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12.22 2018년 12월 22일 - UCLA 464일차
  2. 2018.12.01 할머니
  3. 2018.10.25 2018년 10월 25일 - UCLA 406일차
  4. 2018.03.05 잊기 전에 - 할머니 (4)
생각2018. 12. 22. 21:00


Posted by 사용자 Л
TAG 할머니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弔意2018. 12. 1. 09:18

2008년 겨울인가 학교에서 무슨 이벤트를 벌여서 할머니랑 찍은 사진을 보냈더니 저런 편지가 날라왔다. 편지 원본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진을 찍어두길 잘했다.

Posted by 사용자 Л
TAG 할머니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각2018. 10. 25. 08:12

아침에 일어났는데 동생이 영상통화를 하자고 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봤다.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와서 보니 그는 울고 있었다. 방금 일어난 터였지만 슬펐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은 아주 평온해 보이진 않았다. 듣지는 못하시겠지만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편히 쉬실 수 있을 것이다. 통화를 마치고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난 3년 간 고생한 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1월 초에는 동생과 함께 할머니를 뵈러 갈 것이다. 자신이 돌아가면 언제나 화장을 하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 난다. 그간 함께 만든 많은 기억, 사랑과 아픔을 마음 속에 간직할 것이다. 

배화숙 (1928-2018). 향년 90.




사진은 각각 2018년 3월 27일과 7월 30일에 찍었음.

Posted by 사용자 Л
TAG 할머니

댓글을 달아 주세요

생각2018. 3. 5. 21:55

사람은 한 번 죽는다. 오래 살 수도 없다. 죽기 전에 무언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짧은 인생에서 기억은 쉽게 왜곡되고 기록은 잘 남지 않는다.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얻은 영향도 있지만, 살면서 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을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잊기 전에 기록해 두어야 하고, 역사를 바라볼 때도 이러한 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록이 항상 진실은 아니고, 기억이 항상 사실만도 아니라는 점을.

내가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은 할머니다. 두 번째는 부모님인데, 사실 고마워해야 한다는 생각은 무척 희미하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가난하게 살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내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망도 많이 했고, 충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다른 누구보다 가까워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동생이다. 어쩌다 한 번 죽는 인생을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남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한 10대를 보내야 했는가. 하지만 20대부터 시운과 본인의 노력이 맞물려 제법 잘 하고 있다. 올바르게 자라고 있어서 고맙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할머니는 2018년 3월 5일(PST) 현재 은평구의 한국효요양병원에 누워 계시다. 2017년 6월께 집에서 넘어지시면서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리를 다치신 이후 여태껏 병원에 계셨다. 그전까지는 구순의 노구를 이끌고, 가끔 밖에 나가실 적에 손자들의 도움을 받아 차디찬 벽돌 건물 2층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셨다. 그 움직임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고인다. 나처럼 메마른 감정에도, 할머니의 고생은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좌우간 올해 한국 나이로 91세시니, 90세까지는 그래도 지팡이에 의지해서 아주 가끔씩 집밖으로 다녀오셨다. 나는 2017년 2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시베리아와 유럽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으셔서 마음이 안 좋다. 

2016년은 내가 석사 졸업을 했을 때였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집에서 종종 넘어지셨고, 나는 집에서 공부할 때마다 밖에서 들리는 지랄 맞은 소음과 할머니의 고생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정신적으로 약간 쇠약해졌다. 고마운 사람이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매일 같이 본다는 것은 도무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사실 나보다는 동생이 더 고생이 많았다. 집밖에서 장장 1년에 걸쳐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옆 건물 소음은 나의 인생을 결정 지었다. 나는 결코 국가나 자본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현재 한국 대자본이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있다. 노동자의 착취에 기반 한 장학금을 받는 만큼, 더욱 열심히 해서 꼭 그들에게 되돌려 줄 수 있도록 하겠다. 또한 나는 결코 지주가 되거나 지주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다. 공사장 소음을 들으며 나는 빌어먹을 영어 시험을 준비했고, 할머니는 그 소음 속에서 약간의 집안일을 하셨다. 그러다가 병원에 입원하시기도 하고. 나는 당시 기자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른 신문사에 연락도 해보고, 비서관인 친한 형의 도움을 받아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실로 없었다. 

석사 과정을 밟던 2013년부터 2015년, 그리고 복학하여 학부 과정을 밟던 2011년부터 2013년, 전부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때 할머니는 80대 후반이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밖에 잘 다니셨고 택시도 타고 먼 길을 행차하셨다. 나는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밖이란 언제나 할머니에게 위험한 요소로 가득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 할머니께서 길을 건너시다가, 어떤 개같은 애새끼가 킥보드를 타다가 할머니에게 부딪혀 큰 사고를 당하신 적이 있다. 그 후론 거동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셨고, 밖에 나가시는 걸 나는 싫어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할머니를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나도 가난한 우리 집 사정에서 서울 안에 살면서 방이 3개이고(동생은 내가 군생활을 하던 2009-11년, 러시아 연수를 갔던 2017년 2월 말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 방이 생긴 셈이었고, 그전까지는 항상 할머니랑 같은 방을 썼다) 2층집이 아닌 곳을 찾기란 어려웠다. 아, 정말 괴로운 기억들이다.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었을 때, 할머니는 그 이후보다는 조금 더 활동 폭이 넓으셨다. 70대 후반과 80대 초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가 항상 학교에서, 독서실에서 새벽 1시, 2시가 넘어 돌아올 때면 거의 대부분 주무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맞아 주셨다.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아침과 저녁 식사를 거의 매일 챙겨주셨고, 방학 때면 삼시 세 끼를 전부 해주셨다. 물론 중간에 부모님과 외식을 한 적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외식, 1년에 두세 번 있을 법한 외식조차 싫었는데, 부모님은 내게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 외엔 도무지 격려도, 칭찬도 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기엔 너무나 많인 시간들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2005년, 서대문구로 이사온 뒤 두 번째로 이사간 집(백련시장 근처 문구점 건너편이 아닌 우체국 근처)에서 비로소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할머니와 썼고, 동생은 부모님과 썼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정말 가난 때문에 동생은 자기 방도 가질 수 없었고, 나 또한 학원이며 과외, 어학연수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나를 언제나 격려해 주셨다. 손자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길을 좇는지를 아셨을 리가 없다. 나도 잘 설명하지 않았는데, 사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도 언제나 할머니에게 잘 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가끔은 소리도 지르고(집안일을 그만 하라는 부탁이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 이틀 정도 사이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일도 이렇게 기록해 두지 않고서는 아득한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008년 초부터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없는 형편에서 과외는 정말,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과외를 제법 많이 한 편이었는데, 학생들의 실력은 대부분 높진 않았으나, 하나 같이 헬조선에 태어나 고생하는 이들 뿐이었다. 가끔은 정말 부잣집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라고 천성이 잘못되었겠는가? 다만 부잣집의 부모들, 졸부들이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하다보니 잘못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아이들 책임이겠는가? 전적으로 낳은 부모의 책임이고 제대로 키우지 못한 부모의 책임이다. 좌우간 그렇게 과외를 하면서 돈을 꽤 많이 모으게 되었다. 정말 가난하게 살다보니 그렇게 들어온 돈을 많이 간직하고자 했다. 한편으로 할머니께 자주 돈을 드렸다. 응당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 외엔 딱히 다른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군 복무할 때 주말에 집에 와서 자고 갈 때,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종종 내게 돈을 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돈 들어올 구석이 조금 있으셨다. 큰아버지께서 1970년대 말에 군 복무 하시다가 병사하셨기 때문이다. 보훈처에서 다달이 얼마간을 할머니께 드렸다. 물론 나는 이 돈이 전적으로 할머니를 위해 쓰이길 바랐으나, 부모님부터 해서 친지들은 이 돈의 존재를 맹수나 맹금처럼 알아채고 가로채가려고 했다. 나는 너무나 화가 났다. 그래서 할머니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도 아득한 저편의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2014년 아이폰5를 산 뒤부터 집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길게 할 때면 가끔은 녹음기를 켜두고 할머니와의 대화를 기록했다. 어떤 자료로 쓰거나 그럴려던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했다. 녹음해 두고 여태껏 한 번도 다시 들은 적이 없다. 미래를 겨냥한(?) 질문, 예컨대 "할머니는 꿈이 뭐였어요?" "제일 바라는 게 뭐였어요?" 따위를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고통과 고생으로 가득한 자신의 인생에서 꿈이나 소망 같은 건 차마 바랄 수도 없었고, 다만 이제는 나와 동생이 잘 풀리는 것 하나만을 바란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욕쟁이다. 나나 동생도 헬조선에선 심심치 않게 욕을 많이 하는데, 얼마 전에 동생이 LA를 휴가차 방문하여 어찌나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헬조선식 욕은 헬조선을 참으로 아는 우리들 같은 사람들끼리 할 때나 제맛이기 때문이다. 좌우간 우리의 욕은 할머니로부터 배운 바가 크다. 할머니 욕의 특징은 쌍시옷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인데, 의외로 변주가 다양하진 않다. 언젠가 나를 족보에 넣지 않겠다고 직계(?)/본가(?)에서 결정이 내려왔을 때, 할머니는 전화에다가 대고 시원하게 개쌍욕을 날리시면서 관계를 단절했다. 그런 욕, 아니, 그런 쿨함은 내가 할머니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생 뭐 있는가? 지르고 보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할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꼭 화장을 할 것"을 종종 부탁하셨다.

할머니는 혁명가다. 2017년 초, 내가 유학 지원을 마무리 짓고 러시아 연수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할머니는 단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제사며 차례를 전부 폐지했다. 내가 기억이 있을 어렸을 적부터 지낸 봉건 유습이 비로소 작년에서야 끊긴 것이다. 그것도 그 유습을 계속 지키던 할머니 당신이 이를 폭파시킨 것이어서 나는 참으로 기뻤다. 그 이후 우리 가족은 명절이면 모여서 이야기 나누지만, 누구하나 "너는 결혼 언제 하니?" "너는 얼마 버니?" 같은 미치광이 소리는 하지 않고, 다만 헬조선 살이의 아픔을 약간이나마 달랜다. 좋은 광경이고, 좋은 전통이다. 

할머니는 좌파다. 재미있게도 꼭 대선이든 총선이든 선거에 나가셔서 한 표를 행사하셨는데, 다리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가 된 2017년 이전까지는 항상 나나 동생에게 본인의 투표에 대해 여쭤보셨다. 언제나 우리는 "민주당" "노동당" "정의당" 등을 찍어야 우리가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씀 드렸고, 이에 할머니는 단 한 차례의 반론이나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당신 세대가 결사옹위해 마지 않던 MB나 503에 대해서도 언제나 비판과 쌍욕으로 일관하셨는데, 이는 멀게는 박정희 독재 때부터 가깝게는 전두환 군부 독재 때까지 "인간백정"들의 지배 속에서 경제성장의 결실을 누리지 못한 한 의로운 식민지 조선 출신 여자의 기구한 삶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실천과 서사가 아닌가 싶다. 할머니는 지금도 반박정희 반전두환 반노태우 반김영삼 반이회창 반이명박 반박근혜 반홍준표 반김정은 반김정일 반김일성 반트럼프 반시진핑 반아베로 초지일관이시다. 이런 좌파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러한 할머니가 자랑스럽다.

할머니와 언젠가 어렸을 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의 어렸을 적 동무인 "시연"은 위안부 공출로 부산항까지 끌려 갔다가 "광복"을 맞아 거기에 눌러 살았단다. 90년대까지 어찌어찌하여 연락을 하다가 먼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에 관해 할머니는 별다른 기억이 없으셨지만, 위안부 공출을 피해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혼인을 약조하셨다고 기억하고 계셨고, 그것이 바로 지랄 맞은 우家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고 하셨다. 1945년 12월 시집을 가셨고, 정말 고생을 이로 말할 수 없이 겪으셨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두 번 피난을 가셨고, 1960년대인가 70년대에 충청도에서 경기북부로, 이후 서울에 자리를 잡게 되신 모양이다.

할머니와의 이별이라는 모티프는 내 인생에 세 번 정도 기억되는데, 한 번은 2009년 5월 11일 논산 가기 전에, 한 번은 2017년 2월 러시아 연수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2017년 9월 15일 미국 유학 오기 전이다. 논산 가던 날에는 할머니도 나도 크게 울었고, 2017년에는 할머니만 우셨다. 더 이상 내겐 울고 싶은 감정도 없었고, 우는 건 사치로 느껴졌다. 당연히 할머니는 서운하셨으리라. 하지만 이후로 나는 동생이 고생을 해주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꾸준히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3월 19일에 한국에 잠시 가는데, 이는 할머니를 뵙기 위함이지 다른 용무는 결코 없다. 헬조선은 정말이지 가지 않을수록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또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할머니와의 추억은 실로 많지만, 이는 생활 속에서 항상 같은 공간(좁아터진 집구석)에서, 같은 길가에서 조심스레 천천히 걸으며 나지막하게 나눈 대화와 같은 것이어서 특정하고 강렬한 사건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추억은 내 정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우선 오늘은 이 정도로 쓰고, 나중에 생각이 더 나는대로 덧붙이도록 하겠다. 아래 사진은 2017년 9월 14일, 출국 하루 전에 할머니와 동생과 같이 찍은 사진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두 사람이다.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8년 4월 7일 - UCLA 205일차  (0) 2018.04.07
2018년 4월 1일 - UCLA 199일차  (0) 2018.04.01
잊기 전에 - 할머니  (4) 2018.03.05
2018년 3월 5일 - UCLA 172일차  (0) 2018.03.05
니혼고 사쿠분  (0) 2018.03.05
2018년 2월 15일 - UCLA 154일차  (0) 2018.02.15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댓글입니다

    2018.03.07 20:19 [ ADDR : EDIT/ DEL : REPLY ]
  2. 비밀댓글입니다

    2018.04.09 03:14 [ ADDR : EDIT/ DEL : REPLY ]
    • 감사합니다! 요새 논문 주제를 뭘로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조만간 지혜를 빌려 주시길 바랍니다. 건강히 지내십시오.

      2018.04.09 11:26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