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현대한국2014. 12. 3. 08:28

 이 책은 저자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인 解放後 左右合作에 의한 民族國家建設運動 硏究(1990)을 수정·증보한 것으로, 1991년 초판 이래 판과 쇄를 거듭하여 출간되었다. 1945년 이후 한반도의 역사를 편의상 한국현대사라고 규정할 때, 이 책은 한국학계에서 한국현대사를 다룬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학위논문과 저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좌우합작운동을 열쇳말로 하여 해방3년사(출간 당시에는 해방후사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추정)’를 탐구하였다. 이하에서는 기존에 나온 서평들[각주:1]을 참고하여 저자, 출간의 배경, 책의 자료적·내용적 핵심과 의의를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우선 한국현대사 박사 1인 저자에 관해 알아보자. 서중석(徐仲錫)1948825일 충남 논산군 연무읍에서 출생하였다. 1967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한 뒤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하다가 학부 4학년이던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獄苦)를 치렀다. 박정희 정권은 거세지던 반대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급조하였고,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CJ)는 당시 판결(48)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 바 있다. 그 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신동아에서 기자로 활약하였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 복학하여 졸업(1984)했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198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1990)를 취득하였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봉직(1991~2013)하면서 역사문제연구소 운영위원(1986~2013, 2014년 현재 이사장),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자문위원(1994~2009),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위원장(2007~2013, 2014년 현재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80년대 후반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을 시작으로 6월 항쟁(2011)(사진과 그림으로 보는)한국 현대사(2013)까지 한국현대사의 주요 인물(이승만·김구·김규식·조봉암 등)이나 주제(민족운동·정당정치 등)를 다룬 굵직한 저작들을 펴냈으며, 연구와 후학 양성, 사회활동 등 다방면에서 실천적인 역사가로서 꾸준히 활약하였다.

 

 이 책은 어떠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하였는가? 박찬승과 최장집에 따르면, 한국현대()지배의 모순구조를 집단적으로 경험시켜준 구체적 계기는 바로 광주민중항쟁이었다. 한국사회는 5·18 이후 학원가와 작업장을 중심으로 반독재운동이나 반미운동 등 민주화 내지 변혁, 나아가 통일을 지향하는 감성과 실천의 폭발적 운동을 목도하였다. 동시에 도처에서의 운동을 하나의 대오로 묶어내려는 통일전선(이하 통전)운동이 본격화되었다.[각주:2] 시대의 과제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한국사 속에서 동형(同形)을 찾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의 이른바 급진적인 연구들학문적 엄밀성을 담보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회고적으로 제기됐다. 때맞춰 1990년대의 초입에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한국현대사 속 통전운동이 학문세계에서 시민권을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615쪽 분량으로, 5개의 보론을 더하여 모두 519장으로 구성돼있다. 각 부는 저자의 시기구분을 다음과 같이 그대로 반영하였다. 일제시기, 해방~모스크바3상회의(1), 모스크바3상회의~1차 미소공위(2), 1차 미소공위~남조선 과도입법의원 개원(3), 1947~19485·10선거(4). 저자의 강조점은 아무래도 좌파통전세력과 중도우파가 가담한 좌우합작운동을 다룬 4(3)에 놓여있다.

 

 이 책이 구사한 자료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김남식·이정식·한홍구가 편집(1986)한국현대사자료총서는 해방3년사 연구의 뼈대를 이루는 신문(한성일보, 해방일보 등), 잡지, 연감, 단행본 등 연대기적 자료와 함께 주요 회의 의사록(‘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의사록), 미소공위 및 남북협상관련 자료를 종합적으로 수록하였다. 이 책의 신문자료 구사 수준과 규모는 파천황이라 할만하다. 주한미군정보일지, 주한미군사, 미국무성비밀외교문서(FRUS로 추정) 등 미국 자료는 쓰인 시기를 고려했을 때 양이 적을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요행위자이자 규정력이었던 미국측의 의도를 보여준다. 각 개인들의 전기·회고록·논설 등은 연대기적 자료의 공백을 채우는데 일조하였다. 사상휘보, 사상월보등 일제가 생산한 자료는 일제시기 민족운동의 흔적을 담고 있으며, 일어판 코민테른 자료는 ‘12월 테제를 이어받은 ‘8월 테제’(좌경노선)의 사상적 배경을 잘 설명하였다. 이밖에도 이 책은 기본적인 북한관련 자료와 중국 관내 민족운동관련 자료를 다루었다. 요컨대, 이 책은 해방3년사 연구에 필요한 국내자료의 개황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앞서 설명한 시대적 배경을 이 책으로 외화(外化)한 셈이지만, 그것으로 소급되지 않는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서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이 책은 혁명 대() 반혁명의 관점으로 해방직후를 바라보는 시각을 거부한다. 이분법으로 역사를 재단할 경우,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구심력을 도외시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저자는 오히려 한국인의 주체적인 노력,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을 중심으로 해방직후를 살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멀게는 일제시기, 가깝게는 해방직후부터 제기된 통전운동(=좌우합작운동) 또는 그것의 역사를 매개로 삼아 해방3년사를 서술하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민족운동세력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우익세력, (급진)좌익세력, 통전세력의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2014년 현재, 재론의 여지가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해방3년사를 독해할 수 있는 하나의 유용한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우익세력은 임정봉대와 인공반대를 내세우며 단정도 불사하겠다는 식으로 민족국가 수립을 추구했고, 좌익세력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는 12월 테제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계속 경직된 움직임만을 보였다. 이러한 속에서 통전세력은, 저자가 설정한 지상명제인 민족국가의 수립에 가장 적합한 세력으로 그려진다. 저자에 따르면, 이 세 세력의 뿌리는 일제시기 민족운동에 근거한 것(1)이었다.

 

 2장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의 성격을 비교하면서 통전이라는 측면에서 전자를 긍정적으로 그려냈다. 이어 조선공산당과 인민당(여운형)의 모습이 비교되었다. 3장은 신탁통치 파동부터 1차 미소공위까지의 기간 동안 각 세력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묘사하였다. 1945년 연말부터 우익은 약점(민족 대 친일)을 냉전의 문법(찬탁 대 반탁)으로 호도했고, 좌익은 3상회의를 총체적으로 지지한다고 표명하면서 예의 경직성을 견지하였다. 저자는 박헌영보다는 백남운(=여운형)의 노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4장은 미소공위 휴회 이후의 남한 정국을 묘사하였다. 미국의 대한정책상의 변화와 맞물려 좌우합작운동이 제기됐으나 조공은 민전5원칙을 내세워 통전운동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좌익노선을 과오라고 평가하였다. 5장은 1947년 이후를 다루었다. 이 시기 세 세력의 노선은 각각 평행선을달렸고, 원심력이 구심력을 압도하는 현상이 남한 단선으로 표출되었다.

 

 저작의 선구성과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독자에게 상당히 많은 의문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책의 도처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개입(평가, 가정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연 그러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여하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국현대사 연구의 시발이자 출범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를 창출하였다.

  1. 박찬승, 「한국현대사연구와 통일전선문제」, 『창작과 비평』 73호, 1991; 정영태, 「해방직후 한국정치와 사회민주주의」, 『한국과 국제정치』 7권 2호, 1991; 최장집, 「‘가능의 정치’로서의 해방후사 연구」, 『역사비평』 14권, 1991. [본문으로]
  2. 박찬승은 “1984년의 민중민주운동협의회, 85년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87년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89년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90년의 국민연합, 91년의 범국민대책회의 등”을 통일전선운동의 대표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박찬승, 앞의 논문, 1991, 24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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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1. 24. 07:11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신화화는 오늘날 지배층이 지배적 이념(ideology)을 강화·호도·재생산하기 위한 유효한 방편 중 하나이다. 이러한 명제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은 일각에서 국부(國父)”로까지 추대·숭앙하는 역사적 인물을 목도하고 있다. 바로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이다. 그는 박정희(朴正熙, 1917~1979)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초혼(招魂)되고 있으며, ‘가장(家長)’이자 지도자로서 상징 이상의 지위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그러한 신화화 작업의 주축을 이루는지, 그 의도와 목표는 무엇인지 알아보는 작업은 분명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왜 특정 인물이 신화화의 대상이 됐는지를 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과연 이승만은 어떠한 인물이었고, 왜 오늘날 다시 주목을 끄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먼저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참고해보자. 왕실의 먼 방계 태생이었던 그는 배재학당을 거쳐 주로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젊은 시절부터 청년 지도자로서의 명망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됐고, 미주(美洲)를 근거지로 삼아 이른바 외교독립노선에 입각하여 민족운동을 수행하였다. 그의 노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 및 자리매김과는 별개로, 그는 20세기 초부터 한국 우파민족주의의 대표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과정 속에 자신을 명백히 각인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194874세의 나이에 신생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4·19로 하야할 때까지 12년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의민주주의의 여러 원칙을 몸소 부정했고, 그의 정치적 보증인이나 다름없던 미국을 겨냥하여 실력행사(반공포로 석방 등)도 불사했으며, ‘암울했던’ 1950년대라는 시대상을 만들어낸 핵심이자 주역이었다. 이후 ‘2의 고장이나 다름없던 하와이에서 사망하였다. ‘반공주의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우선 본문 714, 각주 1,781라는 수치가 보여주듯, 이승만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방대하면서도 실증적인 조사이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증보한 것으로, 모두 414장으로 구성돼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가교였던 이승만의 역할과 노선, 그것들의 역사적 배경과 형성 과정을 분석하였다. 1(1~3)는 그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는 19131월 이전의 성장기 및 청년기를 다뤘다. 이승만은 미국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1910)했다. ‘스티븐스 저격 사건 변호 거부애국동지대표회(이른바 덴버대회) 참석1908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그의 사상과 지향을 충분히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2(4~6)는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을 외교독립론실력양성론으로 정식화했고, ‘무장투쟁불가론’, ‘자력독립불가론’, ‘준비론이 이승만 노선의 방법론적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정립(鼎立)의 지도자라는 용어를 통해 박용만·안창호 등과의 비교를 통해 미주에서 그의 활약을 밝혔고, 1920~40년대의 외교활동을 정리하였다. 3(7~9)는 이 책의 핵심으로 해방 이후 이승만이 국내의 우파세력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던 사실의 기원을 되짚었다. 이승만의 국내 인맥의 형성 시기를 3·1운동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았다. 흥업구락부(1927~38)의 존재와 지향(유학, 기호(畿湖), 기독교, 친자본, 친미 성향)은 이승만 노선의 실체와 그의 국내 연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9장은 단파방송 사건을 살펴 이승만 신화가 해방 이전 국내의 좌우세력으로 확대·재생산되는 상황을 세밀하게 추적하였다. 4(10~14)는 해방 직후부터 제헌선거(1948) 이전까지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다루었다. 조기 귀국을 하기 위해 펼친 로비에 대한 서술에서부터 정치자금을 어떻게, 얼마나 모았는지에 대한 분석, 1946년 이후 전개된 이승만·김구·하지의 정치적 이별과정과 그 속에서 이승만이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는 모습까지 국내외를 넘나들며 최고지도자를 지향한 이승만의 역사를 충실하게 복원하였다.

 

 홍석률이 잘 요약한대로, 이승만은 전통과 현재, 한국과 세계가 교차하는인물의 전형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흔적을 드러내는 사료도 전통과 현재, 한국과 세계가 교차했던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한문과 우리말, 영문, 일문, 노문 등 실로 다양한 주체들이 작성한 다채로운 사료를 섭렵하였다. 이 책은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펴낸(1996) 이화장 소장 우남 이승만 문서(東文篇)을 골간으로 하여 조선왕조와 일본제국이 생산해낸 자료, 각종 신문조서와 재판기록, 판결문, 국내외의 여러 신문과 잡지,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관련 문서 및 미국 전역에 산재돼있는 개인 문서철, 관련자의 증언과 같은 구술 자료 등을 망라하였다.[각주:1] 요컨대, 이 책은 제헌선거 이전까지 이승만에 관해서, 적어도 자료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향후 1948년 이후 이승만에 관한 연구가 공히 참고해야하는 필독서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승만을 매개로 현실 정치인이 명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들려주기 위해, 명망의 이면에 놓여 가려지기 쉬운 권력과 금전의 향배를 면밀하게 추적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다룬 13장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자료에 대한 심층 분석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의 평가에 따르면, 이승만은 1946년 중반을 넘기면서 한국 우파에 대한 정치적 통제와 대중 조직 장악을 완료했다. 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저자는 이승만이 우익 진영에서 가장 많은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운용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이승만 문서철에 남아 있던 영수증 자료와 비밀 해제된 미국문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45~47년의 기간 동안 최소 27백만 원, 최대 52백만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더불어 저자는 이와 관계된 한국인 유산층 모임이었던 대한경제보국회의 인적 구성과 각각의 경력 및 활동, 미군정의 기여 등을 추적하여 밝혀냈다. 그 결과 이해의 관건은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 불법·탈법에 대한 묵인과 승인이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행위자와 구조 간의 역사적 상호작용 또한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일개인의 능력과 수완”, 그리고 그 인물을 둘러싼 외부의 틀인 구조 중 어느 것도 역사에 단독으로 출현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책의 일차적인 특징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저자의 노고는 빛을 발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인물 연구라는 역사 연구방법론의 한 분야를 충실히 잘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는 특정 인물의 파편적인 언행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행위자의 생각과 의도를 그의 행동과 결부하여 분석하고 검증하였다. 실증적인 역사 연구가 결코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자료의 확보와 저자의 노고가 결합될 때는 이 책과 같은 역작이 나올 수 있음을 예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롭게 발굴한 자료(핏치George A. Fitch 문서철에서 발굴한 이승만의 자서전 등)를 비롯하여 각종 사료를 종합한 저자의 노고와는 별개로, 이 책이 정작 이승만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식으로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하려고 하는지에 관해서는 좀처럼 판단하기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7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바, 그러한 시간 폭을 이승만의 역할과 노선이라는 매개로 일이관지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미덕이다. 하지만 독자가 엄청난 자료의 홍수에 빠져, 또는 저자의 담담한 어조에 설득돼 이 책이 선사하는 새로운 역사적 관점이나 시각의 선회를 거리를 두고 음미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오히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저자가 과연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관해 무엇을 언급하려고 했을까?’라는 의문(평가의 문제)을 선사한다.

  1. 홍석률, 「사실과 역사 속의 이승만 연구」, 『한국사연구』 133권,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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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0. 26. 06:35

 이 책은 미국에서 수학한 저자의 정치학 박사학위논문을 국역한 것으로, 1948년 이승만 정부의 출범 때부터 19615·16 군사쿠데타에 이어 장면 정부의 붕괴까지의 정치사를 다룬 연구 성과이다. 박사학위논문의 원제는 The Failure of Democracy in South Korea로 국역해보자면 실패한 남한의 민주주의정도로 옮겨볼 수 있겠다. 따라서 독자는 이 글이 1948~1961년의 한국현대정치사, 그 중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실패에 주목하여 쓴 것임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평가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며, 독자는 어떤 식으로 저자의 해석을 받아들여야 할까? 저자는 어떠한 사관에 입각하고 있는가?

 

 저자의 평가를 따라가는 한편 민주주의민중(내지 인민)’을 열쇳말 삼아 한국현대사를 살폈을 때, 그것이 실패 외에 다른 어떤 것이었음을 주장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자의 논지는 박사학위논문이 출간된 1974년에도, 이 글을 쓰는 2014년 현재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1987년 대의제 민주주의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운동 속에서 사회가 질식하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는 견제의 기능을 멈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하에서는 책의 내용을 정리한 후 비평을 시도하겠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장으로 구성돼있다. 저자는 서론(1)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논문으로서의 여러 구성요건 중 하나로 보이는 1960년대 당시의 다양한 사회과학 방법론을 서술했고, 해당 방법론들이 한국정치사에 그대로 적용하기 힘든 성격의 것들임을 밝힌 후에 본론에서 다룰 내용의 요체를 적시했다. 저자의 핵심주장은 다음과 같은데, 2공화국이 붕괴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양극화 현상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즉 저자는 장면(張勉, 1899~1966) 정부의 붕괴와 잇따른 5·16 군사쿠데타를 남한 민주주의의 실패로 규정하고, 어떻게 이러한 실패가 도래했는가를 추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저자의 문제제기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과연 정당한지는 의문이 들었다. 이하에서 다시 재론하겠다.

 

 2장과 3장은 해방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을 통해 분단과 전쟁이라는 주제 및 시민사회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과도한 행정력, 즉 제1공화국의 유산과 한민당-민국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을 묘사했다. 독자는 여기서 남한 군부의 성장과 비대화, 그리고 특히 ()정치적요소에 집중하는 저자의 서술을 읽을 수 있다. 2장과 3장의 배경설명은 제2공화국 의회정치의 난맥상과 세력 간의 이합집산, 마지막으로 군사쿠데타를 자칫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하는 장치들 중 하나이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대 내내 이승만은 경찰로 대표되는 제도(행정부)를 통해 반대세력에게 물리력을 행사했다. 그러한 속에서 이승만의 반대세력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승만의 하야 이후 보인 난맥상은 이러한 정치적 경험부족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이 시기 훈련(()자유당으로서의 의회정치 활동)은 곧 죽음(조봉암 등)으로 언제든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4장과 5장에서 독자는 4·19부터 7월 총선(5대 국회의원 선거)까지의 대략적인 모습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4장은 4·19직후 등장한 허정 과도정부를 다루었다. 이 장에서는 이승만이 퇴출된 후 자유당이 와해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 세력의 권력 독점과 이데올로기적 일치라는 요인이야말로 자유당 해체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데, 권력욕 외에는 집합적 행동의 동기가 없으므로 구심점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운명은 해체라는 식이다. 저자는 자유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 및 사회세력에 대해서도 일관된 설명을 시도했다. 5장은 진보당으로 대표되는 혁신계의 배경 및 4·19이후 등장한 사회대중당(서상일, 이동화 등), 한국사회당(전진한), 사회혁신당(고정훈) 등 주요정당의 정치활동을 서술했다.

 

 6장은 전반적으로 민주당의 우세 속에서 펼쳐지는 제2공화국 의회정치의 전개양상을 다루었다. 여기서도 저자는 개인적 연줄과 즉각적인 개인적 이해관계라는 요소에 주목하여 정치파벌(주로 민주당 구파와 신파)간의 적대와 대립을 묘사했다. 평자는 특히 8월에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어떤 식으로 장면이 권력을 거머쥐게 됐는지 설명한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1960812, “구파 내에 조직된 추종자를 가지지 못한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이어서 그는 같은 계파 내의 경쟁자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공표(16)했다. 그러나 국회는 한 계파의 지배를 피하기 위해 김도연을 반대(17)했고, 장면에게는 찬성(19)을 던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의 분석처럼 당시 무소속 의원들이 김도연과 장면에게 똑같은 수의 지지표(21)와 반대표(16)를 던졌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시 국회에서 민주당이 다른 당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는 분열돼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장은 소제목처럼 진퇴양난에 빠진 장면 정권과 사태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마지막으로 8장은 19607월 선거에서 패배를 맛본 혁신계의 재배치(사회대중당과 사회당/통일사회당/민족통일당)와 그들의 대미관(對美觀) 및 통일정책, 그리고 당시 남한 시민사회의 주요한 두 조직이었던 교원노조와 학생단체의 결성을 그려냈다. 장면은 이른바 신파의 상징이었으나, 그는 구파·신파·무소속의 국회 내 세력 중 어느 한쪽을 휘어잡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친이승만세력 및 부정축재자에 대해서는 미온적 처벌에 그쳤고, 경찰력과 군부 중 어느 집단에게도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다. 미군은 시시때때로 정부의 군 개혁안에 우려를 표명했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정부의 미약한 행정력은 1950년대와는 너무도 대비됐고, 들풀에 불이 번지듯 터져 나오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결코 소화해낼 수 없었다. 국가주의적 우파의 물리적 반동이 언제든 실행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자는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나 조지 맥큔의 Korea Today 등 당시이용 가능했던 일급의 역사서와 함께 명사(名士)들의 회고록, 사상계재정, 고시계같은 국내잡지 등을 주된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책의 이론적 자원으로, 저자는 Gabriel Almond(1911~2002), David Easton(1917~2014), Morris Janowitz(1919~1988), Martin Lipset(1922~2006) 등 미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군의 사회학자·정치학자들을 두루 이용했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 이른바 행태주의자들이었다. 행태주의자들에 관한 비판으로는 미국인 학자 Ron Robin이 쓴 The Making of the Cold War Enemy를 참조할 수 있는데, 그 핵심은 당시 행태주의자들이 사람과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역사적 맥락을 사상(捨象)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저자는 서양의 이론을 특정 국가의 특정한 상황에 적용하는 일은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저자의 시도가 행태주의과학의 난점을 극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반공주의로 점철된 1950년대를 제시했고, 그 속에서 이승만과 대비되는 무능한기성 정치인의 모습과 혁명이후 권력창출에 실패한 세력의 존재양식을 추적했다. 이 책은 출간된 시점이나 국역된 시점을 고려했을 때, 2공화국의 정치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요소를 두루 다루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양극화와 그러한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행정부를 비판하는 가정(假定)식의 논의는 여러모로 한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양극화는 현대사회가 지닌 보편성이기도 하며, 후자의 논의는 쿠데타세력을 비호하는 논리로 언제든 탈바꿈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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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대사2014. 10. 9. 09:04

4.19는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

 

국사학과 석사과정 우동현

 

1. 서론: 혁명의 정의와 개념, 그리고 4.19[각주:1]

 

최갑수에 따르면 혁명이란 원래 易姓革命을 줄인 말로서,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을 말한다.[각주:2] 그러나 같은 역성혁명이라 하더라도 동양과 서양의 역사적 경험은 상이했다. 전통시대에 동양의 왕조가 대개 역성혁명을 통해 대두한 후 사라진 반면, 프랑스의 경우 카롤링거 왕조에서부터 부르봉 왕조까지 방계 혈통이 왕위를 계승했고 사실상 같은 왕통이 1천년 넘게 지속됐다. 또한 유럽에서는 강력한 국제적 귀족집단과 유럽적 차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기독교가 왕가의 존재를 세속적이고 종교적으로 보장했다. 따라서 영국(1649)과 프랑스(1793)에서 혁명세력이 국왕을 처형한 사건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고, 이제 혁명은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될 터였다.

근대적 의미의 혁명은 revolution을 번역한 말로서,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을 의미한다. 서양에 연원을 둔 이 새로운 용어는 19세기 후반 동양에 전파됐으나, 번역되지는 않았다. 다만 기존의 단어인 혁명이 근대적 의미를 획득하게 됐고, 이후 전통적 의미는 퇴색했다. 더하여 혁명은 근대성의 핵심적 요소로 거듭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쓰일 수 있는 다소간 모호하지만 풍성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한편 최갑수는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입헌혁명사회혁명으로 분류했으나, 양자 모두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새 사회에 대한 전망이라는 의미와 인간해방의 계기를 갖는다고 썼다.

한편 한국현대사에서 혁명이라는 記標는 여러 논자들이 다소 모호하게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홍석률은 자신의 글에서 쿠데타와 혁명을 비교하며, 혁명은 어떤 개혁적 진보적 가치를 내걸고 피지배집단인 민중이 참여하여 권력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했다.[각주:3] 이러한 정의는 5.16군사혁명내지 근대화 혁명이라고 부르짖는 작태에 학술적으로 맞설 때는 타당할 수 있으나, 결코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온전히 표상했다고는 볼 수 없다. 요컨대 논자마다 혁명을 명명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안에서 합의점을 찾기란 요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서구의 최신 논의를 정리하고, 그에 입각하여 한국현대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구에 연원을 둔 개념이니만큼 본고장에서 나온 주장을 겸허하나 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논의의 적실성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현대사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4.19를 연구사적 차원에서 정리하고, 서구의 이론을 잣대로 삼아 4.19를 재본다.

 

2. “새로운정통 부르주아혁명론[각주:4]

 

이 장은 서구에서 나온 최신이론을 정리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국사의 맥락에 적용해보기 위한 整地작업의 성격을 띤다. 이하에서 필자는 스코틀랜드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자인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 이하 저자”)이 쓴 부르주아혁명은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이하 저서”)革命論에 관한 최신의 연구 성과로 보고 그 대강을 살펴볼 것이다.

저자는 저서 19장에서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개념의 역사적 전개를 다루며, 트로츠키, 아이작 도이처, 토니 클리프 각각의 혁명론을 비교했다. 세 인물 중 뒤의 두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트로츠키주의를 수용 변형 주창했고, 그들의 트로츠키주의는 이후 20세기 후반 서구학계에서 전개될 다양한 부르주아혁명론의 저변을 이루었다. 저자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주도하여 개발도상국이 봉건 · 종속 · 식민지적 지배관계에서 벗어나 국제적 혁명운동의 일부로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구혁명으로 보았다. 트로츠키의 혁명론도 시기에 따라 표면적으로 변했으나, 어쨌든 그의 영구혁명론의 대표적인 사례는 1917년의 러시아였다. 한편 도이처는 구체제에 대항하여 피억압자 대다수가 봉기하고, “자유의 억압과 내전이 뒤따르며, 새로운 지배계급이 최종적으로 인민대중의 평등주의적 꿈을 폐기하는 양상을 언급하며 역사상 위대한 혁명들(영국, 프랑스, 러시아)”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부르주아혁명론에 관해, “구체제 또는 구체제 내부의 요소가 내부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를 부과하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따라서 그의 논의에서 부르주아혁명의 주체는 반드시 부르주아일 필요가 없었다. 도이처와 달리 클리프는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용어를 쓰진 않았으나, “엇나간(deflected) 영구혁명을 통해 부르주아혁명의 근대적 판본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엇나간 영구혁명을 노동계급이 영구혁명 전략을 완수할 수 없었고, 다른 사회세력이 지도부를 맡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또는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었다.

앞선 논의는 모두 근본적인 사회변형을 수반했던 역사적 혁명과, 그러한 변형을 가져올 미래의 사회주의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 전자인 부르주아혁명은 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가 더 이상 어떠한 제약에도 놓이지 않게 되는 시발이었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혁명은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적 사회관계의 번창과 전체로서의 부르주아 사회의 발달과 일치하는 국가 권력과 조직적 틀을 창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는 가장 지엽적인 부르주아혁명을 제외하고는 부르주아혁명이 모든 곳에서 현실적 목적을 위해 이미 성취됐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혁명은 사회주의혁명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제 부르주아혁명론에서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부르주아지로 한정될 필요가 없어졌다. 부르주아혁명이 그것을 수행한 주체와는 별개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르주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같은 형태를 가질 필요도 없다. 즉 부르주아혁명은 자본주의가 한 사회에 자리 잡게 되는 과정, 실로 격변을 거쳐야하는 사회주의혁명의 순간중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저자는 바로 다음 장에서 두 혁명,” 즉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간의 차이를 다뤘다. 저자에 따르면 둘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상호 중첩되기도 했다. 일부 정치혁명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든 사회혁명은 정치적 변화를 보였다. 또한 일부 사회혁명은 단순히 정치혁명의 외피를 입고 있더라도, 장기적인 사회혁명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저자는 애봇(Andrew Abbott)전환점(turning point)” 분석을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滔滔히 흐르는 자본주의의 과정과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인 부르주아혁명을 동시에 설명하려고 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기왕의 부르주아혁명론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주체와 성격을 가지고 논의가 분분했으며, 학문적 陣營을 가르는 계선 중 하나가 바로 그 사건이 정치적이냐 사회적이냐의 구분이었다. 저자는 영국의 지성인 해링턴과 로크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누적을 바탕으로, 정치혁명은 사회경제적 구조 안에서발생하나, 사회혁명은 한 형태의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나아가는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전자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 없이 사회 내부에서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지배계층 분파 간의 투쟁이고, 후자는 이미 진행된 생산양식상의 변화에 상응하거나 또는 그러한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 국가를 변형시키려는 투쟁이다.

한편 사회혁명은 반드시 직접적 계급투쟁의 결과일 필요가 없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혁명은 역사 속에서 분명 발생했으나 그 수가 너무 적어 사회혁명의 일반적 속성을 추출하기란 어렵다. 더하여 노예소유주가 봉건영주로, 봉건영주가 자본가로 변했던 것처럼, 기존 지배계급의 일원이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이전의 지위를 잃지 않고 역할만 바꿀 수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계급투쟁의 모습이 실로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계급체제 내부에서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대립하고, “계급체제 사이에서는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대립한다. 특히 후자의 관계에서 사태가 복잡해지는데, 모든 피착취계급은 억압을 당하지만, 모든 피압제계급이 착취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압제계급이 다른 피압제계급을 착취할 수도 있다. 역사적 피압제계급 중 사회를 재편할 역량을 가진 수는 제한적이었고, 부르주아만이 독보적으로 그러한 역량을 갖췄다.

이어서 저자는 부르주아혁명 시대의 전제조건을 다섯 개로 나누어 설명했다.[각주:5] 각각은 다음 사건의 대두를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확정적인 역사적 사건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서구의 경험에 국한하여 그 조건들을 탐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세계를 시야에 넣으려 하였고, 그 결과 세 번째 조건인 자본주의적 국가의 구조적 능력절을 전후로 과거의 유럽식민지들과 오스만 무굴 제국 일본 등 아시아의 사례가 대거 등장했다. 저자의 구도를 받아들일 경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또는 계급사회)은 노예 봉건 공납으로 구분된다. 더하여 저자는 절대주의를 공납적 양식의 서양식 변종으로 보는 아민(Samir Amin)의 견해에 주목했다. 요컨대 절대주의는 서구 바깥의 생산양식과 그에 상응하는 국가형태를 유럽에 도입하여 생산의 족쇄를 부과하려던 시도였으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공납국가와는 달리 서구절대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결코 막지 못했다. 하지만 절대주의국가는 그것이 타도되기 전까지 자본주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고, 이제 혁명적 주체와 그들을 움직이게 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할 터였다.

저자는 마지막장에서 부르주아혁명이 완성(Consummation)”된 여러 양상을 다루었다. 저자에 따르면 부르주아혁명의 완성은 자본주의적 개별국가의 전복과 자본주의적 내부발전의 장애물 제거, 그리고 국제적 환경의 영향이라는 면 등에서 고찰해야 한다. 서로 다르고 적대적인 체제들이 우세한 세계에서 고립됐을수록, 사회혁명에서 외압과 내부 국가전복이 쉬이 혼합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혁명 이후의 사회는 자본주의적 운동법칙에 종속된 경제와 임노동에 기반을 둔 경쟁적 축적에 헌신하는 국가를 주된 특징으로 한다.[각주:6] 이제 잉여착취의 중심수단에 임노동이 자리매김하고, “경제(또는 사적 專用)”정치(또는 공적 의무)”는 분리될 터였다. 절대주의국가에서 지배층이 지녔던 人身적 권력은 사회적 의무를 얼마간 포함했다. 그러나 로부터 공적 심급(경쟁적 축적)이 새로이 창출됐고, 이제 자본주의국가에서 자본가는 사회적 공적 기능을 수행할 의무없이 경제적 힘을 발휘하게 됐다.

 

3. 국내 연구: 4.19연구의 쟁점과 과제

 

이 장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진행된 4.19연구의 쟁점과 과제를 살필 것이다. 서술의 저본은 한국사연구회 4월민주항쟁연구반 소속 연구자들의 공동저작으로, 이 책은 4.19민중의 민주항쟁으로 규정했다.[각주:7] 홍석률과 정창현(이하 공저자”)에 따르면 4.19“6·25전쟁 뒤 사회변혁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직후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것은 이승만을 권좌에서 축출했으나, “주도세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뚜렷한 이념이 없어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완성에는 실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공저자의 주장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체와 민족통일의 당위성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전제인 듯하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공저자의 성격규정이 함축하는 과도한 문제의식을 일단 비판적으로 인정하고, 이하에서 그 내용을 살핀다.

. 4.19의 원인과 배경. 여태껏 4.19가 일어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차원에서 분석이 시도됐다. 1970년대 이뤄진 초기 연구는 학생들의 불만과 분노가 어디서 연유했는지에 집중했고, 그리하여 구조적 차원의 원인 규명보다는 다소 현상적인 차원의 분석이 이뤄졌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적 · 정치현상적 차원에서 4.19의 원인을 분석한 연구들은 이후 현상적 원인규명이라는 반론에 직면했다. 이제 연구의 방향은 3·15 부정선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왜 그러한 부정선거가 자행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4.19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나 파행적인 도시화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규명이 요구됐고, 전철환, 이대근, 손호철 등의 연구자는 각각 한국경제의 대미의존성, 원조경제의 모순, 국내외적 모순이 연계된 총체적 위기를 열쇳말로 삼아 연구를 진행했다. 이종원은 자신이 쓴 동아시아냉전과 한미일관계(アジア冷戰韓美日關係, 1996)에서 비밀 해제된 미국자료를 근거로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을 분석했다. 그는 미국이 부패 · 무능하고, 계속 북진통일식의 구형 냉전논리를 주장하며, 한일관계 정상화를 도외시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한편 공저자에 따르면 기왕의 연구들은 4.19를 촉발 · 주도한 주체들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객관적인 조건만을 나열했을 뿐이다. 그 중 박찬호는 당시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대중들의 역할을 살폈고, 1950년대를 운동의 회복기또는 운동의 내재적 성장기로 파악하여 선구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시론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 사회활동과 학생운동의 주체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 4.19의 전개과정. 4.19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는 크게 초기 연구와 1980년대 이후의 연구로 대별된다. 전자는 그 시기를 19602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부터 같은 해 426일 이승만의 퇴진까지로 보았고, 후자는 5.16 쿠데타 직전의 2공화국까지를 포괄했다. 공저자는 이 중 후자를 바탕으로 4.19의 전개과정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눴다.

첫 번째 시기는 19602월부터 4월까지이다. 공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 대중의 시위과정은 기초적인 사실이 정리된 바탕 위에 비교적 소상하게 진척되었다.” 이 때 4.19의 주체들은 학생에 국한되지 않았고, 특히 밤이 되면 학생들의 온건한 시위가 펼쳐진 낮과는 반대로 시위가 과격화되고 도시빈민층이나 일반시민들도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하여 4.19와 미국의 개입문제라는 주제도 1980년대에 들어와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이재봉의 경우 비밀 해제된 미국외교문서(FRUS)를 자료적 근거로 하여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각주:8]

두 번째 시기는 이승만 퇴진 이후 허정 과도정권의 수립과 개헌, 7.29총선으로 새 정권이 창출되기까지의 과도기이다. 허정 과도정권에 대한 평가는 肯否가 엇갈렸는데, 공저자에 따르면 이는 혁명의 주도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에 결국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권력을 재편할 수밖에 없던 4.19의 한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초기 연구경향은 대개 7.29 총선에 관해 공정한 선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90년대 공개된 미국자료 및 이갑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온건지향적 다수파인 민주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했으나,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가 비슷하게 의석을 차지하여 어느 한 쪽도 안정적이고 주도적인 정부를 꾸릴 수 없었다. “구체제의 골자가 유지된 상황에서일련의 민주화 조치가 있었을 뿐, 결국 4.19는 지배층 내부의 재편만을 불러왔다.

세 번째 시기는 민주당 정권의 성립과, 그와 동시에 기층 민중운동 및 통일운동이 활성화하는 시기이다. 대표적인 초기 연구자인 한승주는 4.19자유민주주의의 실험 와중에서 조성된 혼란기로 규정하는 견해를 체계화했다.[각주:9]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민주당 정권이 새로 대두하는 극단적인 좌파주의와 극단적인 반공주의양자로부터 협공을 받았고, 운신의 폭이 좁은 상태에서 결국 쿠데타를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를 양극화이론이라고 한다. 후기의 연구들은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띠었다. 김수진은 당시의 혼란을 정치적 양극화보다는 민주화 과정에서 필연적인 사회적 갈등을 제도권이 흡수할 수 없었던 정치권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한편 서중석은 민주당 정권과 그 구성원의 본질적 한계가 당시의 혼돈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극우반공이데올로기를 기본으로 하고, “폭력체계를 집단의 특성으로 하는 민주당은 민중항쟁에 편승하여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애초에 자유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저자에 따르면 4.19 시기의 사회변동을 전후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파악하려고 시도한 연구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당시는 외적으로 변동하는 냉전체제”, 내적으로 4.19라는 격변이 있었고, 각 정파와 주체 또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향후 연구는 그러한 변화를 역사적 맥락과 연결하여 제 나름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하고, 각각의 의미와 한계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 4.19 시기의 민중운동. 4.196·25전쟁 이후 완만하게 성장하던 민중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된 계기였다.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됐고, 조국통일민족전선과 같은 연합조직도 조직됐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운동은 5.16 쿠데타 이후 후퇴했다. 한편 이 시기 민중운동에 대한 평가는 극우 일변도의 정치무대에서 나머지 정치세력이었던 혁신정치세력과 사회운동,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대중운동은 7.29총선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학생운동도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더하여 이 시기 민간차원의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에 주목할 만한데, 공저자에 따르면 당시 냉전체제의 공존과 3세계 민족주의의 대두,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 강화 등통일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던 객관적 요인이 존재했다. 한편 민중운동 연구는 각론의 차원에서 노동운동 · 농민운동 · 청년 및 학생운동 ·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등으로 나뉘어 연구가 진행됐으나, 여전히 규명해야 할 사실이 많고 전후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 4.19의 성격. 4.19를 어떤 용어로 규정할 것인가에 관해 4.19 직후부터 논의가 분분했다. 당시 좌우를 불문하고 4.19혁명이라고 표상했으나,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記意는 전혀 달랐다. 한편 공저자에 따르면 혁명엄격히 학문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때쓰인다. 현재 학계에선 4.19지향성에 주목하여 “4월 혁명을 사용하려는 분파와, 엄밀한 기준에서 볼 때 진정한 사회체제의 변혁을 가져오진 않았으므로 항쟁이 적확하다고 주장하는 분파가 맞부딪히고 있다.

기왕의 연구는 4.19의 성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규정했다. 각각의 주장은 학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각 주장이 대변하는 주체들의 역사관 또는 지향성과 긴밀하게 닿아있다. 첫째는 4.19를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파악하는 방식으로, 대표적 논자는 민석홍이었다. 여기서 근대화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개발이라는 이중혁명론의 구체화이다. 그러나 공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설명방식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4.19그대로 대입해 파악하여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방식으로, 대개 4.19 직후의 통일운동이나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등 민족주의의 고양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의적 흐름은 4.19 이전으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이전부터 지속되던 민족운동사의 흐름속에서 4.19 이후 민족주의의 자리매김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보는 방식으로, 이는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장과 변혁운동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 또한 실증적이고 구체적이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어떤 시론이나 문제제기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한계가 일정 정도 자료부족이나 연구자의 문제의식의 과잉에 기인한다고 본다.

. 연구과제. 공저자에 따르면 4.19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서까지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1970년대 미국의 박사학위 논문을 방법론과 자료구사 수준에서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 자료발굴이 선행돼야 할 것이고, 실증적인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기왕의 연구처럼 시각이나 방법론 중심의 역사연구가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둘째, 연구 분야와 폭을 넓혀야 한다. 대개의 4.19 연구는 정치사와 운동사에 국한돼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 · 경제문제와 그러한 문제들을 두고 진행된 백가쟁명의 시기를 더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더하여 대중의 생활상 같은 미시사적 주제와 이산가족문제 및 월남민문제, 국제적 환경 등에 관해서도 연구전망을 세워야 한다. 셋째, 4.19와 그것의 의미를 전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 부분에 관한 연구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평면적으로 사건과 그 추이를 나열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연발생적민중운동 안에 용해된 지도성대중성을 포괄해서 파악해야 한다. 요컨대 4.19 연구는 전인미답의 분야뿐만 아니라 장차 발굴될 새로운 자료들도 많이 있다.

 

4. 순간과 과정: 역사적 맥락 안의 4.19

 

이 장에서는 앞서 파악한 최신의 혁명론과 연구 성과를 살펴본 4.19를 접맥시켜볼 것이다. 필자는 이 장을 서술하기에 앞서 다음의 지침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첫째, 이 장의 서술은 어디까지나 시론의 성격을 갖는다. 둘째, 어떤 역사적 사건을 파악할 때는 그 사건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이 어떠한 궤적 속에 놓여있는지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4.19의 전후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4.19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것이다. 셋째, 닐 데이비슨의 혁명론을 탐구의 도구로 삼아 4.19를 파악해 볼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하에서 4.19라는 순간적이고 분수령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과정 속에 놓여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이현진은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정치면에서는 보수 양당체제가 형성되었고, 경제면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통한 대외 의존적 성장의 틀이 마련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의 붕괴와 가치규범의 혼란으로 전통적 가족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각주:10]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등은 이승만정권의 폭압적이고 파행적인 정국운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독재와 부정부패를 자행 · 은폐했고, “원조물자 배분과 금융특혜 등을 이용해 정경유착 구조를 형성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미국의 냉전전략상 대소 전진기지인 한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 정치적 修辭였다. 한편 1950년대는 원조경제의 시대라고 불렸을 만큼 미국의 對韓경제원조정책이 한국경제를 좌우했고, 동시에 한국경제의 물적 토대가 조성된 시기였다. 이대근은 당시 한국경제를 두고 “30억 달러 이상에 달하는 미국원조 도입을 통해 전후 자본주의세계경제체제로 신속하게 편입됐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950년대 한국경제는 결코 停滯的이지 않았고, 자본형성과 기술축적이 상당히 이루어졌으며, “5%대의 성장 실적을 거양했고, 당대보다는 차세대 공업화를 위한 기반구축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각주:11]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인구이동이 대규모로 관찰됐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농지개혁의 실패 및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美公法 480(PL 480)를 통한 잉여농산물의 대거 수입은 농촌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농현상이 가중됐고, 휴전 이후 피난민들의 귀환은 도시인구를 급증시켰다. 자연스레 도시빈민이 양산됐으며, 가족공동체 규범의 변화와 함께 도시민들의 불만도 증가했다. 한편 당시 학교교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취업난과 상승의 욕구, 징집회피의 수단, 미국 유학의 가능성 증가 등 여러 요인이 결합하여 대학생이 급증했는데, 1960년대 대학생과 대학출신자의 수는 거의 38만여 명에 이르렀다.[각주:12] 이들은 장차 사회적 불만을 체현하여 4.19 발발의 주체가 될 터였다.

1960228,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정권에 맞서 시위를 감행했다. 그들은 대구지역 8개 국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녀 학생들이었고, 자신들을 민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자유당에 맞서 한나절 동안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어 3.15 부정선거에 따른 마산 의거(또는 봉기)”와 다음 달인 411일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대학생과 교수, 시민들이 참여하여 시위의 주체도 대폭 확대됐다. 시위는 지역과 주체에 따라 지속적 또는 간헐적으로 진행되었으나, 418일 고려대생이 시위 후에 습격당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정권 규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서울 시내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민들의 무력시위가 개시됐고, 419일 정부의 발포로 피의 화요일이 시작됐다. 이어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공직 사퇴, 계엄사령부의 선무노력 등 미봉적인 수습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미국은 체제변혁이 개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개입하여 이승만을 압박했고, 425일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더해져 결국 426일 오전 1030분 이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했다.[각주:13]

한편 1950년대 후반 미국은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공산권과의 체제경쟁에 맞서동북아시아지역에서 한 · · 일을 잇는 지역통합전략을 현실화하려고 했다.[각주:14] 미국은 이승만의 감정적 반일을 차츰 장애로 느끼기 시작했고, 3.15 부정선거 이후 일어난 민중항쟁이 더욱 불거지기 전에 개입했다.[각주:15] 이승만 하야 뒤 기득권층이 권력을 재편했고, 허정 과도정부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 후 729일 총선을 실시했다. 민주당 정권은 반공주의라는 기왕의 정책적 틀을 유지한 채, “경제제일주의로 표현되는 근대화론을 집권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다른 한편에선 시민사회단체와 혁신계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겨냥하는 세력들이 대두했다.

그러나 1961516일 쿠데타가 벌어졌다. 군부는 반공을 국시로 함과 동시에, 민생고를 해결하고 통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의 국가기획이 선통일후건설이었던데 반해, 박정희는 선건설후통일을 주창했고, “4.19와 동일한 사회상황의 소산인 원조경제의 停滯 속에서 경제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확산시켰다. 군사정권은 4.19를 계승한다고 자임했고, 4.19 당시 제기된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요구에 나름대로 응답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반공 · 권위주의적이자 동시에 강력한 발전주의적성격을 보였다. 케네디 정권은 3세계 각국의 경제발전을 통해 양극적 체제경쟁에 돌입했고, 한국은 이러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 하에서 일본과 책임을 분담했다. 결국 5.16이후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산업화 경쟁에 탈정치화된 대중의 에너지를 총동원했다.[각주:16]

결국 4.191960년대부터 진행될 한국의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부표의 역할을 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계급성과 계급의식은 모호했으나 시민들이 참여하여 반민주적이고 경제발전에 별 관심이 없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한편 4.19를 통해 한국인은 국가지도자를 끌어내리는 찬란한 역사적 성과를 거뒀으나, 한국사회의 지배층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이어 민주당의 머뭇거림과 그 틈을 타 무력으로 헌법을 뒤집은 반혁명적 사건5.16을 통해 4.19의 염원은 당분간 짙은 어둠 속에 갇히게 됐다. 이제 한국은 국가주도하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기형적으로 확립될 위로부터의 혁명이 개시될 터였다.

 

5. 결론: 서구의 이론으로 본 4.19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서구의 최신이론을 정리한 후, 기왕의 4.19 연구 현황을 개괄했으며, 마지막으로 역사적 맥락 안에 4.19를 위치시켜 파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선배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첫째, 자료의 부족과, 둘째, 선행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정치한 분석보다는 소묘에 가까운 서술에 그치고 말았다. 더하여 닐 데이비슨의 결과주의적인 부르주아혁명론을 4.19에 적용하려고 했으나, 한편으로 5.16사건으로서의 한국식 부르주아혁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첫째, 1960년대라는 시대[각주:17]와 당시의 한국경제를 쿠데타 세력이 재단했고, 둘째, 쿠데타 세력의 미봉책으로 인해 1950년대의 재벌들은 족쇄를 하나하나 벗어던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각주:18]

그러나 4.19滔滔히 흐르는 자본주의의 과정속에서 본다면, 비록 정치혁명에 그쳤으나 실로 혁명적인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6·25전쟁과 온갖 부정부패로 점철된 11년여의 이승만 반공독재를 피지배층, 그 중에서도 청년층이 솔선하여 붕괴시킨 점은 그 의미를 결코 낮추어 평가할 수 없다. 4.19 이후 한국인의 경제적 기본권이 강력하게 요구됐고,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지는사태가 벌어졌다.[각주:19] 허정 과도정부와 2공화국은 한국인의 그러한 요구를 수용할 역량이 부족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4.19 이후 한국식 자본주의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기형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오유석에 따르면 4.19정치 · 경제 · 사회 모든 측면에서 낡은 체재를 개혁하려던 항쟁이었으나, 그것은 학생에 의한 대리혁명이었고, 5.16에 의해 좌절됐다.[각주:20] 그러나 이 같은 역사서술은 근시안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야 비로소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유석의 평가는 4.19로 추동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립(요구)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특정한 역사적 목적을 설정했을 때 가능한 평가이다. 필자는 닐 데이비슨의 결과주의적 부르주아혁명론을 빌려, “순간과정양자를 염두에 두고 현대한국사의 혁명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4.19는 고유의 한계가 뚜렷했으나, 이후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확립되고, 자본주의적 운동법칙이 사회적 심급으로 작용하며, 임노동에 기반을 둔 경쟁적 축적을 강요하는 국가가 대두하게 된 장대한 서사시의 서막이었다.

 

 

 

참고문헌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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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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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19’는 여태껏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왔다. 대표적으로 “4.19,” “4.19혁명,” “4.19의거,” “4.19(민주 또는 민중)항쟁,” “4.19사태,” “미완의 혁명” 등이 있다. 4.19의 正名에 관해서는 아직 합의된 바가 없는데, 이는 해당 사건을 바라보는 논자의 학문적 · 정치적 입장 및 시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과 윤치영, 현대의 수구 논객 지만원 등은 4.19를 “사태”로 파악한 반면, 역사학자 서중석은 “혁명”으로 파악했다. 한편 필자는 4.19의 기본적 성격을 정치혁명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또한 부르주아혁명으로 볼 여지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 우선 민중이 지배층을 끌어내렸고(순간), 이후 일련의 사태 전개를 거쳐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우세하게 바뀌는 이행기(과정)의 시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4.19 자체는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심원한 변화를 초래한 “사회혁명”은 아니었고, 지배세력 내에 재편이 이루어졌다가 얼마 후 반동적 군사쿠데타에 직면한 “정치혁명”이었다. 물론 2공화국 때 한국의 시민사회가 보여준 혁신적이고 민족적인 행동과 요구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필자는 4.19를 “4.19혁명”이라기보다는 “4.19”라고 표현하는 편이 간명하다고 생각하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최갑수, 「역사 속의 혁명」, 6차 맑스 꼬뮤날레 3번 발제문, 2013, 179쪽. [본문으로]
  3. 홍석률, 「4월혁명 직후 정군(整軍)운동과 5.16 쿠데타」, 『한국사연구』 권158, 2012, 200쪽. [본문으로]
  4. “부르주아혁명”에 관한 역사, 즉 “혁명의 역사학”도 흥미롭다. 최갑수에 따르면 부르주아혁명관은 원래 운동권에서 제기한 것으로, 그것은 사회혁명론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특히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유럽사회의 자기전망이 변하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학계의 주도적인 해석으로 자리 잡고 적어도 1960년대 말까지 혁명의 ‘고전’해석의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프랑스 학계의 경우 프랑스혁명을 기본적으로 부르주아혁명으로 파악하면서도, 농민과 귀족의 반혁명 노력 등 혁명의 여러 부차적 양상을 밝혀내 풍성한 혁명사를 서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자유주의사가들이 만들어 낸 이 개념은 이후 마르크스가 차용했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분석적 개념으로 만들어냈다. 이제 부르주아혁명이란 개별 혁명을 논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사건들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68년에 벌어진 세계적 규모의 변화와 함께, 1990년대 초반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부르주아혁명론은 힘을 잃게 됐다. 더 이상 부르주아혁명론으로 개별 혁명들을 설명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최갑수, 앞의 논문, 187~188쪽 참고. [본문으로]
  5. 여기서 말하는 다섯 가지 부르주아혁명 시대의 전제조건은 ①봉건제의 위기, ②(생산력 발전을 위한)자본주의적 대안의 가능성, ③(자본주의 발달에 간여하는)前자본주의적 국가의 구조적 능력, ④혁명적 주체, ⑤혁명적 이데올로기이다. [본문으로]
  6. 저자는 자본주의국가가 수행해야만 하는 중요한 특정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①이중(수평적, 수직적)의 사회질서를 부과하는 것, ②‘생산의 일반적 조건’을 확립하는 것, ③각각의 자본주의국가가 ‘내부적’ 자본가 계급의 집단적 이해를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것. 이 중 ①은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해주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아야 하는 수평적 사회질서와, 노사관계가 항상 자본에게 유리한 쪽으로 귀결돼야 하는 수직적 사회질서를 포함한다. 다음으로 ②는 경쟁적 축적이 잘 일어날 수 있도록 하부구조(Infrastructure)를 창출해야함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③은 정책들이 자본가나 지배층 한 분파의 이익 속에 갇혀있지 않고, 세계시장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7. 홍석률 · 정창현, 「4월민중항쟁 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0, 13~46쪽 참고. [본문으로]
  8. 이재봉, 「4월혁명, 제2공화국, 그리고 한미관계」,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나남출판, 1996, 71~110쪽 참고. [본문으로]
  9. 한승주,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종로서적, 1983 참고. [본문으로]
  10. 이현진, 「전후 한국사회와 4 · 19」,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下』, 지식산업사, 2011, 421쪽. [본문으로]
  11. 이대근, 『解放後-1950年代의 經濟』, 삼성경제연구소, 2002, 517~518쪽. [본문으로]
  12. 이현진, 앞의 책, 429쪽. [본문으로]
  13. 정근식 외 편,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2010, 23~79쪽, 181~220쪽 참고. [본문으로]
  14. 허버트 P. 빅스, 「지역 통합 전략」, 『1960年代』, 거름, 1983, 208~250쪽 참고. [본문으로]
  15. 미국 국무부 전후 대외정책 자문위원회, 정치소위원회 50차 회의록(1943.04.03.).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6. 정용욱 외,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15~20쪽 참고. [본문으로]
  17. 박준식에 따르면 1960년대는 “근대적 의미의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대부분의 후진국이 노동시장 형성의 초기단계에는 엄청난 과잉인구의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더하여 당시 사회복지나 사회부조 같은 서구식 복지개념은 기대하기 힘들었고, 가족구성원 일부의 희생에 의존하여 가정경제가 작동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박준식, 「1960년대의 사회환경과 사회복지정책」, 『1960년대의 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1999, 160, 194~198쪽 참고. [본문으로]
  18. 공제욱, 「부정축재자 처리와 재벌」, 위의 책, 201~204, 252~255쪽 참고. [본문으로]
  1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237쪽, 김광희, 『박정희와 개발독재』, 선인, 2008, 37쪽 각주 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0. 오유석, 「서울에서의 4월혁명」, 앞의 책, 2010, 21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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