 방식이었으나, 막상 이 정책은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 문제 중 가장 중요한 사안, 즉 홍콩 사람의 정체성 문제를 다룰 순 없다고 주장하였다. 챵시공은 홍콩 사람의 정체성 문제에 관해서는 법리적 수단보다는 정치적 수단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며, 베이징은 홍콩 거주민을 진정한 중국의 애국자로 변모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일국양제라는 틀 너머를 사고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렇지 않는 한,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은 공식적일뿐 결코 실질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챵시공은 홍콩 사람 대다수가 1950년대 이래 사회주의 모국을 받아들였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심지어는 영국에 협력한 홍콩계 중국인들마저 본질적으로는 애국적이었는데, 이는 몇 세대 뒤로 거슬러 올라가는 본토와의 가족적 유대 때문이다. (챵시공, 2008: 142~45) 그렇다면 중요한 과업은 바로 홍콩계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애국주의를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식민통치 기간 영국인들이 기민히 움직여 홍콩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얻게됐는데, 챵시공은 베이징은 이러한 영국의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챵시공이 마음과 정신을 얻다세뇌영심(洗腦迎心)”, 즉 문면 그대로 뇌를 씻고 마음을 얻는다로 옮기면서 영어 원문의 본뜻을 탈각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챵시공, 2008: 31) 챵시공의 명제는 모든 홍콩계 중국인들이 본질적으로 즉자적 애국자이면서 베이징의 애국적 전위대를 통하여 대자적 애국자로 변모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주장에 버금간다. 이 명제는 홍콩에서 베이징의 이념 공작이 지역적 정체성을 극복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제안한다. 돌이켜보면, 챵시공의 진단은 그의 홍콩 부임 이후 나온 베이징의 2012년 안건, 즉 홍콩의 모든 학교에 강제적인 국가교육과정을 도입하려는 시도와 잘 맞아 떨어진다.

 

챵시공은 일국양제방식은 그 기원이 1951년 티베트를 두고 베이징과 달라이 라마 정부 사이에 체결된 십칠조협의(十七條協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홍콩의 반환을 예측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제국 중국의 부흥의 전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챵시공, 2008: 123~58)[각주:6] 챵시공에 따르면, 중화제국은 청조(淸朝, 1644~1911) 때 절정에 도달했고, 유교문명의 진원지이자 주변부를 끊임없이 핵심부로 통합하고 변모시키는데 기반을 두었다. 청 황제는 새로이 통합한 지역의 엘리트에게 독특한 관습과 지도권을 보장하고 지역적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물론 그것은 영구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제국의 중심부로 통합되고 문화적으로 동화되면서 지역적 자율성을 폐기할 터였다. 그 후 제국은 새로운 지역의 합병에 나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의 홍콩 통합과 함께 장래에 있을 홍콩의 동화와 종국에 가서 타이완의 통합 및 동화는 과거 중화제국의 팽창주의와 비슷한 21세기의 팽창주의적 감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챵시공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정책은 단지 전술적이고 과도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홍콩을 기다리는 것은 1959년 이래 티베트가 처했던 운명, 즉 베이징이 주도하는 무력에 의한 흡수와 직접적이고 엄격한 통제라는 것이다.

 

챵시공은 책 전반에 걸쳐 제국이라는 용어에 긍정적인 함축을 담아 쓰길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되살아난 중화제국은 영국제국의 통치술에서 배워야 한다고 규정하기까지 하였다. 챵시공이 홍콩을 논하면서 마오쩌둥사상, 유사 파시즘, 제국주의를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은 결코 이례적이지 않다. 이는 오히려 홍콩에 대하여 발언을 늘려가는 중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첸관중의 중국의 천하주의와 홍콩은 홍콩을 바라보는 챵시공의 견해에 대한 명백한 응답이다. 이 책에서 첸관중은 홍콩의 역사 및 홍콩·중국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책의 반절을 할애하여 챵시공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첸관중은 챵시공의 견해가 수년간 중국인 관료들 사이에서 오갔으나 결코 공개적으로 정식화되지는 않았다고 올바르게 관측하였다. 그는 그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챵시공의 시도를 환영했는데, 이는 중국의 대()홍콩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따져 물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첸관중은 홍콩 베이비 붐(baby boomer) 세대의 상징적인 문화비평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상하이 출생으로 홍콩에서 교육받았으며, 1976년에는 홍콩의 문화적 사안을 다루는 전위적인 잡지 호외(好外)를 창간하였다. 그는 10년 전에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중국 내의 자유주의나 정치개혁에 관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홍콩의 주류 온건 민주주의자들의 노선과 견해를 같이 하고, 베이징이 설정한 한계 내에서 점진적인 민주적 개혁을 옹호한다. 챵시공에 대한 첸관중의 비판은 홍콩의 관점과 중국 자유주의의 관점을 고루 반영한다. 그는 챵시공이 문혁을 대민주주의의 사례로 끌어안고, 슈미트적인 정치관을 견지하며, 중화제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충격적이라고 파악하는데, 이는 챵시공을 비롯하여 신좌파, 또는 첸관중의 용어를 빌려 우파 마오주의자들가운데 챵시공의 지적 동반자들이 파시스트적인 경향을 몸소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관중, 2012: 118~22) 첸관중은 챵시공이 홍콩의 역사를 오독하고 왜곡하는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는 1950~60년대 홍콩계 중국인들이 중국을 따스한 마음으로 맞았다는 챵시공의 묘사를 순전한 날조라고 파악하였다. 사실 전후(戰後) 홍콩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 본토의 중국인 이민자들은 공산주의 통치를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 홍콩 사람들은 대약진운동의 기근과 문혁 기간 동안 동포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했고, 따라서 그들은 결코 자연스레 중국을 애호할 수 없었다. (첸관중, 2012: 7~10; 58~61)

 

첸관중은 홍콩이 중국의 문화·정치적 발전에 대하여 단지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참여자라고 지적하였다. 첸관중은 챵시공을 비판함과 동시에,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뤄진 중국의 자유주의적이고 입헌적인 개혁에 대한 홍콩의 기여를 개괄하였다. 19세기말 홍콩의 영향력 있는 신문 순환일보(循環日報, Universal Circulating Herald)를 창간한 지식인 왕타오(王韜, 1828~1897)는 홍콩과 본토의 문인들에게 개혁주의적인 생각을 고취시켰고,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가 이끈 19세기말의 입헌군주제적 개혁운동을 직접적으로 도왔다. 한편 캉유웨이는 일찍이 홍콩을 여행했는데, 그는 그곳의 영국 식민당국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통치체라고 본 바 있다. 1898년 개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홍콩은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피난처가 되었다.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孫文, 1866~1925) 박사의 부친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혁명가들이 홍콩에서 교육받았고, 유럽의 혁명적인 이론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첸관중, 2012: 14~21)

 

바로 다음 세대의 중공 지도부는 홍콩을 본토로부터 분리했을 때의 효용을 인지하였다. 중공은 일찍이 1946년부터 홍콩을 돌려받지 않는다는 정책을 채택했고, 미래의 사회주의 중국에게 홍콩이 세계로의 창구 및 영국과의 외교 수단으로써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첸관중, 2012: 42~46) 중공은 심지어 마오 시기 동안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 식량과 식수를 조달하는 등 홍콩의 안정과 생존을 유지하는데 조력하였다. 첸관중은 그러한 정책을 통해 영국이 중국으로 기울 것이고, 따라서 냉전 기간 중국을 포위하고 있던 영·미 동맹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마오의 주장을 언급하였다. 홍콩은 또한 중국정부가 외화(外貨)와 세계의 정보를 흡수하는 통로로써 기능하였다. 중공에 대한 홍콩 사람의 혐오감을 제외하더라도, 쟝시공은 마오 시대의 중국에 홍콩이 매우 중요했다는 냉혹한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인식하길 거부한 셈이었다. (첸관중, 2012: 42~61)

 

덩샤오핑이 홍콩 문제를 풀기 위해 일국양제모형을 택한 것은 주권 이양 문제를 뛰어넘어 중국의 발전이라는 틀 안에서 홍콩의 특수한 역할을 연장하려는 시도였다.

 

첸관중은 그러한 방식이 의도치 않게 중국의 정치적 개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홍콩반환협정(中英聯合聲明)과 기본법(香港基本法)에 쓰여 있는 일국양제방식은 중국 영토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진정한 입헌주의 및 법치의 사례였다. 따라서 홍콩의 실험이 내포하고 있는 입헌주의적인 속뜻은 지켜져야 하며, “일국양제방식의 입헌주의적인 성격을 실용적이며 임시적이라고 폄하하는 챵시공의 신제국주의적인 이론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첸관중에 따르면, 홍콩의 자율성을 지키는 일은 중국 내의 자유주의자와 보수적 국가주의자 사이의 거대한 싸움에서 하나의 전장(戰場)이나 다름없다.

 

첸관중은 1997년 이후 중국에 대한 홍콩의 경제적 가치에 관해서 이 도시가 중국 내 다른 도시들에 비하여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베이징의 주류적인 설명에 동조하였다. 첸관중은 홍콩이 중국 내 다른 지역과의 통합을 심화해야 하고, 경제적 소외를 피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5개년계획에 포함돼야 한다는 관변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첸관중, 2012: 70~77) 첸관중은 중앙정부가 심지어 본토의 후진적인 도시와 성()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쉽게 폐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홍콩이 예전과 같은 경제적 특수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은 여전히 일국양제모형을 가볍게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홍콩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홍콩의 주권에 대한 베이징의 철의 결단(決斷)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홍콩 사람들은 베이징이 설정한 제한된 공간을 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첸관중, 2012: 70~82)

 

국가주의자들의 맹공에 맞서 입헌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받아들여 지키는 식으로 일국양제모형을 방어하는 첸관중의 논변에 중국 내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상당히 공명(共鳴)할 법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 일부는 명백한 모순이고, 현실이라는 시험 앞에서 유효하지 않다. 첸관중은 일국양제를 새로운 중화제국이 확장됐을 때 즉각 폐기될 우발계획 정도라고 폄하하는 챵시공의 입장이 베이징에서 세를 얻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지난 몇 년간 홍콩의 선거·매체·학계에 베이징이 직접적으로 간여한 결과, 베이징이 애초에 홍콩에 설정했던 자율성의 경계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홍콩 사람들은 중국의 영향 하에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공간에 얌전히 머무른 채로 계속 그들의 자율성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 공간은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경계가 첸관중이 경고하듯 철갑(鐵甲)처럼 두텁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홍콩 사람들은 분명히 기본법이라는 틀에 반항하고 있지만, 베이징은 아직 홍콩에 대한 명시적 억압을 꺼려하고 있다. 일례로, 홍콩이 기본법 하의 헌법상 시행해야만 했던 23조 반전복 활동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2003년의 군중시위 이후 베이징은 홍콩정부가 23조의 입법을 무기한으로 보류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한 저항은 베이징이 설정한 엄격한 경계를 위반하였는가? 그렇다면 첸관중은 그가 경고한 베이징의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가 그러한 위반을 용인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의 책에는 23조 반전복 활동법에 관한 논의뿐만 아니라 1989년 중국의 민주화운동에 홍콩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빠져있다. 또 다른 사례로, 2012년 베이징의 국가교육과정 시행에 대하여 첸관중의 책이 출간된 직후 발생한 성공적인 대중저항을 들 수 있겠다. 홍콩에서의 시위가 견인력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주류 민주주의자들은 홍콩 사람들에게 국가교육과정을 반대하지 말고 차라리 이를 받아들인 후 개선하는데 집중하라는 식으로 첸관중의 감상만을 되풀이하였다.

 

베이징이 계속 23조의 입법의 무기한 유예를 용인하는 사실은 홍콩이 보통의 중국 도시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는 첸관중의 주장과는 달리, 중공의 통치 하에서 홍콩의 자율성 및 일국양제가 여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상 중국이 인민폐(人民幣, )의 국제화를 통해 미국 달러에의 의존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홍콩의 독특한 역할은 중국의 금융 분야도 인정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이 달러를 국제화하고 지배적인 화폐로 만들기 위해 런던의 유로달러(Eurodollar)를 필요로 한 것처럼, 중국은 점차 강해지고는 있지만 아직 태환성(兌換性)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인민폐를 국제화하기 위해서 역외시장을 필요로 할 터이다. 은퇴한 금융관료와 중국의 주요기업 및 국제적인 금융회사의 분석가들로 구성된 중국의 두뇌집단인 금융사십인논단(金融四十人論壇, China Finance 40 Forum)은 최근 발행한 보고서에서, 홍콩은 법치, 정보의 자유, 중국으로부터의 입헌적 분리 등이 보장될 때만이 대규모 역외 인민폐 시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각주:7]

 

실증적인 증거들은 홍콩이 보통의 중국 도시로 바뀌었고, 상하이나 다른 도시들에 밀린다는 얘기가 대부분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담론은 정치적 동기가 개입된 수사이거나, 또는 베이징이 국영기업과 인민폐의 국제화를 촉진시키는 역외시장의 중심으로서 홍콩을 이용하려는 필요에 지나지 않는다.[각주:8] 쟝시공의 제국주의담론에 대한 첸관중의 비평은 탁월하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권 행사에 맞서서 홍콩 사람들에게 그가 제안한 저항의 방식은 쟝시공의 수사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홍콩 사람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첸관중의 책이 중국의 입헌주의적인 개혁에 관해 홍콩의 자율성이 갖는 효용을 강조하는 동시에 쟝시공의 담론을 비판했다면, 첸윈의 도시국가 홍콩에 대하여는 홍콩이 홍콩 사람에게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쟝시공에게 대답하였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열띤 공개토론을 촉발시켰고, 광범한 인기를 누렸다. 이 책은 라디오텔레비전홍콩(香港電台網站)이 주최한 홍콩 서적박람회에서 2011년 올해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됐고, 같은 해 말 출간된 이래 모든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재됐다. 저자 첸윈(본명은 첸윈근陳雲根)은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민족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97~2007년 동안 홍콩특별행정구정부의 문화·예술·민사 관련 선임 고문을 맡았으며, 도시재개발 열풍이 불러온 지역공동체와 역사적 건축물의 파괴에 저항하는 선도적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첸윈이라는 필명을 쓰는 그는 여러 편의 신문 기고를 통해 홍콩과 중국의 부동산 토호 및 베이징의 홍콩 개입에 전투적으로 저항하는 젊은 급진주의자들을 열성적으로 지지하였다.

 

첸윈의 견해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홍콩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보다 더욱 중국이 홍콩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이러한 사실이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사실이라는 점이다. 식민지기에는 필수적인 식량 때문에, 탈식민기에는 자본과 고객 때문에 홍콩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했다는 식의 이해는 베이징의 홍콩 사람들의 자신감을 파괴하고자 선전으로 보인다. 식민지 홍콩은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봉쇄 속에서 중국이 외화를 흡수하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였다. 홍콩이 식수를 공급받는 대가로 중국에 지불한 금액은 싱가포르가 자국의 식수 공급을 책임지는 기술이기도 한 담수화(淡水化)의 비용보다 훨씬 더 비쌌다. 시장경제로의 이행기와 경제의 국제화 기간을 통틀어 중국이 홍콩의 투자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현재, 중국에 대한 외국의 모든 직접투자유입 중에 홍콩의 투자비율은 놀랍게도 64%나 된다. (첸윈, 2011: 112~127; 135~140)

 

1997년 이전까지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홍콩정부는 지역의 영국인·중국인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결탁하여 런던의 영향에서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고, 사실상 도시국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각주:9] 첸윈은 1997~2003년의 기간 동안 베이징이 홍콩의 도시국가적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과도한 간섭을 참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은 23조의 입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홍콩전략을 급격히 바꾸었다. 아직까지 베이징은 전면적인 단속을 실시할 순 없으나, 경제회복 및 홍콩과 중국의 사회경제적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국가로서의 홍콩의 경계를 침식하기 시작하였다. (첸윈, 2011: 112~127; 145~63)

 

이 계획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바로 본토발 홍콩 관광객을 대규모로 허용하는 것이다. 홍콩을 찾은 본토 관광객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는데, 2012년 현재 홍콩을 찾는 연간 본토 관광객의 숫자는 35백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약 7백만 명에 달하는 전체 홍콩 인구의 다섯 배에 이르는 규모이다. 홍콩정부는 중국정부가 발행한 홍콩 여행증을 소지한 본토 관광객을 거부하거나 규제할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본토 관광객이 급작스럽게 증가하자 홍콩 거주민과 본토인 사이의 갈등과 긴장도 증가하였다. 홍콩의 사치품점이나 일상용품점이 모두, 본토에서는 살 수 없거나 또는 홍콩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구입(수입관세 때문에)해야 하는 물품들에 대하여 더욱 많은 돈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본토 관광객 소비자를 우선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8년 본토에서 오염된 우유와 관련된 추문(醜聞)이 돈 후에, 중국으로의 조제유(調製乳) 밀반출은 본토 방문객 대다수의 부업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홍콩의 몇몇 구역에서는 식료품과 의약품이 동나기도 하였다. 홍콩 사람과 본토인을 구분하는 사회적 관습의 차이(군데군데 일어나지만 이미 잘 알려진 새치기라든가 공공장소에서 용변 보기 등)는 논쟁의 주제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지역의 중공 산하 단체들 또한 본토의 이주민들 - 이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일일 150명 수준으로 편도 사증(査證)”을 편무적으로 발급 받으며(공식적으로는 가족의 재회라는 목적으로), 홍콩정부의 사전 심사를 거치지 않는다 - 을 충성스러운 유권자 집단으로 조직하는 노력을 확대하였다. 1997~2012년 사이에 홍콩으로 이주한 새로운 본토 출신 이민자들은 전체 홍콩 인구의 약 10%를 구성하였다. 친정부 성향 문회보(文滙報)의 편집자였던 언론인 청샹(程翔, 1949~)은 중공이 그러한 이주 기획을 통해 홍콩사회의 각계각층에 요원을 보냈으며, 남아있는 이주 한도는 종종 부패한 본토 관료들에게 판매된다고 쓴 바 있다.[각주:10] 홍콩 야권의 오랜 지도자 마틴 리(李柱銘, 1938~)는 그러한 이주 정책이 홍콩에서 자랐고, 홍콩의 핵심가치를 체화한 홍콩의 원주민을 소수로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홍콩을 티베트화 할 것이라고 보았다.[각주:11] 2005~2012년의 기간 동안 홍콩의 행정장관을 역임한 도널드 창(曾蔭權, 1944~)과 그의 두뇌집단은 홍콩이 인구의 수혈을 필요로 하며, 지역민을 본토의 이주민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제안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중공(홍콩 내에 법적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표를 매수하고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선거 전략을 통해 우호적인 후보에 대하여 새로운 이주민들의 표를 꽤나 성공적으로 확보했다는 사실 또한 널리 보도된 바 있다.

 

첸윈은 본토의 관광객 및 이주민들의 대거 유입이 홍콩에 있는 기존의 제도나 사회적 관습에 심대한 위협을 제기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홍콩정부가 다른 모든 국가 출신 이민자에게 하듯이, 그리고 세계의 모든 정부가 그렇게 하듯이 본토발 이주민을 심사할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본토의 관광객 숫자가 반드시 축소돼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낙심천만하게도 홍콩의 반대운동은 이러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본토의 관광객이나 본토발 이주민을 심사할 수 없는 홍콩의 권한부족에 대한 불만을 외국인 공포증이라고 낙인찍었다. 심사권한이 없는 홍콩의 상황은 본토 출신 정착민들로 구성된 식민지와 흡사한데도 말이다. (첸윈, 2011: 150-63)

 

친웬은 홍콩의 반대파가 홍콩과 중국 간의 경계 수호를 불편해하는 이유로 그들의 중국식 민족주의이념을 꼽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홍콩의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중국을 꿈꿨다. 그들에게 홍콩의 민주화운동은 중국 내의 민주화운동에 부수적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콩의 반대파는 홍콩을 식민화하려는 베이징의 기획을 의도치 않게 지지하게 된다. (첸윈, 2011: 175-79; 51-54) 첸윈은 그의 책에서,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홍콩보다 중국을 우선시하는 풍조에 대한 답으로 아주 논쟁적인 의견, 즉 중국 내의 민주화는 절망적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민주화는 오로지 파시즘을 초래할 것이며 홍콩을 해친다는 것이다. (첸윈, 2011: 36-56)

 

중국의 민주화를 바라보는 친웬의 음울한 시각은, 60년에 걸친 공산통치와 지난 30년 동안 지속된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적 호황 이후 과거 중국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며 인민들 사이에서는 신뢰를 북돋아준 크고 작은 전통들이 전멸했다는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국가가 무너진 후 남을 원자화(原子化)된 사회는, 적어도 그러한 붕괴 직후의 여파 속에서 건전한 민주적 제도를 함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풍경은 노골적인 파시스트 정치가 흥기할 수 있는 온상일 터이다. 따라서 친웬은 주류 민주주의자들이 개진하는 중국 우선중국과 홍콩의 통합대신에 홍콩 우선홍콩과 중국의 분리를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홍콩을 겨냥한 중국의 신제국주의적인 접근에 맞서는 일과 홍콩의 반대운동을 중국의 민주화라는 더 큰 투쟁에 복속시키려는 중국 자유주의자들을 거부하는 일은 홍콩이 진정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조건인 유사 도시국가로서의 자율성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데 똑같이 중요하다.

 

홍콩에 관한 세 권의 책과 세 가지 미래

 

사상의 전쟁은 언제나 지상의 정치 투쟁과 함께 간다. 쟝시공, 첸관중, 첸윈의 시각은 각각 (1) 한시라도 빨리 홍콩을 동화시키고 그곳에 본토와 같은 권력행사 기제를 심으려는 베이징, (2) 홍콩 사람의 투쟁보다는 중국의 불투명한 민주적 개혁에서 그들의 희망을 거는 홍콩의 주류 민주주의자, (3) 베이징을 거부하고 홍콩 민주주의를 촉진시킬 준비가 된, 지역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신생 운동을 대표한다.

 

홍콩에 대한 베이징의 공세적 압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편, 주류 민주주의자 및 그들의 사회적 기반인 나이 들고 재산도 넉넉한 중산계급은 직선제로 선출된 입법회(立法會)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주류 매체의 지원을 누리면서도 여느 때보다 소심해져있다. 청년 중심의 지역주의적 운동은 여전히 분열상을 보이고 주변화 돼있지만, 1997년 이후 등장한 젊은 세대 가운데서 인기가 높다. 또한 그들은 주류 민주주의자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국가교육과정의 시행을 막거나 조제유 밀반출과 출산 관광을 단속하게끔 정부를 압박하는 등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둔바 있다.

 

2014년 홍콩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홍콩의 미래는 전적으로 앞서 언급한 세 세력 간의 상호작용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한편 세 책의 인기를 비교했을 때, 지역주의적 시각이 세를 얻고 있음은 확실하다. 중국 자유주의자들이 좌절에 좌절을 겪고 있고, 어떠한 주류 정치세력도 여론조사를 통해 꾸준히 드러나는 홍콩의 지역적 정체성을 이해하거나 결집시키려고 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앞서의 관찰은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그러한 홍콩 지역주의의 흐름이 계속 증가하여 대만 민족주의의 수준에 도달하고, 더욱 전투적인 반대운동의 밑거름이 될지는 장차 두고 볼 일이다. 

 

훙호펑은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사회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로 동아시아에 초점을 맞춰 지구정치경제, 저항운동, 국민국가의 형성, 사회이론 등을 공부한다. 그는 중국적 특징을 가진 저항: 청(淸) 중기의 시위, 폭동, 탄원(Protest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Demonstrations, Riots, and Petitions in the Mid-Qing Dynasty)의 저자이며, 중국과 지구적 자본주의의 변환(China and the Transformation of Global Capitalism)의 편집자이다.

 

이 글을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이 출처를 밝혀줄 것을 권고함. Ho-fung Hung, "Three Views of Consciousness in Hong Kong",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43, No. 1, November 3, 2014.

 

  1. 이 글은 9월말 터진 우산혁명(雨傘革命)의 전야에 『비평』(Critique) 807-808호, 2014년 8-9월자에 “Trois visions de la conscience autochtone à Hong Ko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불문(佛文)을 손 본 것이다. [본문으로]
  2. 홍콩정부가 제안한 법은 다음과 같다. “홍콩특별행정구정부는 중앙인민정부(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대한 반역, 분리 독립, 선동, 전복 등의 활동, 또는 국가비밀의 사취(詐取)를 막고, 해당 지역에서 외국의 정치기관이나 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하며, 정치기관 또는 단체가 외국의 정치기관 또는 단체와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방지하는 법을 제정한다.” 그러나 이 법안은 보류됐다. [본문으로]
  3.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 50(1), 1971, 71~136쪽. [본문으로]
  4. 주민에 대한 민족적 정체성 조사, 여론 프로그램, 홍콩대학. [본문으로]
  5. Lilla, Mark, 「베이징에서 스트라우스 읽기」(Reading Strauss in Beijing), 『새로운 공화국』(The New Public), 2010년 12월 10일자; 마준(馬駿), 슈지안쟝(徐劍剛), 『인민폐의 국제화를 위한 방안: 역외시장 발전과 자본 개방』(人民幣走出國門之路: 離岸市場發展和資本項目開放), 홍콩: 커머셜(Commercial) 출판사, 2012. [본문으로]
  6. 1951년 협정의 전문은 중국어, 티베트어, 영어로 이용 가능하다. [본문으로]
  7. 마준(馬駿), 슈지안쟝(徐劍剛), 앞의 글, 2012. [본문으로]
  8. 일례로, 「왜 홍콩은 여전히 중국경제에 필수적인가」(Why Hong Kong remains vital to China's economy),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2014년 9월 30일자를 보라. [본문으로]
  9. Yep, Ray, 「대중화권에서 자율성 협상하기: 1997년 전후의 홍콩 및 주권」(Negotiating Autonomy in Greater China: Hong Kong and its Sovereign Before and After 1997), 코펜하겐, 덴마크: 니아스(Nias) 출판사, 2013. [본문으로]
  10. 청샹(程翔), 「18회 당대회를 통해 본 홍콩 내 중공 지하단체의 규모」(從十八大看香港地下黨規模), 『명보』(明報), 2012년 11월 7일자. [본문으로]
  11. Lee, Martin, 「홍콩의 티베트화」(香港西藏化), 『넥스트』(Next Magazine), 2012년 9월 29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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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Neil Davidson, 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Chicago: Haymarket Books, 2012의 A Note On the Reproductions(출간에 부쳐)를 번역한 것이다.

 

 

   

          

           Liberty Guiding the People               What Courage!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대단한 용기!>

 

 

그림에 대한 주석

 

부르주아 혁명을 생각할 때 어떤 인상이 먼저 떠오르는가? 우리는 대개 프랑스와 반란의 와중에 있는 인민, 아마도 바스티유를 기습하거나, 또는 파리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인민을 떠올린다. 후자의 인상을 그 어느 것보다 효과적으로 포착한 그림은 앞표지에 자세히 드러나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31)이다. 에릭 홉스봄(Eric Habsbawm)은 이 작품이 구현한 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과 혁명적임에 대한 낭만적인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 모자를 쓰고 수염 난 음울한 젊은이들, 셔츠바람의 노동자들, 솜브레로 닮은 모자 아래로 늘어뜨린 머리의 호민관들이, 삼색기들과 프리기아 모자에 둘러싸인 채, 대륙의 모든 도시에 바리케이드를 쌓으며, 1789년의 온건했던 혁명이 아닌, 혁명력 2년의 영광을 재창조한다.” 그림의 원제는 <728: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었고, 이는 1830년의 프랑스 혁명 도중 728일에 일어난 실제 사건, 즉 아르콜 다리에서 스위스 근위대를 무찌르려는 반란군의 마지막 시도를 나타낸다. 이 그림은 신화적이다. 자유의 여신은 그녀가 바리케이드 너머로 이끄는 민중의 여인이자, 용기, 대담함, 지도력 같은 관념적인 혁명적 덕성의 전형으로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1792년 이래 대혁명과 공화국, 그리고 프랑스 그 자체의 상징인 마리안의 재현이다. 자유의 여신이 반-신화적인 여신 외에 다른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성이 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확실히 바리케이드에는 다른 어떤 여성이 묘사돼있지 않다. 들라크루아가 자세히 그리고 있는 4명의 남성 중 오직 한 명만이 부르주아인데, 그의 모자, 조끼, 삼각건, 그리고 화승총을 휘두르는 평민들에 비추어 알아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사태의 진행 과정이 정확히 노동계급투쟁의 형성단계들과 겹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부르주아 혁명의 영웅적인 구상을 봉안(奉安)했다. 그들이 쌓은 바리케이드에 넘치던 이 혁명적 대중들은 부르주아 질서의 경계 또한 넘고 있었는가? 결국 인민은 1830년대의 목격자일 사람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다. 이 목격자란 반혁명 세력의 관점에서 위 작품을 응시했을 미술관의 부르주아 단골로서, 작품이 처음 전시됐을 때 그것이 상대적으로 인기 없던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애매모호한 점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유의 여신은 민중을 이끄는 동시에 그들을 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혁명에 대한 들라크루아 자신의 양면성을 시사한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1789-1815 연간의 첫 번째 프랑스대혁명 기간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균열선 중 하나를 암시한다면, 그보다 앞선 작품 하나는 좀 더 어두운 면모를 그리고 있다. 책의 속표지를 맞대고 있는 삽화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대단한 용기!>이다. 이 판화는 <전쟁의 참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85개의 작품 중 7번째 작품이다. 고야는 1820년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참상>을 제작했으나, 해당 작품들은 그의 사망 35년 후인 186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개되었다. 자유의 여신처럼, 고야 그림의 주인공도 시체더미 위에서 싸우는데, 이것이 사실상 들라크루아 그림과의 유일한 비교점이다. 고야는 확실히 여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녀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아구스티나 사라고사 도메네크라는 역사적 인물로, 1808년 사라고사 지역의 수도 방어 때 활약하여 아라곤의 아구스티나로 알려져 있다. 고야는 영광이 아닌 비극을 강조한다. 같은 사건을 감상적으로 표현한 <사라고사 방어>(1928)를 그린 스코틀랜드 화가 데이비드 윌키(David Wilkie)와는 달리, 고야는 적을 향해 돌린 아구스티나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등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전쟁으로 황량해진 풍경 속 유일한 인물로 대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적은 누구인가? 역설적인 것은 그녀가 프랑스군을 상대로 도시를 방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는 제정 독재의 중심이었으나, 국외에서 그들은 총검의 끝을 들이대며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을 강요했다. 그러나 적어도 에스파냐에서는 비교적 부유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소수의 인구만이 프랑스군을 반겼다. 에스파냐 사람 대다수는 교회와 왕의 깃발 아래서 침략자와 침략자를 돕는 지방 세력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전쟁의 참상>은 들라크루아가 기념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민중의 다른 측면, 즉 무지하고 짐승 같으며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프랑스는 에스파냐 사람들의 대응보다 더욱 야만적인 잔혹행위를 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의 참상>이 보여주는 전부는 아니다. 사라고사 방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민중봉기도 전적으로 반동적일 수 없었다. <전쟁의 참상> 작품들 중 <대단한 용기!>만이 에스파냐 저항군의 영웅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 또한 여성들, 즉 아구스티나의 이름 없는 자매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작품의 제목들은 고야의 입장이 가지는 모호성을 전달해준다. <여인들 용기를 북돋우다>가 선언적이라면, <그리고 그들은 야수 같다>는 몸서리쳐진다.

 

각자가 발생하는 국가적 맥락이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고야의 판화는 모두 공통적인 부르주아 문화의 일부로 파악이 가능한데, 그것은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위대함의 절정에 다가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물론 부르주아 예술의 위대함은 이 지점에서 그치지 않았으나,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부르주아 세계관의 대표이기를 멈추었다. 부르주아의 존재조건들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대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부 근대주의적 아방가르드의 발생은, 잠재적이기 보다는 실제적 지배계급으로서 부르주아 통합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을 것이다. 혁명에 대한 다소 엇갈리는 애증을 지닌 예술가가 승리의 즉각적인 여파에서 성공적으로 압축할 수 있었기에 동정어린 자화상을 갖게 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성공적인 아래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의 절정을 보여준다. <대단한 용기!>는 비슷한 영웅적 순간을 묘사하지만, 이는 반갑지 않은 위와 바깥으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의 패배를 다뤘고, 자신이 지녔던 국민적 자부심과 계몽주의적 원칙이 양립할 수 없어 보였던 반동의 시기에, 양자 사이에서 망설인 예술가가 그린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극단의 반대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혁명과 <전쟁의 참상>의 반혁명은 한 가지 주제를 공유한다. 바로 부르주아라는 혐의이다. 노동계급이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 세력으로서 출현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사례에서, 이러한 혐의는 부르주아 의도에 대한 의심의 시작이었고, 국민적 단결이라는 수사가 타협 불가능한 계급 분화를 숨겼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의 부상이었다. 노동계급이 거의 형성되지 못했던 에스파냐의 사례에서는, 이것이 부르주아가 민중 대다수와는 다른 경제적 이익을 가졌을 뿐더러, 국가를 외국의 침략자에게 넘김으로써 민중을 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이미 확고해진 신념이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는 군주제에 충분히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 반면, 에스파냐에서 부르주아는 군주제를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르주아의 명칭을 갖는 혁명들과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가 지니는 모순들에 대한 부르주아의 양면성은, 앞서의 두 그림 모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한 주제이자, 또한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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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

 

국사학과 석사과정 우동현

 

1. 서론: 혁명의 정의와 개념, 그리고 4.19[각주:1]

 

최갑수에 따르면 혁명이란 원래 易姓革命을 줄인 말로서,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을 말한다.[각주:2] 그러나 같은 역성혁명이라 하더라도 동양과 서양의 역사적 경험은 상이했다. 전통시대에 동양의 왕조가 대개 역성혁명을 통해 대두한 후 사라진 반면, 프랑스의 경우 카롤링거 왕조에서부터 부르봉 왕조까지 방계 혈통이 왕위를 계승했고 사실상 같은 왕통이 1천년 넘게 지속됐다. 또한 유럽에서는 강력한 국제적 귀족집단과 유럽적 차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기독교가 왕가의 존재를 세속적이고 종교적으로 보장했다. 따라서 영국(1649)과 프랑스(1793)에서 혁명세력이 국왕을 처형한 사건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고, 이제 혁명은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될 터였다.

근대적 의미의 혁명은 revolution을 번역한 말로서,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을 의미한다. 서양에 연원을 둔 이 새로운 용어는 19세기 후반 동양에 전파됐으나, 번역되지는 않았다. 다만 기존의 단어인 혁명이 근대적 의미를 획득하게 됐고, 이후 전통적 의미는 퇴색했다. 더하여 혁명은 근대성의 핵심적 요소로 거듭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쓰일 수 있는 다소간 모호하지만 풍성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한편 최갑수는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입헌혁명사회혁명으로 분류했으나, 양자 모두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새 사회에 대한 전망이라는 의미와 인간해방의 계기를 갖는다고 썼다.

한편 한국현대사에서 혁명이라는 記標는 여러 논자들이 다소 모호하게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홍석률은 자신의 글에서 쿠데타와 혁명을 비교하며, 혁명은 어떤 개혁적 진보적 가치를 내걸고 피지배집단인 민중이 참여하여 권력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했다.[각주:3] 이러한 정의는 5.16군사혁명내지 근대화 혁명이라고 부르짖는 작태에 학술적으로 맞설 때는 타당할 수 있으나, 결코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온전히 표상했다고는 볼 수 없다. 요컨대 논자마다 혁명을 명명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안에서 합의점을 찾기란 요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서구의 최신 논의를 정리하고, 그에 입각하여 한국현대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구에 연원을 둔 개념이니만큼 본고장에서 나온 주장을 겸허하나 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논의의 적실성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현대사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4.19를 연구사적 차원에서 정리하고, 서구의 이론을 잣대로 삼아 4.19를 재본다.

 

2. “새로운정통 부르주아혁명론[각주:4]

 

이 장은 서구에서 나온 최신이론을 정리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국사의 맥락에 적용해보기 위한 整地작업의 성격을 띤다. 이하에서 필자는 스코틀랜드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자인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 이하 저자”)이 쓴 부르주아혁명은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이하 저서”)革命論에 관한 최신의 연구 성과로 보고 그 대강을 살펴볼 것이다.

저자는 저서 19장에서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개념의 역사적 전개를 다루며, 트로츠키, 아이작 도이처, 토니 클리프 각각의 혁명론을 비교했다. 세 인물 중 뒤의 두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트로츠키주의를 수용 변형 주창했고, 그들의 트로츠키주의는 이후 20세기 후반 서구학계에서 전개될 다양한 부르주아혁명론의 저변을 이루었다. 저자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주도하여 개발도상국이 봉건 · 종속 · 식민지적 지배관계에서 벗어나 국제적 혁명운동의 일부로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구혁명으로 보았다. 트로츠키의 혁명론도 시기에 따라 표면적으로 변했으나, 어쨌든 그의 영구혁명론의 대표적인 사례는 1917년의 러시아였다. 한편 도이처는 구체제에 대항하여 피억압자 대다수가 봉기하고, “자유의 억압과 내전이 뒤따르며, 새로운 지배계급이 최종적으로 인민대중의 평등주의적 꿈을 폐기하는 양상을 언급하며 역사상 위대한 혁명들(영국, 프랑스, 러시아)”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부르주아혁명론에 관해, “구체제 또는 구체제 내부의 요소가 내부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를 부과하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따라서 그의 논의에서 부르주아혁명의 주체는 반드시 부르주아일 필요가 없었다. 도이처와 달리 클리프는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용어를 쓰진 않았으나, “엇나간(deflected) 영구혁명을 통해 부르주아혁명의 근대적 판본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엇나간 영구혁명을 노동계급이 영구혁명 전략을 완수할 수 없었고, 다른 사회세력이 지도부를 맡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또는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었다.

앞선 논의는 모두 근본적인 사회변형을 수반했던 역사적 혁명과, 그러한 변형을 가져올 미래의 사회주의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 전자인 부르주아혁명은 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가 더 이상 어떠한 제약에도 놓이지 않게 되는 시발이었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혁명은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적 사회관계의 번창과 전체로서의 부르주아 사회의 발달과 일치하는 국가 권력과 조직적 틀을 창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는 가장 지엽적인 부르주아혁명을 제외하고는 부르주아혁명이 모든 곳에서 현실적 목적을 위해 이미 성취됐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혁명은 사회주의혁명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제 부르주아혁명론에서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부르주아지로 한정될 필요가 없어졌다. 부르주아혁명이 그것을 수행한 주체와는 별개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르주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같은 형태를 가질 필요도 없다. 즉 부르주아혁명은 자본주의가 한 사회에 자리 잡게 되는 과정, 실로 격변을 거쳐야하는 사회주의혁명의 순간중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저자는 바로 다음 장에서 두 혁명,” 즉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간의 차이를 다뤘다. 저자에 따르면 둘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상호 중첩되기도 했다. 일부 정치혁명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든 사회혁명은 정치적 변화를 보였다. 또한 일부 사회혁명은 단순히 정치혁명의 외피를 입고 있더라도, 장기적인 사회혁명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저자는 애봇(Andrew Abbott)전환점(turning point)” 분석을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滔滔히 흐르는 자본주의의 과정과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인 부르주아혁명을 동시에 설명하려고 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기왕의 부르주아혁명론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주체와 성격을 가지고 논의가 분분했으며, 학문적 陣營을 가르는 계선 중 하나가 바로 그 사건이 정치적이냐 사회적이냐의 구분이었다. 저자는 영국의 지성인 해링턴과 로크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누적을 바탕으로, 정치혁명은 사회경제적 구조 안에서발생하나, 사회혁명은 한 형태의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나아가는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전자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 없이 사회 내부에서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지배계층 분파 간의 투쟁이고, 후자는 이미 진행된 생산양식상의 변화에 상응하거나 또는 그러한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 국가를 변형시키려는 투쟁이다.

한편 사회혁명은 반드시 직접적 계급투쟁의 결과일 필요가 없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혁명은 역사 속에서 분명 발생했으나 그 수가 너무 적어 사회혁명의 일반적 속성을 추출하기란 어렵다. 더하여 노예소유주가 봉건영주로, 봉건영주가 자본가로 변했던 것처럼, 기존 지배계급의 일원이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이전의 지위를 잃지 않고 역할만 바꿀 수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계급투쟁의 모습이 실로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계급체제 내부에서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대립하고, “계급체제 사이에서는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대립한다. 특히 후자의 관계에서 사태가 복잡해지는데, 모든 피착취계급은 억압을 당하지만, 모든 피압제계급이 착취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압제계급이 다른 피압제계급을 착취할 수도 있다. 역사적 피압제계급 중 사회를 재편할 역량을 가진 수는 제한적이었고, 부르주아만이 독보적으로 그러한 역량을 갖췄다.

이어서 저자는 부르주아혁명 시대의 전제조건을 다섯 개로 나누어 설명했다.[각주:5] 각각은 다음 사건의 대두를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확정적인 역사적 사건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서구의 경험에 국한하여 그 조건들을 탐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세계를 시야에 넣으려 하였고, 그 결과 세 번째 조건인 자본주의적 국가의 구조적 능력절을 전후로 과거의 유럽식민지들과 오스만 무굴 제국 일본 등 아시아의 사례가 대거 등장했다. 저자의 구도를 받아들일 경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또는 계급사회)은 노예 봉건 공납으로 구분된다. 더하여 저자는 절대주의를 공납적 양식의 서양식 변종으로 보는 아민(Samir Amin)의 견해에 주목했다. 요컨대 절대주의는 서구 바깥의 생산양식과 그에 상응하는 국가형태를 유럽에 도입하여 생산의 족쇄를 부과하려던 시도였으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공납국가와는 달리 서구절대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결코 막지 못했다. 하지만 절대주의국가는 그것이 타도되기 전까지 자본주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고, 이제 혁명적 주체와 그들을 움직이게 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할 터였다.

저자는 마지막장에서 부르주아혁명이 완성(Consummation)”된 여러 양상을 다루었다. 저자에 따르면 부르주아혁명의 완성은 자본주의적 개별국가의 전복과 자본주의적 내부발전의 장애물 제거, 그리고 국제적 환경의 영향이라는 면 등에서 고찰해야 한다. 서로 다르고 적대적인 체제들이 우세한 세계에서 고립됐을수록, 사회혁명에서 외압과 내부 국가전복이 쉬이 혼합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혁명 이후의 사회는 자본주의적 운동법칙에 종속된 경제와 임노동에 기반을 둔 경쟁적 축적에 헌신하는 국가를 주된 특징으로 한다.[각주:6] 이제 잉여착취의 중심수단에 임노동이 자리매김하고, “경제(또는 사적 專用)”정치(또는 공적 의무)”는 분리될 터였다. 절대주의국가에서 지배층이 지녔던 人身적 권력은 사회적 의무를 얼마간 포함했다. 그러나 로부터 공적 심급(경쟁적 축적)이 새로이 창출됐고, 이제 자본주의국가에서 자본가는 사회적 공적 기능을 수행할 의무없이 경제적 힘을 발휘하게 됐다.

 

3. 국내 연구: 4.19연구의 쟁점과 과제

 

이 장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진행된 4.19연구의 쟁점과 과제를 살필 것이다. 서술의 저본은 한국사연구회 4월민주항쟁연구반 소속 연구자들의 공동저작으로, 이 책은 4.19민중의 민주항쟁으로 규정했다.[각주:7] 홍석률과 정창현(이하 공저자”)에 따르면 4.19“6·25전쟁 뒤 사회변혁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직후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것은 이승만을 권좌에서 축출했으나, “주도세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뚜렷한 이념이 없어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완성에는 실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공저자의 주장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체와 민족통일의 당위성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전제인 듯하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공저자의 성격규정이 함축하는 과도한 문제의식을 일단 비판적으로 인정하고, 이하에서 그 내용을 살핀다.

. 4.19의 원인과 배경. 여태껏 4.19가 일어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차원에서 분석이 시도됐다. 1970년대 이뤄진 초기 연구는 학생들의 불만과 분노가 어디서 연유했는지에 집중했고, 그리하여 구조적 차원의 원인 규명보다는 다소 현상적인 차원의 분석이 이뤄졌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적 · 정치현상적 차원에서 4.19의 원인을 분석한 연구들은 이후 현상적 원인규명이라는 반론에 직면했다. 이제 연구의 방향은 3·15 부정선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왜 그러한 부정선거가 자행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4.19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나 파행적인 도시화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규명이 요구됐고, 전철환, 이대근, 손호철 등의 연구자는 각각 한국경제의 대미의존성, 원조경제의 모순, 국내외적 모순이 연계된 총체적 위기를 열쇳말로 삼아 연구를 진행했다. 이종원은 자신이 쓴 동아시아냉전과 한미일관계(アジア冷戰韓美日關係, 1996)에서 비밀 해제된 미국자료를 근거로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을 분석했다. 그는 미국이 부패 · 무능하고, 계속 북진통일식의 구형 냉전논리를 주장하며, 한일관계 정상화를 도외시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한편 공저자에 따르면 기왕의 연구들은 4.19를 촉발 · 주도한 주체들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객관적인 조건만을 나열했을 뿐이다. 그 중 박찬호는 당시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대중들의 역할을 살폈고, 1950년대를 운동의 회복기또는 운동의 내재적 성장기로 파악하여 선구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시론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 사회활동과 학생운동의 주체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 4.19의 전개과정. 4.19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는 크게 초기 연구와 1980년대 이후의 연구로 대별된다. 전자는 그 시기를 19602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부터 같은 해 426일 이승만의 퇴진까지로 보았고, 후자는 5.16 쿠데타 직전의 2공화국까지를 포괄했다. 공저자는 이 중 후자를 바탕으로 4.19의 전개과정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눴다.

첫 번째 시기는 19602월부터 4월까지이다. 공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 대중의 시위과정은 기초적인 사실이 정리된 바탕 위에 비교적 소상하게 진척되었다.” 이 때 4.19의 주체들은 학생에 국한되지 않았고, 특히 밤이 되면 학생들의 온건한 시위가 펼쳐진 낮과는 반대로 시위가 과격화되고 도시빈민층이나 일반시민들도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하여 4.19와 미국의 개입문제라는 주제도 1980년대에 들어와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이재봉의 경우 비밀 해제된 미국외교문서(FRUS)를 자료적 근거로 하여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각주:8]

두 번째 시기는 이승만 퇴진 이후 허정 과도정권의 수립과 개헌, 7.29총선으로 새 정권이 창출되기까지의 과도기이다. 허정 과도정권에 대한 평가는 肯否가 엇갈렸는데, 공저자에 따르면 이는 혁명의 주도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에 결국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권력을 재편할 수밖에 없던 4.19의 한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초기 연구경향은 대개 7.29 총선에 관해 공정한 선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90년대 공개된 미국자료 및 이갑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온건지향적 다수파인 민주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했으나,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가 비슷하게 의석을 차지하여 어느 한 쪽도 안정적이고 주도적인 정부를 꾸릴 수 없었다. “구체제의 골자가 유지된 상황에서일련의 민주화 조치가 있었을 뿐, 결국 4.19는 지배층 내부의 재편만을 불러왔다.

세 번째 시기는 민주당 정권의 성립과, 그와 동시에 기층 민중운동 및 통일운동이 활성화하는 시기이다. 대표적인 초기 연구자인 한승주는 4.19자유민주주의의 실험 와중에서 조성된 혼란기로 규정하는 견해를 체계화했다.[각주:9]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민주당 정권이 새로 대두하는 극단적인 좌파주의와 극단적인 반공주의양자로부터 협공을 받았고, 운신의 폭이 좁은 상태에서 결국 쿠데타를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를 양극화이론이라고 한다. 후기의 연구들은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띠었다. 김수진은 당시의 혼란을 정치적 양극화보다는 민주화 과정에서 필연적인 사회적 갈등을 제도권이 흡수할 수 없었던 정치권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한편 서중석은 민주당 정권과 그 구성원의 본질적 한계가 당시의 혼돈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극우반공이데올로기를 기본으로 하고, “폭력체계를 집단의 특성으로 하는 민주당은 민중항쟁에 편승하여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애초에 자유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저자에 따르면 4.19 시기의 사회변동을 전후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파악하려고 시도한 연구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당시는 외적으로 변동하는 냉전체제”, 내적으로 4.19라는 격변이 있었고, 각 정파와 주체 또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향후 연구는 그러한 변화를 역사적 맥락과 연결하여 제 나름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하고, 각각의 의미와 한계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 4.19 시기의 민중운동. 4.196·25전쟁 이후 완만하게 성장하던 민중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된 계기였다.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됐고, 조국통일민족전선과 같은 연합조직도 조직됐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운동은 5.16 쿠데타 이후 후퇴했다. 한편 이 시기 민중운동에 대한 평가는 극우 일변도의 정치무대에서 나머지 정치세력이었던 혁신정치세력과 사회운동,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대중운동은 7.29총선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학생운동도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더하여 이 시기 민간차원의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에 주목할 만한데, 공저자에 따르면 당시 냉전체제의 공존과 3세계 민족주의의 대두,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 강화 등통일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던 객관적 요인이 존재했다. 한편 민중운동 연구는 각론의 차원에서 노동운동 · 농민운동 · 청년 및 학생운동 ·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등으로 나뉘어 연구가 진행됐으나, 여전히 규명해야 할 사실이 많고 전후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 4.19의 성격. 4.19를 어떤 용어로 규정할 것인가에 관해 4.19 직후부터 논의가 분분했다. 당시 좌우를 불문하고 4.19혁명이라고 표상했으나,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記意는 전혀 달랐다. 한편 공저자에 따르면 혁명엄격히 학문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때쓰인다. 현재 학계에선 4.19지향성에 주목하여 “4월 혁명을 사용하려는 분파와, 엄밀한 기준에서 볼 때 진정한 사회체제의 변혁을 가져오진 않았으므로 항쟁이 적확하다고 주장하는 분파가 맞부딪히고 있다.

기왕의 연구는 4.19의 성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규정했다. 각각의 주장은 학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각 주장이 대변하는 주체들의 역사관 또는 지향성과 긴밀하게 닿아있다. 첫째는 4.19를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파악하는 방식으로, 대표적 논자는 민석홍이었다. 여기서 근대화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개발이라는 이중혁명론의 구체화이다. 그러나 공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설명방식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4.19그대로 대입해 파악하여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방식으로, 대개 4.19 직후의 통일운동이나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등 민족주의의 고양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의적 흐름은 4.19 이전으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이전부터 지속되던 민족운동사의 흐름속에서 4.19 이후 민족주의의 자리매김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보는 방식으로, 이는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장과 변혁운동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 또한 실증적이고 구체적이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어떤 시론이나 문제제기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한계가 일정 정도 자료부족이나 연구자의 문제의식의 과잉에 기인한다고 본다.

. 연구과제. 공저자에 따르면 4.19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서까지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1970년대 미국의 박사학위 논문을 방법론과 자료구사 수준에서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 자료발굴이 선행돼야 할 것이고, 실증적인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기왕의 연구처럼 시각이나 방법론 중심의 역사연구가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둘째, 연구 분야와 폭을 넓혀야 한다. 대개의 4.19 연구는 정치사와 운동사에 국한돼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 · 경제문제와 그러한 문제들을 두고 진행된 백가쟁명의 시기를 더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더하여 대중의 생활상 같은 미시사적 주제와 이산가족문제 및 월남민문제, 국제적 환경 등에 관해서도 연구전망을 세워야 한다. 셋째, 4.19와 그것의 의미를 전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 부분에 관한 연구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평면적으로 사건과 그 추이를 나열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연발생적민중운동 안에 용해된 지도성대중성을 포괄해서 파악해야 한다. 요컨대 4.19 연구는 전인미답의 분야뿐만 아니라 장차 발굴될 새로운 자료들도 많이 있다.

 

4. 순간과 과정: 역사적 맥락 안의 4.19

 

이 장에서는 앞서 파악한 최신의 혁명론과 연구 성과를 살펴본 4.19를 접맥시켜볼 것이다. 필자는 이 장을 서술하기에 앞서 다음의 지침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첫째, 이 장의 서술은 어디까지나 시론의 성격을 갖는다. 둘째, 어떤 역사적 사건을 파악할 때는 그 사건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이 어떠한 궤적 속에 놓여있는지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4.19의 전후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4.19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것이다. 셋째, 닐 데이비슨의 혁명론을 탐구의 도구로 삼아 4.19를 파악해 볼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하에서 4.19라는 순간적이고 분수령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과정 속에 놓여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이현진은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정치면에서는 보수 양당체제가 형성되었고, 경제면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통한 대외 의존적 성장의 틀이 마련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의 붕괴와 가치규범의 혼란으로 전통적 가족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각주:10]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등은 이승만정권의 폭압적이고 파행적인 정국운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독재와 부정부패를 자행 · 은폐했고, “원조물자 배분과 금융특혜 등을 이용해 정경유착 구조를 형성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미국의 냉전전략상 대소 전진기지인 한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 정치적 修辭였다. 한편 1950년대는 원조경제의 시대라고 불렸을 만큼 미국의 對韓경제원조정책이 한국경제를 좌우했고, 동시에 한국경제의 물적 토대가 조성된 시기였다. 이대근은 당시 한국경제를 두고 “30억 달러 이상에 달하는 미국원조 도입을 통해 전후 자본주의세계경제체제로 신속하게 편입됐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950년대 한국경제는 결코 停滯的이지 않았고, 자본형성과 기술축적이 상당히 이루어졌으며, “5%대의 성장 실적을 거양했고, 당대보다는 차세대 공업화를 위한 기반구축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각주:11]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인구이동이 대규모로 관찰됐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농지개혁의 실패 및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美公法 480(PL 480)를 통한 잉여농산물의 대거 수입은 농촌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농현상이 가중됐고, 휴전 이후 피난민들의 귀환은 도시인구를 급증시켰다. 자연스레 도시빈민이 양산됐으며, 가족공동체 규범의 변화와 함께 도시민들의 불만도 증가했다. 한편 당시 학교교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취업난과 상승의 욕구, 징집회피의 수단, 미국 유학의 가능성 증가 등 여러 요인이 결합하여 대학생이 급증했는데, 1960년대 대학생과 대학출신자의 수는 거의 38만여 명에 이르렀다.[각주:12] 이들은 장차 사회적 불만을 체현하여 4.19 발발의 주체가 될 터였다.

1960228,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정권에 맞서 시위를 감행했다. 그들은 대구지역 8개 국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녀 학생들이었고, 자신들을 민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자유당에 맞서 한나절 동안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어 3.15 부정선거에 따른 마산 의거(또는 봉기)”와 다음 달인 411일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대학생과 교수, 시민들이 참여하여 시위의 주체도 대폭 확대됐다. 시위는 지역과 주체에 따라 지속적 또는 간헐적으로 진행되었으나, 418일 고려대생이 시위 후에 습격당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정권 규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서울 시내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민들의 무력시위가 개시됐고, 419일 정부의 발포로 피의 화요일이 시작됐다. 이어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공직 사퇴, 계엄사령부의 선무노력 등 미봉적인 수습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미국은 체제변혁이 개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개입하여 이승만을 압박했고, 425일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더해져 결국 426일 오전 1030분 이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했다.[각주:13]

한편 1950년대 후반 미국은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공산권과의 체제경쟁에 맞서동북아시아지역에서 한 · · 일을 잇는 지역통합전략을 현실화하려고 했다.[각주:14] 미국은 이승만의 감정적 반일을 차츰 장애로 느끼기 시작했고, 3.15 부정선거 이후 일어난 민중항쟁이 더욱 불거지기 전에 개입했다.[각주:15] 이승만 하야 뒤 기득권층이 권력을 재편했고, 허정 과도정부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 후 729일 총선을 실시했다. 민주당 정권은 반공주의라는 기왕의 정책적 틀을 유지한 채, “경제제일주의로 표현되는 근대화론을 집권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다른 한편에선 시민사회단체와 혁신계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겨냥하는 세력들이 대두했다.

그러나 1961516일 쿠데타가 벌어졌다. 군부는 반공을 국시로 함과 동시에, 민생고를 해결하고 통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의 국가기획이 선통일후건설이었던데 반해, 박정희는 선건설후통일을 주창했고, “4.19와 동일한 사회상황의 소산인 원조경제의 停滯 속에서 경제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확산시켰다. 군사정권은 4.19를 계승한다고 자임했고, 4.19 당시 제기된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요구에 나름대로 응답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반공 · 권위주의적이자 동시에 강력한 발전주의적성격을 보였다. 케네디 정권은 3세계 각국의 경제발전을 통해 양극적 체제경쟁에 돌입했고, 한국은 이러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 하에서 일본과 책임을 분담했다. 결국 5.16이후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산업화 경쟁에 탈정치화된 대중의 에너지를 총동원했다.[각주:16]

결국 4.191960년대부터 진행될 한국의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부표의 역할을 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계급성과 계급의식은 모호했으나 시민들이 참여하여 반민주적이고 경제발전에 별 관심이 없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한편 4.19를 통해 한국인은 국가지도자를 끌어내리는 찬란한 역사적 성과를 거뒀으나, 한국사회의 지배층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이어 민주당의 머뭇거림과 그 틈을 타 무력으로 헌법을 뒤집은 반혁명적 사건5.16을 통해 4.19의 염원은 당분간 짙은 어둠 속에 갇히게 됐다. 이제 한국은 국가주도하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기형적으로 확립될 위로부터의 혁명이 개시될 터였다.

 

5. 결론: 서구의 이론으로 본 4.19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서구의 최신이론을 정리한 후, 기왕의 4.19 연구 현황을 개괄했으며, 마지막으로 역사적 맥락 안에 4.19를 위치시켜 파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선배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첫째, 자료의 부족과, 둘째, 선행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정치한 분석보다는 소묘에 가까운 서술에 그치고 말았다. 더하여 닐 데이비슨의 결과주의적인 부르주아혁명론을 4.19에 적용하려고 했으나, 한편으로 5.16사건으로서의 한국식 부르주아혁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첫째, 1960년대라는 시대[각주:17]와 당시의 한국경제를 쿠데타 세력이 재단했고, 둘째, 쿠데타 세력의 미봉책으로 인해 1950년대의 재벌들은 족쇄를 하나하나 벗어던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각주:18]

그러나 4.19滔滔히 흐르는 자본주의의 과정속에서 본다면, 비록 정치혁명에 그쳤으나 실로 혁명적인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6·25전쟁과 온갖 부정부패로 점철된 11년여의 이승만 반공독재를 피지배층, 그 중에서도 청년층이 솔선하여 붕괴시킨 점은 그 의미를 결코 낮추어 평가할 수 없다. 4.19 이후 한국인의 경제적 기본권이 강력하게 요구됐고,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지는사태가 벌어졌다.[각주:19] 허정 과도정부와 2공화국은 한국인의 그러한 요구를 수용할 역량이 부족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4.19 이후 한국식 자본주의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기형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오유석에 따르면 4.19정치 · 경제 · 사회 모든 측면에서 낡은 체재를 개혁하려던 항쟁이었으나, 그것은 학생에 의한 대리혁명이었고, 5.16에 의해 좌절됐다.[각주:20] 그러나 이 같은 역사서술은 근시안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야 비로소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유석의 평가는 4.19로 추동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립(요구)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특정한 역사적 목적을 설정했을 때 가능한 평가이다. 필자는 닐 데이비슨의 결과주의적 부르주아혁명론을 빌려, “순간과정양자를 염두에 두고 현대한국사의 혁명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4.19는 고유의 한계가 뚜렷했으나, 이후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확립되고, 자본주의적 운동법칙이 사회적 심급으로 작용하며, 임노동에 기반을 둔 경쟁적 축적을 강요하는 국가가 대두하게 된 장대한 서사시의 서막이었다.

 

 

 

참고문헌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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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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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19’는 여태껏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왔다. 대표적으로 “4.19,” “4.19혁명,” “4.19의거,” “4.19(민주 또는 민중)항쟁,” “4.19사태,” “미완의 혁명” 등이 있다. 4.19의 正名에 관해서는 아직 합의된 바가 없는데, 이는 해당 사건을 바라보는 논자의 학문적 · 정치적 입장 및 시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과 윤치영, 현대의 수구 논객 지만원 등은 4.19를 “사태”로 파악한 반면, 역사학자 서중석은 “혁명”으로 파악했다. 한편 필자는 4.19의 기본적 성격을 정치혁명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또한 부르주아혁명으로 볼 여지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 우선 민중이 지배층을 끌어내렸고(순간), 이후 일련의 사태 전개를 거쳐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우세하게 바뀌는 이행기(과정)의 시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4.19 자체는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심원한 변화를 초래한 “사회혁명”은 아니었고, 지배세력 내에 재편이 이루어졌다가 얼마 후 반동적 군사쿠데타에 직면한 “정치혁명”이었다. 물론 2공화국 때 한국의 시민사회가 보여준 혁신적이고 민족적인 행동과 요구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필자는 4.19를 “4.19혁명”이라기보다는 “4.19”라고 표현하는 편이 간명하다고 생각하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최갑수, 「역사 속의 혁명」, 6차 맑스 꼬뮤날레 3번 발제문, 2013, 179쪽. [본문으로]
  3. 홍석률, 「4월혁명 직후 정군(整軍)운동과 5.16 쿠데타」, 『한국사연구』 권158, 2012, 200쪽. [본문으로]
  4. “부르주아혁명”에 관한 역사, 즉 “혁명의 역사학”도 흥미롭다. 최갑수에 따르면 부르주아혁명관은 원래 운동권에서 제기한 것으로, 그것은 사회혁명론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특히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유럽사회의 자기전망이 변하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학계의 주도적인 해석으로 자리 잡고 적어도 1960년대 말까지 혁명의 ‘고전’해석의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프랑스 학계의 경우 프랑스혁명을 기본적으로 부르주아혁명으로 파악하면서도, 농민과 귀족의 반혁명 노력 등 혁명의 여러 부차적 양상을 밝혀내 풍성한 혁명사를 서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자유주의사가들이 만들어 낸 이 개념은 이후 마르크스가 차용했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분석적 개념으로 만들어냈다. 이제 부르주아혁명이란 개별 혁명을 논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사건들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68년에 벌어진 세계적 규모의 변화와 함께, 1990년대 초반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부르주아혁명론은 힘을 잃게 됐다. 더 이상 부르주아혁명론으로 개별 혁명들을 설명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최갑수, 앞의 논문, 187~188쪽 참고. [본문으로]
  5. 여기서 말하는 다섯 가지 부르주아혁명 시대의 전제조건은 ①봉건제의 위기, ②(생산력 발전을 위한)자본주의적 대안의 가능성, ③(자본주의 발달에 간여하는)前자본주의적 국가의 구조적 능력, ④혁명적 주체, ⑤혁명적 이데올로기이다. [본문으로]
  6. 저자는 자본주의국가가 수행해야만 하는 중요한 특정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①이중(수평적, 수직적)의 사회질서를 부과하는 것, ②‘생산의 일반적 조건’을 확립하는 것, ③각각의 자본주의국가가 ‘내부적’ 자본가 계급의 집단적 이해를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것. 이 중 ①은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해주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아야 하는 수평적 사회질서와, 노사관계가 항상 자본에게 유리한 쪽으로 귀결돼야 하는 수직적 사회질서를 포함한다. 다음으로 ②는 경쟁적 축적이 잘 일어날 수 있도록 하부구조(Infrastructure)를 창출해야함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③은 정책들이 자본가나 지배층 한 분파의 이익 속에 갇혀있지 않고, 세계시장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7. 홍석률 · 정창현, 「4월민중항쟁 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0, 13~46쪽 참고. [본문으로]
  8. 이재봉, 「4월혁명, 제2공화국, 그리고 한미관계」,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나남출판, 1996, 71~110쪽 참고. [본문으로]
  9. 한승주,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종로서적, 1983 참고. [본문으로]
  10. 이현진, 「전후 한국사회와 4 · 19」,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下』, 지식산업사, 2011, 421쪽. [본문으로]
  11. 이대근, 『解放後-1950年代의 經濟』, 삼성경제연구소, 2002, 517~518쪽. [본문으로]
  12. 이현진, 앞의 책, 429쪽. [본문으로]
  13. 정근식 외 편,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2010, 23~79쪽, 181~220쪽 참고. [본문으로]
  14. 허버트 P. 빅스, 「지역 통합 전략」, 『1960年代』, 거름, 1983, 208~250쪽 참고. [본문으로]
  15. 미국 국무부 전후 대외정책 자문위원회, 정치소위원회 50차 회의록(1943.04.03.).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6. 정용욱 외,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15~20쪽 참고. [본문으로]
  17. 박준식에 따르면 1960년대는 “근대적 의미의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대부분의 후진국이 노동시장 형성의 초기단계에는 엄청난 과잉인구의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더하여 당시 사회복지나 사회부조 같은 서구식 복지개념은 기대하기 힘들었고, 가족구성원 일부의 희생에 의존하여 가정경제가 작동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박준식, 「1960년대의 사회환경과 사회복지정책」, 『1960년대의 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1999, 160, 194~198쪽 참고. [본문으로]
  18. 공제욱, 「부정축재자 처리와 재벌」, 위의 책, 201~204, 252~255쪽 참고. [본문으로]
  1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237쪽, 김광희, 『박정희와 개발독재』, 선인, 2008, 37쪽 각주 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0. 오유석, 「서울에서의 4월혁명」, 앞의 책, 2010, 218쪽. [본문으로]
Posted by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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