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한국전쟁2014. 12. 8. 05:51

 1945923, 남한에 미()점령군이 진주한지 보름여 만에 최고실력자 하지 장군은 38도선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도로차단기 설치를 지시하였다. 그 결과 10월 중순까지 38도선 인근에 약 25개의 도로차단기가 설치되었다. 소련군 역시 같은 지역에 18~20개의 도로차단기를 설치하였다. 미군은 38도선 인근의 도시들을 신속하게 점령하였으며,[각주:1] 미군의 화답에 기초하여 소련군은 9월 초부터 38도선 통행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미소공위 예비회담(46.1.16~2.5)에서 한국인들의 38선 이동문제가 최초로 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장차 미소공위의 운명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논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46년 여름(5) 콜레라 만연을 기점으로 38선 통행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시간대를 종축으로 삼고, 한반도를 이분하는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한 역작이다. 이 책에서 첫 번째 시간대라고 할 수 있는 1945~48년의 기간은 서술의 원경(遠景)으로 제시된다. 이 시기 전후(前後) 강대국의 점령정책과 대한정책, 점령과 철수라는 원심력에 따라서 또는 이에 대응하여 남과 북에서 군()정이 들어섰고 각각은 상호작용 또는 충돌하며 긴장과 적대를 한껏 부풀렸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주연은 어디까지나 미소군정이었다. 두 번째 시간대인 1949~50년의 기간은 서술은 근경(近景)이면서 동시에 이 책의 핵심적 분석대상이다. 이 시기 강도와 규모를 달리하며 벌어진 남북 간의 충돌은 결국 북한의 무장력 강화와 전쟁의 형식을 창출(“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하에서는 기존의 서평을 참고하여 특장과 구성, 자료적 근거 등을 간략히 정리하겠다.[각주:2]

 

 독자는 이 책의 특장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책의 외관이 선사하는 두툼한 두께감에 더하여 이 책의 목적이 이론과 자료에 오도되거나 미혹되지 않고 역사적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작의 실증성을 웅변한다. 저자에 따르면, 책의 핵심 내용은 1999년 완성되었으나, “북한 자료들이 미진한 관계로 책이 출간되기까지는 7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사이 저자는 2001년과 2005년에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 미국의 여러 기관을 방문해 미국 자료를 비롯하여 신노획문서 전량과 구노획문서 3분의 1 정도를 검토하였다. 요컨대, 저자는 방대한 다국적 자료를 섭렵하는 방식을 통해 한국전쟁의 전사(前史)38도선 충돌의 역사를 탐구한 것이다.

 

 둘째, 이 책은 38도선 또는 38도선 충돌을 일관되게 매개로 삼아 미시사를 서술하였다. 다시 말해, 저자는 해방과 함께 찾아온 38도선의 형성에서부터 이를 둘러싸고 전개된 미소간의 상호작용, 미소의 군대가 철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외화(外化)된 남과 북의 충돌, 마침내 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사료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추적하였다. 서동만에 따르면, 기왕의 저작들이 동북아시아 국제관계 등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중시한 데 비해, 이 책은 미시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그간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한 1945~48년의 기간 38도선과 미소점령군과의 관계 및 1949~50년의 기간 38도선 충돌과 북한지도부의 대응을 미시적으로 복원한 셈이다. 이는 메릴, 커밍스, 양영조 등이 선구적으로 수행한 1949~50년 어간의 38도선 충돌 서술을 수정·보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셋째, 전쟁의 성격과 관련하여 이 책은 내쟁 같은 국제전쟁, 외전 같은 동족전쟁이라는 1948년 남북 문화인 108인의 성명을 인용하며, “1950년 발발 시점에서 이미 내전이자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이 혼재돼있었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성격 규정은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냉전연구에서 직간접적으로 발원했고 미소 중 어느 일방의 책임을 묻는 전통 대() 수정도식을 지양하며, 동시에 내전이나 국제전또는 내전으로 발화해서 국제전으로 비화했다는 설명도 거부한다. 저자의 성격 규정은 당시 한국인들의 정세 판단과 분석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의 근본적인 책임을 전후 강대국에게 돌리는 효과를 가진다. 물론 전쟁으로 치닫는 주요 동력은 내부 갈등이었으나, “그 궤도는 미소가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이 책은 800쪽이 넘는 분량으로 모두 520장으로 구성돼있다. I서장3장이고, 한국전쟁 연구사, 전재의 개전·성격·형성에 관한 논점들, 책의 구성·방법론·자료를 담고 있다. 박태균에 따르면, 이 서장은 한국전쟁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II미소의 38선 정책과 남북갈등의 기원5장이고, 38도선과 미소점령군을 매개로 하여 1945~48년의 역사를 살폈다. II 부는 미소 양국이 우발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교통할 수 있는 수단을 고안했으면서도 동시에 남북의 공식적 교류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상상의 선38도선이 한국인들에게 가한 실제적 힘은 경기도 연백군의 사례 두 가지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다. III'남북의 정치군사적 갈등과 38선 충돌'IV개전의 결정·공격 계획의 수립·초기 전투는 각각 5장과 4장이며, 단정이 수립된 이후부터 개전초기 옹진전투에 이르기까지 1년 반 정도의 시간대를 미시적으로 살폈다. III부에서 저자는 최초로 1949년 한국군의 대북공격 가능성 문제를 천착하였고, 그 결과 도발 받지 않은 불의의 기습남침이나 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 ‘개전정보의 실패등 남북이 주장이 바로 이 1949년에 가닿아 있음을 증명하였다. IV부는 이른바 북··소 합의의 내용과 북한의 전면공격의 결정을 묘사했고, 정찰명령 1전투명령 1, 정찰계획등 북한의 의도를 담고 있는 자료를 사료비판하였다. V에필로그3장으로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관련된 주장·의혹(‘정보의 실패’, ‘해주점령설실상을 다루었다.

 

 이 책은 역사주의적인 접근과 연대기적인 접근을 방법론적 핵심으로 삼았다. 저자가 밝혔듯, 역사학의 본령이기도 한 엄격한 자료 비판은 본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이 책은 미··, 즉 한국전쟁의 당사국이었던 3개국의 주요 자료를 비교·교차·분석하였다. 저자는 다양한 언어로 쓰인 다양한 자료를 통해 한국전쟁의 미시사적 사실(史實)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이 구사한 미국자료는 주한미군사령부 정모참모부 및 주한미군사고문단(KMAG)이 생산한 정보보고서(일일정보요약, 주간정보요약, 북한정보요약), 주한미군971방첩대의 정보요약 및 연례보고서, NARA RG 332에 소장된 미소간의 왕래서한, 주한미24군단 군사실 문서철, RG59한국 내정 관련 문서철, RG 319의 육군 정보참모부 문서철, 맥아더아카이브에 소장된 KMAG 보고서·전문철 등이 있다. 저자는 자신이 구사한 소련자료를 크게 4가지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한국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 극비소련외교문서,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가 발행하는 소장처·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소련문서, KGB 출신이자 소련문서고를 독점했던 볼코고노프 및 러시아 외무성 출신 학자들의 저작, 한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간행한 라주바예프(주북한 소련군사고문단장을 역임) 보고서. 기왕의 연구가 전쟁의 결정과 관련하여 지도부의 의중만을 쫓았다면, 저자는 소련자료에 드러난 1949년 소련과 북한의 시각과 입장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이 책의 자료적 진가는 북한자료, 즉 노획문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가 구사한 구·신 노획문서는 대부분이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미군이 북한에서 노획한 자료들이 어떠한 여정을 거쳐 미국에 도달했고 그 후 방선주에 의해 세상에 공개될 때까지의 과정을 요약하였다.

  1. 춘천(9월 19일), 삼척(9월 25일), 의정부(9월 30일), 연안·배천(10월 초), 옹진(10월 5일). [본문으로]
  2. 서동만, 「한국전쟁 연구의 새로운 지평」, 『창작과비평』 34(3), 2006; 이완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 『역사와현실』 62, 2006; 박태균, 「다른 방식의 수정주의 뛰어넘기」, 『한국사연구』 136, 20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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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26. 06:45

 기왕의 625전쟁 연구는,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냉전연구라는 관점 위에서 진행된 측면이 강했고, 이는 연구의 경향을 대별하는 지표에서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전통수정이라는 수식어구가 그것이다. 양자를 대표하는 연구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고저를 달리하며 이어졌다. 전자는 전쟁의 발발원인과 책임을 북··소 등 공산권에서 찾은 반면, 후자는 그것을 남한과 미국 등에서 찾았다. 한편 1990년대 이후부터 전통/수정의 이분을 뛰어넘으려는 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됐고, 연구주제의 외연도 크게 확대되었다.

 

 1990년대까지의 625전쟁사 연구는 40년이라는 시간을 종축으로 삼고, ‘전통/수정을 가르는 계선의 양편에서 미국/한국’, ‘관변/민간’, ‘내인론/외인론’, ‘국내전/국제전등 각각이 625전쟁을 보는 입장과 분석의 하위 범주를 달리 설정 했다.

 

 미국의 625전쟁 연구의 경우 한편으로 관변의 전통주의적 시각과,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수정주의적(또는 급진적) 시각이 80년대까지 서로 평행을 달렸다. 양자 모두 종합적인 625전쟁사는 쓸 수 없었는데, 자료나 관심의 초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은 포연 가득한 전장의 복판에서 625전쟁의 공식사를 서술했고, 이는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한국에 번역·소개되었다. 이는 전장에서 벌어진 전투와, 개전부터 정전까지의 기간에 집중한 것이었다.

 

 625전쟁에 관한 여러 해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소 정책입안자들의 사전지식·행동·의도, ·소의 대한정책, 미국 국내 정치, 다른 국가들의 대미관계, 625전쟁과 냉전의 상관관계 등이 주로 연구되었다. 전반적으로 냉전적 대결의식 위에서, 주요 행위자를 미국으로 설정한 연구들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625전쟁을 설명하는데 있어 한국과 한국인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한편 미·소 자료의 공개로 개인·국가·국제체계 등 여러 층위에서 625전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고, 이러한 흐름은 80년대 초반 커밍스를 시작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전쟁발발 직후부터 개전의 책임을 두고 공방이 오갔고, 정전협상 후 각 국가의 625전사는 이후 각국의 625전쟁에 대한 입장의 골조를 구성했다. 70년대 후반 미국에서 자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625전쟁의 원인과 발발에 관한 연구는 이론과 가설의 조합인 측면이 강했다. 80년대 미국에서 625전쟁 관련 저작들이 급증했는데, 이들 대다수는 새로이 공개된 미국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각주:1] 90년대에 들어와 러시아와 중국의 자료가 빛을 보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625전쟁 연구의 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했다. 한국인 연구자가 급증했고, 외국학계와의 소통도 본격화됐으며, 세부 주제와 해석의 다양성 또한 예비 되었다.[각주:2]

 

 최근 625전쟁 연구 동향의 핵심 단어는 인간일 것이다. 전쟁 50주년과 60년을 맞이하며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제출되었으나, 그것들 대부분은 여전히 국가의 정당성 문제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연구는 정치적·거시적·이념적 차원에서 사회인류학적·미시적·개인적 차원으로 관심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각주:3]

 

자료의 공개

 

 1970년대와 90년대 들어와 공개된 미국과 구소련 자료는 이후 625전쟁 연구의 질적 도약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국외의 수준 높은 연구들이 유입·번역·유통되면서 국내의 625전쟁 연구는 국외의 연구 성과들을 소화하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료의 공개는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구소련과 중국 지도층의 입장·의도·생각을 보여주는 문서 대다수는 묶여있는 상태이고, 현재 공개된 자료들도 위생처리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몇 년 전 공개된 스탈린의 서한은 625전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각주:4] 만일 이 자료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625전쟁의 역사는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향후 러시아문서고의 자료들과 중국공산당 당안(檔案)[각주:5] 등이 추가적으로 공개될 때까지 연구자들은 인내하며 추가로 엄정한 사료 비판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죽음과 공포의 역사

 

 625전쟁은 약 250만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와 실종자, 피랍자를 낳은 한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이다.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죽거나, 자의와는 무관하게 죽음의 공포를 느꼈고, 전쟁 이후에도 그 공포는 개인과 사회의 내면에서 떠돌았을 것이다.

 

 향후 625전쟁 연구에서 시급한 것은 첫째, 전쟁 중 죽은 사람들의 규모와 각각의 死因을 규명해야 하고, 둘째, 전쟁 당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광범한 폭력의 메커니즘과 생산주체, 명령주체를 더욱 확실히 밝혀내야 하며, 셋째, 그러한 죽음의 경험과 공포가 사람들의 신체에 어떻게 새겨졌고, 이후 어떻게 해소·변화·강화 또는 권력에 의해 활용되었나를 분석해야 한다. 특히 마지막은 한국인에게 드리워진 국가폭력의 그림자를 규명하고, 이를 걷어내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사료와 사람들이 구술하는 기억과의 교차 분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며, 사료로는 일기, 문학작품, 영화, 잡지, 신문, 공보처 등 정부기관 보고서, 구술 등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엄연한 실체이지만, 사람들의 공포는 어떠한 실체로서 포착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625전쟁기와 이후 한국인들의 표현방식, 행동양식 등의 표출,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자기)억압·배제를 면밀히 봐야할 것이며, ···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반공 담론의 유포와 메커니즘 등을 추가로 살펴야 할 것이다. 625전쟁기 죽음과 공포의 역사는 국시였던 반공(반북)‘과 닿아 있고, 이는 이후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심성으로 자리 잡았으며 일부가 여태껏 이어진다는 점에서 시급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전쟁으로 형성된 공포의 역사는 625전쟁만의 특질은 아니므로, 625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의 한국·아시아·세계의 전쟁을 살피고, 각각의 전쟁이 남긴 공포의 심리적·사회적 효과와 625전쟁의 그것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1. Rosemary Foot, "Making Known the Unknown War: Policy Analysis of the Korean Conflict since the Early 1980s," Michael J. Hogan ed., America in the World: The Historiography of American Foreign Relations since 194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271~272쪽. [본문으로]
  2. 이완범, 「한국 국내의 625 연구 동향」, 『군사』 5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44쪽. [본문으로]
  3. 박명림은 이러한 연구 경향을 ‘인간 문제의 등장’이라고 표현했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나남, 2011, 291쪽. [본문으로]
  4.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스탈린의 서한. 스탈린은 서한에서, 소련의 UN 안보리 불참과 복귀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12225 [본문으로]
  5. 중국기록학용어로 국가 기구, 사회 조직 및 개인이 정치·군사·경제·과학·기술·문화·종교 등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직접 생산한 기록 중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자·도표·음향·영상 등 여러 가지 형식의 역사 기록을 말한다. 또한 당안은 1949년을 기점으로, 이전에 생산된 것에는 ‘역사당안’, 나중에 생산된 것에 ‘현행당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네이버지식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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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26. 06:42

1. 저자 소개

 

 미국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동아시아 전공)를 취득했다. 1967평화봉사단[각주:1]으로 내한했고, 1981년 평양 방문, 한국전쟁의 기원1 출간 이래 현재까지 한국근현대사, 한미관계사, 미국과 동아시아 관계 등을 천착했다.[각주:2]

 

2. 문제의식과 핵심내용

 

 저자는 서문에서 미국과 한국 사이에 놓여있는 常識의 지리적 편재성을 지적하며, 미국인에게 잊혀진, 더욱이 알려지지 않은한국전쟁의 역사와 기억을 말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의 영향력은 참으로 심원했고, 그 후과는 현재의 북미대결로 가장 잘 드러나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전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미국은, 전쟁 당시부터 한국전쟁을 망각하려 하였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졌다.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미국인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저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다루었다. 전쟁의 추이(1), 전쟁의 내전적 기원(2), 전쟁 기억의 은폐·망각(3) 1950년대 미국의 정치문화적 풍경(맥카시즘)과 전쟁에 대한 검열·은폐, 정형화된 적 이미지(4), 점령과 군정, 한반도 내부의 갈등(5), 미 공군력의 무차별/무제한적 성격(6), 학살의 기억과 진실(7), 한국전쟁으로 촉발된 미국의 심대한 변화(8), 기억과 역사의 복원(9).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정확하고, 불편부당하며, 역사적인 시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3. 이론적 자원과 자료적 근거

 

세계체제론: “워싱턴의 궁극적인 목표는 항상 동아시아 지역(반주변부와 주변부-필자)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었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는 강하나, 서구의 영향력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인 토착정부(시장과 원자재 공급지-필자)를 원했다.”(215)

전쟁의 내전적 기원: “모든 나라는 자기만의 장미전쟁을 치를 권리가 있다”(35), 조만식을 택하려던 소련의 의도와는 달리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김일성(58), “식민지 시대의 갈등 해방 후 한반도 내부의 반란과 투쟁 국가 수립 이후 계속된 유격전과 38선 충돌 내전의 대단원이라는 정식화.(146)[각주:3]

이미지된 적, 선별적 보도, 망각의 헤게모니(229): 지금까지 미국은 한국전쟁과 북한(나아가 한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검열과 맥카시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으로 인한 몰이해는 계속되고 있다(100). “1999년이 돼서야 노근리 사건이 보도될 수 있었는가?”(168) “미국은 한국전쟁의 교훈을 망각하고 다시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였다.”(232)

자료적 근거: <트루먼대통령도서관(HST), 대통령비서실서류철(PSF), CIA file, box250, CIA daily report>, <New York Times>, <국립문서고(NRC), 문서군(RG) 338, 한국군사고문단(KMAG) file>, <맥아더아카이브(MA), RG 6, box 80, ATIS issue>, <국립문서관(NA), 중국국 file>, <Princeton University, Allen Dulles Papers, box 57>, <RG 332, XXIV Corps Historical file, box 20>, <USFIK, G-2 Weekly Summary>, <Seoul Times>, <USFIK G-2 Intelligence Summaries>, <NA, RG94, Central Intelligence>, <NA, 895.00>, <FO, F0317> .

 

4. 논평

 

 이 저서는 미국인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다.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기억된 방식을 환기시켰고, 我側의 만행이나 학살,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적 팽창[각주:4] 등을 서술했으며, 한국전쟁의 역사적/현재적 의미를 미국-북한, 나아가 미국-아시아 관계를 어떻게 봐야하는 지에 대한 질문 속에서 복원시켰다.[각주:5] 광범한 1차 자료와 2차 문헌을 참고하였고, 특히 미국 소재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는 점과 미국의 문학과 사회학 이론을 역사서술과 접목시킨 점은 저자의 큰 미덕이다.

 

 그러나 저자는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한국어로 된 사료와 2차 문헌은 거의 살펴보지 못했고, 주로 영어로 번역된 자료만을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어로 작성된 최신의 연구 성과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 약점을 보였다.[각주:6] 또한 9장의 일부는 진위를 가리기 힘들다.[각주:7]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대상에 대한 이미지나 망각의 헤게모니는 현대의 국민국가에서 보편적인 기획은 아닌가?(“미국=우방, 북한=주적이나 한국군 해외파병 같은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한 보이지 않게 하는 손”) 한편 이러한 기획이 한국 사회에 남긴 영향력은 어떠했는가? 한국전쟁의 발발은 전적으로 내전적인 성격에서 기인했는가?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도 타자/적을 이해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지역학의 탄생과 이에 대한 지원)

  1. Peace Corps. 케네디가 시작한 미국의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으로, 1961년부터 지금까지 130여 개국에 약 210,00명을 파견했다. http://en.wikipedia.org/wiki/Peace_corps 참고. [본문으로]
  2. 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미국 패권의 역사』, 서해문집, 2011 참고. [본문으로]
  3.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New York: The New Press, 2004, preface,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9, 78-79쪽 참고. [본문으로]
  4. 브루스 커밍스, 위의 책, 2011, 626-681쪽 참고. [본문으로]
  5. 필자는 미국과 한국에서 기존에 출간된 한국전쟁 서술을 거의 살펴보지 못했다. [본문으로]
  6. 정병준, 위의 책, 2009, 47-49쪽 참고. [본문으로]
  7. 번역문: “우리가 정의로움, 관대함, 화해를 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해서는 오직 “규율과 처벌을 위한 진리의 메스를” 무자비하게 대는 것에만 의지할 수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남한만이 유일하게 이 작업을 수행했다.”(23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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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20. 04:47

 ‘중국은 왜 6·25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 ‘마오쩌둥은 어떻게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게 됐을까?’ ‘6·25전쟁과 중국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를 법한 질문들이다. 선행 연구들은 혁명 직후 중국의 사정이 정치·경제적으로도 결코 튼튼하지 않았고, 사회·문화적으로도 꽤나 혼란스러웠음을 지적한 바 있다. 1949년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후에도 중국의 각지와 경계에서는 아직 국민당 잔여세력과 토비가 출몰했고. 국내경제는 저자의 표현을 빌려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중국의 최고지도자는, 적어도 겉으로는 대내적 통합과 사회적 재건을 제쳐두고 새로운 동원과 이역으로의 출병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결정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한 결정은 어떠한 요인들에 기인한 것일까? 이 책은 예의 질문들에 대한 저자(미국) 나름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곤차로프(미국) 등의 연구[각주:1]가 중소관계의 삐걱거림을 담담하게 그려내면서도 중소 양국 지도자의 현실주의적인식과 상황적 선택을 강조했다면, 션즈화(중국)의 연구[각주:2]는 중소관계의 전개 속에서 현실주의적이었던 두 지도자의 만남이 새로운 중소동맹을 이끌어냈고 그것이 바로 6·25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곤차로프 등과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주지안롱(일본)의 연구[각주:3]는 시종 마오의 대미관과 결의를 참전의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나름대로의 독특한 분석을 수행한 바 있다. 간략히 정리해보자면, 세 연구는 6·25전쟁으로 이야기를 끝맺고 있다는 점과 중소 양국의 지도자들이 철저하게 국익(또는 안보이익)’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각기 분석의 강조점과 연구자의 배경 등은 판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의 참전을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은 앞서의 연구들과는 강조점을 조금 달리하여 중미대결을 열쇳말로 삼고 중공 지도부,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의 생각, 세계인식, 결정과정에 집중하여 1948~1950년의 기간 동안 벌어진 중미간의 상호작용 또는 상호대결을 그려낸 연구이다. 물론 이 책은 ‘6·25전쟁과 중국이라는 주제에서 으레 다뤄져야 하는 사안들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독자는 이 책에서 국공내전 기간(1946~1949)의 유산과 미국의 대중(對中)전략, 중소관계의 전개 및 중소동맹의 체결, 동북지방과 북한간의 긴밀한 관계, “삼로향심우회전략에 대한 중공 지도부의 인식 등 주목을 요하는 제()사안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중미대결과 그 밑바탕에 놓여 있는 혁명에 대한 헌신”, “혁명적 민족주의”, “세계혁명에 대한 책임의식등에 찍혀있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서 신중국은 스스로를 구래의 세계(old world)를 파괴하고 끝없는 혁명이라는 대의에 투신하는 주체로서 인식했다. 그 과정에서 주된 적이자 반동은 미국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은 주제는 물론이려니와 분석의 주된 대상이 최고지도자의 정신세계라는 점에서 주지안롱의 연구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동() 주제를 다룬 선행 연구들의 도움을 받거나(각주에서 션즈화 및 주지안롱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자료를 구사하였다. 이 중에서 특히 차이청원(紫成文, 당시 재북 중국고문)과 자오용챈(趙勇田)의 회고록(판문점 담판)이나 두핑, 네룽전 등 당시 군인의 회고록, 통역관이었던 스저의 회고록 등은 문서자료의 빈곤 속에서 신중국의 실상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더하여 저자는 중공중앙위원회선집(ZYWJXJ, 1986), 마오쩌둥군사문선(MJWX, 1981), 건국이래마오쩌둥문고(MWG, 1987, 1989), 마오쩌둥군사문집(MJWJ, 1993), 마오쩌둥연보(MNP, 1993) 등 중공중앙위원회 문서와 마오쩌둥 관련 문서를 이용했다.

 

 책의 구성을 따라 저자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돼있고,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모두 7장이 각 부에 나눠서 배치돼있다. 전반적으로 저자의 서술은 꽤나 단조로운 편이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1948~50년의 기간 동안 중국의 거의 모든 대내외적 행보는 진보적 주체로서 자기인식을 수행하는 최고지도자의 생각이 현실화된 것이다. 먼저 1(1부이기도 하다)에서 저자는 신중국의 성립, 즉 혁명 이후 중공 지도부가 직면해야 했던 대내외적 문제를 지적하며, 마오와 그 동지들이 인식한 세 층위(국내, 동아시아, 세계)안보이해를 제시했다. 더불어 마오의 성장사(), 민주집중제, () 진영론, 중간지대론 등 다채로운 설명인자를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요소는 어디까지나 이 책의 핵심, 즉 마오의 정신세계를 설명하는데 맛을 더하는 양념일 뿐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공 지도부는 혁명의 내적 동학(動學)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바로 이 논리가 중국이 참전을 피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쓰였다.

 

 본문의 2(2, 3, 4, 5)3(6, 7, 8)는 마오의 세계인식과 핵심논리에 입각하여 194811월의 워드 사건에서부터 195010월의 참전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정리했다. 독자는 본문의 도움을 받아,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기까지 겪었던 굵직한 사건들의 관계망이나 얼개를 짜볼 수도 있겠다.[각주:4] 평자는 특히 광범한 중국측 사료의 구사를 통해 이 책이 적어도 자료집으로서의 미덕은 갖춘 것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물론 사료의 문제(비공개 또는 부재)는 개별 연구자가 쉽사리 해소할 수 없다. 따라서 평자는 그러한 사료의 공백을 메우는 저자의 논리와 상상력이 얼마나 적절한지에 특히 주목하여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저자는 1940년대 중후반 이후 마오의 대미인식은 적대감으로 바뀌어 점차 고조됐다는 설명방식(주지안롱에게 분수령은 1946년의 사평전투였다)을 채택했다. 그러나 저자는 1948년 후반부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따라서 독자는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한 저자의 설명을 듣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배경지식이 없을 경우 그 실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중화개념과 다양한 내포를 가지는 것 같지만 실상 강대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통개념에 상당히 많이 의지하는 편이다. 그런데 대체 어느 정도까지 사실로 파악해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마오는 중국을 과거의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혁명) 동시에 아시아, 나아가 세계혁명의 촉진자 내지 중심국으로 우뚝 서려고 했다. 이러한 서술이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정향(“영명결정”) 중 어느 쪽에 더욱 부합하는 것인지 곧바로 의문이 들었다. 마오에게 세계혁명은 무엇이었을까? 신중국의 아시아와 세계의 중심으로 서야 한다는 신념(독자는 이 지점에서 대국굴기의 전조를 본다)은 어떻게 세계혁명과 양립할 수 있을까?

  1. 세르게이 곤차로프, 존 루이스, 쉐리타이(薛理泰), 성균관대학교 한국현대사 연구반 옮김, 『흔들리는 동맹: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한국전쟁』, 일조각, 2011. [본문으로]
  2. 션즈화(沈志華), 최만원 옮김, 『마오쩌뚱 스탈린과 조선전쟁』, 선인, 2010. [본문으로]
  3. 주지안롱(朱建榮), 서각수 옮김,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역사넷, 2005. [본문으로]
  4. 워드 사건(48년 11월) → 미코얀의 시바이포 방문(49년 1월) → 김일성의 방소(3월) → 인민해방군의 난징 점령(4월) → 황·스튜어트 회담 및 본토에서 장개석의 퇴각(5월) → “일변도” 성명(6월) → 중공 대표단의 모스크바 방문 및 조선인 사단의 귀환(7월) → 신중국 성립(10월) → 워드 추방 및 마오쩌둥의 방소(12월) → 주은래를 비롯한 중공 대표단의 방소, 애치슨 연설(50년 1월) →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체결(2월) → 중공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지원 및 김일성의 방소, NSC68 채택(4월) → 김일성의 방중(5월) → 전쟁 발발과 트루먼 성명(6월) → 동북변방군의 창설(7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및 유엔군의 북상&월경(9월) → 인민지원군의 참전(10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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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13. 16:58

 이 책은 해방 이전부터 6·25전쟁 발발까지를 종축으로 삼고 구() 만주지역, 다시 말해 오늘날의 중국 동북지방을 크게 세 지역으로 구분하여 그곳에 살았던 만주 조선인의 생활상과 생각을 다양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6·25전쟁 전사(前史) 분야의 또 하나의 대작이다. 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저자의 약력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현재 서울시립대학 전임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서울대 역사교육과와 연세대 사학과(석사)를 거친 이후 1993김원봉 연구를 펴냈고, 이듬해 조선의용군 연구로 국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1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에 이어 이 책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주로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조선사람의 흔적을 역사 속에서 발굴·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책은 기왕에 제출된 저자의 연구실적들을 대거 수정하여 종합한 결과물이며, “한국독립운동사와 해외한인사에 대한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하에서는 이 책의 구성과 핵심논지, 자료를 일별하고 6·25전쟁 연구와 관련하여 이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에 관해 간략히 비평하겠다.[각주:1]


 일찍이 일제의 패망 이전부터,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이 만주지역에서 삶을 일궜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만주지역은 조선인들, 그중에서도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 새롭지만 고달픈 삶의 터전이면서도, 야심찬 누군가에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김원봉, 김일성 등)이자 출세의 신천지(최남선, 박정희 등)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통치의 주체가 빈번히 바뀌면서 그에 따라 다양한 민족이 실로 다채로운 생활상을 보였을 것이고,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의 역사적 경험이 이후 한국사의 전개과정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를 추적한 시도도 제출된 바 있다.[각주:2]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만주지역의 역사적 성격(“무정형성”)이나 만주 조선인의 정체성이 사뭇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더하여 이들의 삶을 살피는 작업 또한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만주 조선인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했고, 어떠한 생각을 하며 해방 이후를 살았을까? 간단하게 보이는 질문이지만 명료하게 답변하기는 분명 어렵다. 저자는 앞서와 같은 사실과 질문을 염두에 두고 만주 조선인 사회 및 그들의 조국()”가 이전 반()식민지·식민지 사회 각각의 좌우대립, 현지 정세와 한반도 정세의 전개와 더불어 어떻게 변했고 실현돼갔는지를 분석하였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연변지역(동만), 목단강지역(북만), 국민당지역(남만·관내)에 있던 조선인 사회의 전개상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각 장은 끝자락에 일종의 맺음말을 제공하고 있는데, 독자들이 저자의 논의를 정리할 때 유용하다. 그러나 각 부의 분량은 균등하지 않다. 1부가 일곱 장으로 논문 7편에 해당하는 분량인 반면 2부와 3부는 네 장씩의 분량으로 구성돼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평자는 이러한 분량상의 차이가 당시 만주 조선인 사회의 역사인구적인 사실, 즉 연변지역이 만주 내 다른 지역보다 조선인이 많았고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거나 또는 다른 지역의 조선인 사회를 선도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역별 사정을 파악하게 해주는 자료의 분량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해방을 전후하여 동만지역에는 ‘50~60’, 북만지역에는 ‘11~12의 조선인이 살았고, 국민당이 통치하던 지역에는 조선인 장병 수가 ‘4~20(?)에 육박하였다.


 저자는 600여 쪽을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해방 후 만주 조선인 사회가 도달하게 된 귀결은 바로 6·25전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좌익이었던 동만·북만지역의 조선인 사회뿐만 아니라 우익조선인 사회에서도 나름대로의 기지론(基地論)을 선보였는데, 그러한 모습의 배경이랄 수 있는 좌우대립의 논리야말로 결국 만주 조선인들이 6·25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주요한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설명하는 셈이다. 더하여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논조는 다음과 같은데, 동만·북만지역의 조선인 사회는 중공당 및 북한과의 친연성이 강한 편이었던 반면, 남만·관내지역의 조선인 사회는 직접적인 통치주체인 국민당 및 남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평자는 분석대상으로서의 사회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성격을 갖는 바, 그것의 어떠한 경향을 서술하는 작업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저자가 치밀한 사료분석을 통해 만주 조선인 사회의 경향을 굵은 필치로 정리하여 제시한 것은 분명 미덕이다. 그러나 평자는 저자가 미처 서술하지 않은 만주 조선인 사회의 흐름, 회색지대를 그 모습은 정확히 알기 어려울지라도 추가적으로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좌우대립의 자장(磁場) 안에 있진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만주 조선인이 생각한 조국이 무엇이었는지는 다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염두에 둔다면 저자가 원초적이라고 평가하는 조국애의 경향이나 역사적 실상을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자신이 구사한 자료를 한글신문(민간과 군부대), 당안관 문서, 문화대혁명 자료군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저자는 신문의 성격을 밝히고 지면에 반영된 당시 만주 조선인 사회의 경향성을 추출했는데, 이를 통해 평자는 추후 연구에 필요한 자료원의 대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문혁자료를 진위를 기준으로둘로 나누어 역사적 사실을 걸러내는 저자의 방식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가 생산된 시기 및 역사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 시기에 대한 북한 측의 자료를 확보하여 대조해본다면 더욱 정확한 서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하여 아무리 민간에서 발행한 신문이라 할지라도 해당 지역에서 우세했던 통치세력의 영향으로부터 거리를 두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만주 조선인 사회의 육성(肉聲)이라고 단정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당시를 살았던 개인의 일기나 출간된 작품, 증언록이나 구술 자료 등을 추가하여 살핀다면 좀 더 풍부한 역사상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각주:3]


 마지막으로 평자는 6·25전쟁과 관련하여 이 책의 내용적 핵심이 각각 인민해방군 156사단(이후 제4야전군 독립 15사단인민군 12사단)164사단(이전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단인민군 5사단)의 창설과 활동, 북한으로의 귀환을 면밀히 추적한 6장과 11장이라고 평가한다. 저자가 참고한 김중생의 글에 따르면,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남진한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10개 연대가 만주 조선인 부대였으나, 정작 이들에 관한 연구는 미비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병() 개개인이 생각했던 귀환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저자가 언급했듯, 지휘부나 당위원회의 생각을 드러내주는 자료는 꽤나 많은 편이지만 병사 개개인의 속셈을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각주:4]

  1. 이 글에서 인용구는 주로 저자 및 다른 서평자의 글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른 서평자의 글로는 任贊赫, 「해방 후 중국 동북지역 조선인 사회와 한국전쟁: 『또 하나의 한국전쟁: 만주 조선인의 ‘조국’과 전쟁』」, 『한국근현대사연구』 57, 2011을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강상중·현무암, 이목 옮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과함께, 2012. 이 책은 같은 저자가 쓴 『興亡の世界史 第18卷: 大日本・満州帝国の遺産』(東京: 講談社, 2010)을 국역한 것이다. [본문으로]
  3. 任贊赫, 앞의 글, 2011. [본문으로]
  4. 염인호, 『또 하나의 한국전쟁』, 역사비평사, 2010, 24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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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9:18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6·25전쟁에 관한 미육군의 공식역사 5부작 중 두 번째 편이다. 이 책은 시기적으로 19517월 휴전협상부터 1953727일 협정 조인까지를, 내용적으로 개성과 판문점에서 벌어진 지난했던 협상의 과정과, 그것과 결부된 전선에서의 상황을 다루었다. 저자는 마지막 장(23回顧)에서 책의 내용을 천막(=협상)’전선부분으로 나누어 요약했고, 6·25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UN(=미국)의 성공적인 공산침략 저지 인도적인 동기의 성공(=비강제송환) 공산중국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인식 미국 국내에서의 변화이다. 이상 저자의 주안점을 다음 절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를 개괄하면서 그라즈단제브(A. J. Grajdanzev)나 맥큔(G. M. McCune)의 책 등 당시 입수 가능했던 최신 자료를 이용했다.[각주:1] 이 외에도 저자는 서한(Ltr), 미공군사 같은 다른 책, 신문(New York Times ), 미국 국회청문회록, 전갈(Msg), 각급부대 및 지휘관 보고서(Rpt), 메모, 협상록(Transcript), 국방성 소책자(Pamphlet) 및 보도자료(Press Release), 국무성 告示(DoS Bulletin), 결정서(Decision) 등을 이용했다. 전반적으로 미국 전구사령관(Theater CDR)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염두에 둔 채 휴전협상의 추이와 전선에서의 충돌을 서술했고, 공산주의자들의 의도와 동향을 추측했다.

 

밀당을 통한 UN의 성공적인 공산침략 저지

저자는 6·25전쟁의 결과를 꽤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결국 UN은 공산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동시에 전투와 정전협상에 있어서 하나의 전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350). 또한 명목상 소규모 병력만을 파견한 21개국 군대는 UN의 정당성을 드높인 하나의 사건이다. 한편 미국은 극동에서 책임을 덜길 원하였고, 현지에서 자유우방군의 창설과 증강을 추구하였다(241). 전쟁말경부터 한국군은 북한군보다 우세하게 되었고, 이후 아시아에서 공산침략에 대한 보루로서 기능했다.

협상의 빈번한 휴회 및 속개는 전선에서의 충돌강도와 빈도에 여파를 미쳤다. 전장에서의 우세가 적의 회담재개를 불러왔다는 설명에서 파악할 수 있다(357). 그러나 성공에 뒤따른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차치하고서라도, UN군의 전쟁노력을 성공적이었다고 서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2년간의 낭비로 보는 것이 2년간의 성공적인 노력으로 보는 것보다 적절하지 않을까.

 

인도적인 동기의 성공(=자원송환)

자원송환(Voluntary Repatriation)과 자동송환(Forced Repatriation) 간의 원칙대결은휴전협상 동안 지난한 문제였다. 1949년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모든 포로들은 적대행위의 종결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석방·송환돼야 했고, 6·25전쟁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 협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저자는 제네바 협정의 강제성이나, 개인의 意思 등과 같이 제네바 협정에서의 생략된 부분에 주목했다(100). 그리고 미국과 북한 모두 공히 제네바 협정의 생략된 부분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원칙의 대결 이면에는 승리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던 것 아닐까. 또한 그 대결의 장에서 강조된 인도적이라는 수사는 이후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해주는 전가의 보도로 기능했다.

저자는 포로문제의 최초 책임을 북한에 두었고, 이후부터 포로문제를 두고 양측의 공방이 오갔다고 썼다. 이후 저자는 일괄교환(=강제송환)”의 원칙을 깬 미국에, “인도적인 의미에서 포로들에게 자결권을 주었다고 면죄부를 발행했다. 그러나 저자의 태도는 공산진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확연히 달라진다. 제네바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했으나, 저자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중공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인식

저자가 6·25전쟁의 결과에서 주목하는 또 다른 한 요소는 바로 중공의 흥기이다. 인민지원군의 首位로서 휴전협상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펑더화이(彭德懷)를 비롯하여, 이 책에서 드러난 공산진영의 주축은 소련이 아닌 중공이다. 저자는 휴전회담 동안 북한은 중공군과 함께 석상에 나타났고, 북한에 대한 소련의 발언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주장했다(351).

 

미국 국내에서의 변화

6·25전쟁은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에서도 광범위한 변화를 촉진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약화되고 이완된미국의 군사력은 6·25전쟁을 기화로 개혁과 재정비에 착수하게 되었다(352). 또한 소련을 맹주로 하는 공산권이 언제든 미국에 도전할 수 있다는 가정이 출현했고, 6·25전쟁을 계기로 이러한 가정은 강화되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戰前상황(status ante bellum)으로 돌아가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일정 규모 이상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戰費 마련이 필수라는 인식이 등장하였다.

 

이 책은 슈나벨의 정책과 지도에서처럼 수사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한 장(15)을 할애하여 제한전의 성격을 드러내고자 했고, “靜態戰이나 停滯상태, “전쟁목적의 결여등을 계속 언급했다. 또한 적극적 방어”(9)에서와 같이 전쟁의 성격을 계속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51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UN군은 9,000출격하여 적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다.

 

이 책을 통해 6·25전쟁의 세부논점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문제적인 서해5도 문제(117)공평하다고 평가받은 1952년의 마이어협정(157)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전적으로 미국의 입장에서 서술된 부분들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 Andrew J. Grajdanzev, Modern Korea,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1944), George M. McCune with Arthur L. Gray, Jr., Korea Today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50) 등. 그라즈단제브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고정휴, 「A. J. 그라즈단제브와 《현대한국》」, 『한국사연구』 126권, 2004를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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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9:17

정책과 지도는 미육군의 6·25전쟁 공식역사 5부작 중 첫 번째 편이다.[각주:1] 이 책은 시기적으로 6·25전쟁의 前史부터 19517월 휴전협상이 벌어지기 직전까지를 다루었다. 한편 이 책을 포함하여 5부작 중 3권의 책이 집필이 완료된 시점인 1950년대 후반 또는 1960년대 중반에 바로 출간될 수 없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특히 5부작 중 첫 번째인 정책과 지도의 경우, 집필이 완료된 시점보다 10여년 늦은 1970년대 초반에 출간되었다. 이는 전투나 전쟁사 일반을 서술한 다른 공식역사와는 달리 미국의 民軍 정책입안자들의 시각과 의도, 정책의 형성·입안·운용 등 현실정치와 관련된 민감한 사항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장기간의 감수와 검열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또한 저자의 근무지 이동으로 인해 4년 동안 추가적 서술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책의 출간이 늦어진데 한 몫을 차지한다.

 

1~2장은 6·25전쟁 이전의 한국사와 한미관계, 해방과 분단 등 역사적 사실들을 간략히 서술했고, 3장에서는 미군의 구조와 1950년 당시 병력 보유상황을 다루었다. 이어서 4~7장은 전쟁 발발 이후 2개월 동안 아시아와 미국 사이의 정책교환과, 개전초기에 중점을 두었고, 8~9장은 인천상륙작전을 다뤘다. 10~16장은 38도선 횡단계획부터 UN군의 북진, 북한지역 점령, 중공군의 개입, 워커의 사망과 리지웨이의 취임, UN군의 철군계획 등에 할애됐다. 17장은 중공에 대한 보복, 중공의 해안봉쇄, 중화민국 정부군의 사용 여부, 중국본토에 대한 폭격 문제 등 정책문제를 주로 다뤘고, 18~22장은 후퇴한 UN군이 38선 근처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9516월 공산군 측의 제의로 같은 해 7월 휴전협정을 시작하기까지의 기간을 보여준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전장의 상황과 사건들, 그리고 워싱턴 및 현지 미국인 지도자들의 의견 교환과 정책·명령들을 인과적으로 서술했다.

 

이 책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이 책은 다분히 미국중심주의적, 반공주의적,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입각하여 서술되었다. 미국인 고위 지도자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이는 추천사에도 나와 있듯 이 책이 6·25전쟁이라는 대사건에서 개인의 역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책은 냉전적 대결의식에 입각하여, 소련은 미국의 대척으로, 中共극동의 잠재적 위협으로, 북한은 소련의 하수인으로, 남한은 몇 차례의 예외를 제외하고 상당히 멸시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한국인에 대한 설명에서 자치능력 부족과 전장에서의 무능력 등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이승만이나 김구를 제외하면 한국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자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41, 47, 95, 118, 278, 414, 492쪽 등).

 

다음으로 이 책이 근거하고 있는 자료들의 특징이다. 그것은 1970년대 초반에 미군이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로, 당시 영어로 쓰인 한국사 관련 2차 문헌, 비망록(각서), 회고록, 정부 공간문서, 군대 문서, 라디오 방송, 電報 등이다. 대부분이 6·25전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미국자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적 구성을 토대로 저서는 시종일관 소련의 팽창야욕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경계하고 비난했으며, UN을 통한 미국의 국제주의적 접근이 지닌 정당성을 강조했고, ‘나쁜소련과 좋은미국이라는 대비를 부각시켰다.[각주:2] 한편 역사적 사실에 있어 오류를 찾을 수 있었는데, 모스크바3상회담의 결과 신탁통치 소식이 한국에 전해진 날짜(1945129)와 폭동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것은 저자의 부주의나 의도적 왜곡으로 보인다.(45)[각주:3]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6·25전쟁은 비단 야전에서만 수행된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 6·25전쟁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야전에서의 작전을 워싱턴 당국이 직접 통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6·25전쟁 발발당시 미국의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72), 소련이나 중공과의 전면전을 유발시킬 가능성 때문(98)이었다. 따라서 한국과 워싱턴 사이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고위급 인물들 간에 시차와 견해차는 필연적이었고, 이는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결국 맥아더의 해임으로 일단락되었다. 19509월 이후 38선 횡단의 문제(10), 중공군 개입에 따른 맥아더-워싱턴 간의 다른 대응(363~370), 대만문제를 비롯하여 월권이나 다름없는 정치적해결을 제안했던 맥아더와 트루만의 관계(20) 등 양자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와 불거지는 갈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고위급 인사들의 정책과 지도(policy and direction)가 전쟁 초반의 상황전개를 결정하는데 미친 영향의 크기 차이다. 미국의 정책내부에는 국가적, 전략적, 전술적 등 층위를 달리하는 영역이 존재했고, 소수파와 다수파의 의견이 착종되었으며, 각각의 정책이 현실화되었을 때 항상 기대효과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즉 정책 대다수는 현실적 상황과 조건에 의해 굴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하여 정책 입안자와 수행자 사이의 지리적 차이는 그 거리만큼이나 경험적 차이를 불러왔고, 이 차이는 6·25전쟁이라는 대사건에서 수많은 주름들을 형성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정책과 지도가 사태의 전개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획정하는 작업은 향후 논의가 추가로 요구되는 작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해보고자 한다. 먼저 저자는 6·25전쟁이라는 국지적 사건을 국제적인 시각에서 파악하였다. 실제로 6·25전쟁 동안 서로 다른 진영 아래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참전하였다. 물론 저자는 어디까지나 미국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공전하는 영국, 프랑스, 대만이라는 식의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서술은 같은 陣營 내에 존재했던 국가 간 갈등을 어느 정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1950년도 미국의 국방구조와 체계를 살필 수 있다는 점(3, 7)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이 세계적 차원의 군사강국으로 변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저자의 서술은 장차 진행될 미국의 군사적 강화의 맹아적 또는 과도기적 단계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

  1. 『정책과 지도』 앞면에는 6·25전쟁에 관한 미육군의 공식역사 5부작의 명칭이 나와 있다. 각각 ①‘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②‘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November 1950,’ ③‘Ebb and Flow,’ ④‘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⑤‘Theater Logistics’이다. 출간 및 번역된 순서는 차례대로 ②, ④, ①, ⑤, ③이다. ⑤의 경우, 원래의 제목이 'The Medics' War'로 바뀌어 5부작 중 네 번째로 출간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미육군군사연구처 홈페이지 http://www.history.army.mil/html/bookshelves/collect/usakw.html 참고. [본문으로]
  2. “거의 본능적으로 미국은 단지 정당한 당위성만을 따르고 있었다.”(492쪽)라는 서술에서 하나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영어원문: “Seemingly by instinct, the United States had been following most of the precepts right along.”(Policy and Direction, 393쪽) [본문으로]
  3.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55쪽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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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9:02

이 책은 1949년 혁명을 달성한 신중국과 한국전쟁 간의 긴밀한 관련을 염두에 둔 채, 아시아의 냉전이라는 대주제 밑의 세부라고 할 수 있는 10여 편의 개성 넘치는 논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구성상 1, 2부로 나뉘어져 있고, 그 중 1부는 당대 생산된 기록 자료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또는 이론적 틀 속에서 걸러낸 담론분석의 성격이 강하며, 대체로 1950년대 신중국민 형성의 초기단계에 주목했다. 주로 한국전쟁기를 전후하여 벌어진 운동(運動)과 그 현장에 동원된 인민들을 묘사함으로써, 중공중앙이 기획한 신중국적 주체 형성의 논리와 실상을 짚어내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정작 논의의 대부분, 특히 중국인 학자가 쓴 글들은 서구(의 이론)와는 다른 중국의 복잡한 현실을 부각시키는데 할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2부는 역시 당대 생산된 기록 자료를 이용한다는 면에서 1부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특정 담론보다는 역사적 사실의 복원에 노력을 기울인 역사서술의 성격이 강하며, 대체로 1950년대 신중국의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북, 대만, 홍콩, 말라야 등지와 한국전쟁 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 2부의 글은 1부에 실린 글보다 사변적 성격이 약하고, 다루는 시간적 길이가 훨씬 길어 역사적인 전변을 좀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필자는 특히 2부에 실린 판왕밍·천띵후이의 글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 이유로는 당대를 몸소 겪은 이들의 기억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점, 서로 멀리 떨어진 곳의 사건들이 정치경제적으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밝힌 점 등을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영국 식민권력의 분할통치술(divide et impera)이나 토사구팽, ‘신촌계획등의 기획이 한국처럼 피식민지의 경험을 겪은 나라에서, 첫째로 이민족 간에, 둘째로 같은 민족 간에도 지배층이 자국민을 상대로 하여 거의 비슷하게 수행된다는 점에서 적잖이 놀라웠고 비교사회학적으로 어느 정도 시사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남주[각주:1]의 글은 중공의 건국강령이었던 신민주주의론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인민민주독재론으로 급격히 변하는 모습을 서술했다. 저자는 주로 건국이래모택동문고등 혁명 지도부의 글과 인민일보등 신문자료를 이용하여 중앙의 논리와 공세, 자산계급의 대응 등을 소묘했다. 저자는 중공 통치이데올로기가 급변한 핵심적 요인으로 시종일관 한국전쟁이 가져온 긴장감을 초들었다. 그러나 이 글은 정작 긴장감이나 위기의식이 중공 지도부와 인민의 의식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해서는 자세히 분석하기는커녕, 자료를 나열하듯 상황설명에만 치중했다. 중공이 전쟁을 활용한 측면은 앞으로 더욱 자세히 분석돼야할 것이다. 한편 부패에 대한 인민의 분노를 전유한 중공의 통치술은 흥미로운 주제였다.

 

청카이(程凱)[각주:2]의 글은 당대 생산된 회고, 신문, 수고 등을 통해 건국초기 신중국의 정치운동 중 하나인 평화서명운동의 전모를 다뤘다. 19494월 시작된 세계평화대회는 그 이듬해까지 세계 인구(대략 25억 명) “5억 명의 서명을 받았던 만큼 그 호소력을 짐작할만하나, 그것은 아직 대만과 시장(西藏)해방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민중의 (정치)인식미달 상태라는 중국적 맥락에서 문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 두만강까지 진격하는 11월에 평화서명운동에 가담한 중국인은 2.2억 명에 도달했고, 그 내용도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비극적 기억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됐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의 평화서명운동은 나름의 계몽기획이자 냉전적 국민을 빚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결과는 항미원조운동으로의 전환에 다름 아니었다.

 

임우경[각주:3]의 글은 국민의 번신(翻身), 즉 중국인의 정체성이 항일에서 번드쳐지는 과정을 한국전쟁기 중국의 반미대중운동관련 잡지(신중국부녀, 현대부녀), 사진, 만화 등을 매개로 살폈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중국인의 대미인식은 크게 친미, 숭미, 공미 등이었는데, 중공 지도부는 이러한 대중의 대미우호적 정서를 적시, 천시, 멸시의 삼시(三視)’, 즉 반미로 갈음하고자 하였다. 항일의 기억을 자양으로 하는 반미이데올로기는 일단 구축됐으나, 한편으로 그러한 논조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목소리는 억압돼야만 했다. 논리생산을 주도한 자는 누군지, 어떠한 의도로 그리하였는지 등이 더욱 자세히 분석돼야 할 것이다. 억압된 목소리의 복원문제가 의문으로 떠올랐다.

 

허지시엔(何吉賢)[각주:4]의 글은 잡지 중국청년과 신문자료 등을 자료적 근거로 삼아 관주도의 신애국주의(운동)론 안에서 청년담론의 면모를 파악한 담론분석이다. 195010월에 이르러서 신애국주의운동은 고조됐는데, 그 내용은 주로 이 운동의 새로움을 강조하고 역사와 민족에 관한 지()를 새로 정립하며 애국일상을 접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사회과학의 개념, 이를테면 민족주의나 애국주의에 관한 서구의 이론을 먼저 소개한 후, 그것들은 중국의 경험과 분명 차별되는 것이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정작 저자가 언급한 중국의 특성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고 역사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 글은 중국의 역사적 경험이 갖는 특별함과 이에 조응하여 선전이데올로기를 정치하게만들어낸 중국인(혁명가)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허하오(何浩)[각주:5]의 글은 마헝창 소조(馬恒昌 小組)를 매개로 신중국적 노동국민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일단에 주목했다. 저자는 기존의 계급론(또는 서구 이론)으로는 모범 노동자마헝창 소조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글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글은 마헝창과 마헝창 소조를 역사적으로 자세히 분석하기보다, 신중국의 역사적 현실을 서구의 이론으로 담아낼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그것을 중국의 특징(개선된 전통윤리나 심적 질서따위)으로 다시 풀어내는데 치중했다. 그 결과 역사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단순한 방식으로 묘사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저자의 의도과는 달리, 증명하기 힘든 주장을 접맥하여 결국에는 단순한 방식으로 묘사하느니만 못한 이도저도 아닌 글이 탄생했다.

 

최일[각주:6]의 글은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역사적 집합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종족 집단(ethnic group)에서 국민(nation)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살폈고, 그들의 한국전쟁서사 시기별로 분석했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조선인의 유입과 활동 양상은 다양한 편이나, 대개 얼구이즈(二鬼子)와 만주국 국민의 처지를 경험했고 동시에 어떤 이들은 항일무장투쟁을 거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빚어나갔다. 그러나 국적과 관련하여 이들은 선택을 내려야 했고, 이는 한국전쟁과 맞물려 전개됐다. 결국 전쟁을 통해 조선족형성의 (잠정적인)마지막 단계가 완성된 것이다. 한편 조선족문학의 경우, 한국전쟁에 관한 주류적 영웅주의·계급투쟁담론을 뛰어넘기까지 30여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란스치(藍適齊)[각주:7]의 글은 한국전쟁이 대만의 역사적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정작 양자 간의 연관성을 다룬 연구가 적었다고 언급한 후, 대만의 한국전쟁 기억이 찾을 곳이 없는지경에 이르렀다는 문제의식에 나름대로 답한다. 이 글은 중앙일보등 신문과 회고록을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한국전쟁기와 그 직후, 국민당 정부는 대만이 한국과 순치관계라 주장하고, 대만으로 귀국한 의사(義士)’를 찬양하는 등 스스로를 높이고 중공을 격하시키는 이중 전략을 취했다. 그 핵심인 반공이데올로기는 국민당 정부의 통치를 정당화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양국 사이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무엇보다 반공이데올로기의 필요성과 효과가 약화되면서 그 상징이나 다름없던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공식기억에서 사그라졌다.

 

로윙상(羅永生)[각주:8]의 글은 한국전쟁 전후 홍콩의 복잡한 문화정치에 대한 기존의 냉전적시각을 비틀어 냉전사유라는 인식론적 전제(또는 지식의 존재구속성) 자체를 비판하는 단초를 마련하려고 했다. 저자는 우선 당시 영국 당국의 전통적인 비정치화식민 전략이라는 맥락을 설명했고, 시종일관 이를 강조했다. 나아가 저자는 미국이 공보처(USIS)를 통해 홍콩과 중국인을 겨냥한 ()선전(匪情硏究)전을 수행했다고 서술했다. 더하여 한국전쟁 이후에도, ·중은 홍콩에서 문화냉전을 계획하고 실천했으나, ·미간의 동상이몽 및 미소대립과 국공내전 사이의 괴리는 미·중 또는 ·어느 한편도 사상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홍콩을 장악하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판왕밍(潘婉明)[각주:9]과 천띵후이(陳丁輝)[각주:10]의 글은 말라야 공산당과 영국 식민당국 간의 상호작용을 한국전쟁을 매개로 하여 살폈다. 공저자는 먼저 영국의 토사구팽 정책과 이에 항거한 ‘620전쟁’, ‘신촌(新村)계획(Briggs Plan)'이 낳은 신촌이라는 특수한 지리 공간 또는 생활 형태의 연원을 설명했다. 신촌계획의 실행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호황에 적극 기인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말라야 공산당은 반제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섰으나, 이후 당의 맹목성과 민족 간 분열,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영국의 전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타이와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유격투쟁을 전개하다가 1989년 자진해산했다.

 

김학재[각주:11]의 글은 한국전쟁의 시종을 살피되 중국이라는 요소에 집중함으로써 한국전쟁에 중국의 개입이 가지는 거대한 함의, 즉 과잉정치의 전쟁이 탈정치적 평화로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에 주목했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의 일부를 축약한 것으로 자료적 근거는 첸 지안(Chen Jian), , 스툭 같은 역사가의 저서와 당대 생산된 미국 보고서, 회고록 등이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정전체제의 기본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문서는 19501212일에 나온 NSC 95이다. 저자에 따르면, 같은 문서는 정전의 군사적 측면만을 강조했고, 한국문제로 의제를 국한하는 특징을 보이며, 이는 장차 전개될 대()공산권 협상에서 미측이 고수한 일관된 경향이었다. 이어서 저자는 징벌적이고 제한적인 조항의 부재를 골자로 하는 미국 자유주의 평화조약(기획)의 무책임성과 비일관성을 비판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미국(유엔)의 아시아 정책에 지진 같은 충격파를 주었고, 결국 중국 불인정, 한국의 군사정전, 일본과의 자유주의 평화협약이라는 차별적인 레짐(regime)과 그 후과가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1. 북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했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이다. [본문으로]
  2. 북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3.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이다. [본문으로]
  4. 청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5. 북경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부연구원이다. [본문으로]
  6. 연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학원 부교수이다. [본문으로]
  7.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대만 중정(中正)대학 교수이다. [본문으로]
  8. 시드니 테크놀로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홍콩 영남대학 문화연구과 부교수이다. [본문으로]
  9. 대만 기남국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싱가포르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다. [본문으로]
  10. 호주 머독(Murdoch)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싱가포르 손중산남양기념관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11.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베를린자유대학 글로벌 히스토리 프로젝트 연구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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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6:32

데이비드 콩드(David W. Conde)1906년 캐나다의 온타리오에서 태어났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긴 후 1932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2차 대전 중 미군 심리 작전군 소속으로 대일 선전전에 종사했고, 종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 정보교육부 영상과장직을 수행했다. 1946년 사임 후 로이터 특파원으로 일하던 중 1947년 무허가 체류를 이유로 맥아더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다. 이후 1964년 도쿄로 돌아와 다양한 미국의 정기간행물에 기고했고, 서적은 주로 일본어로 집필하여 출간했다. 주로 일본과 미국의 국내외 정책에 관해 매우 비판적인 관점에서 서술했고, 중국, 한국,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에 관해서도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그는 자신이 쓴 수고와 인쇄물들을 1964년부터 10여 년간 몇 차례에 걸쳐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 기증했다.[각주:1]

 

이 책은 1967년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것으로, 3부작 현대조선사(An Untold History of Modern Korea)2부이며, 1부와 3부보다 먼저 일역되어 나왔다. 시기적으로 6·25전쟁 발발 직전부터 휴전협상과 1954년 제네바 회담까지를 다루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민간에서 이용할 수 있는 사료들이 이전에 비해 뚜렷하게 증가했다. 저자는 그러한 배경에서 회고록·청문회록·신문(AP, UP, Calender의 뉴스 등북한이 노획한 경무대 문서(Facts Tell, 1960) 등을 자료적 근거로 삼아 6·25전쟁의 이면과 미국의 국내외정치 간의 상관관계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콩드의 문제제기는 1952년 스톤(I.F. Stone)한국전쟁 비사만큼 예리하지 않고, 자료 이용이라는 측면에서도 미육군군사감실의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다. 정병준에 따르면 이 책은 북한의 논리와 자료에 따라 구성됐고, “중국 변수에 대한 해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내용이 설득력이부족하다. 그의 논평은 콩드가 지녔던 문제의식의 과잉이 자신의 분석을 무디게 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스톤의 책이 나오자마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고, 6·25전쟁이 일단락된 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후반에 나왔다. 당시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확전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전 미국을 공분에 휩싸이게 했던 미라이학살(1968)이 보도(1969)되기까지도 2년여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무수한 인명을 앗아간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저자는 그 중심에 미국의 음모와 개입, 만들기의 정치경제학이 있을 것이라고 상정했다. 저자에게 17도선으로 표상되는 베트남전은 38도선으로 표상되는 6·25전쟁과 큰 차이가 없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의 표현을 빌자면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나타난 것이었다. 저자는 그러한 시대적 배경 안에서 언론인으로서의 소명을 가지고 역사적 선행사건이자 비극이었던 6·25전쟁을 조망했다.

 

저자는 책의 전반부에서 미국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질문하며 상황이 6·25전쟁으로 치달았음을 그려냈다. 미국의 중국전략은 미국정치권 내에 무거워지는 반공의 공기 속에서 일본의 경제적 부흥과 아시아에서의 보루설치, 군사원조 등으로 현실화됐고, 이는 이승만과 장개석의 이해에도 부합했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미국의 의도는 평화적 통일에 대한 최고의 가능성을 선보인 북한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상반됐고, 6월 하순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 미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에서 저자는 개전의 책임을 자유세계에 돌리고 있다.

 

6·25전쟁은 처음부터 기묘한 전쟁이자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저자는 3장에서 스톤을 인용하며, 19506월에 벌어진 미국의 정보의 실패에 관해 의문을 제기했다. 저자는 북한에 침략자라는 딱지를 붙인 미국의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 미국의 정세, 한반도의 상황, 국제적 역학관계 등 여러 요소들을 설명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정치한 분석이라기보다 미국을 매도(293, 357)하고 공산측에 우호적인 시각을 견지하는데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즉 저자가 겨냥하는 비판의 초점이 이미 특정한 방향을 타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자료이용은 편향되고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무대 노획문서에 드러난 남측의 북침의도는 그것의 실현여부를 떠나 이미 실현된 사건의 증거로서 기능했고, “평화를 갈망하는공산측 전쟁을 지속하려는유엔측이라는 이분법 또한 책의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똑같은 잣대를 왜 한쪽에만 들이댄 것일까?

 

저자의 주된 집필 의도는 미국 비판, 특히 아시아에서 벌이는 전쟁을 통해 드러난 미국의 추악함과 도덕성의 타락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비약한 무기 생산 및 기술의 발달은 원자폭탄을 필두로 하여 네이팜, 세균무기 등 가공할만한 비대칭무기들을 미국에게 제공했다. 저자가 책을 쓰고 있을 당시 베트남에서는 고엽제 살포가 보도되는 상황이었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책에서 이러한 부분에 지면을 할애했다. 또한 6·25전쟁이라는 비극의 소식은 엄격한 전시검열체계 속에서 몇 번이나 굴절됐고, “국제적인 사기극의 공범자인 미국은 정보왜곡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구성하고 선전(412)했다.

 

6·25 전쟁을 동시대인의 눈으로 바라본 스톤과 비교할 경우 콩드는 전쟁이라는 사건을 역사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공식 보고서와 현실과의 괴리를 포착한 점은 언론인의 책무이자 스톤의 영향력이었다. 그러나 문제의식의 과잉은 저자의 분석을 무디게 했고, 곳곳에서 낭만적인 서술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롭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13장에서 북한 주민과 남한 국민 사이에는 어떤 적의도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한국인이 진정한 동포였다는 서술이나 50년대 후반 남한 대학생의 징병기피가 조국의 군사화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서술이 그것이다. 저자는 한국인이 처한 궁핍과 비참을 안타깝게 보고, 전쟁 이후 폐허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주체로 그려내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의 眞相을 반영했다기보다, 미국의 개입을 부각시키고 비난하기 위한 일련의 장치로 여겨지기 쉽다.

 

저자는 1951년 후반부에 가서 6·25 전쟁은 이미 나토와 일본의 군사화를 촉진했다고 보고, 전쟁과 미국 경제 간의 연관성(272), 일본의 부흥과 반공블록 형성(442)을 짚었다. 또한 전쟁의 향배를 가늠할 1952년 대통령 선거가 한국과 미국에서 진행됐는데 이에 주목한 점도 눈여겨 볼만 하다. 저자의 분석은 사건을 역사화 할 때 가능한 것이었다. 저서 전반에 걸친 수치 제시와 인용은 저자의 성실함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 행위자의 역할이 다소 수동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생각된다.

  1. 저자 및 저서에 관한 정보는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9, 37~38쪽과 구글에서 ‘David W Conde'로 검색한 후,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PDF 형태로 제공하는 An Inventory of His Papers in The Library of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Special Collection Division을 참고했다. 후자의 주소는 http://www.library.ubc.ca/spcoll/AZ/PDF/C/Conde_David_W.pdf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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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5.04.02 12:30 [ ADDR : EDIT/ DEL : REPLY ]
    • 독서량이 굉장히 풍부하셨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이 알려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2015.04.02 18:26 신고 [ ADDR : EDIT/ DEL ]

천자평/한국전쟁2014. 10. 6. 06:30

秘史 한국전쟁의 저자인 스톤은 미국의 언론인으로, 본명은 이시도르 파인스타인(Isidor Feinstein)이다.[각주:1] 1907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930년대 파시즘에 맞서 조직된 인민전선(Popular Front)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했으나,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이후 편집인으로 있던 네이션(The Nation)지에서 스탈린을 맹렬히 비난했다. 뉴욕의 좌익계 일간지인 피엠(PM)의 해외특파원으로 근동을 방문해 이산 유태인들을 취재하기도 한 그는 1950년대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정치색 때문이었다. 이후 독립신문인 주간스톤(I.F. Stone's Weekely)을 창간했고, 지면을 통해 매카시즘과 미국 내 인종차별을 강하게 비판했다. 1964년 그는 기존에 공간된 자료들을 세밀하게 독해하여 통킹만 사건의 허구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1971년 협심증으로 인해 신문발간을 중단했고, 1989년 보스턴에서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종류의 상을 받았다. “모든 정부는 거짓말쟁이에 의해 돌아가고, 그들이 말하는 모든 것은 믿어서는 안 된다는 스톤의 언급을 통해, 저자가 지녔던 삶의 태도를 짐작해볼 수 있다.[각주:2]

 

이 책은 6·25전쟁 중인 1952년에 출간된 책으로, 저자가 19508월부터 1951년 중순까지 파리특파원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 주로 집필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전쟁 발발부터 1952년 초까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극동군사령부가 발표하는 공보와 비록 검열을 거친 것이지만 한국특파원들이 보낸 기사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했고, 일관되지 못한 공보 및 신문의 행간과 이면을 읽어냈다. 저자는 미국의 공식적 견해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반박하고 설득하기 위해책을 집필했고, 따라서 이 책의 주된 자료적 근거는 오로지 미 정부와 UN의 자료, ·영의 권위 있는 신문정보원이다. 이후 이 책은 남침유도론의 효시가 되었고, 6·25전쟁연구사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저작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각주:3]

 

우선 이 책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질문과 가설적인 주장을 들 수 있다. 이는 저자가 논의를 풀어나갈 때 의지하는 주된 표현방식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을 통틀어 전쟁의 각 시기별로 의문시할 수 있는 사항을 가차 없이 물어본다. 이러한 저자의 문제화 방식은 전장을 직접 관찰할 수 없고, 고위 정책결정자들의 의중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자료를 입수할 수 없었던 저자는 공보와 신문기사 사이의 차이를 전유한다. 그것은 정황 증거와 저자의 상상력 및 정치적 태도의 혼합으로 구성돼 이 책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물적 근거에 기초한 뚜렷하고 확고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급이 낮은 가설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자의 가설은 주로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국가의 恥部를 효과적으로 들쑤신다. 저자에게 6·25전쟁이 기습이라는 미국의 주장은 가당치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극동군사령부가 고의로 정보를 무시했거나 연착시켰기 때문이라는 것(2)이다. 저자의 시각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고, 신문지면에 나타난 다양한 국가의 반응과 행동을 6·25전쟁의 틀에 집어넣어 관찰했다(6). 저자는 전쟁을 지속시킨 트루먼과 맥아더(12), 덜레스로 대표되는 반공적이고 망상적인 아시아우선주의자”(5), 미국의 개입을 바라는 아시아 국가의 지도자들(11)에게 공격적으로 질문을 제기한다. 저자에게 그들 모두는 6·25전쟁의 건축가이자 동시에 평화를 반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은 스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을 것이었고, 바로 그 지점이 저자의 노림수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아르카나 임페리[각주:4]를 겨냥한 질문은 대개 가설의 형태(31)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저자의 추론적이고 고발적인 방식은 양날의 검과 같은 것으로, 그 한계 또한 분명하다. 저자는 가설과 추정을 통해 문제를 제기했고, 문제 제기 그 이후를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 책이 1950년대 미국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졌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또한 이 책에서 드물지만 분명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47)이나 미국과 그 동맹국을 바라보는 과도한 음모론적 시각(28),[각주:5] 공산측을 비롯하여 미국을 제외한 행위자들의 역할과 입장을 상대적으로 축소·왜곡시킨 점(14, 34, 35), 정작 한국인은 잘 보이지 않는 서술 등은 주의 깊은 독해를 요구한다.

 

이 책은 일급의 언론인인 저자가 분명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썼고,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후 6·25전쟁연구사에서도 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동시에 이 책이 근거부족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의 여러 세부논점들을 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것은 미국의 군비산업 가동과 봉쇄의 확장(7), 미국 국내의 정황(9),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의 갈등(13), “제한전의 논리(15, 33, 42), 전후 일본의 복구와 미일관계, 휴전협상에서의 논점, 협상의 결렬과 속개, 전시 검열(40), 중국 로비스트들, 종군기자들, 민간인 학살, 냉전의 기원(28) 등으로 6·25전쟁의 공식서술이 담아내지 못한 측면을 독자에게 환기시킨다.

 

김일성을 현대판 카드모스에 비유하여 미국의 과장된 추정을 비판(31)하고, 밴플리트의 애도를 둑에 구멍을 뚫으면서 돌아다녔을 네덜란드 소년으로 전유(42)하며, 맥아더의 이야기를 불교 연대기같다고 설명(35)하는 등 이 책은 고도의 은유와 풍자를 담아냈다. 하지만 저서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시대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있다.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양이 적은 상태에서 작가는 어떻게 역사서술에 착수해야 하는가. 저자의 사례는 우선 문제의식과 사료의 면밀한 독해가 결합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저자도 처음에 정부 공식보도를 믿었지만, 곧 그것과 민간서술 간의 괴리를 발견했고 그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갔다. 또한 이러한 구도는 공식서사와 민간서사의 대결로도 파악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 구도가 2013년 현재에도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본다. 1951822일로 추정된 폭격은 그 다음날 휴전협상을 결렬시켰다. 저자는 서류 공개의 요구에 침묵하는 리지웨이의 태도를 문제 삼았고, “조작이었다면 왜 조사를 하지 않고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을까? (중략)왜 그렇게 빨리 공식발표에 넘겼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59년 후 비극적인 천안함 사건이 벌어졌고, 그것은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기 전 2010년 지방선거에 앞서 그렇게 빨리 공식발표됐다. 스톤이 그랬던 것처럼, 작가는 우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는 천릿길과 같은 역사서술에 내딛는 첫 번째 발걸음이 될 것이다.

  1. 이 책의 원본은 I. F. Stone,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52. 또한 이 책의 1988년 판본에는 브루스 커밍스가 쓴 서문이 실려 있다. [본문으로]
  2. 위키피디아와 Mickey Z(본명 Michael Zezima)라는 미국인 작가, 편집자가 Monthly Review 인터넷 판에 기고한 글을 참고하였다. http://mrzine.monthlyreview.org/2005/mickeyz181205.html [본문으로]
  3.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9, 37쪽. [본문으로]
  4. Arcana Imperii(State secrets, “국가의 비밀”이라는 뜻의 라틴어). [본문으로]
  5. 이완범, 「한국전쟁연구의 국내적 동향 - 그 연구사적 검토 -」, 『한국전쟁과 남북한사회의 구조적 변화』,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1991, 230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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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5.04.02 10:55 [ ADDR : EDIT/ DEL : REPLY ]
    • 안녕하십니까! 아마 제게 원문 pdf가 있을 것 같습니다. 찾아봐야겠지만, 메일주소를 알려주신다면 원문 파일을 송부해 드리겠습니다 ^^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15.04.02 18:25 신고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