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국내의 한 공과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하버드대학의 이학계 박사과정 입학을 받아 놓고, 군대에서 2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전역하자마자 도미하신 한 선생님을 뵙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국내에서 석사를 하지 않은 것이 굉장히 현명한 일이라고 말씀 드렸고, 그는 나에게 학부 시절/군복무 시절 겪었던 온갖 부조리와 구역질 나는 일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인류 최고의 대학인 하버드대학 및 메사추세츠공과대학 박사과정(주로 이공학 계통)에 재학 중이신 한국인 선생님들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결론은, 연구자가 조금이라도 더 역량을 펼치기 위해서는 신속히 탈주변부 해야한다는 것. 이곳 쌀국에는 (갑질도 없진 않지만) 풍성한 재정적 지원, 탄탄한 연구 기반, 훌륭한 연구자들의 연계망, 자유주의적 신제국주의의 환대가 넘쳐난다. 


다만 이러한 탈주변부의 노래는 나처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들보다는 자녀를 위해 큰 돈을 아낌 없이 쓸 수 있는 전문직/관리직/중산층 이상의 계급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동한다. 이는 글로벌 봉건제인 오늘날의 세계에서 부동의 법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주변부의 가난한 청년들을 도우려는 (나같은 사람의) 의도는 '신자유주의적'이라는 매도를 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해답은 뭘까? 해답은 없다. 미국/유럽(중심부)에서의 혁명을 바라느니, 광주 상무가 레알 마드리드를 7:0으로 이기는 걸 바라는 게 더 현실적이다. 다만 새로운 계층으로 거듭난 예의 선생님들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역사적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이를 중심부의 관리자/정책결정자들에게 보급해서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그런 게 가능할까?)를 창출하게 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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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1956년 3월 14일. 하이게이트 묘지에서 카를 마르크스 기념비 제막식 열려. 사진 제공 플래닛 뉴스. 

... 기념비 제막식에는 영국공산당, 노조 및 진보 단체의 대표들과 함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맹, 중화인민공화국 및 여타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프라브다, 1956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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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ifesto being our joint production, I consider myself bound to state that the fundamental proposition, which froms its nucleus, belongs to Marx. That proposition is: that in every historical epoch, the prevailing mode of economic production and exchange, and the social organization necessarily following from it, form the basis upon which is built up, and from which alone can be explained, the political and intellectual history of that epoch; that consequently the whole history of mankind (since the dissolution of primitive tribal society, holding land in common ownership) has been a history of class struggles, contests between exploiting and exploited, ruling and oppressed classes; that the history of these class struggles forms a series of evolutions in which, nowadays, a stage has been reached where the exploited and oppressed class - the proletariat - cannot attain its emancipation from the sway of the exploiting and ruling class - the bourgeoisie - without, at the same time, and once and for all, emancipating society at large from all exploitation, oppression, class distinctions and class strugg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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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5일

생각 2015.12.05 02:28

​- 엥겔스는 내 나이 때, 마르크스보다 두 살 어렸을 때, 불후의 저작 <공산당선언>을 썼다.
- 나는 오늘 구술 녹취를 한 시간 넘게 하고,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다 읽었고 지금은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김경원 옮김)를 경유해 저 둘을 읽으려고 한다.
- 그러나 조금 이따가는 다시 일을 해야 한다. 하기 싫다. 그러면서도 안 할 수가 없다. 이러한 생각이, 처지가 이러한 삶을 영속시킨다.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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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판 서문

"나는 과학적 비판에 근거한 의견이라면 무엇이든 환영한다. 그러나 내가 한 번도 양보한 일이 없는 이른바 여론이라는 편견에 대해서는 저 위대한 플로렌스사람[단테]의 다음과 같은 말이 항상 변함없이 나의 좌우명이다.
"제 갈 길을 가라, 남이야 뭐라든!""

1867년 7월 25일
런던
칼 마르크스

Every opinion based on scientific criticism I welcome. As to prejudices of so-called public opinion, to which I have never made concessions, now as aforetime the maxim of the great Florentine is mine:
"Segui il tuo corso, e lascia dir le genti."
[Follow your own course, and let people talk - paraphrased from Dante]

Karl Marx
London
July 25,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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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1849년부터 어쩔 수 없이 파리를 떠나 영국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런던, 특히 대영박물관 도서실을 '부르주아 사회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이상적인 전략적 거점'이자 무기고로 여겼다. 그런데 정작 그 소유자인 영국인들은 그 중요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 도서실의 중요성.


그러나 인민들이 증오했던 것은 루이 필립이 아니라 왕관을 쓴 한 계급의 지배; 즉 왕좌에 오른 자본이었다. 그런데도 인민들은 늘 그랬듯이 관대한 마음으로 자신들의 적들의 적, 즉 자신들과 자신들의 적들의 공동의 적을 전복하고는 자신의 적들을 섬멸했다고 착각했다. 


- 1848년 7월 폭동에 대한 사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르크스는 한 철도회사의 역무원으로 지원했지만 그의 다 헤진 옷차림과 위협적인 외모가 좋은 인상을 주었을 리는 없었다. 또한 그의 지원서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엥겔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마르크스와 그의 가족이 이 끔찍한 세월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 스펙의 중요성.


마르크스의 생활 방식은 변화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는 7시에 일어나 블랙커피를 여러 잔 마신 후 서재로 들어가 오후 2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식사를 서둘러 마친 후에는 저녁 식사 때까지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햄프스테드 히스로 산보를 나가거나 아니면 서재로 다시 들어가 다음 날 새벽 2, 3시까지 일을 했다. 


- 나태함을 반성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일에서건 매우 조직적이었다. 그는 영국에 도착해서 자신의 영어 실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깨닫고는 실력을 높이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장 표현들을 목록으로 만든 다음 외워버렸다. 러시아어를 배울 때에도 그는 고골리와 푸시킨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의미를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조심스럽게 밑줄을 그었다.


- 대가의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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