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韓美관계2015. 2. 21. 08:00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1942~1947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과도정부형성 구상(1996)을 개정·증보한 것이다. 원래 논문의 본문은 모두 48절로 구성돼있는 데 비해, 이 책은 원래의 논문에서 각 장절의 명칭을 세련되게 바꾸었고 2(2)에 하나의 논문[각주:1]에 해당하는 절을 추가로 삽입하여 모두 49절의 체제를 갖추었다. 논문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자는 미국의 과도정부 구상을 매개로 하여 1942~47년의 시기 동안미국의 대한(對韓)정책이 형성·완숙·변형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복원하였다. 집필뿐만 아니라 저자는 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1차 자료의 수집·편집·출판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각주:2] 연구자들 사이에서 한국현대사 연구의 진전을 가로막는 제1요인으로 흔히 자료적 제한이 운위되는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 저자의 피땀 어린 노고와 그 결실은 고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이 갖는 의미를 간략히 짚어보자.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은 20세기의 역사에서 가히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태평양에서부터 구라파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역을 통치했던 구()제국이 일단 몰락하거나 주춤했고, 식민지·()식민지 지역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 분출하였다. 옛 제국이 차지하던 위치는 장차 미국이 대체할 터였다. 한편 지구 각지의 민족운동은 그 내용과 형태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외피를 입었으며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직간접적인 관련 속에 놓였다. ‘연합국두 수뇌국끼리의 대결의 징후는 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전후하여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소 양국은 38도선을 경계로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분할·점령하는데 동의했다.

 

한국인은 제국을 상대로 간고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인들의 활약을 선뜻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 패망 후에도 한인들의 집단 귀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과연 미국의 대한정책과 점령정책은 무엇이었는가? 그 역사적 전개, 귀결, 성격은 어떠하였는가?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치밀하고 실증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우선 저자는 이 책에서 해방 전후 미국의 과도정부 수립구상과 그 실현과정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같은 시기 미국의 대한정책이 형성·전개되는 모습을 해명했고, 미국의 중간파정책과 중도정책을 매개로 하여 남한점령정책의 정치·사회적 성격과 특질을 분석해냈다. 저자는 이 책의 결론부에서 몇 가지의 역사상을 제공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42~해방 이전(1) 해방~1차 미소공위(2) 미국의 중간파 정책과 2차 미소공위 시기(3) 공위의 결렬과 다가오는 단정(4). 물론 각 부는 평자의 시기구분과 엄밀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며 다양한 시간대가 부를 넘나들며 중첩돼있다.

 

먼저 저자는 미국의 대한정책과 점령정책의 졸속성 및 편의성을 강조하는 논리, 준비결여론이라든가 선의의 무지론등을 통박했다. 이는 해방 이전 미국의 대한정책은 미국 전후구상의 한 구성부분으로서 계기적으로 발전해왔다는 저자의 주장에 잘 나타나는데, 그에 따르면 미국은 일찍이 1942년부터 한반도와 만주를 시야에 넣어 전시·전후 구상을 기획하였다. 저자는 일명 노터 파일, T316등 미국무부 내 자문위의 소위원회 보고서들, P-B81, JANIS 75등 광범한 자료를 통해 해방 이전 미국의 대한정책은 구상과 계획으로서는 완숙단계에 도달했다는 주장을 증명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미국의 대한정책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급조된 것이 아니라, 전후 신세계질서' 구상과 밀접한 연계 하에 끊임없이 다듬어진국가차원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저자는 미국의 전후 대한구상이 수정을 강요받게 되는모습과 각각의 계기를 분석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주변의 정세가 요동치는 시기였고, 정책입안 담당자들(워싱턴)과 집행 담당자들(미군정) 사이에도 인식과 수행방법의 차이가 점차 불거졌다. 예컨대, 애초의 미국 대한구상이었던 국제민간행정기구안이나 정무위원회안(일명 랭던구상) 같은 경우 식민지 상태에서 갓 해방된 한국인뿐만 아니라 그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미군정, 그리고 소련 모두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무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조선임시정부안이 만들어졌다]를 거치며 원안과는 달라진 모습의 대한구상을 준비해야 했다. 이후 미군정은 UN으로 한국문제를 이관시키는 1947년 가을 이전까지 중간파정책과 중도정책을 매개로 하여 남조선 과도정부안을 추진했다.

 

같은 국가의 행위주체라고 해도 워싱턴과 미군정, 군부는 같은 한국문제에 대해 입장차와 태도의 온도차를 보였으며, 심지어 같은 기관 내부에서도 이견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 책은 그러한 각각의 이견이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지는 모습을 계기적으로 포착하는 한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그러한 수렴 과정이 이뤄지는 맥락 또한 들려주었다.

 

이 책은 신탁통치안을 비롯하여 모종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식으로 미국이 남한에서 자국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신탁통치안의 경우를 살펴보자. 군부와 국무부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후 식민종속지역에서 민족운동이 고조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신탁통치안이 식민지역의 구식민모국으로부터의 분리와 미국 영향권으로의 재편입을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장치였기 때문에 도무지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러한 구상은 결국 점령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물적 조건을 창출하는 작업을 전제한 것이며, 이는 어떠한 형태이든지간에 정부의 구성과 인사의 참여 등이 전적으로 미국에 유리해야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이후 미국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소련과의 대화에 임하기 위해 차례대로 고문회의-(정무위원회안)-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남조선과도정부 등을 조직한다. 하지만 미국은 결국에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함으로써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스스로 파기하였다.

 

이 책은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을 미국의 냉전정책이나 대소전략의 일부가 아닌 그 자체로 고유한 것으로 자리매김하여 분석했고, 더불어 그것이 한국인의 자주적 국가건설 노력과맞부딪혔다는 관점을 견지했다. 서론에서 밝혔듯, 저자는 미국 대한정책에는 국제적·국내적 측면이 모두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변화의 원인과 동력은 한국사회 내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한반도와 워싱턴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주제인 미국의 한국정부 수립구상과 중간파정책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며, 선행 연구를 비판하는 데에서도 미국의 국제정치사(외교사)의 연구 흐름(전통주의·수정주의) 및 세계체제론적 접근이 가지고 있는 목적론적 맹점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평자는 이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느꼈다. 저자의 노고와는 별개로, 이 책이 선사하는 역사상에서 한국사회가 선제적으로 창출해낸 모종의 동력이나 행동을 쉽게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탁통치파동이나 ‘10월 항쟁등은 사후 한국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으며 통치주체인 미군정으로 하여금 나름의 대응을 모색케 했다는 데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미국의 대한정책이 수정·굴절(UN 이관)되는 계기 중에 한국사회가 하나의 주체로서 개입했거나 선도한 경우가 있었을까? 적어도 이 책만으로는 그러한 질문에 충분히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1. 정용욱, 「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 -미군정의 여론공작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62, 2003. [본문으로]
  2. 정용욱, 『해방직후 정치·사회사 자료집』 1-12권, 다락방, 1994; 정용욱·이길상, 『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사 자료집』, 다락방, 1995; 정용욱, 『미국 국립문서기록청의 한국근현대사 관련자료 소장 현장과 이용 실태 조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정용욱, 『미군정 자료 연구』, 선인, 2003. [본문으로]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4. 10. 26. 06:59

1. 들어가며

 

 이 글은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을 주제로 다룬 기존의 연구 성과를 가능한대로 한데모아 일별했다. 1945년을 전후하여 소련의 대한정책은 미국 정부의 전략적 이해 속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한반도의 정치세력과 미·소 양국의 정책이 때로는 맞물리고 때로는 어긋나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소련의 대한정책연구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군정을 설치하여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민정이라는 외피를 두른 채 38도선 이북의 정치사회를 나름대로 주조하려고 하였고, 이러한 미국과의 차별성은 시대적인 열기속에서, 또는 이념적인 치기(稚氣)’ 속에서 소련을 선한 행위자로 둔갑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연구자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소련의 민정은 기실 간접통치의 모습을 띤 군정이었다는데 동의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관련 연구는 해방이후부터 여태껏 진행됐다고 할 수 있고, 이 글에서는 동 주제를 다루는 기왕의 연구를 일견한다.

 

2. 연구사 흐름 정리

 

 김성보를 비롯하여 다수의 연구자가 지적했듯, 1990년대 이전까지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 연구는 대개 자료의 빈곤을 이념의 과잉이 보충하는 꼴의 연구 일색이었다.[각주:1] 1990년대 이전 연구는 두 가지 경향으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는데, 김광운을 빌려, 하나는 소비에트화경향으로, 다른 하나는 해방 기획과 자력혁명경향으로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분기는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수정주의 대() 전통주의라는 구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소비에트화경향이란 북한에서의 인민정권 수립과정을 소련의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른 정치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지칭하며, 이 경우 해방 이후 38도선 이북에서 수립된 국가는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의도가 철저히 관철된 결과물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대전제 하에 팽창주의”(김영명, 양호민 등)방어주의”(김학준, 여인곤 등) 또는 대중(對中)정책의 연장”(강원식)이라는 세부적 차이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 경향은 전반적으로 남한 학계와 대중의 인식을 지배(김창숙, 한재덕, 오영진, 한근조 등의 증언에 힘입어 서대숙, 스칼라피노, 이정식, 에릭 반 리Erik van Ree )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소련이라는 외부적 규정력을 강조한 연구들이 계속 진행됐는데, 이러한 경향은 전현수, 웨더즈비, 강인구, 백학순, 란코프[각주:2], 이규태, 박명림 등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북측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료 구사 및 서술상의 균형 유지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해방 기획과 자력혁명경향이란 소련측과 북한측의 주장으로 엄밀히 말해 양자를 한데 묶기란 어렵지만, 전자의 경우는 소련의 식민지 민족해방논리에 따른 정치과정이 해방 이후 북한의 수립으로 귀결됐다고 주장하며, 후자의 경우는 북한 수립은 애당초 자명한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19589월 열린 북한과학원 역사연구소 주최 전국과학토론회를 전후하여, 소련의 해방자적 역할을 강조했던 문화전파설이 부정되고 역사 속 북한의 역할을 더더욱 강조하는 역사민속학이 제창됐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정세에 따른 역사서술 경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의 경향은 대개 이념의 과도한 개입을 경계하고, 소련과 북한이 보여준 상호작용의 속살과 세부를 좀 더 면밀히 보고자 했다. 전반적으로 한반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소련식 질서가 38도선 이북의 사회에서 전개된 내부 모순과 맞물려 벌어지는 현상의 복잡함과 다양성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커밍스,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 이종석, 유길재, 정해구, 김성보, 서동만, 기광서, 이주철, 김광운 등의 연구자가 이러한 경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자료의 부족이라는 만성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혹자는 서구의 소련학(Kremlinology)’에서 파생돼 나온 기법을 단순히 북한에 적용하는 오류(이른바 외재적 접근법’)를 범하기도 했다.

 

 1999년에 쓰인 정성임의 글은 소련문헌을 광범하게 검토한 에릭 반 리의 1989년 저작, 미측 노획문서를 검토한 백학순의 1993년 저작,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소련 외무성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 등을 검토한 웨더즈비의 1993년 저작을 살핀 후, 그러한 획기적인 성과들이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 예를 들어 소련이 명확한 점령정책 없이 북한을 점령했으나 1945년에 이미 북한만의 공산화를 결정했다면 어떻게 9월 하순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분단을 결정했으며, 나아가 1946~47년 미소공위에 임할 당시 결렬을 전제로 했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등을 물으며 자신의 논지를 강화했다. 저자는 주로 소련국방성 문서를 활용하여 점령 첫 해 소련은 사회주의화의 준비기를 가졌으며, 국가형성단계로의 전환점은 모스크바 결정이었음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정성임의 연구에 더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1차 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점증하고 있다. 이는 또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일찍이 선보인 실증주의적 경향의 연구와도 맥이 닿는다.[각주:3]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기광서, 전현수, 이재훈, 김성보 등을 들 수 있다. 기광서는 2002년에 쉬띄꼬프의 활동을 중심으로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했고[각주:4], 2008년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생산 자료인 결정을 바탕으로 1948년 초반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했으며[각주:5], 2010년에는 소련 최고지도부가 승인한 훈령을 토대로 소련의 미소공위 전략을 살폈다.[각주:6] 그에 따르면, “미소공위에서 소련의 대한정책목표는 분단정부나 사회주의 조선이 아니라 좌파가 주도권을 갖는 친소적 조선이었고, 더하여 미소공위 결렬을 대비한 대책, 즉 조선인에게 조선 정부의 수립을 맡기고 외국군대는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방침도 마련해 놓았었다. 이재훈의 경우, 소련공산당 상층부의 정책을 통해 해방 전후 소련의 극동정책과 그 하부의 대한정책, ()한국인식 등을 분석했고, 소련의 한국 민족주의자 인식을 살핀 바가 있다.[각주:7] 전현수는 꾸준한 자료 발굴과 탈초, 번역과 게재를 해왔으며,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의 핵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쉬띄꼬프의 일기를 간행하기도 했다.[각주:8]

 

 전현수의 정리를 빌려 소군정을 거칠게나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소련군 통치방식 자체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북한을 통치한 소련군사령부와 민정청(1947.5)이 군정기구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소련군사령부는 쉬띄꼬프를 정점으로 했고,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간접통치의 외형을 취했으나,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소련군사령부의 개입은 전면적이고 직접적이었다.” 그러나 김광운에 따르면, 해방 직후 소련군사령부는 면 이하 행정단위에 대한 직접 통치능력이 전혀 없었고, ·군 차원의 민정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는 소련의 1차 자료가 공개됨과 함께 과거의 이념적 편향에서 벗어나 좀 더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될 조건을 예비했다. 그러나 북한 및 중국의 공간되지 않은 자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관련 러시아의 자료는 아직 대다수가 베일에 감춰져있으며, 언어의 장벽보다 더 높은 자료접근의 장벽은 아직도 해방 전후 북한 지역 연구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각주:9] 뿐만 아니라, 소련의 1차 자료가 담아내지 못한 당시 북한 지역의 생생한 역사적 모습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연구자들의 고구(考究)를 요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소련의 1차 자료를 연구하거나, 이용한 성과를 살핀다.

 

3. 자료에 관하여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는 연구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측면에서 크게 19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1993년을 전후하여 러시아의 문서고가 제한적, 선별적으로 개방됐고, 이를 통해 해방 전후 북한의 역사적 현실에 가닿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추가됐기 때문이다.[각주:10] 이하에서는 소련의 1차 자료를 중심으로 기왕의 연구가 이용한 자료들을 살핀다.

 

 러시아의 문서고가 열리기 전에 수행된 연구 중 대표격은 하루키의 글이다.[각주:11] 글의 초입에 드러나는 저자의 고충 토로가 인상적이다. 그는 1983년 현재 소련점령군 기관지인 조선신문,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기관지인 평양일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인 정로(正路)와 이론지인 근로자등의 신문·잡지류가 전혀 간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자료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프라우다, 해방일보, 서울신문등 신문자료, 思想月報등 일본 자료, FRUS, SWNCC 문서 등 미국 자료, 1949년 평양에서 간행된 조선중앙연감, 함석헌(씨ᄋᆞᆯ의 소리)과 임춘추 등의 회고록을 널리 이용했고, 맥큔(George M. McCune), 김남식, 커밍스 등 당시의 선행연구 또한 이용했다. 그는 소련이 1945816일 트루만의 일반명령 1를 여지없이 수용했다는 사실을 두고,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나아가 점령후에도 소련은 미국이 전한반도에 깊은 관심을 둔 것과 달리, 북한 지역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19451123일 벌어진 신의주 사건12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기된 민주기지론[각주:12] 등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연합노선에서 결별노선을 택했다고 파악했다.

 

 전현수와 와실리비치의 글은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나온 것으로, 한국인 연구자와 러시아인 한국학 연구자의 시각에서 자료의 신천지라 할 수 있는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소장 자료에 관해 짤막하게 정리한 것이다.[각주:13]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에 소장된 문서군(фонд; 폰드; stock)을 비판적으로 분석했고, 1917년 이후 1990년대까지의 한·소 외교관계 자료(몰로토프 폰드, 브쉰스키 폰드, 쥐다노프 폰드, 소련 외무성 1극동과 폰드, 서울주재 총영사관 폰드, 북한주재 소련 민정청 폰드,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폰드)가 소장됐음을 밝혔다.

 

 김성보의 글은 앞서 언급된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소련외무성 및 소련공산당 문서 등을 일부 활용하여, 그간 소련의 1차 자료의 가뭄에 어느 정도 단비를 내려 주었다. 한편 저자는 웨더즈비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살피는 차원에서 웨더즈비가 이용한 동일한 자료에다가 추가적으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이 편집한 공보(公報)와 소련공산당 중앙의 훈령,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위원회 기관지인 옳다등을 재검토했다. 저자는 소련과 미국은 모두 한반도를 안보상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해, 나름대로의 대한정책을 2차 세계대전기부터 모색했다고 전제했다. 나아가 저자는 종전을 전후한 시점에서 소련의 대한정책의 기본 원칙은 우호적인 한국 정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른 연합국들과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었고, 종전 이후에는 위의 기본 원칙이 실현될 때까지 북한 지역에서 먼저 자신의 지지기반을 창출해간다는 방침이 추가됐다고 결론내리면서, 기존의 준비결여론선의의 무지론을 비판했다.

 

 전현수의 2000년 글은 그간 연구자들이 선별적으로 이용하고 소개한 소련의 1차 자료 및 자료가 소장된 기관의 명칭과 특성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각주:14]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나, 자료 자체에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기술적 오류가 무진 배어있다는 저자의 언급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도 얼마든 참고가 될 수 있는 글이다. 전현수의 글에 실린 소련 자료와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소련공산당 문서: 소련공산당 문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 이곳은 과거에 러시아 현대사자료 보존 및 연구센터(РЦХИДНИ)’으로도 불렸다) 소장. 대외정책 담당기구 생산 문서철(소련군 총정치국,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정치담당 부사령관·정치국이나 소련 외무상비서부, 소련 외무성 2극동과 등에서 생산한 문서,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정세 등),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문서군(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자료, 북조선공산당 각 도당부 및 사회단체 기관지: 옳다(함경남도), 앞으로(강원도), 咸北正路(함북도), 바른발(평안북도, 신의주시) ).

 

소련각료회의 문서: 소련각료회의 문서는 러시아연방국립문서보관소(ГАРФ) 소장. 북한 경제문제 관련 자료, 교육문제 관련 자료, 소련대외문화교류협회 문서군, 동양인민공화국과() 문서철. 소련전보통신(따스) 문서군.

 

소련외무성 문서: 소련외무성 문서는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 소장. 외무상 몰로또브 비서부 문서군(미소 양군사령부 대표회의 관련자료, 미소공위 관련자료, 관련기사 스크랩과 번역 등), 외무부상 븨쉰스키 비서부 문서군(미소공위 관련자료), 외무부상 말리크 비서부 문서군(경제관계 자료), 외무부상 로조프스키 비서부 문서군(194512월 북한정세 보고서), 조선문제에 대한 보고부()(референтура, 리피렌뚜라) 문서군, 미소공위 소련대표단 비서부 문서군,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문서군(경제관계 및 북한정세 자료 다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4812월에 완성된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3개년사업 총괄보고, 19458~194811(민정청장 레베데프의 지도 하에 보도국장 까둘린 중좌와 라디오방송 편집국장 그루지닌 중좌가 함께 작성).

 

소련국방성 문서: 소련국방성 문서는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ЦАМОРФ) 소장. 외국인 연구자의 접근이 가장 곤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비서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연해주군관구 조선위원회, 25군 사령관 비서부, 25군 군사평의회, 25군 정치부,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북조선 각도 경무사령부 등.

 

 이밖에도 1991년 구축된 러시아연방대통령문서고(АПРФ)러시아국립군사(軍事)문서고(РГВА), 러시아국립군사(軍史)문서고(РГВИА)등에 접근이 가능하다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에 관련된 1차 자료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이상에서는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을 다룬 연구사의 흐름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일별했고,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데 근거가 되는 자료의 존재와 소장처를 살폈다. 이상의 정리에서, 당시 소련은 38도선 이북에서 간접통치라는 방식으로 군정을 실시했고, 그 원칙은 당장의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단계적 혁명론에 입각(1945920일자 스탈린 지령)한 계급연합노선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아가 당시 소련의 직접통치를 받았던 동구 제국(諸國)과의 비교를 통해 입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겠다.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은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측과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친소적인 조선정부를 세워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하였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와 이후 탁치정국을 거치며 북한지역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소군정38도선 이북에서 조선인의 자율성을 절대적으로 보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좌파가 정치적으로 우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행정상의 곤란함을 노정했다고 정리해볼 수 있겠다.

   

참고 문헌 (연도순)

 

브루스 커밍스 외, 분단전후의 現代史, 일월서각, 1983.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1, 풀빛, 1991.

전현수, 해방직후 북한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소장 북한관계자료의 검토-, 역사와현실10, 1993.

와닌 유리 와실리비치,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해방직후 한국관계 자료들, 역사비평26, 1994.

안드레이 란코프, 김광린 역, 북한 현대정치사, 오름, 1995.

역사문제연구소, 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역사비평사, 1995.

정성임, 소련의 북한 점령정책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북한현대사 문헌연구, 백산서당, 2000.

기광서, 해방 후 소련의 대한반도정책과 스티코프의 활동, 중소연구26, 2002.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I, 선인, 2003.

이재훈, 해방전후 소련 극동정책을 통해 본 소련의 한국인식과 대한정책, 사림20. 2003.

국사편찬위원회, 쉬띄꼬프일기, 국사편찬위원회, 2004.

임영태, 북한50년사1, 들녘, 2005.

이재훈, 해방 직후 북한 민족주의세력에 대한 소련의 인식과 정책, 역사비평70, 2005.

기광서, 슈티코프, 해방 후 북소관계의 실력자, 내일을 여는 역사24, 2006.

기광서,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대한반도 관련 결정과 북한정부의 성격 구상(1945-1948), 동방학지144, 2008.

김국후,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2008.

이희동, 낡은 논쟁은 멈추자 : 김국후, 秘錄 평양의 소련군정(한울, 2008.6), 플랫폼11, 2008.

기광서, 훈령으로 본 소련의 미소공동위원회 전략, 역사문제연구24, 2010.

유영구·정창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1. 박태균, 「미국과 소련의 대한정책과 미군정」, 『한국현대사』 1, 풀빛, 1991; 김성보, 「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 1945~1946」, 『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역사비평사, 1995; 정성임, 「소련의 對북한 점령정책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I』, 선인, 2003; 임영태, 『북한50년사』 1, 들녘, 2005 참고. [본문으로]
  2. 안드레이 란코프, 김광린 역, 『북한 현대정치사』, 오름, 1995. [본문으로]
  3. 와다 하루키, 「소련의 對北韓政策」, 『분단전후의 現代史』, 일월서각, 1983. [본문으로]
  4. 기광서, 「해방 후 소련의 대한반도정책과 스티코프의 활동」, 『중소연구』 26, 2002, 161-194쪽; 기광서, 「슈티코프, 해방 후 북소관계의 실력자」, 『내일을 여는 역사』 24, 2006, 142-154쪽. [본문으로]
  5. 기광서, 「소련공산당 정치국의 대한반도 관련 「결정」과 북한정부의 성격 구상(1945-1948)」, 『동방학지』 144, 2008, 367-400쪽. [본문으로]
  6. 기광서, 「훈령으로 본 소련의 미소공동위원회 전략」, 『역사문제연구』 24, 2010, 299~335쪽. [본문으로]
  7. 이재훈, 「해방전후 소련 극동정책을 통해 본 소련의 한국인식과 대한정책」, 『사림』 20, 2003, 39-86쪽; 이재훈, 「해방 직후 북한 민족주의세력에 대한 소련의 인식과 정책」, 『역사비평』 70, 2005, 274-301쪽. [본문으로]
  8. 전현수, 「한국 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 『쉬띄꼬프일기』를 중심으로」, 『쉬띄꼬프일기』, 국사편찬위원회, 2004. [본문으로]
  9. 정성임은 자신의 글에서 소련의 1차 자료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 각주로 달아 놓았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문서보관소의 열람증을 얻기 위해서는 소련 내 연구소나 대학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특히 외무성 문서보관소의 경우, 열람 허가에는 일반적으로 약 1개월간의 신원확인기간이 소요된다. 문서열람은 제출한 연구주제와 직접 관련된 것만 열람할 수 있고, 그 외에는 목록조차 확인이 불가하다. 한 문건의 최대 열람기간은 1개월로 연구자가 중복되는 경우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정성임, 앞의 글, 1999, 15쪽, 각주 18번. [본문으로]
  10. 박태균은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에 관해 “사실 자체에 대한 확인 작업이 급선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박태균, 앞의 글, 1991. [본문으로]
  11. 와다 하루키, 앞의 글, 1983. [본문으로]
  12. 사꾸라이 히로시에 따르면, 3차 확대집행위원회는 김일성의 ‘민주기지’ 관련 언술이 처음 나온 회의였다. 사꾸라이 히로시, 「북한노동당의 통일정책 -민주기지노선의 형성-」, 연세대대학원 북한현대사 연구회편, 『북한현대사 I: 연구와 자료』, 공동체, 1989, 255쪽. [본문으로]
  13. 전현수, 「해방직후 북한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소장 북한관계자료의 검토-」, 『역사와현실』 10, 1993, 295-313쪽; 와닌 유리 와실리비치, 전현수 역,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해방직후 한국관계 자료들」, 『역사비평』 26, 1994, 351-367쪽. [본문으로]
  14. 전현수, 「해방 직후 북한자료 해제 2 - 러시아생산 자료 -」, 『북한현대사 문헌연구』, 백산서당, 2000, 157~198쪽. [본문으로]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