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5

저자는 1986년 영화학으로 학부를 마쳤고, 1997년 예일대에서 미국연구로 박사학위를 얻었다. 2013MIT 부교수를 거쳐 2014년 현재 보스턴 대학(Boston College) 영어학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화학, 미국 문학, 미국과 아시아의 만남을 다룬 문학과 문화 등을 주로 공부했고, 현재 미국과 아시아 영화산업의 세계화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이 책은 1945~61년까지의 시기를 종축으로 하고, 미국-태평양-비공산권 아시아를 횡축으로 삼은 냉전(문화)사이다. 저자는 문화계라는 장() 또는 그 분야의 산물이자 실천양식인 영화, 뮤지컬, 소설, 사진(), 입양, 교육 등을 소재로 삼고, 미국 문화계, 그 중에서도 중류(또는 중간)(middlebrow)[각주:1]이 감상적으로 드러낸 아시아 표상과 미국의 대내외 정책 또는 행보 사이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저자는 당시 미국의 아시아 표상, 즉 이전 시기의 오리엔탈리즘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냉전 오리엔탈리즘의 구성요소, 그러한 인식을 주도한 주체들과 논리, 동인(動因), 매체 등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박사학위 논문을 증보한 이 책은 구사하는 자료의 범위가 넓은 편으로, 미국의 문화사, 냉전사(개디스, 커밍스) 관련 연구서뿐만 아니라, 리더스 다이제스트토요비평같은 중류층의 주요 잡지, 영화와 사진, 소설과 뮤지컬, 미국 공식문서와 주요인물의 연설문, 편지 등 다양하고 많은 1차 자료를 참고했다. 일견 압도적인 분량의 각주는 저자의 성실함과 미국 내 미국학 또는 문화사 연구의 방향을 일정 정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독자가 보충하여 공부해야 할 부분을 제시하기도 한다. 저자가 참고한 자료의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쓰인 문헌이니만큼 아시아로부터 문화현상의 되먹임(feedback)’을 온전히 보여주는 자료는 참고문헌에서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하에서는 사변적이나마 저자가 구사한 이론적 자원의 핵심을 먼저 살펴본 후, 책의 주요문제를 일견하도록 하겠다.

 

필자는 이 책이 구사하는 이론적 자원의 핵심은 그람시가 언급한 개념인 역사적 연합(블록)’, 신좌파(New Left)였던 윌리엄스(Raymond H. Williams, 1921~1988)가 창안한 개념인 문화 구성체느낌의 구조라고 보았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역사적 연합이란 사회 제()세력 간의 연합으로, 이 연합은 해당 사회에서 제도적 장치, 사회적 관계, 이념들을 매개로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생산하는 특정 사회질서에 대한 합의의 물적 기반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 연합이란 한 사회의 지배층으로 그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유지하려하고, 대개 권력관계의 상부에 위치한다. 후대의 콕스(Robert W. Cox, 1926~) 같은 정치학자는 이 개념을 발전시켜 역사적 구조이론을 선보이기도 했다.[각주:2] 또한 저자는 윌리엄스의 논의를 빌려, 문화는 구체적인 사물 및 사회적 관계에 묻어 들어있는 채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구체적인 사물 및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문화 구성체를 포착할 때만이 그것들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며 의미 만들기를 수행하는 정황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6). 저자가 이 책에서 주요행위자로 설정한 문화 구성체는 바로 중류층으로 여기엔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이 포함됐고, 그들은 개인적 친분이나 제도적 기구들을 통해 느슨하게나마 서로 연결돼있었다(64).[각주:3] 이들 중류층의 특정한 세계관(감상적 보편주의, 반인종주의, ()제국주의’, 가족적 유대 등)은 문화계에서 각양각색의 산물로 표현되거나 순회교육, 대중강연 등을 통해 국내외에 전파됐으며, 저자는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그러한 산물과 실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하여 교육은 국내외의 미국인에게 특정한 느낌의 구조를 심어주었는데, 바로 이 과정이 저자가 언급하는 냉전 오리엔탈리즘의 작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설정한 당시 미국의 주도적 역사적 연합은 정책입안자들과 중류층을 뭉뚱그려낸 것에 다름 아니다. 비록 그러한 역사적 연합내부에 흐르는 상이한 역사적·지적 원류(源流)가 서술돼있긴 하나, 전체적으로 자세한 분석보다는 상황적 설명에 치우친 느낌을 준다. 더하여 저자의 냉전관은 평면적(“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이 급작스레 끝남”, 226)일 가능성이 높고, 트루만과 아이젠하워 두 행정부의 대외정책적 연속성(냉전 컨센서스)을 누누이 강조하는데 비해 차별성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았다.[각주:4]

 

앞서와 같은 이론적 틀에 기반하여 저자는 냉전 오리엔탈리즘의 분석 지점을 아래와 같이 설정했다. 첫째, 미국의 대외정책적 측면으로, 당시 미국은 어제의 전우였으나 오늘의 적이 돼버린 공산주의 소련을 반대(봉쇄)하며, 동시에 비공산권 아시아국가를 자본주의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로 탈바꿈(통합)해야 한다는 과제를 짊어지게 됐다. 여기서 관건은 ()제국주의식민주의라는 외양을 피하되 근대화라는 시혜(施惠)를 베풀면서도 풍부한 자원의 원천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는 점이다. 둘째, 미국의 국내정책적 측면으로, 당시 미국은 대내적으로도 봉쇄(매카시즘)와 통합(반인종주의, 중류층 가족상상으로의 포섭 등)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에 관한 대중적 표상(관광, 입양, 피플투피플 계획 등)이 선전적, 교육적 수단으로 널리 쓰였다. 셋째, 중류층이라는 문화 구성체이자 역사적 연합의 일부라는 측면으로, 그들은 보편적, 감상적인 논조의 작품 활동을 통해 미국 대중의 시각을 해외, 특히 비공산권 아시아로 돌렸으며, 동시에 미국(문화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밖에도 책에서 자세히 나오진 않았으나, 아시아인(태국인)이 맞닥뜨린 냉전 오리엔탈리즘을 포함하여 네 가지 정도를 서로 다른 분석 지점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 책이 냉전 오리엔탈리즘분석의 두 축으로 설정한 봉쇄통합의 논리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가? 전자의 근거는 트루만 독트린이고, 후자의 대표적 근거는 국무부 관료 윌콕스(Francis O. Wilcox, 1908~1985)필라델피아 연설문(1957)’이다. 연설문은 미국의 팽창은 전적으로 평범한 미국 시민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 이것이 기존의 고립주의적 정서를 깨고 대내적으로 통합을 시도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통합의 노력들이 정말로 태평양 지역에서의 통합을 시도했는지는 전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통합은 어디까지나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를 재편해나가는 과정에서 출현했고, “봉쇄를 변주하는데 불과한 보조적 논리로써 당시 미국 대외정책과 중류층 개입의 미학이 만난 우연한 역사적 사례는 아니었을까? “봉쇄의 논리는 미국 국내외를 막론하고 반공으로 일관됐으나, “통합의 노력은 대상(국민, 비공산권 아시아)에 따라 목적과 강도를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통합봉쇄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의심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1. 중류(층), 또는 중간(층)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영단어 'middlebrow'는 (대중의) 접근이 용이한 특정 예술분야(대표적으로 문학)를 지칭하거나, 문화적·계급적 상승의 도구로 예술을 이용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골상학(骨相學)에서 유래된 이 말은 1925년, 영국의 풍자잡지 『주먹질(Punch)』에서 처음 쓰였고, 상층(highbrow)과 하층(lowbrow) 사이의 중간자적 역할을 지칭한다.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각 층을 두고 문학계에서 논쟁이 있었고, 그 중 중류(문학)는 “질(質)이나 혁신보다는 정서적이고 감상적인 연계”에 주안을 뒀던 것으로 취급받았다. * 위키피디아 (Middlebrow 기사). [본문으로]
  2. “역사적 구조는 상이한 이념, 물질적 역량, 제도적 장치를 보유한 사회세력들 사이의 부단한 쟁투 속에서 변화하며, 결과에 따라 각 세력이 사회에 발휘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도 달라진다.” 박형준,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 책세상, 2013, 112쪽. [본문으로]
  3. 저자는 중류층의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특정한 계급적 함의를 공유 ②국내를 넘어서려는 세계관을 공유 ③교육이라는 원칙에 깊이 착근 ④모든 문제가 해결이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공유. 마지막으로 중류층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심원한 보편주의”가 무방할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뉴룩정책”으로 대표되며, 이는 “원조감축”을 골자로 한다. 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15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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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3

이 책은 교토대의 기시 도시히코(貴志俊彦)와 에히메(愛媛)대의 쓰치야 유카(土屋由香)가 편집한 논문집으로, 서론의 역할을 하는 총론을 제외하고 모두 10편의 글을 한데 모아 2부로 나누어 놓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주로 아시아의 시각(또는 문맥)’에서 냉전을 담아내는 작업을 일차적으로 수행하고, 이차적으로는 아시아의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문화냉전의 양상을 포착하고자 하는 공편자의 의도를 바탕으로 선택된 듯하다. 더군다나 ()중심화 하기라는 책의 부제는 참으로 다른 시각에 입각하여 냉전을 탐구하려는 강한 의지마저 보여주었다. 그러나 책을 일독하고 나니 처음에 표제가 주었던 참신한 느낌은 오간데 없어졌고, ‘다른 시각에 입각한 냉전 연구를 위해서는 막상 무엇이 필요한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여러 고민거리를 안게 되었다.

 

저자들은 대부분 미국과 대만, 일본을 거점으로 학계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아시아 국적의 연구자들로 생각되고, 공편자의 의도인 다른 시각의 냉전 연구를 의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학자를 비롯하여 지역학자, 개발학자, 사회학자, 문학자 등 다양한 학문적 정체성을 지녔다. 더하여 이 책은 대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를 종축으로, 아시아 제국(諸國)과 미국과의 상호작용을 횡축으로 둔 것들이다. 같은 시기는 한반도와 양안(兩岸)’, 인도차이나 등 동아시아 곳곳에 여전히 전쟁이 지속 중이거나 또는 전쟁상태에 버금가는 긴장이 도사리고 있었고, 동시에 일국의 외부적으로는 냉전, 내부적으로는 국민국가 만들기탈식민이라는 홍역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이 책은 흥미로운 시공과 주제를 다루고자 했지만, 공저자의 다양한 국적(주로 일인)과 학문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이 책이 냉전 연구를 충분히 다른 시각에서 수행했는지는 의문이다.

 

공편자가 쓴 총론은 책을 일관하는 주제를 짤막하게 언급하고, 책의 구성을 소개했다. 그들이 냉전 연구를 위해 탐침(探針)을 꽃은 주제는 미국의 ()보선전(廣報宣傳)’으로, 이는 미국의 국가 이미지 향상과 친미여론 육성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대외활동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하필 공보선전에 주목하였는가. 이 책이 정의내리는 문화냉전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문화냉전헤게모니를 확립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전개한 문화·정보·미디어 전략이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 ‘문화냉전이란 상징이자 실체로서의 미국을 아시아인의 마음에 뿌리내리려는 하나의 (전쟁)기획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러한 의도를 관철시킬 매개를 필요로 한다고 짐작해 볼 수 있고, 따라서 이 책은 결과적으로 문화냉전의 연결고리인 공보선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문제설정은 참신하다고 할 수 있고, 냉전의 다른 축, 이를테면 소련이나 중국의 공보선전을 소재로도 삼을 수 있어 유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총론후반부가 말하고 있고, 생각건대 다른 시각의 냉전 연구에 필수적인 “(미국)공보선전 기관과 그 활동이 미국사회 내부나 아시아 국가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선택적 수용과 재해석)에 대한 고찰을 수행하지 못했다.

 

1부에 실린 5편의 글은 미국과 대만을 주된 무대로 하고, 미국 공보선전 기관의 계통, ‘중추(USIA)’, ‘모세혈관(USIS)’ 등 구성의 전모를 비교적 자세히 다뤘으며, 글의 소재로는 영화와 영화계(2, 3, 4), 민관(民官) 상호작용(1, 2), 미국의 대외공작(工作)(1, 3, 4, 5) 등을 택했다. 1부가 주장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미국은 공보선전을 위해 자국 기업(또는 경제계)과 긴밀하게 연동했으나, 그 양상과 결과는 협상대상과 시기별로 차이를 보였다. 자금력을 포함하여 미국의 영향력은 아시아 국가, 특히 대만에 압도적으로 미쳤다. 1부에서 아쉬운 점은, 3장의 영화분석 또는 담론분석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시아 국가에 미친 영향력의 실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특히 우린춘(5)의 글은 면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자료번역에 가까운데, 록펠러재단 연차보고서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집필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또한 그녀는 록펠러재단이 지급한 보조금의 행방을 전혀 추적하지 않았고, “전후 대만의 농촌 근대화와 학술 교육 향상에 이바지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식의 선언조로 끝맺는 등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 많았다.

 

2부에 실린 5편의 글은 시공간적 배경과 자료적 특성 모두 1부와는 꽤나 달랐다. 2부의 글은 한국, 필리핀, 라오스 등지가 배경이고, 미국 공보선전의 대상인 아시아인의 모습과 그들의 능동성을 보여주려고 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7(김려실), 8(고바야시 소메이), 10(치아 유이 방)이었다. 김려실은 해방정국을 통치자와 영화인 단체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고, 그 과정은 남한식() ‘탈식민을 보여주는 하나의 통로라고도 할 수 있다. 고바야시는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미국이 포로의 신체를 공보선전(심리전)의 매체로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치아 유이 방의 글은 소수민족인 몽(Mhong)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어떻게 미국의 공보선전에 선별적으로 포섭됐는지를 생존자들과의 면담을 토대로 밝히고자 했다. 이상에서 2부가 주장하는 바도 또한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미국의 공보선전은 아시아 제국에서 수행됐고, 그 양상은 천차만별이었다. 미국은 공보선전을 통해 아시아 인민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으나, 항상 뜻대로 되진 않았다.

 

이 책은 결국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을까? 이상의 내용에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실로 대규모로 공보선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아시아 각지에서 차별적으로 나타났다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냉전 연구의 탈중심화라는 향후 과업의 계기이자 초석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순 있겠지만, 결코 그것을 넘어설 순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아시아 국적 연구자들이 방문하곤 하는 하버드 대학 옌칭 연구소의 기원이나 저명한 중국사 연구자인 페어뱅크(J. F. Fairbank)의 약력 등 평소라면 주의를 기울여 알아채기 힘든 정보를 꽤나 자세히 알려줬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거나 검증이 필요한 사항들이 사뭇 많고, 더불어 문화냉전의 정의에까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냉전은 과연 무엇이고, 그것들의 지역적/시기적 차별성과 신진 연구자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중층성, 다양성은 대체 어떻게 포착해야 하는가? 이 책의 부록인 참고문헌 가이드를 우선적으로 참고할 수 있겠다.

 

김려실에 따르면, “소련군은 826일부터 38도선을 봉쇄했는데, 박병엽의 증언은 그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각주:1] 또한 그녀는 훗날 한국영화가 떠안게 되는 많은 문제는 미군정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19476월이 미국 해외공보정책의 새로운 국면의 전환점이라고 서술했는데, 그러한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그리고 왜 그러했는지에 관해 설명이 더 필요하다. 고바야시의 경우에도, 포로 문제를 다룬 글의 말미에서 문화냉전이 낳은 폭력성이 불가시화/원경(遠景)됐다고 가정하는데, 그렇다면 우선 그가 말하는 문화냉전의 폭력성은 대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그러한 폭력성이 과연 보이지 않게됐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글들은 대부분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소장된 문서를 주된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더하여 역자의 노고는 치하하지만, 표현의 측면에서 이 장()’이 글, ‘오직(汚職)’부패, ‘광보(廣報)’공보로 바꾸어 써도 무방할 것이다.

  1. “소련군 제25군사령부는 8월 27일 밤 38선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27일 밤 지시가 내려간 것이 분명하다. [중략] 봉쇄에 따라 8월 28일 새벽부터 교통, 우편, 전신전화 등이 모두 차단된다. 기차가 불통됨에 따라 사람들 모두가 걸어서 38선을 넘나들었다.” 유영구·정창현, 『조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25~2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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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9:02

이 책은 1949년 혁명을 달성한 신중국과 한국전쟁 간의 긴밀한 관련을 염두에 둔 채, 아시아의 냉전이라는 대주제 밑의 세부라고 할 수 있는 10여 편의 개성 넘치는 논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구성상 1, 2부로 나뉘어져 있고, 그 중 1부는 당대 생산된 기록 자료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또는 이론적 틀 속에서 걸러낸 담론분석의 성격이 강하며, 대체로 1950년대 신중국민 형성의 초기단계에 주목했다. 주로 한국전쟁기를 전후하여 벌어진 운동(運動)과 그 현장에 동원된 인민들을 묘사함으로써, 중공중앙이 기획한 신중국적 주체 형성의 논리와 실상을 짚어내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정작 논의의 대부분, 특히 중국인 학자가 쓴 글들은 서구(의 이론)와는 다른 중국의 복잡한 현실을 부각시키는데 할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2부는 역시 당대 생산된 기록 자료를 이용한다는 면에서 1부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특정 담론보다는 역사적 사실의 복원에 노력을 기울인 역사서술의 성격이 강하며, 대체로 1950년대 신중국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북, 대만, 홍콩, 말라야 등지와 한국전쟁 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2부의 글은 1부에 실린 글보다 사변적 성격이 약하고, 다루는 시간적 길이가 훨씬 길어 역사적인 전변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필자는 특히 2부에 실린 판왕밍·천띵후이의 글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 이유로는 당대를 몸소 겪은 이들의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점, 서로 멀리 떨어진 곳의 사건들이 정치경제적으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밝힌 점 등을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영국 식민권력의 분할통치술(divide et impera)이나 토사구팽, ‘신촌계획등의 기획이 한국처럼 피식민지의 경험을 겪은 나라에서, 첫째로 이민족 간에, 둘째로 같은 민족 간에도 지배층이 자국민을 상대로 하여 거의 비슷하게 수행된다는 점에서 적잖이 놀라웠고 비교사회학적으로 어느 정도 시사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남주[각주:1]의 글은 중공의 건국강령이었던 신민주주의론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민민주독재론으로 급격히 변하는 모습을 서술했다. 저자는 주로 건국이래모택동문고등 혁명 지도부의 글과 인민일보등 신문자료를 이용하여 중앙의 논리와 공세, 자산계급의 대응 등을 소묘했다. 저자는 중공 통치이데올로기가 급변한 핵심적 요인으로 시종일관 한국전쟁이 가져온 긴장감을 초들었다. 그러나 이 글은 정작 긴장감이나 위기의식이 중공 지도부와 인민의 의식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해서는 자세히 분석하기는커녕, 자료를 나열하듯 상황설명에만 치중했다. 중공이 전쟁을 활용한 측면은 앞으로 더욱 자세히 분석돼야할 것이다. 한편 부패에 대한 인민의 분노를 전유한 중공의 통치술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청카이(程凱)[각주:2]의 글은 당대 생산된 회고, 신문, 수고 등을 통해 건국초기 신중국의 정치운동 중 하나인 평화서명운동의 전모를 다뤘다. 19494월 시작된 세계평화대회는 그 이듬해까지 세계 인구(대략 25억 명) “5억 명의 서명을 받았던 만큼 그 호소력을 짐작할만하나, 그것은 아직 대만과 시장(西藏)해방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민중의 (정치)인식미달 상태라는 중국적 맥락에서 문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 두만강까지 진격하는 11월에 평화서명운동에 가담한 중국인은 2.2억 명에 도달했고, 그 내용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비극적 기억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됐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의 평화서명운동은 나름의 계몽기획이자 냉전적 국민을 빚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결과는 항미원조운동으로의 전환에 다름 아니었다.

 

임우경[각주:3]의 글은 국민의 번신(翻身), 즉 중국인의 정체성이 항일에서 번드쳐지는 과정을 한국전쟁기 중국의 반미대중운동관련 잡지(신중국부녀, 현대부녀), 사진, 만화 등을 매개로 살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중국인의 대미인식은 크게 친미, 숭미, 공미 등이었는데, 중공 지도부는 이러한 대중의 대미우호적 정서를 적시, 천시, 멸시의 삼시(三視)’, 즉 반미로 갈음하고자 하였다. 항일의 기억을 자양으로 하는 반미이데올로기는 일단 구축됐으나, 한편으로 그러한 논조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목소리는 억압돼야만 했다. 논리생산을 주도한 자는 누군지, 어떠한 의도로 그리하였는지 등이 더욱 자세히 분석돼야 할 것이다. 억압된 목소리의 복원문제가 의문으로 떠올랐다.

 

허지시엔(何吉賢)[각주:4]의 글은 잡지 중국청년과 신문자료 등을 자료적 근거로 삼아 관주도의 신애국주의(운동)론 안에서 청년담론의 면모를 파악한 담론분석이다. 195010월에 이르러서 신애국주의운동은 고조됐는데, 그 내용은 주로 이 운동의 새로움을 강조하고 역사와 민족에 관한 지()를 새로 정립하며 애국일상을 접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사회과학의 개념, 이를테면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에 관한 서구의 이론을 먼저 소개한 후, 그것들은 중국의 경험과 분명 차별되는 것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정작 저자가 언급한 중국의 특성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고 역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 글은 중국의 역사적 경험이 갖는 특별함과 이에 조응하여 선전이데올로기를 정치하게만들어낸 중국인(혁명가)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허하오(何浩)[각주:5]의 글은 마헝창 소조(馬恒昌 小組)를 매개로 신중국적 노동국민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일단에 주목했다. 저자는 기존의 계급론(또는 서구 이론)으로는 모범 노동자마헝창 소조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글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글은 마헝창과 마헝창 소조를 역사적으로 자세히 분석하기보다, 신중국의 역사적 현실을 서구의 이론으로 담아낼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그것을 중국의 특징(개선된 전통윤리나 심적 질서따위)으로 다시 풀어내는데 치중했다. 그 결과 역사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단순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저자의 의도과는 달리, 증명하기 힘든 주장을 접맥하여 결국에는 단순한 방식으로 묘사하느니만 못한 이도저도 아닌 글이 탄생했다.

 

최일[각주:6]의 글은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역사적 집합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종족 집단(ethnic group)에서 국민(nation)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살폈고, 그들의 한국전쟁서사 시기별로 분석했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조선인의 유입과 활동 양상은 다양한 편이나, 대개 얼구이즈(二鬼子)와 만주국 국민의 처지를 경험했고 동시에 어떤 이들은 항일무장투쟁을 거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빚어나갔다. 그러나 국적과 관련하여 이들은 선택을 내려야 했고, 이는 한국전쟁과 맞물려 전개됐다. 결국 전쟁을 통해 조선족형성의 (잠정적인)마지막 단계가 완성된 것이다. 한편 조선족문학의 경우, 한국전쟁에 관한 주류적 영웅주의·계급투쟁담론을 뛰어넘기까지 30여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란스치(藍適齊)[각주:7]의 글은 한국전쟁이 대만의 역사적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정작 양자 간의 연관성을 다룬 연구가 적었다고 언급한 후, 대만의 한국전쟁 기억이 찾을 곳이 없는지경에 이르렀다는 문제의식에 나름대로 답한다. 이 글은 중앙일보등 신문과 회고록을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한국전쟁기와 그 직후, 국민당 정부는 대만이 한국과 순치관계라 주장하고, 대만으로 귀국한 의사(義士)’를 찬양하는 등 스스로를 높이고 중공을 격하시키는 이중 전략을 취했다. 그 핵심인 반공이데올로기는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양국 사이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무엇보다 반공이데올로기의 필요성과 효과가 약화되면서 그 상징이나 다름없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공식기억에서 사그라졌다.

 

로윙상(羅永生)[각주:8]의 글은 한국전쟁 전후 홍콩의 복잡한 문화정치에 대한 기존의 냉전적시각을 비틀어 냉전사유라는 인식론적 전제(또는 지식의 존재구속성) 자체를 비판하는 단초를 마련하려고 했다. 저자는 우선 당시 영국 당국의 전통적인 비정치화식민 전략이라는 맥락을 설명했고, 시종일관 이를 강조했다. 나아가 저자는 미국이 공보처(USIS)를 통해 홍콩과 중국인을 겨냥한 ()선전(匪情硏究)전을 수행했다고 서술했다. 더하여 한국전쟁 이후에도, ·중은 홍콩에서 문화냉전을 계획하고 실천했으나, ·미간의 동상이몽 및 미소대립과 국공내전 사이의 괴리는 미·중 또는 ·어느 한편도 사상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홍콩을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판왕밍(潘婉明)[각주:9]과 천띵후이(陳丁輝)[각주:10]의 글은 말라야 공산당과 영국 식민당국 간의 상호작용을 한국전쟁을 매개로 하여 살폈다. 공저자는 먼저 영국의 토사구팽 정책과 이에 항거한 ‘620전쟁’, ‘신촌(新村)계획(Briggs Plan)'이 낳은 신촌이라는 특수한 지리 공간 또는 생활 형태의 연원을 설명했다. 신촌계획의 실행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호황에 적극 기인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말라야 공산당은 반제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섰으나, 이후 당의 맹목성과 민족 간 분열,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영국의 전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타이와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유격투쟁을 전개하다가 1989년 자진해산했다.

 

김학재[각주:11]의 글은 한국전쟁의 시종을 살피되 중국이라는 요소에 집중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중국의 개입이 가지는 거대한 함의, 즉 과잉정치의 전쟁이 탈정치적 평화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에 주목했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의 일부를 축약한 것으로 자료적 근거는 첸 지안(Chen Jian), , 스툭 같은 역사가의 저서와 당대 생산된 미국 보고서, 회고록 등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정전체제의 기본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문서는 19501212일에 나온 NSC 95이다. 저자에 따르면, 같은 문서는 정전의 군사적 측면만을 강조했고, 한국문제로 의제를 국한하는 특징을 보이며, 이는 장차 전개될 대()공산권 협상에서 미측이 고수한 일관된 경향이었다. 이어서 저자는 징벌적이고 제한적인 조항의 부재를 골자로 하는 미국 자유주의 평화조약(기획)의 무책임성과 비일관성을 비판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미국(유엔)의 아시아 정책에 지진 같은 충격파를 주었고, 결국 중국 불인정, 한국의 군사정전, 일본과의 자유주의 평화협약이라는 차별적인 레짐(regime)과 그 후과가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1. 북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이다. [본문으로]
  2. 북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3.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이다. [본문으로]
  4. 청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5. 북경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부연구원이다. [본문으로]
  6. 연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학원 부교수이다. [본문으로]
  7.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대만 중정(中正)대학 교수이다. [본문으로]
  8. 시드니 테크놀로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홍콩 영남대학 문화연구과 부교수이다. [본문으로]
  9. 대만 기남국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싱가포르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다. [본문으로]
  10. 호주 머독(Murdoch)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싱가포르 손중산남양기념관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11.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베를린자유대학 글로벌 히스토리 프로젝트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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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8:59

이임하는 1965년생으로, 덕성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찍이 한국전쟁 연구의 주변부에 있던 전쟁미망인의 존재에 주목했고, 1950년대 여성의 삶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2012년 현재 방통대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에서의 현대적 몸/삶과 미국의 역할을 연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군과 유엔군은 사상전 또는 심리전(PSYWAR)이라는 전쟁수행의 한 양식을 체계화했고, 그 가운데 실로 많은 수의 종잇장(전단)이 아군과 적군을 불문하며 전장에 뿌려졌다. 한국전쟁기에 무려 40억 장이 살포됐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한 삐라는 생산주체의 의도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다양한 언어의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대개 아와 피아를 분명히 나눈 위에 왜곡과 꾸밈, 회유와 설득, 위압과 겁박 등 온갖 논조로 피아(또는 아)를 무력화하려는 것이었다.

 

적을 삐라로 묻어라(이하 저서’)는 주로 한국전쟁기에 한반도에 뿌려진, 근대전(총력전-병참학-심리전)의 산물인 다양 다종의 삐라를 주된 자료적 근거로 삼은 역사서이자 자료집으로 볼 수 있다. 저서는 1장에서 삐라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 즉 심리전의 정착이라는 맥락을 소개했다. 더하여 심리전 수행의 척추라고 할 수 있는 지휘계통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2장에서는 극동군 심리전부(FEC PWS), 8군 심리전과(8A PWD), 국방부 정훈국이 주도한 심리전 매체의 제작, 살포, 종류 등을 서술했고, 1장과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3장에서는 삐라 자체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으나, 면밀하다기보다는 단순히 삐라 내용에 관한 부연이나 선언적 언급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4장에서는 휴전 이후에도 지속된 심리전의 흔적을 5, 60년대 남한 교과서 속에서 들춰냈고, 5장에서는 현대 한국사회가 지향했던 미국적 가치한국사회의 윤리의 징후를 한국전쟁기 미국의 심리전과 그 산물인 삐라에서 포착할 수 있다는 도발적인 결론을 내렸다.

 

책의 내용을 설명하기에 앞서, 저자가 검토한 자료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저자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듯, 이 저서는 공간된 미국자료를 많이 살핀 것은 분명하다. 미국 국립기록관리청(NARA)에 있는 미육군 부관감실 문서군(RG407)은 한국전쟁기 심리전의 수행주체였던 극동군사령부와 8군사령부의 제()보고서를 모아둔 것이다. 극동군사령부 심리전부 및 미육군극동부의 월별보고서, 8군사령부의 작전처 활동보고서 및 심리전 보고서, 정용욱이 세권으로 펴낸 6·25전쟁기 미군 심리전 관련 자료집에 실린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소(ORO) 생산자료 등이 책의 핵심적 자료이고, 특히 삐라의 경우 저자는 RG407뿐만 아니라 미태평양군 문서군(RG550), 미육군 참모부 문서군(RG319), 미육군태평양군 문서군(RG495), 참전용사 문서군(RG15), 맥아더문서고(MacArthur Library Archive), 미육군 역사연구소와 교육센터에 있는 자료를 이용했으며, 그 외에도 방선주나 국군이 펴낸 자료들도 참고했다. 한편 밀물과 썰물의 저자이기도 한 군사관 모스맨[각주:1]이 쓴 제3지대의 공식역사나 작전연구소 연구원이었던 페티[각주:2]가 써낸 자료가 쓰인 점도 흥미로웠다.

 

저자는 1장에서 심리전 수행기구가 자리를 잡고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전통적인 군사작전과 다른심리전이 정착 이래 최근까지 수행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먼저 나치의 선전전과 미군의 심리전을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치가 자국민을 동원하기 위하여 사상전을 주로 수행한 반면 미국은 실재하거나 만들어진 을 대상으로 심리전을 수행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심리전은 미국 국내, 나아가 세계로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갔다. 심리전은 공간적 확장과 더불어, “표면적인 적대 행위가 종식된 뒤에도 계속수행된다는 원칙에 따라 시간적으로도 존재의 이유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1장에서 한국전쟁기 활동한 심리전 수행기구의 전사(前史) 및 계통, 삐라전략의 기본정책 등을 파악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선전기구는 구성이 복잡한 편으로, 아직까지 심리전은 각 방면군의 재량이었다. 그러나 1947, 국가안보회의(NSC)와 더불어 중앙정보부(CIA)가 창설되면서 미국의 정보기관이 군을 중심으로 일원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더하여 국방부는 산하에 국가안보국(NSA)이나 방위정보국(DIA) 등을 두었고, 이러한 기관들은 장차 민간의 기업이나 대학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을 터였다. 이후 미국의 심리전은 50년대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국방부/국무부NSCJSCFEC(UNC)8A(ROK MND)의 지휘계통을 따라 수행됐다. 한편 계통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에서 심리전을 수행하는 미8군사령부의 자율성이 컸으며 상위기구의 정책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당시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소(ORO) 보고서에도 잘 드러나 있다.

 

앞서 1장에서 삐라의 역사적, 구조적 맥락을 살폈다면, 2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삐라의 탄생을 살핀다. 한국전쟁기 뿌려진 삐라의 모든 내용은 원칙적으로 극동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한 전제 아래 극동군의 경우엔 제1라디오방송 삐라단(1st RB&L) 작전처(S-3)에서, 8군의 경우엔 육본의 협조를 받아 심리전과에서 삐라를 제작하고 살포했다. 하지만 1951년 들어 본격적으로 삐라가 뿌려지기 전까지 심리전 수행은 혼란과 착오의 연속이었다. 저자는 전쟁 초기 미군이 삐라전 수행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기울인 노력, 즉 포로 심문과 이른바 과학적조사를 보여주며, 그 과정에서 나온 무리한 추정과 과장, 비체계성 등을 짤막하게 언급했다. 이어서는 생산기관에 따른 삐라와 그 대상을 분류했고, 종류도 시기별/유형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3장부터 5장까지는 무수히 많은 삐라가 등장하며, 특히 4장에서는 전쟁 통의 전시독본에서부터 60년대 초의 도덕까지 5, 60년대 교과서 속에 나타난 한국전쟁의 재현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를 교실로 간 삐라의 논리라고 통칭했고, 결국 이 논리가 이후 한국의 냉전주체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라고까지 주장했다. 3장과 5장 또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종국에 냉전비판과 문명비판으로까지 이어지는 저자의 과도한 주장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책 전체에서 주장되는 바, 즉 삐라의 논리가 미국적 가치이자 현대 한국사회의 윤리로 전화됐다는 것은 그 타당성을 면밀히 따져볼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섣불리 결론내리기에 앞서 한국 사회의 속살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아직 저자는 삐라와 교과서를 읽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제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대중에 관한 저자의 자세에서 그 이유를 읽어낼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책의 두께와 다양한 삐라의 모습이 보여준 첫 인상과 달리, 이 책은 정작 삐라와 심리전을 자세히 분석했다기보다 전반적으로 심리전 수행주체들, 즉 미국인(또는 한국인이나 남성)과 그들이 삐라에 담은 세계상을 비판하는데 급급했던 것이다. 필자는 2010년 미군 부대 게시판에 버젓이 붙어있던 심리전 요원(agent) 모집전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래토록 한반도에서 기생한 미국의 심리전을 자세히 알기 위해선 이 책만으로는 공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1. 당시 Billy C. Mossman이 속해있던 제3지대의 주요 활동은 정용욱, 「전선의 역사가들 - 6·25전쟁기 미 육군 군사지대의 한국전사 편찬 활동」, 『軍史』 89, 2013, 248쪽에 나와 있음. [본문으로]
  2. George S. Pettee(1904~1989). The New York Times 1989년 11월 29일자에 다음과 같이 그의 부고가 실려 있다. 페티는 1989년 11월 27일, 메릴랜드(Maryland)의 한 양로원에서 파킨슨병으로 85세에 타계했다. 국가안보와 관련하여 광범하게 집필한 작가이자 분석가, 교육자였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 작전연구소(ORO)에서 20년간 근무했고, 1969년 부소장의 직위에서 내려왔다. 1931년 하바드대학(Harvard)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모교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했다. 그가 1946년에 쓴 <미국 비밀정보의 미래>는 CIA의 조기창설을 주도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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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6:34

저자 스티븐 휫필드는 툴레인대학(Tulane University)에서 학사를, 예일대학에서 석사를, 브랜다이스대학(Brandeis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브랜다이스대학에서 막스 라이터(Max Richter) 미국문명 석좌 교수직을 맡고 있고, 20세기 미국의 정치사와 문화사를 강의한다. 20세기 미국의 정치학 및 관념 간 교호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이스라엘, 벨기에, 독일 등지에 교환교수로 갔다. 그곳에서 주로 미국계 유대인의 역사를 강의했고, 그 주제와 관련된 상을 포함하여 다양한 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각주:1]

 

이 책의 초판은 1991년에, 2판은 1996년에 출간됐다. 이 글은 2판을 읽고 작성한 것이다. 저서는 시간적으로는 1950년대의 언저리를, 내용적으로는 미국의 사회적, 문화적 풍경에 끼친 냉전의 영향력과 그 모습을 그렸다. 앞서 살펴본 권헌익의 책이 인류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단일한 냉전개념의 오류와 냉전의 지역적(주변부적) 발현을 밝혔다면, 이 책은 중심부인 미국사회 내에서 작동한 냉전의 모습을 지적해냈다고 볼 수 있다.[각주:2] 저자는 “(2-평자 주)적색공포”, 비미활동위원회(HUAC), 매카시(), 상공회의소, “수정헌법등을 주요 설명어구로 삼아 9장에 걸쳐 당시의 미국 사회와 문화를 소묘했다.[각주:3]

 

역사가로서 저자는 “1950년대의 적색공포오늘날 더욱 완벽히 밝혀진 민주주의의 힘사이에서 균형을 지켜야 함을 역설했다. 후쿠야마의 현재인식이 과거 미국의 사회와 문화에 억압적으로 작용한 냉전과 그 시대에 대한 관찰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일반적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시민적 자유가 침해를 받았던미국의 1950년대를 살폈다. 결과적으로 당시 미국 내에서 625전쟁이나 헝가리혁명(1956) 같이 대량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많은 수의 사람이 의혹의 대상이 됐고, “문화적 표현은 좌절되거나 왜곡됐으며, 미국공산당과 좌익대중문화는 세를 잃었고, 이후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소비 지향적문화는 반공담론을 대체했다. 또한 당시 냉전은 시민적 자유를 규제하고 침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문화가 정치(반공주의)에 예속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됐다고 저자는 서술했다.

 

 

저서는 총 9장으로 구성돼있고, 책 전반에 걸쳐 각주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책 말미에 참고문헌과 해제를 달고 있어 독자는 이를 이용할 수 있다. 저자가 당시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을 조사한 결과물인 미연방수사국 문서철이나 비망록 등을 이용한 점은 흥미롭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2차 문헌 및 사료를 토대로, 1950년대 언저리의 미국을 대표하는 다양한 인명, 단체, 사건, 대중문화(영화, 서적 등)을 자세하게 서술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많은 사건사례들이 주제별로 묶여 연대기적으로 배열됐고, 냉전기 미국문화를 치밀하게 분석하기보다는 묘사하는데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미국의 문화사회적 풍경을 잘 드러냈으나, 각 사건의 중요한 契機動因에 관한 서술은 소략한 편이다. 오히려 이는 효과적인 전략으로 보이는데, 담담히 풍경을 그려내고 그것의 근거가 되는 인물의 행위나 작품을 분석하여 과잉결정의 오류를 피했다고 여겨진다. 한편 625전쟁은 냉전의 산물이자 직접적인 열전으로 비화된 거대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직접적으로 그것을 다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1950년대 미국의 국내사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이 책은 읽기 용이치 않지만 좋은 입문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문화를 정치화하기)에서 저자는 당시 미국국내의 냉전이 문화를 어떻게 규제했는지 드러낸다. 당시 조사는 예술작품의 내용이 아닌, 작가의 정치적 성향에 의거하여 이뤄졌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입법부는 예술가의 신념을 심문했고, 대학가에서는 선생을 정치적 기준으로 평가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미국의 체계적이지 않은 정치적 시험이 결국 자유를 질식시키고 문화 자체를 타락시켰다고 비판했다. 악마화하는 행위는 당시 미국인들을 인 공산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이 만들었고, 그 귀결은 전체주의의 복제나 다름없었다.

2(빨갱이 바라보기)3(찬성하기)은 공산주의를 낙인찍는 것과 미국주의를 표현하는 것양자를 다룬 장이다. 당시 미국의 이데올로그들은 물질주의(유물론)”에 맞서 미국적 관념론을 주창했고, 그 결과 위생처리 된교과서나 현상유지와 동의어인 민주주의관념이 나타났다. 전문 역사가나 학자들도 이에 가담했고, 이러한 현상은 점차 증가하는 자본주의적 물신으로 대표됐다. 바비 인형을 들어 냉전기 미국의 소비문화를 포착한 점은 흥미롭다.

4(기도하기)은 당시의 이념적, 종교적 풍경을 다루었다. 저자는 냉전기 미국에서 구원(사업)”은 거대한 수요를 창출했다고 지적했다. “적색 공포는 신앙으로 해소될 터였고, 따라서 빌리 그레이엄 같은 목회자가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 함의를 비치기도 했는데, 저자는 이를 다소 모순적으로 바라본다. 기독교세력은 악마공산주의자나 다름없고, 해결책은 내적변화, 즉 영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러나 대만의 國府軍을 중국 본토에 사용하게 준비시키는 것은 영적인 임무가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했다.

5(알려주기)은 당시 만연했던 내부고발자 또는 정보제공자의 고발을 다루었다. 특히 비미활동위원회는 고발과 시민권을 맞교환함으로써 당시 독특한 문화를 창출했다. 그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고발자(유다)가 가지는 전통적 위치마저 파괴한 것이었다.

6(영화 찍기)은 냉전기 미국의 영화산업을 다룬다. 파시즘에 맞서 전쟁을 치른 소련을 옹호했던 헐리우드 영화들은 이제 의혹의 눈길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7(둘러싸기)은 당시 새로 대두한 TV와 연관된 배제를 다루었다. 일찍이 1953년에 전 미국인 가족의 절반이 TV를 보유하게 됐고, 사람들이 여태껏 정보를 얻던 영화관, 라디오, 잡지 등은 그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TV는 모든 걸 보도하지 않았고, 냉전의 정치학은 TV를 결코 빗겨가지 않았다. 독립 언론인 스톤의 사례나 덜레스 형제의 TV 통제 사례, 중국의 언론인 교환 제안 등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8(반대하기)은 킨제이 보고서와 같이 당시 지배적인 미국적 삶관념과 어긋나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례들을, 9(해동하기)은 냉전문화의 해체를 서술했다. 하지만 저자는 지난날의 단절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며, 1950년대 미국의 특수한 정치문화적 맥락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고 파악했다.

  1. 브랜다이스대학의 웹페이지 참고. 미국의 한 강의평가사이트(www.ratemyprofessors.com)에서 저자의 강의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5점 만점에 4.8점, 난이도는 2.2점이었다. (검색일: 2013년 5월 24일) [본문으로]
  2. Heonik Kwon, The Other Cold War, West Sussex: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 [본문으로]
  3. 저서 239쪽에서 저자는 향후 냉전연구가 지구적(globally)뿐만 아니라 지역적(locally)으로도 실시돼야함을 강조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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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6:32

데이비드 콩드(David W. Conde)1906년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태어났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긴 후 193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2차 대전 중 미군 심리 작전군 소속으로 대일 선전전에 종사했고, 종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 정보교육부 영상과장직을 수행했다. 1946년 사임 후 로이터 특파원으로 일하던 중 1947년 무허가 체류를 이유로 맥아더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후 1964년 도쿄로 돌아와 다양한 미국의 정기간행물에 기고했고, 서적은 주로 일본어로 집필하여 출간했다. 주로 일본과 미국의 국내외 정책에 관해 매우 비판적인 관점에서 서술했고, 중국, 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에 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쓴 수고와 인쇄물들을 1964년부터 10여 년간 몇 차례에 걸쳐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 기증했다.[각주:1]

 

이 책은 1967년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것으로, 3부작 현대조선사(An Untold History of Modern Korea)2부이며, 1부와 3부보다 먼저 일역되어 나왔다. 시기적으로 6·25전쟁 발발 직전부터 휴전협상과 1954년 제네바 회담까지를 다루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민간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료들이 이전에 비해 뚜렷하게 증가했다. 저자는 그러한 배경에서 회고록·청문회록·신문(AP, UP, Calender의 뉴스 등북한이 노획한 경무대 문서(Facts Tell, 1960) 등을 자료적 근거로 삼아 6·25전쟁의 이면과 미국의 국내외정치 간의 상관관계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콩드의 문제제기는 1952년 스톤(I.F. Stone)한국전쟁 비사만큼 예리하지 않고, 자료 이용이라는 측면에서도 미육군군사감실의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정병준에 따르면 이 책은 북한의 논리와 자료에 따라 구성됐고, “중국 변수에 대한 해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내용이 설득력이부족하다. 그의 논평은 콩드가 지녔던 문제의식의 과잉이 자신의 분석을 무디게 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스톤의 책이 나오자마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고, 6·25전쟁이 일단락된 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후반에 나왔다. 당시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확전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전 미국을 공분에 휩싸이게 했던 미라이학살(1968)이 보도(1969)되기까지도 2년여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무수한 인명을 앗아간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저자는 그 중심에 미국의 음모와 개입, 만들기의 정치경제학이 있을 것이라고 상정했다. 저자에게 17도선으로 표상되는 베트남전은 38도선으로 표상되는 6·25전쟁과 큰 차이가 없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의 표현을 빌자면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나타난 것이었다. 저자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 안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역사적 선행사건이자 비극이었던 6·25전쟁을 조망했다.

 

저자는 책의 전반부에서 미국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질문하며 상황이 6·25전쟁으로 치달았음을 그려냈다. 미국의 중국전략은 미국정치권 내에 무거워지는 반공의 공기 속에서 일본의 경제적 부흥과 아시아에서의 보루설치, 군사원조 등으로 현실화됐고, 이는 이승만과 장개석의 이해에도 부합했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미국의 의도는 평화적 통일에 대한 최고의 가능성을 선보인 북한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상반됐고, 6월 하순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 미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에서 저자는 개전의 책임을 자유세계에 돌리고 있다.

 

6·25전쟁은 처음부터 기묘한 전쟁이자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저자는 3장에서 스톤을 인용하며, 19506월에 벌어진 미국의 정보의 실패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저자는 북한에 침략자라는 딱지를 붙인 미국의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 미국의 정세, 한반도의 상황, 국제적 역학관계 등 여러 요소들을 설명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정치한 분석이라기보다 미국을 매도(293, 357)하고 공산측에 우호적인 시각을 견지하는데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저자가 겨냥하는 비판의 초점이 이미 특정한 방향을 타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자료이용은 편향되고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무대 노획문서에 드러난 남측의 북침의도는 그것의 실현여부를 떠나 이미 실현된 사건의 증거로서 기능했고, “평화를 갈망하는공산측 전쟁을 지속하려는유엔측이라는 이분법 또한 책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똑같은 잣대를 왜 한쪽에만 들이댄 것일까?

 

저자의 주된 집필 의도는 미국 비판, 특히 아시아에서 벌이는 전쟁을 통해 드러난 미국의 추악함과 도덕성의 타락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약한 무기 생산 및 기술의 발달은 원자폭탄을 필두로 하여 네이팜, 세균무기 등 가공할만한 비대칭무기들을 미국에게 제공했다. 저자가 책을 쓰고 있을 당시 베트남에서는 고엽제 살포가 보도되는 상황이었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책에서 이러한 부분에 지면을 할애했다. 또한 6·25전쟁이라는 비극의 소식은 엄격한 전시검열체계 속에서 몇 번이나 굴절됐고, “국제적인 사기극의 공범자인 미국은 정보왜곡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구성하고 선전(412)했다.

 

6·25 전쟁을 동시대인의 눈으로 바라본 스톤과 비교할 경우 콩드는 전쟁이라는 사건을 역사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공식 보고서와 현실과의 괴리를 포착한 점은 언론인의 책무이자 스톤의 영향력이었다. 그러나 문제의식의 과잉은 저자의 분석을 무디게 했고, 곳곳에서 낭만적인 서술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롭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13장에서 북한 주민과 남한 국민 사이에는 어떤 적의도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한국인이 진정한 동포였다는 서술이나 50년대 후반 남한 대학생의 징병기피가 조국의 군사화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저자는 한국인이 처한 궁핍과 비참을 안타깝게 보고, 전쟁 이후 폐허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주체로 그려내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의 眞相을 반영했다기보다, 미국의 개입을 부각시키고 비난하기 위한 일련의 장치로 여겨지기 쉽다.

 

저자는 1951년 후반부에 가서 6·25 전쟁은 이미 나토와 일본의 군사화를 촉진했다고 보고, 전쟁과 미국 경제 간의 연관성(272), 일본의 부흥과 반공블록 형성(442)을 짚었다. 또한 전쟁의 향배를 가늠할 1952년 대통령 선거가 한국과 미국에서 진행됐는데 이에 주목한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저자의 분석은 사건을 역사화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저서 전반에 걸친 수치 제시와 인용은 저자의 성실함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 행위자의 역할이 다소 수동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생각된다.

  1. 저자 및 저서에 관한 정보는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9, 37~38쪽과 구글에서 ‘David W Conde'로 검색한 후,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PDF 형태로 제공하는 An Inventory of His Papers in The Library of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Special Collection Division을 참고했다. 후자의 주소는 http://www.library.ubc.ca/spcoll/AZ/PDF/C/Conde_David_W.pdf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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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5.04.02 12:30 [ ADDR : EDIT/ DEL : REPLY ]
    • 독서량이 굉장히 풍부하셨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이 알려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2015.04.02 18:26 신고 [ ADDR : EDIT/ DEL ]

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6:30

秘史 한국전쟁의 저자인 스톤은 미국의 언론인으로, 본명은 이시도르 파인스타인(Isidor Feinstein)이다.[각주:1] 1907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30년대 파시즘에 맞서 조직된 인민전선(Popular Front)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으나,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이후 편집인으로 있던 네이션(The Nation)지에서 스탈린을 맹렬히 비난했다. 뉴욕의 좌익계 일간지인 피엠(PM)의 해외특파원으로 근동을 방문해 이산 유태인들을 취재하기도 한 그는 1950년대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정치색 때문이었다. 이후 독립신문인 주간스톤(I.F. Stone's Weekely)을 창간했고, 지면을 통해 매카시즘과 미국 내 인종차별을 강하게 비판했다. 1964년 그는 기존에 공간된 자료들을 세밀하게 독해하여 통킹만 사건의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1971년 협심증으로 인해 신문발간을 중단했고, 1989년 보스턴에서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종류의 상을 받았다. “모든 정부는 거짓말쟁이에 의해 돌아가고,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믿어서는 안 된다는 스톤의 언급을 통해, 저자가 지녔던 삶의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각주:2]

 

이 책은 6·25전쟁 중인 1952년에 출간된 책으로, 저자가 19508월부터 1951년 중순까지 파리특파원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 주로 집필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전쟁 발발부터 1952년 초까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극동군사령부가 발표하는 공보와 비록 검열을 거친 것이지만 한국특파원들이 보낸 기사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했고, 일관되지 못한 공보 및 신문의 행간과 이면을 읽어냈다. 저자는 미국의 공식적 견해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반박하고 설득하기 위해책을 집필했고, 따라서 이 책의 주된 자료적 근거는 오로지 미 정부와 UN의 자료, ·영의 권위 있는 신문정보원이다. 이후 이 책은 남침유도론의 효시가 되었고, 6·25전쟁연구사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저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각주:3]

 

우선 이 책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질문과 가설적인 주장을 들 수 있다. 이는 저자가 논의를 풀어나갈 때 의지하는 주된 표현방식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을 통틀어 전쟁의 각 시기별로 의문시할 수 있는 사항을 가차 없이 물어본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화 방식은 전장을 직접 관찰할 수 없고, 고위 정책결정자들의 의중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자료를 입수할 수 없었던 저자는 공보와 신문기사 사이의 차이를 전유한다. 그것은 정황 증거와 저자의 상상력 및 정치적 태도의 혼합으로 구성돼 이 책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물적 근거에 기초한 뚜렷하고 확고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급이 낮은 가설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의 가설은 주로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국가의 恥部를 효과적으로 들쑤신다. 저자에게 6·25전쟁이 기습이라는 미국의 주장은 가당치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극동군사령부가 고의로 정보를 무시했거나 연착시켰기 때문이라는 것(2)이다. 저자의 시각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고, 신문지면에 나타난 다양한 국가의 반응과 행동을 6·25전쟁의 틀에 집어넣어 관찰했다(6). 저자는 전쟁을 지속시킨 트루먼과 맥아더(12), 덜레스로 대표되는 반공적이고 망상적인 아시아우선주의자”(5), 미국의 개입을 바라는 아시아 국가의 지도자들(11)에게 공격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저자에게 그들 모두는 6·25전쟁의 건축가이자 동시에 평화를 반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은 스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을 것이었고, 바로 그 지점이 저자의 노림수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아르카나 임페리[각주:4]를 겨냥한 질문은 대개 가설의 형태(31)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저자의 추론적이고 고발적인 방식은 양날의 검과 같은 것으로, 그 한계 또한 분명하다. 저자는 가설과 추정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고, 문제 제기 그 이후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 책이 1950년대 미국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졌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이 책에서 드물지만 분명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47)이나 미국과 그 동맹국을 바라보는 과도한 음모론적 시각(28),[각주:5] 공산측을 비롯하여 미국을 제외한 행위자들의 역할과 입장을 상대적으로 축소·왜곡시킨 점(14, 34, 35), 정작 한국인은 잘 보이지 않는 서술 등은 주의 깊은 독해를 요구한다.

 

이 책은 일급의 언론인인 저자가 분명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썼고,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후 6·25전쟁연구사에서도 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동시에 이 책이 근거부족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의 여러 세부논점들을 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것은 미국의 군비산업 가동과 봉쇄의 확장(7), 미국 국내의 정황(9),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의 갈등(13), “제한전의 논리(15, 33, 42), 전후 일본의 복구와 미일관계, 휴전협상에서의 논점, 협상의 결렬과 속개, 전시 검열(40), 중국 로비스트들, 종군기자들, 민간인 학살, 냉전의 기원(28) 등으로 6·25전쟁의 공식서술이 담아내지 못한 측면을 독자에게 환기시킨다.

 

김일성을 현대판 카드모스에 비유하여 미국의 과장된 추정을 비판(31)하고, 밴플리트의 애도를 둑에 구멍을 뚫으면서 돌아다녔을 네덜란드 소년으로 전유(42)하며, 맥아더의 이야기를 불교 연대기같다고 설명(35)하는 등 이 책은 고도의 은유와 풍자를 담아냈다. 하지만 저서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시대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있다.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이 적은 상태에서 작가는 어떻게 역사서술에 착수해야 하는가. 저자의 사례는 우선 문제의식과 사료의 면밀한 독해가 결합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저자도 처음에 정부 공식보도를 믿었지만, 곧 그것과 민간서술 간의 괴리를 발견했고 그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갔다. 또한 이러한 구도는 공식서사와 민간서사의 대결로도 파악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 구도가 2013년 현재에도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본다. 1951822일로 추정된 폭격은 그 다음날 휴전협상을 결렬시켰다. 저자는 서류 공개의 요구에 침묵하는 리지웨이의 태도를 문제 삼았고, “조작이었다면 왜 조사를 하지 않고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을까? (중략)왜 그렇게 빨리 공식발표에 넘겼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59년 후 비극적인 천안함 사건이 벌어졌고, 그것은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기 전 2010년 지방선거에 앞서 그렇게 빨리 공식발표됐다. 스톤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우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는 천릿길과 같은 역사서술에 내딛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 것이다.

  1. 이 책의 원본은 I. F. Stone,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 또한 이 책의 1988년 판본에는 브루스 커밍스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본문으로]
  2. 위키피디아와 Mickey Z(본명 Michael Zezima)라는 미국인 작가, 편집자가 Monthly Review 인터넷 판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였다. http://mrzine.monthlyreview.org/2005/mickeyz181205.html [본문으로]
  3.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9, 37쪽. [본문으로]
  4. Arcana Imperii(State secrets, “국가의 비밀”이라는 뜻의 라틴어). [본문으로]
  5. 이완범, 「한국전쟁연구의 국내적 동향 - 그 연구사적 검토 -」, 『한국전쟁과 남북한사회의 구조적 변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1, 23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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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5.04.02 10:55 [ ADDR : EDIT/ DEL : REPLY ]
    • 안녕하십니까! 아마 제게 원문 pdf가 있을 것 같습니다. 찾아봐야겠지만, 메일주소를 알려주신다면 원문 파일을 송부해 드리겠습니다 ^^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15.04.02 18:25 신고 [ ADDR : EDIT/ DEL ]

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6:26

저자는 이 책에서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지금까지 국내에서 발간된 한국전쟁 연구의 경향과 전망, 향후 과제에 대한 정리를 수행했다. 이 책은 외국의 한국전쟁사 서술에 대한 번역서, 자료집,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그 범위는 지난 30여 년간 국내에서 발간·번역·유통된 한국전쟁사 관련 연구 성과를 망라한 것으로 보인다. 개별 연구들을 출간시기와 주제별로 배치했고, 각각에 연구사적 의미와 비판적 해제를 달았다. 구성은 2장부터 7장까지 한국전쟁의 연구사 정리를 수행했고. 8장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역사진화위를 다루었다. 9장은 한국전쟁사 연구의 전망과 제언, 마지막 10장은 자유’, ‘평등’, ‘진보등의 가치를 주제로 학문 활동의 의의와 강령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광주항쟁 이후 30년을 종축으로 삼아 현실변화에 조응했던 한국전쟁 연구의 유위전변을 다뤘다는데 있다. 이는 전문영역 내부의 주장과 쟁점에 대한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학문 전체 차원과 사회 차원에서 한국전쟁 연구를 다뤄보려는 문제의식의 발로이자, 총체를 지향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336).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학문과 사회의 소통은 변증법적이기보다는 다소 일방적이었던 것 같다. ‘광주항쟁-구소련 붕괴-진보정부 등장이라는 큼직큼직한 외부적 변화에 한국전쟁 연구가 적극적으로 조응했던 반면, 후자는 전자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책에 반영된 저자의 의식적/무의식적 의도는 무엇일까?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함을 전제한 후,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저자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간의 연구를 정리하려 하였다. 서문에서 알 수 있듯, 저서는 저자의 한국전쟁 연구에 대한 중간결산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가 가졌던 지난날의 문제의식을 가늠한 후, “猛省과 전망을 통해 추후 수행할 연구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168). 둘째, 학문적인 차원에서 연구의 소재를 바꾸려고 하였다. 기존의 한국전쟁 연구는 대개 앞머리에, 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차례대로 정리한 史學史를 서술했다. 그러나 저자는 기존의 연구사 정리를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한국전쟁사를 소재로 삼아 학문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고찰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한국전쟁() 연구를 통한 저자의 지식사회학적, 또는 사회지성사적 접근이 담긴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셋째, 사회적인 차원에서 개입과 실천을 욕망했다. 저자는 사회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학문의 사회적 역할, 또는 지식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담론들을 그러모으려고 했는데(11), 이 책은 그러한 기획의 일환으로 나왔다. 나아가 저자는 학문과 사회의 소통을 촉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이성적 사회의 도래에 이바지하려 하였다.

 

필자는 저자의 핵심을 세 번째 의도라고 생각한다. 내용 전반에 걸쳐 있는 사회적 개입과 변화에 대한 저자의 욕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이념이라는 틀에 타인의 주장을 가두고 매도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가 꾸준히 언급하는 투쟁의 도구는 바로 理性이다(379). 물론 저자도 경험으로서의 역사’, 즉 전쟁체험의 상흔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이성의 보편성을 들이미는 것이 이성적일 수 있냐고 자문하며(112), 이성의 잣대를 무작정 들이대는 것에 대해 보류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104).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주장은 한국전쟁사 연구의 범주를 뛰어넘었고, 더욱 적나라해졌다. 저자에게 진보역사의 발전을 의미하며, “보편적 가치의 현실화였다(399). 하지만 “~() 한다처럼 강령조의 주장이 종종 눈에 띠는데, 이는 자칫 맹목적인 인상을 주기도 했다. 각각의 주장을 자세히 따져볼 일이나,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독자는 비판 가능한 하나의 이념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저자의 현실인식과 전망이 지나치게 긍정적인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저자는 구소련의 붕괴로 인한 냉전의 해체를 초들어 이성의 눈이 쓰일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고 했다(355). 그러나 냉전의 해체는 곧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현상적으로 완성되었고, ‘신자유주의적 기획이 금융을 매개로 전 지구를 장악했다는 것의 다른 말 아닌가? 학문은 그 사회가 처한 구조적 제약을 반영할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점이 저자가 강조하고 저항하려는 지점일 때, 정작 문제는 냉전의 해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이성의 횡행이 아닐까? 저자는 그 점을 명시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각주:1]

 

저자는 평시상황에서 벌어진 시민학살이 심대한 충격을 끼쳤으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식의 기준을 과거로부터 현재로 끌어내렸다고 서술했다(41). 광주항쟁은 이후 한국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연구, 나아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을 다시 태어나게한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서의 내용만으로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그 사건이 어떻게 사회와 인식의 변화를 불렀는지 설명하는데 부족한 느낌을 준다. 이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위치나 의의를 잘 모를 수 있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광주항쟁 위에 자신의 입론을 정초하기 위해서는, 광주항쟁 이후 일어난 현상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광주 이전의 광주는 없었는지, “현재의 실천적 요구는 왜 하필 광주항쟁 이후에 과거의 사태들을 다시 바라보게 했는지, 광주항쟁이 한국인에게 입힌 내상은 무엇이었는지, 왜 광주항쟁이 전후 민족문제 인식과 분출·전환의 결정적 계기였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좀 더 자세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전쟁의 학지를 정리하려는 저자는 1980년대 급진적 변혁사상의 유입과 수용, 학습, 극복과 관련하여 용어의 문제를 지적했다. ‘전통주의수정주의의 대별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언어 사용을 관행적 분류도식이라 규정했는데, 그것은 전후의 냉전질서, 또는 미소의 외교정책에 대한 시각을 말하는 것이지 한국전쟁과 직접 관련 있는 설명체계의 갈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호한 개념규정과 작위적 분류에 대한 지양과, 그러한 구분이 한국전쟁 연구에서 갖는 최소한의 필요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저자에 동의한다. 그러나 저자가 대신 제시한 보수주의”, “급진주의”, “비판주의등에 대해서도 같은 비판을 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일례로, 1980년대 한국의 급진적 변혁세력에게 필요했던 급진적 시각과 해석”(77), 저자가 급진주의라고 규정한 일련의 학지를 나름대로 전유했다는데서 의의를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급진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용어가 어떻게 전통주의나 수정주의보다 더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개념인지에 대해서 저자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1. 지주형,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책세상, 2011, 53-60쪽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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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5:35

저자 권헌익(權憲益, 51)은 권태학 전 대구은행장의 아들로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인류학자이다. 서울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 학·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구소련 시베리아 원주민 수렵사회 환경의 역사에 대한 현장연구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331세의 나이에 영국 맨체스터대학 교수로, 2009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런던정치경제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2007학살, 그 이후로 미국인류학회에서 주관하며 인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기어츠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고, 2009년에는 베트남전의 영혼으로 아시아연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조지카힌상의 첫 수상자가 되어 독보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베트남 2부작은 저자가 1996-98, 2001-02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한 베트남 현장조사를 토대로 집필한 것으로, '스파이' 혐의로 현지 경찰 조사까지 받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근래에는 베트남전쟁의 추모문화를 연구했고, 현재는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족적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2013-14년 서울대학에 초빙교수 신분으로 방문 중이다.[각주:1]

 

저자는 이 책에서 냉전담론을 초들어 검토하고, 냉전은 결코 단일한(The) 개념일 수 없음을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의 지배적인 냉전담론은 유럽중심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고, 이는 장기 평화라는 용어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겪어내고 살아낸 냉전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다. 더욱이 1989년 베를린 장벽으로 표상되는 공산권 붕괴 이후 학계에서 더욱 각광을 받게 된 냉전담론은 이제 역사를 제국주의시대-냉전시대-탈냉전시대로 나누고, 각 시기를 이질적인 영역으로 파악한다. 저자는 바로 그 지점을 문제 삼아, 저러한 정식이 서구 아닌 지역에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또한 냉전의 종언이라는 관념해 의문을 제기하고, 민족지학적 현장조사를 통해 냉전은 끝난 것이 아니라 각지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동시에 각 지역 나름의 방식대로 분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1(1-3)에서는 냉전의 종언이라는 관념이 오늘날 사회연구에 끼친 개념적 혼란을 검토한다. 이러한 혼란은 단일한 냉전개념을 상정하고, 그것으로 설명되기 힘든 사회상을 연구에서 제거하거나 또는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4-5)에서는 베트남과 한국에서 수행한 저자의 현장조사를 토대로 냉전의 정치학 및 이념이 지역적으로 분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죽음을 추모하는 양상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가족 구성원과 공동체 간에 스며든 역사적 냉전의 지역적 발현을 파악하며, 나아가 그 지역민들이 어떻게 썩어가는 냉전의 육신을 해소하는지 서술한다. 3(6-7)에서는 탈식민사와 냉전사의 접합 및 냉전문화의 다양성을 생각한다. 지역마다 제국주의질서와 탈식민 및 냉전질서가 연속·단절·교직되는 모습이 다른데, 단일한 냉전개념으로는 결코 이러한 모습을 포착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말미에서는 냉전담론이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경험에 주목함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독창적이고 진정한 정치의 싹을 전망한다

 

이 책은 일찍이 저자가 수행한 민족지학적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상식적인’ “냉전에 의문을 제기하는 試論의 성격을 지닌다. 본문의 분량은 160쪽이 채 되지 않지만, 저자는 이를 서술하기 위해 300권 이상의 2차 문헌을 참고하였다. 참고문헌의 방대함만으로 어떠한 논의가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다양한 주제의 독서를 통해 이론적 내실을 다졌고, 이는 저자의 학적 성실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주된 서술 전략이기도 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4천만 명이상의 사상자를 낳은 냉전의 역사와 문화장기평화또는 “1989년 이후와 같은 어떤 단일한 용법과 인상의 형태로 소비·통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단일한 냉전개념은 모순을 내재하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 사상자의 수에서 그러한 모순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저서는 아렌트의 경구를 인용하며 시작하는데, 이는 곧 내용에서 다루어질 이야기하기에 관한 하나의 암시로 여겨진다.[각주:2] 그것은 자칫 학적 엄밀성이 떨어지는 저차원의 방법론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곧바로 서론에서 불식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주변적 타자가 겪고 이야기하는 냉전에 주목해야 하는데, 이를 토대로 중심부가 구성하는 냉전사 이야기의 잘못된 획일성을 겨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각지의 이야기를 대조할 수 있는 비교연구법과 그 이야기를 직접 채록할 수 있는 사회학적 관점을 필요로 한다. 한편 이야기하기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다. 저자가 보기에 일부 논자를 제외하면 냉전의 역사를 온전히 이야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기존 냉전담론은 20세기의 역사를 제국주의시대-냉전시대-탈냉전시대로 정식화했고, 이는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르게 표출된 냉전의 양상과 시대간의 중첩을 생략·왜곡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략과 왜곡은 자연스레 지역적 현실과 담론 간의 괴리를 낳았고, 저자는 인류학적 조사 및 이야기하기를 통해 그 균열을 공략하는 것이다.

 

한편 필자에게 한국의 정치적 미래를 좀 더 잘 그려내기 위한 작업은 “6·25전쟁의 기원을 찾는 것과 불가분하다는 저자의 설명은 흥미로우며 동시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물론 이는 냉전의 종언이라는 관념이 그 기원과는 달리 단일한 개념으로 통용되는 현상을 비판하기 위한 예시로서 쓰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은 역사서술의 단위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바로 저자에게 한국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기의를 표상하느냐라는 것이다. 이는 일견 국가로 보인다. 그러나 내용에서 저자는 냉전의 영향이 지역공동체, 사회, 국가 등에 산란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그렇다면 저자는 추상적인의미의 한국이 아닌,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분명히 나타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역사학자에게 커다란 과제를 던진다. 저자는 결국 냉전의 지역적 다양성을 드러내는 한 가지 방법을 선보였다. 이는 인류학의 연구방법론을 바탕으로 하고, 사람들의 행위를 역사학에서의 사료로 삼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역사학자는 냉전사를 어떻게, 무엇에 근거해서 서술해야 하는가? 이 책은 다층위의 복합적 맥락 속에서 행위자의 역할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에 답변해야 한다.

  1. 『창비』 인터넷 사이트(http://www.changbi.com/author/content.asp?pAID=3285)와 「매일신문」 인터넷 사이트(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3967&yy=2009)의 2009년도 기사를 참고했다. [본문으로]
  2. “이야기하기는 진정 자신을 정의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은 채 의미를 드러내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한다.” 한나 아렌트, 홍원표 역,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인간사랑, 2010, 16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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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9. 28. 08:37

 이 책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학자의 연구 성과로, 중국의 6·25전쟁 개입의 배경과 준비 과정, 정책 결정 등을 다양한 사료에 기반 하여 그려낸 작품이다. 특히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 지도부의 대내외 정책 및 참전이 형성·결정·실행되는 과정을 자세히 추적하였다. 이 책의 초판은 아직 공산측 자료가 활발히 발굴·공개되기 전인 1991년에 나왔고, 그로부터 13년 후인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그러나 평자는 저자의 핵심 논지가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21) 개정판을 저본으로 삼은 번역판의 핵심 주장은 중국의 참전은 마오의 대미관(對美觀)의지”(또는 결의)의 결과’(367)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개정판에서 새로운 자료(주로 러시아 자료)를 추가했고 몇몇 부분을 수정했으며 연구 범위를 1940년대로 넓혔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1991년 초판의 논지에서 크게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각주:1] 이하에서는 저자에 대해 살펴본 후, 책의 구성과 핵심 요소들을 나름대로 뽑아 정리하겠다. 그러고 나서 6·25전쟁 연구와 관련하여 이 책에 관한 짤막한 논평을 시도하겠다.

 

 저자는 1957년 상하이 태생으로 중국 국적이나 1986년 종합연구개발기구(NIRA)에 객원연구원으로 방문한 이래 일본에서 공부하며 꾸준히 경력(“旅日華人”)을 쌓았다. 도일(渡日) 이전 화둥사범대학에서 일본문학으로 학사학위(1981), 상하이국제문제연구소(SIIS)에서 석사학위(1984)를 취득하였다. 이 책을 출간한 직후 가쿠슈인(学習院)대학에서 마오쩌둥의 조선전쟁으로 정치학 박사학위(1992)[각주:2]를 취득했으며, 일본 내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 생활을 거쳐 1996년 일본의 도요가쿠엔(東洋学園)대학 인문대 교수로 취임하였다. 중국의 정치·외교사, 현대사, 동아시아 국제관계 등이 주된 관심사이며, 저술 및 사회활동을 꾸준히 수행하였다. 2003~2012년 동안 일본화인교수협회 대표를 역임한 바 있으며, 대중매체에 출연하는 등 일본 내에서 기고와 토론으로도 알려져 있다. 20137월에는 회의 참석차 상하이를 방문했다가 정보 누설 혐의로 중국 당국으로부터 체포돼 구금됐으며, 이듬해 1월 석방돼 2월말 일본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중일관계의 발전을 자신의 숙명이자 사명으로 여기지만, 일본의 일각에서는 그를 중국의 대변인이라고 보기도 한다.[각주:3] 이러한 저자의 약력을 통해 그를 일본 내의 성실한 중국인 중국연구자정도로 평가할 수 있고, 션즈화(沈志華)보다는 중국 당국의 입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서론에 더하여 전체 11장으로 구성돼있다. 연구의 범위는 서론과 1, 결론부인 11장을 제외하면, 1950627(트루만의 성명”)[각주:4]부터 1019(“지원군의 압록강 도하”)까지이다. 2장은 1940년대 중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공의 대미인식의 형성과정을, 3장과 4장은 각각 동북변방군의 창설과 전략적 핵심지역(월남·대만)에 대한 전략의 조정을 다루었다. 5장부터 10장까지는 중공 지도부 내부 중공의 중앙과 지방 중공과 소련·북한 등 다양한 분석의 층위를 넘나들며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까지의 우여곡절을 최대한 밀착하여 서술하였다. 결론부에서는 본론의 내용을 정리하는 동시에 이 책의 특장을 도표를 이용한 비교라는 방식을 통해 흥미롭게 제기하였다.

 

 이 책의 핵심적인 질문은 대체 왜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했는가?’(27), 번역판의 제목은 저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평자는 이와 같은 저자의 질문이 역사적으로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오의 참전 결정(중국의 참전)을 통해 비로소 6·25전쟁이 국제전적인 모습을 띠게 됐으며 이후 막대한 역사적 피해와 파급 효과(24~25, 378~387)를 남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공 참전의 역사적 파급과 관련하여 설득력을 높이면서도 예증을 위해 6·25전쟁을 미중전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션즈화의 견해나 전쟁 이후 참전국의 지도부가 얻었던 학습효과 등을 일찌감치 앞부분에 서술해두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나름대로 제기한 질문을 어떻게 해소하였을까?

 

 이 책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 시종일관 마오의 대미관과 의지를 강조(26)하였다. 이는 예의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변이기도 하다. 저자는 들어가는 마당에서 선행 연구들을 언급하며 1946년 쓰핑(四平) 전투를 통해 마오의 대미적대감이 본격적으로 고조됐고, 중공 지도부가 트루만의 성명三路向心迂回전략의 실행[각주:5]이라고 파악하여 마침내 참전의 충분조건이 갖춰졌다고 주장하였다. 결론부에서는 검증된 것을 정리하며, ‘인천상륙작전에 따른 참전준비의 가속화즉시 참전을 반대하거나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다른 중공지도부미국의 대중침략 타파를 항상 염두에 두었던 마오의 결단이라는 도식을 내놓았다.

 

 이와 같은 저자의 강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우선 그는 당시 중공의 정책 형성과정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자료인 각종 회고록이나 建國以來毛澤東文稿등 내부 문건, 우여곡절을 겪으며 얻은 면담과 증언 등을 거의 망라했고 이것들에 입각하여 논지를 전개하였다. 따라서 중공의 참전 결정이라는 주제에 관해 자료 면에서 저자를 뛰어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님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저자는 동시에 확정적인 진술보다는 당시 정황을 충분히 반영한, 신중하고 어찌 보면 교묘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추론식의 서술을 고수하였다. 더불어 저자는 여태껏 해소되지 않은 질문들, 이를테면 (남진)‘협의설이나 전쟁의 주도자는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각각 상반되는 주장들과 그에 따른 근거들을 소개하며 은근히 한쪽 해석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입장임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이러한 서술방식의 특징은 자료상의 한계나 저자의 존재구속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당시 중공이나 공산국가의 민주집중제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지도부의 내밀한 속셈을 보여주는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저자가 시도했듯 다양한 역사적 인과 관계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도(저자는 자신의 분석법을 面狀分析法이라 일컬었다)는 그 자체로 미덕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저자는 정작 중공의 참전 결정에 관한 중층결정적일 수도 있었던 분석을 최고지도자의 세계인식과 결의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에 종속시켜버렸다. 그 속에서 중공의 참전 결정을 촉발시킨 제일요인은 미국의 성명발표였고, 6·25전쟁은 곧 국제전으로 비화될 터였다.

 

 이 책은 역사의 시련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자료들을 구사한 만큼 6·25전쟁 연구의 하위주제인 중공의 참전에 관해서는 상당한 정보(전쟁 즈음의 중공의 병력 현황, 배치 상태, 지도부의 대외 전략, 아시아의 냉전 초기 상황 등)를 들려준다. 특히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다수의 증언은 당시 지도부의 상황을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생생히 전달해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모택동이 왜 개입했을까?’란 역사적 질문을 독자 나름대로 묻게 만들며, 하나의 대답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1. 초판은 일본의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91년 11월 21일)에서 『毛沢東の朝鮮戦争: 中国が鴨緑江を渡るまで』(모택동의 조선전쟁: 중국이 압록강을 건너기까지)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저자는 증보판에서는 ①개전 준비 기간 중공의 대북·대소 동향 ②참전 직전 한 달 간의 정책결정 과정 ③각 시기 인민해방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 등이 추가됐다고 밝히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주지안롱, 서각수 옮김,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역사넷, 2005, 28~29쪽 참조. [본문으로]
  2. 일본국제정보학연구소(JAIRO) 누리집에서 저자의 박사학위논문(pdf)을 받을 수 있다. 다음의 주소(http://jairo.nii.ac.jp/0205/00001562/en)를 참고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이상의 정보는 Wikipedia 일본어판 <朱建栄> 기사 및 누리망상의 각종 신문기사에서 채집하였다. [본문으로]
  4. 미국 UC산타바바라대학의 The American Presidency Project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주소(http://www.presidency.ucsb.edu/ws/?pid=13538)를 참고할 수 있다. [본문으로]
  5. 3방향, 즉 한반도·대만·월남을 통해 중국을 공격한다는 전략을 일컫는다. 번역판에서는 “로(路)”자가 “로(勞)”자로 오기 또는 오역돼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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