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4. 9. 21. 10:16

필자: 길스 트레믈렛(Giles Tremlett)

일시: 2014년 9월 18일(영국 시간으로 오전 6시)

출처: 가디언(The Guardian)의 길게 읽기(The long read) 연작.

 

호세 무히까: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대통령?

(José Mujica: is this the world’s most radical president?)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까는 대통령궁보다는 아주 작은 집에서 지내고, 월급의 9할을 기부한다. 그는 대마초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커다란 유산은 혁명적인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다.

 

 

에모 마니세(Emo Mannise)는 열여섯 살 때 현재 우루과이 대통령인 호세 무히까(José Mujica)를 처음으로 만났다. 1969년의 어느 봄날 마니세와 그의 누이 베아트리즈(Beatriz)는 몬테비데오의 아파트 집에 있었고, 마침 미래의 대통령은 손에 권총을 들고 승강기에서 나와 그들의 펜트하우스(penthouse)로 들이닥쳤다. 그는 고함쳤다. “돌아서서 입 닥치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마니세는 곧장 그들, 즉 대담하고 격렬한 투파마로스 중 가장 악명 높은 이의 파리한 눈매와 굵으면서도 물결치는 갈색 머리칼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니세는 처음의 공포감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상할 정도로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필자가 이제는 62살의 여행사 직원인 마니세를 그가 즐겨 찾고 거대한 라플라타 강의 탁한 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몬테비데오의 한 서점에서 만났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거기 있던 젊은 총잡이가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모습이 기억나는군요.” 그들은 소아마비를 앓아 바퀴의자를 썼던 마니세의 누이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무히까는 그녀에게 걱정 마세요, 비에히따(viejita). 괜찮을 겁니다. 이 일은 당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다정다감한 말투의 비헤이따, 아담한 노부인이란 말은 전형적인 무히까의 느낌이었다.

 

마니세의 양아버지인 호세 페드로 푸르푸라(José Pedro Púrpura)는 우루과이의 극우 및 무기거래와 연계돼있던 악명 높은 판사였다. 강도들이 문서와 무기를 탈취하여 떠났으나 정작 마니세가 화가 났던 이유는 학교숙제를 하기 위해 자기가 쓰던 타자기를 투파마로스가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날 전화가 울렸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어제 찾아갔던 이들이오라고 말했다. 갑자기 마니세는 다시 두려워졌다. 왠지 강도들은 타자기에 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는 마니세에게 타자기를 되찾고 싶으면 근처 건물의 로비(lobby)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타자기는 정말 거기 있었어요. 그들은 내 양아버지에게 보내는 활자로 된 전갈도 놔두었어요. 거기엔 박사, 조심하시오. 우리가 보고 있소.’라고 적혀 있었지요.” 이듬해 투파마로스는 푸르푸라 박사를 암살하고자 건물에 기관총 포화를 퍼부었다.

 

마니세는 5년 전 열린 우루과이 대선에서 무히까와 그가 속한 광역전선(Broad Front)에 투표했다. 광역전선은 우루과이 좌파정당들의 연합체로 지난 2005년 무히까의 선임자이자 온건성향의 타바레 바스케즈(Tabaré Vázquez)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이전까지 정국을 지배했던 콜로라도당과 국민당을 처음으로 뒤엎은 바 있다. 마니세는 필자에게 무히까에게 씁쓸함을 느낄 거라고 기대했을지도 몰라요.”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야말로 언행일치의 유일한 사례죠.” 왕년의 혁명가는 여전히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을 고수하지만, 우루과이 정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유례없는 경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무히까의 인기는 높지만, 대통령은 연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용적인 좌파정부는 올해 1026일 치러질 대선에 출마할 것이다.

 

무히까는 신랄한 어조로 진실을 말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012년 리우+20 정상회의에서와 이듬해 뉴욕의 국제연합에서 만연한 소비주의를 통렬히 질타하는 연설은 유튜브(YouTube)에서 3백만이 넘는 시청 수를 기록했다. 그는 리우에서 청자들에게 독일 가정이 보유한 자동차의 수와 같은 수만큼의 차를 인도인들이 가지게 된다면 지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산소는 얼마큼 남게 될까요?” 국제연합에서는 각국 대표단에게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는 낭비적이고 비싼 정상회의에 가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혹자는 13년에 걸친 그의 옥살이를 떠올리며 그를 라틴아메리카의 넬슨 만델라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대마초 관련 법률과 함께 동성결혼 및 합법적인 낙태를 통과시킨 공전(空前)의 사회자유주의자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진 가장 큰 요인은 바로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대다수 우루과이인들이 엘 페페(El Pepe)라고 부르는 이 남자는 25년 된 폭스바겐 비틀 자동차를 몰고, 전원(田園)의 작은 집에서 살며, 월급의 9할을 기부하는데 쓴다. 의도적으로 거칠고 실용적인 무히까식() 정치는 우루과이의 빈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했을 뿐더러, 중간계급의 일부에게마저 그 효과가 먹혀들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위대한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를 초드는 라틴아메리카의 여타 포퓰리스트(populist) 지도자들은 유독 실패하는 묘기나 다름없다. 무히까의 비판자들은 그가 본질보다는 형식, 즉 총과 혁명적인 사상을 한쪽으로 치워놓은 매력적인 노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대안적인 좌파정부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큰 실험실로 거듭난 라틴아메리카대륙에서 각자는 서로가 마법의 공식을 찾았다며 아옹다옹하는 중이다. 동시에 대다수는 무히까가 영웅인지 아니면 변절자인지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

 

1969년 여름 한 경찰관이 몬테비데오에 있는 작은 투자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그 은행은 한 정부각료가 부분적으로 소유하던 것이었다. 직원은 경찰관을 안으로 들였고, 곧 그가 투파마로스 대원임을 알게 됐다. 몇 명의 유격대 동료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오늘날의 가치로 10만 불()에 상당하는 돈을 가져갔고, 은행계정 원장(元帳)을 요구했다. 직원 중 한 명이었던 루시아 토폴란스키(Lucía Topolansky)투파스에게 은행이 불법적인 외환거래를 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마리아 엘리아(Maria Elia)는 은행을 습격한 유격대원 중 한 명이었다. 투파마로스는 원장을 검사의 집 앞에 갖다놓았고, 곧이어 불법거래에 연루됐던 몇 명이 수감됐다. 이는 투파마로스의 특징인 무장 선전(宣傳)”의 전형이었다. 즉 폭력은 나쁘지 않았으며, 좋은 일로 드러났다면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토폴란스키 자매는 상류충들이 모여사는 포시토스(Pocitos) 구역의 한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재 우루과이 선임 상원의원인 루시아는 몬테비데오에 위치한 국회의 사무실에서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우루과이에 리퀴요(riquillos), 즉 넉넉하지만 부자는 아닌 사람들은 있지만 리코(ricos)는 없어요.” 그녀는 은발에 밝은 갈색 눈매의 소유자로 탈옥한 후 모습을 바꾸기 위해 투파마로 외과의가 그녀의 코를 성형하기도 하였다. 루시아는 무히까와 20여년에 걸친 동거 및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돼 13년간 떨어져 생활한 끝에 마침내 2005년 그와 결혼했다. 무히까가 대통령이 됐을 때, 그녀는 남편에게 취임 선서를 하도록 시켰다. 그녀는 우리 둘을 체포했던 군 연대(聯隊)는 입법회의건물의 보초를 서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때 우리의 친구들은 웃고 떠들었죠. ‘이제 군대가 당신을 예우할 시간 이예요!’라면서요.”

 

토폴란스키의 어렸을 적 별명은 라 플라카(말라깽이)였으나 원체 강인했기 때문에 투파마로스는 그녀를 라 트론카(그루터기)라고 불렀다. 무히까는 아내와 비슷하게 강인한 의지를 지녔던 여성이었던 어머니 도냐 루시(Doña Lucy)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무히까가 고작 8살이었을 때 작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가계를 돕기 위해 시골과 같은 파소 데 라 아레나(Paso de la Arena)의 빵집에서 배달 일을 했고, 집 뒤의 개울에서 칼라(Arum lilies)를 채집해 내다팔았다. 우루과이는 전쟁으로 찢겨진 유럽에 양모와 소고기를 수출하며 찬란한 20세기를 시작했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1인당 소득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국토는 작았으나 하루 8시간 노동과 출산 휴가 등 진보한 사회입법의 혜택을 누린 나라가 바로 우루과이였다. 혹자는 이를 두고 라틴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1930년과 1950년에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도 했으나, 인구는 결코 350만을 넘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무히까가 자라나면서 기적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청년 무히까는 인기 있던 좌익 정치가인 엔리케 에로(Enrique Erro)의 밑에서 일하였다. 에로는 혁명 이후의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나 정치적 입지를 높인 바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의 대다수가 위기와 쇠퇴의 피해자로 전락하자 우루과이인 작가였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라틴아메리카의 절개된 정맥(The Open Veins of Latin America)를 썼고 이는 라틴아메리카대륙 좌익의 새로운 성서로 거듭났다. 갈레아노는 1971빈곤으로 인한 라틴아메리카의 인간 살해는 비밀이라고 썼다. “이제는 이를 꽉 물며 고통에 익숙해진 공동체 위로 매년 히로시마에 떨어트린 폭탄 3발이 소리 없이 터진다.” 만연한 인플레이션과 정체된 경제로 인해 우루과이가 고통 받자 무히까와 그의 동지들은 쿠바의 사례를 따라 옛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일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았다. 우루과이에는 숨어들어갈 산지가 거의 없었고, 몬테비데오시() 주변에는 양들과 헤리퍼드(Hereford)종의 가축으로 가득 찬 비옥한 평야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18세기 페루의 혁명가였던 투팍 아마루 2(Túpac Amaru II)의 이름을 딴 도시유격대로 거듭났다. 투파마로스는 한편에서 사제도 가담해 싸우는 실로 광범한 운동이었고, 대가가 컸을 때에도 결코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역사는 곧 교조보다는 시험 및 오류의 역사였다. 그들은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곧 대담한 연출로 명성을 얻었다. 판도(Pando) 마을을 습격할 때에는 장례행렬로 위장하여 시내의 중심가를 걸었고, 안락한 휴양마을인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의 산 라파엘(San Rafael) 카지노를 털고 나서는 카지노 직원들에게 사례금(tips)을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타임(Time)은 그들에게 로빈 후드(Robin Hood) 유격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총잡이들은 결국 총 쓰기를 그만두게 됐다. 판도 습격에서 6명이 사망했다. 19703월 무히까는 술집에서 경찰에게 신원이 들통 났다. 엘 페페는 권총을 뽑았다. 경찰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무히까는 6번이나 총에 맞았다. 그는 이후 몬테비데오 최남단 지점에서 라플라타 강을 면해 있는 현란한 상점가(mall)로 바뀌게 되는 푼타 카레타스(Punta Carretas) 교도소로 이송됐다. 무히까는 이곳에서 두 번이나 탈출했다. 오래도록 주변 지역 중에서 가장 고요하고 온건한 나라로 간주되던 곳에 시위가 번지자 마니세 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들은 학생시위에 합류했고 경찰에게 짱돌을 던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못 흘러갔다. 납치와 포격, 냉혹한 처형은 투파마로스의 낭만적인 명성을 갈가리 찢었다. 군 병력이 소집됐고, 투파스는 1년이 채 안 돼 궤멸됐다. 19728월 무히까는 우지(Uzi) 기관총과 외투 안쪽에 수류탄을 단 채 한뎃잠을 자다가 군에게 잡혔다. 19736월 콜로라도당의 권위주의적인 목장경영자 대통령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Juan María Bordaberry)는 민·군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주주의를 종식시켰다. 많은 이들이 투파마로스를 탓했다.

 

9명의 투파마로 지도부는 감옥에서 군부대로 옮겨졌고, 투파마로스 단체가 다시 나타나면 처형될 인질의 신세가 되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였던 마우리시오 로센코프(Mauricio Rosencof)는 무히까가 수감된 바로 옆의 조그만 감방에서 11년을 복역했다. 로센코프는 필자에게, 인질들은 수년간 오직 벽을 두드려서 모스부호를 보내는 식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화장실은 하루 한 번만 허락됐기에 그들은 물병에 소변을 보았고, 물 또한 귀했기 때문에 침전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나머지를 마시곤 하였다. 총상으로 내장을 심각하게 훼손당한 무히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독방생활은 그들을 반미치광이로 몰아갔다. 페페는 천장에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상상속의 잡음은 그의 귀를 멎게 했다. 이제 81살인 로센코프는 필자에게 그는 비명이 나오지 않도록 입에 돌을 물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무히까는 그가 간절히 원하던 하나의 물건, 즉 요강을 얻기 위해 싸웠다. 인질들에게는 왕왕 가족들의 면회가 허락됐고 어머니 도냐 루시는 그에게 요강을 가져다주었으나 간수들은 결코 전달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간수들을 위한 연회가 베풀어졌을 때 무히까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손님들 앞에서 무안해진 교도소장은 결국 그에게 요강을 건네주었다. 그들이 새로운 군부대로 이송될 때마다 무히까는 그의 유일한 소유물이자 옥리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상징을 고수했다. 로센코프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그는 요강을 문질러 닦지 않았어요. 우리 모두는 그 때 얻은 경련(tics)을 가지고 있죠. 페페가 석방됐을 때 그는 모든 짐을 가지고 나왔어요.”

 

***

 

몬테비데오에서 나와 무히까의 차크라(chacra), 즉 전원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따라가면서 당신은 교외 공업단지와 오염된 강, 작고 땅딸막한 집들이 모여 있는 평평하고 넓게 툭 트인 땅을 지나게 된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노쇠하진 않았다. 세기 초에 세계적인 부채위기는 많은 이들을 극빈으로 몰아갔으나, 이곳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을 괴롭히는 아릴 정도의 빈곤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난다. 늙은 말들은 노변에 묶여있고, 넓은 녹지의 가에서 풀을 뜯는다. 돌개구멍이 나 있는 아스팔트길 옆에 있는 거칠게 손수 칠한 주석판자 표지판이 진흙길 너머 농장으로 안내한다. 신난 개들이 방문객을 맞기 위해 달려 나왔으나 이내 가스통을 배달하는 유개 화물차의 뒤를 쫓아 질주한다. 근처의 밭에서는 수탉이 울고 자고새가 걸어 다니는데 모두 은밀히 움직이는 농장 고양이의 밥이다. 하얀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농장에 딸린 밭에서 근대를 자르고 있었다.

 

무히까는 새끼 사슴의 털로 만든 플리스(fleece)와 회색 바지, 양말에 샌들 차림으로 그의 작은 집에서 나왔다. 그에게 플리스는 분명한 개선이었는데, 2009년 그에게 누더기가 된 작업용 상의를 그만 입게 한 무히까 대선 팀(team)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는 그의 눈매 주위를 더욱 파리하게 했고 몸의 선에는 살집을 더해주었다. 두껍고 부스스 헝클어진 은발 머리는 단정히 빗질돼있었는데, 그것은 대선에서 얻은 또 하나의 습관이다. 다리 3개의 개(mutt)인 마누엘라가 투지를 보이며 뛰어댔다. 무히까의 단층집은 나뭇잎에 때문에 반쯤 가려져 있었고, 온갖 칙칙한 상자와 항아리로 가득한 좁은 시멘트 통로 주변으로 기둥이 세워져 골이 진 금속제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겨울비가 군데군데 있는 회반죽 작업을 돋보이게 했다. 대통령은 경고로 필자를 반겨주었다. “진흙을 조심하세요!” 좁고 기다란 거실에는 싸구려 사무용 의자와 책상, 책장, 나무로 뒤를 댄 불편한 의자 2개와 작은 탁자, 포효하는 통나무땔감 난로와 아주 오래됐지만 흠결하나 없이 복원된 푸조(Peugeot) 자전거가 있었다. 그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난 저 자전거를 60년 동안이나 가지고 있었지요.”라며 비전문가 경주자였을 때를 상기했다. 집 안의 다른 두 방은 유튜브에서 봤던 우루과이인들에게는 친숙한 것이었다. 일전에 대통령은 한국에서 온 텔레비전 촬영팀에게 조니 워커(Johnny Walker)와 우루과이산() 사탕수수 증류주를 대접하기 전에 그가 손수 제작한 침대와 오래된 냉장고 안의 내용물을 보여준 바 있다. 우리의 머리 위로 죽은 파리로 가득한 거미줄이 매달려있었다. 무히까는 사무용 의자에 벋정다리로 앉아 관절을 풀어주며 필자와의 논전(論戰)을 준비했다.

 

무히까는 프라도(Prado) 구역에 있는 백년이나 된 대저택인 대통령궁에 살 수 있었으나 이곳을 선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개인적 자유를 위한 투쟁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물질적인 의미에서 삶을 너무나 복잡하게 만든다면 그걸 유지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들어갈 겁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4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같은 이웃 속에서 같은 사람들, 같은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해서 보통사람이길 그만둘 순 없는 노릇이죠.”

 

무히까는 검소함에 걸맞은 입담을 지녔다. 바로 전날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노동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청중들은 그가 감옥에서 배웠다고 단언하는 상스러운 어구들의 속사포를 견뎌야만했다. 무히까가 에즈 라 호다(씨발)!”라고 하자 필자 뒤에 있던 한 여인은 기뻐 꽥꽥거리기도 했다. 그는 필자에게 우리 인민들이 어떤지는 제가 압니다.”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교양 있는 몇몇 이들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대통령 각하(el señor)라면 완전히 기력이 없는 무슨 조각상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과 도무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는 신경과 심장, 살과 뼈로 이뤄진 노인입니다. , 물론 내가 이것저것 손을 대긴 하지만, 항상 선의를 지니고 합니다.”

 

그는 내가 투파마로였기 때문에 대통령으로 뽑힌 건 아닙니다.”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래, 내 과거를 숨기면서 하진 않았어요.” 심지어 유격대 시절에도 그는 폭력을 최소화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그는 공공연히 현대전을 미워하지만, 또한 행복한 평화주의도 경멸하며 폭력으로 얼룩진 그의 과거에 대해 후회를 보이려 하진 않았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때 당시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무히까는 구원(舊怨)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를 투옥하고 고문했던 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수중에 있던 도구였다. 우루과이인들은 그네들의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여러 모순들 중 한 가지를 던져버리면서도, 무히까를 대통령으로 뽑은 날에 국가적 억압에 연루된 많은 이들을 보호해주는 사면법을 존속시키는데도 표를 던졌다. “난 고통 받았어요, 하지만 증오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한 나날들을 살아내지 못했더라면 난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거예요.”

 

무히까의 전원 주변에는 작은 집들이 점점이 놓여있었고, 대개는 노인인 14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대통령은 집세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나이든 친구들의 집 같은 겁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무정부주의자 아니면 그가 말하듯, 좌익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였다. “나는 절반의 또는 상당한 자유지상주의자입니다. 꿈이자 이상향(utopia)인 셈이죠. 고대인들이 스스로를 다스렸다면 아마도 미래의 언젠가 사람들은 다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 겁니다.” 투사로서 일평생을 보낸 79세의 대통령은 좌파진영 비판자들의 실망에 대해서도 이상주의와 실용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세계에 대한 좌익의 전망은 미래의 이상향을 상상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권리는 없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오늘날을 더욱 낫게 만드는 싸움을 중심적인 과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

 

우루과이 국기의 색인 담청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새겨진 대통령의 현장(懸章)이 훌리오 마리아 산기네티(Julio María Sanguinetti)의 책으로 가득한 서재 가운데 있는 유리로 씌운 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참으로 푼타 카레타스 근처 조용한 거리에 있는 집안의 침울한 공부방이라 할만 했다. 소맷동 단추와 빛나는 블레이저(blazer) 단추 그리고 파스텔풍 녹색의 비단 넥타이(tie)는 말없고 귀족적으로 세련됐다는 인상을 더해주었다. 그의 집사가 우리를 위해 커피를 가져다주었을 때 산기네티는 필자에게 나는 임기를 두 번 보낸 세 명의 우루과이 대통령 중 한명이지요.”라고 일러주었다. 그의 콜로라도당은 구()투파마로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좌경 기독교민주주의자들이 뭉친 무히까의 광역전선에 다수의 유권자를 내어주며 패배했다. 산기네티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결국 격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재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러나 독재의 계기는 바로 투파마로스였습니다. 무히까가 쏜 모든 총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산기네티는 독재기간 동안 정치에서 배제됐으나, 결국 1984년 군부와의 협상을 도울 수 있었다. 이듬해 산기네티 집권 1년차에 인질들이 풀려났다. 석방에 즈음하여 무히까는 자신의 요강을 작은 천수국(千壽菊)의 정원으로 바꿔놓았다. 로센코프는 무히까가 그의 요강을 자랑스럽게 들고 감옥에서 나와 지지자들이 흔드는 국기(國旗)의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기억했다.

 

1980년대와 90년대 산기네티의 콜로라도당과 그들의 오랜 경쟁자인 국민당이 이끌었던 우루과이 정부는 옅은 수준의 신자유주의적(neoliberal)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온건한 우루과이인들은 적어도 적당한 보증 없이는 국영기업이 사유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국민투표에서 다음과 같이 의사를 표현했다. ‘국영기업은 여전히 공공의 것이다.’ 가장 실험적이었던 투파마로스는 폭력적인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1989년 광역전선에 합류하여 좌파의 목소리를 드높였고 중도주의(centrism)의 악폐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대다수는 신자유주의적 라틴아메리카의 썩어빠진 구조가 붕괴할 것이라고 믿었고, 다시 한 번 무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투파마로스의 선거정치로의 놀라운 이행을 연구한 정치학자 아돌포 가르체(Adolfo Garcé)는 필자에게 구혁명가들이 양면적인 방식, 즉 필요할 경우 지하로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도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투파마로스는 아마도 언제든 지하로 들어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된 조직이었다고 하는 편이 최선의 설명방식일 겁니다.”

 

우루과이의 투표방식은 복잡한 편이다. 유권자들은 단순히 정당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정당 내의 계파를 선택해야 한다. 즉 양원(兩院)과 대통령을 뽑는 것에 더하여 종종 특정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동시에 진행하는 식이다. 1994년 선거에서 광역전선이 승리에 필요한 오직 몇 점만을 남겨두고 있었을 때, 투파마로스가 이끄는 계파는 여전히 규모가 작았고 99석 중에서 오직 2명의 대표만을 보유했다. 무히까가 바로 그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상적인 옷을 입은 채 낡은 베스파(Vespa) 오토바이를 타고 국회에 출근했고, 발언할 때는 항상 비속어를 섞어 썼다. (“그는 명민한 문장을 생각해내곤 했지만 언어 자체를 파괴했지요.” 산기네티의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차크라의 작은 집에 살았고, 꽃을 기르며, 외양이나 재산 또는 몬테비데오 술집의 계산대에서 말싸움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에는 크게 관심없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민중의 영웅 무히까는 그렇게 탄생했다.

 

***

 

루시아가 페페에게 대통령 취임 선서를 시켜야 했던 날, 무히까의 공보담당관인 판초 베르나짜(Pancho Vernazza)는 오전 8시에 그를 만나 연설을 검토하기로 약속했었다. 몬테비데오의 혈기왕성한 광고책임자인 베르나짜는 약속한 시각보다 몇 분 늦게 도착했고, 초조해진 무히까가 이미 자리를 떠났음을 알게 됐다. 베르나짜는 필자에게 그는 자신의 트랙터로 한 바퀴 운전을 하러 나간 것이었죠.”라고 말해주었다. 무히까는 광역전선 내 경선에서 (결국 무히까 정권의 부통령이 되는)온건한 사민주의자인 다닐로 아스토리(Danilo Astori)에 맞섰을 때부터 베르나짜와 함께 했고, 기업친화적인 정권을 운영하겠다고 밝혀 결국 경선에서 승리했다. 베르나짜는 그 경쟁이 우익 무정부주의자와 좌익 무정부주의자 간의 회동이었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사업을 하는 지인들은 만일 무히까가 선거에서 이길 경우 나라를 뜨겠다고 위협했다. 베르나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고업에 40년간 몸담고 있으면서도 그처럼 배우는 능력과 유연함을 갖춘 사람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무히까는 내가 아는 어떠한 정치인들 중에서도 가장 탈권위주의적인 인물입니다.” 베르나짜는 또한 그가 혼란스럽고 체계적이지 않으며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고 보았다. 하지만 토박이 출신으로 정계에 지식을 갖고 있으며 즉흥의 달인인 그는 무히까가 찢어진 옷을 입은 반역자에서 진지한 대통령 후보로 재빨리 변모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말을 입에 달고 의치(義齒)를 하지 않으며 헝클어진 머리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자를 덜 두려워하게 만들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페페는 스스로를 팔았다. 투파마로스는 항상 자기네들을 판촉 하는데 날카로운 감각을 지녔고, 무히까의 번뜩이면서도 야단스러운 기지(機智)는 완벽히 효과적이었다. 베르나짜는 무히까는 그 자신의 형상화에 빠진 꼴이었죠.”라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는 개성마저도 바꾸어버렸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유연하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머리는 빗겨졌고 치아는 제자리를 찾았다. 무히까는 대통령이 되었고, 토폴란스키가 이끄는 그의 계파는 광역전선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거듭났다.

 

무히까의 진보적인 사회 개혁정책은 국제적으로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지만, 그 자신은 오히려 그의 추종자들보다 그러한 소식에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유감과 인권에 맞는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계급차이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활동가들은 그가 타고난 사회적 진보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한 성(보건 활동가는 그는 좀 크로마뇽인 같아요, 정말로.”라고 말했으나, 임신 첫 12주 내의 낙태를 합법화한 것에는 감사해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바스케즈 전 대통령 또한 이전에 광역전선이 집권했을 때 유사한 법에 투표했다. 하지만 작년 동성결혼에 성공한 첫 번째 연인인 세르히오 미란다(Sergio Miranda)와 로드리고 보르다(Rodrigo Borda)는 무히까에게 가장 큰 공로를 돌리지는 않는다. 미란다는 그들 내외가 동성애자 관광사업을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필자에게 많은 이들이 동성결혼을 위해 수년간 싸웠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입장에서 대통령은 아직 남자 동성애자와 여자 동성애자를 성적으로 양면적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무히까는 우리가 하는 일은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무언가를 인정하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게 최선입니다.” 그는 빈곤과 불관용으로 인해 벌을 이중으로 받게 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라고 보았다. “성적으로 양면적인 분들이 만일 가난하기까지 하다면 정말로 큰 문제를 갖게 되는 것이죠. 만일 그들이 부유하다면 사회는 그들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잔혹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이 내가 보는 한 진실입니다.”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가장 차별받는 여자들은 대개 빈곤한 처지입니다.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행태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 가장 공격적이죠. 우리 사회는 가난한 소녀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습니다. 많은 자녀와 함께 버려진 처지에 이르게 된 여자들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평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입니다.” 대선운동 기간 중에 그는 자신들이 탄압받고 있다고 여기는 지적인 여성들,” 진짜 하인 처지의 여자 청소부에게 동지(compañera)”라고 부르는 자들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급료의 거의 9할 모두를 편모(偏母)들에게 기부한다.

 

무히까는 결코 대마초를 피우진 않았으나, 거의 중독 수준의 애연가이다. 방문객들은 대통령과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루시아가 모는 차의 경적 소리에 허둥지둥 담배를 끄는 광경을 종종 연출한다. “금지법 자체는 놀랄만한 실패였습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같은 걸 하면서 할 순 없죠. 우리는 대마초의 판매를 조절하기로 선택했고, 그것은 당연히 국가가 떠맡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마초 흡연자를 양지로 불러내어 당신은 과도한 편이예요. 스스로 대마초 문제와 맞서야 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싶은 겁니다. 이는 정도를 제한하는 문제이지요.” 야당들은 무히까의 이러한 실험이 선거에서 광역전선의 체면을 일거에 날려버릴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부분의 우루과이인들은 이 법을 좋아하지 않는 실정이고, 다시 대표로 출마하는 바스케즈가 다음 달 열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같은 법은 퇴장당할 것이다.

 

대마초법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파소 데 라 아레나 안의 무히까의 고향 근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아스팔트길이 진흙길로 바뀌는 곳이며 집들은 대개 작고 가난하다. 젊은이 무리가 저녁 어스름의 가운데에 서있다. 추적보도원이면서 공사장 인부의 아들인 왈테르 페르나스(Walter Pernas)는 우리가 뒷길에 다다르자 파스타 재료(pasta base)의 아이들이 나타날 때로군요.”라고 설명했다. 파스타 재료란 코카인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독성의 물질로 분해 코카인(crack cocaine)과 유사한 효과를 가지며,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무히까의 시도를 망치는 주범이다. 이는 거의 틀림없이 우루과이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이자 빈곤을 악화시키면서 범죄를 부추기고 있다. 몬테비데오시 거주자의 1푼 이상[약 만 삼천 명 이상-역자 주]이 파스타 재료를 이용한다. 그 숫자는 가난한 주변부 구역(barrios)에서 증가하고 있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보카(bocas), 즉 마약 시장이 성행한다. 무히까는 대마초에서 나는 이윤을 밀수업자로부터 거둬들이면서도 경찰 자원은 늘이고 있다. 우루과이처럼 극적인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더 이상 직장, 빈곤 또는 경제 자체보다는 폭력과 불안, 파스타 재료를 걱정하게 마련이다.

 

잃어버린 세대지요. 그들은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일자리를 유지할 만큼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페르나스의 말이다. 폭력의 공포는 실재하고 증가하는 중이다. 밤에 길거리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렸던 사람들은 이제 아침까지 기다린다. 한때는 사람들이 너무 배고파져 쓰레기통을 뒤지게 되자 주부들은 남은 음식물을 분리된 봉투에 잘 싸서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파스타 재료 중독이 그들을 덮친다. 무히까가 어렸을 적 일했던 빵집의 주인인 후안 아바테(Juan Abbate)는 언제 한 번은 십대 파스타 재료 불량배들에 의해 배달을 하지 못했을 때를 묘사했다. “그 녀석들은 내 차에 돌을 던졌고 난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벗어나야 했어요.” 10월에 열릴 다음 선거에서 우루과이인들은 성인범죄가 적용되는 나이를 현행 18세에서 16세로 낮추는 사안에 관해 투표할 것이다. 무히까가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부유해졌지만 동시에 약해진 사회를 볼 것이다. 이는 땔나무를 모으고 꽃을 팔고, 시내에서 물고기를 쫓으며 보낸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노인의 탄식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소비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그가 정신의 빈곤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반대하는 그의 담론이기도 하다. “우리네 삶은 더욱 쉬워졌지만, 그것은 동시에 창의성을 앗아갑니다.”

 

무히까의 농가 안에 있는 책꽂이에서 흉상(胸像)의 체 게바라는 담담하게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혁명가였지요.” 대통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내 젊은 시절에 깊숙이 각인됐어요.” 그러나 게바라에게서 영감을 얻어 한 때 외국인이 소유한 공장을 폭파시켰던 남자는 이제 그들에게 세금우대조치를 제공한다. “나에겐 자본주의가 잘 작동해야 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야 하거든요. 너무나 급작스레 자본주의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싸우는 이유인 바로 그 사람들에게 고통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 많은 빵 대신 더 적은 빵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모든 투파마로스가 무히까의 부드럽고 실용적인 사회주의로의 여정에 동행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인질로 잡혀있었던 호르헤 자블라자(Jorge Zabalza)는 최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들은 감옥에 이상을 두고 나왔다.” 대통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몇몇 나이든 동지들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람들이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해요. 삶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거든요.”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경기호황은 대체로 중국의 식량에 대한 필요가 증가한데 기인했다. 이를 통해 많은 수가 빈곤에서 벗어났고, 그 비율은 지난 10년 동안 인구의 4할에서 12푼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같은 기간 동안 극심한 빈곤도 열배 가까이 줄어들었다. 호황은 무히까 및 바스케즈의 임기와 겹쳤고, 경제는 75푼 증가했으며, 공공지출도 5할 가량 증가했다. 우루과이의 빈부격차 또한 좁혀졌는데, 이는 특히 바스케즈 정부가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소득세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겨냥한 사회복지비 또한 급증했다. 우루과이의 모든 초등학생은 무료 휴대용컴퓨터를 가지게 됐으나, 학교제도 일부는 여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우루과이의 기본적인 사회구조 또는 정치구조에서 급격한 변화는 없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복잡한 제도 자체가 그러한 변화를 막는데 기인한다. 예를 들어, 무히까가 제안한 토지세는 법원에서 기각됐다. 정치학자 가르체의 설명에 따르면, 우루과이의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가 많아서 대통령이라도 반드시 대화를 통해 통치해야 한다. 이는 또한 라틴아메리카대륙의 다른 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대중영합주의(populism)를 미연에 방지하는 국가적인 예방접종과도 같은 것이다.

 

새로운 실용주의자로 거듭난 무히까는 더 이상 중국인의 저녁식사와 우루과이인의 농장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세계화에 맞서지 않는다. 세계화는 무히까가 성취한 놀라운 변화에 자금을 대기 때문이다. 그는 필자에게 이것은 꼭 내가 거울에서 나의 주름을 보는 것과 같죠. 난 주름에 동조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난 가능한 한 주름을 관리하기 위해 싸워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기처럼 울기 시작한다면 주름을 바꿀 순 없을 테니까요.”라고 말해주었다. 무히까는 세계화가 불러일으킨 두드러진 실패는 정치적 감시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세계화는 오로지 시장에 의해서만 다스려지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거기엔 정치도 정부도 없는 셈이죠. 각국 정부는 오로지 다음 선거만을 걱정합니다만, 실상 아무도 대처하지 않는 일련의 지구적인 문제들이 존재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승리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 세상이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믿지 않는 것과 같아요. 사람은 물론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으나 깜짝 놀랄만한 능력도 갖추고 있는 동물이거든요.”

 

***

 

무히까는 여전히 계급 간의 전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이지요. 이것은 참으로 전쟁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앗아가고 현실에 의해 엉망이 된 바로 그 전쟁은 현재 대단히 좁은 전장(戰場)에서 치러지고 있다. 봉급 및 노동조합의 권리는 그를 가장 신나게 하는 요소이다. 가르체는 필자에게 무히까가 광역전선에서 자기 계파의 소수자적 위치로 인해 방해를 받았었다고 일러주었다. “기이한 사실은 바로,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던 일군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유권자를 찾는 일의 전문가로 모습을 바꿨으나 결국 체제개혁은 최소한도로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히까가 재임하는 동안 최저임금은 5할 이상 인상됐고, 이는 장차 그의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성큼 다가가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개혁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필자가 우루과이인들에게 무히까가 얼마나 나라를 바꿔놓았는지 물었을 때, 일부는 우루과이가, 그리고 이 나라의 전통인 중용과 대화가 그를 바꿔놓았다고 답했다. 경제학자 에르네스토 탈비(Ernesto Talvi)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히까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입니다.”

 

필자가 만난 왕년의 투파마로스는 돈키호테를 자주 언급했다. 무히까는 필자에게 체 게바라야말로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광인이자 영예에 사로잡힌 협객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어떤 한 젊은 작가는 심지어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현대판 돈키호테로 광고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히까의 단순한 전원에서의 삶이 예증하듯, 개인적인 영예를 위해 영합하길 거절하는 그의 행동에 확실히 들어맞는다. 이상향적인 꿈을 지니고 종국에는 헛된 폭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사랑했던 투파마로스는 풍차를 상대로 싸우는 것의 무모함에 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험적인 정신을 유지하려고 한 무히까는 그의 이상주의와 실용주의를 일치시킬 수 있었다. 이른바 긴축이 외부에서보다 대통령의 집안에서 시행되고 있는 곳에서 변절이라는 비난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대화가 끝난 후 대통령은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나서 필자에게 농장의 건물들을 보여주었다. 먼지투성이 차고에는 녹이 슨 판금으로 된 문이 달린 연청색 폭스바겐 비틀이 주차돼있었다. “이 차는 거의 부서지지 않아요. 그들은 예비품을 거저나 다름없이 줍니다. 보험도 싸고요.” 공직 생활이 끝난 후 대통령의 꿈은 전원 주변의 빈 곳간에 젊은이들을 위한 농업교실을 여는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뜯어고치는데 전념했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았어요.” 그곳을 나오면서 필자는 근대를 수확하는 사람에게 대통령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지요.” 이는 마치 칭찬처럼 들렸다.

 

이 기사는 2014918일에 수정됐음. 이전 기사에서는 에르네스토 탈비의 성을 칼비(Calvi)라고 오기(誤記)했음.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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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 허락을 구하려 했으나 답장을 못 받은 채 올려 공개하는 글이다. 문제가 될 경우, 바로 삭제하겠다.

    2014.09.28 10:1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