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북한연구2014. 11. 7. 07:11

이 책은 저자의 정치학 박사학위논문인 북한의 집단주의적 발전 전략과 수령체계의 확립(2001)을 증보한 것이다. 저자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북한의 독특한 정치체계인 수령체계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평가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이 책은 자료적으로는 북한의 간행물에 기초하였으며, 방법론적으로는 북한의 정치적 배경을 경시하진 않지만 주로 사회경제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수령체계가 형성·성립되는 과정을 추적하였다. 이하에서는 책의 구성, 자료와 방법론, 핵심 논지를 살펴본 후에 논평을 시도하겠다.

 

먼저 저자의 약력부터 간단하게 살펴보자. 저자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부과정을 마친 후에 같은 대학교의 정치학과대학원에 진학하여 석·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로 북한 정치를 공부했고, 역사문제연구소·한겨레사회연구소·한국사회과학연구소 등지에서 북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2003년에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로 취임했고, 2014년 현재 같은 대학교 통일학과대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비교적 다양한 저작에 공저자로 참여하였고, 대표작으로는 박사학위논문을 증보한 이 책과 북한의 경제위기를 다룬 북한의 경제위기와 체제변화(선인, 2009)를 들 수 있다.[각주:1]

 

이 책은 모두 6, 500여 쪽으로 구성돼있다. 1장 서론에서는 연구의 대상과 목적을 밝혔고, 같은 주제를 다룬 선행 연구를 일별했으며, 저자가 입각한 분석의 틀을 설명하였다.. 다음 두 장은 6·25전쟁 이후의 1950년대를 크게 경제위기(2)와 당적 지도체계의 확립(3)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4장과 5장도 앞서 두 장의 구성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데, 여기서는 1960년대의 경제위기(4)와 수령 지도체계의 확립(5)을 다루었다. 6장 결론에서는 본론의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면서 1950~60년대 북한식 사회주의 발전 전략의 귀결이 수령체계의 탄생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평이(平易)한 논조에 입각하여 설명을 이어나갔고, 북한에서 생산된 많은 수의 문건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서사를 구성한 부분은 흡사 역사가의 세심함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평자는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북한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 읽는 것이야말로 북한 연구에서 필요한 실사구시적 자세라고 밝혔다. 그는 실사구시를 강조하며 이전까지 북한을 자기식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는모종의 연구 경향을 비판하였다. 평자는 저자의 강조와 비판이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한편 저자의 비판을 이 책에 그대로 적용해볼 경우, 독자는 의외의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사실은 바로 이 책 어디에도 사료 비판이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북한을 보려는 것은 북한 연구자에게는 당연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가 근거로 대는 자료들이 얼마나북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북한에서 나온 문헌의 성격상, 그리고 모든 사료의 특성상 북한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엄정하고 세밀한 사료 비판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책의 각주에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김일성저작집이나 김일성선집등은 많은 조작문이 섞여있고, 근로자는 당의 노선과 정책을 보여주는 당 기관지로서 사실(史實)보다는 당의 입장이나 세계관에 부합하는 설명을 기재했을 가능성이 무척 높기 때문이다.[각주:2] 더불어 이 책은 ‘~에 따르면’, ‘~것으로 추정된다.’ 등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료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전재(全載)하거나 역사상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추론을 시도하였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그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저자가 유독 사료의 성격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점은 그 자체로 큰 약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독자는 이 책에서 의외로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사료 비판을 하지 않고 북한에서 생산한 사료를 그대로 가져다썼다면, 6·25전쟁 이후부터 1970년대 이전까지 북한의 상황을 북한의 주류적(당적) 시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물론 우리가 조선로동당(이하 ’)의 역사 서술을 사실로 받아들여 추수(追隨)할 필요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당이 어떻게 자기네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는지를 애써 무시할 필요도 없다. 김일성이 언제부터 북한의 실권자였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명확한 설명이 나오지 않은 상태이나, 이 책이 잘 그려내고 있듯 1970년대 이전 북한의 역사는 김일성이 체계의 정점인 수령의 자리에 올라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내재적 독해에 입각하여 당이 북한의 1950~60년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따라가 보자.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북한 사회는 체계를 뒤흔들만한 경제위기를 겪었으나, 그 모습은 각각 달랐다. 그 내용은 전자의 경우, 중공업 우선노선과 급진적인 농업협동화정책에 따른 사회의 불만, 이를 무마시키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인 재정지원과 대외원조의 감소가 결합하여 축적위기가 도래했던 것인 반면, 후자의 경우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노선 등 고유한 성장 전략의 한계, 그리고 북·소 갈등으로 인해 다시 불거진 경제위기였다.

 

경제위기는 곧 그 경제를 구성하는 북한 사회와 체계의 위기였다. 저자는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지도부, 즉 당이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을 행정 관료적 지도체계집단주의적 당적 지도체계수령 유일 지도체계라는 도식으로 풀어 설명하였다. 195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경제 관리체계는 행정관료 지도를 우선시하고 이를 당이 보완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축적위기에 맞닥뜨린 지도부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당내갈등을 풀기 위해 대중노선의 방법을 이용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195612월부터 시작된 천리마 운동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이를 반종파투쟁과 결부하여, ‘투쟁의 일환으로 운동이 나온 것이 아니고 운동의 전개 속에서 투쟁이 결합됐다는 해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어 1960년대 당의 집단주의적 발전노선이 경제위기와 더불어 갑산파와의 갈등과 같은 요인으로 도전받자 북한은 더욱 집단주의적인 발전전략을 북한사회에 강요했고 결국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다.[각주:3]

 

저자의 설명 방식은 위기(모순)대응변화의 순으로 변증법적이고, 따라서 독자는 저자의 서술을 바탕으로 해당 시기 북한 사회의 전반적인 경향과 더불어 당이 운동하는 생생한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리자의 역사이면서 당이 회고(回顧)하는 과거에 불과하다. 더하여 저자는 북한을 설명하면서 동시대의 소련 및 중국과의 비교를 시도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소련이 실용(‘자본주의적’) 편향을 보인 반면, 중국은 이념(‘공산주의적’) 편향을 보였고 북한은 그 가운데에서 이념을 우선시하지만 물질적 유인의 결합을 간과하지 않은 중용을 택했다. 이는 북한의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듯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저자의 도식적인 관점과 서술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계속 의문이다. 하지만 자료들이 얼마나 사실(事實)을 말해주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 책은 분명 독자들에게 1950~60년대 북한 역사 및 수령체계의 형성에 대한 북한의 관점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많은 정보를 일러준다고 할 수 있다.

  1. 김남식 외, 『새로운 세기를 예비하며』, 대동, 1992; 현대경제연구원통일경제센터, 『북한 교역 투자 가이드』, 21세기북스, 2000 등에 공저자로 참여하였다. [본문으로]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음, 『북한현대사 문헌연구』, 백산서당, 2001, 72~73쪽; 김용현, 「『근로자』 분석을 통한 북한의 군사화 담론 변화 연구: 1946-2006」, 『통일문제연구』 21(1), 2009, 270~271쪽 참고. [본문으로]
  3. 정성임, 「이태섭,『김일성의 리더쉽 연구: 북한의 집단주의와 수령체제』(들녘, 2001)」, 『아세아연구』 44(1), 2001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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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28. 16:36

 이 책은 냉전아시아’, ‘신중국6·25전쟁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다룬 11편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다. 여기 실린 글들이 각각 다룬 주제, 자료, 논리는 결코 같다고 할 순 없지만, 공간적으로는 아시아를 시간적으로는 1949~1953년의 기간을 다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한편 평자는 지난 봄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1부에 초점을 맞추어 재독했다. 재론하겠지만, 1부는 신중국국민 만들기(주체형성)’ 또는 국민동원과 그 이데올로기에 주목한 글이 대종을 이뤘다. 평자는 그러한 서술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중공, 특히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부의 생각과 논리를 일부나마 확인하고자 했다.

 

 구성의 측면에서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원담의 서론은 책의 전반적인 논지와 성격을 강하게 규정지으려고 하였다. 그는 현란한 어휘를 통해 냉전6·25전쟁의 아시아적맥락을 부각시키고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어 1부와 2부는 각각 5편의 글을 담았다. 전자는 중국대륙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담론분석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당대 행해진 운동과 그 논리를 서술한 것이다. 반면 후자는 중국 국내외의 주변부의 역사를 천착하였다. 따라서 2부가 1부보다는 이 책의 원래 취지에 좀 더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서론에서 확인한 바, 이 책의 핵심적인 취지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냉전아시아적맥락을 파악하여 서구 중심적(이분법적)냉전인식을 지양·탈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탈식민냉전적자장(磁場) 위에서 전개됐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한편으로 아시아주변부냉전신중국이라는 이중의 요인(또는 압력)에 대응해야 했다. 그렇다면 곧바로 신중국(아시아의)‘주변부의 관계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떠오른다. 현재 아시아의 문화냉전에 관한 연구는 걸음마 단계이다. 자료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의 확보에서부터, 그렇게 그려진 아시아를 읽어내고 더욱 풍부한 해석을 제공하는 데까지 가야할 길이 꽤나 멀다. 그렇다고 해서 대국굴기에 힘입은 중국 연구자가 관변적논조, 즉 마오를 격찬하거나 오늘날 중국의 외교정책을 정당화하는 서술을 통해 냉전아시아적맥락을 자기네들 입맛에 맞게 요리하도록 좌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평자는 2부의 글이 1부에 실린 글보다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평자는 1부를 보려 하는가? 우리가 1부의 글을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선 1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론에 드러난 책의 취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론은 다음과 같이 6·25전쟁을 정의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중과 전후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이에 대응한 소련의 피압박민족해방운동에 점철된 자기이해관철방식의 충돌이 야기해낸 강권적 역사현실에 대한 주체적 극복경로이자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 기획의 각축.” 독자는 이 구절에서 ·소의 영향력 속에서 전개된 아시아 제국(諸國)의 주체성을 다루겠다는 공편자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핵심은 아시아의 주체성이다. 이어 저자는 흡사 마오의 중간지대론에서 빌려온 것 마냥 4분화된 도식을 제공한다. ‘소비에트화/(민족화/반공주의)/아메리카화가 바로 그것인데, 기존의 냉전적 시각에서 괄호 안에 있던 수동적인 아시아를 드러내어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이다. 공편자는 책의 취지를 물화시키기 위해 중국의 6·25전쟁 경험을 분석하고 중국이라는 장소가 지닌 다양한 성격을 추출하며 문화적 차원에 주목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평자는 이러한 취지가 기존의 시각에 균열을 내고 다원화의 가능성을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한다. 그러나 아시아와 중국 간의 경계설정은 모호하다. 그러한 모호함이 역사상을 잘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간 간과돼왔던 아시아주체성’(모택동사상의 반근대적 근대기획 등)을 웅변하기 위해 중국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인지는 의문이 들었다.[각주:1] 더하여 이 도식은 상당히 국가주의적이다.

 

 서론에서 제시한 이 책의 취지를 염두에 두고, 1부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자. 이남주는 전판 운동’(19511) 산판 운동’(12)의 급진화를 소재로 중공이 인민민주독재의 일정을 앞당기는 모습을 살폈다. 청카이의 글은 평화서명운동의 중국화’, 항미원조운동으로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신중국의 선택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임우경의 글은 냉전적 국민으로 변화해가는 중국 인민의 모습을, 허지시엔은 1950년대 주창됐던 신애국주의 운동을 통해 중국적 주체의 형성과정을 추적하였다. 마지막으로 허하오는 마헝창 소조(馬恒昌 小組)라는 특이한 사례를 통해 중국의 노동국민이 형성되는 과정을 그려냈다. 그렇다면 1부를 꿰는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독자는 1부의 서술을 통해 짧게는 1949~1953, 길게는 1949~1960년대의 기간까지 중국 본토의 운동사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운동의 주체인 중국국민이 빚어졌고, 중국사회의 성격이 바뀌어갔다. 둘째, 그러한 선전, 교육, 동원의 구성과 내용을 국민(또는 주체)형성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 운동은 곧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중공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어야 했다. 참전은 그러한 중공의 기획을 가속화시키는 계기이자 결과였다. 적어도 공식서사에서는 항일반미로 대체됐고, 국민에 대한 갖가지 요구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됐다. 저자들에 따르면, 공론장은 사라졌고 중앙과 어긋나는 목소리와 기억은 공적인 영역에서 추방됐다. 셋째, 중국인 연구자에게 해당되는 부분으로 중공 지도부에 대한 찬양 및 해석상의 무리수를 들 수 있다. 허하오의 글이 대표적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인 노동자들은 중국 사회구조의 논리맥락에 입각하여 특정 시기의 역사적 어려움을 전복시켰고, 중국 공산당의 이론 구조를 받아들였다.도무지 실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더하여 오늘날 G2로 급부상한 중국의 시원을 건국으로 파악하다보니 저자들은 자연스레 당시 지도부의 이론이나 세계인식을 추인(追認)한 셈이다. 맹자를 인용하는 부분에서 평자는 당혹스러움마저 느꼈다.

 

 세 번째 모습은 저자들의 존재구속성(외재성)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보건대, 첫째, 본토에서 학술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선사하는 당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례로, 주지안롱의 체포를 들 수 있다. 둘째, 그러한 속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비-서구적인 어떠한 설명방식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지 모른다. 즉 그들이 처한 물적 구조가 중국의 역사적 우월함을 되풀이하도록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냉전문화아시아적관점에 입각하여 재확인하는 작업은 우선 양적 축적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아시아적냉전의 특수성을 일반화하기엔 이르지 않은가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한편으로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추가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아시아중국이었는가? 냉전의 아시아적특수성/중층성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공저자들은 지역을 얘기했는데, 그 결과는 국민국가의 탄생인 이유가 무엇인가? ‘신민주주의인민민주전정의 관계는 무엇인가? . 이러한 질문에 답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아시아적냉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물론 백원담은 다섯 가지 이유(①냉전의 아시아적 기원(분할점령과 신중국 탄생) ②냉전의 실질적 체제화 ③냉전의 구도가 아시아에서 미중 중심으로 중첩적으로 재구성됨 ④아시아에서 냉전은 아시아 지역화의 기획으로 탈냉전의 구도를 일찌감치 형성했음 ⑤냉전의 문화심리구조가 계급적 아비투스로 공고화됐음)를 들어 6·25전쟁과 중국 간의 상관관계 및 이후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평자는 ①, ②, ③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면서도, ④와 ⑤에 관해서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시아 지역화의 기획’은 대체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어떠한 ‘탈냉전’의 구도를 지녔나? 또는 ‘계급적 아비투스’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그것의 담지주체는 누구였나? 등의 의문이 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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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0. 26. 22:41

 1970년대 초 이른바 데탕트(긴장완화) 시기 국제질서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정착된 미·소간의 적대적 공존은 지구 도처에서 냉전과 열전(베트남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변주됐으나, 어디까지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극체제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기왕의 국제질서 안에 변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고, 국제무대에서 중국이 하나의 주연으로 등장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미·중 관계가 개선되면서 촉발된 것이었고, 장차 중국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할 터였다.[각주:1]

 

 이 책은 앞서 말한 국제정치적 변화를 염두에 둔 채, 1968년부터 1973년까지의 시간을 종축으로 삼고, 국제관계와 남북관계를 횡축으로 삼아 미중 관계개선(국제정치), 남북 대화의 전개(남북관계), 남북의 국내정치적 변화(국내정치) 등을 각각의 연관 속에서 세밀하게 그려냈다. 저자는 최근 공개된 1970년대 한국자료와 미국자료(미국무부에서 생산한 미국 외교관계 문서집(FRUS), 중앙문서 파일(Central Files), 특수문서 파일(Lot Files))를 주된 사료적 근거로 삼고, 북한 및 중국자료로 보충하는 방식을 통해 당대의 개별 사안들을 넘어 1970년대 전반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을 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미중 관계개선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비로소 주연으로 올라선 중국을 역사연구의 범주에 넣어 분석한 것은 공전의 성과라 할 수 있다.

 

 한편 저자의 눈은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사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서 한국현대사의 구조적 문제를 겨냥한다. , 저자는 데탕트기 국제질서 자체에 관한 탐구보다는, 그러한 배경 속의 분단문제를 재고하고자 했다. 남북분단이라는 극단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일상적인상황은 한국현대사와 시작을 같이 하는 굉장히 특수한 관계이자 문제였으나, 그것을 국제관계와의 관련 속에서 학문적으로 분석한 성과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장준하와 백낙청 등 지식인들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공개된 자료들을 통해 1970년대 초의 남북분단 문제를 거시적으로 조망했다. 나아가 저자는 68년 한반도 안보위기를 시점으로, 미중관계 개선 속에서 한반도의 현상유지 및 영향력 온존을 꾀한 미국과 중국의 의도, 그리고 외압에 나름대로 대응하여 결국 각자의 유일체제를 형성한 남북 양측 집권세력의 향배를 면밀하게 추적했다.

 

 저자의 연구는 선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아쉬움과 한계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글은 공개된 자료를 섭렵해 당시 각국 정부의 속셈들을 잘 밝히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상황설명에 치중한 듯 보이고, 구조적인 분석은 다소 미흡한 것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시종일관 데탕트를 통해 한반도의 분단이 한반도화”, 또는 내재화되었다고 설명하고 그러한 정황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으나, 한반도 분단체제가 어떤 동학을 통해 그 구조를 재생산하는지에 관한 분석은 거의 없다. 특히 분단의 해결에 관해서는 남북 권력집단의 무책임성(또는 식민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쳐 어떠한 대안적 실천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1970년대 초반 데탕트기의 남북관계를 미중관계와 맞물린 것으로 보고, 그것을 실증적으로 조망한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는 노작이다.

  1. 박태균, 「미중관계와 남북관계의 복잡한 방정식 풀기」, 『역사와 현실』 86, 2012, 39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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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0. 26. 22:39

 저자는 6·25전쟁 휴전 직후부터 5·16 쿠데타까지의 시간을 종축으로 삼고, 미국무부의 의견을 포함한 남한의 각 정치세력들의 통일논의와 정치·사회적 갈등을 횡축으로 삼아 분단을 바라보는 우리 내부의 시각과 이해관계의  차이를 드러내고, 규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저자는 한국의 분단문제가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민주주의, 경제발전, 외교 등)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상과도 깊숙이 얽혀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분단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인 통일론을 살핀다면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문제로 바라보았고, 대응하며, 어떠한 해결의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관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통일론은 각 정치세력들이 냉전과 분단에 대처하는 기본방식을 함축할뿐더러 남한사회의 발전전략에도 긴밀히 닿아있었다. 따라서 저자는 통일논의를 중심으로 당시 정치세력 간에 界線을 굵직하게 그어 각각을 서술하고 비교했다. 이러한 방식의 서술은 시기별로 등장한 1) 통일론의 내용, 2) 통일론을 주장한 정치세력, 3) 통일론의 전개과정 등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더하여 저자는 각 정치세력의 통일론이 국내외적 정세(냉전체제, 시민사회)의 변동과 맞물리는 동시에 이전의 통일담론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자의 논의를 뒷받침 하는 자료적 근거로 당시 남과 북에서 발간된 신문과 잡지 등 출판물, 한국과 미국의 관찬 자료 등 보고서, 당시대를 산 인물들의 증언(송남헌, 박병엽 등) 등이 있다. 그 중 특히 혁신계 신문이었던 민족일보를 주로 활용하여 1950년대를 통틀어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던 혁신계 세력의 면면을 자세히 다룬 점이 눈에 띤다. 사상계를 통해 당대 지식인의 인식과 고민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논의 현황을 일별하려고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그러한 잡지가 당시 지식인 사회에 특별한 파급력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저서는 총 4장으로 이뤄져있으나, 남한 정치세력의 통일논의를 자세하게 다룬 부분은 1장부터 3장까지이다. 1장은 휴전 이후 1950년대의 통일논의를 서술했다. 이승만(북진통일론)과 민주당(和戰兩樣論)은 정치적 성향이 대동소이했고, 진보당(평화통일론)세력과 분명히 구분됐다.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의 시기였고, 이승만과 우익세력이 탄압기구를 독점했던 만큼 국내에서 평화통일론이 설자리는 불투명했다. 그러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당시 남한(한국) 지식인의 사상의 저변에는 무력을 동반한 통일을 거부하는 평화적 통일론의 다양한 모습이 잠재한 채 흐르고 있었다.

 

 2장과 3장의 시기적 배경은 4·19부터 5·16까지의 기간인 “4·19시기로 공통적이다. 2장은 당시 드러난 통일논의와 정치·사회적 갈등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했고, 3장은 당시 제기된 통일론을 유형별로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고 각각의 성격을 분석했다. 이승만 장기독재가 무너지자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의견과 주장, 요구가 분출됐고, 그것은 대개 강한 민족주의적 감성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더하여 국제정세는 공존(=냉전적 현상유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고, 戰後 舊식민지들이 제3세계 국가로 국제무대에 등장했으며, 북한 또한 활발한 대남 통일공세를 벌였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등장한 통일론을 크게 세 가지로 준별했다. 그것은 바로 1) 유엔 감시하 남북 총선거론, 2) 중립화 통일론, 3) 남북 협상론이다. “4·19시기에 들어와 무력북진통일론은 효력을 상실했으나 장차 흡수통일론으로 이어질 터였다. 이제 각 정치세력의 통일론 구도는 전쟁 평화에서부터, 평화(또는 공존)를 전제한 바탕 위에 국제적 권위(UN 또는 열강의 협정) 대 반외세先建設 後統一 대 건설과 통일의 병행으로 바뀌었다.

 

 저자에 따르면 “4·19시기민간 차원의 광범한 통일논의와 운동의 출현은 이전까지 잠복해있던 시민사회의 열망이 민주화라는 새로운 국내적 국면과 동시에 국제적 상황변화와 맞물려 표현된 것이었다. 그 핵심은 7여 년간 터부시됐던 남과 북의 교류였고, 각 정치세력들은 이제 그러한 남한 인민들의 열망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통일론 속에 담아내야 했다. 한편 “4·19시기남한에서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지 않은 틀 안에서의 정치행위는 이념과 사상의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와 공존을 모색했던 성숙한 다원주의적 사회질서의 대두를 의미했다. 저자는 이후 한국사회가 5·16이라는 틀 밖으로부터의 충격을 시점으로 장기간의 군부독재를 겪었으나, 당시 등장한 세 가지 통일론의 시각차이의 조류가 21세기까지 이어졌다고 보았다.

 

 저자는 “4·19시기시민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통일론으로 중립화 통일론에 주목했다. 그것은 집권당의 통일론이 갖는 유보론적성격과 남북협자들이 주장한 민족혁명론의 비현실성에 비췄을 때, “가장 구체적인 분단 타결책을 담은 통일방안이었다. 중립화 통일론은 정치의 민주화와 경제의 사회화를 한국적 실정에 적용하는 민주사회주의구상에 바탕을 두고, “영세중립국이라는 통일의 방법론을 마련했다. 또한 중립화 통일론자들의 중립주의적 감성과 이념은 해방공간의 중간파 민족주의에서 기원하여 1950년대의 진보당을 경유하여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립화 통일론 또한 계획경제론이 구체화되지 못했다는 점과, 무엇보다 남북 간 타협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 등에서 한계를 지녔다고 보았다.

 

 이 책은 저자의 실천적 고민이 담긴 한 편의 노작이다. 당시의 국내외적 맥락은 지금의 맥락과 다르지만, 이 책을 통해 확인한 당시 통일에 대한 세력 간 異見과 길항은 오늘날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그것은 저자가 지적했듯, 첫째, 통일에 관한 다양한 이견을 우선 인정하고, 그것이 불러일으킬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절하는 동시에 (남한 내부와 남북 간)공존 내지 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의 유효성이다. 다원주의적 질서를 표방하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견은 언제나 공론장에 우선 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가 서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결코 자유민주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정치사회적 갈등을 조절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 “4·19 시기” “좌와 우를 막론하고 통일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왕왕 있었으나, 그것이 물리적 폭력의 충돌로 귀결된 경우는 희박했다. 한편 그러한 사회 내의 분출무질서로 보는 시각이 존재했고, 5·16을 두둔하는 세력은 그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당시의 풍경을 2013년의 한국과 바로 맞대어 비교할 순 없지만, 독자는 이 책을 통해 틀의 안팎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시대의 화두(당시는 통일문제)를 둘러싼 세력 간 갈등이 어떻게 조절돼야 하는지 조그맣지만 빛나는 통찰을 얻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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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26. 06:45

 기왕의 625전쟁 연구는,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냉전연구라는 관점 위에서 진행된 측면이 강했고, 이는 연구의 경향을 대별하는 지표에서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전통수정이라는 수식어구가 그것이다. 양자를 대표하는 연구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고저를 달리하며 이어졌다. 전자는 전쟁의 발발원인과 책임을 북··소 등 공산권에서 찾은 반면, 후자는 그것을 남한과 미국 등에서 찾았다. 한편 1990년대 이후부터 전통/수정의 이분을 뛰어넘으려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됐고, 연구주제의 외연도 크게 확대되었다.

 

 1990년대까지의 625전쟁사 연구는 40년이라는 시간을 종축으로 삼고, ‘전통/수정을 가르는 계선의 양편에서 미국/한국’, ‘관변/민간’, ‘내인론/외인론’, ‘국내전/국제전등 각각이 625전쟁을 보는 입장과 분석의 하위 범주를 달리 설정 했다.

 

 미국의 625전쟁 연구의 경우 한편으로 관변의 전통주의적 시각과,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수정주의적(또는 급진적) 시각이 80년대까지 서로 평행을 달렸다. 양자 모두 종합적인 625전쟁사는 쓸 수 없었는데, 자료나 관심의 초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은 포연 가득한 전장의 복판에서 625전쟁의 공식사를 서술했고, 이는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한국에 번역·소개되었다. 이는 전장에서 벌어진 전투와, 개전부터 정전까지의 기간에 집중한 것이었다.

 

 625전쟁에 관한 여러 해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 정책입안자들의 사전지식·행동·의도, ·소의 대한정책, 미국 국내 정치, 다른 국가들의 대미관계, 625전쟁과 냉전의 상관관계 등이 주로 연구되었다. 전반적으로 냉전적 대결의식 위에서, 주요 행위자를 미국으로 설정한 연구들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625전쟁을 설명하는데 있어 한국과 한국인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한편 미·소 자료의 공개로 개인·국가·국제체계 등 여러 층위에서 625전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이러한 흐름은 80년대 초반 커밍스를 시작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전쟁발발 직후부터 개전의 책임을 두고 공방이 오갔고, 정전협상 후 각 국가의 625전사는 이후 각국의 625전쟁에 대한 입장의 골조를 구성했다. 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자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625전쟁의 원인과 발발에 관한 연구는 이론과 가설의 조합인 측면이 강했다. 80년대 미국에서 625전쟁 관련 저작들이 급증했는데, 이들 대다수는 새로이 공개된 미국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각주:1] 9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와 중국의 자료가 빛을 보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625전쟁 연구의 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했다. 한국인 연구자가 급증했고, 외국학계와의 소통도 본격화됐으며, 세부 주제와 해석의 다양성 또한 예비 되었다.[각주:2]

 

 최근 625전쟁 연구 동향의 핵심 단어는 인간일 것이다. 전쟁 50주년과 60년을 맞이하며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었으나, 그것들 대부분은 여전히 국가의 정당성 문제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연구는 정치적·거시적·이념적 차원에서 사회인류학적·미시적·개인적 차원으로 관심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각주:3]

 

자료의 공개

 

 1970년대와 90년대 들어와 공개된 미국과 구소련 자료는 이후 625전쟁 연구의 질적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국외의 수준 높은 연구들이 유입·번역·유통되면서 국내의 625전쟁 연구는 국외의 연구 성과들을 소화하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료의 공개는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구소련과 중국 지도층의 입장·의도·생각을 보여주는 문서 대다수는 묶여있는 상태이고, 현재 공개된 자료들도 위생처리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몇 년 전 공개된 스탈린의 서한은 625전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각주:4] 만일 이 자료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625전쟁의 역사는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향후 러시아문서고의 자료들과 중국공산당 당안(檔案)[각주:5] 등이 추가적으로 공개될 때까지 연구자들은 인내하며 추가로 엄정한 사료 비판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죽음과 공포의 역사

 

 625전쟁은 약 250만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실종자, 피랍자를 낳은 한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이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거나, 자의와는 무관하게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전쟁 이후에도 그 공포는 개인과 사회의 내면에서 떠돌았을 것이다.

 

 향후 625전쟁 연구에서 시급한 것은 첫째, 전쟁 중 죽은 사람들의 규모와 각각의 死因을 규명해야 하고, 둘째, 전쟁 당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광범한 폭력의 메커니즘과 생산주체, 명령주체를 더욱 확실히 밝혀내야 하며, 셋째, 그러한 죽음의 경험과 공포가 사람들의 신체에 어떻게 새겨졌고, 이후 어떻게 해소·변화·강화 또는 권력에 의해 활용되었나를 분석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은 한국인에게 드리워진 국가폭력의 그림자를 규명하고, 이를 걷어내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사료와 사람들이 구술하는 기억과의 교차 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며, 사료로는 일기, 문학작품, 영화, 잡지, 신문, 공보처 등 정부기관 보고서, 구술 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엄연한 실체이지만, 사람들의 공포는 어떠한 실체로서 포착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625전쟁기와 이후 한국인들의 표현방식, 행동양식 등의 표출,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자기)억압·배제를 면밀히 봐야할 것이며, ···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반공 담론의 유포와 메커니즘 등을 추가로 살펴야 할 것이다. 625전쟁기 죽음과 공포의 역사는 국시였던 반공(반북)‘과 닿아 있고, 이는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심성으로 자리 잡았으며 일부가 여태껏 이어진다는 점에서 시급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전쟁으로 형성된 공포의 역사는 625전쟁만의 특질은 아니므로, 625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의 한국·아시아·세계의 전쟁을 살피고, 각각의 전쟁이 남긴 공포의 심리적·사회적 효과와 625전쟁의 그것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1. Rosemary Foot, "Making Known the Unknown War: Policy Analysis of the Korean Conflict since the Early 1980s," Michael J. Hogan ed., America in the World: The Historiograph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since 194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271~272쪽. [본문으로]
  2. 이완범, 「한국 국내의 625 연구 동향」, 『군사』 5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44쪽. [본문으로]
  3. 박명림은 이러한 연구 경향을 ‘인간 문제의 등장’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나남, 2011, 291쪽. [본문으로]
  4.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스탈린의 서한. 스탈린은 서한에서, 소련의 UN 안보리 불참과 복귀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2225 [본문으로]
  5. 중국기록학용어로 국가 기구, 사회 조직 및 개인이 정치·군사·경제·과학·기술·문화·종교 등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직접 생산한 기록 중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자·도표·음향·영상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역사 기록을 말한다. 또한 당안은 1949년을 기점으로, 이전에 생산된 것에는 ‘역사당안’, 나중에 생산된 것에 ‘현행당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네이버지식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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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26. 06:42

1. 저자 소개

 

 미국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동아시아 전공)를 취득했다. 1967평화봉사단[각주:1]으로 내한했고, 1981년 평양 방문, 한국전쟁의 기원1 출간 이래 현재까지 한국근현대사, 한미관계사, 미국과 동아시아 관계 등을 천착했다.[각주:2]

 

2. 문제의식과 핵심내용

 

 저자는 서문에서 미국과 한국 사이에 놓여있는 常識의 지리적 편재성을 지적하며, 미국인에게 잊혀진, 더욱이 알려지지 않은한국전쟁의 역사와 기억을 말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의 영향력은 참으로 심원했고, 그 후과는 현재의 북미대결로 가장 잘 드러나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전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미국은, 전쟁 당시부터 한국전쟁을 망각하려 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졌다.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미국인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저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다루었다. 전쟁의 추이(1), 전쟁의 내전적 기원(2), 전쟁 기억의 은폐·망각(3) 1950년대 미국의 정치문화적 풍경(맥카시즘)과 전쟁에 대한 검열·은폐, 정형화된 적 이미지(4), 점령과 군정, 한반도 내부의 갈등(5), 미 공군력의 무차별/무제한적 성격(6), 학살의 기억과 진실(7), 한국전쟁으로 촉발된 미국의 심대한 변화(8), 기억과 역사의 복원(9).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정확하고, 불편부당하며, 역사적인 시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3. 이론적 자원과 자료적 근거

 

세계체제론: “워싱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항상 동아시아 지역(반주변부와 주변부-필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었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는 강하나, 서구의 영향력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인 토착정부(시장과 원자재 공급지-필자)를 원했다.”(215)

전쟁의 내전적 기원: “모든 나라는 자기만의 장미전쟁을 치를 권리가 있다”(35), 조만식을 택하려던 소련의 의도와는 달리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김일성(58), “식민지 시대의 갈등 해방 후 한반도 내부의 반란과 투쟁 국가 수립 이후 계속된 유격전과 38선 충돌 내전의 대단원이라는 정식화.(146)[각주:3]

이미지된 적, 선별적 보도, 망각의 헤게모니(229): 지금까지 미국은 한국전쟁과 북한(나아가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검열과 맥카시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으로 인한 몰이해는 계속되고 있다(100). “1999년이 돼서야 노근리 사건이 보도될 수 있었는가?”(168) “미국은 한국전쟁의 교훈을 망각하고 다시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였다.”(232)

자료적 근거: <트루먼대통령도서관(HST), 대통령비서실서류철(PSF), CIA file, box250, CIA daily report>, <New York Times>, <국립문서고(NRC), 문서군(RG) 338, 한국군사고문단(KMAG) file>, <맥아더아카이브(MA), RG 6, box 80, ATIS issue>, <국립문서관(NA), 중국국 file>, <Princeton University, Allen Dulles Papers, box 57>, <RG 332, XXIV Corps Historical file, box 20>, <USFIK, G-2 Weekly Summary>, <Seoul Times>, <USFIK G-2 Intelligence Summaries>, <NA, RG94, Central Intelligence>, <NA, 895.00>, <FO, F0317> .

 

4. 논평

 

 이 저서는 미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기억된 방식을 환기시켰고, 我側의 만행이나 학살,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적 팽창[각주:4] 등을 서술했으며, 한국전쟁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미국-북한, 나아가 미국-아시아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 지에 대한 질문 속에서 복원시켰다.[각주:5] 광범한 1차 자료와 2차 문헌을 참고하였고, 특히 미국 소재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는 점과 미국의 문학과 사회학 이론을 역사서술과 접목시킨 점은 저자의 큰 미덕이다.

 

 그러나 저자는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한국어로 된 사료와 2차 문헌은 거의 살펴보지 못했고, 주로 영어로 번역된 자료만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어로 작성된 최신의 연구 성과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 약점을 보였다.[각주:6] 또한 9장의 일부는 진위를 가리기 힘들다.[각주:7]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대상에 대한 이미지나 망각의 헤게모니는 현대의 국민국가에서 보편적인 기획은 아닌가?(“미국=우방, 북한=주적이나 한국군 해외파병 같은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한 보이지 않게 하는 손”) 한편 이러한 기획이 한국 사회에 남긴 영향력은 어떠했는가? 한국전쟁의 발발은 전적으로 내전적인 성격에서 기인했는가?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도 타자/적을 이해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지역학의 탄생과 이에 대한 지원)

  1. Peace Corps. 케네디가 시작한 미국의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으로, 1961년부터 지금까지 130여 개국에 약 210,00명을 파견했다. http://en.wikipedia.org/wiki/Peace_corps 참고. [본문으로]
  2. 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미국 패권의 역사』, 서해문집, 2011 참고. [본문으로]
  3.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New York: The New Press, 2004, preface,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9, 78-79쪽 참고. [본문으로]
  4. 브루스 커밍스, 위의 책, 2011, 626-681쪽 참고. [본문으로]
  5. 필자는 미국과 한국에서 기존에 출간된 한국전쟁 서술을 거의 살펴보지 못했다. [본문으로]
  6. 정병준, 위의 책, 2009, 47-49쪽 참고. [본문으로]
  7. 번역문: “우리가 정의로움, 관대함, 화해를 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해서는 오직 “규율과 처벌을 위한 진리의 메스를” 무자비하게 대는 것에만 의지할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남한만이 유일하게 이 작업을 수행했다.”(23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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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0. 26. 06:37

 이 책은 시기적으로는 1970년대 초 이른바 데탕트Détente”라는 배경 아래서, 내용적으로는 남북 당국 간에 오고간 史上 첫 대화의 양상과 실체를 밝히고자 했다. 책의 제목은 자칫 전자(데탕트, 외적 조건”)와 후자를 대등한 연구주제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국제정세의 규정력을 인정한 위에, 남북관계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저자에 따르면, 기존 연구는 1970년대 미국자료를 바탕으로 데탕트기 드러난 한·미 갈등에 주목했다. 이 때 한국정부의 대응방식을 두고 논의 지형이 갈렸는데, 신욱희·김영호 등은 한국의 수세적 대응을 강조한 반면, 홍석률·김현철 등은 능동적 대응을 역설했다. 그러나 관변의 연구를 비롯하여 기존 연구들은 대개 내적 요인”(국제정세 인식, 상호간 인식, 정책 등)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 따라서 저자는 그러한 연구사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자료 자체의 냉전적 목적성등 한계를 염두에 두고 국토통일원의 公刊자료(남북대화백서, 남북대화사료집), 남북대화 관련자들의 증언·회고·기록(70년대 남북대화 성립 비사(I)), 대통령연설문집, 미국무부 일반문서철(RG 59), 외교통상부 문서 일부, 신문과 잡지 등을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저자는 당시 남북대화의 본질적인 측면을 남북관계를 중심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민족사의 관점에 입각했다. 따라서 데탕트는 남북대화를 가능케 한 결정적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남북대화의 배경일 수밖에 없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주장(내지 과도한 의미부여)이 독자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는 알 수 없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의 지도자 각각이 내적으로 집권을 공고히 한 것은 周知의 사실이며, 이는 양 정권이 적극적인 통일의 의지를 표출했다기보다 상징적인 사건 하나를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저자는 당시 남북대화가 남북 당국이 상대방을 [...] 인정하고 진지한 대화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남북관계 진전의 뚜렷한 이정표를 세운 역사적 경험이었다고 그 의의를 강조했다.

 

 이 책은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 초 남북대화를 주제로 삼아, 그 과정에서 드러난 상호 간 인식과 대응 양상 모두를 가급적 포괄하고자 했다. 구성의 측면에서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고, ·후반부의 분량 차이가 크다. 전반부인 1장에서는 남북대화의 직접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일별한다. 1969년 닉슨의 괌 발언”(이른바 닉슨 독트린”)72訪中은 아시아에서 냉전의 긴장이 완화되고, 장차 미···일 사이의 정치적 다극성이 출현하게 될 계기였다. 한편 남북 당국은 이러한 정세를 나름대로 인식하고 이에 대응했다. 이어 2장과 3장에서 남과 북의 인사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대화가 전개된다. 먼저 2장에서는 분단 이후 남북이 공식적으로 양자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처음가진 회담인 남북적십자회담의 전개과정과 당국 간 대화의 양상을 살핀다.[각주:1] 이어 3장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와 그 후 구성된 남북조절위원회의 전개과정, 남북대화의 소멸을 다룬다.

 

 북한 당국의 인식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점, 내용상의 사소한 오류(키신저의 방중 기간을 “19707이라고 했음) 등은 이 책의 간과할 수 없는 지점들이다. 또한 합의록이나 발표문을 全載하고, 한 사건을 중심으로 관련 인물 및 기관의 반응을 나열하는 서술은 가독성을 떨어트린다. 하지만 남북 당국의 접촉과 대화의 전개양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비교하여 서술한 부분은 활용가치가 높다. 따라서 이 책은 과도한 의미부여(“불멸의 [...]”)를 걷어낸다면, 남한 당국의 인식을 중심으로 1970년대 초 전개됐던 남북대화의 과정을 실증적으로 탐구한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15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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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현대한국2014. 10. 26. 06:35

 이 책은 미국에서 수학한 저자의 정치학 박사학위논문을 국역한 것으로, 1948년 이승만 정부의 출범 때부터 19615·16 군사쿠데타에 이어 장면 정부의 붕괴까지의 정치사를 다룬 연구 성과이다. 박사학위논문의 원제는 The Failure of Democracy in South Korea로 국역해보자면 실패한 남한의 민주주의정도로 옮겨볼 수 있겠다. 따라서 독자는 이 글이 1948~1961년의 한국현대정치사, 그 중에서도 자유민주주의의 실패에 주목하여 쓴 것임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평가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며, 독자는 어떤 식으로 저자의 해석을 받아들여야 할까? 저자는 어떠한 사관에 입각하고 있는가?

 

 저자의 평가를 따라가는 한편 민주주의민중(내지 인민)’을 열쇳말 삼아 한국현대사를 살폈을 때, 그것이 실패 외에 다른 어떤 것이었음을 주장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자의 논지는 박사학위논문이 출간된 1974년에도, 이 글을 쓰는 2014년 현재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1987년 대의제 민주주의를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운동 속에서 사회가 질식하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는 견제의 기능을 멈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하에서는 책의 내용을 정리한 후 비평을 시도하겠다.

 

 이 책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장으로 구성돼있다. 저자는 서론(1)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논문으로서의 여러 구성요건 중 하나로 보이는 1960년대 당시의 다양한 사회과학 방법론을 서술했고, 해당 방법론들이 한국정치사에 그대로 적용하기 힘든 성격의 것들임을 밝힌 후에 본론에서 다룰 내용의 요체를 적시했다. 저자의 핵심주장은 다음과 같은데, 2공화국이 붕괴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양극화 현상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즉 저자는 장면(張勉, 1899~1966) 정부의 붕괴와 잇따른 5·16 군사쿠데타를 남한 민주주의의 실패로 규정하고, 어떻게 이러한 실패가 도래했는가를 추적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저자의 문제제기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과연 정당한지는 의문이 들었다. 이하에서 다시 재론하겠다.

 

 2장과 3장은 해방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을 통해 분단과 전쟁이라는 주제 및 시민사회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과도한 행정력, 즉 제1공화국의 유산과 한민당-민국당-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을 묘사했다. 독자는 여기서 남한 군부의 성장과 비대화, 그리고 특히 ()정치적요소에 집중하는 저자의 서술을 읽을 수 있다. 2장과 3장의 배경설명은 제2공화국 의회정치의 난맥상과 세력 간의 이합집산, 마지막으로 군사쿠데타를 자칫 자연스러운 것으로 묘사하는 장치들 중 하나이다.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1950년대 내내 이승만은 경찰로 대표되는 제도(행정부)를 통해 반대세력에게 물리력을 행사했다. 그러한 속에서 이승만의 반대세력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승만의 하야 이후 보인 난맥상은 이러한 정치적 경험부족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이 시기 훈련(()자유당으로서의 의회정치 활동)은 곧 죽음(조봉암 등)으로 언제든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4장과 5장에서 독자는 4·19부터 7월 총선(5대 국회의원 선거)까지의 대략적인 모습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4장은 4·19직후 등장한 허정 과도정부를 다루었다. 이 장에서는 이승만이 퇴출된 후 자유당이 와해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 세력의 권력 독점과 이데올로기적 일치라는 요인이야말로 자유당 해체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데, 권력욕 외에는 집합적 행동의 동기가 없으므로 구심점이 사라지고 난 다음의 운명은 해체라는 식이다. 저자는 자유당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 및 사회세력에 대해서도 일관된 설명을 시도했다. 5장은 진보당으로 대표되는 혁신계의 배경 및 4·19이후 등장한 사회대중당(서상일, 이동화 등), 한국사회당(전진한), 사회혁신당(고정훈) 등 주요정당의 정치활동을 서술했다.

 

 6장은 전반적으로 민주당의 우세 속에서 펼쳐지는 제2공화국 의회정치의 전개양상을 다루었다. 여기서도 저자는 개인적 연줄과 즉각적인 개인적 이해관계라는 요소에 주목하여 정치파벌(주로 민주당 구파와 신파)간의 적대와 대립을 묘사했다. 평자는 특히 8월에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어떤 식으로 장면이 권력을 거머쥐게 됐는지 설명한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다. 1960812, “구파 내에 조직된 추종자를 가지지 못한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이어서 그는 같은 계파 내의 경쟁자인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공표(16)했다. 그러나 국회는 한 계파의 지배를 피하기 위해 김도연을 반대(17)했고, 장면에게는 찬성(19)을 던졌다.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의 분석처럼 당시 무소속 의원들이 김도연과 장면에게 똑같은 수의 지지표(21)와 반대표(16)를 던졌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당시 국회에서 민주당이 다른 당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는 분열돼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장은 소제목처럼 진퇴양난에 빠진 장면 정권과 사태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마지막으로 8장은 19607월 선거에서 패배를 맛본 혁신계의 재배치(사회대중당과 사회당/통일사회당/민족통일당)와 그들의 대미관(對美觀) 및 통일정책, 그리고 당시 남한 시민사회의 주요한 두 조직이었던 교원노조와 학생단체의 결성을 그려냈다. 장면은 이른바 신파의 상징이었으나, 그는 구파·신파·무소속의 국회 내 세력 중 어느 한쪽을 휘어잡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친이승만세력 및 부정축재자에 대해서는 미온적 처벌에 그쳤고, 경찰력과 군부 중 어느 집단에게도 명확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다. 미군은 시시때때로 정부의 군 개혁안에 우려를 표명했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정부의 미약한 행정력은 1950년대와는 너무도 대비됐고, 들풀에 불이 번지듯 터져 나오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결코 소화해낼 수 없었다. 국가주의적 우파의 물리적 반동이 언제든 실행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저자는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나 조지 맥큔의 Korea Today 등 당시이용 가능했던 일급의 역사서와 함께 명사(名士)들의 회고록, 사상계재정, 고시계같은 국내잡지 등을 주된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책의 이론적 자원으로, 저자는 Gabriel Almond(1911~2002), David Easton(1917~2014), Morris Janowitz(1919~1988), Martin Lipset(1922~2006) 등 미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군의 사회학자·정치학자들을 두루 이용했다. 그들은 넓은 의미에서 이른바 행태주의자들이었다. 행태주의자들에 관한 비판으로는 미국인 학자 Ron Robin이 쓴 The Making of the Cold War Enemy를 참조할 수 있는데, 그 핵심은 당시 행태주의자들이 사람과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역사적 맥락을 사상(捨象)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저자는 서양의 이론을 특정 국가의 특정한 상황에 적용하는 일은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저자의 시도가 행태주의과학의 난점을 극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반공주의로 점철된 1950년대를 제시했고, 그 속에서 이승만과 대비되는 무능한기성 정치인의 모습과 혁명이후 권력창출에 실패한 세력의 존재양식을 추적했다. 이 책은 출간된 시점이나 국역된 시점을 고려했을 때, 2공화국의 정치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요소를 두루 다루었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양극화와 그러한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 행정부를 비판하는 가정(假定)식의 논의는 여러모로 한계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양극화는 현대사회가 지닌 보편성이기도 하며, 후자의 논의는 쿠데타세력을 비호하는 논리로 언제든 탈바꿈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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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20. 04:47

 ‘중국은 왜 6·25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 ‘마오쩌둥은 어떻게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게 됐을까?’ ‘6·25전쟁과 중국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를 법한 질문들이다. 선행 연구들은 혁명 직후 중국의 사정이 정치·경제적으로도 결코 튼튼하지 않았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꽤나 혼란스러웠음을 지적한 바 있다. 1949년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후에도 중국의 각지와 경계에서는 아직 국민당 잔여세력과 토비가 출몰했고. 국내경제는 저자의 표현을 빌려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적어도 겉으로는 대내적 통합과 사회적 재건을 제쳐두고 새로운 동원과 이역으로의 출병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결정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한 결정은 어떠한 요인들에 기인한 것일까? 이 책은 예의 질문들에 대한 저자(미국) 나름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곤차로프(미국) 등의 연구[각주:1]가 중소관계의 삐걱거림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중소 양국 지도자의 현실주의적인식과 상황적 선택을 강조했다면, 션즈화(중국)의 연구[각주:2]는 중소관계의 전개 속에서 현실주의적이었던 두 지도자의 만남이 새로운 중소동맹을 이끌어냈고 그것이 바로 6·25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곤차로프 등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주지안롱(일본)의 연구[각주:3]는 시종 마오의 대미관과 결의를 참전의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나름대로의 독특한 분석을 수행한 바 있다. 간략히 정리해보자면, 세 연구는 6·25전쟁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는 점과 중소 양국의 지도자들이 철저하게 국익(또는 안보이익)’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각기 분석의 강조점과 연구자의 배경 등은 판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의 참전을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은 앞서의 연구들과는 강조점을 조금 달리하여 중미대결을 열쇳말로 삼고 중공 지도부,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의 생각, 세계인식, 결정과정에 집중하여 1948~1950년의 기간 동안 벌어진 중미간의 상호작용 또는 상호대결을 그려낸 연구이다. 물론 이 책은 ‘6·25전쟁과 중국이라는 주제에서 으레 다뤄져야 하는 사안들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독자는 이 책에서 국공내전 기간(1946~1949)의 유산과 미국의 대중(對中)전략, 중소관계의 전개 및 중소동맹의 체결, 동북지방과 북한간의 긴밀한 관계, “삼로향심우회전략에 대한 중공 지도부의 인식 등 주목을 요하는 제()사안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중미대결과 그 밑바탕에 놓여 있는 혁명에 대한 헌신”, “혁명적 민족주의”, “세계혁명에 대한 책임의식등에 찍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신중국은 스스로를 구래의 세계(old world)를 파괴하고 끝없는 혁명이라는 대의에 투신하는 주체로서 인식했다. 그 과정에서 주된 적이자 반동은 미국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은 주제는 물론이려니와 분석의 주된 대상이 최고지도자의 정신세계라는 점에서 주지안롱의 연구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동() 주제를 다룬 선행 연구들의 도움을 받거나(각주에서 션즈화 및 주지안롱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자료를 구사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차이청원(紫成文, 당시 재북 중국고문)과 자오용챈(趙勇田)의 회고록(판문점 담판)이나 두핑, 네룽전 등 당시 군인의 회고록, 통역관이었던 스저의 회고록 등은 문서자료의 빈곤 속에서 신중국의 실상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더하여 저자는 중공중앙위원회선집(ZYWJXJ, 1986), 마오쩌둥군사문선(MJWX, 1981), 건국이래마오쩌둥문고(MWG, 1987, 1989), 마오쩌둥군사문집(MJWJ, 1993), 마오쩌둥연보(MNP, 1993) 등 중공중앙위원회 문서와 마오쩌둥 관련 문서를 이용했다.

 

 책의 구성을 따라 저자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있고,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모두 7장이 각 부에 나눠서 배치돼있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서술은 꽤나 단조로운 편이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1948~50년의 기간 동안 중국의 거의 모든 대내외적 행보는 진보적 주체로서 자기인식을 수행하는 최고지도자의 생각이 현실화된 것이다. 먼저 1(1부이기도 하다)에서 저자는 신중국의 성립, 즉 혁명 이후 중공 지도부가 직면해야 했던 대내외적 문제를 지적하며, 마오와 그 동지들이 인식한 세 층위(국내, 동아시아, 세계)안보이해를 제시했다. 더불어 마오의 성장사(), 민주집중제, () 진영론, 중간지대론 등 다채로운 설명인자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요소는 어디까지나 이 책의 핵심, 즉 마오의 정신세계를 설명하는데 맛을 더하는 양념일 뿐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공 지도부는 혁명의 내적 동학(動學)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바로 이 논리가 중국이 참전을 피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쓰였다.

 

 본문의 2(2, 3, 4, 5)3(6, 7, 8)는 마오의 세계인식과 핵심논리에 입각하여 194811월의 워드 사건에서부터 195010월의 참전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했다. 독자는 본문의 도움을 받아,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기까지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의 관계망이나 얼개를 짜볼 수도 있겠다.[각주:4] 평자는 특히 광범한 중국측 사료의 구사를 통해 이 책이 적어도 자료집으로서의 미덕은 갖춘 것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물론 사료의 문제(비공개 또는 부재)는 개별 연구자가 쉽사리 해소할 수 없다. 따라서 평자는 그러한 사료의 공백을 메우는 저자의 논리와 상상력이 얼마나 적절한지에 특히 주목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저자는 1940년대 중후반 이후 마오의 대미인식은 적대감으로 바뀌어 점차 고조됐다는 설명방식(주지안롱에게 분수령은 1946년의 사평전투였다)을 채택했다. 그러나 저자는 1948년 후반부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따라서 독자는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한 저자의 설명을 듣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배경지식이 없을 경우 그 실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중화개념과 다양한 내포를 가지는 것 같지만 실상 강대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통개념에 상당히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그런데 대체 어느 정도까지 사실로 파악해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마오는 중국을 과거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혁명) 동시에 아시아, 나아가 세계혁명의 촉진자 내지 중심국으로 우뚝 서려고 했다. 이러한 서술이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정향(“영명결정”) 중 어느 쪽에 더욱 부합하는 것인지 곧바로 의문이 들었다. 마오에게 세계혁명은 무엇이었을까? 신중국의 아시아와 세계의 중심으로 서야 한다는 신념(독자는 이 지점에서 대국굴기의 전조를 본다)은 어떻게 세계혁명과 양립할 수 있을까?

  1. 세르게이 곤차로프, 존 루이스, 쉐리타이(薛理泰), 성균관대학교 한국현대사 연구반 옮김, 『흔들리는 동맹: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 일조각, 2011. [본문으로]
  2. 션즈화(沈志華), 최만원 옮김,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 선인, 2010. [본문으로]
  3. 주지안롱(朱建榮), 서각수 옮김,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역사넷, 2005. [본문으로]
  4. 워드 사건(48년 11월) → 미코얀의 시바이포 방문(49년 1월) → 김일성의 방소(3월) → 인민해방군의 난징 점령(4월) → 황·스튜어트 회담 및 본토에서 장개석의 퇴각(5월) → “일변도” 성명(6월) → 중공 대표단의 모스크바 방문 및 조선인 사단의 귀환(7월) → 신중국 성립(10월) → 워드 추방 및 마오쩌둥의 방소(12월) → 주은래를 비롯한 중공 대표단의 방소, 애치슨 연설(50년 1월) →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체결(2월) → 중공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원 및 김일성의 방소, NSC68 채택(4월) → 김일성의 방중(5월) → 전쟁 발발과 트루먼 성명(6월) → 동북변방군의 창설(7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및 유엔군의 북상&월경(9월) → 인민지원군의 참전(10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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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13. 16:58

 이 책은 해방 이전부터 6·25전쟁 발발까지를 종축으로 삼고 구() 만주지역, 다시 말해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하여 그곳에 살았던 만주 조선인의 생활상과 생각을 다양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6·25전쟁 전사(前史) 분야의 또 하나의 대작이다. 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저자의 약력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현재 서울시립대학 전임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서울대 역사교육과와 연세대 사학과(석사)를 거친 이후 1993김원봉 연구를 펴냈고, 이듬해 조선의용군 연구로 국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1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에 이어 이 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주로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조선사람의 흔적을 역사 속에서 발굴·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책은 기왕에 제출된 저자의 연구실적들을 대거 수정하여 종합한 결과물이며, “한국독립운동사와 해외한인사에 대한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하에서는 이 책의 구성과 핵심논지, 자료를 일별하고 6·25전쟁 연구와 관련하여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에 관해 간략히 비평하겠다.[각주:1]


 일찍이 일제의 패망 이전부터,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에서 삶을 일궜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만주지역은 조선인들, 그중에서도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새롭지만 고달픈 삶의 터전이면서도, 야심찬 누군가에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김원봉, 김일성 등)이자 출세의 신천지(최남선, 박정희 등)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통치의 주체가 빈번히 바뀌면서 그에 따라 다양한 민족이 실로 다채로운 생활상을 보였을 것이고,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의 역사적 경험이 이후 한국사의 전개과정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를 추적한 시도도 제출된 바 있다.[각주:2]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만주지역의 역사적 성격(“무정형성”)이나 만주 조선인의 정체성이 사뭇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더하여 이들의 삶을 살피는 작업 또한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만주 조선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고, 어떠한 생각을 하며 해방 이후를 살았을까? 간단하게 보이는 질문이지만 명료하게 답변하기는 분명 어렵다. 저자는 앞서와 같은 사실과 질문을 염두에 두고 만주 조선인 사회 및 그들의 조국()”가 이전 반()식민지·식민지 사회 각각의 좌우대립, 현지 정세와 한반도 정세의 전개와 더불어 어떻게 변했고 실현돼갔는지를 분석하였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연변지역(동만), 목단강지역(북만), 국민당지역(남만·관내)에 있던 조선인 사회의 전개상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각 장은 끝자락에 일종의 맺음말을 제공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저자의 논의를 정리할 때 유용하다. 그러나 각 부의 분량은 균등하지 않다. 1부가 일곱 장으로 논문 7편에 해당하는 분량인 반면 2부와 3부는 네 장씩의 분량으로 구성돼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평자는 이러한 분량상의 차이가 당시 만주 조선인 사회의 역사인구적인 사실, 즉 연변지역이 만주 내 다른 지역보다 조선인이 많았고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거나 또는 다른 지역의 조선인 사회를 선도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역별 사정을 파악하게 해주는 자료의 분량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해방을 전후하여 동만지역에는 ‘50~60’, 북만지역에는 ‘11~12의 조선인이 살았고, 국민당이 통치하던 지역에는 조선인 장병 수가 ‘4~20(?)에 육박하였다.


 저자는 600여 쪽을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해방 후 만주 조선인 사회가 도달하게 된 귀결은 바로 6·25전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좌익이었던 동만·북만지역의 조선인 사회뿐만 아니라 우익조선인 사회에서도 나름대로의 기지론(基地論)을 선보였는데, 그러한 모습의 배경이랄 수 있는 좌우대립의 논리야말로 결국 만주 조선인들이 6·25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주요한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설명하는 셈이다. 더하여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논조는 다음과 같은데, 동만·북만지역의 조선인 사회는 중공당 및 북한과의 친연성이 강한 편이었던 반면, 남만·관내지역의 조선인 사회는 직접적인 통치주체인 국민당 및 남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평자는 분석대상으로서의 사회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성격을 갖는 바, 그것의 어떠한 경향을 서술하는 작업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저자가 치밀한 사료분석을 통해 만주 조선인 사회의 경향을 굵은 필치로 정리하여 제시한 것은 분명 미덕이다. 그러나 평자는 저자가 미처 서술하지 않은 만주 조선인 사회의 흐름, 회색지대를 그 모습은 정확히 알기 어려울지라도 추가적으로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좌우대립의 자장(磁場) 안에 있진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만주 조선인이 생각한 조국이 무엇이었는지는 다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염두에 둔다면 저자가 원초적이라고 평가하는 조국애의 경향이나 역사적 실상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자신이 구사한 자료를 한글신문(민간과 군부대), 당안관 문서, 문화대혁명 자료군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저자는 신문의 성격을 밝히고 지면에 반영된 당시 만주 조선인 사회의 경향성을 추출했는데, 이를 통해 평자는 추후 연구에 필요한 자료원의 대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문혁자료를 진위를 기준으로둘로 나누어 역사적 사실을 걸러내는 저자의 방식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가 생산된 시기 및 역사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 시기에 대한 북한 측의 자료를 확보하여 대조해본다면 더욱 정확한 서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하여 아무리 민간에서 발행한 신문이라 할지라도 해당 지역에서 우세했던 통치세력의 영향으로부터 거리를 두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만주 조선인 사회의 육성(肉聲)이라고 단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당시를 살았던 개인의 일기나 출간된 작품, 증언록이나 구술 자료 등을 추가하여 살핀다면 좀 더 풍부한 역사상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각주:3]


 마지막으로 평자는 6·25전쟁과 관련하여 이 책의 내용적 핵심이 각각 인민해방군 156사단(이후 제4야전군 독립 15사단인민군 12사단)164사단(이전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단인민군 5사단)의 창설과 활동, 북한으로의 귀환을 면밀히 추적한 6장과 11장이라고 평가한다. 저자가 참고한 김중생의 글에 따르면,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남진한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10개 연대가 만주 조선인 부대였으나, 정작 이들에 관한 연구는 미비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병() 개개인이 생각했던 귀환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저자가 언급했듯, 지휘부나 당위원회의 생각을 드러내주는 자료는 꽤나 많은 편이지만 병사 개개인의 속셈을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각주:4]

  1. 이 글에서 인용구는 주로 저자 및 다른 서평자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른 서평자의 글로는 任贊赫, 「해방 후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사회와 한국전쟁: 『또 하나의 한국전쟁: 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한국근현대사연구』 57, 2011을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강상중·현무암, 이목 옮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과함께, 2012. 이 책은 같은 저자가 쓴 『興亡の世界史 第18卷: 大日本・満州帝国の遺産』(東京: 講談社, 2010)을 국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3. 任贊赫, 앞의 글, 2011. [본문으로]
  4. 염인호, 『또 하나의 한국전쟁』, 역사비평사, 2010, 243쪽. [본문으로]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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