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9:18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6·25전쟁에 관한 미육군의 공식역사 5부작 중 두 번째 편이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 19517월 휴전협상부터 1953727일 협정 조인까지를, 내용적으로 개성과 판문점에서 벌어진 지난했던 협상의 과정과, 그것과 결부된 전선에서의 상황을 다루었다. 저자는 마지막 장(23回顧)에서 책의 내용을 천막(=협상)’전선부분으로 나누어 요약했고, 6·25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UN(=미국)의 성공적인 공산침략 저지 인도적인 동기의 성공(=비강제송환) 공산중국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인식 미국 국내에서의 변화이다. 이상 저자의 주안점을 다음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를 개괄하면서 그라즈단제브(A. J. Grajdanzev)나 맥큔(G. M. McCune)의 책 등 당시 입수 가능했던 최신 자료를 이용했다.[각주:1] 이 외에도 저자는 서한(Ltr), 미공군사 같은 다른 책, 신문(New York Times ), 미국 국회청문회록, 전갈(Msg), 각급부대 및 지휘관 보고서(Rpt), 메모, 협상록(Transcript), 국방성 소책자(Pamphlet) 및 보도자료(Press Release), 국무성 告示(DoS Bulletin), 결정서(Decision) 등을 이용했다. 전반적으로 미국 전구사령관(Theater CDR)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염두에 둔 채 휴전협상의 추이와 전선에서의 충돌을 서술했고,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와 동향을 추측했다.

 

밀당을 통한 UN의 성공적인 공산침략 저지

저자는 6·25전쟁의 결과를 꽤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결국 UN은 공산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동시에 전투와 정전협상에 있어서 하나의 전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350). 또한 명목상 소규모 병력만을 파견한 21개국 군대는 UN의 정당성을 드높인 하나의 사건이다. 한편 미국은 극동에서 책임을 덜길 원하였고, 현지에서 자유우방군의 창설과 증강을 추구하였다(241). 전쟁말경부터 한국군은 북한군보다 우세하게 되었고, 이후 아시아에서 공산침략에 대한 보루로서 기능했다.

협상의 빈번한 휴회 및 속개는 전선에서의 충돌강도와 빈도에 여파를 미쳤다. 전장에서의 우세가 적의 회담재개를 불러왔다는 설명에서 파악할 수 있다(357). 그러나 성공에 뒤따른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차치하고서라도, UN군의 전쟁노력을 성공적이었다고 서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2년간의 낭비로 보는 것이 2년간의 성공적인 노력으로 보는 것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인도적인 동기의 성공(=자원송환)

자원송환(Voluntary Repatriation)과 자동송환(Forced Repatriation) 간의 원칙대결은휴전협상 동안 지난한 문제였다. 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모든 포로들은 적대행위의 종결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석방·송환돼야 했고, 6·25전쟁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제네바 협정의 강제성이나, 개인의 意思 등과 같이 제네바 협정에서의 생략된 부분에 주목했다(100). 그리고 미국과 북한 모두 공히 제네바 협정의 생략된 부분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원칙의 대결 이면에는 승리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던 것 아닐까. 또한 그 대결의 장에서 강조된 인도적이라는 수사는 이후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해주는 전가의 보도로 기능했다.

저자는 포로문제의 최초 책임을 북한에 두었고, 이후부터 포로문제를 두고 양측의 공방이 오갔다고 썼다. 이후 저자는 일괄교환(=강제송환)”의 원칙을 깬 미국에, “인도적인 의미에서 포로들에게 자결권을 주었다고 면죄부를 발행했다. 그러나 저자의 태도는 공산진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확연히 달라진다. 제네바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했으나, 저자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중공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인식

저자가 6·25전쟁의 결과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한 요소는 바로 중공의 흥기이다. 인민지원군의 首位로서 휴전협상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펑더화이(彭德懷)를 비롯하여, 이 책에서 드러난 공산진영의 주축은 소련이 아닌 중공이다. 저자는 휴전회담 동안 북한은 중공군과 함께 석상에 나타났고, 북한에 대한 소련의 발언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주장했다(351).

 

미국 국내에서의 변화

6·25전쟁은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도 광범위한 변화를 촉진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약화되고 이완된미국의 군사력은 6·25전쟁을 기화로 개혁과 재정비에 착수하게 되었다(352). 또한 소련을 맹주로 하는 공산권이 언제든 미국에 도전할 수 있다는 가정이 출현했고, 6·25전쟁을 계기로 이러한 가정은 강화되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戰前상황(status ante bellum)으로 돌아가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일정 규모 이상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戰費 마련이 필수라는 인식이 등장하였다.

 

이 책은 슈나벨의 정책과 지도에서처럼 수사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한 장(15)을 할애하여 제한전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고, “靜態戰이나 停滯상태, “전쟁목적의 결여등을 계속 언급했다. 또한 적극적 방어”(9)에서와 같이 전쟁의 성격을 계속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51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UN군은 9,000출격하여 적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다.

 

이 책을 통해 6·25전쟁의 세부논점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문제적인 서해5도 문제(117)공평하다고 평가받은 1952년의 마이어협정(157)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전적으로 미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부분들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 Andrew J. Grajdanzev, Modern Korea,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1944), George M. McCune with Arthur L. Gray, Jr., Korea Toda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0) 등. 그라즈단제브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고정휴, 「A. J. 그라즈단제브와 《현대한국》」, 『한국사연구』 126권, 2004를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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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9:17

정책과 지도는 미육군의 6·25전쟁 공식역사 5부작 중 첫 번째 편이다.[각주:1] 이 책은 시기적으로 6·25전쟁의 前史부터 19517월 휴전협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를 다루었다. 한편 이 책을 포함하여 5부작 중 3권의 책이 집필이 완료된 시점인 1950년대 후반 또는 1960년대 중반에 바로 출간될 수 없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특히 5부작 중 첫 번째인 정책과 지도의 경우, 집필이 완료된 시점보다 10여년 늦은 1970년대 초반에 출간되었다. 이는 전투나 전쟁사 일반을 서술한 다른 공식역사와는 달리 미국의 民軍 정책입안자들의 시각과 의도, 정책의 형성·입안·운용 등 현실정치와 관련된 민감한 사항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감수와 검열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또한 저자의 근무지 이동으로 인해 4년 동안 추가적 서술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책의 출간이 늦어진데 한 몫을 차지한다.

 

1~2장은 6·25전쟁 이전의 한국사와 한미관계, 해방과 분단 등 역사적 사실들을 간략히 서술했고, 3장에서는 미군의 구조와 1950년 당시 병력 보유상황을 다루었다. 이어서 4~7장은 전쟁 발발 이후 2개월 동안 아시아와 미국 사이의 정책교환과, 개전초기에 중점을 두었고, 8~9장은 인천상륙작전을 다뤘다. 10~16장은 38도선 횡단계획부터 UN군의 북진, 북한지역 점령, 중공군의 개입, 워커의 사망과 리지웨이의 취임, UN군의 철군계획 등에 할애됐다. 17장은 중공에 대한 보복, 중공의 해안봉쇄, 중화민국 정부군의 사용 여부, 중국본토에 대한 폭격 문제 등 정책문제를 주로 다뤘고, 18~22장은 후퇴한 UN군이 38선 근처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9516월 공산군 측의 제의로 같은 해 7월 휴전협정을 시작하기까지의 기간을 보여준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전장의 상황과 사건들, 그리고 워싱턴 및 현지 미국인 지도자들의 의견 교환과 정책·명령들을 인과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은 다분히 미국중심주의적, 반공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입각하여 서술되었다. 미국인 고위 지도자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이는 추천사에도 나와 있듯 이 책이 6·25전쟁이라는 대사건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냉전적 대결의식에 입각하여, 소련은 미국의 대척으로, 中共극동의 잠재적 위협으로, 북한은 소련의 하수인으로, 남한은 몇 차례의 예외를 제외하고 상당히 멸시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한국인에 대한 설명에서 자치능력 부족과 전장에서의 무능력 등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이승만이나 김구를 제외하면 한국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자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41, 47, 95, 118, 278, 414, 492쪽 등).

 

다음으로 이 책이 근거하고 있는 자료들의 특징이다. 그것은 1970년대 초반에 미군이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로, 당시 영어로 쓰인 한국사 관련 2차 문헌, 비망록(각서), 회고록, 정부 공간문서, 군대 문서, 라디오 방송, 電報 등이다. 대부분이 6·25전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미국자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적 구성을 토대로 저서는 시종일관 소련의 팽창야욕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경계하고 비난했으며, UN을 통한 미국의 국제주의적 접근이 지닌 정당성을 강조했고, ‘나쁜소련과 좋은미국이라는 대비를 부각시켰다.[각주:2] 한편 역사적 사실에 있어 오류를 찾을 수 있었는데, 모스크바3상회담의 결과 신탁통치 소식이 한국에 전해진 날짜(1945129)와 폭동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것은 저자의 부주의나 의도적 왜곡으로 보인다.(45)[각주:3]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6·25전쟁은 비단 야전에서만 수행된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 6·25전쟁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야전에서의 작전을 워싱턴 당국이 직접 통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6·25전쟁 발발당시 미국의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72), 소련이나 중공과의 전면전을 유발시킬 가능성 때문(98)이었다. 따라서 한국과 워싱턴 사이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고위급 인물들 간에 시차와 견해차는 필연적이었고, 이는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결국 맥아더의 해임으로 일단락되었다. 19509월 이후 38선 횡단의 문제(10), 중공군 개입에 따른 맥아더-워싱턴 간의 다른 대응(363~370), 대만문제를 비롯하여 월권이나 다름없는 정치적해결을 제안했던 맥아더와 트루만의 관계(20) 등 양자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와 불거지는 갈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고위급 인사들의 정책과 지도(policy and direction)가 전쟁 초반의 상황전개를 결정하는데 미친 영향의 크기 차이다. 미국의 정책내부에는 국가적, 전략적, 전술적 등 층위를 달리하는 영역이 존재했고, 소수파와 다수파의 의견이 착종되었으며, 각각의 정책이 현실화되었을 때 항상 기대효과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즉 정책 대다수는 현실적 상황과 조건에 의해 굴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하여 정책 입안자와 수행자 사이의 지리적 차이는 그 거리만큼이나 경험적 차이를 불러왔고, 이 차이는 6·25전쟁이라는 대사건에서 수많은 주름들을 형성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정책과 지도가 사태의 전개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획정하는 작업은 향후 논의가 추가로 요구되는 작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먼저 저자는 6·25전쟁이라는 국지적 사건을 국제적인 시각에서 파악하였다. 실제로 6·25전쟁 동안 서로 다른 진영 아래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참전하였다. 물론 저자는 어디까지나 미국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공전하는 영국, 프랑스, 대만이라는 식의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서술은 같은 陣營 내에 존재했던 국가 간 갈등을 어느 정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1950년도 미국의 국방구조와 체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3, 7)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이 세계적 차원의 군사강국으로 변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저자의 서술은 장차 진행될 미국의 군사적 강화의 맹아적 또는 과도기적 단계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

  1. 『정책과 지도』 앞면에는 6·25전쟁에 관한 미육군의 공식역사 5부작의 명칭이 나와 있다. 각각 ①‘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②‘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November 1950,’ ③‘Ebb and Flow,’ ④‘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⑤‘Theater Logistics’이다. 출간 및 번역된 순서는 차례대로 ②, ④, ①, ⑤, ③이다. ⑤의 경우, 원래의 제목이 'The Medics' War'로 바뀌어 5부작 중 네 번째로 출간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미육군군사연구처 홈페이지 http://www.history.army.mil/html/bookshelves/collect/usakw.html 참고. [본문으로]
  2. “거의 본능적으로 미국은 단지 정당한 당위성만을 따르고 있었다.”(492쪽)라는 서술에서 하나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영어원문: “Seemingly by instinct, the United States had been following most of the precepts right along.”(Policy and Direction, 393쪽) [본문으로]
  3.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55쪽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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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韓美관계2014. 10. 6. 09:15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동아시아 전공)를 취득했다. 1967평화봉사단[각주:1]의 일원으로 내한했고, 1981년 평양 방문, 한국전쟁의 기원1 출간 이래 현재까지 한국근현대사, 한미관계사, 미국과 동아시아 관계 등을 천착했다.[각주:2]

 

이 책은 미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미국과 동아시아, 특히 對日·관계사에 초점을 맞추어 쓴 작품이고,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는 20세기를, 공간적으로는 세계체제 내에서의 미국과 동아시아를 주목한다. 각 장은 하나의 주제를 자세히 다루는 편으로, 그것은 저자가 차용한 방법론을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국가 간 관계(), 문헌 검토를 통한 (민주주의)개념의 정립, 세계체제에 관한 저자 나름의 전망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다. 한편 저서의 각 장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있지 않고, 하나의 장이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됐다. 하지만 저서 전반에 걸쳐 있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뚜렷하다. 저자는 서론에서 어떠한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하게 미국과 동아시아(특히 일본) 관계를 살펴볼 것을 다짐한다. “미국식 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이론과 상식이 여태껏 미국인의 눈에 暗點(scotoma, 시야결손부)”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암점은 크게 자각할 수 있는 實性과 자각할 수 없는 虛性으로 나뉜다.[각주:3] 저자는 미국과 동아시아의 관계사를 서술함으로써 미국인의 실성암점을, “미국예외주의를 지탱하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고찰함으로써 허성암점을 드러내고 치유하고자 했다.

 

우선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제목이기도 한 視差의 쓰임이다. 왜 천문학 용어인 시차를 빌려 역사를 서술해야 했을까? “인용를 통해 그 이유를 파악해 볼 수 있다. 저자는 벤야민을 들며, 일본에 관한 인용문을 나열했다(16-18). 각각의 인용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에 걸쳐 생산된 것이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여러 논자들이 일본에 관해 다양한 의견을 표출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분법적 쌍(肯否, 好惡 )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서술전략에서 각각의 인용문과 일본과의 일치”, 즉 시차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일본이라는 대상은 인용문의 나열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느 시기의 특정한 인물에 의해 설명이 시도되지만, 결코 그 설명 하나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을 설명하는데 따르는 일치의 부재”, 그리고 그러한 부재의 충분조건인 시차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역사(서술)에서의 시차를 파악한다면, 독자는 더 이상 어떤 대상에 관해 변해봤자 그게 그거"라는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있다(20). 나아가 일본이라는 대상을 단편적으로 설명하는 어느 역사서술에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시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1(고고학, 家系, 대두: 미국의 신화와 동아시아의 현실)은 저자의 방법론을 설명한다. 바로 고고학과 계보학으로, 이것을 통해 독자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유산인 실증주의적 합리성이나 진보담론의 인식론을 상대화할 수 있다. 저자는 저서 전체에 걸쳐 세계체제론적 입장을 취한다. 20세기 동아시아의 중심은 미국과 영국, “반주변은 일본, “주변은 중국과 한국이라는 식이다. 한편 이러한 구도는 영원하지 않고, 따라서 여태껏 미국과 영국의 패권을 뒷받침했던 진보담론은 문제제기를 다시 해야 하거나 소멸될 위치에 놓이게 된다.

 

2(동쪽 바람과 비, 붉은 바람, 검은 비: 미일전쟁, 시작과 끝)태평양전쟁(미일전쟁)”과 전쟁범죄, 그것을 바라보는 인식을 다룬다. 한국의 해방 전후사와 전쟁범죄, 학살문제, 그리고 그것에 연루돼 가공할 폭력을 겪은 아시아인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서 3(식민지적 형성과 변형: 한국, 대만, 베트남)20세기 식민지 경험을 겪은 한국, 대만, 베트남의 사례를 들어 각 국가의 탈식민 이후 경제성장과정을 보여준다. 한국과 대만이 같은 형태의 식민주의를 겪었다는 서술로 시작하여, 프랑스-베트남과는 달리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대만의 공업화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이후 저자는 동아시아가 보여준 발전의 근거가 되는 역사적 특성을 소묘한다. 그 특성들은 제도와 형이상학을 넘나들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과연 경제적 성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기 어렵다.

 

4(미국과 동아시아에서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서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개념을 검토한 후, 한국적 맥락에서 민주주의를 살핀다. 저자는 전자가 풍기는 서구우월주의나 오리엔탈리즘적인 함의를 비판하고, 한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민주주의에 관한 전망을 세운다. 그러나 이 장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검토라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의 시민(사회)”를 모색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일반적인 주장으로 결론을 갈음한 것으로 보인다. 5(공포의 핵 불균형: 미국의 감시체제와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서는 북미관계와 그 관계의 대표적 표상으로서 1993년 한반도 핵위기를 다루었다. 저자는 북한식 대응의 動因을 서술하며,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6(세계가 중국을 흔들다)은 미중관계 및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다루었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은 중요한 결정이었고, 중국적 맥락에서 그는 박정희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적절한 지는 의문이다. 7(경계 이동: 국가, 기관, 냉전기와 그 이후의 국제연구 및 지역연구)은 국제연구와 지역연구가 어떻게 냉전기에 출현했고, 이후 해당 연구(기관)들이 어떠한 존재구속성에 놓여있었는지를 고고학적/계보학적으로 추적했다. 8(동아시아와 미국: 複視와 패권적 대두)은 저서의 결론부로, 20세기 미국패권과 그 아래서의 동아시아(특히 일본)를 언급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한 세기에 걸친 장기지속적인 미국의 패권체제 아래서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그들의 對美관계사를 거시적으로 다루었다. 평자는 그러한 거시적 조망의 유용함을 인정하나, 저자의 전망이 가지는 타당함을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그러한 조망이 정확한 것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저자에게 패권(헤게모니)은 그람시적 의미로서 패권국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인민(여기서는 국가)들이 합의된 것처럼 여기고 그대로 시행하는 바를 의미한다(206). 한편 국제관계에서 이것은 제국,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비공식적 제국을 아우르고, 그 너머까지 넘보는 용어이다(26). 그렇다면 저자에게 헤게모니는 어떠한 기의를 표상하는가? 모든 것? 저자는 미국패권이라는 구조 내에서 기술과 생산이라는 2가지 요소가 개별국가들의 위계를 결정하는 주요요인으로 보았다. 더하여 그는 냉전이 개시됨에 따라 세계체제는 양극체제(“철의 장막을 경계로)로 나뉘었고, 각 권역에서 체제적 분업과 중심-반주변(일본, 독일)-주변이라는 구도가 등장했다고 본다. 미국의 패권이 1945년 이래 동아시아에서 강력히 작용했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41), 체제의 구조적 규정성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역사적 사실들을 세계체제론가 지닌 지나친 도식성 안으로 끌어들여 설명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 방식과 역사 자체를 상대화할 수 있는 한 가지 계기를 다시 마련해주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미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각주:4]

  1. Peace Corps. 케네디가 시작한 미국의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으로, 1961년부터 지금까지 130여 개국에 약 210,00명을 파견했다. http://en.wikipedia.org/wiki/Peace_corps 참고. [본문으로]
  2. 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미국 패권의 역사』, 서해문집, 2011 참고. [본문으로]
  3. 두산백과 “암점” [본문으로]
  4. 정용욱, <‘점령’의 역사적 구조와 대중의식, 그리고 과거사 인식>, 『대학신문』 인터넷, 2013년 5월 25일 게재 승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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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13

이 책은 냉전 초기부터 케네디 행정부가 활동했던 1960년대 초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근대화(Modernization)”는 당시 미국의 정책입안자와 학자, 주류언론이 공유했던 지배적 인식의 틀(conceptual framework)이자 이념(ideology)이었으며 이를 통해 당대 미국인들이 지녔던 발전에 대한 생각과 탈식민화의 전략적 중요성, ‘개입의 양상 등이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길먼의 책이 근대화()”의 탄생부터 몰락까지의 과정을 세 가지 사례(DSR, CCP, CIS)를 통해 추적했다면, 이 책은 세 가지 사례(Alliance for Progress, Peace Corps, Strategic Hamlet)를 통해 근대화()”이라는 이념이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대외정책에 어떤 식으로 반영됐고 재생산됐는지를 탐구한 문화사 내지 담론연구이다.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돼있으며, 1장에서는 문제제기와 방법론을 언급했고, 2장에서는 냉전이라는 맥락과 근대화론의 부상을 다훴다. 3~5장에서는 사례를 통해 근대화론의 냉전적 작동양상을 살폈다. ‘결론에서는 앞서의 논의를 정리하지만, 어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저자가 온당하게 짚고 있듯,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 입안·실행과정에서 사회과학적 근대화론은 결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심급은 아니었고,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형성을 주도했던 유일한 요소는 아니었다. 따라서 저자는 각각의 사례연구에서 근대화라는 이념을 정치가들의 연설이나 서한, 정책보고서의 문면에서 추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냉전이라는 큰 맥락과 1950~60년대 각 지역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제시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엮어냈다. 이 책을 포함하여 앞선 연구자들이 보여주듯, 근대화라는 생각, 또는 근대화론은 당시 미국 외교정책의 입안부터 실행, 검토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와 다양한 층위에서 관계를 맺었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정의나 전형(model)도 꽤나 다양했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화론은 미국사회 자체의 성격뿐만 아니라, 미국이 물질적·문화적으로 열악하다고 인지한 외부세계를 변형시키는 능력에 관한 가정의 집합이다. 길먼의 책에서도 지적된 바 있듯, 이 이론의 대표적 특징으로는 전통근대라는 이분법적 시각, 경제·정치·사회 변화는 통합돼있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생각, 어떤 사회든 직선적인 발전을 공유한다는 관념, 선진국이 발전 중에 있는 국가의 근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는 사고 등이다. 여태까지의 설명을 통해 냉전기 전반 미국 발 근대화론의 모습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여태껏 살펴본 미국인 학자들의 냉전문화사 연구에서처럼, 이 책은 냉전기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러한 정책이 나와 실행에 옮겨지는 역사적 사실을 소묘하려고 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과학자들의 노력에 주목했다. 저자는 사회과학자들의 정치적지식 생산, 사회과학이론(근대화론)과 외교정책 간의 관계,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의 변용 등을 주로 살피고자 했고, 이 내용들이 결합돼 본문의 개별 사례연구에 잘 드러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학계(이론)과 정계(정책)는 시기별·분과별로 친소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고, 특히 사회과학계(국제정치학과 지역학을 포함)가 쌓아올린 입지와 위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사회과학계가 기울인 노력’(길먼)이나 그들이 확보한 과학성에만 전적으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치가들의 세계전략 구상과 국내적 동원’(클라인), 공산권 및 3세계의 존재, ‘3세계에 대한 경쟁적 원조라는 냉전의 맥락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할 때 더욱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냉전의 문화’, 냉전의 아시아적 풍경’, 냉전의 한국적 발현을 확인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적잖은 아쉬움을 줄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논리라는 유용하고 큰 그림을 제공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개별적(지역적) 사례연구는 어디까지나 큰 그림 그리기(=‘미국의 논리확인)에 복무할 따름이라는 인상을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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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12

이 책은 냉전 초기부터 월남전이 패배로 귀착돼가는 1970년대 중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미국 국내에서 근대화(Modernization)”로 포괄할 수 있는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출현했고, 그것의 핵심인 발전(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미국의 사회과학계에서 이론적 중추로 거듭나고 다듬어졌는지를 탐구한 노작이다. “근대화론(modernization theory)”은 근대화를 위한 이론이자, 당시 미국의 근대주의자들이 기울였던 근대화 노력의 청사진이 되는 논의들을 말한다. 저자는 총 7장에 걸쳐 미국 국내에서 근대화론이 대두하여 사회과학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가 쇠락하는 모습을 선별적이지만, 면밀히 조사했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설명하는 도식 중 하나가 바로 개발세력 민주세력의 경합이고, 양쪽이 근대화(=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은 미국의 지성사를 다룬 연구지만 한국현대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장은 대표적 근대화론자이자 시카고대학 사회학자 쉴즈(Edward Shils, 1910~1995)를 인용하며 글을 시작했고, 근대화론을 개괄했다. 근대화론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미국 사회과학계가 공유했던 탈식민 세계의 경제·정치·사회적 변화에 관한 지배적인 사고방식 또는 문제해결방식이었다. 이것은 전통과 근대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세계를 보았고, 계몽주의, 반대중주의 등 위계적인 틀을 전제했으며, 그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諸國전통이라는 범주 하에 도매금으로 묶였다. 근대화론 안에는 여러 지류들이 있었으나, 미국의 국내외적 정세변화와 맞물려 권위주의적인 근대화론이 득세했고, 이것은 장차 국제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뒷받침할 터였다.

 

2장은 근대화론이 부상하게 된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근대화론은 대략 두 세기에 걸쳐 세계로 급격히 확산됐다. 구미 지식인들은 물질적으로 공전의 도약을 달성했고 세계적으로 팽창하던 유럽을 바라보며 근대라는 시대상을 생각하게 됐고, 이는 반제반봉건 투쟁을 벌이던 식민지민에게도 이론적 자원으로 수용됐다. 한편 戰後 세계의 핵심적인 표어이자 모든 지역 지도자들의 해결책은 경제 발전이었고, 따라서 미국은 제국주의와는 다른 위치에서 탈식민 세계의 열망에 나름대로 답해야했다. 물론 미국식 민주자본주의의 대척점엔 소련이 존재했고, 미국의 정책입안자들과 학자들은 급속도로 산업화를 수행하던 소련식 체제와 그 주변세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하여 학계의 지배적인 담론으로 거듭나게 된 근대화론에는 엘리트 민주주의, 행태주의, 예외주의, 박애심 등의 요소들이 결합했다.

 

3장부터 5장은 근대화론의 내용을 생산한 기관 중 주요한 세 곳을 조사한 사례연구 부분으로 책의 핵심이다. 각각 하버드대학 사회관계학과(DSR), 사회과학협의회 비교정치위원회(SSRC CCP),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국제관계학연구소(MIT CIS)라는 개별 기관들의 활동과 인물들의 관계망, 오고간 서신, 개최된 학회, 제출된 내용과 주장들, 정부와의 연계 등을 자료를 토대로 충실하게 제시했다. 개별 기관들이 상호작용 속에서 활동했다는 저자의 언급과 함께, 각 장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스토우, 아몬드, 파이 등)이 인적·물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세 장은 각 기관의 독자성·독창성보다는 당시 미국 내의 근대화론에 관한 부분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으므로 유용하다 하겠다.

 

저자는 근대성과 미국예외주의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하버드대학에서 약 45년 동안 교편을 잡았던 탈콧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를 중심으로 인물 및 학과(DSR), 그들이 만든 근대화론의 이론적 밑바탕을 살폈다. 파슨스는 19461DSR을 신설했고, 여기에 사회학자, 인류학자, 심리학자 등을 불러 모아 사회과학을 재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927, 하버드대학 경제학 교수로 부임한 이후, 당시 지배적이었던 경제학의 아성에 도전하며 이론적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경제학의 양대 지류였던 신고전파와 제도학파를 모두 비판했고, ‘경제를 넘어 사회 전체를 분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침내 1951, DSR가장 중요한 연구 성과이자 악명 높은일반행동이론에 관하여가 출간됐다. 이 책은 행동을 이분법적인 양식변수(pattern variables)”에 따라 정의하고 분석했으며, 이후 탈식민지역에서 미국의 개입(=근대화)을 격려하는 주요한 이론적 자원이 됐다.

 

근대화론이 부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냉전이라는 정세적 맥락도 물론 중요했지만, 당대 사회과학계를 주름잡던 거두들의 공모도 그 몫을 단단히 했다. 저자는 4장과 5장을 통해, 근대화론자들이 일련의 연계망을 구축하여 서로 친분을 쌓고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학적 권력을 확보해나가는 과정과 근대화론에 기입된 반공주의적 기초를 면밀히 조사했다. 저자는 SSRC CCP를 근대화론자들이 연계를 도모한 하나의 통로였다고 보았다. CCP에 소속된 학자들은 산업화 세계와 탈식민 세계를 비교하기 위하여 비교정치학을 이론적으로 가다듬었으며, 이 때 DSR의 근대화론을 좀 더 비판()적으로 채용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DSR의 이론적 기반과 반공주의가 결합돼 생겨난 MIT CIS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CIS의 대표적 이론가는 로스토우였는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경제 발전의 단계에 이전까지 제출된 근대화론자들의 식견을 모두담았다.

 

저자는 베트남전을 통해 근대화론이 소멸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전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명백한 실패였고, 베트남전 수행을 뒷받침한 이론이 근대화론이었던 만큼, 이 이론은 더 이상 발전의 전형이라는 입지를 지켜낼 수 없었다. 근대화론에 대한 뚜렷한 반대는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제기되기 시작했으나, 그 때까지 근대화론은 자기방어를 잘 수행한 편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는 CCP의 해산(1973), DSR의 해산(1974), CIS의 선회(전략문제) 등 급작스러운 근대화론의 실종을 목도한 시기였다. 저자는 이를 두고 획일적이고 거대한 사회과학적 사고가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좌우간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으로 좌우를 막론하고 사방에서 수행됐고, 더하여 저자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으로 통칭할 수 있는 일련의 흐름을 짚어냈다. 이들은 근대화론 자체보다는 그 안의 근대주의적 사고방식(mind-view)”을 문제 삼았다. 또한 저자는 국내정치의 위기에서부터 경기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들을 정리하여 제시했고, 그것을 통해 당시 지배적이었던 감정구조에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서술했다.

 

이 책은 근대화론이 몰락한 이후의 지적 흐름들도 간략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전의 근대화론자들은 이제 신보수주의공동체주의등으로 묶이게 됐다. 전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치적 안정과 그것의 현상적 표현인 질서가 유지되길 간절히 원했고, 후자도 질서에 대한 희구라는 측면에서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질서부과의 주체로 국가가 아닌 공동체를 지목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어 저자는 세계화와 근대화론 이후의 발전주의를 간략히 다루며 글을 마무리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아쉬웠던 점은, 저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수행하고 있는 근대화에 대한 방어이다. 그는 근대화희망적인 측면을 인권이라고 짚어냈고, 근대화론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선 안 되며,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을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한편으로 근대화론이 내포하는 측면들의 다양성을 실증적으로 알려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근대화론이 적용된 특정한 양상이나 맥락을 추인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에게 어떠한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고,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더 건강하고 부유하며 공평하고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를 당위로서 제시하는 것에 그쳤다. 따라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저자의 명백한 주장이면서도, 동시에 이 책이 주장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는 효과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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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12

이 책은 냉전 초기인 1950년대를 종축으로 삼고, 행태주의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하여 미국의 군·(학 복합체가 주도한 적 만들기의 모습을 서술한 노작이다. 행태주의는 당시 미국의 지성사를 석권했고, 스스로 과학의 이름을 내걸었다. 행태주의는 또한 냉전이라는 시대적 규정 속에서 탄생했고, 그것을 자양으로 하여 성장했다. 따라서 행태주의는 당시의 미국의 학계뿐만 아니라 국내인식과 대외인식, 재정운용과 學知의 형성 등 한국사와 미국사의 여러 세부주제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요소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물질·구술 자료를 근거로 하여 냉전 초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사회과학계를 풍미했던 행태주의의 전개과정과 인식론적 구조, 행태주의자들의 활동양상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저자는 RG319(육군참모부), RG333(유엔사/한국), RG338(미육군 작전· 전술·지원기관), RG389(헌병감실)를 포함한 다양한 NARA자료(삐라와 통행증)와 본문에 나온 각 연구기관에서 생산한 자료들, FRUS, 회고록이나 회담문 등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논의를 전개했다. 이론적으로는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개념을 빌려 행태주의를 설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행태주의는 냉전의 고착과 함께 정상과학의 위상을 확보했으나, 1960년대 중반 위기를 맞게 돼 결국 지성사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됐다. 저자는 세 부에 걸쳐, 행태주의의 대두와 양상, 위기를 다뤘다. 1부의 제목은 패러다임 규정하기, 세 장에 걸쳐 행태주의의 대두, 토대, 정재계·군부와의 공모, 인식론적 기초를 설명했다.

 

1장에서 저자는 미국의 군인(TAS, 1949)을 들며, 1950년대 미국의 지성사적 특징인 행태주의(Behavioralism)의 등장을 설명했다. TAS 장차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으로 불릴 어떤 과학의 사례였다. 한편 이 기획은 미육군과 카네기재단, 시카고대학이 협력하여 만든 결과물이었다. 이는 행태주의 연구의 물적·지적토대와, 당시 미국의 군··학 복합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행태주의의 본령은 자율적인 개인을 상정하는 것이었다. 이제 사람의 (정치적)행동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있게 될 터였다. 행태주의는 간학제적(interdisciplinary)이었고, 여기엔 가치적(value-free) 방법론을 추구했던 심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이 주로 복무했다. 전통적 의미의 학자들은 행태주의에 반발과 비난을 던졌으나, 기업들은 192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2장은 토머스 셸링[각주:1]의 예를 시작으로, 1950년대 미국이 자국의 두뇌’(지식인)를 동원하는 풍경을 서술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학계는 급성장했고, 그 속에서 양산된 학자들은 전통적 의미의 학계와 민간연구기관 사이에서 종종 방황했고, 이들은 결코 독립적이거나, 지적으로 대담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정부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19514, 심리전략처(PSB, 1954년에 해체되고 작전조정처(OCB)가 설립됨)를 세우는 등 원자무기에 버금가는 심리무기를 준비했고, 그 결과 두뇌집단들은 미국정부와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됐다. 이어 저자는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로 공군 산하의 랜드연구소와 공군대학 산하의 인적자원연구기관(HRRI), 해군연구소(ONR), 육군 산하의 인간관계연구소(HumRRO)와 작전연구소(ORO) 등을 살폈다. 2차 대전 때와는 달리 이 풍경에서 인문학자들은 배제됐다.

 

3장은 행태주의의 인식론적 기초(일차집단, 무의식, 계량화)에 관해 설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행태주의자들은 전통적 의미의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공동체(gemeinschaft)적 특성, 비공식적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들의 밀착된 자율적 집단인 일차집단이 현대에도 존속·번성하고 있으며, 사회화와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이어 저자는 해롤드 라스웰[각주:2]로 대표되는 정신병리학적분석전략 및 불확실한 것확실하게만들어주는 계량화 또한 당시 행태주의 이론의 밑바탕이었다고 분석했다.

 

2부의 제목은 정상과학으로, 저자는 다섯 장에 걸쳐 당시 정상과학이었던 행태주의가 적용·실천되는 양상을 서술했다. 2부의 각 장은 한국현대사, 특히 심리전, 포로조사 등에 관련된 일화들을 꽤나 많이 담고 있어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4장은 윌버 슈람(Wilbur Schramm) HRRI에 소속된 일군의 연구자들이 한국전쟁의 전선을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당시 학계의 통설을 적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이 장에서 저자는 분석-권고-영향-전승으로 나눠 HRRI 보고서를 살폈고, 이 보고서가 갖는 중요성이 이역만리의 경험을 중심지(metropolis) 용어로 옮겨놓았고, 또한 보편주의적 가정-틀을 다른 지역의 사례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당시 행태주의의 대표적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더하여 저자는 그 보고서에 나온 분석기법이나 논조, 동원된 인력 등은 언론연구로 계승됐거나, 미국 외 지역에서 미국이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지적인 배경을 이루게 됐다고 분석했다.

 

5장은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수행한 심리전의 면모와 이면을 다뤘다. 미국은 2차 대전에서 선전을 연구한 학자들[각주:3]의 주장에 힘입어 사상이 갖는 힘을 기각했고, “건설적인 선전근본적인 관심사인 생존과 의식주에만 국한된다고 믿게 됐다. 선전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이후 베트남전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이어 문화적 특성들을 제거한 분석인 리비어 프로젝트나, 심리전국(OCPW)에 담긴 두 가지 경쟁적인 전략”(사회/생존, 일반적군/여론선도자) 등을 제시했고, 심리전 수행에서 행태론이 이념론을 압도하는 과정을 서술했다.

 

6장과 7장은 바로 앞장인 5장에서 승리를 거둔 행태론이 휴전협상 과정 및 포로수용소 조사과정에 적용되는 모습을 서술했다. 저자는 행동과학의 계보와 영향력이 라스웰-리츠-골드해머로 이어졌다고 보았고, 휴전협상에서 미국의 논리와 적 인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했다. 한편 랜드, HumRRO, ORO는 거제도에서 포로에 대한 조사를 수행했고, 19526월의 도드 납치사건을 계기로 CIE의 활동을 행태주의자들이 맡게 되면서 포로에 대한 이념 주입은 금지됐다. 6장의 작업 규칙’(Operational Code)이라는 개념이 보여주듯, 당시 행태주의는 적의 행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승리를 거두)고자 했으나, 실상은 이념과 역사문화적인 맥락과 배경을 그들의 과학적분석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呪文에 불과했다.

 

8장은 복귀하지 않았던 미군포로의 존재와 세뇌 논란, 이에 대한 행동과학자들의 비판을 다뤘다. 미국은 제네바 규정을 어기면서 자원송환을 주장했으나, 복귀를 원치 않는 포로의 존재는 미국 국내에서 논쟁을 유발했다. 여기서도 행태주의자들은 이적행위를 이념적 동기와 분리시켰다. 더하여 그들은 침묵한 다수를 긍정하면서도, 굴복한 자와 저항한 자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양자 모두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례에 불과했다. 저자는 나아가 행태주의자들이 인종·종족의 문제와 갈등도 덮어두는 것으로 끝맺었다고 비판했다.

 

3부의 제목은 위기, 세 장에 걸쳐 행태주의가 가지고 있던 정상과학으로서의 위상이 위기를 맞게 되고, 경제학이 이를 대체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있다.

 

9장은 1962년 여름,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미육군의 제한전 임무와 사회과학 연구>라는 군·학 회담을 계기로 행태주의의 내용이 점차 변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 회담에서 랜드는 건설적인 방식”(사회공공활동)의 효과를 회의적으로 보았고, 대안으로 합리적 선택개념에 입각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행태주의 연구는 베트남 농민 또한 맥락을 탈각한 합리적 개인으로 정위했고, 그들이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와 반란군 모두를 지원할 것이기 때문에, “베트남에 대한 원조는 실상 베트콩에 대한 원조였다.”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랜드는 심리학보다는 경제학(게임이론과 합리적 선택)을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베트남전 수행방식은 이전보다 더욱 억제적이고 강압적으로 거듭나게 됐다.

 

10장은 군·학 두뇌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특작연구소(SORO)와 미육군이 가담한 카멜롯 프로젝트(1964~65)의 사례를 들며 행태주의가 종말로 치닫는 과정을 묘사했다. 행복이 넘치던 신화 속 카멜롯(Camelot)을 의식한 듯, 이 기획은 미국의 안정에 위해를 초래할 신생국의 정치적 봉기를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 예방적인 미국발 근대화였다. 저자는 카멜롯 논쟁에 포함되는 인명과 논란의 전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행태주의의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모습과 일관되지 않은 모습 등 다양한 모순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11장은 책의 종결부로 New York Times의 베스트셀러이자 15개국 말로 역간된 The Report from Iron Mountain(Dial Press, 1967)[각주:4]가 불러일으킨 진위논쟁을 통해 행태주의가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묘사했고, 미드(Margaret Mead)의 사례를 빌려 냉전시기 지배적이었던 과학의 종언 및 미국 학계에서 학문적 권위가 여전히 실종상태라고 주장했다.

 

행태주의는 과학과 가치중립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 과학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선험적인 이론에 현상을 끼워 맞추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정부지원금을 받아내려는 노력에 불과했고, “탈가치적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추종하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편향된 것이었다. 행태주의가 설정한 보편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상정한 미국적 양식에 다름 아니었고, 미국적 보편에 대한 일탈이나 미달은 전적으로 개개인의 심리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보여주듯, 미국의 행태주의는 피아(또는 적)를 극복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태도는 제국주의의 인종논의와 준별되는 미국의 새로운 제국주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실증을 위해서는 횡적으로 광범한 비교가 필요하다.

 

이 책은 성실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정작 무엇을 주장하려했고 어디에 강조점을 두려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는 인상과 함께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들을 주었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냉전 초기 미국에서 행태주의가 대두했고, 그것이 냉전의 적 만들기를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미국 학계, 때로는 미국을 겨냥하여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지점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태도는 저자처럼 미국인이자 미국 학계에서 자국을 비판적으로 사고해야하는 학자들의 전략은 아닐까? 그리고 내용에 관해서는, 행태주의가 정상과학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원인과 20여년이 흐른 뒤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 원인,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적 만들기전략의 실체 등이 궁금증으로 남게 됐다.

 

마지막으로 케난 전기로 퓰리처상을 받았고(2012), “냉전史家의 수장평을 받는 예일대학의 역사가 개디스(John L. Gaddis)를 보자. 그는 2005년에 봉쇄전략을 출간한 이후 백악관에서 국립인문기금(NEH) 훈장을 받았고, 정계에까지 입지를 다졌다. 한편 그는 알렉산더 조지(Alexander L. George, 1920~2006)의 개념인 작업 규칙의 영향을 받아 연구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조지는 한국전쟁 당시 랜드 소속으로 중국군 포로를 조사한 바 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이를 행동과학의 잔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1. 토머스 셸링(Thomas C. Schelling, 1921~)은 미국인 경제학자로, 현재 컬리지 파크에 위치한 메릴랜드대학 공공정책(Public Policy)학교에서 외교, 안보, 핵전략 분야를 맡고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1951)했고 유럽부흥계획에 참여했으며, 유수의 대학과 백악관을 넘나들며 경력을 쌓았다. 2005년에는 로버트 아우만(Robert J. Aumann, 1930~)과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본문으로]
  2. 해롤드 라스웰(Harold D. Lasswell, 1902~1978)은 미국인 정치학자이자 언론에 관한 이론가로, 시카고 사회학파의 일원이자 예일대학 법대교수였다. [본문으로]
  3. 모리스 야노비츠(Morris Janowitz, 1919~1988)는 미국인 사회학자로, “편견, 애국”에 관해 연구했고,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등과 함께 군대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쉴즈(Edward Shils, 1910~1995) 역시 미국인 사회학자로, 시카고 사회학파의 일원이었고, 권력 및 공공정책과 지식인(intellectuals)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4. 위키피디아 The Report from Iron Mountain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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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韓美관계2014. 10. 6. 09:10

이 책은 1945년 일제의 패망부터 1960년대 중반 한일회담반대투쟁까지를 종축으로 삼고,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미국이 차지하고 있는 문화적 위상과 역할의 실체, 다시 말해 한국현대사 속 미국의 (문화적) 개입과 영향”(“미국의 헤게모니”)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우직한 시도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로 구성돼있고, 각각이 1945년부터 6·25전쟁 이전까지, 1950년대, 1960년대를 다루고 있다. 그 중 분석의 핵심은 2부로, 저자는 200여 쪽을 할애하여 6·25전쟁을 치르는 과정 속에서 미국이 한국인의 집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모습을 시작으로 1950년대 미국이 수행한 다양한 패권사업의 구조와 양상을 세밀하게 서술했다.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면, 1부는 미국이 문명국의 위상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한 공보원(미군정 공보국미군정 공보부OCIUSIS/K)과 전국적 지부의 현황(2), 친일 경력이 있는 기독교 인사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한미협회(3) 등을 비롯하여 미군정기와 건국 이후미국 문화사업의 물적 토대를 주로 설명했다. 이어 저자는 2부에서 문화적 개입의 범주를 일상 생활양식을 포함하여 의료·보건(4), 언론·공보(2, 5, 7), 교육·유학(6, 7), 지역개발·농촌개편(8) 등으로 나누었고, 각각의 전모를 면밀한 사료분석을 통해 다루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3부는 미국이 한국에서 수립하려던 문화적 중심-변경의 위계 중 변경”, 즉 당시 한국, 그 중에서도 한국 지식인의 반응을 중심으로 한국의 민족주의가 보여준 균열을 제시했다. 대개의 냉전문화연구가 분석의 범주를 크게 세 층위, 사상·이념/제도·정책·매체/소비·현상으로 나눈다고 할 때, 이 책은 한국현대사 속 20여년을 배경으로 하여 세 층위의 범주를 나름대로 전부 다루면서도, “한국의 민족주의라는 요소를 계속 염두에 두었다(1, 3).

 

저자는 기존에 제출된 명제의 한계를 밝히고, 그 위에 자기주장을 부연하는 방식을 통해 저자 나름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해방 이후부터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 내에서 한국이 반공의 보루’, 前線國家(frontier state)’라는 인식상의 위상을 부여받았다는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저자는 이러한 종래의 이념적인 해석(‘혈맹’, ‘봉쇄의 최전선’)만으로는 냉전시대 한미관계를 온전히 파악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이어 그는 20세기 초반 활약했던 미국의 역사가이자 이론가(ideologue)이기도 했던 프레더릭 터너(Frederick J. Turner, 1861~1932)를 빌려와, 당시 한국은 미국발 서진운동(중간)종착역으로서, 미국으로부터 문명을 들여와야 할 邊境國家(frontier state)’라는 인식상의 위상도 부여받았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저자는 당대 미국의 문화 전파 담당자들의 인식수준과 양상, 실천을 사료 속에서 발굴하여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츠지야 유카의 친미일본의 구축이 언급한 미국의 대일점령정책 속 일본인식과 비교 및 종합을 시도할 수 있는 재료적 근거가 될 것이다. 물론 허은과 유카 등의 연구만을 가지고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대한·일 문화정책을 아우르려는 시도는 역부족에 그칠 공산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살펴본 연구들을 통해 당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두고 ‘(냉전)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에 입각하여 그전과는 외형을 달리하는 제국주의적인 문화 정책을 입안·수행했고, 미국은 한국보다는 일본에 문화적인 공로를 많이 들였으며(미국 내 親日派의 계보, 국화와 칼이나 동양문화사같은 서적, ‘역방향(reverse course)’ ), 양국의 미군 점령기이후로도 한··3국에서 반공주의에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미국의 의도에 균열을 일으키려던 사람들은 대개 그것을 우회해야 했거나, 배제 또는 馴致됐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3국에서 억눌리고 배제된 목소리’, 또는 다른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사실들 중에서도 저자는 특히 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한편으로 문화영역에서 한국의 주체성을 설정하는 문제와 접속돼있고, 다른 한편으로 당시 미국의 문화적기획(패권사업)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것에 내재한 고유의 모순이나 한계를 들춰내려는 시도와도 연결돼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 신생 대한민국에 부과하려던 (문화의) “중심-변경의 도식은 1960년대에 들어와 일군의 한국인에 의해 제국-신식민지라는 도식으로 결국 부정되기에 이르렀고, 이제 탈주를 위한 주체로 민중이 설정될 터였다. 저자가 수행한 이러한 대안적 시도의 발굴은 고고학적·계보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한편으로 몇 가지 의문을 추가적으로 제기하게 한다. 한국인들의 문화적 탈주시도는 왜 하필 1960년대 초중반에 대두됐는가? 저자의 서술대로라면, 그러한 시도1950년대에는 잠재돼있었는데, 그것은 이승만 정권의 강고한 반공체제를 방증하는 것인가?(357) 또한 탈주대두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며, 얼마나 대표성을 지니는지 등이 궁금했다.

 

앞서의 질문을 포괄하며, 이 책을 통해 평자가 제기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질문은 당시 한국의 민족주의를 어떻게 포착(실체화)하고 평가할 것인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먼저 저자가 결론부분에서 지적·도덕적 패권을 구축하려고 했던 미국의 시도는 궁극(적으로) 성취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점은 일견 타당한 듯 보인다. 남한의 거의 모든 사람과 지역을 망라하기 위해 미국이 수행한 각양각색의 문화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문명주도국이자 민족적 열망을 채워주는 지도국으로서의 위상은 확고할 수 없었다. 책이 잘 보여주듯, 시기와 분야를 달리하며 미국식 노선에 사상적 균열을 일으키는 이반자(dissident)는 항상 존재(오기영부터 홍이섭까지)했고, 더하여 문화권력의 담지자인 지식인 및 사회주도층과 지배블록의 정점에 있던 한국정부조차 항상 미국과 궤를 같이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저자가 미국이 미국의 패권질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 제반 분야의 내용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입장을 취해갔다.”라고 요약한 부분도 눈여겨봐야 한다. 각 분야에서 펼쳐진 미국의 노력과 타협은 결국 이승만-장면-박정희로 이어지는 한국정부의 방향성을 일정하게 순치시켰다는 저자의 주장 역시 타당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저자가 드러내고자 했던 한국의 근대성과 정체성의 한 축을 구성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한국 사회가 냉전 분단 시대의 질곡과 끊임없이 대결하며 자신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수립해왔다.”고 주장했다. 더하여 이러한 사상의 운동이 정치적 주권, 문화적 독자성을 추구할 때, “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의 담지자, 또는 이것을 외친 주체는 누구였을까? 이에 대해 이 책은 일단 일군의 비판적 지식인과 학생들이라고 답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에게 있어 미국(또는 대미인식)한국의 민족주의가 이론적으로는 부정해야할 규칙(大他者)이면서도, 물질적으로는 타협해야할 실체를 지닌 존재(小他者)일 것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제외한 다른 한국인들과 한국의 민족주의와의 관련은 어떤 모습이었고, 그 관계는 어떻게 서술해야 할까?

 

앞서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나니, 오히려 한국의 근대성과 정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문화적 패권사업이야말로 성공을 거두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것은 1960년대 이후로 시야를 넓힐 경우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일상 생활양식을 포함하여 문화를 파악하는 저자의 전략을 따를 때, 유학을 통해 권력의 중추에 도달한다거나(6), 놀라울 정도의 영어교육열(7), ‘민족이란 언술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고, ‘미국식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를 사고할 수 없게 만든 점(8) 등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작동한다. 이러한 모습이 전적으로 당시 미국에 기인한 것이라곤 하기 어렵겠으나, 좌우간 미국이 한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는 징후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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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9

연합국은 2차 대전에서 추축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미국은 사할린을 제외한 일본 열도를 석권한 뒤 수년간 군정(민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일본에서 1951,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어진 두 개의 조약[각주:1]이 이듬해인 1952년에 발효될 때까지 7년간 군정을 실시했고, 오키나와(沖縄)가 일본에 최종반환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을 더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일본의 미군정기는 오늘날까지도 미·일 각국의 공식역사서술뿐만 아니라 대중의 역사인식, 대외정책 입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울림을 주는 파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문이 언급하고 있듯, 부시 정권의 대이라크점령정책 입안·수행과정에서 대략 한 회갑 전에 만들어진 대일점령정책은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참조됐다. 더하여 미측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은 미국이 再造한 국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미군정기(또는 점령기)’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염두에 둔 채 미국의 대일점령통치를 정보와 교육 기획(project)"이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에서 집필한 박사학위논문을 日譯한 뒤 증보한 것으로, 미국과 일본 양국의 여러 공식/개인 자료(문서, 영화, 면담 등)를 근거로 삼고, 戰時에 수립돼 점령(戰後)기를 지나 강화가 달성된 이후에까지 입안·변용·실행된 미국의 對日문화전략의 구조와 양상을 역사주의적으로 살폈다. 저자는 시종일관 점령기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가르치려고(“재교육·재방향설정”) 했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핵심주장으로 삼았고,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다른 주장들, 이를테면 미국의 점령정책은 과거로부터 강화 이후에까지 이어졌다라든가 ·일 양국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미국의 점령정책에 융합됐다등을 추가적으로 제기했다. 나아가 저자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서 수행된 기존의 대일점령연구들을 잘 정리하면서도,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종적한계, 즉 한 분야를 다른 분야와 제대로 연계하지 못하는 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가 내세우고 있는 미국학이라는 학제적 접근법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횡적인 연구방법을 표방하기 위해 연구의 시야를 일본사회의 모든 측면으로 넓히고자 한데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등은 쉽사리 알기 어려웠다.

 

여태껏 살펴본 냉전문화연구는 분석의 범주를 크게 세 층위, 사상·이념/제도·정책·매체/소비·현상으로 나눠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연구들은 세 층위 중 한 곳에 주로 머물거나(남한과 대만의 국립대학 인문학부 편제), 성긴 논리로 서로 다른 층위를 무리하게 연결하고자 한다거나(원자탄과 재지역화의 균열들),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이론을 충분한 반성 없이 곧바로 연구에 도입(국문학자들의 푸코 원용)하는 등 부족함과 아쉬움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세 층위 모두를 나름대로 적절하게 다루었다고 할만하다. 그러면서도 특히 제도(조직·계통정책(정보·교육매체(영화)’ 층위에 주목했고, 대개의 문화연구가 보여준 방법론(역사적 총체성을 제시한 후 맥락 안에서 내용을 분석한다기보다, 몇 가지 생각만을 제시하는 식)과는 달리, 먼저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자칫 사변적인 담론분석에 머물기 쉬운 문화연구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문제(“횡적인 연구의 한계(22), 과연 새로운 시각인지?(49), CIE 영화에 집중 등)가 없지 않지만, ‘점령정책의 실시(점령기)’와 함께 점령정책의 입안주체와 조직·기관들 사이의 생각과 상호작용을 차분히 설명하며 점령정책의 도출과정(점령 이전)’점령정책의 계승(강화 이후)’를 보여준 점, ·일 어느 일방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지만은 않았다고 지적하여 양측의 주체성을 드러내려고 한 점, 모르는 부분은 솔직히 인정한 점 등은 당장에 문화연구자가 본받아야 할 방법론적 미덕이라고 여겨진다.

 

책의 2장은 당시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에 영향을 끼친 생각의 흐름을 세 갈래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블레이크슬리로 대변되는 친일파’, 보튼이 중심인 유도파(온건)’, 맥리쉬 등이 포함된 재교육파(강경)’로 서술돼있고, 삼자는 정계와 학계 등을 넘나들며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이 일본인의 적극적인 참가 속에서 실행됐다는 저자의 주장에서, 당시 대일점령정책을 두고 벌어진 미·일 양국의 일치단결과 동상이몽, 또는 3의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러한 흐름들이 섞여 만들어진 대일점령정책의 일부가 대외정보·교육교류 프로그램(USIE)'으로 강화 이후에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4장과 5장의 주제는 점령 당시 육군성과 민간정보교육국(CIE)이 힘을 기울였던 다큐멘터리 영화(CIE 영화)이다. 두 장에 걸쳐 CIE의 설립경위 및 계통, CIE 영화의 기원, 육군성의 역할, 영화 내용분석 및 상영과 반응 등을 다뤘다.

 

1945827, 미태평양육군(USAFPAC)은 산하에 정보선전부(IDS)를 설립했고, 이 부서의 최고책임자는 전략사무국(OSS) 출신으로 육군무관과 심리전감을 맡았고 맥아더의 군사고문이기도 했던 펠러스(Bonner F. Fellers, 1896~1973) 준장이었다. 922, 맥아더는 IDSCIE로 개조한 후 102, GHQ/SCAP를 설치할 때 최초의 특별참모부서로 CIE를 다시 발족시켰다. CIE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가담했고, 전시의 심리전·선전의 기능을 계승했다. SCAP 일반명령 4(“모든 미디어를 통해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보급·선전하는 것”)CIE의 목적을 규정했다. 저자에 따르면, CIE는 본래 자문기구였으나, 워싱턴의 지침이 현지의 재량권을 크게 제한하지 않았으므로, 실제적으로 이 기구는 월권하여 미디어와 교육에 관한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했다. 같은 기구는 또한 모든 도도부현에 <시청각 자료실>의 설립을 의무화했고, 영사기와 영화를 배포했다. 일본에서 CIE 조직은 19487월경에 이르러서야 CIE 정보과 영화연극계(MPTB) 산하의 교육영화배급부(EFU)가 영화를 지휘하는 형태로 안착됐고, 라디오, 신문, 출판 등 문화산업 전반과 교육 활동에도 종사했다.

 

55(일본인 시청자의 반응)CIE EFU에서 실시한 시청자 반응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영화를 본 일본인의 반응을 정리했다. 19503월쯤부터 시청자에 대한 조직적인 반응조사가 실시됐고, 이 절이 근거하고 있는 자료는 19506~11월의 조사표 565장이다. 자료의 특징을 언급하자면, 가나자와(金沢)와 후쿠시마(福島)를 제외하곤 조사 장소를 알 수 없고, 상영회의 주최자가 시청자의 반응을 수합하여 요약하고 논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자료는 시청자의 육성을 들려주진 못하지만, 경향을 파악하기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논평은 미국의 과학기술’, ‘스포츠(야구)’, ‘여가활동(스퀘어 댄스)’에 현저한 관심을 표명했고, 정치적·교육적 내용이 담긴 영화는 인기가 없었다. 표본이 가지고 있는 대표성 및 신빙성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를 통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미국의 원폭투하는 즉사인원만 대략 12만 명(7+5)이라는 가공할 피해를 남겼다.[각주:2] 헌데 조사가 실시된 년도는 1950년으로, 원폭이 투하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이 겪은 피해 수준과 과학(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인식 간의 괴리는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CIE 영화의 포장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과학(원자력)에 대한 불평을 조사표에서 배제시킨 것인지, 또는 역사에 대한 일본 민초들의 뼈저린 반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의문이다.

 

2장에서 미국 대일점령정책을 만든 조직·계통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었다.

 

1942년 봄. 국무부가 특별조사부(SR) 설치.

1942년 가을. 블레이크슬리와 보튼이 SR 극동단에 배속.

19431. 블레이크슬리 무리가 SR 정치연구국 영토문제소위원회(TS, 의장 보우맨)에 배속, T-357a 작성. 아직까지 매체를 재교육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19441. 국무부가 전후계획위원회(PWC) 설치, 블레이크슬리 무리는 국가지역위원회(CAC)의 하나인 부처간극동지역위원회(IDACFE, 의장 블레이크슬리)에 배속. 친일적 CAC-116과 이를 두고 수정을 요한 PWC-108b가 제안됨. 매체가 재교육수단으로 대두됨.

(IDACFE CAC PWC)

19443·4. PWC-108b를 두고 논의가 진행됨. 세 시기(엄격한 통제/주의 깊은 관찰/국제사회로 복귀) 구분.

19445. PWC-152b 승인.

19446. PWC-288(CAC-237)의 초안이 작성됨. 매체의 역할을 명확히 정의(PWC-288b).

194412. 삼부조정위원회(SWNCC) 설립.

19452. SWNCC가 극동소위원회(SFF, 의잔 두맨) 설치. 블레이크슬리 무리는 SFE의 작업단에 배속.

(작업단 SFE SWNCC JCS)

19457. SWNCC 해군성대표 게이츠가 SWNCC-162/D(“재교육·재방향설정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확립됨) 검토를 지시.

1945821. 블레이크슬리는 SWNCC-150(점령정책의 기본노선)SWNCC-162/D(SFE-116))을 결론 내려야한다는 IDACFE의 견해를 전달.

1945831. 국무성이 국제공보문화국(OIC)를 설치.

194596. SWNCC-150/4 승인. 불개입주의/개입주의를 각각 반영.

194597. “일본인의 재방향설정을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보튼)” 조직됨.

19451226. SFE-116/4(일본인의 재방향설정) 완성.

194618. SFE-116/4가 맥아더에게 송부돼 민간정보교육국(CIE)의 활동 지침이 됨.

  1. 1951년 9월 8일, 연합국 48개국과의 다자적 평화조약(남한·북한·중공·대만·소련은 서명하지 않음)과 미·일간 안보조약을 일컫는다. 1952년 4월 28일자로 발효됐고, 같은 날 일본은 타이페이(臺北)에서 대만(중화민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다우어(John W. Dower)는 샌프란시스코체제가 일본과 아시아 주변국들 간의 화해와 재통합을 막고, 평화의 도래를 지연시켰다고 평가했다. [본문으로]
  2.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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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8

이 책은 사상계연구팀이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를 종축으로 삼고, 사상계(이하 사상계’)를 비롯한 다양다종의 간행물을 자료적 근거로 한 연구 성과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총론을 쓴 박지영에 따르면, 사상계는 195341일에 창간됐고, 김지하의 글이 실린 19705월호(205)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지도원(이후 국민사상연구원으로 개칭)19529월 창간하여 발행한 기관지 사상4호 만에 폐간을 맞이하자, 장준하가 제호를 바꾸고 미공보원(USIS)으로부터 종이 원조를 받아 독자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각주:1] 창간 당시 3,000부가 매진됐다는 기록에서 사상계에 대한 서울, 그 중에서도 지식인층의 관심과 반응이 사뭇 뜨거웠음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이후 1961년에 들어 통권 100호를 발행했고, 4·19 이후 전성기를 맞아 발행부수가 65,000부까지 증가했다. 사상계는 지식인 종합잡지라는 점에서 개벽1960년대 후반의 창작과비평의 가운데에 놓여있고, 1946서울신문에서 발간한 신천지(이하 신천지’, 195112월에 속간, 1954년까지 발행)민성(1948~1950)의 뒤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각주:2]

 

다음은 이 책의 탄생배경에 관한 추측이다.[각주:3] 201142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는 냉전과 혁명, 그 사회역사적 분절과 이행의 논리들이라는 이름의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 대회서는 모두 7명이 발표하였는데, 그 중 6명의 글이 이 책에 실려 있고, 각 제목은 발표문의 제목과 대동소이하다.[각주:4] 더하여 대회 말미의 종합토론에는 이상록, 정진아 등이 참여했는데, 이 책은 그들의 논문도 게재했다. 따라서 이 책은 일군의 학자들이 모여 사상계를 읽는 세미나를 가졌고, 중간 결산격의 발표문을 가다듬어 다시 모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다섯 편의 글은 모두 국문학자가 쓴 것으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생산된 글을 매개로 논지를 전개하고 형식상 담론분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각각이 구사한 자료적 근거나 내세우는 주체는 다소 차이가 있다. 먼저 공임순과 장세진의 글은 시기적으로 1940년대부터 6·25전쟁 직후까지를 다루었고, 두 글 모두 신문과 잡지 등을 이용했으나, 전자가 민성과 신천지에 주목한 반면, 후자는 신천지와 海洋, 최남선의 글과 당대의 교과서 등을 주된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는 자료를 취합·선별하여 당대 제출된 담론의 추이(‘원자탄과 정치의 도덕화)와 의미의 전환(‘냉전성이 가미되는 태평양’)을 잘 보여주지만, 정작 각각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 두 글은 독일과 프랑스의 문제적철학자인 푸코와 슈미트를 서로 다른 지점에서 인용하고 있어 흥미롭다. 푸코의 언술을, 1946‘10월 항쟁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태평양을 바라보는 권력이 배인 시각, 공간()”을 설명하는데 차용했다. 칼 슈미트의 경우, 원자무기절대 전쟁(‘정치의 도덕화’)남한의 전면전 요청이라는 도식을 파악하는데, 유럽 공법(새로운 공간질서 규정)’을 부연하는데 빌려 썼다. 두 글 모두 철학자를 인용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진 않으나, 그나마 보다 인용의 통일성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김예림은 1950년대 아시아 내셔널리즘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남한의 입장과 반응을 살피고자 했다. 저자는 사상계와 신천지를 통해 동남아를 둘러싼 당대의 담론 지형을 탐색했다. 월러스틴을 빌려 지역학 연구의 부상을 간략히 본 뒤, 동남아에 관한 남한 나름의 앎의 지층을 검토하는 구성이다. 그 결과, 저자는 베트남전 이전까지 남한의 아시아 내셔널리즘인식은 대개 반공주의근대화론에 갇힌 대자적 자기인식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박지영과 권보드래는 사상계의 문화번역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의 작동을 분석하려고 했다. 전자는 당대 남한식으로 번역된 한 철학자의 글에, 후자는 번역된 글들의 개황과 문화자유회의와의 관련성에 집중했다. 는 사르트르의 번역 양태를 좇아, 당대 한국인 역자들의 냉전인식 또는 시대정신이 어떻게 번역에 드러나는가를 보여줬다. 그 결과, 당시는 비판 대상은 번역되지 않고 비판 논리만 번역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반공주의가 작동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당시 지식인들이 반공주의를 내면화해야 했다고 전제했는데, 정작 그 과정은 서술돼있지 않다. 는 사상계 논조의 전환점을 이 책의 총론과는 조금 다르게 설정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둘을 비교하자면, 총론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진행되는 ‘1963년 이후저항로 바뀌는 전환기로 설정한데 비해, ‘1964년 초반다른 길을 검토하게 되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서도 보이듯, 그러한 모색(중립, 3세계 노선)이 머지않아 배제될 것임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첫째, 다섯 편의 글은 모두 미국의 영향력(내지 담론)과 반공주의를 남한 사회에서 압도적이고 규정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인식은 타당하다. 하지만 문화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영향력이 한국 사회의 전반을 가로지르며 전개되는 과정은 어떻게 포착해야 할까? 다시 말해, 그러한 유입된구속성(또는 규정력)의 구조나 대두는 대체 어떻게 설명 내지 언어화할 것인가? 의 글머리에 두 번 나오는 생존이란 단어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고, 더불어 정치사, 사회사 서술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책의 저자들은 나름대로 푸코적인(Foucauldian)’ 방법론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특정 시대 특정 담론의 배치와 그러한 배치가 켜켜이 쌓인 지식의 地層을 밝히는 고고학’, 담론들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권력관계들의 총체가 정치적·역사적으로 구성하는 진리(의 정치사)를 탐구하는 계보학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들은 그러한 방법론을 어떻게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지적했지만, 저자들의 서술전략은 반공주의근대화론이 어느 순간 최종심급으로 자리매김했고, 그에 따라 당대 담론의 추이가 조정됐다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반공주의근대화론은 대체 어떻게 지식인에게 내면화됐는지, 또는 사회적 발언의 한계로 거듭났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1. 권보드래·천정환, 「《사상계》가 사랑한 세계의 지식」, 『1960년을 묻다』, 천년의상상, 2012 참고. [본문으로]
  2. 동방미디어(http://www.koreaa2z.com)에서 『사상계』의 원문을 볼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 『민성』, 『신천지』 등 ‘한국근현대잡지자료’의 목차를 검색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자세한 사항은 『교수신문』 인터넷판과 검색을 통해 확인했다.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간행하는 『西江人文論叢』 31집(2011.08)은 앞서 4월에 개최된 학술대회의 발표문들을 특집의 형태로 담았다. [본문으로]
  4. 해당 인물은 다음과 같다. 공임순, 김명임, 김예림, 박지영, 정영진, 한영현 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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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6

이 책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학진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야심차게 기획했고, 난항을 겪으며 도출해낸 냉전문화에 관한 여러 연구자들의 보고서 또는 연구결과이다. 대개는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50년대를 종축으로 삼았고, ‘문화를 매개로 하여 일국적·지역적 수준에서 작동한 아시아의 냉전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제출됐다. 책은 세 부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이념’(1), ‘제도’(2), ‘대중문화’(3)라는 주제로 묶였다. 1부에 실린 세 편의 글은 차례대로 중··(백원담), 한국(김예림), 싱가폴과 말레이반도(렁유)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잡지·신문·소설 등 당대에 생산된 글(text)과 담론을 주된 자료적 근거로 하며, 각 내용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복원한다는 방법론을 취했다. 하지만 그러한 복원이 잘 이뤄졌거나 또는 어떤 새롭고 총체적인 역사상 내지 관점을 제시했다기보다, 그간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익숙지 않을 수 있는 내용을 전면에 배치하여 향후 연구의 밑바탕을 마련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2부에 실린 다섯 편의 글은 차례대로 대만과 한국(윤영도), 홍콩(뤄융성), 일본(치카노부), 한국(이종님), ··(이선이)을 배경으로 하며, 국가 간의 제도를 비교하거나 또는 일국적으로 작동한 제도·정책을 분석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구조와 다소 선언적인 주장(특히 152)이 종종 보이지만, 아시아 각국의 냉전문화를 산생한 (사회 또는 정책)구조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각각을 요약하며 살펴보도록 하겠다.

 

백원담은 냉전성을 염두에 두고, ‘아시아의 아시아 인식이라는 아시아주의또는 아시아상이 비대칭적(/西, /)이고 대극적(/)분열적 아시아상으로 공고화되는 과정을 살피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는 공고화를 묘사했다기보다,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 아시아주의(또는 상상)’의 계보를 어떻게 정위(定位)할지에 관한 나름의 문제의식만을 늘어놓았다. 저자에 따르면, ‘냉전적 아시아주의戰前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사상을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병영적 권역주의의 변주라고 부를만하다. 그러므로 아시아에서 탈식민의 선결조건은 곧 대동아공영권 사상의 해체와 성찰이 된다. 따라서 저자는 먼저 루쉰 연구가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1910~1977)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적 논의(‘아시아의 내셔널리즘’, ‘새아시아주의)를 중심으로 전후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살폈다. 이어 저자는 갑자기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한국전쟁 연구를 빌려 논의를 이어나가려고 했으나,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와 그 지도부의 사상의 복권(復權)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마르크시즘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등 이론의 이해방식, “부르주아민족”(54), “민주주주민족통일전선”(62), “숙정”(68) 등의 현란한 용어 구사는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김예림은 해방 이후 한국인 엘리트집단(권력자, 지식인 등)(, 동남)아시아인식 또는 심상지리를 해방 이전부터 냉전기까지의 연속성 속에서 살피고자 했다. 저자에 따르면, 그의 분석단위인 한국인 엘리트집단은 일정한 (아시아)담론을 공유했고, 그것은 사상계신천지등의 잡지, 신문에 드러났다. 이어 전후 일본의 아시아 망각과는 달리, 한국은 아시아호출했는데, 이러한 차이는 양국에 대한 서로 다른 미국의 정책에 기인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은 냉전 지도변방에서 중심으로 상상적 위치 이동을 수행했다. 이 글은 시계열을 따라 자료를 배치하여 담론변화의 추이는 잘 보여주었으나, 정작 그 사이에 놓여있는 전환의 고리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저자는 “1950년대 초반의 동양론이 아시아의 열등성에 주목했고, “새로운 반공적 갱생을 추진했다고 서술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엘리트집단이 어떠한 모세혈관을 통해 냉전적 성격을 선택 또는 수용했는지, 또는 과연 그것이 냉전적 성격인지 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렁유의 글은 원문이 난해한 이론적 용어로 점철돼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별도의 배경지식(말레이 반도의 현대사)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읽기 어려운 편이나, 1부에 실린 3편의 글 중 가장 흥미롭다. 저자는 먼저 서구 냉전문화연구의 존재양식(자본주의-공산주의 축, 중심-주변 축 등)과 말레이반도의 현대사를 서술했고, 기존 서구의 냉전문화연구로는 포착하기 힘든 복수성관리할 것을 주문했다. 저자는 당대 말레이반도에서 제국주의세력을 한편으로, 공산측 세력과 싱가폴 인민행동당 등 민족주의적 인텔리겐챠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투쟁의 양상과 추이를 크게 현실과 담론이라는 두 분야에서 추적했고, 동남아의 역사상이나 서사를 지역이라는 지점을 통해 더욱 파편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저자의 요청은 한국의 냉전문화를 분석하는데도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례로, ‘국가라는 자칫 자명해 보이는 연구단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파편적이고 復數的냉전문화의 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자료로 삼을 것인가?

 

윤영도의 글은 한국과 타이완 양국의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각 대학의 인문학부 편제와 지식-담론의 형성과정을 묘사하고자 했다. 저자는 당시 제국대학에서 생산한 인문학적 지식-담론이 식민지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제했고, 양국 국립대학 구조의 변천과 인문학부 편제의 대강을 살폈다. 하지만 저자는 시종 지식-담론이 양국의 국가형성 과정에서 중요했다고 서술했으나, 정작 그의 글은 당시 지식-담론의 어떤 내용이 어떠한 방식으로 국가건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더하여 저자는 국대안과 관련해서도 연구사 정리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각주:1]

 

뤄융성(羅永生)의 글은 미소대립을 심급으로 하는 냉전서사로는 홍콩현대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홍콩의 냉전 경험을 탐구했다. 저자는 우선 중국현대의 민족주의를 약술했고, 뒤이어 중국의 대()홍콩 정책이 발표와 실질 사이에 괴리가 있었음을 드러냈다. 저자에 따르면, 홍콩은 대체적으로 식민지라는 현실(영국의 탈정치화라는 이데올로기 공세와 그에 대한 중국의 승인) 속에서 (중공편향)’(국부편향)’의 서로 다른 세력 또는 이념이 강도를 달리하며 맞부딪힌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문화적 매체(학계, 달력, 영화, 신문 등)를 통해 전개된 이러한 좌우대립은 곧 식민지적 탈정치화 정책속으로 매몰됐고, 마침내 상업주의소비주의의 홍수 속에서 데탕트를 거치며 소거됐다.

 

미치바 치카노부(道場親信)의 글은 다우어(John W. Dower)의 분석을 빌려 천황을 매개로 삼은 뒤, 다우어가 놓친 전후의 일본문화론이라는 정치/문화담론의 형성사와 전개를 살폈다. 미국의 전쟁수행기구 중 하나인 전쟁정보국(OWI) 산하 외국전의분석과(FMAD)와 깊은 관련을 맺은 일본, 그 중에서도 베네딕트 앤더슨의 약력과 그녀 책의 유통·번역 과정 등이 서술했다. 저자는 국화와 칼이라는 인기작이자 문제작을 매개로 미·일 간 문화정치의 양상을 살폈고, 그 때 만들어진 상징천황제정치문화로 분식(粉飾)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종님은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의 창시자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를 충분한 설명 없이 인용했고, 자료의 신빙성을 따져봐야 하겠으나, 미군정 시대의 매체전략을 몇몇 역사적 사실을 나열함으로써 조금 드러냈다. 이선이는 廢娼을 매개로 중국과 한국의 냉전, 국가형성, 젠더문제 등 다양한 소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려고 했으나, 정작 냉전문화가 그녀의 분석에서 도출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글은 분석단위(국가·지역·개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비판의 초점(‘근대’·국가·‘문명’·젠더)도 뚜렷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1. 김기석은 자신의 저서 6장에서 해방 이후 서울대를 중심으로 미군정과 한국인 ‘좌우파’ 교수 간의 갈등과 해소를 다뤘다. 미군정의 “포섭과 배제” 전략은 결국 김석형(金錫亨)이나 백남운(白南雲) 같은 한국인 연구자들로 하여금 신생 ‘김일성대학’을 택하게 했다. 김기석, 『한국고등교육연구』, 교육과학사, 2008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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