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2017. 5. 5. 10:43

 한동안 이 '생각'을 이용하지 않았다. 4월 초까지는 문서에 하루하루의 일과를 적어 넣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만 두었다.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 이탈리아인 친구인 이본을 배웅하러 프란치스카와 셋이 아르쬼의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온도는 10도를 넘는 상온이었고 하얀 파카가 아주 벅차진 않았으나 계속 입을 수는 없었다.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가 그녀를 보내고 프란치스카와 돌아왔다. 갈 때는 500루블, 올 때는 700루블이었는데 전부 이탈리아인들이 지불하였다. 방에 돌아와 잠깐 누워 있다가 씻지도 않고 학교로 향했다. 한국인 동생인 K와 L이 먼저 와있었다. 수업을 듣고 K와 사르본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점저를 마저 산 뒤에 주건물로 향했다. 주건물 창구 직원은 바로 은행에 가서 납부하면 된다고 했고, 그 길로 스베르방크에 가서 납부하였다. 야르체에 들러 이것저것 사고, 인터넷 비용 1,000루블을 낸 후에 기숙사에 돌아왔다. 책을 읽다가 잠깐 잤다. 다시 책을 읽다가 아까 산 점저를 데워 먹고, 다시 책을 읽었다. 10시가 되어 내려가 운동을 했다. 막판엔 러시아인 커플이 들어와 말을 걸어 보았다. 여자는 엠게우 철학과 1학년생이었고, 남자는 트수(톰스크국립대학)에 다닌다고 하였다. 둘은 톰스크 출신이나, 남자의 아버지는 투르크메니스탄 출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이 루스땀이었다. 역시 투르크메니스탄 출신의 막사트가 들어와 넷은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방에 돌아와 씻고 이제 잘 준비를 마쳤다.

 박사학위 논문뿐만 아니라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궁금하다. 역사학이란 무엇이고, 역사학적인 질문과 서술은 무엇인가. 어떠한 효용을 가질까? 나는 그 효용에 관심이 많다. 이런 내 관심사는 사회과학으로 공부를 시작한 개인사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이런저런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2008년, 학부 2년생이었을 때였지만, 본격적으로 무언가 읽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일병 때부터였다. 지금은 시카고로 박사과정 진학에 성공한 연대 사회학과의 Y형의 영향이 컸다. 부르디외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연스레 독서의 범위가 넓어졌다. 좌우간 역사학을 당분간은 계속 할 터인데, 아직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북한사와 사회주의역사를 보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서술해야 할지, 어떠한 논지를 통해 누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그러한 작업은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지 아직은 모르는 것 투성이일 따름이다.

 현재로서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일어, 노어, 중어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박사과정 동안 게으름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어렵지 않게 독어나 다른 언어를 추가적으로 한두 개 정도는 할 수 있을 듯 하다. 문제는 그러한 언어 습득이 나의 박사학위 논문 작성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아직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박사학위 논문을 잘 작성하는 일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서적의 형태(book-form)로 일정한 두께의 글을 써내야 하는 일이다. 5년이라는 시간이 짧은 기간은 물론 아니지만, 2년은 수업을 듣고 시험을 준비하는 데 써야 하므로 실상 내게 주어진 시간은 3년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1~2년은 또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러저러한 일에 연루되어야 하는 만큼, 순수하게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년이 채 안 된다. 5년을 넘어가면 다시 연구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일에 시간을 쏟아야 하고, 자연스레 연구는 지지부진해 질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에서의 박사과정이겠다.

 그래도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어찌 됐든, 궁핍한 계층에서 태어나 강한 운과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라라랜드로 떠나게 되었다. 이제는 가서 잘 하는 일이 남았다. 물론 더 큰 출구전략을 계속해서 생각은 하고 있지만, 거기에 필요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힘도 들 뿐더러 효율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다. 컴퓨터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일이지만, 나는 지금 컴퓨터 언어보다 더 급한 공부를 앞에 두고 있다. 양자택일이고,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다시 역사학으로 돌아와 박사학위 논문으로 생각을 모으자면, 어찌 됐든 오늘날 북한사는 거의 아무도 안 하니만큼 기존의 연구를 잘 섭렵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기존의 연구를 어떻게 수준 높게 지양하는 일이겠다. 소련사의 Magnetic Mountain 같은 대저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고전으로 불리우는 여러 책들처럼 꾸준히 읽히는 그런 책을 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학만을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며, 두루 읽고 널리 섭취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바탕 위에 북한사의 어떠한 면을 볼 수 있을까? 북한의 사회사를 쓰면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날은 물론이거니와 냉전기에도 공산주의국가에 서방의 '시민사회' 비슷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공산주의를 실천한 국가에도 분명 사람들이 모여사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가 있을 터이고, 이를 사회(obshchestvo)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또한 소련사의 수정주의적 흐름을 무작정 따라해서는 안 되고, 그들이 노정하고 있는 문제, 즉 연구 주제 선정의 곤란에 따른 후속 연구의 부재를 잘 인지하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염두에 두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결국 북한사 속의 사회, 북한의 인민/공민들이 받아 들이고 실천한 사회의 제면모를 그려내는 한편, Revolution on My Mind에서 선보인 것처럼 인민들 개인의 의식으로도 천착할 수 있어야 하겠다. 문제는 자료이다. 그런 방법론을 비슷하게나마 적용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을까? 자료의 한계를 인지한 후에는 결국 자료의 유형과 성격에 따라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해야 하는데, 그 경우에는 사회사의 외형을 띨 순 있어도 원래의 계획과는 다른 형태의 무언가가 나오겠다. 

 북한을 무대로 사회주의를 실천한 사람들의 만남을 연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사회주의는 동상이몽이었다는 걸 드러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러한 면모들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녔으며, 어떻게 기존의 논지와 시각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겠다.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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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대사2014. 10. 26. 06:59

1. 들어가며

 

 이 글은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을 주제로 다룬 기존의 연구 성과를 가능한대로 한데모아 일별했다. 1945년을 전후하여 소련의 대한정책은 미국 정부의 전략적 이해 속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한반도의 정치세력과 미·소 양국의 정책이 때로는 맞물리고 때로는 어긋나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소련의 대한정책연구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군정을 설치하여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민정이라는 외피를 두른 채 38도선 이북의 정치사회를 나름대로 주조하려고 하였고, 이러한 미국과의 차별성은 시대적인 열기속에서, 또는 이념적인 치기(稚氣)’ 속에서 소련을 선한 행위자로 둔갑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연구자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소련의 민정은 기실 간접통치의 모습을 띤 군정이었다는데 동의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관련 연구는 해방이후부터 여태껏 진행됐다고 할 수 있고, 이 글에서는 동 주제를 다루는 기왕의 연구를 일견한다.

 

2. 연구사 흐름 정리

 

 김성보를 비롯하여 다수의 연구자가 지적했듯, 1990년대 이전까지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 연구는 대개 자료의 빈곤을 이념의 과잉이 보충하는 꼴의 연구 일색이었다.[각주:1] 1990년대 이전 연구는 두 가지 경향으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는데, 김광운을 빌려, 하나는 소비에트화경향으로, 다른 하나는 해방 기획과 자력혁명경향으로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분기는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수정주의 대() 전통주의라는 구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소비에트화경향이란 북한에서의 인민정권 수립과정을 소련의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른 정치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지칭하며, 이 경우 해방 이후 38도선 이북에서 수립된 국가는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의도가 철저히 관철된 결과물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대전제 하에 팽창주의”(김영명, 양호민 등)방어주의”(김학준, 여인곤 등) 또는 대중(對中)정책의 연장”(강원식)이라는 세부적 차이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 경향은 전반적으로 남한 학계와 대중의 인식을 지배(김창숙, 한재덕, 오영진, 한근조 등의 증언에 힘입어 서대숙, 스칼라피노, 이정식, 에릭 반 리Erik van Ree )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소련이라는 외부적 규정력을 강조한 연구들이 계속 진행됐는데, 이러한 경향은 전현수, 웨더즈비, 강인구, 백학순, 란코프[각주:2], 이규태, 박명림 등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북측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료 구사 및 서술상의 균형 유지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해방 기획과 자력혁명경향이란 소련측과 북한측의 주장으로 엄밀히 말해 양자를 한데 묶기란 어렵지만, 전자의 경우는 소련의 식민지 민족해방논리에 따른 정치과정이 해방 이후 북한의 수립으로 귀결됐다고 주장하며, 후자의 경우는 북한 수립은 애당초 자명한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19589월 열린 북한과학원 역사연구소 주최 전국과학토론회를 전후하여, 소련의 해방자적 역할을 강조했던 문화전파설이 부정되고 역사 속 북한의 역할을 더더욱 강조하는 역사민속학이 제창됐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정세에 따른 역사서술 경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의 경향은 대개 이념의 과도한 개입을 경계하고, 소련과 북한이 보여준 상호작용의 속살과 세부를 좀 더 면밀히 보고자 했다. 전반적으로 한반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소련식 질서가 38도선 이북의 사회에서 전개된 내부 모순과 맞물려 벌어지는 현상의 복잡함과 다양성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커밍스,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 이종석, 유길재, 정해구, 김성보, 서동만, 기광서, 이주철, 김광운 등의 연구자가 이러한 경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자료의 부족이라는 만성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혹자는 서구의 소련학(Kremlinology)’에서 파생돼 나온 기법을 단순히 북한에 적용하는 오류(이른바 외재적 접근법’)를 범하기도 했다.

 

 1999년에 쓰인 정성임의 글은 소련문헌을 광범하게 검토한 에릭 반 리의 1989년 저작, 미측 노획문서를 검토한 백학순의 1993년 저작,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소련 외무성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 등을 검토한 웨더즈비의 1993년 저작을 살핀 후, 그러한 획기적인 성과들이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 예를 들어 소련이 명확한 점령정책 없이 북한을 점령했으나 1945년에 이미 북한만의 공산화를 결정했다면 어떻게 9월 하순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분단을 결정했으며, 나아가 1946~47년 미소공위에 임할 당시 결렬을 전제로 했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등을 물으며 자신의 논지를 강화했다. 저자는 주로 소련국방성 문서를 활용하여 점령 첫 해 소련은 사회주의화의 준비기를 가졌으며, 국가형성단계로의 전환점은 모스크바 결정이었음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정성임의 연구에 더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1차 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점증하고 있다. 이는 또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일찍이 선보인 실증주의적 경향의 연구와도 맥이 닿는다.[각주:3]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기광서, 전현수, 이재훈, 김성보 등을 들 수 있다. 기광서는 2002년에 쉬띄꼬프의 활동을 중심으로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했고[각주:4], 2008년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생산 자료인 결정을 바탕으로 1948년 초반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했으며[각주:5], 2010년에는 소련 최고지도부가 승인한 훈령을 토대로 소련의 미소공위 전략을 살폈다.[각주:6] 그에 따르면, “미소공위에서 소련의 대한정책목표는 분단정부나 사회주의 조선이 아니라 좌파가 주도권을 갖는 친소적 조선이었고, 더하여 미소공위 결렬을 대비한 대책, 즉 조선인에게 조선 정부의 수립을 맡기고 외국군대는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방침도 마련해 놓았었다. 이재훈의 경우, 소련공산당 상층부의 정책을 통해 해방 전후 소련의 극동정책과 그 하부의 대한정책, ()한국인식 등을 분석했고, 소련의 한국 민족주의자 인식을 살핀 바가 있다.[각주:7] 전현수는 꾸준한 자료 발굴과 탈초, 번역과 게재를 해왔으며,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의 핵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쉬띄꼬프의 일기를 간행하기도 했다.[각주:8]

 

 전현수의 정리를 빌려 소군정을 거칠게나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소련군 통치방식 자체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북한을 통치한 소련군사령부와 민정청(1947.5)이 군정기구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소련군사령부는 쉬띄꼬프를 정점으로 했고,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간접통치의 외형을 취했으나,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소련군사령부의 개입은 전면적이고 직접적이었다.” 그러나 김광운에 따르면, 해방 직후 소련군사령부는 면 이하 행정단위에 대한 직접 통치능력이 전혀 없었고, ·군 차원의 민정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는 소련의 1차 자료가 공개됨과 함께 과거의 이념적 편향에서 벗어나 좀 더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될 조건을 예비했다. 그러나 북한 및 중국의 공간되지 않은 자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관련 러시아의 자료는 아직 대다수가 베일에 감춰져있으며, 언어의 장벽보다 더 높은 자료접근의 장벽은 아직도 해방 전후 북한 지역 연구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각주:9] 뿐만 아니라, 소련의 1차 자료가 담아내지 못한 당시 북한 지역의 생생한 역사적 모습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연구자들의 고구(考究)를 요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소련의 1차 자료를 연구하거나, 이용한 성과를 살핀다.

 

3. 자료에 관하여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는 연구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측면에서 크게 19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1993년을 전후하여 러시아의 문서고가 제한적, 선별적으로 개방됐고, 이를 통해 해방 전후 북한의 역사적 현실에 가닿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추가됐기 때문이다.[각주:10] 이하에서는 소련의 1차 자료를 중심으로 기왕의 연구가 이용한 자료들을 살핀다.

 

 러시아의 문서고가 열리기 전에 수행된 연구 중 대표격은 하루키의 글이다.[각주:11] 글의 초입에 드러나는 저자의 고충 토로가 인상적이다. 그는 1983년 현재 소련점령군 기관지인 조선신문,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기관지인 평양일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인 정로(正路)와 이론지인 근로자등의 신문·잡지류가 전혀 간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자료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프라우다, 해방일보, 서울신문등 신문자료, 思想月報등 일본 자료, FRUS, SWNCC 문서 등 미국 자료, 1949년 평양에서 간행된 조선중앙연감, 함석헌(씨ᄋᆞᆯ의 소리)과 임춘추 등의 회고록을 널리 이용했고, 맥큔(George M. McCune), 김남식, 커밍스 등 당시의 선행연구 또한 이용했다. 그는 소련이 1945816일 트루만의 일반명령 1를 여지없이 수용했다는 사실을 두고,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나아가 점령후에도 소련은 미국이 전한반도에 깊은 관심을 둔 것과 달리, 북한 지역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19451123일 벌어진 신의주 사건12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기된 민주기지론[각주:12] 등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연합노선에서 결별노선을 택했다고 파악했다.

 

 전현수와 와실리비치의 글은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나온 것으로, 한국인 연구자와 러시아인 한국학 연구자의 시각에서 자료의 신천지라 할 수 있는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소장 자료에 관해 짤막하게 정리한 것이다.[각주:13]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에 소장된 문서군(фонд; 폰드; stock)을 비판적으로 분석했고, 1917년 이후 1990년대까지의 한·소 외교관계 자료(몰로토프 폰드, 브쉰스키 폰드, 쥐다노프 폰드, 소련 외무성 1극동과 폰드, 서울주재 총영사관 폰드, 북한주재 소련 민정청 폰드,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폰드)가 소장됐음을 밝혔다.

 

 김성보의 글은 앞서 언급된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소련외무성 및 소련공산당 문서 등을 일부 활용하여, 그간 소련의 1차 자료의 가뭄에 어느 정도 단비를 내려 주었다. 한편 저자는 웨더즈비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살피는 차원에서 웨더즈비가 이용한 동일한 자료에다가 추가적으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이 편집한 공보(公報)와 소련공산당 중앙의 훈령,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위원회 기관지인 옳다등을 재검토했다. 저자는 소련과 미국은 모두 한반도를 안보상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해, 나름대로의 대한정책을 2차 세계대전기부터 모색했다고 전제했다. 나아가 저자는 종전을 전후한 시점에서 소련의 대한정책의 기본 원칙은 우호적인 한국 정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른 연합국들과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었고, 종전 이후에는 위의 기본 원칙이 실현될 때까지 북한 지역에서 먼저 자신의 지지기반을 창출해간다는 방침이 추가됐다고 결론내리면서, 기존의 준비결여론선의의 무지론을 비판했다.

 

 전현수의 2000년 글은 그간 연구자들이 선별적으로 이용하고 소개한 소련의 1차 자료 및 자료가 소장된 기관의 명칭과 특성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각주:14]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나, 자료 자체에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기술적 오류가 무진 배어있다는 저자의 언급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도 얼마든 참고가 될 수 있는 글이다. 전현수의 글에 실린 소련 자료와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소련공산당 문서: 소련공산당 문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 이곳은 과거에 러시아 현대사자료 보존 및 연구센터(РЦХИДНИ)’으로도 불렸다) 소장. 대외정책 담당기구 생산 문서철(소련군 총정치국,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정치담당 부사령관·정치국이나 소련 외무상비서부, 소련 외무성 2극동과 등에서 생산한 문서,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정세 등),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문서군(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자료, 북조선공산당 각 도당부 및 사회단체 기관지: 옳다(함경남도), 앞으로(강원도), 咸北正路(함북도), 바른발(평안북도, 신의주시) ).

 

소련각료회의 문서: 소련각료회의 문서는 러시아연방국립문서보관소(ГАРФ) 소장. 북한 경제문제 관련 자료, 교육문제 관련 자료, 소련대외문화교류협회 문서군, 동양인민공화국과() 문서철. 소련전보통신(따스) 문서군.

 

소련외무성 문서: 소련외무성 문서는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 소장. 외무상 몰로또브 비서부 문서군(미소 양군사령부 대표회의 관련자료, 미소공위 관련자료, 관련기사 스크랩과 번역 등), 외무부상 븨쉰스키 비서부 문서군(미소공위 관련자료), 외무부상 말리크 비서부 문서군(경제관계 자료), 외무부상 로조프스키 비서부 문서군(194512월 북한정세 보고서), 조선문제에 대한 보고부()(референтура, 리피렌뚜라) 문서군, 미소공위 소련대표단 비서부 문서군,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문서군(경제관계 및 북한정세 자료 다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4812월에 완성된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3개년사업 총괄보고, 19458~194811(민정청장 레베데프의 지도 하에 보도국장 까둘린 중좌와 라디오방송 편집국장 그루지닌 중좌가 함께 작성).

 

소련국방성 문서: 소련국방성 문서는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ЦАМОРФ) 소장. 외국인 연구자의 접근이 가장 곤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비서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연해주군관구 조선위원회, 25군 사령관 비서부, 25군 군사평의회, 25군 정치부,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북조선 각도 경무사령부 등.

 

 이밖에도 1991년 구축된 러시아연방대통령문서고(АПРФ)러시아국립군사(軍事)문서고(РГВА), 러시아국립군사(軍史)문서고(РГВИА)등에 접근이 가능하다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에 관련된 1차 자료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이상에서는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을 다룬 연구사의 흐름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일별했고,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데 근거가 되는 자료의 존재와 소장처를 살폈다. 이상의 정리에서, 당시 소련은 38도선 이북에서 간접통치라는 방식으로 군정을 실시했고, 그 원칙은 당장의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단계적 혁명론에 입각(1945920일자 스탈린 지령)한 계급연합노선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아가 당시 소련의 직접통치를 받았던 동구 제국(諸國)과의 비교를 통해 입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겠다.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은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측과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친소적인 조선정부를 세워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하였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와 이후 탁치정국을 거치며 북한지역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소군정38도선 이북에서 조선인의 자율성을 절대적으로 보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좌파가 정치적으로 우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행정상의 곤란함을 노정했다고 정리해볼 수 있겠다.

   

참고 문헌 (연도순)

 

브루스 커밍스 외, 분단전후의 現代史, 일월서각, 1983.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1, 풀빛, 1991.

전현수, 해방직후 북한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소장 북한관계자료의 검토-, 역사와현실10, 1993.

와닌 유리 와실리비치,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해방직후 한국관계 자료들, 역사비평26, 1994.

안드레이 란코프, 김광린 역, 북한 현대정치사, 오름, 1995.

역사문제연구소, 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역사비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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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기광서, 「해방 후 소련의 대한반도정책과 스티코프의 활동」, 『중소연구』 26, 2002, 161-194쪽; 기광서, 「슈티코프, 해방 후 북소관계의 실력자」, 『내일을 여는 역사』 24, 2006, 142-15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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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기광서, 「훈령으로 본 소련의 미소공동위원회 전략」, 『역사문제연구』 24, 2010, 299~335쪽. [본문으로]
  7. 이재훈, 「해방전후 소련 극동정책을 통해 본 소련의 한국인식과 대한정책」, 『사림』 20, 2003, 39-86쪽; 이재훈, 「해방 직후 북한 민족주의세력에 대한 소련의 인식과 정책」, 『역사비평』 70, 2005, 274-301쪽. [본문으로]
  8. 전현수, 「한국 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 『쉬띄꼬프일기』를 중심으로」, 『쉬띄꼬프일기』, 국사편찬위원회, 2004. [본문으로]
  9. 정성임은 자신의 글에서 소련의 1차 자료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 각주로 달아 놓았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문서보관소의 열람증을 얻기 위해서는 소련 내 연구소나 대학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특히 외무성 문서보관소의 경우, 열람 허가에는 일반적으로 약 1개월간의 신원확인기간이 소요된다. 문서열람은 제출한 연구주제와 직접 관련된 것만 열람할 수 있고, 그 외에는 목록조차 확인이 불가하다. 한 문건의 최대 열람기간은 1개월로 연구자가 중복되는 경우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정성임, 앞의 글, 1999, 15쪽, 각주 18번. [본문으로]
  10. 박태균은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에 관해 “사실 자체에 대한 확인 작업이 급선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박태균, 앞의 글, 1991. [본문으로]
  11. 와다 하루키, 앞의 글, 1983. [본문으로]
  12. 사꾸라이 히로시에 따르면, 3차 확대집행위원회는 김일성의 ‘민주기지’ 관련 언술이 처음 나온 회의였다. 사꾸라이 히로시, 「북한노동당의 통일정책 -민주기지노선의 형성-」, 연세대대학원 북한현대사 연구회편, 『북한현대사 I: 연구와 자료』, 공동체, 1989, 255쪽. [본문으로]
  13. 전현수, 「해방직후 북한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소장 북한관계자료의 검토-」, 『역사와현실』 10, 1993, 295-313쪽; 와닌 유리 와실리비치, 전현수 역,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해방직후 한국관계 자료들」, 『역사비평』 26, 1994, 351-367쪽. [본문으로]
  14. 전현수, 「해방 직후 북한자료 해제 2 - 러시아생산 자료 -」, 『북한현대사 문헌연구』, 백산서당, 2000, 157~19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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