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로 탈조선' 칼럼에 오랜만에 귀중한 외부 필진 선생님을 한 분 모시게 되었습니다. 언어학을 공부하시는 C 선생님이십니다. 한국에서 학사와 석사를 하셨고,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엔젤레스(UCLA)에서 박사 과정 중이십니다. 전진과 협력에 입각한 언어학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하실 예비연구자의 흥미로운 탈조선 이야기, 정말 기대가 큽니다. 바로 읽어 봅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서 동아시아 언어학을 전공하고 있는 한국인입니다. 블로그 주인분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쓰게 되는 글입니다. 보다는 이 분의 가르침인 ‘전진과 협력’을 실천하고자 쓰는 글이라고 포장하겠습니다.


서두에서 보이듯이 저는 모두가 가볍게 읽으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쓰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대단하신 선생님들께서 이 블로그에 각자의 경험과 조언들을 써 주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엔 내세울 것도 없거니와 순전히 제 노력으로 왔다는 생각은 아직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눌 경험도 없고, 감히 조언은 할 수도 없기에 그냥 정말 가볍고 편하게 써보겠습니다.


저는 20대 중반까지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야. 우리 같은 인생이 제일 답이 없어. 반에서 7~15등 하면 뭐든지 애매해. 좋은 학교를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하고 빠르게 취직하는 것도 아니고.” 이 말을 한 친구는 대학교에 진학한 후 열심히 공부하여 취직을 하였고 얼마 전 결혼을 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는 저 정도 하는 (2005년~2007년기준, 한 반에 40여 명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며 놀고 잠자는 걸 좋아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떻게 비벼서? 서울권 대학 영어영문학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군 휴학 전까지는 그냥 먹고 놀고 자며 지냈습니다. 후회가 있다면 ‘아. 그 때, 더 놀 걸…’


그러다, 휴학을 마치고 3학년으로 학교에 복학하니, 이상하게? 공부가 좋아졌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1. 그냥 공부에 흥미를 느껴서.

2. 내가 한 질문, 과제, 그리고 내가 치룬 시험에 교수님들께서 극찬을 해주셔서. 인정받는 기분이라

3. 공부라도 해야지 나중에 가정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3학년 2학기에 당시 지도교수님께 ‘대학원’은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나도 갈 수 있는 곳인지? 거기 가면 나는 뭐가 되는 것인지? 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연구실로 찾아 뵈었습니다. 지금도 신기하지만, 처음 교수님의 오피스를 들어갈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야. OOO. 너 대학원 가고싶어서 왔지?!”

아직도 신기합니다.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날, 교수님과의 많은 상담 끝에 타 대학교 영어학과 석사과정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년 후 대학원 면접을 치뤘고,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때 조금 기뻤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나도 석사과정에 입학했다는 기쁨보다는,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하는 마음이 저를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석사생활을 시작하며 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주로 학술지 편집 및 콜로퀴움 운영을 도왔습니다. 이 경험은 제가 미국 박사과정에 지원할 때 ‘여러 분야의 논문을 접할 수 있었다’라고 포장?하였습니다. 실제로도 제가 관심있던 분야 외에 다양한 분야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편집상의 이유로). 또한 이 당시,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국가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제 능력이 너무 모자라 시간을 많이 빼았기는 바람에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학위를 마치지 않고 그냥 관둬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를 응원해주신 부모님을 비롯하여 교수님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못 할 짓이라고 생각하며 ‘오직 전진뿐’ (이럴 때 쓰는 표현이 맞죠? 블로그 주인장님)을 외치며 버텨나갔습니다.


고생 끝에 보람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번역 사업이 마무리 되어 갈 때 쯤 한 과목을 듣게 되었고, 이 과목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과목 교수님께 제가 ‘왜’ 이 과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걸’ ‘연구’하고싶은지 등에 대해 말씀을 드렸고, 감사하게도 저를 지도제자로 받아주셔서 이 전공으로 지금 유학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한국어 언어현상에 큰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도 그 영향을 받았으며 한국어의 여러 언어현상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에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통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교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저의 결정을 너무 좋아해 주셨고 응원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지금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본격적으로 어떻게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들에 비해 늦게 공부에 흥미를 가졌으나 (20대 중반) 이 때부터 공부를 하려면 미국에서 해야지! 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처음 석사과정 진학에 대해 지도 교수님께 상의를 드릴 때, 교수님께서도 바로 미국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겁이 많아서 국내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선택이 ‘틀리진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 평생의 은인이신 지도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2. 교수님을 따라 학회도 다니고 발표도 했으며, 석사논문을 편집하여 학술지에 투고하였다.

3. 진짜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은 돈으로 얻을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유학을 가고 싶었던 마음이 석사 1학기 때에도 역시 있었기에 여름 방학에 GRE 준비 차 강남의 한 어학원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번역과 조교 일로 몸과 마음이 상해있던 터라 학원에서 조느라 바빴습니다. 결국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를 한 건, 석사논문을 작성하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관심 있는 학교를 찾아보며 ‘아. 이 학교가서 박사과정 한다면 행복하겠지? 미국은 어떤 곳일까?’ 라는 상상과 함께 버텨나간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의 교육제도와 교수님들이 저에겐 너무나도 좋았고 과분하였지만, 그냥 ‘단순히’ ‘미국’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찾아보니 박사과정 지원에 있어서는 다양한 요구사항이 있었습니다. TOEFL은 79~100/120 정도의 커트라인을 요구하였고, 특정학교들은 speaking 영역 24~25/30이상의 점수를 요구하였습니다. GRE같은 경우는 SUNY Buffalo에서 ‘Verbal 과 Math 총 합 몇 점 이상. Writing은 몇 점 이상이 ‘선호 됨’’이라고 적혀있던 걸로 기억됩니다. 다행이게도? TOEFL speaking 커트라인을 요구하는 학교에선 제 관심분야를 다루지 않았기에, 저 정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고 GRE 같은 경우에도 ‘선호됨’이라고 하였기에 대충 할까 하다가, 괜히 긴장이 되어 먼저 유학간 사람들에게, 교수님들께 여쭤보았습니다.

“보니까 그냥 영어는 먹고 살 만큼은 하는 것 같고, 어학 점수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는데 높아보이는 사람도 있고 낮아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그냥 요구 점수만 넘기면 학업계획서나 샘플페이퍼에 치중하는게 합리적인 듯? 근데 어학점수는 높으면 높을 수록 좋겠지. 고고익선!”이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빠르게 커트라인만 넘기자라는 마음으로 (핑계로) 나름? 열심히 하는 척을 하며 시험을 치루었고 각 학교에서 요구하는 커트라인을 넘겼습니다. 이 후에도 어학점수에 계속 아쉬움이 남았지만, 제 시간과 노력을 학업계획서와 샘플페이퍼에 치중을 하였습니다.

샘플페이퍼는 석사논문을 편집하여 학술지에 투고했던 논문 (약 25쪽?) 과 유학 준비 해에 학회에서 발표한 발표논문 (약 22쪽?)을 다시 학교 규정에 맞춰 편집을 진행하였습니다. 

학업계획서는 평소에 제가 가지고 있던 ‘언어’에 대한 짧은 생각과 어떠한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연구’하고 싶은지, 왜 내가 ‘거기’서 공부를 해야하는지 (Faculty와의 ‘연구 접점’) 등에 치중하여 쓴 것 같습니다.


저의 관심분야는 미국 전 지역에서 연구되는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미국 서부쪽 (+유럽)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는 터라, 학교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수님들과 먼저 유학간 선생님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많이 반영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UCLA, UC Berkeley, UC Santa Barbara, U. of Oregon, U. of Colorado 등 서부의 학교와 SUNY Buffalo 등 약 10 군데의 학교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준비를 하였습니다.

~10월- 어학시험 준비

10월~11월- 샘플페이퍼 재편집/ 교수님들께 추천서 부탁

10월~12월- SOP및 CV 작성 / 학교 리서치


이 중 UCLA에서 가장 먼저 좋은 조건으로 합격통지를 받게 되었고, 후에 SUNY Buffalo에서도 합격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결국 2할 정도네요. 이런 제가 글을 쓴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저와 리서치 핏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 학교는 UCLA, UC Berkeley, UC Santa Barbara, U. of Colorado였습니다. 이 네 군데의 학교를 제외하고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아. 어디라도 가고싶다.’ 라는 생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물론 성격상의 이유로 그 어느 곳에도 사전연락 (contact)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리서치핏’이 ‘가장 잘 맞다고’ 생각한 학교에서 ‘가장 먼저’, ‘가장 좋은 조건’으로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제가 왜 뽑혔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1. 남들에 비해 낮은 어학성적

2. 남들에 비해 좋지 않은 학벌과 GPA

3. 남들에 비해 적은 연구실적 및 수상경력


합격통지를 받은 올해 1월부터 지금 11월까지 고민을 해 본 결과,

1. 나를 ‘정말 잘 알고 계시는’ 평생의 은사이신 교수님의 추천서

2. 나름 잘 맞은 리서치 핏.

3. 운

이 큰 작용을 하였다고 답을 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감히 주제넘게 제가 조언을 드리자면,

1. 지도교수님과 모든 걸 상의하시고,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 어떨까요?

2. 리서치 핏이 잘 맞는 학교를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상 글 마치겠습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부로 탈조선 > [언어학] Voice from La La Land' 카테고리의 다른 글

Voice from La La Land  (3) 2019.11.17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그런데

    공부만으로는 부족 결국 탈조선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하는데 얼마정도 있어야하는지?

    2019.12.01 16:40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생활 할 수 있는 자금이요.

    2019.12.01 16:43 [ ADDR : EDIT/ DEL : REPLY ]

생각2018. 6. 12. 18:50

아까 낮에 중국어 기말고사를 끝으로 UCLA에서 박사과정 1년차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러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15주씩 두 번 돌아가는 학기제와는 다른, 10주씩 세 번 돌아가는 쿼터제를 처음으로 마쳤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학과 수업coursework이라는 게 사람을 쉽게 지치게도 하지만, 박사논문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수업을 골라 들으면 그나마 유용하고 유익하겠다. 허나 나는 2, 3외국어 요건을 채우는 데 집중한 한 해를 보냈고, 이제 위에서 언급한 논문작성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수업은 2년차 때 본격적으로 들으려고 한다. 좌우간 정리 안 되는 생각을 주제별로 써보겠다.


1. 연구는 탈조선

서울에서 석사과정 및 석사학위 소지자로 보낸 3+1년을 전부 합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용하고 즐거운 9개월을 보냈다. 물론 서울에서 얻은 경험들과 인연이 여기서의 생활에 큰 활력과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구를 진행하려면 탈조선 및 도미해야 한다. 


2. 탈조선엔 영어

영어가 진리의 언어는 아니지만, 세계어lingua franca이며 인류가 수행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작업언어working language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다. 영어로 써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으며, 자신 연구의 영향력을 더욱 늘릴 수 있다. 탈조선에 영어가 필수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3. 목표와 효율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할 공산이 크다. 박사과정에서 어떤 단기, 중기, 장기 목표를 세우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게 효율적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 나의 경우, 1년차에 언어 요건을 전부 완료했다. 2년차에 논문자격시험을 위한 다른 수업 요건을 채우려고 한다. 동시에 이번 여름에 논문 1.5편에 해당하는 글을 쓰려고 한다. 물론 영어로.


4. 끊임없는 혁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사'라는 필드를 조금만 벗어나면 주제와 방법론 측면에서 도무지 추격이 불가능한 정도의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를 모두 시야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나 새로운 것에 대한 추격,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써놓고 나니 무슨 기업의 슬로건 같지만,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전에 이를 분명히 해두어야 시간 낭비를 덜 한다.


5. 충분한 휴식과 강인한 체력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기계가 될 수도 없다. 힘들 때는, 쉬고 싶을 때는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한 번 죽는 인생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운동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기계가 될 수 없는 연구자가 경쟁에서 승리하는 지름길은 체력과 지구력의 배양 및 보존이다. 슬프게도 이 지적은, 나같은 범인凡人에게는 참이다.


6. 이미 늦었다

박사과정에서 유학생, 그것도 나처럼 30대 초반에 유학을 나온 이들은 이미 세계적인 경쟁에서 한참을 뒤쳐져 있음을 보았다. 나와 동갑내기 미국인이나 중국인들, 인도인들 가운데에는 벌써 박사, 포닥, 교수들도 있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한시라도 빨리 탈조선 및 도미하는 게 중요하다.


7. 호전되는 남미북 관계

세 번째 쿼터는 역사적인 사건이 몇 개 있었다. 4.27 판문점 회담과 5.26 통일각 회담, 그리고 어제 기말고사 시험 준비를 포기하며 계속 봤던 6.12 싱가폴 회담까지. 한편으로 미국에 그 흔할 것 같은 '북한연구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8. 아름다운 사람들

한국에서처럼 여러 좋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부터 학과의 친절한 선후배들, 같이 학문적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동학들, 외국어 수업에서 만났으나 내게 과분한 호의를 보여준 미국인/중국인 학부생들. 나와 같이, 또는 나보다 먼저 유학을 나와서 내게 커다란 도움을 준 분들도 잊을 수 없다.


9. 쏜살 같은 시간

첫 번째 쿼터가 끝나자마자 학교 대학원에서 제공하는 소정의 펠로십을 받아 동부에서 자료 수집을 4일간 진행했다. 아울러 박노자 선생님께서 불러 주셔서 프로젝트 건으로 오슬로를 다시 방문했고, 그곳에서 오랜 노르웨이인 친구(지금은 일본에서 교수)를 만났다. 하버드와 MIT 관련자들은 내게 여행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었으며, 돌아와서는 훌륭한 선배 K의 호의에 힘입어 샌디에이고를 다녀왔다. 두 번째 쿼터에는 동생이 휴가를 왔었고, 로마 워크샵 합격 통보를 받았으며, 쿼터 종료와 함께 한국에 다녀왔다. 세 번째 쿼터에는 다시 여름 펠로십을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으며, 점차 무엇을 연구할지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정말 빨리 갔다. 앞으로 더 빨리 갈 것이다.


10. 오직 전진뿐

조선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고통 받는 여자와 소수자, 가난한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보면서, 이 세계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변화는 너무나 느리게 온다. 쌀국이 결코 낙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선보다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우수하다. 그러한 비참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직 전진뿐이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8월 6일  (0) 2018.08.06
2018년 6월 23일  (0) 2018.06.23
2018년 6월 12일 - UCLA 271일차 (박사 1년차를 마치며)  (0) 2018.06.12
2018년 6월 9일 - UCLA 268일차  (0) 2018.06.09
전진 우클라  (0) 2018.06.06
2018년 5월 15일 - UCLA 253일차  (0) 2018.05.26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각2018. 5. 4. 21:40

윤충로 선생의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2015)를 읽고 있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비판할 거리가 잔뜩 떠오르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지만, 사실 이런 책이 한 권이라도 더 필요한 시점에서 그런 비판을 쏟아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이론의 쓰임새, "사회과학"의 외형을 띤 모델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아무리 입이 닳도록 비판해봤자 그러한 행태가 바뀔 일도 없고, 차라리 내가 그런 이론이나 모델을 안 쓰고 좋은 책을 쓰는 게 더욱 빠르다. 좌우간 재미있게 읽고 있다.

조선일보 아카이브에서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몇몇 기사를 찾아 읽었다. 놀라울만치 영어학원/과외 광고가 많았다. 윤충로 선생의 책에도 월남으로 파견된 "기술자"들을 선발하는 데 있어서 영어는 "우선적인 기준"(224쪽)이었다. 이들의 취업 경로를 보아도 미군 또는 미군부대 관련인과의 관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고, 영어를 어떻게든 할 줄 알았기에 월남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전쟁터로 가야만 했던 이들의 선택이 애처로웠다. 옹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책에 나오는 많은 군인들, 기술자들, 한남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다. 이는 조선에서 어떻게든 살기 위해 아등바등 "프로젝트"를 하고, 과외를 하고, 나중에는 탈조선을 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영어를 했던 나의 모습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울러 점점 더 한국과 한남(일반화 할 수 없음을 잘 알지만)에 대해 전해 듣는 여자들의 악몽 같은 경험담들이 축적되면서, 정말이지 한국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굳건해진다. 어떻게 여자들은 그런 곳에서 그런 더러운 손길과 눈길과 입질을 견뎌가며 사는 것일까? 과연 그곳은 바뀔 수가 있는 것일까? 성추행/갑질 문화가 너무나 심하다. 이 문화의 기원을 더듬더듬 짚어 나가다 보면 일제시기를 거쳐 조선사회로까지 이어지겠지. 이 더럽고 더러운 문화를 없애버리는 것이 과연 가능이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가난한 젊은이, 여자, 소수자는 무조건 영어 공부를 통해 탈조선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아낌 없이 동지적 손길을 내밀겠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5월 12일 - UCLA 240일차  (0) 2018.05.12
2018년 5월 6일 - UCLA 234일차  (0) 2018.05.07
2018년 5월 4일 - UCLA 232일차  (0) 2018.05.04
2018년 4월 15일 - UCLA 213일차  (0) 2018.04.15
2018년 4월 14일 - UCLA 212일차  (0) 2018.04.15
2018년 4월 7일 - UCLA 205일차  (0) 2018.04.07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각2018. 3. 5. 21:55

사람은 한 번 죽는다. 오래 살 수도 없다. 죽기 전에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짧은 인생에서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기록은 잘 남지 않는다.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영향도 있지만, 살면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을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잊기 전에 기록해 두어야 하고, 역사를 바라볼 때도 이러한 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록이 항상 진실은 아니고, 기억이 항상 사실만도 아니라는 점을.

내가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은 할머니다. 두 번째는 부모님인데, 사실 고마워해야 한다는 생각은 무척 희미하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가난하게 살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내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망도 많이 했고, 충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다른 누구보다 가까워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동생이다. 어쩌다 한 번 죽는 인생을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한 10대를 보내야 했는가. 하지만 20대부터 시운과 본인의 노력이 맞물려 제법 잘 하고 있다. 올바르게 자라고 있어서 고맙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할머니는 2018년 3월 5일(PST) 현재 은평구의 한국효요양병원에 누워 계시다. 2017년 6월께 집에서 넘어지시면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리를 다치신 이후 여태껏 병원에 계셨다. 그전까지는 구순의 노구를 이끌고, 가끔 밖에 나가실 적에 손자들의 도움을 받아 차디찬 벽돌 건물 2층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셨다. 그 움직임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고인다. 나처럼 메마른 감정에도, 할머니의 고생은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좌우간 올해 한국 나이로 91세시니, 90세까지는 그래도 지팡이에 의지해서 아주 가끔씩 집밖으로 다녀오셨다. 나는 2017년 2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시베리아와 유럽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으셔서 마음이 안 좋다. 

2016년은 내가 석사 졸업을 했을 때였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집에서 종종 넘어지셨고, 나는 집에서 공부할 때마다 밖에서 들리는 지랄 맞은 소음과 할머니의 고생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정신적으로 약간 쇠약해졌다. 고마운 사람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매일 같이 본다는 것은 도무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사실 나보다는 동생이 더 고생이 많았다. 집밖에서 장장 1년에 걸쳐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옆 건물 소음은 나의 인생을 결정 지었다. 나는 결코 국가나 자본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현재 한국 대자본이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있다. 노동자의 착취에 기반 한 장학금을 받는 만큼, 더욱 열심히 해서 꼭 그들에게 되돌려 줄 수 있도록 하겠다. 또한 나는 결코 지주가 되거나 지주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다. 공사장 소음을 들으며 나는 빌어먹을 영어 시험을 준비했고, 할머니는 그 소음 속에서 약간의 집안일을 하셨다. 그러다가 병원에 입원하시기도 하고. 나는 당시 기자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른 신문사에 연락도 해보고, 비서관인 친한 형의 도움을 받아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실로 없었다. 

석사 과정을 밟던 2013년부터 2015년, 그리고 복학하여 학부 과정을 밟던 2011년부터 2013년, 전부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때 할머니는 80대 후반이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밖에 잘 다니셨고 택시도 타고 먼 길을 행차하셨다. 나는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밖이란 언제나 할머니에게 위험한 요소로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 할머니께서 길을 건너시다가, 어떤 개같은 애새끼가 킥보드를 타다가 할머니에게 부딪혀 큰 사고를 당하신 적이 있다. 그 후론 거동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셨고, 밖에 나가시는 걸 나는 싫어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할머니를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나도 가난한 우리 집 사정에서 서울 안에 살면서 방이 3개이고(동생은 내가 군생활을 하던 2009-11년, 러시아 연수를 갔던 2017년 2월 말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 방이 생긴 셈이었고, 그전까지는 항상 할머니랑 같은 방을 썼다) 2층집이 아닌 곳을 찾기란 어려웠다. 아, 정말 괴로운 기억들이다.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었을 때, 할머니는 그 이후보다는 조금 더 활동 폭이 넓으셨다. 70대 후반과 80대 초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항상 학교에서, 독서실에서 새벽 1시, 2시가 넘어 돌아올 때면 거의 대부분 주무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맞아 주셨다.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아침과 저녁 식사를 거의 매일 챙겨주셨고, 방학 때면 삼시 세 끼를 전부 해주셨다. 물론 중간에 부모님과 외식을 한 적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외식, 1년에 두세 번 있을 법한 외식조차 싫었는데, 부모님은 내게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 외엔 도무지 격려도, 칭찬도 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기엔 너무나 많인 시간들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2005년, 서대문구로 이사온 뒤 두 번째로 이사간 집(백련시장 근처 문구점 건너편이 아닌 우체국 근처)에서 비로소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할머니와 썼고, 동생은 부모님과 썼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정말 가난 때문에 동생은 자기 방도 가질 수 없었고, 나 또한 학원이며 과외, 어학연수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나를 언제나 격려해 주셨다. 손자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길을 좇는지를 아셨을 리가 없다. 나도 잘 설명하지 않았는데, 사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도 언제나 할머니에게 잘 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가끔은 소리도 지르고(집안일을 그만 하라는 부탁이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 이틀 정도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도 이렇게 기록해 두지 않고서는 아득한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008년 초부터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없는 형편에서 과외는 정말,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과외를 제법 많이 한 편이었는데, 학생들의 실력은 대부분 높진 않았으나, 하나 같이 헬조선에 태어나 고생하는 이들 뿐이었다. 가끔은 정말 부잣집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라고 천성이 잘못되었겠는가? 다만 부잣집의 부모들, 졸부들이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하다보니 잘못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아이들 책임이겠는가? 전적으로 낳은 부모의 책임이고 제대로 키우지 못한 부모의 책임이다. 좌우간 그렇게 과외를 하면서 돈을 꽤 많이 모으게 되었다. 정말 가난하게 살다보니 그렇게 들어온 돈을 많이 간직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할머니께 자주 돈을 드렸다. 응당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 외엔 딱히 다른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군 복무할 때 주말에 집에 와서 자고 갈 때,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종종 내게 돈을 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돈 들어올 구석이 조금 있으셨다. 큰아버지께서 1970년대 말에 군 복무 하시다가 병사하셨기 때문이다. 보훈처에서 다달이 얼마간을 할머니께 드렸다. 물론 나는 이 돈이 전적으로 할머니를 위해 쓰이길 바랐으나, 부모님부터 해서 친지들은 이 돈의 존재를 맹수나 맹금처럼 알아채고 가로채가려고 했다. 나는 너무나 화가 났다. 그래서 할머니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도 아득한 저편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2014년 아이폰5를 산 뒤부터 집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길게 할 때면 가끔은 녹음기를 켜두고 할머니와의 대화를 기록했다. 어떤 자료로 쓰거나 그럴려던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했다. 녹음해 두고 여태껏 한 번도 다시 들은 적이 없다. 미래를 겨냥한(?) 질문, 예컨대 "할머니는 꿈이 뭐였어요?" "제일 바라는 게 뭐였어요?" 따위를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고통과 고생으로 가득한 자신의 인생에서 꿈이나 소망 같은 건 차마 바랄 수도 없었고, 다만 이제는 나와 동생이 잘 풀리는 것 하나만을 바란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욕쟁이다. 나나 동생도 헬조선에선 심심치 않게 욕을 많이 하는데, 얼마 전에 동생이 LA를 휴가차 방문하여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헬조선식 욕은 헬조선을 참으로 아는 우리들 같은 사람들끼리 할 때나 제맛이기 때문이다. 좌우간 우리의 욕은 할머니로부터 배운 바가 크다. 할머니 욕의 특징은 쌍시옷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인데, 의외로 변주가 다양하진 않다. 언젠가 나를 족보에 넣지 않겠다고 직계(?)/본가(?)에서 결정이 내려왔을 때, 할머니는 전화에다가 대고 시원하게 개쌍욕을 날리시면서 관계를 단절했다. 그런 욕, 아니, 그런 쿨함은 내가 할머니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생 뭐 있는가? 지르고 보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할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꼭 화장을 할 것"을 종종 부탁하셨다.

할머니는 혁명가다. 2017년 초, 내가 유학 지원을 마무리 짓고 러시아 연수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할머니는 단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제사며 차례를 전부 폐지했다. 내가 기억이 있을 어렸을 적부터 지낸 봉건 유습이 비로소 작년에서야 끊긴 것이다. 그것도 그 유습을 계속 지키던 할머니 당신이 이를 폭파시킨 것이어서 나는 참으로 기뻤다. 그 이후 우리 가족은 명절이면 모여서 이야기 나누지만, 누구하나 "너는 결혼 언제 하니?" "너는 얼마 버니?" 같은 미치광이 소리는 하지 않고, 다만 헬조선 살이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달랜다. 좋은 광경이고, 좋은 전통이다. 

할머니는 좌파다. 재미있게도 꼭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에 나가셔서 한 표를 행사하셨는데, 다리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가 된 2017년 이전까지는 항상 나나 동생에게 본인의 투표에 대해 여쭤보셨다. 언제나 우리는 "민주당" "노동당" "정의당" 등을 찍어야 우리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 드렸고, 이에 할머니는 단 한 차례의 반론이나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당신 세대가 결사옹위해 마지 않던 MB나 503에 대해서도 언제나 비판과 쌍욕으로 일관하셨는데, 이는 멀게는 박정희 독재 때부터 가깝게는 전두환 군부 독재 때까지 "인간백정"들의 지배 속에서 경제성장의 결실을 누리지 못한 한 의로운 식민지 조선 출신 여자의 기구한 삶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실천과 서사가 아닌가 싶다. 할머니는 지금도 반박정희 반전두환 반노태우 반김영삼 반이회창 반이명박 반박근혜 반홍준표 반김정은 반김정일 반김일성 반트럼프 반시진핑 반아베로 초지일관이시다. 이런 좌파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러한 할머니가 자랑스럽다.

할머니와 언젠가 어렸을 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의 어렸을 적 동무인 "시연"은 위안부 공출로 부산항까지 끌려 갔다가 "광복"을 맞아 거기에 눌러 살았단다. 90년대까지 어찌어찌하여 연락을 하다가 먼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에 관해 할머니는 별다른 기억이 없으셨지만, 위안부 공출을 피해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혼인을 약조하셨다고 기억하고 계셨고, 그것이 바로 지랄 맞은 우家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고 하셨다. 1945년 12월 시집을 가셨고, 정말 고생을 이로 말할 수 없이 겪으셨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두 번 피난을 가셨고, 1960년대인가 70년대에 충청도에서 경기북부로, 이후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되신 모양이다.

할머니와의 이별이라는 모티프는 내 인생에 세 번 정도 기억되는데, 한 번은 2009년 5월 11일 논산 가기 전에, 한 번은 2017년 2월 러시아 연수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2017년 9월 15일 미국 유학 오기 전이다. 논산 가던 날에는 할머니도 나도 크게 울었고, 2017년에는 할머니만 우셨다. 더 이상 내겐 울고 싶은 감정도 없었고, 우는 건 사치로 느껴졌다. 당연히 할머니는 서운하셨으리라. 하지만 이후로 나는 동생이 고생을 해주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꾸준히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3월 19일에 한국에 잠시 가는데, 이는 할머니를 뵙기 위함이지 다른 용무는 결코 없다. 헬조선은 정말이지 가지 않을수록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또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할머니와의 추억은 실로 많지만, 이는 생활 속에서 항상 같은 공간(좁아터진 집구석)에서, 같은 길가에서 조심스레 천천히 걸으며 나지막하게 나눈 대화와 같은 것이어서 특정하고 강렬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추억은 내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우선 오늘은 이 정도로 쓰고, 나중에 생각이 더 나는대로 덧붙이도록 하겠다. 아래 사진은 2017년 9월 14일, 출국 하루 전에 할머니와 동생과 같이 찍은 사진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두 사람이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4월 7일 - UCLA 205일차  (0) 2018.04.07
2018년 4월 1일 - UCLA 199일차  (0) 2018.04.01
잊기 전에 - 할머니  (4) 2018.03.05
2018년 3월 5일 - UCLA 172일차  (0) 2018.03.05
니혼고 사쿠분  (0) 2018.03.05
2018년 2월 15일 - UCLA 154일차  (0) 2018.02.15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댓글입니다

    2018.03.07 20:19 [ ADDR : EDIT/ DEL : REPLY ]
  2. 비밀댓글입니다

    2018.04.09 03:14 [ ADDR : EDIT/ DEL : REPLY ]
    • 감사합니다! 요새 논문 주제를 뭘로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조만간 지혜를 빌려 주시길 바랍니다. 건강히 지내십시오.

      2018.04.09 11:26 신고 [ ADDR : EDIT/ DEL ]

현실은 생각보다 참담했다. 유학을 나와도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더 확실해 진다. 이번 꼭지에서는 바로 그러한 참담함의 일면과 그에 대처하는 우리 문돌이들의 준비에 관해 적는다.


1. 참담함

오늘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기친구들과 유럽에서 공부하는 친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처한 현실은 참담했는데, 문사철 가운데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모어가 아닌 외국어로 학문을 하기 때문에, 갑절의 노력을 기울인다 하더라도 우리에겐 외국어를 모어로 쓰는 화자들에게 도무지 상대가 안 된다. 더군다나 어찌어찌 하여 학위를 취득한다 하더라도 선진 서방세계에서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백인 연구자들에게도 정년이 보장되는 직위(tenured position)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 마당에 비백인 연구자에게 그런 자리가 돌아올 확률은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돈이 주어지는 4~5년 동안이 그나마 마음껏 선진 서방세계의 (제국주의를 통해 일궈 놓은) 연구 토대와 자원을 쓸 수 있는 기간이다. 이후에는 그 누구도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2. 준비

그렇다고 공부로 탈조선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나와서 조금이나마 '잘' 하기 위해서는, 서방 세계의 연구자들를 조금이나마 따라 잡으려면 준비가 필요하고, 그 준비는 가급적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 무엇이 있을까?

a. 영어: 영어의 중요성은 사람의 숨과 같다. 숨을 안 쉬면 어떻게 되는가?

b. 외국어: 다양한 외국어보다는 본인 연구에 정말 필요한 외국어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c. 검색 능력: 검색하고 또 검색하라. 그렇게 해서 연구사 정리의 외연을 넓혀 나가는 수밖에 없다.

d. 방법론적 쇄신: 위의 c와도 연관이 되는 것이지만, 본인 필드의 최신 방법론과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쇄신을 거듭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상투어뿐이다.

e. 인간 관계: 문돌이들의 필드는 대개 좁게 마련이다. 인간 관계를 잘 다져 놓을 필요가 있다. 좀 더 정확히는 척을 질 필요가 없다. 본인 연구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 말이다.


3. 그래도

위의 길이 어렵다고 느껴질 경우, 가장 좋은 대안은 문돌이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포기라는 말의 어감이 좋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문돌이의 길은 노력에 비해 성과가 극히 미미하게 주어진다. 그러한 미래를 감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전진하시라. 그렇지 않다면? 조금이라도 더 빠른 결정을 내려 이공계로 틀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의 탈조선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조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도무지 할 수 있는 바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도 진정으로 열심히 전진하는 연구자가 있다. 허나 이 글은 그런 특수한 사례의 연구자보다는, 공부로 탈조선을 꿈 꾸는 凡人, 즉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썼다.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각2018. 1. 7. 10:13

계속 나아가고 있다.

주제를 좁히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대주제 안에서, 북한과 소련의 교류라는 중간적 주제를 설정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무엇을 배우려고 했던 것일까? 소련은 북한의 요구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렇게 소련으로부터 배운 지식/기술technology은 북한의 통치governance와 외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 주제들에 내 글들이 국한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대개는 이 주제들의 그물에 걸릴 것 같다.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결과물들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좁게 주제를 선정하고 파원을 넓혀 나갈 필요가 있다. 동시에 다양한 서사의 목록repertoire을 늘리기 위해 좋은 글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그러니 좋은 책 위주로 골라 읽을 필요가 있다.

다음주부터 개강인 새 쿼터에는 과학사, 중국어, 일본어, 자율 세미나를 수강한다. 지난 쿼터에도 열심히 했지만, 새 쿼터에는 조금 더 기운을 내도록 할 작정이다. 특히 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딴짓을 줄여야 한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종문제  (0) 2018.01.14
전진의 존재론  (0) 2018.01.08
2018년 1월 7일 - UCLA 115일차  (0) 2018.01.07
노인의 믿음에 관하여  (0) 2018.01.05
2017년을 보내며  (0) 2017.12.31
2017년 12월 9일 - UCLA 86일차  (0) 2017.12.09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말이 필요 없다.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해외로 나와야 하고, 아직까지는 연구 기본여건(infrastructure)과 생활비(stipend)를 가장 많이, 풍부하게 지급하는 미국으로 나와야 한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전망이 거의 닫혀 버린 오늘날의 세계에서, 공부로 탈조선은 신분상승보다는 좋은 연구에 전적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이 역사적 무게추는 계속 흔들릴 텐데, 언젠가는 좋은 연구에서 다른 지향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연구를 위해서는 탈조선이 필요하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영어, 영어를 잘 해야 한다. 정말 중요하다.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쓰기가 제일 중요하지만, 말하기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결국 표현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영어를 정말 잘 해야 한다.

그밖의 것들은 부차적이다. 영어 글쓰기와 말하기를 단련하고 또 단련해야 한다.

이는 영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리고 영어를 쉽게 익힐 수 없는 비서구나 비구영어권식민지 사람들에게, 우리들에게 적잖이 큰 짐으로 다가온다. 어쩔 수 없다. 영어를 잘 하든지, 아니면 불평등결합발전의 세계에서 영원한 밑바닥을 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구가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연구에 바치지 못할 바에야, 또는 그런 각오가 없다면 애초에 공부로 탈조선은 형용모순이다. 다른 방식의 탈조선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침에 책 읽다가 수업 갔다가 지금껏 책 읽으면서 하나도 졸리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고 즐겁다. 정말 오길 잘했다. 한/미 대학원 생활-북한사 연구-비교. 지극히 주관적이니 감안하시고 보세요.


1. 재정: 미국에선 돈을 준다. 한국에선 돈을 낸다. 이는 어떤 생각들을 반영할 텐데, 전자는 "(아무리 문송해도) 학자는 키운다"이겠고, 후자는 "네 선택이니 네가 책임지려므나"겠다. 직업적 전망의 열악함을 들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건 전세계적 현상 아닌가.

2. 자료: 미국에선 그나마 맘껏 볼 수 있다. 한국에선 언제든 국가보안법 위반의 멍에를 지고 본다. 물론 자료는 여기보다 한국에 더 많이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보기가 영 까다롭고 귀찮고 위험하다.

3. 수업: 책 많이 읽는다. 예전에 한 대학원 수업에서 한 학기에 걸쳐 읽은 분량을 여기서 일주일만에 읽었다. 영어가 진리의 언어는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많이 읽는다. 지금도 읽고 있다.

4. 토론: 수업 내외로 토론을 많이 한다. 논의 수준이 항상 높다고만 할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고 발언권이 있어서 좋고 윽박지르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좋다. "정통" 해석은 종교기관이나 신학교에 있는 걸로 족하다.

5. 동학: 아무래도 북한사는 미국에서 비주류인 한국사보다 더 비주류인만큼 같은 공부를 하는 선생님을 찾기 어렵다. 허나 집중도 측면에서는 전미에서 우클라만한 데가 없다고 자부한다.

6. 이론: 방법론/접근/이론/시각 등 뭐라고 해도 좋다. 다양성과 참신성을 보장하기 위해 전반적으로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이론의 다양함이 자료의 빈약함을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두뇌를 더 주름지게 할 수 있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7. 생활: 집 떠나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강추. 밥도 밥솥과 햇반이 다 해결해 주니 반찬만 조금 확보하면 된다. 나성 날씨는 허구헌 날 맑고 좋다. 사시일철 선크림이 필요한 게 유일한 단점이다. 아, 운전을 못하면 조금 힘들다. 특히 정착 초기에는 그렇고, 가구를 마련해야 하면 더욱 그렇다. 아시안이 많고 인종구성이 다양한 만큼 차별을 대놓고 느끼진 못했다. 일전의 테러처럼 총기 규제가 여전히 안 되는 측면이 있고 이는 분명 문제적이지만, 내가 뭘 어떻게 나서서 할 수도 없거니와 한국에서도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종종 발생하는 걸 생각하면그저 내 할 일에 집중해야겠다.

8. 추행: 한국 대학원에서의 추행과 갑질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선 적어도 노력봉사 같은 건 없고, 학내 권력자가 자행하는 성범죄에 엄정하다. 물론 여기도 학생-교수 간 갈등이 샷건 난사로 이어지는 일이 가끔 있다. 자살자도 더러 있다.

그밖에도 많은 얘기가 남아있지만 우선 마저 하던 독서를 계속 해야 한다. 오직 전진뿐.


fb에 2017년 10월 10일(미국시각) 게재.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2017. 9. 25. 19:17

실제로 절약했으면 아무말 안 하지(참고 기사). 무슨 랩배틀 하고 있는 줄.


김병국이 아뢰기를, “경비가 이처럼 부족하니, 지금의 급한 일은 절약해서 쓰는 것이 제일입니다.” (炳國曰, 經費若是艱窘, 目下急務, 莫如節用矣。)

상이 이르기를, “과연 절약하고자 하니, 유사(有司)들도 항상 절약해서 써야 한다.” (上曰, 果欲節省, 而有司之臣, 亦當隨處節用也。)

김병국이 아뢰기를, “위에서 절약해서 쓰시면 재부(財賦)를 맡은 신하 역시 절약해 쓰는 가운데서 더욱 절약할 것이니, 재물을 여유 있게 하는 방도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炳國曰, 自上節用, 則財賦之臣, 節用之中, 尤當節用, 裕財之道, 莫過於此矣。)


출처: 승정원일기 고종 12년(1875) 10월 25일자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각2017. 9. 14. 08:13

 9월 13일 수요일은 아침에 홍대입구역 애플민트치과에 가서 치료를 마저 받고, 걸어서 서대문우체국에 들러 카카오뱅크 카드를 수령한 후에 다시 걸어서 신한은행 신촌점에 가서 미화 환전을 했다. 이후 유플렉스 앞 잠망경에서 기다리다가 고1과 고3때 같은 반 친구였던 L을 만나 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도무지 9월의 볕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빛이 내리쬐는 낮이었다. 어떤 아줌마가 유인물을 건네 주었다. 받아 읽어 보았더니 큰 글씨로 "동성 결혼 합법 반대"라고 써져 있었다. 난 유인물을 그대로 건네 주었다. 그 아줌마는 멀어져 가는 내게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라고 소리 쳤다. 이후 조선의 육개장이라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내가 샀다.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마셨고, 2호선을 타고 이동했다. 그는 신도림에서 내렸고, 나는 사당에서 내려 조금 기다리다가 학교 선배들을 만났다. 곧이어 존경하는 P형님이 오셔서 우리는 막걸리집으로 이동했다. 형님이 내게 자료를 주셨다. 이후 우리는 이래저래 마시다가 파했다. 형님과 나는 4호선을 타고 북상했다. 형은 이수역에서 7호선으로 갈아 타셨고, 나는 서울역에서 내려 9-1번 출구로 나가 7016을 탔다. 하림각에서 내려 상명대 쪽으로 서서히 걸었다. 소대에 도착하니 동생이 친구로 보이는 한 학생과 편의점에 다녀오는 것이 아닌가. 인사를 나눈 후에 과 후배인 K와 전화 통화를 했다. 동생과 잠시 걸었고, 110을 타고 동신병원 앞에서 내려 걸어왔다. 

 9월 14일 목요일은 피곤해서 9시 넘어서 일어났다. 소포를 부칠 상자를 점검했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편의점에 가서 과자를 사먹었다. 편의점 가는 길에 어떤 할머니가 유인물을 건네 줬다. 안 받고 조용히 지나쳤다. 멀어져 가는 내게 그녀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소리 쳤다. 이후 준비하여 이동해 홍대입구역에서 10년지기 K를 만나 홍대돈부리 홍대본점으로 이동했다. 식사를 샀다. 이후 커피와 사람들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역에서 그와 헤어졌다. 바로 치과로 이동하여 치료를 마무리 짓고 그 길로 7612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맞춰 요양병원으로 걸어 갔다. 곧 동생이 도착했고, 우리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는 벌써부터 울기 시작하셨다. 우는 할머니를 조금 달래 드리고 나왔다. 동생은 할머니의 감수성이 풍부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감수성이라고 불릴 만한 감정을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조선땅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집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예전에 살던 남가좌2동의 한 갈비집으로 이동하여 식사를 했다. 부모님은 먼저 가시고, 우리는 걸어가면서 만물상과 약국에 들렀다가 베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이니스프리에 들려 필요한 화장품을 조금 산 뒤 귀가했다. 이후 다시 산책을 나갔다.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왕돈가스 왕냉면집을 지나쳐 죽 내려 가서 가재동상을 끼고 다리를 건넜다. 고개 위로 올라가서 과거 아파트가 있던 공원길을 지나 연희1동으로 굽이굽이 내려갔다. 콜드 레시피 앞까지 가서 우회전하여 성산회관쪽으로 나와 우리가 서대문구 처음 이사왔을 때의 집 쪽을 지나 사천교를 건넜다. 버거킹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계속 길을 따라 걸었고, 중간에 어떤 냄저(냄새나는 개저씨)가 아파트 경비원께 쌍욕을 하는 걸 들으면서 역시 이 조선땅의 기백은 변하지 않겠구나, 를 절감했다. 이후 현대아파트 뒤쪽으로 하여 걸었고, 동생과의 당분간 마지막 동네 산책을 마쳤다. 

 이제 내일 아침에는 우체국 박스 5호짜리 4개를 아버지 차에 싣고 우체국으로 가서 부쳐야 한다. 캘리포니아까지 이 박스들이 무사히 오길 바란다. 이후에는 연신내로 이동하여 휴대폰을 정지할 계획이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동생과 함께 병원에 가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오후 4시 반 경에 아버지 차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할 것이다. 체크인을 하고 가족에게 작별을 고한 뒤 검색대를 지나 게이트로 가겠지. 선배이자 친구인 K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정말로 내 인생의 다음 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고들 한다. 나는 이러한 묘사 자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상 사람의 인생은, 자본가나 대부호를 제외하면, 대개 거기서 거기이다. 개미가 무리를 지어 살며 여왕을 모시듯, 우리도 무리를 지어 살며 아옹다옹하기도 하고 서로 돕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헬조선의 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10대와 20대를 무기력하게 보냈다. 물론 공부가 적성에 맞아 잘 할 수 있었기에 탈조선을 하는 데는 성공했다. 허나 아주 기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서방선진세계에 태어났더라면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됐을 감정을 느낀다는 점에서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제 그곳에서는 그곳 나름의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총 안 맞도록 조심하는 한편, 미국에서 한국학도로서 할 수 있는 바를 해야겠다. 다만 40대에 접어 들어 나의 30대를 회고할 때, 후회가 든다거나 무기력하게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중장기적인 계획을 잘 세우는 한편, 하루하루를 알차고 소중하게 보내야겠다고도 생각한다. 젊음이 너무나 짧다. 세상 사람들은 전쟁과 기아,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반주변부 역사학도는 이러한 세상을 바꾸기엔 턱없이 역부족이다. 그러기에 당이 필요하다. 무리를 지어야 한다. 연대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점점 감을 잡아가고 있다. 이제 비행기 이륙까지 20시간 남았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년 9월 15일 - UCLA 1일차  (0) 2017.09.16
내 이름은 빨강  (0) 2017.09.14
2017년 9월 14일 - 출국 전날 묘사  (0) 2017.09.14
2017년 9월 12일 - 글의 무용함에 관해  (2) 2017.09.11
2017년 9월 3일  (0) 2017.09.03
2017년 8월 26일  (0) 2017.08.26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