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우한 유년시절과 소년시절 (1898년~1916년)

2. 상군에 입대하다 (1916년 3월~1921년 가을)

3. 가난한 사람을 구할 뜻을 세우다 (1921년 가을~1925년)

4. 중국공산당을 찾았다 (1926년~1928년 4월)

5. 평강 봉기 (1928년 봄~1928년 7월)

6. 정강산으로 가다 (1928년 7월~1929년 7월)

7. 상악감변구로 다시 돌아오다 (1929년 8월~1930년 6월)

8. 장사를 들이치다 (1930년 6월~1930년 9월)

9. 제1차~제4차 반"포위토벌" 투쟁 (1930년 9월~1933년 2월)

10. 제5차 반"포위토벌 전후에 왕명 노선을 점차 인식하게 되다 (1931년 11월~1934년 9월)

11. 장정으로부터 3대 주력이 회사할 때까지 (1934년 10월~1936년 12월)

12. 항일전쟁 (1937년 7월~1945년 8월)

13. 해방전쟁 (1946년~1949년 10월)

14. 항미원조 (1950년 10월~1953년 7월)

15. 려산회의 전후 (1959년)


부록


1. 1959년 7월 14일 모주석께 드린 팽덕회동지의 편지

2. 팽덕회동지와 나누신 모주석의 담화 (발췌) (1965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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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이 조인된지 63주년인 밤이다(우리 할머니께서 25살이었을 때). 김선호 선생님 언급을 듣고 적는다. 전쟁, 참 무섭다. 증언을 들어보면 공포가 이내 육박한다. 그래서 오늘날 "여차하면 쓸어버리자"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 "비례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등 전쟁을 옹호하는 수사는 악랄하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선에 설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나같은 예비군도 안 끝난 젊은이들이 가장 먼저 징집돼 총대를 맬 것이다. 오로지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전쟁이 연일 벌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시리아, 이라크, 아프간, 우끄라이나 등 주변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전과 독일, 프랑스 등 중심부에서 터지는 테러공격 등. 전쟁은 결코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너무나 많은 수가 죽는다. 동시에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는 반드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렵긴 하다.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곧 전쟁의 이유를 옹호하는 것으로 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인민들의 싸움에 대하여 "전쟁은 안되는데"라며 손사래를 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피착취인민의 투쟁을 마냥 지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선 결국 원인인 (신)제국주의에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대처는 무의미하거나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무섭고 노답이다. 63년 전 오늘 휴전이 조인된 625전쟁은 북한의 명백한 남침이다. 지난 63년 동안, 개전을 명령한 김의 죄과는 한국에서 철저하게 물어져왔다. 한편 그가 왜 그러한 전쟁을 벌였는가에 관해서는 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해=변호'라는 틀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속에서 한반도 최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수장이 그렇게 쉽게 국민과 수도를 내팽개치고 전광석화와 같이 도망간 사실 그리고 그 책임 또한 금기에 붙여졌다. 최근에 와서 일각에서 國父로 격상된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사회적 스트레스 수치가 거의 안면마비급으로 온 현재, 평화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때의 평화교육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수행되어야 할까? 국내의 자본가계급과 국가가 결탁해 최저시급을 6,000원대로 유지하면서 국민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분할통치를 실시하는 가운데 어떤 평화를 상상하고 실천해야 할까? 내가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며 보았던 미군들은 전체 미군에 비해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대부분 경제적으로 열악한 계층이었다.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한반도에 지원한 백인 청년이 쉬는 시간에 엘프어를 공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위대도 연봉을 중소기업 회사원 초봉 이상으로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도 몇년 전부터 군대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힘쓴다고 들었다. 중국/북한은 세계 병력규모 1위와 4위를 도맡고 있다. 도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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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923, 남한에 미()점령군이 진주한지 보름여 만에 최고실력자 하지 장군은 38도선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도로차단기 설치를 지시하였다. 그 결과 10월 중순까지 38도선 인근에 약 25개의 도로차단기가 설치되었다. 소련군 역시 같은 지역에 18~20개의 도로차단기를 설치하였다. 미군은 38도선 인근의 도시들을 신속하게 점령하였으며,[각주:1] 미군의 화답에 기초하여 소련군은 9월 초부터 38도선 통행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미소공위 예비회담(46.1.16~2.5)에서 한국인들의 38선 이동문제가 최초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장차 미소공위의 운명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논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46년 여름(5) 콜레라 만연을 기점으로 38선 통행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시간대를 종축으로 삼고, 한반도를 이분하는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역작이다. 이 책에서 첫 번째 시간대라고 할 수 있는 1945~48년의 기간은 서술의 원경(遠景)으로 제시된다. 이 시기 전후(前後) 강대국의 점령정책과 대한정책, 점령과 철수라는 원심력에 따라서 또는 이에 대응하여 남과 북에서 군()정이 들어섰고 각각은 상호작용 또는 충돌하며 긴장과 적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주연은 어디까지나 미소군정이었다. 두 번째 시간대인 1949~50년의 기간은 서술은 근경(近景)이면서 동시에 이 책의 핵심적 분석대상이다. 이 시기 강도와 규모를 달리하며 벌어진 남북 간의 충돌은 결국 북한의 무장력 강화와 전쟁의 형식을 창출(“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하에서는 기존의 서평을 참고하여 특장과 구성, 자료적 근거 등을 간략히 정리하겠다.[각주:2]

 

 독자는 이 책의 특장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책의 외관이 선사하는 두툼한 두께감에 더하여 이 책의 목적이 이론과 자료에 오도되거나 미혹되지 않고 역사적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작의 실증성을 웅변한다. 저자에 따르면, 책의 핵심 내용은 1999년 완성되었으나, “북한 자료들이 미진한 관계로 책이 출간되기까지는 7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사이 저자는 2001년과 2005년에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 미국의 여러 기관을 방문해 미국 자료를 비롯하여 신노획문서 전량과 구노획문서 3분의 1 정도를 검토하였다. 요컨대, 저자는 방대한 다국적 자료를 섭렵하는 방식을 통해 한국전쟁의 전사(前史)38도선 충돌의 역사를 탐구한 것이다.

 

 둘째, 이 책은 38도선 또는 38도선 충돌을 일관되게 매개로 삼아 미시사를 서술하였다. 다시 말해, 저자는 해방과 함께 찾아온 38도선의 형성에서부터 이를 둘러싸고 전개된 미소간의 상호작용, 미소의 군대가 철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외화(外化)된 남과 북의 충돌, 마침내 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사료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추적하였다. 서동만에 따르면, 기왕의 저작들이 동북아시아 국제관계 등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중시한 데 비해, 이 책은 미시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그간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한 1945~48년의 기간 38도선과 미소점령군과의 관계 및 1949~50년의 기간 38도선 충돌과 북한지도부의 대응을 미시적으로 복원한 셈이다. 이는 메릴, 커밍스, 양영조 등이 선구적으로 수행한 1949~50년 어간의 38도선 충돌 서술을 수정·보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셋째, 전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이 책은 내쟁 같은 국제전쟁, 외전 같은 동족전쟁이라는 1948년 남북 문화인 108인의 성명을 인용하며, “1950년 발발 시점에서 이미 내전이자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이 혼재돼있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성격 규정은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냉전연구에서 직간접적으로 발원했고 미소 중 어느 일방의 책임을 묻는 전통 대() 수정도식을 지양하며, 동시에 내전이나 국제전또는 내전으로 발화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는 설명도 거부한다. 저자의 성격 규정은 당시 한국인들의 정세 판단과 분석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의 근본적인 책임을 전후 강대국에게 돌리는 효과를 가진다. 물론 전쟁으로 치닫는 주요 동력은 내부 갈등이었으나, “그 궤도는 미소가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이 책은 800쪽이 넘는 분량으로 모두 520장으로 구성돼있다. I서장3장이고, 한국전쟁 연구사, 전재의 개전·성격·형성에 관한 논점들, 책의 구성·방법론·자료를 담고 있다. 박태균에 따르면, 이 서장은 한국전쟁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II미소의 38선 정책과 남북갈등의 기원5장이고, 38도선과 미소점령군을 매개로 하여 1945~48년의 역사를 살폈다. II 부는 미소 양국이 우발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교통할 수 있는 수단을 고안했으면서도 동시에 남북의 공식적 교류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상상의 선38도선이 한국인들에게 가한 실제적 힘은 경기도 연백군의 사례 두 가지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다. III'남북의 정치군사적 갈등과 38선 충돌'IV개전의 결정·공격 계획의 수립·초기 전투는 각각 5장과 4장이며, 단정이 수립된 이후부터 개전초기 옹진전투에 이르기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대를 미시적으로 살폈다. III부에서 저자는 최초로 1949년 한국군의 대북공격 가능성 문제를 천착하였고, 그 결과 도발 받지 않은 불의의 기습남침이나 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개전정보의 실패등 남북이 주장이 바로 이 1949년에 가닿아 있음을 증명하였다. IV부는 이른바 북··소 합의의 내용과 북한의 전면공격의 결정을 묘사했고, 정찰명령 1전투명령 1, 정찰계획등 북한의 의도를 담고 있는 자료를 사료비판하였다. V에필로그3장으로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관련된 주장·의혹(‘정보의 실패’, ‘해주점령설실상을 다루었다.

 

 이 책은 역사주의적인 접근과 연대기적인 접근을 방법론적 핵심으로 삼았다. 저자가 밝혔듯, 역사학의 본령이기도 한 엄격한 자료 비판은 본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이 책은 미··, 즉 한국전쟁의 당사국이었던 3개국의 주요 자료를 비교·교차·분석하였다. 저자는 다양한 언어로 쓰인 다양한 자료를 통해 한국전쟁의 미시사적 사실(史實)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이 구사한 미국자료는 주한미군사령부 정모참모부 및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이 생산한 정보보고서(일일정보요약, 주간정보요약, 북한정보요약), 주한미군971방첩대의 정보요약 및 연례보고서, NARA RG 332에 소장된 미소간의 왕래서한, 주한미24군단 군사실 문서철, RG59한국 내정 관련 문서철, RG 319의 육군 정보참모부 문서철, 맥아더아카이브에 소장된 KMAG 보고서·전문철 등이 있다. 저자는 자신이 구사한 소련자료를 크게 4가지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한국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 극비소련외교문서,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가 발행하는 소장처·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련문서, KGB 출신이자 소련문서고를 독점했던 볼코고노프 및 러시아 외무성 출신 학자들의 저작, 한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간행한 라주바예프(주북한 소련군사고문단장을 역임) 보고서. 기왕의 연구가 전쟁의 결정과 관련하여 지도부의 의중만을 쫓았다면, 저자는 소련자료에 드러난 1949년 소련과 북한의 시각과 입장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자료적 진가는 북한자료, 즉 노획문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가 구사한 구·신 노획문서는 대부분이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미군이 북한에서 노획한 자료들이 어떠한 여정을 거쳐 미국에 도달했고 그 후 방선주에 의해 세상에 공개될 때까지의 과정을 요약하였다.

  1. 춘천(9월 19일), 삼척(9월 25일), 의정부(9월 30일), 연안·배천(10월 초), 옹진(10월 5일). [본문으로]
  2. 서동만,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창작과비평』 34(3), 2006; 이완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역사와현실』 62, 2006; 박태균, 「다른 방식의 수정주의 뛰어넘기」, 『한국사연구』 136, 20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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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오의 중국과 냉전을 열쇳말 삼아 전후(戰後) 아시아에서 펼쳐진 중공의 의도와 국제관계를 9개의 주제와 사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새롭게 발굴·번역된 중국과 러시아 자료에 기초하여 1940~60년대 아시아의 냉전 경험을 중국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서술하였다. 서문이 잘 밝히고 있듯,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탐구지점을 설정하였다. 그것은 바로 지난했던 국공내전과 중국혁명, 두 차례의 열전, 미국과의 긴장 완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의 두 번째 질문은 국익과 안보를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국적 자료에 근거하여 사상과 이념이라는 요소를 분석에 도입한 개디스를 필두로 하는 ()냉전사연구의 흐름 속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각주:1] 저자는 이 책에서 상기의 질문에 답하면서 중국의 냉전 경험을 반추했고, 그러한 경험의 유산이 어떠한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가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론과 결어를 포함하여 모두 11장으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마오의 중국이 맞닥뜨리게 된 일련의 사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지도부의 인식 및 행동을 보여주었다. 1~2장은 전후 중국이 다시 한 번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미소갈등이라는 냉전 구도에 포획된 아시아에서 중국의 주도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특히 저자는 2장에서 워드 사건’, ‘-스튜어트 접촉’, ‘일변도 성명에서 드러난 중공의 언설과 행위를 통해 중국에서 미국이 실패한 것은 잘못된 대중(對中)정책 때문이라는 모종의 신화를 비판하였다.[각주:2] 3장은 1956년 열린 20차 소련공산당대회를 기점으로 중소관계가 악화돼가는 모습을 서술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본격적인 중소갈등의 진원(震源)은 이미 고인이 된 스탈린에 대한 태도상의 차이였다. 4장은 6·25전쟁을 끝내기 위한 중국의 생각과 전략을 다루었고, 5장은 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뒤이은 제네바협상의 미봉적 타결을 서술하였다. 6장은 1956년 폴란드 위기와 헝가리 사태에 대한 베이징의 태도를, 7장은 1958년 대만해협 위기를 다루었으며, 8장과 9장은 각각 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와 데탕트에서 중국의 인식과 역할을 설명하였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 중인 냉전사 연구에서 근거가 되는 1차 자료들의 소장처뿐만 아니라 각 주제를 다룬 영어 및 중국어 문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등장한 바 있듯, 이 책 역시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중공 지도부의 사고와 인식을 엿보기 위해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회고록을 비롯하여 선집이나 건국이래마오쩌둥문고, 마오쩌둥군사문집 등 중앙당안관(中央檔案館)[각주:3]에서 펴낸 중공중앙위원회 문서와 마오쩌둥 관련 문서를 자료적 핵심으로 삼았다. 더하여 저자는 구()소련 및 동구(東歐) 자료의 경우,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국가안보문서고[각주:4]와 우드로윌슨센터의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 문서고[각주:5]에서 도움을 얻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자료에 대한 엄밀한 사료비판은 드러나지 않으며, 또한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고 충실한지에 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저자의 서술에서 찾을 수 있었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가 이후 전개될 중소갈등, 조중갈등, 중월갈등의 씨앗을 각기 다른 시간대의 역사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중공 지도부나 중국을 설명할 때 아편전쟁 이후중국이 겪게 된 역사적 굴욕과 피해의식을 계속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 간 관계, 특히 갈등의 역사는 19세기 이전으로 소급하여 서술하지 않았다. 평자는 그 이유가 궁금한데, 아무래도 중국(관변)의 입장에서 냉전기 중국의 경험을 파악한 다수의 사료에 근거하다보니 나올 수밖에 없던 문제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러한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북한·베트남의 냉전사 서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저자가 제기한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이 어떠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따라가 보자. 첫째,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2차 대전이 끝난 세계,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역할은 결코 미소갈등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은 결정적인 주연으로서 냉전의 국제정치에 개입했고 시기별·지역별로 나름의 국내외 정책을 관철시켰다. 6·25전쟁에 참가하여 소련의 불완전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상대로 대등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스탈린의 소련의 눈치를 봐야했으나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소련을 적극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가려고 하였다. 물론 헝가리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제공산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라는 수사를 통해 소련의 진압을 용인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 중소관계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독자는 이 책에서 중소관계의 몰락이나 중월관계의 악화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소제목(Ideology matters)을 할애하여 이념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때 이념은 단일한 결과로 귀결되었다기보다는 그 이념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인 주체의 세계인식 또는 역사·문화적 환경에 따라 변용되고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고, 마오식()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원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별개로 중국의 대내외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이 책은 마오를 비롯하여 중공 지도부의 인식과 생각에 강조점을 두어 계속 드러내려고 하였다.

 

셋째,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 저자는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국제정치에서 중국이 보인 행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마오의 혁명 후의 우려라는 심리적·개념적 요소를 제시하였다. 이는 마오의 계속혁명개념과 쌍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즉 그는 보편적 정의와 평등이 도래하고, 중국이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다시거듭날 때까지 혁명을 계속추구하였고, (실상 불가능에 가까운)이러한 목표들이 달성되기까지 우려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터였다. 따라서 마오 시기의 중국은, 적어도 대외관계상에서 중심성을 추구하였으나 지배는 추구하지 않았고, “항상대내적 동원이라는 목적으로만 물리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또한 자본주의사회와는 구별되는 중공 정치의 독특한 요소들, 이를테면 중국에서의 민주집중제나 광범한 대중 동원을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결어에서 저자는 중국의 냉전 경험의 유산을 설명하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중국의 1당 독재체제라든가 피해의식에 대하여 서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한 듯 보인다. 이렇듯 저자가 영어로 마오의 생각과 중국의 냉전 경험을 서술한 의도는 그 다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중공 정부는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수행(즉 국제사회로의 통합)해야 하고 그것의 관건은 바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성원들이 열심히 중국의 관점과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현실의 정세(중국의 대국굴기와 미국의 쇠퇴)가 역사가의 입지에 고스란히 반영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1. John L. Gaddis(1941~). 이른바 "냉전사가의 수장(Dean)”으로 불리는 미국인 역사가로 냉전과 거대전략을 탐구한다. 2014년 현재 예일대학에서 Robert A. Lovett육해군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조지 케난(George F. Kennan)의 공식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Chen Jian(陈兼),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본문으로]
  3. http://www.saac.gov.cn [본문으로]
  4. http://www2.gwu.edu/~nsarchiv [본문으로]
  5.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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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왕의 625전쟁 연구는,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냉전연구라는 관점 위에서 진행된 측면이 강했고, 이는 연구의 경향을 대별하는 지표에서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전통수정이라는 수식어구가 그것이다. 양자를 대표하는 연구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고저를 달리하며 이어졌다. 전자는 전쟁의 발발원인과 책임을 북··소 등 공산권에서 찾은 반면, 후자는 그것을 남한과 미국 등에서 찾았다. 한편 1990년대 이후부터 전통/수정의 이분을 뛰어넘으려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됐고, 연구주제의 외연도 크게 확대되었다.

 

 1990년대까지의 625전쟁사 연구는 40년이라는 시간을 종축으로 삼고, ‘전통/수정을 가르는 계선의 양편에서 미국/한국’, ‘관변/민간’, ‘내인론/외인론’, ‘국내전/국제전등 각각이 625전쟁을 보는 입장과 분석의 하위 범주를 달리 설정 했다.

 

 미국의 625전쟁 연구의 경우 한편으로 관변의 전통주의적 시각과,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수정주의적(또는 급진적) 시각이 80년대까지 서로 평행을 달렸다. 양자 모두 종합적인 625전쟁사는 쓸 수 없었는데, 자료나 관심의 초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은 포연 가득한 전장의 복판에서 625전쟁의 공식사를 서술했고, 이는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한국에 번역·소개되었다. 이는 전장에서 벌어진 전투와, 개전부터 정전까지의 기간에 집중한 것이었다.

 

 625전쟁에 관한 여러 해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 정책입안자들의 사전지식·행동·의도, ·소의 대한정책, 미국 국내 정치, 다른 국가들의 대미관계, 625전쟁과 냉전의 상관관계 등이 주로 연구되었다. 전반적으로 냉전적 대결의식 위에서, 주요 행위자를 미국으로 설정한 연구들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625전쟁을 설명하는데 있어 한국과 한국인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한편 미·소 자료의 공개로 개인·국가·국제체계 등 여러 층위에서 625전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이러한 흐름은 80년대 초반 커밍스를 시작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전쟁발발 직후부터 개전의 책임을 두고 공방이 오갔고, 정전협상 후 각 국가의 625전사는 이후 각국의 625전쟁에 대한 입장의 골조를 구성했다. 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자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625전쟁의 원인과 발발에 관한 연구는 이론과 가설의 조합인 측면이 강했다. 80년대 미국에서 625전쟁 관련 저작들이 급증했는데, 이들 대다수는 새로이 공개된 미국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각주:1] 9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와 중국의 자료가 빛을 보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625전쟁 연구의 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했다. 한국인 연구자가 급증했고, 외국학계와의 소통도 본격화됐으며, 세부 주제와 해석의 다양성 또한 예비 되었다.[각주:2]

 

 최근 625전쟁 연구 동향의 핵심 단어는 인간일 것이다. 전쟁 50주년과 60년을 맞이하며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었으나, 그것들 대부분은 여전히 국가의 정당성 문제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연구는 정치적·거시적·이념적 차원에서 사회인류학적·미시적·개인적 차원으로 관심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각주:3]

 

자료의 공개

 

 1970년대와 90년대 들어와 공개된 미국과 구소련 자료는 이후 625전쟁 연구의 질적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국외의 수준 높은 연구들이 유입·번역·유통되면서 국내의 625전쟁 연구는 국외의 연구 성과들을 소화하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료의 공개는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구소련과 중국 지도층의 입장·의도·생각을 보여주는 문서 대다수는 묶여있는 상태이고, 현재 공개된 자료들도 위생처리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몇 년 전 공개된 스탈린의 서한은 625전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각주:4] 만일 이 자료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625전쟁의 역사는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향후 러시아문서고의 자료들과 중국공산당 당안(檔案)[각주:5] 등이 추가적으로 공개될 때까지 연구자들은 인내하며 추가로 엄정한 사료 비판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죽음과 공포의 역사

 

 625전쟁은 약 250만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실종자, 피랍자를 낳은 한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이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거나, 자의와는 무관하게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전쟁 이후에도 그 공포는 개인과 사회의 내면에서 떠돌았을 것이다.

 

 향후 625전쟁 연구에서 시급한 것은 첫째, 전쟁 중 죽은 사람들의 규모와 각각의 死因을 규명해야 하고, 둘째, 전쟁 당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광범한 폭력의 메커니즘과 생산주체, 명령주체를 더욱 확실히 밝혀내야 하며, 셋째, 그러한 죽음의 경험과 공포가 사람들의 신체에 어떻게 새겨졌고, 이후 어떻게 해소·변화·강화 또는 권력에 의해 활용되었나를 분석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은 한국인에게 드리워진 국가폭력의 그림자를 규명하고, 이를 걷어내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사료와 사람들이 구술하는 기억과의 교차 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며, 사료로는 일기, 문학작품, 영화, 잡지, 신문, 공보처 등 정부기관 보고서, 구술 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엄연한 실체이지만, 사람들의 공포는 어떠한 실체로서 포착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625전쟁기와 이후 한국인들의 표현방식, 행동양식 등의 표출,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자기)억압·배제를 면밀히 봐야할 것이며, ···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반공 담론의 유포와 메커니즘 등을 추가로 살펴야 할 것이다. 625전쟁기 죽음과 공포의 역사는 국시였던 반공(반북)‘과 닿아 있고, 이는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심성으로 자리 잡았으며 일부가 여태껏 이어진다는 점에서 시급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전쟁으로 형성된 공포의 역사는 625전쟁만의 특질은 아니므로, 625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의 한국·아시아·세계의 전쟁을 살피고, 각각의 전쟁이 남긴 공포의 심리적·사회적 효과와 625전쟁의 그것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1. Rosemary Foot, "Making Known the Unknown War: Policy Analysis of the Korean Conflict since the Early 1980s," Michael J. Hogan ed., America in the World: The Historiograph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since 194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271~272쪽. [본문으로]
  2. 이완범, 「한국 국내의 625 연구 동향」, 『군사』 5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44쪽. [본문으로]
  3. 박명림은 이러한 연구 경향을 ‘인간 문제의 등장’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나남, 2011, 291쪽. [본문으로]
  4.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스탈린의 서한. 스탈린은 서한에서, 소련의 UN 안보리 불참과 복귀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2225 [본문으로]
  5. 중국기록학용어로 국가 기구, 사회 조직 및 개인이 정치·군사·경제·과학·기술·문화·종교 등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직접 생산한 기록 중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자·도표·음향·영상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역사 기록을 말한다. 또한 당안은 1949년을 기점으로, 이전에 생산된 것에는 ‘역사당안’, 나중에 생산된 것에 ‘현행당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네이버지식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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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 소개

 

 미국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동아시아 전공)를 취득했다. 1967평화봉사단[각주:1]으로 내한했고, 1981년 평양 방문, 한국전쟁의 기원1 출간 이래 현재까지 한국근현대사, 한미관계사, 미국과 동아시아 관계 등을 천착했다.[각주:2]

 

2. 문제의식과 핵심내용

 

 저자는 서문에서 미국과 한국 사이에 놓여있는 常識의 지리적 편재성을 지적하며, 미국인에게 잊혀진, 더욱이 알려지지 않은한국전쟁의 역사와 기억을 말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의 영향력은 참으로 심원했고, 그 후과는 현재의 북미대결로 가장 잘 드러나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전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미국은, 전쟁 당시부터 한국전쟁을 망각하려 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졌다.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미국인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저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다루었다. 전쟁의 추이(1), 전쟁의 내전적 기원(2), 전쟁 기억의 은폐·망각(3) 1950년대 미국의 정치문화적 풍경(맥카시즘)과 전쟁에 대한 검열·은폐, 정형화된 적 이미지(4), 점령과 군정, 한반도 내부의 갈등(5), 미 공군력의 무차별/무제한적 성격(6), 학살의 기억과 진실(7), 한국전쟁으로 촉발된 미국의 심대한 변화(8), 기억과 역사의 복원(9).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정확하고, 불편부당하며, 역사적인 시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3. 이론적 자원과 자료적 근거

 

세계체제론: “워싱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항상 동아시아 지역(반주변부와 주변부-필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었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는 강하나, 서구의 영향력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인 토착정부(시장과 원자재 공급지-필자)를 원했다.”(215)

전쟁의 내전적 기원: “모든 나라는 자기만의 장미전쟁을 치를 권리가 있다”(35), 조만식을 택하려던 소련의 의도와는 달리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김일성(58), “식민지 시대의 갈등 해방 후 한반도 내부의 반란과 투쟁 국가 수립 이후 계속된 유격전과 38선 충돌 내전의 대단원이라는 정식화.(146)[각주:3]

이미지된 적, 선별적 보도, 망각의 헤게모니(229): 지금까지 미국은 한국전쟁과 북한(나아가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검열과 맥카시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으로 인한 몰이해는 계속되고 있다(100). “1999년이 돼서야 노근리 사건이 보도될 수 있었는가?”(168) “미국은 한국전쟁의 교훈을 망각하고 다시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였다.”(232)

자료적 근거: <트루먼대통령도서관(HST), 대통령비서실서류철(PSF), CIA file, box250, CIA daily report>, <New York Times>, <국립문서고(NRC), 문서군(RG) 338, 한국군사고문단(KMAG) file>, <맥아더아카이브(MA), RG 6, box 80, ATIS issue>, <국립문서관(NA), 중국국 file>, <Princeton University, Allen Dulles Papers, box 57>, <RG 332, XXIV Corps Historical file, box 20>, <USFIK, G-2 Weekly Summary>, <Seoul Times>, <USFIK G-2 Intelligence Summaries>, <NA, RG94, Central Intelligence>, <NA, 895.00>, <FO, F0317> .

 

4. 논평

 

 이 저서는 미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기억된 방식을 환기시켰고, 我側의 만행이나 학살,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적 팽창[각주:4] 등을 서술했으며, 한국전쟁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미국-북한, 나아가 미국-아시아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 지에 대한 질문 속에서 복원시켰다.[각주:5] 광범한 1차 자료와 2차 문헌을 참고하였고, 특히 미국 소재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는 점과 미국의 문학과 사회학 이론을 역사서술과 접목시킨 점은 저자의 큰 미덕이다.

 

 그러나 저자는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한국어로 된 사료와 2차 문헌은 거의 살펴보지 못했고, 주로 영어로 번역된 자료만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어로 작성된 최신의 연구 성과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 약점을 보였다.[각주:6] 또한 9장의 일부는 진위를 가리기 힘들다.[각주:7]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대상에 대한 이미지나 망각의 헤게모니는 현대의 국민국가에서 보편적인 기획은 아닌가?(“미국=우방, 북한=주적이나 한국군 해외파병 같은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한 보이지 않게 하는 손”) 한편 이러한 기획이 한국 사회에 남긴 영향력은 어떠했는가? 한국전쟁의 발발은 전적으로 내전적인 성격에서 기인했는가?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도 타자/적을 이해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지역학의 탄생과 이에 대한 지원)

  1. Peace Corps. 케네디가 시작한 미국의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으로, 1961년부터 지금까지 130여 개국에 약 210,00명을 파견했다. http://en.wikipedia.org/wiki/Peace_corps 참고. [본문으로]
  2. 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미국 패권의 역사』, 서해문집, 2011 참고. [본문으로]
  3.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New York: The New Press, 2004, preface,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9, 78-79쪽 참고. [본문으로]
  4. 브루스 커밍스, 위의 책, 2011, 626-681쪽 참고. [본문으로]
  5. 필자는 미국과 한국에서 기존에 출간된 한국전쟁 서술을 거의 살펴보지 못했다. [본문으로]
  6. 정병준, 위의 책, 2009, 47-49쪽 참고. [본문으로]
  7. 번역문: “우리가 정의로움, 관대함, 화해를 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해서는 오직 “규율과 처벌을 위한 진리의 메스를” 무자비하게 대는 것에만 의지할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남한만이 유일하게 이 작업을 수행했다.”(23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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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왜 6·25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 ‘마오쩌둥은 어떻게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게 됐을까?’ ‘6·25전쟁과 중국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를 법한 질문들이다. 선행 연구들은 혁명 직후 중국의 사정이 정치·경제적으로도 결코 튼튼하지 않았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꽤나 혼란스러웠음을 지적한 바 있다. 1949년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후에도 중국의 각지와 경계에서는 아직 국민당 잔여세력과 토비가 출몰했고. 국내경제는 저자의 표현을 빌려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적어도 겉으로는 대내적 통합과 사회적 재건을 제쳐두고 새로운 동원과 이역으로의 출병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결정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한 결정은 어떠한 요인들에 기인한 것일까? 이 책은 예의 질문들에 대한 저자(미국) 나름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곤차로프(미국) 등의 연구[각주:1]가 중소관계의 삐걱거림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중소 양국 지도자의 현실주의적인식과 상황적 선택을 강조했다면, 션즈화(중국)의 연구[각주:2]는 중소관계의 전개 속에서 현실주의적이었던 두 지도자의 만남이 새로운 중소동맹을 이끌어냈고 그것이 바로 6·25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곤차로프 등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주지안롱(일본)의 연구[각주:3]는 시종 마오의 대미관과 결의를 참전의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나름대로의 독특한 분석을 수행한 바 있다. 간략히 정리해보자면, 세 연구는 6·25전쟁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는 점과 중소 양국의 지도자들이 철저하게 국익(또는 안보이익)’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각기 분석의 강조점과 연구자의 배경 등은 판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의 참전을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은 앞서의 연구들과는 강조점을 조금 달리하여 중미대결을 열쇳말로 삼고 중공 지도부,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의 생각, 세계인식, 결정과정에 집중하여 1948~1950년의 기간 동안 벌어진 중미간의 상호작용 또는 상호대결을 그려낸 연구이다. 물론 이 책은 ‘6·25전쟁과 중국이라는 주제에서 으레 다뤄져야 하는 사안들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독자는 이 책에서 국공내전 기간(1946~1949)의 유산과 미국의 대중(對中)전략, 중소관계의 전개 및 중소동맹의 체결, 동북지방과 북한간의 긴밀한 관계, “삼로향심우회전략에 대한 중공 지도부의 인식 등 주목을 요하는 제()사안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중미대결과 그 밑바탕에 놓여 있는 혁명에 대한 헌신”, “혁명적 민족주의”, “세계혁명에 대한 책임의식등에 찍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신중국은 스스로를 구래의 세계(old world)를 파괴하고 끝없는 혁명이라는 대의에 투신하는 주체로서 인식했다. 그 과정에서 주된 적이자 반동은 미국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은 주제는 물론이려니와 분석의 주된 대상이 최고지도자의 정신세계라는 점에서 주지안롱의 연구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동() 주제를 다룬 선행 연구들의 도움을 받거나(각주에서 션즈화 및 주지안롱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자료를 구사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차이청원(紫成文, 당시 재북 중국고문)과 자오용챈(趙勇田)의 회고록(판문점 담판)이나 두핑, 네룽전 등 당시 군인의 회고록, 통역관이었던 스저의 회고록 등은 문서자료의 빈곤 속에서 신중국의 실상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더하여 저자는 중공중앙위원회선집(ZYWJXJ, 1986), 마오쩌둥군사문선(MJWX, 1981), 건국이래마오쩌둥문고(MWG, 1987, 1989), 마오쩌둥군사문집(MJWJ, 1993), 마오쩌둥연보(MNP, 1993) 등 중공중앙위원회 문서와 마오쩌둥 관련 문서를 이용했다.

 

 책의 구성을 따라 저자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있고,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모두 7장이 각 부에 나눠서 배치돼있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서술은 꽤나 단조로운 편이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1948~50년의 기간 동안 중국의 거의 모든 대내외적 행보는 진보적 주체로서 자기인식을 수행하는 최고지도자의 생각이 현실화된 것이다. 먼저 1(1부이기도 하다)에서 저자는 신중국의 성립, 즉 혁명 이후 중공 지도부가 직면해야 했던 대내외적 문제를 지적하며, 마오와 그 동지들이 인식한 세 층위(국내, 동아시아, 세계)안보이해를 제시했다. 더불어 마오의 성장사(), 민주집중제, () 진영론, 중간지대론 등 다채로운 설명인자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요소는 어디까지나 이 책의 핵심, 즉 마오의 정신세계를 설명하는데 맛을 더하는 양념일 뿐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공 지도부는 혁명의 내적 동학(動學)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바로 이 논리가 중국이 참전을 피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쓰였다.

 

 본문의 2(2, 3, 4, 5)3(6, 7, 8)는 마오의 세계인식과 핵심논리에 입각하여 194811월의 워드 사건에서부터 195010월의 참전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했다. 독자는 본문의 도움을 받아,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기까지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의 관계망이나 얼개를 짜볼 수도 있겠다.[각주:4] 평자는 특히 광범한 중국측 사료의 구사를 통해 이 책이 적어도 자료집으로서의 미덕은 갖춘 것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물론 사료의 문제(비공개 또는 부재)는 개별 연구자가 쉽사리 해소할 수 없다. 따라서 평자는 그러한 사료의 공백을 메우는 저자의 논리와 상상력이 얼마나 적절한지에 특히 주목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저자는 1940년대 중후반 이후 마오의 대미인식은 적대감으로 바뀌어 점차 고조됐다는 설명방식(주지안롱에게 분수령은 1946년의 사평전투였다)을 채택했다. 그러나 저자는 1948년 후반부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따라서 독자는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한 저자의 설명을 듣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배경지식이 없을 경우 그 실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중화개념과 다양한 내포를 가지는 것 같지만 실상 강대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통개념에 상당히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그런데 대체 어느 정도까지 사실로 파악해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마오는 중국을 과거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혁명) 동시에 아시아, 나아가 세계혁명의 촉진자 내지 중심국으로 우뚝 서려고 했다. 이러한 서술이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정향(“영명결정”) 중 어느 쪽에 더욱 부합하는 것인지 곧바로 의문이 들었다. 마오에게 세계혁명은 무엇이었을까? 신중국의 아시아와 세계의 중심으로 서야 한다는 신념(독자는 이 지점에서 대국굴기의 전조를 본다)은 어떻게 세계혁명과 양립할 수 있을까?

  1. 세르게이 곤차로프, 존 루이스, 쉐리타이(薛理泰), 성균관대학교 한국현대사 연구반 옮김, 『흔들리는 동맹: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 일조각, 2011. [본문으로]
  2. 션즈화(沈志華), 최만원 옮김,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 선인, 2010. [본문으로]
  3. 주지안롱(朱建榮), 서각수 옮김,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역사넷, 2005. [본문으로]
  4. 워드 사건(48년 11월) → 미코얀의 시바이포 방문(49년 1월) → 김일성의 방소(3월) → 인민해방군의 난징 점령(4월) → 황·스튜어트 회담 및 본토에서 장개석의 퇴각(5월) → “일변도” 성명(6월) → 중공 대표단의 모스크바 방문 및 조선인 사단의 귀환(7월) → 신중국 성립(10월) → 워드 추방 및 마오쩌둥의 방소(12월) → 주은래를 비롯한 중공 대표단의 방소, 애치슨 연설(50년 1월) →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체결(2월) → 중공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원 및 김일성의 방소, NSC68 채택(4월) → 김일성의 방중(5월) → 전쟁 발발과 트루먼 성명(6월) → 동북변방군의 창설(7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및 유엔군의 북상&월경(9월) → 인민지원군의 참전(10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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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해방 이전부터 6·25전쟁 발발까지를 종축으로 삼고 구() 만주지역, 다시 말해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하여 그곳에 살았던 만주 조선인의 생활상과 생각을 다양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6·25전쟁 전사(前史) 분야의 또 하나의 대작이다. 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저자의 약력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현재 서울시립대학 전임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서울대 역사교육과와 연세대 사학과(석사)를 거친 이후 1993김원봉 연구를 펴냈고, 이듬해 조선의용군 연구로 국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1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에 이어 이 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주로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조선사람의 흔적을 역사 속에서 발굴·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책은 기왕에 제출된 저자의 연구실적들을 대거 수정하여 종합한 결과물이며, “한국독립운동사와 해외한인사에 대한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하에서는 이 책의 구성과 핵심논지, 자료를 일별하고 6·25전쟁 연구와 관련하여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에 관해 간략히 비평하겠다.[각주:1]


 일찍이 일제의 패망 이전부터,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에서 삶을 일궜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만주지역은 조선인들, 그중에서도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새롭지만 고달픈 삶의 터전이면서도, 야심찬 누군가에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김원봉, 김일성 등)이자 출세의 신천지(최남선, 박정희 등)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통치의 주체가 빈번히 바뀌면서 그에 따라 다양한 민족이 실로 다채로운 생활상을 보였을 것이고,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의 역사적 경험이 이후 한국사의 전개과정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를 추적한 시도도 제출된 바 있다.[각주:2]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만주지역의 역사적 성격(“무정형성”)이나 만주 조선인의 정체성이 사뭇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더하여 이들의 삶을 살피는 작업 또한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만주 조선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고, 어떠한 생각을 하며 해방 이후를 살았을까? 간단하게 보이는 질문이지만 명료하게 답변하기는 분명 어렵다. 저자는 앞서와 같은 사실과 질문을 염두에 두고 만주 조선인 사회 및 그들의 조국()”가 이전 반()식민지·식민지 사회 각각의 좌우대립, 현지 정세와 한반도 정세의 전개와 더불어 어떻게 변했고 실현돼갔는지를 분석하였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연변지역(동만), 목단강지역(북만), 국민당지역(남만·관내)에 있던 조선인 사회의 전개상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각 장은 끝자락에 일종의 맺음말을 제공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저자의 논의를 정리할 때 유용하다. 그러나 각 부의 분량은 균등하지 않다. 1부가 일곱 장으로 논문 7편에 해당하는 분량인 반면 2부와 3부는 네 장씩의 분량으로 구성돼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평자는 이러한 분량상의 차이가 당시 만주 조선인 사회의 역사인구적인 사실, 즉 연변지역이 만주 내 다른 지역보다 조선인이 많았고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거나 또는 다른 지역의 조선인 사회를 선도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역별 사정을 파악하게 해주는 자료의 분량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해방을 전후하여 동만지역에는 ‘50~60’, 북만지역에는 ‘11~12의 조선인이 살았고, 국민당이 통치하던 지역에는 조선인 장병 수가 ‘4~20(?)에 육박하였다.


 저자는 600여 쪽을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해방 후 만주 조선인 사회가 도달하게 된 귀결은 바로 6·25전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좌익이었던 동만·북만지역의 조선인 사회뿐만 아니라 우익조선인 사회에서도 나름대로의 기지론(基地論)을 선보였는데, 그러한 모습의 배경이랄 수 있는 좌우대립의 논리야말로 결국 만주 조선인들이 6·25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주요한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설명하는 셈이다. 더하여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논조는 다음과 같은데, 동만·북만지역의 조선인 사회는 중공당 및 북한과의 친연성이 강한 편이었던 반면, 남만·관내지역의 조선인 사회는 직접적인 통치주체인 국민당 및 남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평자는 분석대상으로서의 사회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성격을 갖는 바, 그것의 어떠한 경향을 서술하는 작업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저자가 치밀한 사료분석을 통해 만주 조선인 사회의 경향을 굵은 필치로 정리하여 제시한 것은 분명 미덕이다. 그러나 평자는 저자가 미처 서술하지 않은 만주 조선인 사회의 흐름, 회색지대를 그 모습은 정확히 알기 어려울지라도 추가적으로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좌우대립의 자장(磁場) 안에 있진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만주 조선인이 생각한 조국이 무엇이었는지는 다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염두에 둔다면 저자가 원초적이라고 평가하는 조국애의 경향이나 역사적 실상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자신이 구사한 자료를 한글신문(민간과 군부대), 당안관 문서, 문화대혁명 자료군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저자는 신문의 성격을 밝히고 지면에 반영된 당시 만주 조선인 사회의 경향성을 추출했는데, 이를 통해 평자는 추후 연구에 필요한 자료원의 대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문혁자료를 진위를 기준으로둘로 나누어 역사적 사실을 걸러내는 저자의 방식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가 생산된 시기 및 역사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 시기에 대한 북한 측의 자료를 확보하여 대조해본다면 더욱 정확한 서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하여 아무리 민간에서 발행한 신문이라 할지라도 해당 지역에서 우세했던 통치세력의 영향으로부터 거리를 두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만주 조선인 사회의 육성(肉聲)이라고 단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당시를 살았던 개인의 일기나 출간된 작품, 증언록이나 구술 자료 등을 추가하여 살핀다면 좀 더 풍부한 역사상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각주:3]


 마지막으로 평자는 6·25전쟁과 관련하여 이 책의 내용적 핵심이 각각 인민해방군 156사단(이후 제4야전군 독립 15사단인민군 12사단)164사단(이전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단인민군 5사단)의 창설과 활동, 북한으로의 귀환을 면밀히 추적한 6장과 11장이라고 평가한다. 저자가 참고한 김중생의 글에 따르면,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남진한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10개 연대가 만주 조선인 부대였으나, 정작 이들에 관한 연구는 미비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병() 개개인이 생각했던 귀환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저자가 언급했듯, 지휘부나 당위원회의 생각을 드러내주는 자료는 꽤나 많은 편이지만 병사 개개인의 속셈을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각주:4]

  1. 이 글에서 인용구는 주로 저자 및 다른 서평자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른 서평자의 글로는 任贊赫, 「해방 후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사회와 한국전쟁: 『또 하나의 한국전쟁: 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한국근현대사연구』 57, 2011을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강상중·현무암, 이목 옮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과함께, 2012. 이 책은 같은 저자가 쓴 『興亡の世界史 第18卷: 大日本・満州帝国の遺産』(東京: 講談社, 2010)을 국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3. 任贊赫, 앞의 글, 2011. [본문으로]
  4. 염인호, 『또 하나의 한국전쟁』, 역사비평사, 2010, 24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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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중·소관계()를 경유하여 6·25전쟁의 배경·원인·전개의 일부분을 살핀 역사서이다. 저자는 6·25전쟁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도 소련과 중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 및 그러한 결정이 이뤄질 수 있었던 공산측 지도부의 정세인식과 국제적인 상황요인을 서술하는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평자는 이 책을 6·25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역사서라기보다는 냉전사 또는 외교사(국제관계사)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사료에 근거를 둔 하위연구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하에서는 저자 소개와 책의 구성, 핵심주장, 논리 및 그를 뒷받침하는 자료적 근거 등을 살펴본 후 논평을 시도하겠다.

 

 저자는 1950년 북경 출생으로 일급의 역사가로 인정받기까지 독특한 경력을 쌓았다. 중공선전부장 등리쥔(邓力群, 1915~)의 도움을 받아 중국사회과학원에 어렵사리 입학했으나 1983년 재학 중 정치사건에 연루돼 복역하였다. 조기 출소한 후 무역사업과 금()거래를 통해 致富했고, 1993년 중국사학회동방역사연구소를 세웠다. 그 후 러시아문서고에서 직접, 또는 사료발굴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왕성한 학술활동을 벌여왔다. 현재 화동사범대학 교수이자 북경대학·인민대학 겸임교수 및 중국사회과학원 동양사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각주:1]

 

 이 책은 서론과 부록을 제외하고 5장으로 구성돼있고 시기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 여름까지를 다루었다. 저자는 서론에서 중·소관계 및 6·25전쟁에 관한 연구사를 개괄한 후 중소 동맹의 체결이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식의 사뭇 도발적인 주장을 제기하였다. 1장은 세계대전 이후 소련 대외정책의 변화와 대조선정책·대중국정책을 서술하였다. 2장은 1949년에서 1950년 사이에 벌어진 중·소 대화를, 3장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스탈린의 정세인식을 다루었다. 4장은 전쟁 발발 이후부터 중국의 참전까지를, 5장은 중국의 참전 이후 정전협정의 체결까지를 묘사하였다. 이어 두 개의 부록은 각각 조약 체결 전까지의 조·중관계와 정전협정 이전의 1년을 다룬 글이다.

 

 우선 저자의 시각과 방법론, 자료구사 방식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저자의 관심분야인 소련사와 냉전사의 하위 연구이면서 그 중에서도 중·소관계와 6·25전쟁 간의 연관을 확인하고자 기획됐다. 따라서 저자가 당시 중·소의 지도부, 그 중에서도 실권자였던 마오와 스탈린의 인식 및 동기에 주목한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이 책에서 광범한 자료를 구사했는데, 그 목록엔 문고, 선집, 공개자료(중국, 러연방 대통령·대외정책·국방성중앙 문서고 등), 회고록과 구술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저자가 밝혔듯, 사료의 진위판단을 잠시 미뤄둔다 하더라도, 각국 지도부의 내밀한 속셈을 솔직히 보여주는 사료 자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책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공개한 일은 미덕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저자가 쓴 자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또는 저자 고유의 선험적 해석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활용된 것은 아닌지 등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하겠다.

 

 저자의 주장과 논리를 다음의 도식처럼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혁명 새로운 중소조약[각주:2] 얄타체제의 변경에 따른 소련의 이권(핀란드-발트제국-동유럽, 근동-몽고-동베이-일본의 북방도서) 대체 필요성 동베이에서 한반도로의 목표 전환 아시아에서 소련의 공세적 선회 예상치 못한 미국의 적극적 개입 스탈린의 철수 통지(1011, 289~292) 마오쩌뚱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따른 파병 결정(1013, 299.)’ 이러한 저자의 논리 속에서 6·25전쟁의 주역은 결국 스탈린을 정점으로 하는 소련이었고, 중국은 그러한 소련의 의사에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오쩌뚱은 항상 소련에 동조하지만은 않았고, 파병에 이어 결국 제국주의미국을 상대로 선전을 벌였다. 그 결과 중·소 간의 분열과 마찰은 미봉됐고 동맹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시각이 꽤나 흥미롭다. 저자에 따르면 스탈린은 국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전형적인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세 부분 또는 세 단계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평화공존 - 세계혁명 - 국가의 안전과 이익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단계국가의 안전과 이익에 다른 단계를 종속시켰다. 이러한 논리는 어디서 기초한 것인가? 저자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스탈린이 지녔던 논리의 이론적 기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평가는 과연 정당한가? 일국사회주의론에 관한 지리한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한 것은 저자의 시각, 즉 스탈린의 외교에 관한 그러한 평가는 수많은 실증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련 외교를 보편적 개념인 이해관계와 계산적 합리성으로만 설명하여, 궁극적으로 그 특수성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없었다는 점이다.[각주:3]

 

 이 책의 내용 중에서 평자가 가장 주의 깊게 읽은 지점은 저자의 논리 중 아시아에서 소련의 공세적 선회부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스탈린은 “1950년 초 몇 개월 사이에()한반도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4)비밀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현재 러시아의 문건 중 어떤 관련 자료도확보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에 저자는 스탈린의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를 자문한 후, 중공의 등장 및 중소조약의 체결에 따른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이익이받게 된 위협 내지 상실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그 답으로 내놓는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의 공세적 선회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수행한 정황상의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굳이 소련의 선회, 즉 북한(의 공격계획)에 대한 승인과 관련하여 지면을 할애해 나름의 답을 내려야만 했던 것일까? 우선 그의 방법론에서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있을 터인데, 평자는 저자가 냉전사 연구에서 어느 한 지도자·분파의 능동성과 일방성을 전제하는 흐름 안에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신생국가인 북한은 어디까지나 소련(스탈린)의 손바닥 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에 따르면 그러한 선회의 계기는 신생 중공의 대두였다.

 

 저자의 논리와 설명방식은 6·25전쟁사 연구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시계열을 따라 사료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특정시기의 중·소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각국의 문서고가 개방됨에 따라 새로운 자료들이 등장함으로써 풍부한 역사상을 그릴 수 있는 충분조건이 확보됐고, 저자는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활용하여 상당히 일찍부터 러시아 자료와 중국 자료를 확보함으로써 해당 분야에서는 대가로 인정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6·25전쟁이라는 대사건 자체는 소외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전쟁의 직접적인 당사국인 남북한은 제대로 등장하지조차 않고, 일방이었던 유엔측또한 좀체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사의 맥락에서 6·25전쟁으로 이르게 되는 역사적 경로에 관한 설명은 완전히 생략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목적은 6·25전쟁을 중·소관계()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평자의 아쉬움은 ·소관계의 시각에서 또는 중공의 입장에서 6·25전쟁을 묻는 일은 오늘날 어떤 효과를 갖는가라는 질문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1. 특히 저자는 1995년 러시아문서고에서 비밀 해제된 자료를 구입하기 위해 사비 천사백만 위안(元)을 사용하면서 매체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상 저자의 약력에 관해서는 호주국립대학 중화지구연구소 누리집(http://www.thechinastory.org)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2. 중소우호동맹조약(소련-국민당 중국)은 1945년 8월 14일이 체결됐고,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소련-중공)은 1950년 2월 14일 체결됐다. 여기서는 후자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저자의 스탈린 해석이 과연 역사적 사실과 맞는지는 언제든지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다음의 연구 성과들을 참조할 수 있었다. 황동하, 「소련 역사 속의 “스탈린 시대”: 이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들」, 『서양사학연구』 7집, 2002; 노경덕, 노경덕, 「스탈린 시대 소련의 대외 관계, 1926-1953」, 『슬라브학보』 27권 1호, 20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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