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냉전연구2014. 11. 9. 20:39

이 책은 마오의 중국과 냉전을 열쇳말 삼아 전후(戰後) 아시아에서 펼쳐진 중공의 의도와 국제관계를 9개의 주제와 사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새롭게 발굴·번역된 중국과 러시아 자료에 기초하여 1940~60년대 아시아의 냉전 경험을 중국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서술하였다. 서문이 잘 밝히고 있듯,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탐구지점을 설정하였다. 그것은 바로 지난했던 국공내전과 중국혁명, 두 차례의 열전, 미국과의 긴장 완화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그의 두 번째 질문은 국익과 안보를 중시하는 현실주의적 분석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국적 자료에 근거하여 사상과 이념이라는 요소를 분석에 도입한 개디스를 필두로 하는 ()냉전사연구의 흐름 속에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각주:1] 저자는 이 책에서 상기의 질문에 답하면서 중국의 냉전 경험을 반추했고, 그러한 경험의 유산이 어떠한 방식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가를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서론과 결어를 포함하여 모두 11장으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마오의 중국이 맞닥뜨리게 된 일련의 사건들과 그에 대응하는 지도부의 인식 및 행동을 보여주었다. 1~2장은 전후 중국이 다시 한 번 내전의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미소갈등이라는 냉전 구도에 포획된 아시아에서 중국의 주도적 역할을 부각시켰다. 특히 저자는 2장에서 워드 사건’, ‘-스튜어트 접촉’, ‘일변도 성명에서 드러난 중공의 언설과 행위를 통해 중국에서 미국이 실패한 것은 잘못된 대중(對中)정책 때문이라는 모종의 신화를 비판하였다.[각주:2] 3장은 1956년 열린 20차 소련공산당대회를 기점으로 중소관계가 악화돼가는 모습을 서술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본격적인 중소갈등의 진원(震源)은 이미 고인이 된 스탈린에 대한 태도상의 차이였다. 4장은 6·25전쟁을 끝내기 위한 중국의 생각과 전략을 다루었고, 5장은 1차 인도차이나전쟁과 뒤이은 제네바협상의 미봉적 타결을 서술하였다. 6장은 1956년 폴란드 위기와 헝가리 사태에 대한 베이징의 태도를, 7장은 1958년 대만해협 위기를 다루었으며, 8장과 9장은 각각 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와 데탕트에서 중국의 인식과 역할을 설명하였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을 중심으로 진행 중인 냉전사 연구에서 근거가 되는 1차 자료들의 소장처뿐만 아니라 각 주제를 다룬 영어 및 중국어 문헌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저자의 다른 책에서도 등장한 바 있듯, 이 책 역시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중공 지도부의 사고와 인식을 엿보기 위해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회고록을 비롯하여 선집이나 건국이래마오쩌둥문고, 마오쩌둥군사문집 등 중앙당안관(中央檔案館)[각주:3]에서 펴낸 중공중앙위원회 문서와 마오쩌둥 관련 문서를 자료적 핵심으로 삼았다. 더하여 저자는 구()소련 및 동구(東歐) 자료의 경우,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의 국가안보문서고[각주:4]와 우드로윌슨센터의 냉전국제사프로젝트(CWIHP) 문서고[각주:5]에서 도움을 얻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자료에 대한 엄밀한 사료비판은 드러나지 않으며, 또한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고 충실한지에 관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저자의 서술에서 찾을 수 있었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가 이후 전개될 중소갈등, 조중갈등, 중월갈등의 씨앗을 각기 다른 시간대의 역사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중공 지도부나 중국을 설명할 때 아편전쟁 이후중국이 겪게 된 역사적 굴욕과 피해의식을 계속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 간 관계, 특히 갈등의 역사는 19세기 이전으로 소급하여 서술하지 않았다. 평자는 그 이유가 궁금한데, 아무래도 중국(관변)의 입장에서 냉전기 중국의 경험을 파악한 다수의 사료에 근거하다보니 나올 수밖에 없던 문제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러한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북한·베트남의 냉전사 서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저자가 제기한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이 어떠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따라가 보자. 첫째, 중국은 냉전의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였는가? 2차 대전이 끝난 세계,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역할은 결코 미소갈등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은 결정적인 주연으로서 냉전의 국제정치에 개입했고 시기별·지역별로 나름의 국내외 정책을 관철시켰다. 6·25전쟁에 참가하여 소련의 불완전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상대로 대등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스탈린의 소련의 눈치를 봐야했으나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소련을 적극 비판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가려고 하였다. 물론 헝가리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제공산주의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라는 수사를 통해 소련의 진압을 용인하기도 했으나, 1980년대 중후반 이전까지 중소관계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의 역할을 파악할 때 무엇을 가장 주의 깊게 봐야하는가? 독자는 이 책에서 중소관계의 몰락이나 중월관계의 악화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소제목(Ideology matters)을 할애하여 이념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 때 이념은 단일한 결과로 귀결되었다기보다는 그 이념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인 주체의 세계인식 또는 역사·문화적 환경에 따라 변용되고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이고, 마오식()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원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별개로 중국의 대내외 정책을 만들고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이 책은 마오를 비롯하여 중공 지도부의 인식과 생각에 강조점을 두어 계속 드러내려고 하였다.

 

셋째, 중국은 실제로 어떠한 행보를 보였는가? 저자는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국제정치에서 중국이 보인 행보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마오의 혁명 후의 우려라는 심리적·개념적 요소를 제시하였다. 이는 마오의 계속혁명개념과 쌍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즉 그는 보편적 정의와 평등이 도래하고, 중국이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다시거듭날 때까지 혁명을 계속추구하였고, (실상 불가능에 가까운)이러한 목표들이 달성되기까지 우려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터였다. 따라서 마오 시기의 중국은, 적어도 대외관계상에서 중심성을 추구하였으나 지배는 추구하지 않았고, “항상대내적 동원이라는 목적으로만 물리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또한 자본주의사회와는 구별되는 중공 정치의 독특한 요소들, 이를테면 중국에서의 민주집중제나 광범한 대중 동원을 이해하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결어에서 저자는 중국의 냉전 경험의 유산을 설명하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중국의 1당 독재체제라든가 피해의식에 대하여 서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한 듯 보인다. 이렇듯 저자가 영어로 마오의 생각과 중국의 냉전 경험을 서술한 의도는 그 다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중공 정부는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수행(즉 국제사회로의 통합)해야 하고 그것의 관건은 바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성원들이 열심히 중국의 관점과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평자는 현실의 정세(중국의 대국굴기와 미국의 쇠퇴)가 역사가의 입지에 고스란히 반영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1. John L. Gaddis(1941~). 이른바 "냉전사가의 수장(Dean)”으로 불리는 미국인 역사가로 냉전과 거대전략을 탐구한다. 2014년 현재 예일대학에서 Robert A. Lovett육해군사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조지 케난(George F. Kennan)의 공식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Chen Jian(陈兼),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6. [본문으로]
  3. http://www.saac.gov.cn [본문으로]
  4. http://www2.gwu.edu/~nsarchiv [본문으로]
  5.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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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28. 16:36

 이 책은 냉전아시아’, ‘신중국6·25전쟁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다룬 11편의 글을 모아놓은 것이다. 여기 실린 글들이 각각 다룬 주제, 자료, 논리는 결코 같다고 할 순 없지만, 공간적으로는 아시아를 시간적으로는 1949~1953년의 기간을 다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한편 평자는 지난 봄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1부에 초점을 맞추어 재독했다. 재론하겠지만, 1부는 신중국국민 만들기(주체형성)’ 또는 국민동원과 그 이데올로기에 주목한 글이 대종을 이뤘다. 평자는 그러한 서술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중공, 특히 마오를 중심으로 하는 지도부의 생각과 논리를 일부나마 확인하고자 했다.

 

 구성의 측면에서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원담의 서론은 책의 전반적인 논지와 성격을 강하게 규정지으려고 하였다. 그는 현란한 어휘를 통해 냉전6·25전쟁의 아시아적맥락을 부각시키고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어 1부와 2부는 각각 5편의 글을 담았다. 전자는 중국대륙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담론분석을 시도하는 방식으로 당대 행해진 운동과 그 논리를 서술한 것이다. 반면 후자는 중국 국내외의 주변부의 역사를 천착하였다. 따라서 2부가 1부보다는 이 책의 원래 취지에 좀 더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서론에서 확인한 바, 이 책의 핵심적인 취지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냉전아시아적맥락을 파악하여 서구 중심적(이분법적)냉전인식을 지양·탈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시아탈식민냉전적자장(磁場) 위에서 전개됐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한편으로 아시아주변부냉전신중국이라는 이중의 요인(또는 압력)에 대응해야 했다. 그렇다면 곧바로 신중국(아시아의)‘주변부의 관계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가 떠오른다. 현재 아시아의 문화냉전에 관한 연구는 걸음마 단계이다. 자료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의 확보에서부터, 그렇게 그려진 아시아를 읽어내고 더욱 풍부한 해석을 제공하는 데까지 가야할 길이 꽤나 멀다. 그렇다고 해서 대국굴기에 힘입은 중국 연구자가 관변적논조, 즉 마오를 격찬하거나 오늘날 중국의 외교정책을 정당화하는 서술을 통해 냉전아시아적맥락을 자기네들 입맛에 맞게 요리하도록 좌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평자는 2부의 글이 1부에 실린 글보다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평자는 1부를 보려 하는가? 우리가 1부의 글을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선 1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론에 드러난 책의 취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론은 다음과 같이 6·25전쟁을 정의했다. “2차 세계대전의 전중과 전후 미국의 세계지배전략과 이에 대응한 소련의 피압박민족해방운동에 점철된 자기이해관철방식의 충돌이 야기해낸 강권적 역사현실에 대한 주체적 극복경로이자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 기획의 각축.” 독자는 이 구절에서 ·소의 영향력 속에서 전개된 아시아 제국(諸國)의 주체성을 다루겠다는 공편자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다. 핵심은 아시아의 주체성이다. 이어 저자는 흡사 마오의 중간지대론에서 빌려온 것 마냥 4분화된 도식을 제공한다. ‘소비에트화/(민족화/반공주의)/아메리카화가 바로 그것인데, 기존의 냉전적 시각에서 괄호 안에 있던 수동적인 아시아를 드러내어 주체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이다. 공편자는 책의 취지를 물화시키기 위해 중국의 6·25전쟁 경험을 분석하고 중국이라는 장소가 지닌 다양한 성격을 추출하며 문화적 차원에 주목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평자는 이러한 취지가 기존의 시각에 균열을 내고 다원화의 가능성을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한다. 그러나 아시아와 중국 간의 경계설정은 모호하다. 그러한 모호함이 역사상을 잘 반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간 간과돼왔던 아시아주체성’(모택동사상의 반근대적 근대기획 등)을 웅변하기 위해 중국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인지는 의문이 들었다.[각주:1] 더하여 이 도식은 상당히 국가주의적이다.

 

 서론에서 제시한 이 책의 취지를 염두에 두고, 1부의 내용과 특징을 살펴보자. 이남주는 전판 운동’(19511) 산판 운동’(12)의 급진화를 소재로 중공이 인민민주독재의 일정을 앞당기는 모습을 살폈다. 청카이의 글은 평화서명운동의 중국화’, 항미원조운동으로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신중국의 선택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임우경의 글은 냉전적 국민으로 변화해가는 중국 인민의 모습을, 허지시엔은 1950년대 주창됐던 신애국주의 운동을 통해 중국적 주체의 형성과정을 추적하였다. 마지막으로 허하오는 마헝창 소조(馬恒昌 小組)라는 특이한 사례를 통해 중국의 노동국민이 형성되는 과정을 그려냈다. 그렇다면 1부를 꿰는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독자는 1부의 서술을 통해 짧게는 1949~1953, 길게는 1949~1960년대의 기간까지 중국 본토의 운동사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운동의 주체인 중국국민이 빚어졌고, 중국사회의 성격이 바뀌어갔다. 둘째, 그러한 선전, 교육, 동원의 구성과 내용을 국민(또는 주체)형성의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 운동은 곧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중공은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어야 했다. 참전은 그러한 중공의 기획을 가속화시키는 계기이자 결과였다. 적어도 공식서사에서는 항일반미로 대체됐고, 국민에 대한 갖가지 요구가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부과됐다. 저자들에 따르면, 공론장은 사라졌고 중앙과 어긋나는 목소리와 기억은 공적인 영역에서 추방됐다. 셋째, 중국인 연구자에게 해당되는 부분으로 중공 지도부에 대한 찬양 및 해석상의 무리수를 들 수 있다. 허하오의 글이 대표적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인 노동자들은 중국 사회구조의 논리맥락에 입각하여 특정 시기의 역사적 어려움을 전복시켰고, 중국 공산당의 이론 구조를 받아들였다.도무지 실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더하여 오늘날 G2로 급부상한 중국의 시원을 건국으로 파악하다보니 저자들은 자연스레 당시 지도부의 이론이나 세계인식을 추인(追認)한 셈이다. 맹자를 인용하는 부분에서 평자는 당혹스러움마저 느꼈다.

 

 세 번째 모습은 저자들의 존재구속성(외재성)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보건대, 첫째, 본토에서 학술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선사하는 당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례로, 주지안롱의 체포를 들 수 있다. 둘째, 그러한 속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비-서구적인 어떠한 설명방식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지 모른다. 즉 그들이 처한 물적 구조가 중국의 역사적 우월함을 되풀이하도록 만드는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냉전문화아시아적관점에 입각하여 재확인하는 작업은 우선 양적 축적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아시아적냉전의 특수성을 일반화하기엔 이르지 않은가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한편으로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추가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아시아중국이었는가? 냉전의 아시아적특수성/중층성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공저자들은 지역을 얘기했는데, 그 결과는 국민국가의 탄생인 이유가 무엇인가? ‘신민주주의인민민주전정의 관계는 무엇인가? . 이러한 질문에 답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아시아적냉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물론 백원담은 다섯 가지 이유(①냉전의 아시아적 기원(분할점령과 신중국 탄생) ②냉전의 실질적 체제화 ③냉전의 구도가 아시아에서 미중 중심으로 중첩적으로 재구성됨 ④아시아에서 냉전은 아시아 지역화의 기획으로 탈냉전의 구도를 일찌감치 형성했음 ⑤냉전의 문화심리구조가 계급적 아비투스로 공고화됐음)를 들어 6·25전쟁과 중국 간의 상관관계 및 이후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평자는 ①, ②, ③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면서도, ④와 ⑤에 관해서는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시아 지역화의 기획’은 대체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어떠한 ‘탈냉전’의 구도를 지녔나? 또는 ‘계급적 아비투스’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그것의 담지주체는 누구였나? 등의 의문이 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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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13

이 책은 냉전 초기부터 케네디 행정부가 활동했던 1960년대 초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근대화(Modernization)”는 당시 미국의 정책입안자와 학자, 주류언론이 공유했던 지배적 인식의 틀(conceptual framework)이자 이념(ideology)이었으며 이를 통해 당대 미국인들이 지녔던 발전에 대한 생각과 탈식민화의 전략적 중요성, ‘개입의 양상 등이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길먼의 책이 근대화()”의 탄생부터 몰락까지의 과정을 세 가지 사례(DSR, CCP, CIS)를 통해 추적했다면, 이 책은 세 가지 사례(Alliance for Progress, Peace Corps, Strategic Hamlet)를 통해 근대화()”이라는 이념이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대외정책에 어떤 식으로 반영됐고 재생산됐는지를 탐구한 문화사 내지 담론연구이다.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돼있으며, 1장에서는 문제제기와 방법론을 언급했고, 2장에서는 냉전이라는 맥락과 근대화론의 부상을 다훴다. 3~5장에서는 사례를 통해 근대화론의 냉전적 작동양상을 살폈다. ‘결론에서는 앞서의 논의를 정리하지만, 어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저자가 온당하게 짚고 있듯,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 입안·실행과정에서 사회과학적 근대화론은 결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심급은 아니었고, 케네디 행정부의 정책형성을 주도했던 유일한 요소는 아니었다. 따라서 저자는 각각의 사례연구에서 근대화라는 이념을 정치가들의 연설이나 서한, 정책보고서의 문면에서 추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냉전이라는 큰 맥락과 1950~60년대 각 지역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제시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엮어냈다. 이 책을 포함하여 앞선 연구자들이 보여주듯, 근대화라는 생각, 또는 근대화론은 당시 미국 외교정책의 입안부터 실행, 검토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와 다양한 층위에서 관계를 맺었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정의나 전형(model)도 꽤나 다양했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화론은 미국사회 자체의 성격뿐만 아니라, 미국이 물질적·문화적으로 열악하다고 인지한 외부세계를 변형시키는 능력에 관한 가정의 집합이다. 길먼의 책에서도 지적된 바 있듯, 이 이론의 대표적 특징으로는 전통근대라는 이분법적 시각, 경제·정치·사회 변화는 통합돼있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생각, 어떤 사회든 직선적인 발전을 공유한다는 관념, 선진국이 발전 중에 있는 국가의 근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는 사고 등이다. 여태까지의 설명을 통해 냉전기 전반 미국 발 근대화론의 모습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여태껏 살펴본 미국인 학자들의 냉전문화사 연구에서처럼, 이 책은 냉전기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기보다는 그러한 정책이 나와 실행에 옮겨지는 역사적 사실을 소묘하려고 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과학자들의 노력에 주목했다. 저자는 사회과학자들의 정치적지식 생산, 사회과학이론(근대화론)과 외교정책 간의 관계, 미국의 국가적 정체성의 변용 등을 주로 살피고자 했고, 이 내용들이 결합돼 본문의 개별 사례연구에 잘 드러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학계(이론)과 정계(정책)는 시기별·분과별로 친소의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고, 특히 사회과학계(국제정치학과 지역학을 포함)가 쌓아올린 입지와 위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사회과학계가 기울인 노력’(길먼)이나 그들이 확보한 과학성에만 전적으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치가들의 세계전략 구상과 국내적 동원’(클라인), 공산권 및 3세계의 존재, ‘3세계에 대한 경쟁적 원조라는 냉전의 맥락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할 때 더욱 깊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냉전의 문화’, 냉전의 아시아적 풍경’, 냉전의 한국적 발현을 확인하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적잖은 아쉬움을 줄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논리라는 유용하고 큰 그림을 제공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개별적(지역적) 사례연구는 어디까지나 큰 그림 그리기(=‘미국의 논리확인)에 복무할 따름이라는 인상을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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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12

이 책은 냉전 초기부터 월남전이 패배로 귀착돼가는 1970년대 중반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미국 국내에서 근대화(Modernization)”로 포괄할 수 있는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출현했고, 그것의 핵심인 발전(Development)”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미국의 사회과학계에서 이론적 중추로 거듭나고 다듬어졌는지를 탐구한 노작이다. “근대화론(modernization theory)”은 근대화를 위한 이론이자, 당시 미국의 근대주의자들이 기울였던 근대화 노력의 청사진이 되는 논의들을 말한다. 저자는 총 7장에 걸쳐 미국 국내에서 근대화론이 대두하여 사회과학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가 쇠락하는 모습을 선별적이지만, 면밀히 조사했다. 오늘날 우리사회를 설명하는 도식 중 하나가 바로 개발세력 민주세력의 경합이고, 양쪽이 근대화(=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자신의 공로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은 미국의 지성사를 다룬 연구지만 한국현대사 연구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장은 대표적 근대화론자이자 시카고대학 사회학자 쉴즈(Edward Shils, 1910~1995)를 인용하며 글을 시작했고, 근대화론을 개괄했다. 근대화론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미국 사회과학계가 공유했던 탈식민 세계의 경제·정치·사회적 변화에 관한 지배적인 사고방식 또는 문제해결방식이었다. 이것은 전통과 근대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세계를 보았고, 계몽주의, 반대중주의 등 위계적인 틀을 전제했으며, 그 속에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諸國전통이라는 범주 하에 도매금으로 묶였다. 근대화론 안에는 여러 지류들이 있었으나, 미국의 국내외적 정세변화와 맞물려 권위주의적인 근대화론이 득세했고, 이것은 장차 국제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뒷받침할 터였다.

 

2장은 근대화론이 부상하게 된 배경을 서술하고 있다. 근대화론은 대략 두 세기에 걸쳐 세계로 급격히 확산됐다. 구미 지식인들은 물질적으로 공전의 도약을 달성했고 세계적으로 팽창하던 유럽을 바라보며 근대라는 시대상을 생각하게 됐고, 이는 반제반봉건 투쟁을 벌이던 식민지민에게도 이론적 자원으로 수용됐다. 한편 戰後 세계의 핵심적인 표어이자 모든 지역 지도자들의 해결책은 경제 발전이었고, 따라서 미국은 제국주의와는 다른 위치에서 탈식민 세계의 열망에 나름대로 답해야했다. 물론 미국식 민주자본주의의 대척점엔 소련이 존재했고, 미국의 정책입안자들과 학자들은 급속도로 산업화를 수행하던 소련식 체제와 그 주변세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하여 학계의 지배적인 담론으로 거듭나게 된 근대화론에는 엘리트 민주주의, 행태주의, 예외주의, 박애심 등의 요소들이 결합했다.

 

3장부터 5장은 근대화론의 내용을 생산한 기관 중 주요한 세 곳을 조사한 사례연구 부분으로 책의 핵심이다. 각각 하버드대학 사회관계학과(DSR), 사회과학협의회 비교정치위원회(SSRC CCP), 매사추세츠공과대학 국제관계학연구소(MIT CIS)라는 개별 기관들의 활동과 인물들의 관계망, 오고간 서신, 개최된 학회, 제출된 내용과 주장들, 정부와의 연계 등을 자료를 토대로 충실하게 제시했다. 개별 기관들이 상호작용 속에서 활동했다는 저자의 언급과 함께, 각 장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스토우, 아몬드, 파이 등)이 인적·물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세 장은 각 기관의 독자성·독창성보다는 당시 미국 내의 근대화론에 관한 부분적인 상을 그려볼 수 있으므로 유용하다 하겠다.

 

저자는 근대성과 미국예외주의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하버드대학에서 약 45년 동안 교편을 잡았던 탈콧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를 중심으로 인물 및 학과(DSR), 그들이 만든 근대화론의 이론적 밑바탕을 살폈다. 파슨스는 19461DSR을 신설했고, 여기에 사회학자, 인류학자, 심리학자 등을 불러 모아 사회과학을 재정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927, 하버드대학 경제학 교수로 부임한 이후, 당시 지배적이었던 경제학의 아성에 도전하며 이론적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경제학의 양대 지류였던 신고전파와 제도학파를 모두 비판했고, ‘경제를 넘어 사회 전체를 분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침내 1951, DSR가장 중요한 연구 성과이자 악명 높은일반행동이론에 관하여가 출간됐다. 이 책은 행동을 이분법적인 양식변수(pattern variables)”에 따라 정의하고 분석했으며, 이후 탈식민지역에서 미국의 개입(=근대화)을 격려하는 주요한 이론적 자원이 됐다.

 

근대화론이 부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냉전이라는 정세적 맥락도 물론 중요했지만, 당대 사회과학계를 주름잡던 거두들의 공모도 그 몫을 단단히 했다. 저자는 4장과 5장을 통해, 근대화론자들이 일련의 연계망을 구축하여 서로 친분을 쌓고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학적 권력을 확보해나가는 과정과 근대화론에 기입된 반공주의적 기초를 면밀히 조사했다. 저자는 SSRC CCP를 근대화론자들이 연계를 도모한 하나의 통로였다고 보았다. CCP에 소속된 학자들은 산업화 세계와 탈식민 세계를 비교하기 위하여 비교정치학을 이론적으로 가다듬었으며, 이 때 DSR의 근대화론을 좀 더 비판()적으로 채용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DSR의 이론적 기반과 반공주의가 결합돼 생겨난 MIT CIS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CIS의 대표적 이론가는 로스토우였는데,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경제 발전의 단계에 이전까지 제출된 근대화론자들의 식견을 모두담았다.

 

저자는 베트남전을 통해 근대화론이 소멸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전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명백한 실패였고, 베트남전 수행을 뒷받침한 이론이 근대화론이었던 만큼, 이 이론은 더 이상 발전의 전형이라는 입지를 지켜낼 수 없었다. 근대화론에 대한 뚜렷한 반대는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제기되기 시작했으나, 그 때까지 근대화론은 자기방어를 잘 수행한 편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는 CCP의 해산(1973), DSR의 해산(1974), CIS의 선회(전략문제) 등 급작스러운 근대화론의 실종을 목도한 시기였다. 저자는 이를 두고 획일적이고 거대한 사회과학적 사고가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좌우간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으로 좌우를 막론하고 사방에서 수행됐고, 더하여 저자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으로 통칭할 수 있는 일련의 흐름을 짚어냈다. 이들은 근대화론 자체보다는 그 안의 근대주의적 사고방식(mind-view)”을 문제 삼았다. 또한 저자는 국내정치의 위기에서부터 경기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들을 정리하여 제시했고, 그것을 통해 당시 지배적이었던 감정구조에 변화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서술했다.

 

이 책은 근대화론이 몰락한 이후의 지적 흐름들도 간략하지만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전의 근대화론자들은 이제 신보수주의공동체주의등으로 묶이게 됐다. 전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치적 안정과 그것의 현상적 표현인 질서가 유지되길 간절히 원했고, 후자도 질서에 대한 희구라는 측면에서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질서부과의 주체로 국가가 아닌 공동체를 지목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어 저자는 세계화와 근대화론 이후의 발전주의를 간략히 다루며 글을 마무리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아쉬웠던 점은, 저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수행하고 있는 근대화에 대한 방어이다. 그는 근대화희망적인 측면을 인권이라고 짚어냈고, 근대화론 전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선 안 되며,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을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한편으로 근대화론이 내포하는 측면들의 다양성을 실증적으로 알려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근대화론이 적용된 특정한 양상이나 맥락을 추인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에게 어떠한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고,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더 건강하고 부유하며 공평하고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를 당위로서 제시하는 것에 그쳤다. 따라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저자의 명백한 주장이면서도, 동시에 이 책이 주장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는 효과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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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12

이 책은 냉전 초기인 1950년대를 종축으로 삼고, 행태주의와 한국전쟁을 주제로 하여 미국의 군·(학 복합체가 주도한 적 만들기의 모습을 서술한 노작이다. 행태주의는 당시 미국의 지성사를 석권했고, 스스로 과학의 이름을 내걸었다. 행태주의는 또한 냉전이라는 시대적 규정 속에서 탄생했고, 그것을 자양으로 하여 성장했다. 따라서 행태주의는 당시의 미국의 학계뿐만 아니라 국내인식과 대외인식, 재정운용과 學知의 형성 등 한국사와 미국사의 여러 세부주제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요소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물질·구술 자료를 근거로 하여 냉전 초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사회과학계를 풍미했던 행태주의의 전개과정과 인식론적 구조, 행태주의자들의 활동양상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저자는 RG319(육군참모부), RG333(유엔사/한국), RG338(미육군 작전· 전술·지원기관), RG389(헌병감실)를 포함한 다양한 NARA자료(삐라와 통행증)와 본문에 나온 각 연구기관에서 생산한 자료들, FRUS, 회고록이나 회담문 등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논의를 전개했다. 이론적으로는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개념을 빌려 행태주의를 설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행태주의는 냉전의 고착과 함께 정상과학의 위상을 확보했으나, 1960년대 중반 위기를 맞게 돼 결국 지성사의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됐다. 저자는 세 부에 걸쳐, 행태주의의 대두와 양상, 위기를 다뤘다. 1부의 제목은 패러다임 규정하기, 세 장에 걸쳐 행태주의의 대두, 토대, 정재계·군부와의 공모, 인식론적 기초를 설명했다.

 

1장에서 저자는 미국의 군인(TAS, 1949)을 들며, 1950년대 미국의 지성사적 특징인 행태주의(Behavioralism)의 등장을 설명했다. TAS 장차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으로 불릴 어떤 과학의 사례였다. 한편 이 기획은 미육군과 카네기재단, 시카고대학이 협력하여 만든 결과물이었다. 이는 행태주의 연구의 물적·지적토대와, 당시 미국의 군··학 복합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행태주의의 본령은 자율적인 개인을 상정하는 것이었다. 이제 사람의 (정치적)행동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로 환원될 수 있게 될 터였다. 행태주의는 간학제적(interdisciplinary)이었고, 여기엔 가치적(value-free) 방법론을 추구했던 심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이 주로 복무했다. 전통적 의미의 학자들은 행태주의에 반발과 비난을 던졌으나, 기업들은 192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2장은 토머스 셸링[각주:1]의 예를 시작으로, 1950년대 미국이 자국의 두뇌’(지식인)를 동원하는 풍경을 서술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학계는 급성장했고, 그 속에서 양산된 학자들은 전통적 의미의 학계와 민간연구기관 사이에서 종종 방황했고, 이들은 결코 독립적이거나, 지적으로 대담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정부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19514, 심리전략처(PSB, 1954년에 해체되고 작전조정처(OCB)가 설립됨)를 세우는 등 원자무기에 버금가는 심리무기를 준비했고, 그 결과 두뇌집단들은 미국정부와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됐다. 이어 저자는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로 공군 산하의 랜드연구소와 공군대학 산하의 인적자원연구기관(HRRI), 해군연구소(ONR), 육군 산하의 인간관계연구소(HumRRO)와 작전연구소(ORO) 등을 살폈다. 2차 대전 때와는 달리 이 풍경에서 인문학자들은 배제됐다.

 

3장은 행태주의의 인식론적 기초(일차집단, 무의식, 계량화)에 관해 설명했다. 저자에 따르면, 행태주의자들은 전통적 의미의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공동체(gemeinschaft)적 특성, 비공식적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들의 밀착된 자율적 집단인 일차집단이 현대에도 존속·번성하고 있으며, 사회화와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이어 저자는 해롤드 라스웰[각주:2]로 대표되는 정신병리학적분석전략 및 불확실한 것확실하게만들어주는 계량화 또한 당시 행태주의 이론의 밑바탕이었다고 분석했다.

 

2부의 제목은 정상과학으로, 저자는 다섯 장에 걸쳐 당시 정상과학이었던 행태주의가 적용·실천되는 양상을 서술했다. 2부의 각 장은 한국현대사, 특히 심리전, 포로조사 등에 관련된 일화들을 꽤나 많이 담고 있어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4장은 윌버 슈람(Wilbur Schramm) HRRI에 소속된 일군의 연구자들이 한국전쟁의 전선을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당시 학계의 통설을 적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이 장에서 저자는 분석-권고-영향-전승으로 나눠 HRRI 보고서를 살폈고, 이 보고서가 갖는 중요성이 이역만리의 경험을 중심지(metropolis) 용어로 옮겨놓았고, 또한 보편주의적 가정-틀을 다른 지역의 사례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당시 행태주의의 대표적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더하여 저자는 그 보고서에 나온 분석기법이나 논조, 동원된 인력 등은 언론연구로 계승됐거나, 미국 외 지역에서 미국이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지적인 배경을 이루게 됐다고 분석했다.

 

5장은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수행한 심리전의 면모와 이면을 다뤘다. 미국은 2차 대전에서 선전을 연구한 학자들[각주:3]의 주장에 힘입어 사상이 갖는 힘을 기각했고, “건설적인 선전근본적인 관심사인 생존과 의식주에만 국한된다고 믿게 됐다. 선전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이후 베트남전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이어 문화적 특성들을 제거한 분석인 리비어 프로젝트나, 심리전국(OCPW)에 담긴 두 가지 경쟁적인 전략”(사회/생존, 일반적군/여론선도자) 등을 제시했고, 심리전 수행에서 행태론이 이념론을 압도하는 과정을 서술했다.

 

6장과 7장은 바로 앞장인 5장에서 승리를 거둔 행태론이 휴전협상 과정 및 포로수용소 조사과정에 적용되는 모습을 서술했다. 저자는 행동과학의 계보와 영향력이 라스웰-리츠-골드해머로 이어졌다고 보았고, 휴전협상에서 미국의 논리와 적 인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증명했다. 한편 랜드, HumRRO, ORO는 거제도에서 포로에 대한 조사를 수행했고, 19526월의 도드 납치사건을 계기로 CIE의 활동을 행태주의자들이 맡게 되면서 포로에 대한 이념 주입은 금지됐다. 6장의 작업 규칙’(Operational Code)이라는 개념이 보여주듯, 당시 행태주의는 적의 행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승리를 거두)고자 했으나, 실상은 이념과 역사문화적인 맥락과 배경을 그들의 과학적분석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呪文에 불과했다.

 

8장은 복귀하지 않았던 미군포로의 존재와 세뇌 논란, 이에 대한 행동과학자들의 비판을 다뤘다. 미국은 제네바 규정을 어기면서 자원송환을 주장했으나, 복귀를 원치 않는 포로의 존재는 미국 국내에서 논쟁을 유발했다. 여기서도 행태주의자들은 이적행위를 이념적 동기와 분리시켰다. 더하여 그들은 침묵한 다수를 긍정하면서도, 굴복한 자와 저항한 자를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양자 모두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례에 불과했다. 저자는 나아가 행태주의자들이 인종·종족의 문제와 갈등도 덮어두는 것으로 끝맺었다고 비판했다.

 

3부의 제목은 위기, 세 장에 걸쳐 행태주의가 가지고 있던 정상과학으로서의 위상이 위기를 맞게 되고, 경제학이 이를 대체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있다.

 

9장은 1962년 여름,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미육군의 제한전 임무와 사회과학 연구>라는 군·학 회담을 계기로 행태주의의 내용이 점차 변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 회담에서 랜드는 건설적인 방식”(사회공공활동)의 효과를 회의적으로 보았고, 대안으로 합리적 선택개념에 입각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행태주의 연구는 베트남 농민 또한 맥락을 탈각한 합리적 개인으로 정위했고, 그들이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 정부와 반란군 모두를 지원할 것이기 때문에, “베트남에 대한 원조는 실상 베트콩에 대한 원조였다.”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랜드는 심리학보다는 경제학(게임이론과 합리적 선택)을 이론적 자원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베트남전 수행방식은 이전보다 더욱 억제적이고 강압적으로 거듭나게 됐다.

 

10장은 군·학 두뇌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특작연구소(SORO)와 미육군이 가담한 카멜롯 프로젝트(1964~65)의 사례를 들며 행태주의가 종말로 치닫는 과정을 묘사했다. 행복이 넘치던 신화 속 카멜롯(Camelot)을 의식한 듯, 이 기획은 미국의 안정에 위해를 초래할 신생국의 정치적 봉기를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 예방적인 미국발 근대화였다. 저자는 카멜롯 논쟁에 포함되는 인명과 논란의 전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행태주의의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모습과 일관되지 않은 모습 등 다양한 모순을 담담하게 드러냈다.

 

11장은 책의 종결부로 New York Times의 베스트셀러이자 15개국 말로 역간된 The Report from Iron Mountain(Dial Press, 1967)[각주:4]가 불러일으킨 진위논쟁을 통해 행태주의가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묘사했고, 미드(Margaret Mead)의 사례를 빌려 냉전시기 지배적이었던 과학의 종언 및 미국 학계에서 학문적 권위가 여전히 실종상태라고 주장했다.

 

행태주의는 과학과 가치중립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 과학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선험적인 이론에 현상을 끼워 맞추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정부지원금을 받아내려는 노력에 불과했고, “탈가치적이라기보다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추종하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관심이 많았던 편향된 것이었다. 행태주의가 설정한 보편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상정한 미국적 양식에 다름 아니었고, 미국적 보편에 대한 일탈이나 미달은 전적으로 개개인의 심리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보여주듯, 미국의 행태주의는 피아(또는 적)를 극복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태도는 제국주의의 인종논의와 준별되는 미국의 새로운 제국주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실증을 위해서는 횡적으로 광범한 비교가 필요하다.

 

이 책은 성실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정작 무엇을 주장하려했고 어디에 강조점을 두려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는 인상과 함께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들을 주었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냉전 초기 미국에서 행태주의가 대두했고, 그것이 냉전의 적 만들기를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미국 학계, 때로는 미국을 겨냥하여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지점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태도는 저자처럼 미국인이자 미국 학계에서 자국을 비판적으로 사고해야하는 학자들의 전략은 아닐까? 그리고 내용에 관해서는, 행태주의가 정상과학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원인과 20여년이 흐른 뒤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 원인,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적 만들기전략의 실체 등이 궁금증으로 남게 됐다.

 

마지막으로 케난 전기로 퓰리처상을 받았고(2012), “냉전史家의 수장평을 받는 예일대학의 역사가 개디스(John L. Gaddis)를 보자. 그는 2005년에 봉쇄전략을 출간한 이후 백악관에서 국립인문기금(NEH) 훈장을 받았고, 정계에까지 입지를 다졌다. 한편 그는 알렉산더 조지(Alexander L. George, 1920~2006)의 개념인 작업 규칙의 영향을 받아 연구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조지는 한국전쟁 당시 랜드 소속으로 중국군 포로를 조사한 바 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이를 행동과학의 잔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1. 토머스 셸링(Thomas C. Schelling, 1921~)은 미국인 경제학자로, 현재 컬리지 파크에 위치한 메릴랜드대학 공공정책(Public Policy)학교에서 외교, 안보, 핵전략 분야를 맡고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1951)했고 유럽부흥계획에 참여했으며, 유수의 대학과 백악관을 넘나들며 경력을 쌓았다. 2005년에는 로버트 아우만(Robert J. Aumann, 1930~)과 함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본문으로]
  2. 해롤드 라스웰(Harold D. Lasswell, 1902~1978)은 미국인 정치학자이자 언론에 관한 이론가로, 시카고 사회학파의 일원이자 예일대학 법대교수였다. [본문으로]
  3. 모리스 야노비츠(Morris Janowitz, 1919~1988)는 미국인 사회학자로, “편견, 애국”에 관해 연구했고,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등과 함께 군대사회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쉴즈(Edward Shils, 1910~1995) 역시 미국인 사회학자로, 시카고 사회학파의 일원이었고, 권력 및 공공정책과 지식인(intellectuals)과의 관계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4. 위키피디아 The Report from Iron Mountain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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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9

연합국은 2차 대전에서 추축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미국은 사할린을 제외한 일본 열도를 석권한 뒤 수년간 군정(민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일본에서 1951,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어진 두 개의 조약[각주:1]이 이듬해인 1952년에 발효될 때까지 7년간 군정을 실시했고, 오키나와(沖縄)가 일본에 최종반환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을 더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일본의 미군정기는 오늘날까지도 미·일 각국의 공식역사서술뿐만 아니라 대중의 역사인식, 대외정책 입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울림을 주는 파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문이 언급하고 있듯, 부시 정권의 대이라크점령정책 입안·수행과정에서 대략 한 회갑 전에 만들어진 대일점령정책은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참조됐다. 더하여 미측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은 미국이 再造한 국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미군정기(또는 점령기)’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염두에 둔 채 미국의 대일점령통치를 정보와 교육 기획(project)"이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에서 집필한 박사학위논문을 日譯한 뒤 증보한 것으로, 미국과 일본 양국의 여러 공식/개인 자료(문서, 영화, 면담 등)를 근거로 삼고, 戰時에 수립돼 점령(戰後)기를 지나 강화가 달성된 이후에까지 입안·변용·실행된 미국의 對日문화전략의 구조와 양상을 역사주의적으로 살폈다. 저자는 시종일관 점령기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가르치려고(“재교육·재방향설정”) 했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핵심주장으로 삼았고,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다른 주장들, 이를테면 미국의 점령정책은 과거로부터 강화 이후에까지 이어졌다라든가 ·일 양국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미국의 점령정책에 융합됐다등을 추가적으로 제기했다. 나아가 저자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서 수행된 기존의 대일점령연구들을 잘 정리하면서도,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종적한계, 즉 한 분야를 다른 분야와 제대로 연계하지 못하는 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가 내세우고 있는 미국학이라는 학제적 접근법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횡적인 연구방법을 표방하기 위해 연구의 시야를 일본사회의 모든 측면으로 넓히고자 한데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등은 쉽사리 알기 어려웠다.

 

여태껏 살펴본 냉전문화연구는 분석의 범주를 크게 세 층위, 사상·이념/제도·정책·매체/소비·현상으로 나눠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연구들은 세 층위 중 한 곳에 주로 머물거나(남한과 대만의 국립대학 인문학부 편제), 성긴 논리로 서로 다른 층위를 무리하게 연결하고자 한다거나(원자탄과 재지역화의 균열들),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이론을 충분한 반성 없이 곧바로 연구에 도입(국문학자들의 푸코 원용)하는 등 부족함과 아쉬움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세 층위 모두를 나름대로 적절하게 다루었다고 할만하다. 그러면서도 특히 제도(조직·계통정책(정보·교육매체(영화)’ 층위에 주목했고, 대개의 문화연구가 보여준 방법론(역사적 총체성을 제시한 후 맥락 안에서 내용을 분석한다기보다, 몇 가지 생각만을 제시하는 식)과는 달리, 먼저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자칫 사변적인 담론분석에 머물기 쉬운 문화연구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문제(“횡적인 연구의 한계(22), 과연 새로운 시각인지?(49), CIE 영화에 집중 등)가 없지 않지만, ‘점령정책의 실시(점령기)’와 함께 점령정책의 입안주체와 조직·기관들 사이의 생각과 상호작용을 차분히 설명하며 점령정책의 도출과정(점령 이전)’점령정책의 계승(강화 이후)’를 보여준 점, ·일 어느 일방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지만은 않았다고 지적하여 양측의 주체성을 드러내려고 한 점, 모르는 부분은 솔직히 인정한 점 등은 당장에 문화연구자가 본받아야 할 방법론적 미덕이라고 여겨진다.

 

책의 2장은 당시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에 영향을 끼친 생각의 흐름을 세 갈래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블레이크슬리로 대변되는 친일파’, 보튼이 중심인 유도파(온건)’, 맥리쉬 등이 포함된 재교육파(강경)’로 서술돼있고, 삼자는 정계와 학계 등을 넘나들며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이 일본인의 적극적인 참가 속에서 실행됐다는 저자의 주장에서, 당시 대일점령정책을 두고 벌어진 미·일 양국의 일치단결과 동상이몽, 또는 3의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러한 흐름들이 섞여 만들어진 대일점령정책의 일부가 대외정보·교육교류 프로그램(USIE)'으로 강화 이후에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4장과 5장의 주제는 점령 당시 육군성과 민간정보교육국(CIE)이 힘을 기울였던 다큐멘터리 영화(CIE 영화)이다. 두 장에 걸쳐 CIE의 설립경위 및 계통, CIE 영화의 기원, 육군성의 역할, 영화 내용분석 및 상영과 반응 등을 다뤘다.

 

1945827, 미태평양육군(USAFPAC)은 산하에 정보선전부(IDS)를 설립했고, 이 부서의 최고책임자는 전략사무국(OSS) 출신으로 육군무관과 심리전감을 맡았고 맥아더의 군사고문이기도 했던 펠러스(Bonner F. Fellers, 1896~1973) 준장이었다. 922, 맥아더는 IDSCIE로 개조한 후 102, GHQ/SCAP를 설치할 때 최초의 특별참모부서로 CIE를 다시 발족시켰다. CIE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가담했고, 전시의 심리전·선전의 기능을 계승했다. SCAP 일반명령 4(“모든 미디어를 통해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보급·선전하는 것”)CIE의 목적을 규정했다. 저자에 따르면, CIE는 본래 자문기구였으나, 워싱턴의 지침이 현지의 재량권을 크게 제한하지 않았으므로, 실제적으로 이 기구는 월권하여 미디어와 교육에 관한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했다. 같은 기구는 또한 모든 도도부현에 <시청각 자료실>의 설립을 의무화했고, 영사기와 영화를 배포했다. 일본에서 CIE 조직은 19487월경에 이르러서야 CIE 정보과 영화연극계(MPTB) 산하의 교육영화배급부(EFU)가 영화를 지휘하는 형태로 안착됐고, 라디오, 신문, 출판 등 문화산업 전반과 교육 활동에도 종사했다.

 

55(일본인 시청자의 반응)CIE EFU에서 실시한 시청자 반응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영화를 본 일본인의 반응을 정리했다. 19503월쯤부터 시청자에 대한 조직적인 반응조사가 실시됐고, 이 절이 근거하고 있는 자료는 19506~11월의 조사표 565장이다. 자료의 특징을 언급하자면, 가나자와(金沢)와 후쿠시마(福島)를 제외하곤 조사 장소를 알 수 없고, 상영회의 주최자가 시청자의 반응을 수합하여 요약하고 논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자료는 시청자의 육성을 들려주진 못하지만, 경향을 파악하기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논평은 미국의 과학기술’, ‘스포츠(야구)’, ‘여가활동(스퀘어 댄스)’에 현저한 관심을 표명했고, 정치적·교육적 내용이 담긴 영화는 인기가 없었다. 표본이 가지고 있는 대표성 및 신빙성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를 통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미국의 원폭투하는 즉사인원만 대략 12만 명(7+5)이라는 가공할 피해를 남겼다.[각주:2] 헌데 조사가 실시된 년도는 1950년으로, 원폭이 투하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이 겪은 피해 수준과 과학(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인식 간의 괴리는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CIE 영화의 포장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과학(원자력)에 대한 불평을 조사표에서 배제시킨 것인지, 또는 역사에 대한 일본 민초들의 뼈저린 반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의문이다.

 

2장에서 미국 대일점령정책을 만든 조직·계통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었다.

 

1942년 봄. 국무부가 특별조사부(SR) 설치.

1942년 가을. 블레이크슬리와 보튼이 SR 극동단에 배속.

19431. 블레이크슬리 무리가 SR 정치연구국 영토문제소위원회(TS, 의장 보우맨)에 배속, T-357a 작성. 아직까지 매체를 재교육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19441. 국무부가 전후계획위원회(PWC) 설치, 블레이크슬리 무리는 국가지역위원회(CAC)의 하나인 부처간극동지역위원회(IDACFE, 의장 블레이크슬리)에 배속. 친일적 CAC-116과 이를 두고 수정을 요한 PWC-108b가 제안됨. 매체가 재교육수단으로 대두됨.

(IDACFE CAC PWC)

19443·4. PWC-108b를 두고 논의가 진행됨. 세 시기(엄격한 통제/주의 깊은 관찰/국제사회로 복귀) 구분.

19445. PWC-152b 승인.

19446. PWC-288(CAC-237)의 초안이 작성됨. 매체의 역할을 명확히 정의(PWC-288b).

194412. 삼부조정위원회(SWNCC) 설립.

19452. SWNCC가 극동소위원회(SFF, 의잔 두맨) 설치. 블레이크슬리 무리는 SFE의 작업단에 배속.

(작업단 SFE SWNCC JCS)

19457. SWNCC 해군성대표 게이츠가 SWNCC-162/D(“재교육·재방향설정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확립됨) 검토를 지시.

1945821. 블레이크슬리는 SWNCC-150(점령정책의 기본노선)SWNCC-162/D(SFE-116))을 결론 내려야한다는 IDACFE의 견해를 전달.

1945831. 국무성이 국제공보문화국(OIC)를 설치.

194596. SWNCC-150/4 승인. 불개입주의/개입주의를 각각 반영.

194597. “일본인의 재방향설정을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보튼)” 조직됨.

19451226. SFE-116/4(일본인의 재방향설정) 완성.

194618. SFE-116/4가 맥아더에게 송부돼 민간정보교육국(CIE)의 활동 지침이 됨.

  1. 1951년 9월 8일, 연합국 48개국과의 다자적 평화조약(남한·북한·중공·대만·소련은 서명하지 않음)과 미·일간 안보조약을 일컫는다. 1952년 4월 28일자로 발효됐고, 같은 날 일본은 타이페이(臺北)에서 대만(중화민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다우어(John W. Dower)는 샌프란시스코체제가 일본과 아시아 주변국들 간의 화해와 재통합을 막고, 평화의 도래를 지연시켰다고 평가했다. [본문으로]
  2.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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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8

이 책은 사상계연구팀이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를 종축으로 삼고, 사상계(이하 사상계’)를 비롯한 다양다종의 간행물을 자료적 근거로 한 연구 성과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총론을 쓴 박지영에 따르면, 사상계는 195341일에 창간됐고, 김지하의 글이 실린 19705월호(205)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지도원(이후 국민사상연구원으로 개칭)19529월 창간하여 발행한 기관지 사상4호 만에 폐간을 맞이하자, 장준하가 제호를 바꾸고 미공보원(USIS)으로부터 종이 원조를 받아 독자적으로 발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각주:1] 창간 당시 3,000부가 매진됐다는 기록에서 사상계에 대한 서울, 그 중에서도 지식인층의 관심과 반응이 사뭇 뜨거웠음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 이후 1961년에 들어 통권 100호를 발행했고, 4·19 이후 전성기를 맞아 발행부수가 65,000부까지 증가했다. 사상계는 지식인 종합잡지라는 점에서 개벽1960년대 후반의 창작과비평의 가운데에 놓여있고, 1946서울신문에서 발간한 신천지(이하 신천지’, 195112월에 속간, 1954년까지 발행)민성(1948~1950)의 뒤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각주:2]

 

다음은 이 책의 탄생배경에 관한 추측이다.[각주:3] 2011422,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는 냉전과 혁명, 그 사회역사적 분절과 이행의 논리들이라는 이름의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 대회서는 모두 7명이 발표하였는데, 그 중 6명의 글이 이 책에 실려 있고, 각 제목은 발표문의 제목과 대동소이하다.[각주:4] 더하여 대회 말미의 종합토론에는 이상록, 정진아 등이 참여했는데, 이 책은 그들의 논문도 게재했다. 따라서 이 책은 일군의 학자들이 모여 사상계를 읽는 세미나를 가졌고, 중간 결산격의 발표문을 가다듬어 다시 모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다섯 편의 글은 모두 국문학자가 쓴 것으로,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생산된 글을 매개로 논지를 전개하고 형식상 담론분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각각이 구사한 자료적 근거나 내세우는 주체는 다소 차이가 있다. 먼저 공임순과 장세진의 글은 시기적으로 1940년대부터 6·25전쟁 직후까지를 다루었고, 두 글 모두 신문과 잡지 등을 이용했으나, 전자가 민성과 신천지에 주목한 반면, 후자는 신천지와 海洋, 최남선의 글과 당대의 교과서 등을 주된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는 자료를 취합·선별하여 당대 제출된 담론의 추이(‘원자탄과 정치의 도덕화)와 의미의 전환(‘냉전성이 가미되는 태평양’)을 잘 보여주지만, 정작 각각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한편 두 글은 독일과 프랑스의 문제적철학자인 푸코와 슈미트를 서로 다른 지점에서 인용하고 있어 흥미롭다. 푸코의 언술을, 1946‘10월 항쟁의 원인을 분석하는데, 태평양을 바라보는 권력이 배인 시각, 공간()”을 설명하는데 차용했다. 칼 슈미트의 경우, 원자무기절대 전쟁(‘정치의 도덕화’)남한의 전면전 요청이라는 도식을 파악하는데, 유럽 공법(새로운 공간질서 규정)’을 부연하는데 빌려 썼다. 두 글 모두 철학자를 인용한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진 않으나, 그나마 보다 인용의 통일성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김예림은 1950년대 아시아 내셔널리즘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남한의 입장과 반응을 살피고자 했다. 저자는 사상계와 신천지를 통해 동남아를 둘러싼 당대의 담론 지형을 탐색했다. 월러스틴을 빌려 지역학 연구의 부상을 간략히 본 뒤, 동남아에 관한 남한 나름의 앎의 지층을 검토하는 구성이다. 그 결과, 저자는 베트남전 이전까지 남한의 아시아 내셔널리즘인식은 대개 반공주의근대화론에 갇힌 대자적 자기인식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박지영과 권보드래는 사상계의 문화번역과정에서 드러난 권력의 작동을 분석하려고 했다. 전자는 당대 남한식으로 번역된 한 철학자의 글에, 후자는 번역된 글들의 개황과 문화자유회의와의 관련성에 집중했다. 는 사르트르의 번역 양태를 좇아, 당대 한국인 역자들의 냉전인식 또는 시대정신이 어떻게 번역에 드러나는가를 보여줬다. 그 결과, 당시는 비판 대상은 번역되지 않고 비판 논리만 번역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반공주의가 작동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이 글은 당시 지식인들이 반공주의를 내면화해야 했다고 전제했는데, 정작 그 과정은 서술돼있지 않다. 는 사상계 논조의 전환점을 이 책의 총론과는 조금 다르게 설정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둘을 비교하자면, 총론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진행되는 ‘1963년 이후저항로 바뀌는 전환기로 설정한데 비해, ‘1964년 초반다른 길을 검토하게 되는 시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서도 보이듯, 그러한 모색(중립, 3세계 노선)이 머지않아 배제될 것임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첫째, 다섯 편의 글은 모두 미국의 영향력(내지 담론)과 반공주의를 남한 사회에서 압도적이고 규정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인식은 타당하다. 하지만 문화에 국한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영향력이 한국 사회의 전반을 가로지르며 전개되는 과정은 어떻게 포착해야 할까? 다시 말해, 그러한 유입된구속성(또는 규정력)의 구조나 대두는 대체 어떻게 설명 내지 언어화할 것인가? 의 글머리에 두 번 나오는 생존이란 단어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고, 더불어 정치사, 사회사 서술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 책의 저자들은 나름대로 푸코적인(Foucauldian)’ 방법론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특정 시대 특정 담론의 배치와 그러한 배치가 켜켜이 쌓인 지식의 地層을 밝히는 고고학’, 담론들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권력관계들의 총체가 정치적·역사적으로 구성하는 진리(의 정치사)를 탐구하는 계보학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들은 그러한 방법론을 어떻게 구사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지적했지만, 저자들의 서술전략은 반공주의근대화론이 어느 순간 최종심급으로 자리매김했고, 그에 따라 당대 담론의 추이가 조정됐다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반공주의근대화론은 대체 어떻게 지식인에게 내면화됐는지, 또는 사회적 발언의 한계로 거듭났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1. 권보드래·천정환, 「《사상계》가 사랑한 세계의 지식」, 『1960년을 묻다』, 천년의상상, 2012 참고. [본문으로]
  2. 동방미디어(http://www.koreaa2z.com)에서 『사상계』의 원문을 볼 수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서 『민성』, 『신천지』 등 ‘한국근현대잡지자료’의 목차를 검색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자세한 사항은 『교수신문』 인터넷판과 검색을 통해 확인했다.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간행하는 『西江人文論叢』 31집(2011.08)은 앞서 4월에 개최된 학술대회의 발표문들을 특집의 형태로 담았다. [본문으로]
  4. 해당 인물은 다음과 같다. 공임순, 김명임, 김예림, 박지영, 정영진, 한영현 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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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6

이 책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가 학진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야심차게 기획했고, 난항을 겪으며 도출해낸 냉전문화에 관한 여러 연구자들의 보고서 또는 연구결과이다. 대개는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50년대를 종축으로 삼았고, ‘문화를 매개로 하여 일국적·지역적 수준에서 작동한 아시아의 냉전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제출됐다. 책은 세 부로 구성돼있고, 각각은 이념’(1), ‘제도’(2), ‘대중문화’(3)라는 주제로 묶였다. 1부에 실린 세 편의 글은 차례대로 중··(백원담), 한국(김예림), 싱가폴과 말레이반도(렁유)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잡지·신문·소설 등 당대에 생산된 글(text)과 담론을 주된 자료적 근거로 하며, 각 내용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복원한다는 방법론을 취했다. 하지만 그러한 복원이 잘 이뤄졌거나 또는 어떤 새롭고 총체적인 역사상 내지 관점을 제시했다기보다, 그간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익숙지 않을 수 있는 내용을 전면에 배치하여 향후 연구의 밑바탕을 마련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2부에 실린 다섯 편의 글은 차례대로 대만과 한국(윤영도), 홍콩(뤄융성), 일본(치카노부), 한국(이종님), ··(이선이)을 배경으로 하며, 국가 간의 제도를 비교하거나 또는 일국적으로 작동한 제도·정책을 분석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구조와 다소 선언적인 주장(특히 152)이 종종 보이지만, 아시아 각국의 냉전문화를 산생한 (사회 또는 정책)구조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각각을 요약하며 살펴보도록 하겠다.

 

백원담은 냉전성을 염두에 두고, ‘아시아의 아시아 인식이라는 아시아주의또는 아시아상이 비대칭적(/西, /)이고 대극적(/)분열적 아시아상으로 공고화되는 과정을 살피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는 공고화를 묘사했다기보다, 한국전쟁이라는 사건을 통해 아시아주의(또는 상상)’의 계보를 어떻게 정위(定位)할지에 관한 나름의 문제의식만을 늘어놓았다. 저자에 따르면, ‘냉전적 아시아주의戰前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사상을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병영적 권역주의의 변주라고 부를만하다. 그러므로 아시아에서 탈식민의 선결조건은 곧 대동아공영권 사상의 해체와 성찰이 된다. 따라서 저자는 먼저 루쉰 연구가인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1910~1977)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적 논의(‘아시아의 내셔널리즘’, ‘새아시아주의)를 중심으로 전후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살폈다. 이어 저자는 갑자기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한국전쟁 연구를 빌려 논의를 이어나가려고 했으나,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국가와 그 지도부의 사상의 복권(復權)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마르크시즘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등 이론의 이해방식, “부르주아민족”(54), “민주주주민족통일전선”(62), “숙정”(68) 등의 현란한 용어 구사는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김예림은 해방 이후 한국인 엘리트집단(권력자, 지식인 등)(, 동남)아시아인식 또는 심상지리를 해방 이전부터 냉전기까지의 연속성 속에서 살피고자 했다. 저자에 따르면, 그의 분석단위인 한국인 엘리트집단은 일정한 (아시아)담론을 공유했고, 그것은 사상계신천지등의 잡지, 신문에 드러났다. 이어 전후 일본의 아시아 망각과는 달리, 한국은 아시아호출했는데, 이러한 차이는 양국에 대한 서로 다른 미국의 정책에 기인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은 냉전 지도변방에서 중심으로 상상적 위치 이동을 수행했다. 이 글은 시계열을 따라 자료를 배치하여 담론변화의 추이는 잘 보여주었으나, 정작 그 사이에 놓여있는 전환의 고리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저자는 “1950년대 초반의 동양론이 아시아의 열등성에 주목했고, “새로운 반공적 갱생을 추진했다고 서술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엘리트집단이 어떠한 모세혈관을 통해 냉전적 성격을 선택 또는 수용했는지, 또는 과연 그것이 냉전적 성격인지 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렁유의 글은 원문이 난해한 이론적 용어로 점철돼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별도의 배경지식(말레이 반도의 현대사)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정확히 읽기 어려운 편이나, 1부에 실린 3편의 글 중 가장 흥미롭다. 저자는 먼저 서구 냉전문화연구의 존재양식(자본주의-공산주의 축, 중심-주변 축 등)과 말레이반도의 현대사를 서술했고, 기존 서구의 냉전문화연구로는 포착하기 힘든 복수성관리할 것을 주문했다. 저자는 당대 말레이반도에서 제국주의세력을 한편으로, 공산측 세력과 싱가폴 인민행동당 등 민족주의적 인텔리겐챠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투쟁의 양상과 추이를 크게 현실과 담론이라는 두 분야에서 추적했고, 동남아의 역사상이나 서사를 지역이라는 지점을 통해 더욱 파편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저자의 요청은 한국의 냉전문화를 분석하는데도 유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례로, ‘국가라는 자칫 자명해 보이는 연구단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파편적이고 復數的냉전문화의 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자료로 삼을 것인가?

 

윤영도의 글은 한국과 타이완 양국의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각 대학의 인문학부 편제와 지식-담론의 형성과정을 묘사하고자 했다. 저자는 당시 제국대학에서 생산한 인문학적 지식-담론이 식민지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제했고, 양국 국립대학 구조의 변천과 인문학부 편제의 대강을 살폈다. 하지만 저자는 시종 지식-담론이 양국의 국가형성 과정에서 중요했다고 서술했으나, 정작 그의 글은 당시 지식-담론의 어떤 내용이 어떠한 방식으로 국가건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더하여 저자는 국대안과 관련해서도 연구사 정리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각주:1]

 

뤄융성(羅永生)의 글은 미소대립을 심급으로 하는 냉전서사로는 홍콩현대사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홍콩의 냉전 경험을 탐구했다. 저자는 우선 중국현대의 민족주의를 약술했고, 뒤이어 중국의 대()홍콩 정책이 발표와 실질 사이에 괴리가 있었음을 드러냈다. 저자에 따르면, 홍콩은 대체적으로 식민지라는 현실(영국의 탈정치화라는 이데올로기 공세와 그에 대한 중국의 승인) 속에서 (중공편향)’(국부편향)’의 서로 다른 세력 또는 이념이 강도를 달리하며 맞부딪힌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문화적 매체(학계, 달력, 영화, 신문 등)를 통해 전개된 이러한 좌우대립은 곧 식민지적 탈정치화 정책속으로 매몰됐고, 마침내 상업주의소비주의의 홍수 속에서 데탕트를 거치며 소거됐다.

 

미치바 치카노부(道場親信)의 글은 다우어(John W. Dower)의 분석을 빌려 천황을 매개로 삼은 뒤, 다우어가 놓친 전후의 일본문화론이라는 정치/문화담론의 형성사와 전개를 살폈다. 미국의 전쟁수행기구 중 하나인 전쟁정보국(OWI) 산하 외국전의분석과(FMAD)와 깊은 관련을 맺은 일본, 그 중에서도 베네딕트 앤더슨의 약력과 그녀 책의 유통·번역 과정 등이 서술했다. 저자는 국화와 칼이라는 인기작이자 문제작을 매개로 미·일 간 문화정치의 양상을 살폈고, 그 때 만들어진 상징천황제정치문화로 분식(粉飾)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이종님은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의 창시자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를 충분한 설명 없이 인용했고, 자료의 신빙성을 따져봐야 하겠으나, 미군정 시대의 매체전략을 몇몇 역사적 사실을 나열함으로써 조금 드러냈다. 이선이는 廢娼을 매개로 중국과 한국의 냉전, 국가형성, 젠더문제 등 다양한 소재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려고 했으나, 정작 냉전문화가 그녀의 분석에서 도출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글은 분석단위(국가·지역·개인)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비판의 초점(‘근대’·국가·‘문명’·젠더)도 뚜렷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1. 김기석은 자신의 저서 6장에서 해방 이후 서울대를 중심으로 미군정과 한국인 ‘좌우파’ 교수 간의 갈등과 해소를 다뤘다. 미군정의 “포섭과 배제” 전략은 결국 김석형(金錫亨)이나 백남운(白南雲) 같은 한국인 연구자들로 하여금 신생 ‘김일성대학’을 택하게 했다. 김기석, 『한국고등교육연구』, 교육과학사, 2008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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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5

저자는 1986년 영화학으로 학부를 마쳤고, 1997년 예일대에서 미국연구로 박사학위를 얻었다. 2013MIT 부교수를 거쳐 2014년 현재 보스턴 대학(Boston College) 영어학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영화학, 미국 문학, 미국과 아시아의 만남을 다룬 문학과 문화 등을 주로 공부했고, 현재 미국과 아시아 영화산업의 세계화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이 책은 1945~61년까지의 시기를 종축으로 하고, 미국-태평양-비공산권 아시아를 횡축으로 삼은 냉전(문화)사이다. 저자는 문화계라는 장() 또는 그 분야의 산물이자 실천양식인 영화, 뮤지컬, 소설, 사진(), 입양, 교육 등을 소재로 삼고, 미국 문화계, 그 중에서도 중류(또는 중간)(middlebrow)[각주:1]이 감상적으로 드러낸 아시아 표상과 미국의 대내외 정책 또는 행보 사이의 상관관계에 주목했다. 그 중에서도 저자는 당시 미국의 아시아 표상, 즉 이전 시기의 오리엔탈리즘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냉전 오리엔탈리즘의 구성요소, 그러한 인식을 주도한 주체들과 논리, 동인(動因), 매체 등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박사학위 논문을 증보한 이 책은 구사하는 자료의 범위가 넓은 편으로, 미국의 문화사, 냉전사(개디스, 커밍스) 관련 연구서뿐만 아니라, 리더스 다이제스트토요비평같은 중류층의 주요 잡지, 영화와 사진, 소설과 뮤지컬, 미국 공식문서와 주요인물의 연설문, 편지 등 다양하고 많은 1차 자료를 참고했다. 일견 압도적인 분량의 각주는 저자의 성실함과 미국 내 미국학 또는 문화사 연구의 방향을 일정 정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 독자가 보충하여 공부해야 할 부분을 제시하기도 한다. 저자가 참고한 자료의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쓰인 문헌이니만큼 아시아로부터 문화현상의 되먹임(feedback)’을 온전히 보여주는 자료는 참고문헌에서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하에서는 사변적이나마 저자가 구사한 이론적 자원의 핵심을 먼저 살펴본 후, 책의 주요문제를 일견하도록 하겠다.

 

필자는 이 책이 구사하는 이론적 자원의 핵심은 그람시가 언급한 개념인 역사적 연합(블록)’, 신좌파(New Left)였던 윌리엄스(Raymond H. Williams, 1921~1988)가 창안한 개념인 문화 구성체느낌의 구조라고 보았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역사적 연합이란 사회 제()세력 간의 연합으로, 이 연합은 해당 사회에서 제도적 장치, 사회적 관계, 이념들을 매개로 지배층의 헤게모니를 ()생산하는 특정 사회질서에 대한 합의의 물적 기반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 연합이란 한 사회의 지배층으로 그 사회의 지배적 질서를 유지하려하고, 대개 권력관계의 상부에 위치한다. 후대의 콕스(Robert W. Cox, 1926~) 같은 정치학자는 이 개념을 발전시켜 역사적 구조이론을 선보이기도 했다.[각주:2] 또한 저자는 윌리엄스의 논의를 빌려, 문화는 구체적인 사물 및 사회적 관계에 묻어 들어있는 채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구체적인 사물 및 사회적 관계를 이루는 문화 구성체를 포착할 때만이 그것들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며 의미 만들기를 수행하는 정황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6). 저자가 이 책에서 주요행위자로 설정한 문화 구성체는 바로 중류층으로 여기엔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이 포함됐고, 그들은 개인적 친분이나 제도적 기구들을 통해 느슨하게나마 서로 연결돼있었다(64).[각주:3] 이들 중류층의 특정한 세계관(감상적 보편주의, 반인종주의, ()제국주의’, 가족적 유대 등)은 문화계에서 각양각색의 산물로 표현되거나 순회교육, 대중강연 등을 통해 국내외에 전파됐으며, 저자는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그러한 산물과 실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하여 교육은 국내외의 미국인에게 특정한 느낌의 구조를 심어주었는데, 바로 이 과정이 저자가 언급하는 냉전 오리엔탈리즘의 작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설정한 당시 미국의 주도적 역사적 연합은 정책입안자들과 중류층을 뭉뚱그려낸 것에 다름 아니다. 비록 그러한 역사적 연합내부에 흐르는 상이한 역사적·지적 원류(源流)가 서술돼있긴 하나, 전체적으로 자세한 분석보다는 상황적 설명에 치우친 느낌을 준다. 더하여 저자의 냉전관은 평면적(“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이 급작스레 끝남”, 226)일 가능성이 높고, 트루만과 아이젠하워 두 행정부의 대외정책적 연속성(냉전 컨센서스)을 누누이 강조하는데 비해 차별성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았다.[각주:4]

 

앞서와 같은 이론적 틀에 기반하여 저자는 냉전 오리엔탈리즘의 분석 지점을 아래와 같이 설정했다. 첫째, 미국의 대외정책적 측면으로, 당시 미국은 어제의 전우였으나 오늘의 적이 돼버린 공산주의 소련을 반대(봉쇄)하며, 동시에 비공산권 아시아국가를 자본주의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로 탈바꿈(통합)해야 한다는 과제를 짊어지게 됐다. 여기서 관건은 ()제국주의식민주의라는 외양을 피하되 근대화라는 시혜(施惠)를 베풀면서도 풍부한 자원의 원천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는 점이다. 둘째, 미국의 국내정책적 측면으로, 당시 미국은 대내적으로도 봉쇄(매카시즘)와 통합(반인종주의, 중류층 가족상상으로의 포섭 등)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에 관한 대중적 표상(관광, 입양, 피플투피플 계획 등)이 선전적, 교육적 수단으로 널리 쓰였다. 셋째, 중류층이라는 문화 구성체이자 역사적 연합의 일부라는 측면으로, 그들은 보편적, 감상적인 논조의 작품 활동을 통해 미국 대중의 시각을 해외, 특히 비공산권 아시아로 돌렸으며, 동시에 미국(문화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밖에도 책에서 자세히 나오진 않았으나, 아시아인(태국인)이 맞닥뜨린 냉전 오리엔탈리즘을 포함하여 네 가지 정도를 서로 다른 분석 지점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 책이 냉전 오리엔탈리즘분석의 두 축으로 설정한 봉쇄통합의 논리는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가? 전자의 근거는 트루만 독트린이고, 후자의 대표적 근거는 국무부 관료 윌콕스(Francis O. Wilcox, 1908~1985)필라델피아 연설문(1957)’이다. 연설문은 미국의 팽창은 전적으로 평범한 미국 시민에게 달려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 이것이 기존의 고립주의적 정서를 깨고 대내적으로 통합을 시도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통합의 노력들이 정말로 태평양 지역에서의 통합을 시도했는지는 전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통합은 어디까지나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를 재편해나가는 과정에서 출현했고, “봉쇄를 변주하는데 불과한 보조적 논리로써 당시 미국 대외정책과 중류층 개입의 미학이 만난 우연한 역사적 사례는 아니었을까? “봉쇄의 논리는 미국 국내외를 막론하고 반공으로 일관됐으나, “통합의 노력은 대상(국민, 비공산권 아시아)에 따라 목적과 강도를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통합봉쇄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의심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1. 중류(층), 또는 중간(층)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영단어 'middlebrow'는 (대중의) 접근이 용이한 특정 예술분야(대표적으로 문학)를 지칭하거나, 문화적·계급적 상승의 도구로 예술을 이용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골상학(骨相學)에서 유래된 이 말은 1925년, 영국의 풍자잡지 『주먹질(Punch)』에서 처음 쓰였고, 상층(highbrow)과 하층(lowbrow) 사이의 중간자적 역할을 지칭한다.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각 층을 두고 문학계에서 논쟁이 있었고, 그 중 중류(문학)는 “질(質)이나 혁신보다는 정서적이고 감상적인 연계”에 주안을 뒀던 것으로 취급받았다. * 위키피디아 (Middlebrow 기사). [본문으로]
  2. “역사적 구조는 상이한 이념, 물질적 역량, 제도적 장치를 보유한 사회세력들 사이의 부단한 쟁투 속에서 변화하며, 결과에 따라 각 세력이 사회에 발휘할 수 있는 권력의 크기도 달라진다.” 박형준, 『재벌, 한국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 책세상, 2013, 112쪽. [본문으로]
  3. 저자는 중류층의 특질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특정한 계급적 함의를 공유 ②국내를 넘어서려는 세계관을 공유 ③교육이라는 원칙에 깊이 착근 ④모든 문제가 해결이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공유. 마지막으로 중류층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심원한 보편주의”가 무방할 것이다. [본문으로]
  4.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뉴룩정책”으로 대표되며, 이는 “원조감축”을 골자로 한다. 박태균, 『우방과 제국, 한미관계의 두 신화』, 창비, 2006, 15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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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3

이 책은 교토대의 기시 도시히코(貴志俊彦)와 에히메(愛媛)대의 쓰치야 유카(土屋由香)가 편집한 논문집으로, 서론의 역할을 하는 총론을 제외하고 모두 10편의 글을 한데 모아 2부로 나누어 놓았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주로 아시아의 시각(또는 문맥)’에서 냉전을 담아내는 작업을 일차적으로 수행하고, 이차적으로는 아시아의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문화냉전의 양상을 포착하고자 하는 공편자의 의도를 바탕으로 선택된 듯하다. 더군다나 ()중심화 하기라는 책의 부제는 참으로 다른 시각에 입각하여 냉전을 탐구하려는 강한 의지마저 보여주었다. 그러나 책을 일독하고 나니 처음에 표제가 주었던 참신한 느낌은 오간데 없어졌고, ‘다른 시각에 입각한 냉전 연구를 위해서는 막상 무엇이 필요한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여러 고민거리를 안게 되었다.

 

저자들은 대부분 미국과 대만, 일본을 거점으로 학계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아시아 국적의 연구자들로 생각되고, 공편자의 의도인 다른 시각의 냉전 연구를 의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학자를 비롯하여 지역학자, 개발학자, 사회학자, 문학자 등 다양한 학문적 정체성을 지녔다. 더하여 이 책은 대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를 종축으로, 아시아 제국(諸國)과 미국과의 상호작용을 횡축으로 둔 것들이다. 같은 시기는 한반도와 양안(兩岸)’, 인도차이나 등 동아시아 곳곳에 여전히 전쟁이 지속 중이거나 또는 전쟁상태에 버금가는 긴장이 도사리고 있었고, 동시에 일국의 외부적으로는 냉전, 내부적으로는 국민국가 만들기탈식민이라는 홍역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런 만큼 이 책은 흥미로운 시공과 주제를 다루고자 했지만, 공저자의 다양한 국적(주로 일인)과 학문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이 책이 냉전 연구를 충분히 다른 시각에서 수행했는지는 의문이다.

 

공편자가 쓴 총론은 책을 일관하는 주제를 짤막하게 언급하고, 책의 구성을 소개했다. 그들이 냉전 연구를 위해 탐침(探針)을 꽃은 주제는 미국의 ()보선전(廣報宣傳)’으로, 이는 미국의 국가 이미지 향상과 친미여론 육성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대외활동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하필 공보선전에 주목하였는가. 이 책이 정의내리는 문화냉전에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문화냉전헤게모니를 확립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전개한 문화·정보·미디어 전략이라고 정의했다. 다시 말해, ‘문화냉전이란 상징이자 실체로서의 미국을 아시아인의 마음에 뿌리내리려는 하나의 (전쟁)기획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러한 의도를 관철시킬 매개를 필요로 한다고 짐작해 볼 수 있고, 따라서 이 책은 결과적으로 문화냉전의 연결고리인 공보선전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문제설정은 참신하다고 할 수 있고, 냉전의 다른 축, 이를테면 소련이나 중국의 공보선전을 소재로도 삼을 수 있어 유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총론후반부가 말하고 있고, 생각건대 다른 시각의 냉전 연구에 필수적인 “(미국)공보선전 기관과 그 활동이 미국사회 내부나 아시아 국가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선택적 수용과 재해석)에 대한 고찰을 수행하지 못했다.

 

1부에 실린 5편의 글은 미국과 대만을 주된 무대로 하고, 미국 공보선전 기관의 계통, ‘중추(USIA)’, ‘모세혈관(USIS)’ 등 구성의 전모를 비교적 자세히 다뤘으며, 글의 소재로는 영화와 영화계(2, 3, 4), 민관(民官) 상호작용(1, 2), 미국의 대외공작(工作)(1, 3, 4, 5) 등을 택했다. 1부가 주장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미국은 공보선전을 위해 자국 기업(또는 경제계)과 긴밀하게 연동했으나, 그 양상과 결과는 협상대상과 시기별로 차이를 보였다. 자금력을 포함하여 미국의 영향력은 아시아 국가, 특히 대만에 압도적으로 미쳤다. 1부에서 아쉬운 점은, 3장의 영화분석 또는 담론분석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시아 국가에 미친 영향력의 실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특히 우린춘(5)의 글은 면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자료번역에 가까운데, 록펠러재단 연차보고서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집필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또한 그녀는 록펠러재단이 지급한 보조금의 행방을 전혀 추적하지 않았고, “전후 대만의 농촌 근대화와 학술 교육 향상에 이바지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식의 선언조로 끝맺는 등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 많았다.

 

2부에 실린 5편의 글은 시공간적 배경과 자료적 특성 모두 1부와는 꽤나 달랐다. 2부의 글은 한국, 필리핀, 라오스 등지가 배경이고, 미국 공보선전의 대상인 아시아인의 모습과 그들의 능동성을 보여주려고 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7(김려실), 8(고바야시 소메이), 10(치아 유이 방)이었다. 김려실은 해방정국을 통치자와 영화인 단체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했고, 그 과정은 남한식() ‘탈식민을 보여주는 하나의 통로라고도 할 수 있다. 고바야시는 풍부한 자료를 토대로 미국이 포로의 신체를 공보선전(심리전)의 매체로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치아 유이 방의 글은 소수민족인 몽(Mhong)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어떻게 미국의 공보선전에 선별적으로 포섭됐는지를 생존자들과의 면담을 토대로 밝히고자 했다. 이상에서 2부가 주장하는 바도 또한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미국의 공보선전은 아시아 제국에서 수행됐고, 그 양상은 천차만별이었다. 미국은 공보선전을 통해 아시아 인민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으나, 항상 뜻대로 되진 않았다.

 

이 책은 결국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을까? 이상의 내용에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실로 대규모로 공보선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아시아 각지에서 차별적으로 나타났다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냉전 연구의 탈중심화라는 향후 과업의 계기이자 초석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순 있겠지만, 결코 그것을 넘어설 순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아시아 국적 연구자들이 방문하곤 하는 하버드 대학 옌칭 연구소의 기원이나 저명한 중국사 연구자인 페어뱅크(J. F. Fairbank)의 약력 등 평소라면 주의를 기울여 알아채기 힘든 정보를 꽤나 자세히 알려줬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았거나 검증이 필요한 사항들이 사뭇 많고, 더불어 문화냉전의 정의에까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냉전은 과연 무엇이고, 그것들의 지역적/시기적 차별성과 신진 연구자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중층성, 다양성은 대체 어떻게 포착해야 하는가? 이 책의 부록인 참고문헌 가이드를 우선적으로 참고할 수 있겠다.

 

김려실에 따르면, “소련군은 826일부터 38도선을 봉쇄했는데, 박병엽의 증언은 그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각주:1] 또한 그녀는 훗날 한국영화가 떠안게 되는 많은 문제는 미군정기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19476월이 미국 해외공보정책의 새로운 국면의 전환점이라고 서술했는데, 그러한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 그리고 왜 그러했는지에 관해 설명이 더 필요하다. 고바야시의 경우에도, 포로 문제를 다룬 글의 말미에서 문화냉전이 낳은 폭력성이 불가시화/원경(遠景)됐다고 가정하는데, 그렇다면 우선 그가 말하는 문화냉전의 폭력성은 대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그러한 폭력성이 과연 보이지 않게됐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글들은 대부분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소장된 문서를 주된 자료적 근거로 삼았다. 더하여 역자의 노고는 치하하지만, 표현의 측면에서 이 장()’이 글, ‘오직(汚職)’부패, ‘광보(廣報)’공보로 바꾸어 써도 무방할 것이다.

  1. “소련군 제25군사령부는 8월 27일 밤 38선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27일 밤 지시가 내려간 것이 분명하다. [중략] 봉쇄에 따라 8월 28일 새벽부터 교통, 우편, 전신전화 등이 모두 차단된다. 기차가 불통됨에 따라 사람들 모두가 걸어서 38선을 넘나들었다.” 유영구·정창현, 『조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25~2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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