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6. 6. 26. 19:40

일시: 2016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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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말년에 가서 “Was will das Weib?”(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라는 수수께끼 앞에서 느낀 혼란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브렉시트 투표와 관련하여 유사한 당혹감이 들었다.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

 

더 큰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브렉시트 투표의 본질적 이해관계는 명확해진다. 서유럽과 동유럽에서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의 장기적인 재배치에 관한 조짐들이 보였다. 최근까지 정치적 공간은 전체 유권자를 좌지우지하는 중도우파 정당(기독교민주주의자, 자유보수주의자, 포퓰리스트)과 중도좌파 정당(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이라는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지배했고, 군소 정당들(환경주의자, ()파시스트)이 그 밖의 미미한 유권자층을 대변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른바 지구적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두드러진 정당이 대두했으며, 이들은 대개 낙태, 동성애권, 종교 및 인종적 소수자 등의 현안에 관해 상대적으로 관용적이다. 또한 이러한 정당의 대척에는 강력한 반()이민 정서를 지닌 포퓰리스트적 정당이 있고, 이들의 주변부에는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신파시스트 단체들이 위치해있다.

 

폴란드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 공산주의자들이 퇴장한 이후 주요 정당으로는 총리를 지낸 바 있는 도날트 투스크(현재 유럽이사회 의장)-이념적중도자유주의 정당과 카친스키 형제(일란성 쌍둥이로, 한 명은 2005~10년 대통령을, 다른 한 명은 2006~07년 총리를 역임하였다)의 보수적 기독교당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급진중도(Radical Center)의 성패는 다음과 같다.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이 두 정당 가운데 누가 다른 당을 여전히 오래된 이념의 망령에 사로잡혀있다고 일축하고, 탈이념 시대의 비정치(non-politics)의 구현자로 현상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1990년대 초만 해도 이러한 작업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식은 죽 먹기였으나, 이후 자유주의적 좌파들이 우세를 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보수주의자들이 강세이다.


반이민 포퓰리즘은 정치에 다시 열정을 불러왔고, 적대라는 관점에서 우리와 타자를 나눠 호명한다. 좌파에게 무엇이 남았는가에 관한 혼란의 신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파로부터 이러한 열정적 접근을 취해야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지도자 마린 르펜이 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이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하여 좌파는 강력한 국민국가(nation-states)를 지지하는 것으로 선회하며 국민적 열정을 동원할 것이다. 이는 우스꽝스러운 투쟁이며, 앞서 패배한 싸움이다.

 

유럽은 관성으로부터 유럽을 끌어낼 능력이 없는 브뤼셀의 기술관료집단과 이러한 관성에 대한 민중적 분노, 즉 더욱 급진적인 새로운 좌파운동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우익 포퓰리즘에 의해 삼켜지는 분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악순환에 갇혀있다. 브렉시트 투표는 이러한 새로운 적대의 계선을 따라 움직였고, 이는 무언가 끔찍한 잘못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브렉시트 진영에 가담한 이상한 동반자들을 한 번 살펴보자. 이들은 극심한 노동계급적 분노로 버무려진 우익 애국주의자와 이민자 공포에 의해 촉발된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애국주의적 인종주의와 보통 사람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혼합은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자라기에 이상적인 토양이지 않겠는가?

 

투표를 향한 감정적 투사의 강도(强度)가 우리를 기만해서는 아니 되지만, 주어진 선택지는 진정한 질문들, 예컨대 민중주권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자 새로운 빈곤과 이주를 낳을 생태적 재앙 및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통제를 불가능하게 할 범대서양 무역투자 동반자 협정(TTIP)와 같은 무역 협정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와 같은 진정한 싸움에 대해 브렉시트는 심대한 차질을 의미한다. 브렉시트를 구성하는 중요한 주장 중 하나가 난민 위협임을 명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브렉시트 투표는 이념(지나간 마르크스주의적 감성으로 말하자면 허위의식”)이 여전히 우리사회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이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우파와 좌파 중에서 어느 쪽의 정치적 변형이 더 나쁜지에 관해 질문을 받자마자 날카롭게 대꾸하였다. “둘 다 최악이오!” 바로 이것이 영국의 유권자들이 맞닥뜨렸던 선택이지 않았을까? 잔류는 유럽을 수렁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관성의 지속을 의미하기에 최악이었다. 그리고 탈퇴는 전혀 바람직해보이지 않는 변화를 의미하기에 최악이었다.

 

투표가 열리기 바로 며칠 전, 우리 매체는 다음과 같이 심오한 척 하는 생각을 유통시켰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유럽연합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고,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가 사실이다. 유럽의 관성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유럽은 실현 불가능한 대규모의 정치적 기획을 계속해서 만들려는 유럽연합 국가들 간의 길고긴 협상들 속에서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잔류파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 잔류파는 충격 속에서 탈퇴파의 비합리에 관해 불평하며, 투표를 통해 명백해진 변화에 대한 간절한 필요를 무시한다.

 

브렉시트 투표의 기저를 이루는 혼란은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들에서 민주적 합의 제조하기가 처한 위기, 그리고 정치기구들과 민중적 분노-그 분노는 미국에서 트럼프와 샌더스를 낳았다-사이에서 점증하는 괴리라는 훨씬 더 커다란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혼돈의 징후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미국 의회에서 벌어진 총기 통제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민주당원들의 연좌농성으로 이어졌다. 지금이야말로 체념할 때인가?

 

마오쩌둥의 오래된 경구를 떠올려보자: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일대 혼란이다. 상황은 더할 나위 없다.” 위기는 진중하고 냉철하게 취급되어야 하지만, 또한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도 다뤄져야 한다. 위기는 고통스럽고 위험하지만, 전투를 벌이고 승리를 거둬야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하늘에는 싸움이 없고, 또한 나뉘어져있지도 않은가? 다시 말해, 현재의 혼란이 급진적인 변화의 필요에 대하여 더욱 적절하게 반응할 유일한 기회를, 유럽연합 기술관료집단과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악순환을 깰 기획을 제공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사는 하늘에서 진정한 분리는 빈혈에 시달리는 기술관료집단과 민족주의적 열정 사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악순환과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도전에 해결책을 제시할 새로운 범유럽적 기획 사이에 놓여있다.

 

브렉시트 승리의 메아리 속에서 유럽연합으로부터의 또 다른 탈퇴 요구는 전 유럽에 걸쳐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현 상황이야말로 그러한 기획을 요청한다. 누가 기회를 붙잡을 것인가? 안타깝게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결국 기회를 놓치는 기존의 좌파는 아니다.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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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9. 1. 16:35

* 2014년 5월 12일 작성.

 

필자: Slavoj Žižek

일시: 201448

출처: http://inthesetimes.com/article/16526/what_europe_can_learn_from_ukraine

사진: 201311, 키예프(Kiev)에서 일어난 시위는 결국 대통령(Prime Minister)을 축출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어떻게 서유럽과 합칠지에 관한 결정에 직면하고 있다.

 

제목: 유럽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What Europe Can Learn From Ukraine.)

부제: 유럽 좌파들은 우크라이나 시위대를 가르치려드는데 너무 조급하다. (European Leftists are too quick to patronize Ukrainian Protesters.)

 

 5월 말로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가 가까워오는 지금,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최근의 사건들을 기억해야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으로의 통합보다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우선순위로 두어 시위를 촉발시켰고, 그것은 2월 말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Prime Minister)과 그의 졸개들을 무너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좌파들은 가련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려드는 방식으로 대규모 시위 소식에 반응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지속적으로 유럽을 이상화(理想化)하고, 바로 그 유럽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로 얼마나 착각에 빠져 있는가! 그들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우크라이나를 서유럽의 경제식민지로, 오늘날의 그리스와 같은 처지로 만들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좌파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럽연합의 실상에 관해 전혀 무지하지 않다는 사실은 도외시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유럽연합이 노정하는 갖가지 문제와 격차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전하고자 하는바는 간단히 말해, 그들이 처한 상황은 더욱 엉망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문제(경제적 불안전과 가차 없는 실업)는 여전히 부유한 자들의 문제이다. 그리스가 처한 끔찍한 곤궁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난민들은 여전히 대규모로 그곳을 찾고 있으며, 우파 애국자들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우크라이나 시위대들이 언급하는 유럽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다. 유럽은 어떤 단일한 전망(展望)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는 내셔널리스트(nationalist)적이고 심지어 파시스트(Fascist)적인 요소부터 오늘날 유럽의 기관들이 그것을 더욱더 배반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지구적인 정치적 상상에 유일무이하게 기여한 사상이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평등자유(égaliberté), 즉 평등 속의 자유(freedom-in-equality, *진태원에 따르면, 발리바르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이론적 핵심을 이루는 두 축을 인간=시민명제와 평등=자유명제라고 제시한다.)라고 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 범위에 걸쳐있다. 이러한 두 극() 사이에서 오직 순진무구한 자들만이 자유민주주의적(liberal-democratic) 자본주의에 그들의 믿음을 건다. 그러므로 우크라이나의 시위에서 유럽이 봐야할 것은 그 자신의 최선과 최악이다.

 

 우크라이나 우파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새로워진 반()이민, ()종교적 포퓰리즘(populism)의 일부로, 그들은 스스로를 유럽의 방위라고 표현한다. 한 세기 전, 체스터턴(Gilbert K. Chesterton, 1874~1936)은 이 새로운 우파의 위험을 분명히 감지했고, 그가 쓴 정통(Orthodoxy)에서 종교 비판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근본적 교착상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자유와 인간성을 구하기 위해 교회와 싸우기 시작한 사람은 교회와 싸우기만 하다가 결국 자유와 인간성을 내팽개치게 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 옹호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가? 많은 광신적인 종교 수호자들이 현대의 세속적인 문화를 맹렬히 공격하면서도 결국 어떤 유의미한 종교적 경험도 저버리지 않는가? 또한 이는 이민이라는 위협에 맞서 유럽의 수호자들이 최근에 대두하는 것에도 적용되지 않는가? 유럽의 기독교적 유산을 보호하겠다는 그들의 열망 속에서, 새로운 광신자들은 그 유산의 참된 핵심을 저버릴 준비가 돼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주류 자유주의자들은 인종적 또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들을 위협할 때에 우리는 문화적 관용이라는 자유민주주의적 안건을 배경으로 모두 뭉쳐야 하고, 구할 수 있는 것은 구해야 하며 더욱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의 꿈은 제쳐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한편 우크라이나 시위대가 그토록 맹렬히 옹호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유러피언 드림은 어떠한가? 어느 누구도 유럽연합 안의 무엇이 우크라이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그 정책묶음에 긴축 수단이 포함될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지난 세기 소련에서 나온 잘 알려진 이야기이자 다른 나라로 이주하길 원하는 유대인인 라비노비치(Rabinovitch)에 관한 농담을 알고 있다. 소련 이주국(移住局)의 관료가 왜냐고 물었고, 라비노비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이 두려운데, 소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잃을 것이고, 새로 등장한 권력은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짓의 죄과를 모두 우리 유대인들에게 떠넘길 것이며, 다시 반()유대 계획(program)이 나타나날 것이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료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말은 순전한 헛소리야.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고, 공산주의자들의 권력은 영원할 것이다!” 라비노비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 바로 그게 둘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위와 비슷한 대화를 비판적인 우크라이나인과 유럽연합의 재정관 사이에서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이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당황해하는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이 두려운데, 유럽연합이 러시아의 압박에 우리를 간단히 넘겨줄 것이고, 우리의 경제가 붕괴되도록 놔둘 것이며유럽연합 재정관이 그를 가로 막는다. “하지만 당신네는 우리를 믿을 수 있어. 우리는 당신네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당신네들을 단단히 통제하고, 무엇을 할지 조언할 거야!” 그 우크라이나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 그게 바로 둘째 이유입니다.”

 

 그렇다. 키예프의 독립광장(Independence Square)에서 싸웠던 마이단 시위대들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싸움, 즉 새로운 우크라이나가 어떤 모습이 될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은 이제야 시작됐다. 그리고 이 싸움은 푸틴의 간섭에 대항하는 싸움보다 훨씬 더 고될 것이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값하고,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족한지의 여부가 아니라, 오늘날의 유럽이 우크라이나인들의 심원한 열망에 값하는지의 여부이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과두집단이 뒤에서 조종하는 형태로, 인종적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뒤섞인 비빔밥처럼 된다면, 우크라이나는 오늘날의 러시아(또는 헝가리)만큼 유럽적이게 될 것이다. 정치적 논평가들은 유럽연합이 러시아와 갈등하는 우크라이나를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점령과 합병에 대해서도 건성으로 대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다른 종류의 지원이 심지어 엄청날 정도로 빠져있다.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사회경제적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실현가능한 전략을 제공받은 적이 결코 없다. 그러한 지원을 하기위해서라도, 유럽은 우선 자신을 변모해야 하고, 스스로의 유산이 담고 있는 해방적 핵심에 다시금 헌신해야 한다.

 

 걸출한 보수주의자 엘리엇(Thomas S. Eliot, 1888~1965)은 그가 쓴 문화의 정의에 관한 단상(Notes Towards a Definition of Culture)에서 유일한 선택이 종파주의(宗派主義)와 믿지 않음(non-belief) 사이에서 내려야 하는 선택이 되고, 종교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원래의 송장으로부터 종파적 분리를 수행하는 것이 되는 계기들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유일한 기회이다. ()유럽의 썩어가는 송장으로부터 종파적 분리를 수행하는 방식만이 우리가 평등자유라는 유럽적 유산을 살아있게 할 수 있다. 그러한 분리는 우리가 우리의 숙명이자 협상할 수 없는 곤경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바로 그 전제, 다시 말해 주로 지구적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로 명명되는 현상과 근대화"를 통해 우리를 그 질서에 순응시켜야 할 필요성 양자를 문제적으로 만든다. 직설적으로 말해, 대두하는 신세계질서가 우리 모두에게 협상할 수 없는 숙명일 때 유럽은 패배한다. 따라서 유럽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의 숙명이라는 주문을 깨트리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그렇게 나온 새로운 유럽 안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유럽으로부터 배워야 할 사람은 우크라이나인이 아니고 유럽 자신이다. 유럽은 반드시 마이단 시위대에 동기를 부여한 그 꿈을 포함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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