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한국전쟁2014. 12. 8. 05:51

 1945923, 남한에 미()점령군이 진주한지 보름여 만에 최고실력자 하지 장군은 38도선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도로차단기 설치를 지시하였다. 그 결과 10월 중순까지 38도선 인근에 약 25개의 도로차단기가 설치되었다. 소련군 역시 같은 지역에 18~20개의 도로차단기를 설치하였다. 미군은 38도선 인근의 도시들을 신속하게 점령하였으며,[각주:1] 미군의 화답에 기초하여 소련군은 9월 초부터 38도선 통행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미소공위 예비회담(46.1.16~2.5)에서 한국인들의 38선 이동문제가 최초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장차 미소공위의 운명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논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46년 여름(5) 콜레라 만연을 기점으로 38선 통행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시간대를 종축으로 삼고, 한반도를 이분하는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역작이다. 이 책에서 첫 번째 시간대라고 할 수 있는 1945~48년의 기간은 서술의 원경(遠景)으로 제시된다. 이 시기 전후(前後) 강대국의 점령정책과 대한정책, 점령과 철수라는 원심력에 따라서 또는 이에 대응하여 남과 북에서 군()정이 들어섰고 각각은 상호작용 또는 충돌하며 긴장과 적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주연은 어디까지나 미소군정이었다. 두 번째 시간대인 1949~50년의 기간은 서술은 근경(近景)이면서 동시에 이 책의 핵심적 분석대상이다. 이 시기 강도와 규모를 달리하며 벌어진 남북 간의 충돌은 결국 북한의 무장력 강화와 전쟁의 형식을 창출(“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하에서는 기존의 서평을 참고하여 특장과 구성, 자료적 근거 등을 간략히 정리하겠다.[각주:2]

 

 독자는 이 책의 특장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책의 외관이 선사하는 두툼한 두께감에 더하여 이 책의 목적이 이론과 자료에 오도되거나 미혹되지 않고 역사적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작의 실증성을 웅변한다. 저자에 따르면, 책의 핵심 내용은 1999년 완성되었으나, “북한 자료들이 미진한 관계로 책이 출간되기까지는 7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사이 저자는 2001년과 2005년에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 미국의 여러 기관을 방문해 미국 자료를 비롯하여 신노획문서 전량과 구노획문서 3분의 1 정도를 검토하였다. 요컨대, 저자는 방대한 다국적 자료를 섭렵하는 방식을 통해 한국전쟁의 전사(前史)38도선 충돌의 역사를 탐구한 것이다.

 

 둘째, 이 책은 38도선 또는 38도선 충돌을 일관되게 매개로 삼아 미시사를 서술하였다. 다시 말해, 저자는 해방과 함께 찾아온 38도선의 형성에서부터 이를 둘러싸고 전개된 미소간의 상호작용, 미소의 군대가 철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외화(外化)된 남과 북의 충돌, 마침내 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사료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추적하였다. 서동만에 따르면, 기왕의 저작들이 동북아시아 국제관계 등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중시한 데 비해, 이 책은 미시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그간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한 1945~48년의 기간 38도선과 미소점령군과의 관계 및 1949~50년의 기간 38도선 충돌과 북한지도부의 대응을 미시적으로 복원한 셈이다. 이는 메릴, 커밍스, 양영조 등이 선구적으로 수행한 1949~50년 어간의 38도선 충돌 서술을 수정·보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셋째, 전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이 책은 내쟁 같은 국제전쟁, 외전 같은 동족전쟁이라는 1948년 남북 문화인 108인의 성명을 인용하며, “1950년 발발 시점에서 이미 내전이자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이 혼재돼있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성격 규정은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냉전연구에서 직간접적으로 발원했고 미소 중 어느 일방의 책임을 묻는 전통 대() 수정도식을 지양하며, 동시에 내전이나 국제전또는 내전으로 발화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는 설명도 거부한다. 저자의 성격 규정은 당시 한국인들의 정세 판단과 분석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의 근본적인 책임을 전후 강대국에게 돌리는 효과를 가진다. 물론 전쟁으로 치닫는 주요 동력은 내부 갈등이었으나, “그 궤도는 미소가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이 책은 800쪽이 넘는 분량으로 모두 520장으로 구성돼있다. I서장3장이고, 한국전쟁 연구사, 전재의 개전·성격·형성에 관한 논점들, 책의 구성·방법론·자료를 담고 있다. 박태균에 따르면, 이 서장은 한국전쟁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II미소의 38선 정책과 남북갈등의 기원5장이고, 38도선과 미소점령군을 매개로 하여 1945~48년의 역사를 살폈다. II 부는 미소 양국이 우발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교통할 수 있는 수단을 고안했으면서도 동시에 남북의 공식적 교류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상상의 선38도선이 한국인들에게 가한 실제적 힘은 경기도 연백군의 사례 두 가지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다. III'남북의 정치군사적 갈등과 38선 충돌'IV개전의 결정·공격 계획의 수립·초기 전투는 각각 5장과 4장이며, 단정이 수립된 이후부터 개전초기 옹진전투에 이르기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대를 미시적으로 살폈다. III부에서 저자는 최초로 1949년 한국군의 대북공격 가능성 문제를 천착하였고, 그 결과 도발 받지 않은 불의의 기습남침이나 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개전정보의 실패등 남북이 주장이 바로 이 1949년에 가닿아 있음을 증명하였다. IV부는 이른바 북··소 합의의 내용과 북한의 전면공격의 결정을 묘사했고, 정찰명령 1전투명령 1, 정찰계획등 북한의 의도를 담고 있는 자료를 사료비판하였다. V에필로그3장으로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관련된 주장·의혹(‘정보의 실패’, ‘해주점령설실상을 다루었다.

 

 이 책은 역사주의적인 접근과 연대기적인 접근을 방법론적 핵심으로 삼았다. 저자가 밝혔듯, 역사학의 본령이기도 한 엄격한 자료 비판은 본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이 책은 미··, 즉 한국전쟁의 당사국이었던 3개국의 주요 자료를 비교·교차·분석하였다. 저자는 다양한 언어로 쓰인 다양한 자료를 통해 한국전쟁의 미시사적 사실(史實)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이 구사한 미국자료는 주한미군사령부 정모참모부 및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이 생산한 정보보고서(일일정보요약, 주간정보요약, 북한정보요약), 주한미군971방첩대의 정보요약 및 연례보고서, NARA RG 332에 소장된 미소간의 왕래서한, 주한미24군단 군사실 문서철, RG59한국 내정 관련 문서철, RG 319의 육군 정보참모부 문서철, 맥아더아카이브에 소장된 KMAG 보고서·전문철 등이 있다. 저자는 자신이 구사한 소련자료를 크게 4가지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한국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 극비소련외교문서,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가 발행하는 소장처·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련문서, KGB 출신이자 소련문서고를 독점했던 볼코고노프 및 러시아 외무성 출신 학자들의 저작, 한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간행한 라주바예프(주북한 소련군사고문단장을 역임) 보고서. 기왕의 연구가 전쟁의 결정과 관련하여 지도부의 의중만을 쫓았다면, 저자는 소련자료에 드러난 1949년 소련과 북한의 시각과 입장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자료적 진가는 북한자료, 즉 노획문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가 구사한 구·신 노획문서는 대부분이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미군이 북한에서 노획한 자료들이 어떠한 여정을 거쳐 미국에 도달했고 그 후 방선주에 의해 세상에 공개될 때까지의 과정을 요약하였다.

  1. 춘천(9월 19일), 삼척(9월 25일), 의정부(9월 30일), 연안·배천(10월 초), 옹진(10월 5일). [본문으로]
  2. 서동만,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창작과비평』 34(3), 2006; 이완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역사와현실』 62, 2006; 박태균, 「다른 방식의 수정주의 뛰어넘기」, 『한국사연구』 136, 20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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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1. 24. 07:11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신화화는 오늘날 지배층이 지배적 이념(ideology)을 강화·호도·재생산하기 위한 유효한 방편 중 하나이다. 이러한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은 일각에서 국부(國父)”로까지 추대·숭앙하는 역사적 인물을 목도하고 있다. 바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초혼(招魂)되고 있으며, ‘가장(家長)’이자 지도자로서 상징 이상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그러한 신화화 작업의 주축을 이루는지, 그 의도와 목표는 무엇인지 알아보는 작업은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왜 특정 인물이 신화화의 대상이 됐는지를 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과연 이승만은 어떠한 인물이었고, 왜 오늘날 다시 주목을 끄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먼저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참고해보자. 왕실의 먼 방계 태생이었던 그는 배재학당을 거쳐 주로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젊은 시절부터 청년 지도자로서의 명망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됐고, 미주(美洲)를 근거지로 삼아 이른바 외교독립노선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수행하였다. 그의 노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 및 자리매김과는 별개로, 그는 20세기 초부터 한국 우파민족주의의 대표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과정 속에 자신을 명백히 각인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194874세의 나이에 신생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4·19로 하야할 때까지 12년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의민주주의의 여러 원칙을 몸소 부정했고, 그의 정치적 보증인이나 다름없던 미국을 겨냥하여 실력행사(반공포로 석방 등)도 불사했으며, ‘암울했던’ 1950년대라는 시대상을 만들어낸 핵심이자 주역이었다. 이후 ‘2의 고장이나 다름없던 하와이에서 사망하였다. ‘반공주의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우선 본문 714, 각주 1,781라는 수치가 보여주듯, 이승만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방대하면서도 실증적인 조사이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증보한 것으로, 모두 414장으로 구성돼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가교였던 이승만의 역할과 노선, 그것들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 과정을 분석하였다. 1(1~3)는 그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는 19131월 이전의 성장기 및 청년기를 다뤘다. 이승만은 미국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1910)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 변호 거부애국동지대표회(이른바 덴버대회) 참석1908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그의 사상과 지향을 충분히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2(4~6)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을 외교독립론실력양성론으로 정식화했고, ‘무장투쟁불가론’, ‘자력독립불가론’, ‘준비론이 이승만 노선의 방법론적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정립(鼎立)의 지도자라는 용어를 통해 박용만·안창호 등과의 비교를 통해 미주에서 그의 활약을 밝혔고, 1920~40년대의 외교활동을 정리하였다. 3(7~9)는 이 책의 핵심으로 해방 이후 이승만이 국내의 우파세력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던 사실의 기원을 되짚었다. 이승만의 국내 인맥의 형성 시기를 3·1운동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았다. 흥업구락부(1927~38)의 존재와 지향(유학, 기호(畿湖), 기독교, 친자본, 친미 성향)은 이승만 노선의 실체와 그의 국내 연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9장은 단파방송 사건을 살펴 이승만 신화가 해방 이전 국내의 좌우세력으로 확대·재생산되는 상황을 세밀하게 추적하였다. 4(10~14)는 해방 직후부터 제헌선거(1948) 이전까지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다루었다. 조기 귀국을 하기 위해 펼친 로비에 대한 서술에서부터 정치자금을 어떻게, 얼마나 모았는지에 대한 분석, 1946년 이후 전개된 이승만·김구·하지의 정치적 이별과정과 그 속에서 이승만이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는 모습까지 국내외를 넘나들며 최고지도자를 지향한 이승만의 역사를 충실하게 복원하였다.

 

 홍석률이 잘 요약한대로, 이승만은 전통과 현재, 한국과 세계가 교차하는인물의 전형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흔적을 드러내는 사료도 전통과 현재, 한국과 세계가 교차했던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한문과 우리말, 영문, 일문, 노문 등 실로 다양한 주체들이 작성한 다채로운 사료를 섭렵하였다. 이 책은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펴낸(1996) 이화장 소장 우남 이승만 문서(東文篇)을 골간으로 하여 조선왕조와 일본제국이 생산해낸 자료, 각종 신문조서와 재판기록, 판결문, 국내외의 여러 신문과 잡지,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관련 문서 및 미국 전역에 산재돼있는 개인 문서철, 관련자의 증언과 같은 구술 자료 등을 망라하였다.[각주:1] 요컨대, 이 책은 제헌선거 이전까지 이승만에 관해서, 적어도 자료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향후 1948년 이후 이승만에 관한 연구가 공히 참고해야하는 필독서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승만을 매개로 현실 정치인이 명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려주기 위해, 명망의 이면에 놓여 가려지기 쉬운 권력과 금전의 향배를 면밀하게 추적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다룬 13장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자료에 대한 심층 분석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이승만은 1946년 중반을 넘기면서 한국 우파에 대한 정치적 통제와 대중 조직 장악을 완료했다. 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승만이 우익 진영에서 가장 많은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운용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이승만 문서철에 남아 있던 영수증 자료와 비밀 해제된 미국문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5~47년의 기간 동안 최소 27백만 원, 최대 52백만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더불어 저자는 이와 관계된 한국인 유산층 모임이었던 대한경제보국회의 인적 구성과 각각의 경력 및 활동, 미군정의 기여 등을 추적하여 밝혀냈다. 그 결과 이해의 관건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 불법·탈법에 대한 묵인과 승인이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행위자와 구조 간의 역사적 상호작용 또한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일개인의 능력과 수완”, 그리고 그 인물을 둘러싼 외부의 틀인 구조 중 어느 것도 역사에 단독으로 출현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책의 일차적인 특징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저자의 노고는 빛을 발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인물 연구라는 역사 연구방법론의 한 분야를 충실히 잘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는 특정 인물의 파편적인 언행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행위자의 생각과 의도를 그의 행동과 결부하여 분석하고 검증하였다. 실증적인 역사 연구가 결코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자료의 확보와 저자의 노고가 결합될 때는 이 책과 같은 역작이 나올 수 있음을 예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롭게 발굴한 자료(핏치George A. Fitch 문서철에서 발굴한 이승만의 자서전 등)를 비롯하여 각종 사료를 종합한 저자의 노고와는 별개로, 이 책이 정작 이승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식으로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하려고 하는지에 관해서는 좀처럼 판단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7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바, 그러한 시간 폭을 이승만의 역할과 노선이라는 매개로 일이관지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미덕이다. 하지만 독자가 엄청난 자료의 홍수에 빠져, 또는 저자의 담담한 어조에 설득돼 이 책이 선사하는 새로운 역사적 관점이나 시각의 선회를 거리를 두고 음미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오히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저자가 과연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관해 무엇을 언급하려고 했을까?’라는 의문(평가의 문제)을 선사한다.

  1. 홍석률, 「사실과 역사 속의 이승만 연구」, 『한국사연구』 133권,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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