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USSR2017. 9. 25. 01:43

Introduction: the Great Purges as history


Each says something about the nature of the world, and, though individually he adds little or nothing to our understanding of it, still from the combination of all something considerable is accomplished. - Aristotle

There are a number of speculations as to why Stalin carried out this bloody operation. Fainsod; Isaac Deutscher; Brzezinski etc. ... Both versions assume that the party (and police) bureaucracies were efficient and obedient ... In its investigation of the structure of the Bolshevik Party in the thirties, this study questions the applicability of the totalitarian model (2-3)

Rethinking Stalinism: A weak tradition of source criticism and a developing historiography on related problems both suggest the need to reevaluate the thirties. ... Personal accounts are valuable sources and provide vivid descriptions of the experiences and psychological impact of events of the persons who wrote them ... Yet historians have been justifiably skeptical of memoirs and autobiographies. ... The inaccessibility of archival sources on the Great Purges has led to a 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 and to something less than rigorous methodology. (4-5)

This study examines the structure, organization, composition, and evolution of the Soviet Communist Party from 1933 to 1939. ... [T]he focus is the relationship between central and peripheral party organizations. ... The findings suggest that the party in the 1930s was inefficient, fragmented, and split several ways by internal factional conflict. ... Indeed, all the political events of the thirties were not parts of the same phenomenon, and it is a basic assumption of the study that an analysis of the party's structure can help avoid such reductionist fallacies. ... Although he was certainly the most authoritative political actor of the period, speculations on his mental state, private attitudes, and prejudices are baseless, given the lack of primary evidence on these matters. ... Accordingly, the work is not an exhaustive history of the Great Purges, for only access to Soviet political archives will allow historians to write definitive works on the event. (6-7)

Primary sources: 1) archival material from the Smolensk Archive, a collection of Communist Party records from the Western Region (oblast') from before the 1917 Revolution to about 1939. ... 2) printed documents, published speeches, decisions, resolutions, and so forth. ... A careful reading of party decisions alone has shown interesting conflicts and even divergent points of view within the Stalinist leadership at the time of the Great Purges. ... [A]lthough Soviet documents are often devilishly selective and full of omissions, they are important indicators of what the leaders believed to be problems and of what they wanted done - considerations of no little importance in such a mystery story. (7-8)

Nothing in the following pages is meant to minimize, justify, or excuse the terror, notwithstanding the terminology and rhetoric that close reliance on contemporaneous texts forces one to use. Certainly, any attempt to excuse such violence would be pointless and morally bizarre. ... Although the moral questions seem clear, the historical ones do not. If it were enough to fix guilt or blame, there would be no reason for any historical research. To ever understand why something happened, it is first of all necessary to know what happened.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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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7. 8. 11. 06:36

116~127쪽.


공산당의 주도로 그리고 그 지도하에 공산주의의 자기-철폐는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한 사건이고, 이는 전쟁, 예컨대 냉전에서의 패배나 또는 공산주의에 복속된 인민들이 자유를 위해 싸운 결과로 아직까지도 일관되게 인식되기 때문에 종종 하찮은 것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 같은 매우 친숙한 설명은 하나도 정확하지 않다. 냉전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은유였고, 따라서 이는 오직 은유적으로만 패배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소련은 난공불락이었다. 그리고 자유를 외치던 그 모든 단체들은 자본주의로의 이행 이전에 모두 수그러들었다. 러시아의 반체제 운동은 198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모두 끝난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폴란드의 연대(Solidarność)운동 또한 폴란드 계엄군에 의해 즉각적으로 종결되었다. 북경에서의 소요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고 질서가 회복되었다. 정확히 바로 이러한 모든 내부적 반대의 총체적 패배와 어떤 가능한 외부적 간섭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웠던 점이 소비에트 및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착수하게 이끌었다. 만일 지도부가 절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더라면, 그렇듯 거대한 정도의 재건과 가속을 실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재건의 과정에서 소련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패배라는 인식에 기여하곤 하였다. 외부에서는 소련을 러시아 제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소련의 해체는 결과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여타 국가의 노력을 방해하는 러시아의 패배로 종종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러시아가 소련을 해체했다는 사실, 즉 옐친 행정부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및 벨로러시아와의 조약에 따라 소련에서 탈퇴한 사실은 망각된다. 따라서 다른 소비에트공화국들에 독립이 부과되었다. 이는 위에서부터, 그리고 중앙에서부터, 가만히 수동적으로 당하지 않고,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업을 부여 받았다는 신념 속에서 성장한 지도부의 주도하에 야기된 전환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자본주의가 경제적 가속을 위한 최선의 기제라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빈번하게 강조했고, ‘공상적 공산주의에 맞선 주장으로 활용했다.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 사회주의적 질서라는 틀 안에서 그리고 공산당의 통제 하에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도구화하고, 이를 일하게끔 만들겠다는 제안은 10월 혁명 이래 주요한 안건이었다. 이는 무척 많이 논의되었고, 때때로 그리고 아주 일관성 없게 실행에 옮겨진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공산주의지도부가 충분히 안정적이라고 느끼지 않았고, 이러한 실험이 행여 권력의 상실로 이어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결코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1980년대와 90년대, 지도부는 충분히 강하다고 느꼈고, 실험에 따른 위험을 감내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이 실패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여전히 확고하게 권력을 쥐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중앙의 통제가 약화되기보다는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 시험대에 오를 것이고, 완전히 성공했음을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상 스탈린이 소련 해체의 조건과 법리적 절차 양자를 고안하고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만하다. 이른바 1936년도 스탈린 헌법17조는 다음과 같다. “각각의 연맹공화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에서 자유롭게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한다.” 이 정식은 아무런 변경 없이 1977년도 소련 최후의 헌법에 72조로 채택되었다. 이 조항의 중요성은 미국 역사상 유일한 내전이 독립된 주들이 연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느냐 여부에서 발생된 것임을 기억할 때 무척 분명해진다. 대조적으로 개별 공화국들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탈퇴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다. 이는 스탈린이 애초부터 소련을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독립국들의 느슨한 연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헌법이 소련의 잠재적 해체를 사전에 기획하는 것이라는 반대는 당시 국제법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문제적인 조항을 수정하지 않고 유지하려는 스탈린의 결심은 굳건했다. 그 이유는 오직, 스탈린이 소련을 변증법적으로, 즉 국가인 동시에 비()국가로 규정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스탈린 헌법이 이러한 정의를 연맹 초기의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유지는 일국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을 논한 스탈린 태제를 향한 비판, 특히 가장 유명한 것으로 트로츠키의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들어설 이 나라는 국가들의 연합이자 나라들의 무리, 즉 독자적이고 단일하며 고립된 국가라기보다는 자본주의국가들의 공동체에 대항하는 사회주의국가들의 공동체에 더욱 가깝게 표상되었다. 소련에서 이러한 국가들의 공동체 개념은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일관되게 수행되었다. 각 공화국은 고유한 정부와 의회, 행정기관과 언어를 가졌다. 한 공화국에서 다른 공화국으로 당과 국가 공무원들의 공식 방문이 있었다. 작가들의 대회가 조직되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문화축제나 전문가의 교환 등이 이뤄졌다. 국가 내부의 생활은 마치 국제무대에서처럼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모든 소비에트 공민의 여권에 나와 있는 민족’(nationality)이라는 범주가 맡았다. 이 범주의 기능은, 민족을 한 국가의 시민권으로 이해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단지 수수께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의 모든 공민들에게, 그리고 확실히 그들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때 민족은 한 성원의 종족적 기원을 의미했다. 개인은 그의 부모가 서로 다른 민족일 때만 자신의 민족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부모의 민족은 자녀에게 전해졌다. 모든 실질적인 사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직 시, 개인은 민족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종종 부모의 민족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았다. 소비에트 국제주의는 종족적 차이를 극복하고 지워버리는 일면적인 보편주의를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사회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국가들의 공동체인 소련의 건설과정에서 공민 그 누구도 그들의 출신에 대해 망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변증법적 이성을 체현한 공산당만이 어디서 민족이 끝나고 국제주의가 시작되는지, 또는 어디서 국제주의가 끝나고 민족이 시작되는지 결정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조직된 사유화 과정 또한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이었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의 완전한 철폐를 우선 사회주의, 이어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보았다. 오직 모든 사적소유에 대한 총체적 국가-사회화만이, 공산당이 사회에 대해 완전히 새롭고 비할 데 없는 형성적 권력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사회적 가소성(可塑性)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사적소유의 철폐는 과거, 그리고 심지어는 역사와의 급격한 단절을 수반했는데, 이는 역사가 대개 사적소유관계의 역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철폐는 자연, 즉 인간 본성(human nature) 등등의 자연에 앞서 술(, art)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만일 사적소유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 인간의 자연권이 철폐된다면, 그들의 혈통에 대한 자연적인끈이, 그것들의 유산 및 내재적인문화적 전통 또한 분리될 것이고 그때 인류는 스스로를 새롭게 완벽한 자유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인간만이 모든 사회적 실험에 자유롭게 뛰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사적소유의 철폐는 자연적인 것에서 인공적인 것으로, 필요의 세계에서 (정치적으로 형성적인) 자유의 세계로, 전통적인 국가에서 총체적인 예술품으로의 이행을 표상한다.

이러한 기초 위에 사적소유의 재도입은 적어도 처음에는 공산주의 실험을 종결시키기 위한 동등하게 결정적인 전제 조건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적으로 통치하는 국가의 소멸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표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부들, 정치체제들, 권력관계들이 종종 사적소유에 대한 권리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변해왔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알고 있다. 이러한 예들에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삶은 심지어 정치적 삶이 급진적인 변화를 겪더라도 사적[소유] 법에 의거해 구조화된 채 남아있다. 대조적으로, 소련의 해체 이후에는 운동 중인 어떠한 사회계약도 더 이상 없었다. 거대한 영토가 버려졌고,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처럼 무법천지의 황무지들은 새롭게 구조화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그러한 땅들은 사적 전용을 위해, 그리고 실상 국가 지도부 스스로가 명령하는 규칙들에 의거해 구획되어야 했고, 분배되어야 했으며, 풀려야 했다. 이 경로를 따라 재화의 국가-사회화 이전에, 상속 철폐 이전에, 사적 재산의 기원과의 단절 이전에 존재했던 조건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가능성은 전무했다.

사유화는 이전의 사회화만큼이나 인공적인 정치적 구성물이었음을 궁극적으로 증명했다.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한때 사회화된 국가는 이제 자본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사유화되었다. 양자의 경우에서 모두 사적소유는 국가적 이유(raison d'état)에 종속되었고, 따라서 명백히 인공물, 철저히 계획된 경륜(經綸)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사적소유의 ()도입으로서의 사유화는 자연으로, 자연 상속과 자연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탈공산주의 국가는 공산주의적 선구자처럼 구성물이고, 단지 행정 권력인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탈공산주의적 상황은 자본주의의 인위성을 밝힌다는 사실에서 특징적인데, 이는 자본주의의 대두를 경제발전의 자연스러운과정으로서가 아닌 사회적 재구조화를 위한 순전한 정치적 기획으로 표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동구 국가들에서, 그리고 현저하게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건설은 경제적 또는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결과도 아니고, 피할 수 없으며 유기적인역사적 이행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공산주의 건설에서 자본주의 건설로 바꾸도록 정치적 결정이 취해졌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리고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완벽히 의거하여) 건설의 대들보 역할을 맡도록 사적소유의 주인 계급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사체, 즉 사회주의사회의 시체에 대한 폭력적인 훼손과 사적 전용을 포함했는데, 이는 민족 또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신성시되는 동물의 사체를 공동으로 섭취하는 과거의 신성한 연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연회는 한편에서 각각이 사체의 사적인 조각을 조금씩 받는다는 점에서 신성시되는 동물의 사유화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정확이 이러한 사유화를 통해 부족의 초()개인 및 초사유(私有) 공동체의 기초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시체에 대한 유물론적 변증법은 자신의 오래도록 지속되는 효과를 증명한다.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진정한 뻔뻔함은 바로 반()유토피아주의, 즉 소련에 기본적으로 이미 유토피아가 현실화되었다는 단언에 있다. 사회주의진영이 들어선 진정으로 실재하는 장소는 유토피아의 비장소(non-place)라고 공언되었다. 이러한 단언이 반사실적(反事實的)이고, 국가가 공식 전원시(田園詩)를 조작하고, 개인적인 생존이나 억압 및 조작에 저항하는 투쟁 또는 영구혁명을 위한 투쟁이든 간에 갈등과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나 통찰이 요구되지 않고, 당시에도 요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사실적 부정의와 단점들을 언급함으로써 이는 끝났다는 유명한 주장을 세계로부터 최종적으로 일축하는 것은 아트만(atman, 힌두교에서 개별적, 인격적 원리-역자 주)은 브라만(brahman, 힌두교에서 근본적 실재 또는 원리-역자 주)’ 또는 삼사라(samsara, 윤회-역자 주)는 니르바나같은 유명한 교리를 불식시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데, 이는 반유토피아와 유토피아, 지옥과 낙원, 영벌(永罰)과 구원의 역설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료되었다는 것은 마쳤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유롭게 반복될 수 있다.

그러한 반복이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하고 결정적으로 종결된 현상인 소비에트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언어를 통한 통치를 확립하려는, 즉 철학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추후의 시도는 개연성이 높고, 확실히 불가피하다. 언어는 돈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더욱 민주적이다. 게다가 이는 돈보다 더욱 효율적인 매개인데, 사고 팔리는 것보다 더욱 많이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적 권력관계의 언어화(linguistification; d. Versprachlichung)는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 권력, 운명, 삶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저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건네준다. 언어는 평등의 매개이다. 권력이 언어화된 상태에선, 권력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모든 화자의 평등이라는 조건하에서 권력이 작동하도록 강제된다. 만일 모든 화자에게 형식논리적으로 유효한 주장을 하라고 요구된다면, 분명히 언어의 평등은 왜곡되고 심지어 파괴된다. 그러나 철학의 과제는 정확히 그러한 형식논리적으로 유효한 언어의 억압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충족되지 않고 충족될 수 없는 사랑으로 규정되기에 일종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는 총체적으로 언어화된 욕망이며, 따라서 이것의 역설성(paradoxicality)은 투명해진다. 철학은 인간에게 자기모순 속에서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 바로 이 제도를 사회 전체로 확장하려는 바람은 전적으로 억압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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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2017. 7. 9. 06:43

 러알못이었을 2016년 1월, 귀국을 앞두고 모스크바의 헌책방 М♥СКВА에서 500루블 주고 구입한 고서를 이제야 펴봤다. 첫 구절부터 강렬하고 파고든다. 아래와 같다. 


"오늘날 사회적 삶의 핵심은 바로 계급투쟁이다. 이 투쟁의 운동에서 각 계급은 저마다의 이데올로기에 의거한다. 부르주아지는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른바 리버럴리즘이다. 프롤레타리아 또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는 사회주의다." 


С, 무정부주의 또는 사회주의?, 195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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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USSR2015. 11. 7. 06:49

​​"Some readers may think that nothing but sustained outrage is appropriate for writing about a great evildoer like Stalin. But I think the historian's job is different from that of prosecutor, or, for that matter, counsel for the defense. Your first task as a historian is try to make sense of things, and that's a different brief from prosecution or defense."


Sheila Fitzpatrick, On Stalin's tea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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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USSR2015. 4. 6. 16:24

목차

 

서문

제1장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

제2장 석방

제3장 돌아온 희생자들

제4장 '흐루쇼프파 죄수들'의 흥망

제5장 사라진 희생자들이 다시 돌아오다

맺음말 스탈린의 희생자들과 러시아의 미래

 

 "물론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공포에도 테러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했던 소비에트 시민들이 있었다. 부모의 체포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아이들을 위해 시험을 연기한 학교 교사들이 있었고, 훗날 샤트로프의 회상에 따르면 고아들에게 안식처를 마련해준 '수많은 훌륭한 사람'이 있었으며, 희생자의 낙인 찍힌 배우자를 고용한 국가 관리들, 희생자들이 사랑하는 이에게 휘갈겨 쓴 뒤 굴라크행 기차에서 던진 쪽지들을 당사자에게 발송해준 많은 소도시와 마을의 주민들, 콜리마의 한 병원에 자진해서 근무한 어느 여의사, 1938년 자신의 구호단체가 문을 닫을 때까지 수감자들을 도왔던 작가 막심 고리키의 미망인 예카테리나 페시코바, 심지어는 희생자들에게 연민을 보여준 몇몇 검찰관, NKVD 취조관, 수용소 보초도 있었다.

 그리고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체포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애쓴 저명한 문화계, 학계, 과학계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대체로 허사로 끝났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 또한 희생양이 되었다." (112쪽)

 

 "서구의 시사해설자들은 러시아 내에 친스탈린적 태도가 만연한 데에는 크렘린 정부가 스탈린의 범죄를 완전히 규탄하지 못하고(고르바초프와 옐친은 그렇게 했지만) 그 희생자들을 제대로 추모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계속해서 비난한다. 내 동정표가 어느 쪽에 가 있는지 독자 여러분도 알 테지만, 미국인들은 그런 판단을 자제해야 한다. 미국의 하원과 상원은 노예제도에 대한 공식 사과를 노예제가 끝난 지 150년이 지난 2008년과 2009년에야 비로소 각각 발표했다. 미국 대통령 또는 의회 전체가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미국에는 노예로 살다가 죽은 수백만 흑인을 위한 국가기념비는커녕, 오늘날 러시아 전역에 세워진 수백 개의 작은 스탈린 희생자 기념비 비슷한 것조차 없다."

 

소련사 및 학살과 추방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흐루쇼프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스티븐 코언 아저씨를 한 번 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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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1. 9. 20:39

이 책은 마오의 중국과 냉전을 열쇳말 삼아 전후(戰後) 아시아에서 펼쳐진 중공의 의도와 국제관계를 9개의 주제와 사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새롭게 발굴·번역된 중국과 러시아 자료에 기초하여 1940~60년대 아시아의 냉전 경험을 중국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서술하였다. 서문이 잘 밝히고 있듯,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탐구지점을 설정하였다. 그것은 바로 지난했던 국공내전과 중국혁명, 두 차례의 열전, 미국과의 긴장 완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의 두 번째 질문은 국익과 안보를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국적 자료에 근거하여 사상과 이념이라는 요소를 분석에 도입한 개디스를 필두로 하는 ()냉전사연구의 흐름 속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각주:1] 저자는 이 책에서 상기의 질문에 답하면서 중국의 냉전 경험을 반추했고, 그러한 경험의 유산이 어떠한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가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론과 결어를 포함하여 모두 11장으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마오의 중국이 맞닥뜨리게 된 일련의 사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지도부의 인식 및 행동을 보여주었다. 1~2장은 전후 중국이 다시 한 번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미소갈등이라는 냉전 구도에 포획된 아시아에서 중국의 주도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특히 저자는 2장에서 워드 사건’, ‘-스튜어트 접촉’, ‘일변도 성명에서 드러난 중공의 언설과 행위를 통해 중국에서 미국이 실패한 것은 잘못된 대중(對中)정책 때문이라는 모종의 신화를 비판하였다.[각주:2] 3장은 1956년 열린 20차 소련공산당대회를 기점으로 중소관계가 악화돼가는 모습을 서술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본격적인 중소갈등의 진원(震源)은 이미 고인이 된 스탈린에 대한 태도상의 차이였다. 4장은 6·25전쟁을 끝내기 위한 중국의 생각과 전략을 다루었고, 5장은 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뒤이은 제네바협상의 미봉적 타결을 서술하였다. 6장은 1956년 폴란드 위기와 헝가리 사태에 대한 베이징의 태도를, 7장은 1958년 대만해협 위기를 다루었으며, 8장과 9장은 각각 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와 데탕트에서 중국의 인식과 역할을 설명하였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 중인 냉전사 연구에서 근거가 되는 1차 자료들의 소장처뿐만 아니라 각 주제를 다룬 영어 및 중국어 문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등장한 바 있듯, 이 책 역시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중공 지도부의 사고와 인식을 엿보기 위해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회고록을 비롯하여 선집이나 건국이래마오쩌둥문고, 마오쩌둥군사문집 등 중앙당안관(中央檔案館)[각주:3]에서 펴낸 중공중앙위원회 문서와 마오쩌둥 관련 문서를 자료적 핵심으로 삼았다. 더하여 저자는 구()소련 및 동구(東歐) 자료의 경우,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국가안보문서고[각주:4]와 우드로윌슨센터의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 문서고[각주:5]에서 도움을 얻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자료에 대한 엄밀한 사료비판은 드러나지 않으며, 또한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고 충실한지에 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저자의 서술에서 찾을 수 있었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가 이후 전개될 중소갈등, 조중갈등, 중월갈등의 씨앗을 각기 다른 시간대의 역사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중공 지도부나 중국을 설명할 때 아편전쟁 이후중국이 겪게 된 역사적 굴욕과 피해의식을 계속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 간 관계, 특히 갈등의 역사는 19세기 이전으로 소급하여 서술하지 않았다. 평자는 그 이유가 궁금한데, 아무래도 중국(관변)의 입장에서 냉전기 중국의 경험을 파악한 다수의 사료에 근거하다보니 나올 수밖에 없던 문제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러한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북한·베트남의 냉전사 서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저자가 제기한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이 어떠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따라가 보자. 첫째,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2차 대전이 끝난 세계,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역할은 결코 미소갈등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은 결정적인 주연으로서 냉전의 국제정치에 개입했고 시기별·지역별로 나름의 국내외 정책을 관철시켰다. 6·25전쟁에 참가하여 소련의 불완전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상대로 대등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스탈린의 소련의 눈치를 봐야했으나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소련을 적극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가려고 하였다. 물론 헝가리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제공산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라는 수사를 통해 소련의 진압을 용인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 중소관계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독자는 이 책에서 중소관계의 몰락이나 중월관계의 악화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소제목(Ideology matters)을 할애하여 이념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때 이념은 단일한 결과로 귀결되었다기보다는 그 이념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인 주체의 세계인식 또는 역사·문화적 환경에 따라 변용되고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고, 마오식()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원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별개로 중국의 대내외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이 책은 마오를 비롯하여 중공 지도부의 인식과 생각에 강조점을 두어 계속 드러내려고 하였다.

 

셋째,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 저자는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국제정치에서 중국이 보인 행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마오의 혁명 후의 우려라는 심리적·개념적 요소를 제시하였다. 이는 마오의 계속혁명개념과 쌍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즉 그는 보편적 정의와 평등이 도래하고, 중국이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다시거듭날 때까지 혁명을 계속추구하였고, (실상 불가능에 가까운)이러한 목표들이 달성되기까지 우려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터였다. 따라서 마오 시기의 중국은, 적어도 대외관계상에서 중심성을 추구하였으나 지배는 추구하지 않았고, “항상대내적 동원이라는 목적으로만 물리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또한 자본주의사회와는 구별되는 중공 정치의 독특한 요소들, 이를테면 중국에서의 민주집중제나 광범한 대중 동원을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결어에서 저자는 중국의 냉전 경험의 유산을 설명하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중국의 1당 독재체제라든가 피해의식에 대하여 서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한 듯 보인다. 이렇듯 저자가 영어로 마오의 생각과 중국의 냉전 경험을 서술한 의도는 그 다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중공 정부는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수행(즉 국제사회로의 통합)해야 하고 그것의 관건은 바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성원들이 열심히 중국의 관점과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현실의 정세(중국의 대국굴기와 미국의 쇠퇴)가 역사가의 입지에 고스란히 반영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1. John L. Gaddis(1941~). 이른바 "냉전사가의 수장(Dean)”으로 불리는 미국인 역사가로 냉전과 거대전략을 탐구한다. 2014년 현재 예일대학에서 Robert A. Lovett육해군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조지 케난(George F. Kennan)의 공식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Chen Jian(陈兼),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본문으로]
  3. http://www.saac.gov.cn [본문으로]
  4. http://www2.gwu.edu/~nsarchiv [본문으로]
  5.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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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9. 13. 05:29

 이 책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중·소관계()를 경유하여 6·25전쟁의 배경·원인·전개의 일부분을 살핀 역사서이다. 저자는 6·25전쟁의 다양한 측면 중에서도 소련과 중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 및 그러한 결정이 이뤄질 수 있었던 공산측 지도부의 정세인식과 국제적인 상황요인을 서술하는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평자는 이 책을 6·25전쟁에 관한 본격적인 역사서라기보다는 냉전사 또는 외교사(국제관계사) 연구의 흐름 속에서 사료에 근거를 둔 하위연구로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하에서는 저자 소개와 책의 구성, 핵심주장, 논리 및 그를 뒷받침하는 자료적 근거 등을 살펴본 후 논평을 시도하겠다.

 

 저자는 1950년 북경 출생으로 일급의 역사가로 인정받기까지 독특한 경력을 쌓았다. 중공선전부장 등리쥔(邓力群, 1915~)의 도움을 받아 중국사회과학원에 어렵사리 입학했으나 1983년 재학 중 정치사건에 연루돼 복역하였다. 조기 출소한 후 무역사업과 금()거래를 통해 致富했고, 1993년 중국사학회동방역사연구소를 세웠다. 그 후 러시아문서고에서 직접, 또는 사료발굴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며 왕성한 학술활동을 벌여왔다. 현재 화동사범대학 교수이자 북경대학·인민대학 겸임교수 및 중국사회과학원 동양사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각주:1]

 

 이 책은 서론과 부록을 제외하고 5장으로 구성돼있고 시기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1953년 여름까지를 다루었다. 저자는 서론에서 중·소관계 및 6·25전쟁에 관한 연구사를 개괄한 후 중소 동맹의 체결이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식의 사뭇 도발적인 주장을 제기하였다. 1장은 세계대전 이후 소련 대외정책의 변화와 대조선정책·대중국정책을 서술하였다. 2장은 1949년에서 1950년 사이에 벌어진 중·소 대화를, 3장은 전쟁 발발 직전까지의 스탈린의 정세인식을 다루었다. 4장은 전쟁 발발 이후부터 중국의 참전까지를, 5장은 중국의 참전 이후 정전협정의 체결까지를 묘사하였다. 이어 두 개의 부록은 각각 조약 체결 전까지의 조·중관계와 정전협정 이전의 1년을 다룬 글이다.

 

 우선 저자의 시각과 방법론, 자료구사 방식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 책은 저자의 관심분야인 소련사와 냉전사의 하위 연구이면서 그 중에서도 중·소관계와 6·25전쟁 간의 연관을 확인하고자 기획됐다. 따라서 저자가 당시 중·소의 지도부, 그 중에서도 실권자였던 마오와 스탈린의 인식 및 동기에 주목한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이 책에서 광범한 자료를 구사했는데, 그 목록엔 문고, 선집, 공개자료(중국, 러연방 대통령·대외정책·국방성중앙 문서고 등), 회고록과 구술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저자가 밝혔듯, 사료의 진위판단을 잠시 미뤄둔다 하더라도, 각국 지도부의 내밀한 속셈을 솔직히 보여주는 사료 자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책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공개한 일은 미덕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으나, 저자가 쓴 자료들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또는 저자 고유의 선험적 해석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활용된 것은 아닌지 등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하겠다.

 

 저자의 주장과 논리를 다음의 도식처럼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혁명 새로운 중소조약[각주:2] 얄타체제의 변경에 따른 소련의 이권(핀란드-발트제국-동유럽, 근동-몽고-동베이-일본의 북방도서) 대체 필요성 동베이에서 한반도로의 목표 전환 아시아에서 소련의 공세적 선회 예상치 못한 미국의 적극적 개입 스탈린의 철수 통지(1011, 289~292) 마오쩌뚱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따른 파병 결정(1013, 299.)’ 이러한 저자의 논리 속에서 6·25전쟁의 주역은 결국 스탈린을 정점으로 하는 소련이었고, 중국은 그러한 소련의 의사에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오쩌뚱은 항상 소련에 동조하지만은 않았고, 파병에 이어 결국 제국주의미국을 상대로 선전을 벌였다. 그 결과 중·소 간의 분열과 마찰은 미봉됐고 동맹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시각이 꽤나 흥미롭다. 저자에 따르면 스탈린은 국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전형적인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세 부분 또는 세 단계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평화공존 - 세계혁명 - 국가의 안전과 이익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단계국가의 안전과 이익에 다른 단계를 종속시켰다. 이러한 논리는 어디서 기초한 것인가? 저자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스탈린이 지녔던 논리의 이론적 기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평가는 과연 정당한가? 일국사회주의론에 관한 지리한 논쟁은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한 것은 저자의 시각, 즉 스탈린의 외교에 관한 그러한 평가는 수많은 실증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소련 외교를 보편적 개념인 이해관계와 계산적 합리성으로만 설명하여, 궁극적으로 그 특수성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없었다는 점이다.[각주:3]

 

 이 책의 내용 중에서 평자가 가장 주의 깊게 읽은 지점은 저자의 논리 중 아시아에서 소련의 공세적 선회부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스탈린은 “1950년 초 몇 개월 사이에()한반도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4)비밀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현재 러시아의 문건 중 어떤 관련 자료도확보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에 저자는 스탈린의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를 자문한 후, 중공의 등장 및 중소조약의 체결에 따른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이익이받게 된 위협 내지 상실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그 답으로 내놓는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소련의 공세적 선회를 설명하기 위해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수행한 정황상의 추측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굳이 소련의 선회, 즉 북한(의 공격계획)에 대한 승인과 관련하여 지면을 할애해 나름의 답을 내려야만 했던 것일까? 우선 그의 방법론에서 한 가지 답을 찾을 수 있을 터인데, 평자는 저자가 냉전사 연구에서 어느 한 지도자·분파의 능동성과 일방성을 전제하는 흐름 안에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신생국가인 북한은 어디까지나 소련(스탈린)의 손바닥 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에 따르면 그러한 선회의 계기는 신생 중공의 대두였다.

 

 저자의 논리와 설명방식은 6·25전쟁사 연구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시계열을 따라 사료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특정시기의 중·소관계()를 설명하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각국의 문서고가 개방됨에 따라 새로운 자료들이 등장함으로써 풍부한 역사상을 그릴 수 있는 충분조건이 확보됐고, 저자는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활용하여 상당히 일찍부터 러시아 자료와 중국 자료를 확보함으로써 해당 분야에서는 대가로 인정받은 듯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서 ‘6·25전쟁이라는 대사건 자체는 소외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전쟁의 직접적인 당사국인 남북한은 제대로 등장하지조차 않고, 일방이었던 유엔측또한 좀체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한국사의 맥락에서 6·25전쟁으로 이르게 되는 역사적 경로에 관한 설명은 완전히 생략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목적은 6·25전쟁을 중·소관계()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평자의 아쉬움은 ·소관계의 시각에서 또는 중공의 입장에서 6·25전쟁을 묻는 일은 오늘날 어떤 효과를 갖는가라는 질문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1. 특히 저자는 1995년 러시아문서고에서 비밀 해제된 자료를 구입하기 위해 사비 천사백만 위안(元)을 사용하면서 매체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상 저자의 약력에 관해서는 호주국립대학 중화지구연구소 누리집(http://www.thechinastory.org)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2. 중소우호동맹조약(소련-국민당 중국)은 1945년 8월 14일이 체결됐고,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소련-중공)은 1950년 2월 14일 체결됐다. 여기서는 후자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저자의 스탈린 해석이 과연 역사적 사실과 맞는지는 언제든지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다음의 연구 성과들을 참조할 수 있었다. 황동하, 「소련 역사 속의 “스탈린 시대”: 이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각들」, 『서양사학연구』 7집, 2002; 노경덕, 노경덕, 「스탈린 시대 소련의 대외 관계, 1926-1953」, 『슬라브학보』 27권 1호, 20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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