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9:18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6·25전쟁에 관한 미육군의 공식역사 5부작 중 두 번째 편이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 19517월 휴전협상부터 1953727일 협정 조인까지를, 내용적으로 개성과 판문점에서 벌어진 지난했던 협상의 과정과, 그것과 결부된 전선에서의 상황을 다루었다. 저자는 마지막 장(23回顧)에서 책의 내용을 천막(=협상)’전선부분으로 나누어 요약했고, 6·25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UN(=미국)의 성공적인 공산침략 저지 인도적인 동기의 성공(=비강제송환) 공산중국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인식 미국 국내에서의 변화이다. 이상 저자의 주안점을 다음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를 개괄하면서 그라즈단제브(A. J. Grajdanzev)나 맥큔(G. M. McCune)의 책 등 당시 입수 가능했던 최신 자료를 이용했다.[각주:1] 이 외에도 저자는 서한(Ltr), 미공군사 같은 다른 책, 신문(New York Times ), 미국 국회청문회록, 전갈(Msg), 각급부대 및 지휘관 보고서(Rpt), 메모, 협상록(Transcript), 국방성 소책자(Pamphlet) 및 보도자료(Press Release), 국무성 告示(DoS Bulletin), 결정서(Decision) 등을 이용했다. 전반적으로 미국 전구사령관(Theater CDR)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염두에 둔 채 휴전협상의 추이와 전선에서의 충돌을 서술했고,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와 동향을 추측했다.

 

밀당을 통한 UN의 성공적인 공산침략 저지

저자는 6·25전쟁의 결과를 꽤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결국 UN은 공산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동시에 전투와 정전협상에 있어서 하나의 전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350). 또한 명목상 소규모 병력만을 파견한 21개국 군대는 UN의 정당성을 드높인 하나의 사건이다. 한편 미국은 극동에서 책임을 덜길 원하였고, 현지에서 자유우방군의 창설과 증강을 추구하였다(241). 전쟁말경부터 한국군은 북한군보다 우세하게 되었고, 이후 아시아에서 공산침략에 대한 보루로서 기능했다.

협상의 빈번한 휴회 및 속개는 전선에서의 충돌강도와 빈도에 여파를 미쳤다. 전장에서의 우세가 적의 회담재개를 불러왔다는 설명에서 파악할 수 있다(357). 그러나 성공에 뒤따른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차치하고서라도, UN군의 전쟁노력을 성공적이었다고 서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2년간의 낭비로 보는 것이 2년간의 성공적인 노력으로 보는 것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인도적인 동기의 성공(=자원송환)

자원송환(Voluntary Repatriation)과 자동송환(Forced Repatriation) 간의 원칙대결은휴전협상 동안 지난한 문제였다. 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모든 포로들은 적대행위의 종결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석방·송환돼야 했고, 6·25전쟁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제네바 협정의 강제성이나, 개인의 意思 등과 같이 제네바 협정에서의 생략된 부분에 주목했다(100). 그리고 미국과 북한 모두 공히 제네바 협정의 생략된 부분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원칙의 대결 이면에는 승리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던 것 아닐까. 또한 그 대결의 장에서 강조된 인도적이라는 수사는 이후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해주는 전가의 보도로 기능했다.

저자는 포로문제의 최초 책임을 북한에 두었고, 이후부터 포로문제를 두고 양측의 공방이 오갔다고 썼다. 이후 저자는 일괄교환(=강제송환)”의 원칙을 깬 미국에, “인도적인 의미에서 포로들에게 자결권을 주었다고 면죄부를 발행했다. 그러나 저자의 태도는 공산진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확연히 달라진다. 제네바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했으나, 저자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중공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인식

저자가 6·25전쟁의 결과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한 요소는 바로 중공의 흥기이다. 인민지원군의 首位로서 휴전협상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펑더화이(彭德懷)를 비롯하여, 이 책에서 드러난 공산진영의 주축은 소련이 아닌 중공이다. 저자는 휴전회담 동안 북한은 중공군과 함께 석상에 나타났고, 북한에 대한 소련의 발언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주장했다(351).

 

미국 국내에서의 변화

6·25전쟁은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도 광범위한 변화를 촉진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약화되고 이완된미국의 군사력은 6·25전쟁을 기화로 개혁과 재정비에 착수하게 되었다(352). 또한 소련을 맹주로 하는 공산권이 언제든 미국에 도전할 수 있다는 가정이 출현했고, 6·25전쟁을 계기로 이러한 가정은 강화되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戰前상황(status ante bellum)으로 돌아가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일정 규모 이상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戰費 마련이 필수라는 인식이 등장하였다.

 

이 책은 슈나벨의 정책과 지도에서처럼 수사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한 장(15)을 할애하여 제한전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고, “靜態戰이나 停滯상태, “전쟁목적의 결여등을 계속 언급했다. 또한 적극적 방어”(9)에서와 같이 전쟁의 성격을 계속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51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UN군은 9,000출격하여 적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다.

 

이 책을 통해 6·25전쟁의 세부논점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문제적인 서해5도 문제(117)공평하다고 평가받은 1952년의 마이어협정(157)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전적으로 미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부분들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 Andrew J. Grajdanzev, Modern Korea,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1944), George M. McCune with Arthur L. Gray, Jr., Korea Toda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0) 등. 그라즈단제브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고정휴, 「A. J. 그라즈단제브와 《현대한국》」, 『한국사연구』 126권, 2004를 참고. [본문으로]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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