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현대한국2015. 3. 2. 23:33

이 책은 저자(木宮正史, 1960~)의 고려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인 한국의 내포적 공업화전략의 좌절: 5·16군사정부의 국가 자율성의 구조적 한계(1991)를 개정·증보한 것이다. 저자는 일본 시즈오카(静岡)현 출신으로, 1983년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1993년에는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2년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3년부터 일본 대학에서 조교수·교수 생활을 거쳐 2015년 현재 도쿄대학 정보학환(情報学環)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개의 박사학위논문이 일련의 수정을 거쳐 단행본으로 나오는 한국학계의 관행과는 달리, 이 책은 원래 학위논문의 분량만큼이나 새로운 내용을 덧붙여 분석의 수준을 확장·심화하고자 한 듯하다. 책은 총 314장으로 구성돼있는데, 학위논문을 증보한 1부가 네 장, 새롭게 쓴 내용으로 구성된 2부가 일곱 장, 3부가 세 장이다. 1부는 한국정부가 수출지향형 공업화 정책을 택하게 되는 정치과정을 분석했고, 2부는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을 다뤘으며, 3부는 국제적 조건과 한국의 대응(“이용”)을 살폈다. 각 부는 시기적으로는 1961~63, 1964~67, 1965~66년을 다루었으며, 특히 마지막 3부는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의 전개과정 및 각 사건의 경과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식민지 경험을 겪은 나라 중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경제성장)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는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홉스봄의 표현을 빌려, ‘이중혁명의 과실을 쟁취한 현대 한국의 정치경제적 경험은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에게 고구(考究)의 대상이었다. 저자 또한 이러한 관심을 공유한 상태에서 경제성장의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1960년대를 살핀 것이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한국 정부 내지 한국 사회의 대응에 주목하여 이를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내려고 하였다. 저자는 한국의 대응을 구체적으로 한국 정부(사회)의 능동성한국 국가의 성격 문제라는 두 가지 매개를 통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행위자의 인식과정과 결정에 주목하는 구성주의적 시각을 분석의 기본방안으로 채택하였고, 미국 측 자료와 한국 측 자료를 이용 가능한 한 총동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자료 구사는 역사학 논문의 특징을 방불케 할 정도이다.[각주:1]

 

저자는 1부에서 상이한 시각으로 구성된 기존의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에 자신의 이론적 자원(구성주의)과 그 유효성을 내세우면서, ‘1960년대 한국의 경제정책 결정자들과 이를 둘러싼 구조적 조건의 정치적 역학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저자는 주요 행위자들을 일차적으로는 국적에 따라 나누었으나, 같은 국가 내에서도 대사관이나 군, 기획처 등 기관별로, 더불어 그러한 기관 내에서도 개개인을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저자는 박희범, 유원식 등 경제관료들의 사후적 인식과 면담 등을 토대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보완·수정되는 과정과 이 계획에 담긴 방향성을 보여주었는데, 이를 내포적 공업화 전략이라고 요약하였다.[각주:2] 하지만 이 계획은 이후 수정을 강요받게 되는데, 저자는 미국자료에 기초하여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입장 변화, 박정희의 방미(196111)를 둘러싼 한·미간의 입장차, 한국측의 선택폭을 제한한 미국의 압력 내지 간섭(종합제철공장 건설 계획의 백지화나 재정안정계획의 복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그 수정 과정을 보여주었다.

 

저자에 따르면, 초기 군사정부의 복안이었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좌절되었으나,[각주:3]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요인은 미국이라는 외부적 요인의 존재였다. 본문에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국의 존재는 한국의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압도적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경제적 안정의 달성이라는 대한원조정책의 기본 목표에 부합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한국측의 시도는 모조리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장기 경제계획의 필요성이나 한국정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모든 계획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정부의 과도한 개입기간산업 건설에서 국제수지 개선이라는 목표와 이를 위한 방법, 즉 수출지향형 공업화로 일정하게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2부는 잔여적선택지로서 선택된 수출지향형 공업화 정책의 결정과정에 초점을 맞춰 여섯 가지 주제(재정안정계획, 환율제도 개혁, 금리현실화, 수출진흥 정책, 외자도입법, 무역자유화)를 분석하였다. 이 부에서 저자는 신문(특히 동아일보, 회의록, 서한, 전신(電信), 면담 등의 자료를 기초로 하여 각 정책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를 서술했는데, 1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미국의 압력이 한국정부의 선택지를 줄여나가는 과정 내지 구도를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저자는 한국이 미국의 권고에 순진하게 복종만 하진 않았고, ‘자율성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쾌도난마와 같이 뚜렷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자료의 부족 속에서 재구성한 내용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곱씹어볼 만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3부는 한일수교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라는 두 사안을 두고 벌어진 한··일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구성주의적 접근의 효용을 강조하였고, 그에 따라 다양한 주체들의 세계인식 및 정책결정 과정, 거기서 발생한 정치경제적 효과 등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주의적 접근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고 있고, 이는 자료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예컨대, 주체 생각과 인식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는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자료가 보여주는 것 이상(예컨대 주체의 속내)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접근을 취해야하는가 등의 질문이나 문제가 곧바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다양한 주체들을 설정하고, 1차 자료를 통해 그러한 주체들의 인식과 생각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심층적인 분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표면적인 서술과 그에 따른 추론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통화개혁의 예를 들자면, 1962년 내자 동원을 위한 통화개혁의 추진 과정에서 1953년도 통화개혁의 실무진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저자는 성격이 분명히 다른 두 개혁의 상관관계나, 전자의 개혁이 실행된 이유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미국이라는 요소, 또는 그 힘의 성격과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이라는 실체는 주한미군이나 원조 등의 기제를 통해 일견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유솜의 예(201)에서 볼 수 있듯, 기관의 인사 변화에 따라 미국의 대한(원조)정책이 변화했다고 주장하는 등, 시기에 따른 미국 정책의 변화요인을 단순화시켜버린 바 있다. 미국의 정책을 분석할 때에는 미국의 대()세계정책부터 시작하여 아시아, 한국 순으로, 그리고 미국의 국내 상황과 한국의 국내 상황을 시야에 넣어 파악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1. 저자가 구사한 자료의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케네디대통령도서관, 존슨대통령도서관, 미국국립문서관(NARA), 미국정부 비밀해제문서 조회시스템(DDRS), 미국국제개발처(USAID) 도서관, 한국 외교사료관, 경제기획원 도서관, 한국 국가기록원 등. 이 글은 박태균, 「강요된 자율적 선택」, 『역사와 현실』 71, 2009도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의 수립 과정은 이전 계획을 답습하면서도 각 시점의 대내외 환경 및 입안자들의 논쟁을 반영하여 보완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시안)』(약칭 건설부안) → 『종합경제재건계획(안)』(약칭 최고회의안) → 『제1차 5개년경제개발계획』(약칭 경제기획원(EPB)안) [본문으로]
  3. 저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였다. ① 군사정부 내의 권력 기반의 취약성 및 불안정성, ② 민간 기업들의 미약한 지지, ③ 밑으로부터의 민족주의와의 결별, ④ 미국 정부의 거부권 발동, ⑤ 외자도입 다각화 기도의 한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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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1. 16. 21:33

 이 책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20권으로 읽는 20세기 韓國史라는 이름으로 기획된 역사 대중서 편찬 작업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2014년 현재, 서울특별시교육감으로 봉직하고 있는 사회학자 조희연(曺喜昖) 교수가 썼다. 아래서도 살펴보겠지만 저자는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겪어보았고여기에 정면으로 부딪혔다가 곤욕을 당한 일이 있다. 책머리에서 밝히고 있듯, 저자는 나름대로 유신독재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지만전체적인 시대상을 파악하는 일은 요원했고, 따라서 이 책에서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서 총체적인 시각에 입각하여 박정희 시대를 파악하겠다는 집필 의도를 밝혔다. 이 책은 사료에 근거하여 박정희 시대를 본격적으로 살핀 역사서라기보다는 기존에 제출된 서사(敍事)를 종합하여 재배치하고 오늘날에 다시 그것을 복합적으로”, 그리고 확장된 진보의 개념 속에서 다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평자의 말로 다시 풀어쓰자면, “진보적인 시각에 입각하여 복잡했던 박정희 시대의 다양한 역사상을 확인할 수 있는 가교를 마련하는 일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그 결과가 저자의 원래 의도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차분히 따져볼 일이다.

 

 저자는 1956년 전북 정읍에서 공무원 조일환(曺日煥)의 오남으로 태어났다.[각주:1] 중학교를 마친 후,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입학(1972)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사회학과, 1975)에서 수학하였다. 1978년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9호에 반대하는 유인물 배포 및 시위 가담의 명목으로 구속됐으며, 이듬해 815일 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박사학위를 취득(1983, 1992)했고, 1990년부터 성공회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다. 박원순을 비롯하여 1994년에 세워진 참여연대의 창립성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저자는 학계와 정계, 시민사회를 넘나들며 활약하면서, 민주주의·근대화·시민사회·사회운동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저서를 펴내기도 하였다.[각주:2]

 

 저자는 이 책에서 무엇을 어떻게 매개로 삼아 문제적인박정희 시대를 파악하고자 하였는가? 우선 저자는 박정희 시대를 다섯 시기로 나누었다. 저자의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1972년의 10월 유신이었고, 각각은 다시 5·16에서 민정이양까지(1961~63), 한일회담 반대를 둘러싸고(1964~67), 유신체제 이전까지(1968~72),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기 이전까지(1972~75) 10·26까지(1976~79)로 나뉘었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장의 본문은 위와 같은 저자의 시기 구분에 상응하는 나름의 서술이다. 이어 저자는 규범적 판단사실적 분석을 구분해야 하고, 그 중 전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저자는 오늘날 개개인의 신념을 넘어서 사실과 그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호소한 것이다.

 

 무력으로 헌법을 전복하고 권좌에 오른 박정희 개인과 그의 정권은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박정희 체제는 각 시기마다 내용은 다르지만 항상 대내외적 곤란에 맞닥뜨렸고, 이를 지양·극복하는 과정에서 체제는 실로 수많은 문제를 배태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박정희 체제의 문제점을 독재자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기보다는 그 체제를 움직였던 복잡한 동학(動學)을 구조적으로바라볼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저자는 그러한 복잡한 동학을 포착할 틀로써 개발동원체제(developmental mobilization regime)’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란 위로부터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며 아래의 동원을 이끌어내는 체제로서 사회에 대한 일종의 국가적 기동전체제라고 할만하다. 세계사에서 개발동원체제의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저자는 독일(비스마르크), 소련(스탈린), 북한, 중국, 대만(장제스) 등을 들며 사회를 군대식으로 조직화해서 성장효과를 극대화하고, 독재자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만든다.”고 설명하였다. 한편 이러한 설명이 얼마나 타당한지 의문이 든다. 물론 이 책이 개발동원체제를 하나의 사회과학적 전형(典型, model)으로서 탐구하려는 시도는 아니지만, 이 책에서는 방법론적 핵심에 대한 설명을 거의 제시하지 않았다.

 

 이론적인 한계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의 핵심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2공화국은 4·19의 사회정치적 요구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고, 이를 틈타 젊은 군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였다. 거사 직후 혁명위원회는 부정 해결, ()정치세력 일소, 사회 정화의 미명 하에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쿠데타세력은 경제기획원(1961.7.22.)을 발족시키고 이전 정권의 계획을 계승·변용하여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등 일찍부터 경제를 통제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4대 경제 의혹 사건등 조직적인 경제범죄가 터졌고, 쿠데타세력의 도덕성은 이내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아직 반대세력이 수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3공화국은 한··일 삼각을 강화하려는 미국의 지역전략에 따라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민정이양을 마친 쿠데타세력은 정력적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했고, “졸속·굴욕이라는 평가와 함께 사회적 반감은 고조됐다. 한편 한일회담 반대의 기치 하에 투쟁세력이 결속하고 쿠데타세력 가운데서도 이반(김재춘, 김홍일 등)이 나타났으나, 정부의 의도 관철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와 함께 1964~65년의 기간, “수출 증대가 국가의 핵심전략으로 설정됐고, 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에도 한국군이 파병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1968~72) 개발의 성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25개년계획 기간(67~71) 연평균 국민총생산 성장률은 10%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발전방식의 고유한 문제에다가 더해 군대식사회동원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월남에는 계속 젊은이들이 파병됐고, ·북간의 체제경쟁이 가속화됐다. 장기독재의 징후였던 3선개헌이 대중의 의사를 빌려 통과됐고, 발전과정의 핵심이면서 부산물 취급을 받은 노동·빈민 문제가 불거졌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은 상징적이었다. 일련의 완화책으로 복지제도가 운위됐으나 시행까지는 아직 10년이나 더 걸릴 터였고, 유신 직전 초법적인 8·3조치(1972)(시장)자유민주주의를 조롱거리로 전락시켰으며 동시에 독재자의 위력을 실감케 하였다. 1972년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 권한이 부여된 대통령을 허용하는 유신쿠데타가 벌어졌다. 이제 국회는 완전히 무력화됐으며, 대통령을 지상으로 하는 종신 독재체제가 형식상 완료됐다. 더불어 중화학공업화와 새마을운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에 대한 사회의 저항은 이전 시기보다 더욱 거세어졌으나, 그에 못지않게 통제와 진압 또한 가일층 악랄해졌다.[각주:3] 긴급조치 9호는 유신체제의 영구화를 기도하는 제도적인 장치였다.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이나 반대는 물론이려니와, 개정 주장이나 이를 보도하는 행위까지 일체 금지됐다. 한편 경제 집중 및 중복투자 등 일련의 문제와 석유파동이 만나 사회는 더욱 힘겨워했고, 드디어 민중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저자의 서술은 기존의 진보적인 시각의 흐름에서 그렇게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보인다. 이 책은 집필 의도완 달리 다양한 박정희보다는 독재자개인을 부각시켰다. 더하여 박정희 체제를 움직였던 복잡한 동학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했다기보다는 일련의 이야기와 통계를 배치하여 박정희 체제를 바라볼 수 있는 세부주제 각각에 대한 입문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19년이라는 긴 시기를 효과적으로 요약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닌다.

 

  1. 조일환, 조동환, 조희연 외, 『뜻밖의 개인사』, 새만화책, 2008. [본문으로]
  2. 대표적으로 박현채, 조희연, 『한국사회구성체논쟁』 1·2·3, 죽산, 1989·89·91; 조희연, 『동원된 근대화』, 후마니타스 2010; 조희연, 『병든 사회, 아픈 교육』, 한울, 2014 등을 들 수 있다. [본문으로]
  3. “1960년대까지는 빨갱이세력이 배후에 존재한다는 식이었던 반면, 1970년대에 들어서는 정권에 대한 저항 자체를 빨갱이와 동일시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7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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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9. 1. 16:32

* 2014년 3월 4일 작성.

 

필자: 블라디미르 이셴코(Volodymyr Ishchenko)

일시: 2014년 2월 28일(GMT 1532)

출처: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4/feb/28/ukraine-genuine-revolution-tackle-corruption

사진: 지난 금요일, 친러 코사크인들이 크리미아 공화국 의회건물 바깥의 전쟁기념물 근처에 모여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관해 흔히 두 가지 수식이 뒤따른다. 하나는 이것이 민주혁명, 심지어 사회혁명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우익쿠데타, 심지어 네오나찌의 쿠데타라는 것이다. 사실 앞서의 두 성격규정은 모두 틀렸다. 다만 지금껏 우리가 목격한 것은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부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나 동부와 남부 지역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대중봉기이며, 그 결과 정치 엘리트세력 간의 교체는 이뤄졌다. 그러나, 최소한 현정권 밑에서 민주적이고 급진적인 변화의 전망은 굳게 닫혀있다.


 우크라이나의 현 '혁명'이 왜 사회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가? 마이단(Майдан; 광장) 운동이 주장한 몇몇 요구는 관철됐다. 일례로, 사망한 시위대 중 대다수를 죽인 악명높은 베르쿠트(Бе́ркут) 전투경찰대는 해체됐고, 야누코비치 행정부의 가장 악랄했던 관료들도 파면됐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구조적인 민주적 변화의 시작을 의미하거나, 새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만연한 부패, 즉 가난과 불평등을 뿌리채 뽑을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더욱이 새정부는 그러한 문제들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고, 경제위기의 부담을 부유한 과두세력이 아닌 가난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고스란히 지울 것이다.


 새정부는 마이단 운동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신자유주의적 안건과 맞바꿨다. 지난 목요일 인준을 받은 새정부의 각료는 주로 신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의회에, 가격과 관세에 관한 "반민중적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을 강변했고,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돈을 빌려올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갖출 준비가 돼있다고 공표했다.


 임금을 동결하고 가스값을 대폭 인상하라는 국제통화기금의 요구는 우크라이나의 이전 정부가 유럽연합과의 연계 합의에 관한 협상을 유예한 이유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새정부를 "자살자 정부"라고 부를만 하다.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이러한 반사회적 정책과 통화붕괴에 대한 대중들의 실망을 예측하기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극우세력은 새정부 내에서 주요한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몇몇 논자들은 우크라이나 새정부 내의 극우세력의 준동이 유럽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경고했다. 현재 부수상, 국방장관, 생태장관, 농업장관, 검찰총장의 자리를 국수적인 자유당(Свобода)이 쥐고 있다. 조국당(Батьківщина) 온건파에 뒤늦게 가담해 마이단의 자위대세력을 효율적으로 지도한 안드리 파루비(Andriy Parubiy)는 우크라이나 사회국민당의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준군사적 청년단체의 전 지도자였고, 지금은 국방안보회의의 수장이다.


 동시에, 시위에는 잘 기획된 무장 쿠데타라는딱지가 붙게 됐다. 정당들은 마이단 운동, 특히 준군사적 무장대를 거의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실상 이 정당들은 정기적으로 마이단 운동을 고무하고 있고,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야누코비치와의 타협을 촉구하고 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새정부가 악명높은 우파지구(Right Sector)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파지구원들은 이제 대중적인 영웅들이고, 승리한 "혁명"의 전위대이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서 경찰들로부터 총기를 강탈했고, 야누코비치가 실각한 지금은 "부패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 혁명이 계속 진행돼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이단 운동에서의 단호함과 핵심적인 역할을 자찬한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우파의 반동적 생각을 목도하고 있다. 최근 우파지구의 공보비서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유럽이 갈 바른 길을 말해야 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않고 여자 동성애자나 남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의 권리를 용인하는 "완전한 자유주의"라는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유럽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파지구가 새정부에 맞서 움직이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파지구는 급격하고 깊어지는 경제위기 속에서 새로운 반란을 주도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에 강한 좌파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우익 대중주의자들은 사람들의 사회적 고충을 들쑤셔 놓을 것이다.


 동시에, 잠정적인 새 "사회적 마이단 운동" 에서 급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적 역할은 지배계급에 맞서는 어떠한 전국적인 운동도, 문화적으로 쪼개진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남부의 대중참여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급진 민족주의자들은 심지어 분리주의적 성향을 증폭시키고, 현재 크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러적 도발을 기도한다. 불가피하진 않겠지만, 현재 전면적 내전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방측에게 가장 최선은 우크라이나의 지역간 갈등을 봉합할 평화적 해결책을 고수하고, 극우세력의 새정부 참여와 길거리의 통제받지 않는 우익 준군사조직을 강하게 반대하는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서방측이 우크라이나의 외채를 탕감해줌으로써 무조건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외채탕감은 전세계의 많은 진보적 운동들이 제기하는 민중적 요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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