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현대사2014. 10. 26. 06:59

1. 들어가며

 

 이 글은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을 주제로 다룬 기존의 연구 성과를 가능한대로 한데모아 일별했다. 1945년을 전후하여 소련의 대한정책은 미국 정부의 전략적 이해 속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한반도의 정치세력과 미·소 양국의 정책이 때로는 맞물리고 때로는 어긋나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소련의 대한정책연구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로 군정을 설치하여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국과는 달리, 소련은 민정이라는 외피를 두른 채 38도선 이북의 정치사회를 나름대로 주조하려고 하였고, 이러한 미국과의 차별성은 시대적인 열기속에서, 또는 이념적인 치기(稚氣)’ 속에서 소련을 선한 행위자로 둔갑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연구자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소련의 민정은 기실 간접통치의 모습을 띤 군정이었다는데 동의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관련 연구는 해방이후부터 여태껏 진행됐다고 할 수 있고, 이 글에서는 동 주제를 다루는 기왕의 연구를 일견한다.

 

2. 연구사 흐름 정리

 

 김성보를 비롯하여 다수의 연구자가 지적했듯, 1990년대 이전까지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 연구는 대개 자료의 빈곤을 이념의 과잉이 보충하는 꼴의 연구 일색이었다.[각주:1] 1990년대 이전 연구는 두 가지 경향으로 대별된다고 할 수 있는데, 김광운을 빌려, 하나는 소비에트화경향으로, 다른 하나는 해방 기획과 자력혁명경향으로 부를 수 있다. 이러한 분기는 서구 (국제)정치학계의 수정주의 대() 전통주의라는 구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소비에트화경향이란 북한에서의 인민정권 수립과정을 소련의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른 정치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지칭하며, 이 경우 해방 이후 38도선 이북에서 수립된 국가는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의도가 철저히 관철된 결과물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대전제 하에 팽창주의”(김영명, 양호민 등)방어주의”(김학준, 여인곤 등) 또는 대중(對中)정책의 연장”(강원식)이라는 세부적 차이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 경향은 전반적으로 남한 학계와 대중의 인식을 지배(김창숙, 한재덕, 오영진, 한근조 등의 증언에 힘입어 서대숙, 스칼라피노, 이정식, 에릭 반 리Erik van Ree )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소련이라는 외부적 규정력을 강조한 연구들이 계속 진행됐는데, 이러한 경향은 전현수, 웨더즈비, 강인구, 백학순, 란코프[각주:2], 이규태, 박명림 등이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북측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료 구사 및 서술상의 균형 유지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해방 기획과 자력혁명경향이란 소련측과 북한측의 주장으로 엄밀히 말해 양자를 한데 묶기란 어렵지만, 전자의 경우는 소련의 식민지 민족해방논리에 따른 정치과정이 해방 이후 북한의 수립으로 귀결됐다고 주장하며, 후자의 경우는 북한 수립은 애당초 자명한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19589월 열린 북한과학원 역사연구소 주최 전국과학토론회를 전후하여, 소련의 해방자적 역할을 강조했던 문화전파설이 부정되고 역사 속 북한의 역할을 더더욱 강조하는 역사민속학이 제창됐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정세에 따른 역사서술 경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의 경향은 대개 이념의 과도한 개입을 경계하고, 소련과 북한이 보여준 상호작용의 속살과 세부를 좀 더 면밀히 보고자 했다. 전반적으로 한반도 외부에서 주어지는 소련식 질서가 38도선 이북의 사회에서 전개된 내부 모순과 맞물려 벌어지는 현상의 복잡함과 다양성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커밍스, 스즈키 마사유키(鐸木昌之), 이종석, 유길재, 정해구, 김성보, 서동만, 기광서, 이주철, 김광운 등의 연구자가 이러한 경향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또한 자료의 부족이라는 만성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혹자는 서구의 소련학(Kremlinology)’에서 파생돼 나온 기법을 단순히 북한에 적용하는 오류(이른바 외재적 접근법’)를 범하기도 했다.

 

 1999년에 쓰인 정성임의 글은 소련문헌을 광범하게 검토한 에릭 반 리의 1989년 저작, 미측 노획문서를 검토한 백학순의 1993년 저작,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소련 외무성 및 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 등을 검토한 웨더즈비의 1993년 저작을 살핀 후, 그러한 획기적인 성과들이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 예를 들어 소련이 명확한 점령정책 없이 북한을 점령했으나 1945년에 이미 북한만의 공산화를 결정했다면 어떻게 9월 하순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분단을 결정했으며, 나아가 1946~47년 미소공위에 임할 당시 결렬을 전제로 했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등을 물으며 자신의 논지를 강화했다. 저자는 주로 소련국방성 문서를 활용하여 점령 첫 해 소련은 사회주의화의 준비기를 가졌으며, 국가형성단계로의 전환점은 모스크바 결정이었음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정성임의 연구에 더하여, 200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1차 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점증하고 있다. 이는 또한 와다 하루키(和田春樹)가 일찍이 선보인 실증주의적 경향의 연구와도 맥이 닿는다.[각주:3]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기광서, 전현수, 이재훈, 김성보 등을 들 수 있다. 기광서는 2002년에 쉬띄꼬프의 활동을 중심으로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했고[각주:4], 2008년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생산 자료인 결정을 바탕으로 1948년 초반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을 분석했으며[각주:5], 2010년에는 소련 최고지도부가 승인한 훈령을 토대로 소련의 미소공위 전략을 살폈다.[각주:6] 그에 따르면, “미소공위에서 소련의 대한정책목표는 분단정부나 사회주의 조선이 아니라 좌파가 주도권을 갖는 친소적 조선이었고, 더하여 미소공위 결렬을 대비한 대책, 즉 조선인에게 조선 정부의 수립을 맡기고 외국군대는 모두 철수해야 한다는 방침도 마련해 놓았었다. 이재훈의 경우, 소련공산당 상층부의 정책을 통해 해방 전후 소련의 극동정책과 그 하부의 대한정책, ()한국인식 등을 분석했고, 소련의 한국 민족주의자 인식을 살핀 바가 있다.[각주:7] 전현수는 꾸준한 자료 발굴과 탈초, 번역과 게재를 해왔으며,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의 핵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쉬띄꼬프의 일기를 간행하기도 했다.[각주:8]

 

 전현수의 정리를 빌려 소군정을 거칠게나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소련군 통치방식 자체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나 북한을 통치한 소련군사령부와 민정청(1947.5)이 군정기구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소련군사령부는 쉬띄꼬프를 정점으로 했고,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간접통치의 외형을 취했으나,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소련군사령부의 개입은 전면적이고 직접적이었다.” 그러나 김광운에 따르면, 해방 직후 소련군사령부는 면 이하 행정단위에 대한 직접 통치능력이 전혀 없었고, ·군 차원의 민정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는 소련의 1차 자료가 공개됨과 함께 과거의 이념적 편향에서 벗어나 좀 더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될 조건을 예비했다. 그러나 북한 및 중국의 공간되지 않은 자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관련 러시아의 자료는 아직 대다수가 베일에 감춰져있으며, 언어의 장벽보다 더 높은 자료접근의 장벽은 아직도 해방 전후 북한 지역 연구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각주:9] 뿐만 아니라, 소련의 1차 자료가 담아내지 못한 당시 북한 지역의 생생한 역사적 모습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연구자들의 고구(考究)를 요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소련의 1차 자료를 연구하거나, 이용한 성과를 살핀다.

 

3. 자료에 관하여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 연구는 연구자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의 측면에서 크게 199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1993년을 전후하여 러시아의 문서고가 제한적, 선별적으로 개방됐고, 이를 통해 해방 전후 북한의 역사적 현실에 가닿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추가됐기 때문이다.[각주:10] 이하에서는 소련의 1차 자료를 중심으로 기왕의 연구가 이용한 자료들을 살핀다.

 

 러시아의 문서고가 열리기 전에 수행된 연구 중 대표격은 하루키의 글이다.[각주:11] 글의 초입에 드러나는 저자의 고충 토로가 인상적이다. 그는 1983년 현재 소련점령군 기관지인 조선신문,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기관지인 평양일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기관지인 정로(正路)와 이론지인 근로자등의 신문·잡지류가 전혀 간행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자료적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프라우다, 해방일보, 서울신문등 신문자료, 思想月報등 일본 자료, FRUS, SWNCC 문서 등 미국 자료, 1949년 평양에서 간행된 조선중앙연감, 함석헌(씨ᄋᆞᆯ의 소리)과 임춘추 등의 회고록을 널리 이용했고, 맥큔(George M. McCune), 김남식, 커밍스 등 당시의 선행연구 또한 이용했다. 그는 소련이 1945816일 트루만의 일반명령 1를 여지없이 수용했다는 사실을 두고,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나아가 점령후에도 소련은 미국이 전한반도에 깊은 관심을 둔 것과 달리, 북한 지역에만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19451123일 벌어진 신의주 사건12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3차확대집행위원회에서 제기된 민주기지론[각주:12] 등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연합노선에서 결별노선을 택했다고 파악했다.

 

 전현수와 와실리비치의 글은 각각 1993년과 1994년에 나온 것으로, 한국인 연구자와 러시아인 한국학 연구자의 시각에서 자료의 신천지라 할 수 있는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의 소장 자료에 관해 짤막하게 정리한 것이다.[각주:13]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에 소장된 문서군(фонд; 폰드; stock)을 비판적으로 분석했고, 1917년 이후 1990년대까지의 한·소 외교관계 자료(몰로토프 폰드, 브쉰스키 폰드, 쥐다노프 폰드, 소련 외무성 1극동과 폰드, 서울주재 총영사관 폰드, 북한주재 소련 민정청 폰드, 북한주재 소련대사관 폰드)가 소장됐음을 밝혔다.

 

 김성보의 글은 앞서 언급된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소련외무성 및 소련공산당 문서 등을 일부 활용하여, 그간 소련의 1차 자료의 가뭄에 어느 정도 단비를 내려 주었다. 한편 저자는 웨더즈비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살피는 차원에서 웨더즈비가 이용한 동일한 자료에다가 추가적으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보국이 편집한 공보(公報)와 소련공산당 중앙의 훈령,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위원회 기관지인 옳다등을 재검토했다. 저자는 소련과 미국은 모두 한반도를 안보상 동북아시아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해, 나름대로의 대한정책을 2차 세계대전기부터 모색했다고 전제했다. 나아가 저자는 종전을 전후한 시점에서 소련의 대한정책의 기본 원칙은 우호적인 한국 정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른 연합국들과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었고, 종전 이후에는 위의 기본 원칙이 실현될 때까지 북한 지역에서 먼저 자신의 지지기반을 창출해간다는 방침이 추가됐다고 결론내리면서, 기존의 준비결여론선의의 무지론을 비판했다.

 

 전현수의 2000년 글은 그간 연구자들이 선별적으로 이용하고 소개한 소련의 1차 자료 및 자료가 소장된 기관의 명칭과 특성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각주:14]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데 일조할 수 있으나, 자료 자체에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기술적 오류가 무진 배어있다는 저자의 언급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도 얼마든 참고가 될 수 있는 글이다. 전현수의 글에 실린 소련 자료와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소련공산당 문서: 소련공산당 문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문서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 이곳은 과거에 러시아 현대사자료 보존 및 연구센터(РЦХИДНИ)’으로도 불렸다) 소장. 대외정책 담당기구 생산 문서철(소련군 총정치국,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정치담당 부사령관·정치국이나 소련 외무상비서부, 소련 외무성 2극동과 등에서 생산한 문서,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정세 등),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문서군(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자료, 북조선공산당 각 도당부 및 사회단체 기관지: 옳다(함경남도), 앞으로(강원도), 咸北正路(함북도), 바른발(평안북도, 신의주시) ).

 

소련각료회의 문서: 소련각료회의 문서는 러시아연방국립문서보관소(ГАРФ) 소장. 북한 경제문제 관련 자료, 교육문제 관련 자료, 소련대외문화교류협회 문서군, 동양인민공화국과() 문서철. 소련전보통신(따스) 문서군.

 

소련외무성 문서: 소련외무성 문서는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 소장. 외무상 몰로또브 비서부 문서군(미소 양군사령부 대표회의 관련자료, 미소공위 관련자료, 관련기사 스크랩과 번역 등), 외무부상 븨쉰스키 비서부 문서군(미소공위 관련자료), 외무부상 말리크 비서부 문서군(경제관계 자료), 외무부상 로조프스키 비서부 문서군(194512월 북한정세 보고서), 조선문제에 대한 보고부()(референтура, 리피렌뚜라) 문서군, 미소공위 소련대표단 비서부 문서군,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문서군(경제관계 및 북한정세 자료 다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4812월에 완성된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3개년사업 총괄보고, 19458~194811(민정청장 레베데프의 지도 하에 보도국장 까둘린 중좌와 라디오방송 편집국장 그루지닌 중좌가 함께 작성).

 

소련국방성 문서: 소련국방성 문서는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ЦАМОРФ) 소장. 외국인 연구자의 접근이 가장 곤란.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비서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연해주군관구 조선위원회, 25군 사령관 비서부, 25군 군사평의회, 25군 정치부, 북한주재 소련민정청, 북조선 각도 경무사령부 등.

 

 이밖에도 1991년 구축된 러시아연방대통령문서고(АПРФ)러시아국립군사(軍事)문서고(РГВА), 러시아국립군사(軍史)문서고(РГВИА)등에 접근이 가능하다면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에 관련된 1차 자료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며

 

 이상에서는 해방 전후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을 다룬 연구사의 흐름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일별했고,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데 근거가 되는 자료의 존재와 소장처를 살폈다. 이상의 정리에서, 당시 소련은 38도선 이북에서 간접통치라는 방식으로 군정을 실시했고, 그 원칙은 당장의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단계적 혁명론에 입각(1945920일자 스탈린 지령)한 계급연합노선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아가 당시 소련의 직접통치를 받았던 동구 제국(諸國)과의 비교를 통해 입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겠다. 해방을 전후하여 소련은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측과 국제적인 협력을 통해 친소적인 조선정부를 세워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하였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와 이후 탁치정국을 거치며 북한지역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소군정38도선 이북에서 조선인의 자율성을 절대적으로 보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좌파가 정치적으로 우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행정상의 곤란함을 노정했다고 정리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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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정성임은 자신의 글에서 소련의 1차 자료를 얻기가 얼마나 힘든지 각주로 달아 놓았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문서보관소의 열람증을 얻기 위해서는 소련 내 연구소나 대학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특히 외무성 문서보관소의 경우, 열람 허가에는 일반적으로 약 1개월간의 신원확인기간이 소요된다. 문서열람은 제출한 연구주제와 직접 관련된 것만 열람할 수 있고, 그 외에는 목록조차 확인이 불가하다. 한 문건의 최대 열람기간은 1개월로 연구자가 중복되는 경우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정성임, 앞의 글, 1999, 15쪽, 각주 18번. [본문으로]
  10. 박태균은 소련의 대한정책과 소군정에 관해 “사실 자체에 대한 확인 작업이 급선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박태균, 앞의 글, 199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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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대사2014. 10. 23. 18:25

* 원문.

 

 1922년, 소련은 일본이 점령한 베르흐네우진스크(Верхнеудинск, 현 울란 우데Улан-Удэ)를 되찾고 같은 해 10월, 이 도시에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19일~28일)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목적은 초창기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큰 지류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화해를 도모하고, 조선의 공산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더하여 이 대회엔 양파뿐만 아니라 국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재일본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등 약 150명이 참가했다. 조봉암은 국내의 조선인 대표로 참가했다. 참가자의 약 3분의 2를 상해파가 차지했고, 그들은 결의 원칙으로 다수결을 주장했다.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만장일치를 주장하였고, 국내와 일본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이르쿠츠크파와 행동을 같이 했다. 그러나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간부들은 상해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대회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민테른 본부는 양파의 대표들과 함께 조봉암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조봉암은 "양파가 한 치의 앙보도 없이 종래의 주장을 반복했다"고 진술했고, 다른 이들도 각자 할 말이 있었다. <공산주의 ABC>를 쓴 바 있는 부하린(Н. И. Бухарин, 1888~1938)은 조선인 혁명가들의 말을 모두 듣고 난 후 (물론 러시아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양자가 다 같소. 당신들 가운데 그 누구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진정한 사실들을 알고 있지 않소. 그대들은 사실상 다만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오."

 코민테른은 양파의 해체를 선언하고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문제를 전담하는 꼬르뷰로(Корбюро, 고려국)를 설치했다. 조봉암에게도 꼬르뷰로의 참여가 권유됐으나, 그는 1921년에 세워진 동방노력자공산대학(КутВ)에서 수학하길 희망했다. 조봉암은 마침내 1923년 초 쿠트브(동문: 등소평, 유소기, 호지명, 주세죽, 방호산, 허정숙, 김용범 등)에 입학했고, 같은 해 여름, 속성과를 수료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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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대사2014. 10. 9. 09:04

4.19는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

 

국사학과 석사과정 우동현

 

1. 서론: 혁명의 정의와 개념, 그리고 4.19[각주:1]

 

최갑수에 따르면 혁명이란 원래 易姓革命을 줄인 말로서,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을 말한다.[각주:2] 그러나 같은 역성혁명이라 하더라도 동양과 서양의 역사적 경험은 상이했다. 전통시대에 동양의 왕조가 대개 역성혁명을 통해 대두한 후 사라진 반면, 프랑스의 경우 카롤링거 왕조에서부터 부르봉 왕조까지 방계 혈통이 왕위를 계승했고 사실상 같은 왕통이 1천년 넘게 지속됐다. 또한 유럽에서는 강력한 국제적 귀족집단과 유럽적 차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기독교가 왕가의 존재를 세속적이고 종교적으로 보장했다. 따라서 영국(1649)과 프랑스(1793)에서 혁명세력이 국왕을 처형한 사건은 실로 경천동지할 일이었고, 이제 혁명은 새로운 개념을 얻게 될 터였다.

근대적 의미의 혁명은 revolution을 번역한 말로서,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을 의미한다. 서양에 연원을 둔 이 새로운 용어는 19세기 후반 동양에 전파됐으나, 번역되지는 않았다. 다만 기존의 단어인 혁명이 근대적 의미를 획득하게 됐고, 이후 전통적 의미는 퇴색했다. 더하여 혁명은 근대성의 핵심적 요소로 거듭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쓰일 수 있는 다소간 모호하지만 풍성한 의미를 가지게 됐다. 한편 최갑수는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입헌혁명사회혁명으로 분류했으나, 양자 모두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새 사회에 대한 전망이라는 의미와 인간해방의 계기를 갖는다고 썼다.

한편 한국현대사에서 혁명이라는 記標는 여러 논자들이 다소 모호하게 차용했다는 느낌이 들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홍석률은 자신의 글에서 쿠데타와 혁명을 비교하며, 혁명은 어떤 개혁적 진보적 가치를 내걸고 피지배집단인 민중이 참여하여 권력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했다.[각주:3] 이러한 정의는 5.16군사혁명내지 근대화 혁명이라고 부르짖는 작태에 학술적으로 맞설 때는 타당할 수 있으나, 결코 근대적 의미의 혁명을 온전히 표상했다고는 볼 수 없다. 요컨대 논자마다 혁명을 명명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 안에서 합의점을 찾기란 요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서구의 최신 논의를 정리하고, 그에 입각하여 한국현대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구에 연원을 둔 개념이니만큼 본고장에서 나온 주장을 겸허하나 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논의의 적실성을 보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현대사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4.19를 연구사적 차원에서 정리하고, 서구의 이론을 잣대로 삼아 4.19를 재본다.

 

2. “새로운정통 부르주아혁명론[각주:4]

 

이 장은 서구에서 나온 최신이론을 정리하고, 나아가 그것을 한국사의 맥락에 적용해보기 위한 整地작업의 성격을 띤다. 이하에서 필자는 스코틀랜드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자인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 이하 저자”)이 쓴 부르주아혁명은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이하 저서”)革命論에 관한 최신의 연구 성과로 보고 그 대강을 살펴볼 것이다.

저자는 저서 19장에서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개념의 역사적 전개를 다루며, 트로츠키, 아이작 도이처, 토니 클리프 각각의 혁명론을 비교했다. 세 인물 중 뒤의 두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트로츠키주의를 수용 변형 주창했고, 그들의 트로츠키주의는 이후 20세기 후반 서구학계에서 전개될 다양한 부르주아혁명론의 저변을 이루었다. 저자에 따르면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이 주도하여 개발도상국이 봉건 · 종속 · 식민지적 지배관계에서 벗어나 국제적 혁명운동의 일부로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영구혁명으로 보았다. 트로츠키의 혁명론도 시기에 따라 표면적으로 변했으나, 어쨌든 그의 영구혁명론의 대표적인 사례는 1917년의 러시아였다. 한편 도이처는 구체제에 대항하여 피억압자 대다수가 봉기하고, “자유의 억압과 내전이 뒤따르며, 새로운 지배계급이 최종적으로 인민대중의 평등주의적 꿈을 폐기하는 양상을 언급하며 역사상 위대한 혁명들(영국, 프랑스, 러시아)”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부르주아혁명론에 관해, “구체제 또는 구체제 내부의 요소가 내부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를 부과하는 것이라고 서술했다. 따라서 그의 논의에서 부르주아혁명의 주체는 반드시 부르주아일 필요가 없었다. 도이처와 달리 클리프는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용어를 쓰진 않았으나, “엇나간(deflected) 영구혁명을 통해 부르주아혁명의 근대적 판본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엇나간 영구혁명을 노동계급이 영구혁명 전략을 완수할 수 없었고, 다른 사회세력이 지도부를 맡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또는 외세의 지배를 물리치고,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었다.

앞선 논의는 모두 근본적인 사회변형을 수반했던 역사적 혁명과, 그러한 변형을 가져올 미래의 사회주의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시도된 것이었다. 전자인 부르주아혁명은 자본주의적 사회적 생산관계가 더 이상 어떠한 제약에도 놓이지 않게 되는 시발이었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혁명은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적 사회관계의 번창과 전체로서의 부르주아 사회의 발달과 일치하는 국가 권력과 조직적 틀을 창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현재의 세계는 가장 지엽적인 부르주아혁명을 제외하고는 부르주아혁명이 모든 곳에서 현실적 목적을 위해 이미 성취됐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회혁명은 사회주의혁명뿐이라는 것이다. 한편 이제 부르주아혁명론에서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부르주아지로 한정될 필요가 없어졌다. 부르주아혁명이 그것을 수행한 주체와는 별개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르주아혁명은 프롤레타리아혁명과 같은 형태를 가질 필요도 없다. 즉 부르주아혁명은 자본주의가 한 사회에 자리 잡게 되는 과정, 실로 격변을 거쳐야하는 사회주의혁명의 순간중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저자는 바로 다음 장에서 두 혁명,” 즉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간의 차이를 다뤘다. 저자에 따르면 둘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상호 중첩되기도 했다. 일부 정치혁명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모든 사회혁명은 정치적 변화를 보였다. 또한 일부 사회혁명은 단순히 정치혁명의 외피를 입고 있더라도, 장기적인 사회혁명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저자는 애봇(Andrew Abbott)전환점(turning point)” 분석을 이론적 자원으로 삼고, 滔滔히 흐르는 자본주의의 과정과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는 순간인 부르주아혁명을 동시에 설명하려고 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기왕의 부르주아혁명론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주체와 성격을 가지고 논의가 분분했으며, 학문적 陣營을 가르는 계선 중 하나가 바로 그 사건이 정치적이냐 사회적이냐의 구분이었다. 저자는 영국의 지성인 해링턴과 로크를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 누적을 바탕으로, 정치혁명은 사회경제적 구조 안에서발생하나, 사회혁명은 한 형태의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나아가는과정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전자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 없이 사회 내부에서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지배계층 분파 간의 투쟁이고, 후자는 이미 진행된 생산양식상의 변화에 상응하거나 또는 그러한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 국가를 변형시키려는 투쟁이다.

한편 사회혁명은 반드시 직접적 계급투쟁의 결과일 필요가 없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혁명은 역사 속에서 분명 발생했으나 그 수가 너무 적어 사회혁명의 일반적 속성을 추출하기란 어렵다. 더하여 노예소유주가 봉건영주로, 봉건영주가 자본가로 변했던 것처럼, 기존 지배계급의 일원이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이전의 지위를 잃지 않고 역할만 바꿀 수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계급투쟁의 모습이 실로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계급체제 내부에서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대립하고, “계급체제 사이에서는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대립한다. 특히 후자의 관계에서 사태가 복잡해지는데, 모든 피착취계급은 억압을 당하지만, 모든 피압제계급이 착취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압제계급이 다른 피압제계급을 착취할 수도 있다. 역사적 피압제계급 중 사회를 재편할 역량을 가진 수는 제한적이었고, 부르주아만이 독보적으로 그러한 역량을 갖췄다.

이어서 저자는 부르주아혁명 시대의 전제조건을 다섯 개로 나누어 설명했다.[각주:5] 각각은 다음 사건의 대두를 위한 조건을 형성하는 확정적인 역사적 사건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서구의 경험에 국한하여 그 조건들을 탐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세계를 시야에 넣으려 하였고, 그 결과 세 번째 조건인 자본주의적 국가의 구조적 능력절을 전후로 과거의 유럽식민지들과 오스만 무굴 제국 일본 등 아시아의 사례가 대거 등장했다. 저자의 구도를 받아들일 경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또는 계급사회)은 노예 봉건 공납으로 구분된다. 더하여 저자는 절대주의를 공납적 양식의 서양식 변종으로 보는 아민(Samir Amin)의 견해에 주목했다. 요컨대 절대주의는 서구 바깥의 생산양식과 그에 상응하는 국가형태를 유럽에 도입하여 생산의 족쇄를 부과하려던 시도였으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공납국가와는 달리 서구절대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결코 막지 못했다. 하지만 절대주의국가는 그것이 타도되기 전까지 자본주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었고, 이제 혁명적 주체와 그들을 움직이게 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할 터였다.

저자는 마지막장에서 부르주아혁명이 완성(Consummation)”된 여러 양상을 다루었다. 저자에 따르면 부르주아혁명의 완성은 자본주의적 개별국가의 전복과 자본주의적 내부발전의 장애물 제거, 그리고 국제적 환경의 영향이라는 면 등에서 고찰해야 한다. 서로 다르고 적대적인 체제들이 우세한 세계에서 고립됐을수록, 사회혁명에서 외압과 내부 국가전복이 쉬이 혼합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혁명 이후의 사회는 자본주의적 운동법칙에 종속된 경제와 임노동에 기반을 둔 경쟁적 축적에 헌신하는 국가를 주된 특징으로 한다.[각주:6] 이제 잉여착취의 중심수단에 임노동이 자리매김하고, “경제(또는 사적 專用)”정치(또는 공적 의무)”는 분리될 터였다. 절대주의국가에서 지배층이 지녔던 人身적 권력은 사회적 의무를 얼마간 포함했다. 그러나 로부터 공적 심급(경쟁적 축적)이 새로이 창출됐고, 이제 자본주의국가에서 자본가는 사회적 공적 기능을 수행할 의무없이 경제적 힘을 발휘하게 됐다.

 

3. 국내 연구: 4.19연구의 쟁점과 과제

 

이 장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진행된 4.19연구의 쟁점과 과제를 살필 것이다. 서술의 저본은 한국사연구회 4월민주항쟁연구반 소속 연구자들의 공동저작으로, 이 책은 4.19민중의 민주항쟁으로 규정했다.[각주:7] 홍석률과 정창현(이하 공저자”)에 따르면 4.19“6·25전쟁 뒤 사회변혁운동의 첫 출발점이자, 식민지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직후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것은 이승만을 권좌에서 축출했으나, “주도세력이 형성되지 못하고 뚜렷한 이념이 없어 진정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완성에는 실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공저자의 주장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체와 민족통일의 당위성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전제인 듯하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공저자의 성격규정이 함축하는 과도한 문제의식을 일단 비판적으로 인정하고, 이하에서 그 내용을 살핀다.

. 4.19의 원인과 배경. 여태껏 4.19가 일어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차원에서 분석이 시도됐다. 1970년대 이뤄진 초기 연구는 학생들의 불만과 분노가 어디서 연유했는지에 집중했고, 그리하여 구조적 차원의 원인 규명보다는 다소 현상적인 차원의 분석이 이뤄졌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적 · 정치현상적 차원에서 4.19의 원인을 분석한 연구들은 이후 현상적 원인규명이라는 반론에 직면했다. 이제 연구의 방향은 3·15 부정선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왜 그러한 부정선거가 자행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4.19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나 파행적인 도시화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규명이 요구됐고, 전철환, 이대근, 손호철 등의 연구자는 각각 한국경제의 대미의존성, 원조경제의 모순, 국내외적 모순이 연계된 총체적 위기를 열쇳말로 삼아 연구를 진행했다. 이종원은 자신이 쓴 동아시아냉전과 한미일관계(アジア冷戰韓美日關係, 1996)에서 비밀 해제된 미국자료를 근거로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을 분석했다. 그는 미국이 부패 · 무능하고, 계속 북진통일식의 구형 냉전논리를 주장하며, 한일관계 정상화를 도외시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한편 공저자에 따르면 기왕의 연구들은 4.19를 촉발 · 주도한 주체들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객관적인 조건만을 나열했을 뿐이다. 그 중 박찬호는 당시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 대중들의 역할을 살폈고, 1950년대를 운동의 회복기또는 운동의 내재적 성장기로 파악하여 선구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시론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 사회활동과 학생운동의 주체에 관한 연구는 필수적이다.

. 4.19의 전개과정. 4.19의 전개과정에 관한 연구는 크게 초기 연구와 1980년대 이후의 연구로 대별된다. 전자는 그 시기를 19602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부터 같은 해 426일 이승만의 퇴진까지로 보았고, 후자는 5.16 쿠데타 직전의 2공화국까지를 포괄했다. 공저자는 이 중 후자를 바탕으로 4.19의 전개과정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눴다.

첫 번째 시기는 19602월부터 4월까지이다. 공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 대중의 시위과정은 기초적인 사실이 정리된 바탕 위에 비교적 소상하게 진척되었다.” 이 때 4.19의 주체들은 학생에 국한되지 않았고, 특히 밤이 되면 학생들의 온건한 시위가 펼쳐진 낮과는 반대로 시위가 과격화되고 도시빈민층이나 일반시민들도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하여 4.19와 미국의 개입문제라는 주제도 1980년대에 들어와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이재봉의 경우 비밀 해제된 미국외교문서(FRUS)를 자료적 근거로 하여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각주:8]

두 번째 시기는 이승만 퇴진 이후 허정 과도정권의 수립과 개헌, 7.29총선으로 새 정권이 창출되기까지의 과도기이다. 허정 과도정권에 대한 평가는 肯否가 엇갈렸는데, 공저자에 따르면 이는 혁명의 주도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에 결국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권력을 재편할 수밖에 없던 4.19의 한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초기 연구경향은 대개 7.29 총선에 관해 공정한 선거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90년대 공개된 미국자료 및 이갑윤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은 온건지향적 다수파인 민주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했으나,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가 비슷하게 의석을 차지하여 어느 한 쪽도 안정적이고 주도적인 정부를 꾸릴 수 없었다. “구체제의 골자가 유지된 상황에서일련의 민주화 조치가 있었을 뿐, 결국 4.19는 지배층 내부의 재편만을 불러왔다.

세 번째 시기는 민주당 정권의 성립과, 그와 동시에 기층 민중운동 및 통일운동이 활성화하는 시기이다. 대표적인 초기 연구자인 한승주는 4.19자유민주주의의 실험 와중에서 조성된 혼란기로 규정하는 견해를 체계화했다.[각주:9]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민주당 정권이 새로 대두하는 극단적인 좌파주의와 극단적인 반공주의양자로부터 협공을 받았고, 운신의 폭이 좁은 상태에서 결국 쿠데타를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를 양극화이론이라고 한다. 후기의 연구들은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의 성격을 띠었다. 김수진은 당시의 혼란을 정치적 양극화보다는 민주화 과정에서 필연적인 사회적 갈등을 제도권이 흡수할 수 없었던 정치권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한편 서중석은 민주당 정권과 그 구성원의 본질적 한계가 당시의 혼돈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극우반공이데올로기를 기본으로 하고, “폭력체계를 집단의 특성으로 하는 민주당은 민중항쟁에 편승하여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애초에 자유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저자에 따르면 4.19 시기의 사회변동을 전후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파악하려고 시도한 연구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당시는 외적으로 변동하는 냉전체제”, 내적으로 4.19라는 격변이 있었고, 각 정파와 주체 또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향후 연구는 그러한 변화를 역사적 맥락과 연결하여 제 나름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하고, 각각의 의미와 한계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 4.19 시기의 민중운동. 4.196·25전쟁 이후 완만하게 성장하던 민중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된 계기였다.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됐고, 조국통일민족전선과 같은 연합조직도 조직됐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운동은 5.16 쿠데타 이후 후퇴했다. 한편 이 시기 민중운동에 대한 평가는 극우 일변도의 정치무대에서 나머지 정치세력이었던 혁신정치세력과 사회운동, 통일운동에 대한 평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대중운동은 7.29총선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학생운동도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더하여 이 시기 민간차원의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에 주목할 만한데, 공저자에 따르면 당시 냉전체제의 공존과 3세계 민족주의의 대두,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 강화 등통일문제가 뜨거운 쟁점이 될 수 있던 객관적 요인이 존재했다. 한편 민중운동 연구는 각론의 차원에서 노동운동 · 농민운동 · 청년 및 학생운동 ·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등으로 나뉘어 연구가 진행됐으나, 여전히 규명해야 할 사실이 많고 전후의 역사적 맥락과 연결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 4.19의 성격. 4.19를 어떤 용어로 규정할 것인가에 관해 4.19 직후부터 논의가 분분했다. 당시 좌우를 불문하고 4.19혁명이라고 표상했으나,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 記意는 전혀 달랐다. 한편 공저자에 따르면 혁명엄격히 학문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때쓰인다. 현재 학계에선 4.19지향성에 주목하여 “4월 혁명을 사용하려는 분파와, 엄밀한 기준에서 볼 때 진정한 사회체제의 변혁을 가져오진 않았으므로 항쟁이 적확하다고 주장하는 분파가 맞부딪히고 있다.

기왕의 연구는 4.19의 성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 규정했다. 각각의 주장은 학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각 주장이 대변하는 주체들의 역사관 또는 지향성과 긴밀하게 닿아있다. 첫째는 4.19를 근대화론에 입각하여 파악하는 방식으로, 대표적 논자는 민석홍이었다. 여기서 근대화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개발이라는 이중혁명론의 구체화이다. 그러나 공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설명방식은 서구의 역사적 경험을 4.19그대로 대입해 파악하여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파악하는 방식으로, 대개 4.19 직후의 통일운동이나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등 민족주의의 고양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의적 흐름은 4.19 이전으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이전부터 지속되던 민족운동사의 흐름속에서 4.19 이후 민족주의의 자리매김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셋째는 변혁운동의 관점에서 보는 방식으로, 이는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장과 변혁운동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 또한 실증적이고 구체적이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어떤 시론이나 문제제기에 불과할 뿐이다. 필자는 이러한 한계가 일정 정도 자료부족이나 연구자의 문제의식의 과잉에 기인한다고 본다.

. 연구과제. 공저자에 따르면 4.19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서까지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1970년대 미국의 박사학위 논문을 방법론과 자료구사 수준에서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 자료발굴이 선행돼야 할 것이고, 실증적인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기왕의 연구처럼 시각이나 방법론 중심의 역사연구가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둘째, 연구 분야와 폭을 넓혀야 한다. 대개의 4.19 연구는 정치사와 운동사에 국한돼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 · 경제문제와 그러한 문제들을 두고 진행된 백가쟁명의 시기를 더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더하여 대중의 생활상 같은 미시사적 주제와 이산가족문제 및 월남민문제, 국제적 환경 등에 관해서도 연구전망을 세워야 한다. 셋째, 4.19와 그것의 의미를 전후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 부분에 관한 연구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평면적으로 사건과 그 추이를 나열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연발생적민중운동 안에 용해된 지도성대중성을 포괄해서 파악해야 한다. 요컨대 4.19 연구는 전인미답의 분야뿐만 아니라 장차 발굴될 새로운 자료들도 많이 있다.

 

4. 순간과 과정: 역사적 맥락 안의 4.19

 

이 장에서는 앞서 파악한 최신의 혁명론과 연구 성과를 살펴본 4.19를 접맥시켜볼 것이다. 필자는 이 장을 서술하기에 앞서 다음의 지침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첫째, 이 장의 서술은 어디까지나 시론의 성격을 갖는다. 둘째, 어떤 역사적 사건을 파악할 때는 그 사건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사건이 어떠한 궤적 속에 놓여있는지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4.19의 전후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4.19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파악할 것이다. 셋째, 닐 데이비슨의 혁명론을 탐구의 도구로 삼아 4.19를 파악해 볼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하에서 4.19라는 순간적이고 분수령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과정 속에 놓여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이현진은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정치면에서는 보수 양당체제가 형성되었고, 경제면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통한 대외 의존적 성장의 틀이 마련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의 붕괴와 가치규범의 혼란으로 전통적 가족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각주:10]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등은 이승만정권의 폭압적이고 파행적인 정국운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승만은 관제민의를 동원하여 독재와 부정부패를 자행 · 은폐했고, “원조물자 배분과 금융특혜 등을 이용해 정경유착 구조를 형성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미국의 냉전전략상 대소 전진기지인 한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한 정치적 修辭였다. 한편 1950년대는 원조경제의 시대라고 불렸을 만큼 미국의 對韓경제원조정책이 한국경제를 좌우했고, 동시에 한국경제의 물적 토대가 조성된 시기였다. 이대근은 당시 한국경제를 두고 “30억 달러 이상에 달하는 미국원조 도입을 통해 전후 자본주의세계경제체제로 신속하게 편입됐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1950년대 한국경제는 결코 停滯的이지 않았고, 자본형성과 기술축적이 상당히 이루어졌으며, “5%대의 성장 실적을 거양했고, 당대보다는 차세대 공업화를 위한 기반구축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각주:11]

1950년대의 한국사회는 인구이동이 대규모로 관찰됐고,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농지개혁의 실패 및 생산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美公法 480(PL 480)를 통한 잉여농산물의 대거 수입은 농촌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농현상이 가중됐고, 휴전 이후 피난민들의 귀환은 도시인구를 급증시켰다. 자연스레 도시빈민이 양산됐으며, 가족공동체 규범의 변화와 함께 도시민들의 불만도 증가했다. 한편 당시 학교교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취업난과 상승의 욕구, 징집회피의 수단, 미국 유학의 가능성 증가 등 여러 요인이 결합하여 대학생이 급증했는데, 1960년대 대학생과 대학출신자의 수는 거의 38만여 명에 이르렀다.[각주:12] 이들은 장차 사회적 불만을 체현하여 4.19 발발의 주체가 될 터였다.

1960228,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정권에 맞서 시위를 감행했다. 그들은 대구지역 8개 국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녀 학생들이었고, 자신들을 민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자유당에 맞서 한나절 동안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이어 3.15 부정선거에 따른 마산 의거(또는 봉기)”와 다음 달인 411일 김주열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위는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대학생과 교수, 시민들이 참여하여 시위의 주체도 대폭 확대됐다. 시위는 지역과 주체에 따라 지속적 또는 간헐적으로 진행되었으나, 418일 고려대생이 시위 후에 습격당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정권 규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서울 시내에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민들의 무력시위가 개시됐고, 419일 정부의 발포로 피의 화요일이 시작됐다. 이어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 사퇴와 이기붕의 공직 사퇴, 계엄사령부의 선무노력 등 미봉적인 수습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미국은 체제변혁이 개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개입하여 이승만을 압박했고, 425일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더해져 결국 426일 오전 1030분 이승만은 하야성명을 발표했다.[각주:13]

한편 1950년대 후반 미국은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공산권과의 체제경쟁에 맞서동북아시아지역에서 한 · · 일을 잇는 지역통합전략을 현실화하려고 했다.[각주:14] 미국은 이승만의 감정적 반일을 차츰 장애로 느끼기 시작했고, 3.15 부정선거 이후 일어난 민중항쟁이 더욱 불거지기 전에 개입했다.[각주:15] 이승만 하야 뒤 기득권층이 권력을 재편했고, 허정 과도정부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 후 729일 총선을 실시했다. 민주당 정권은 반공주의라는 기왕의 정책적 틀을 유지한 채, “경제제일주의로 표현되는 근대화론을 집권의 명분으로 내걸었다. 다른 한편에선 시민사회단체와 혁신계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고,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겨냥하는 세력들이 대두했다.

그러나 1961516일 쿠데타가 벌어졌다. 군부는 반공을 국시로 함과 동시에, 민생고를 해결하고 통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의 국가기획이 선통일후건설이었던데 반해, 박정희는 선건설후통일을 주창했고, “4.19와 동일한 사회상황의 소산인 원조경제의 停滯 속에서 경제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확산시켰다. 군사정권은 4.19를 계승한다고 자임했고, 4.19 당시 제기된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요구에 나름대로 응답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반공 · 권위주의적이자 동시에 강력한 발전주의적성격을 보였다. 케네디 정권은 3세계 각국의 경제발전을 통해 양극적 체제경쟁에 돌입했고, 한국은 이러한 미국의 대아시아정책 하에서 일본과 책임을 분담했다. 결국 5.16이후 18년 동안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산업화 경쟁에 탈정치화된 대중의 에너지를 총동원했다.[각주:16]

결국 4.191960년대부터 진행될 한국의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립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부표의 역할을 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계급성과 계급의식은 모호했으나 시민들이 참여하여 반민주적이고 경제발전에 별 관심이 없던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한편 4.19를 통해 한국인은 국가지도자를 끌어내리는 찬란한 역사적 성과를 거뒀으나, 한국사회의 지배층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이어 민주당의 머뭇거림과 그 틈을 타 무력으로 헌법을 뒤집은 반혁명적 사건5.16을 통해 4.19의 염원은 당분간 짙은 어둠 속에 갇히게 됐다. 이제 한국은 국가주도하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기형적으로 확립될 위로부터의 혁명이 개시될 터였다.

 

5. 결론: 서구의 이론으로 본 4.19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서구의 최신이론을 정리한 후, 기왕의 4.19 연구 현황을 개괄했으며, 마지막으로 역사적 맥락 안에 4.19를 위치시켜 파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선배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첫째, 자료의 부족과, 둘째, 선행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정치한 분석보다는 소묘에 가까운 서술에 그치고 말았다. 더하여 닐 데이비슨의 결과주의적인 부르주아혁명론을 4.19에 적용하려고 했으나, 한편으로 5.16사건으로서의 한국식 부르주아혁명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첫째, 1960년대라는 시대[각주:17]와 당시의 한국경제를 쿠데타 세력이 재단했고, 둘째, 쿠데타 세력의 미봉책으로 인해 1950년대의 재벌들은 족쇄를 하나하나 벗어던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각주:18]

그러나 4.19滔滔히 흐르는 자본주의의 과정속에서 본다면, 비록 정치혁명에 그쳤으나 실로 혁명적인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6·25전쟁과 온갖 부정부패로 점철된 11년여의 이승만 반공독재를 피지배층, 그 중에서도 청년층이 솔선하여 붕괴시킨 점은 그 의미를 결코 낮추어 평가할 수 없다. 4.19 이후 한국인의 경제적 기본권이 강력하게 요구됐고,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지는사태가 벌어졌다.[각주:19] 허정 과도정부와 2공화국은 한국인의 그러한 요구를 수용할 역량이 부족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4.19 이후 한국식 자본주의는 결국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기형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오유석에 따르면 4.19정치 · 경제 · 사회 모든 측면에서 낡은 체재를 개혁하려던 항쟁이었으나, 그것은 학생에 의한 대리혁명이었고, 5.16에 의해 좌절됐다.[각주:20] 그러나 이 같은 역사서술은 근시안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은 역사적 맥락 안에서야 비로소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유석의 평가는 4.19로 추동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립(요구)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특정한 역사적 목적을 설정했을 때 가능한 평가이다. 필자는 닐 데이비슨의 결과주의적 부르주아혁명론을 빌려, “순간과정양자를 염두에 두고 현대한국사의 혁명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4.19는 고유의 한계가 뚜렷했으나, 이후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확립되고, 자본주의적 운동법칙이 사회적 심급으로 작용하며, 임노동에 기반을 둔 경쟁적 축적을 강요하는 국가가 대두하게 된 장대한 서사시의 서막이었다.

 

 

 

참고문헌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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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역사 속의 혁명, 6차 맑스 꼬뮤날레 3번 발제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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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률, 4월혁명 직후 정군(整軍)운동과 5.16 쿠데타, 한국사연구158, 2012.

 

영문

 

Neil Davidson, 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Chicago: Haymarket Books, 2012.

  1. ‘4.19’는 여태껏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왔다. 대표적으로 “4.19,” “4.19혁명,” “4.19의거,” “4.19(민주 또는 민중)항쟁,” “4.19사태,” “미완의 혁명” 등이 있다. 4.19의 正名에 관해서는 아직 합의된 바가 없는데, 이는 해당 사건을 바라보는 논자의 학문적 · 정치적 입장 및 시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시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과 윤치영, 현대의 수구 논객 지만원 등은 4.19를 “사태”로 파악한 반면, 역사학자 서중석은 “혁명”으로 파악했다. 한편 필자는 4.19의 기본적 성격을 정치혁명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또한 부르주아혁명으로 볼 여지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 우선 민중이 지배층을 끌어내렸고(순간), 이후 일련의 사태 전개를 거쳐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우세하게 바뀌는 이행기(과정)의 시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4.19 자체는 생산양식과 생산관계에 심원한 변화를 초래한 “사회혁명”은 아니었고, 지배세력 내에 재편이 이루어졌다가 얼마 후 반동적 군사쿠데타에 직면한 “정치혁명”이었다. 물론 2공화국 때 한국의 시민사회가 보여준 혁신적이고 민족적인 행동과 요구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필자는 4.19를 “4.19혁명”이라기보다는 “4.19”라고 표현하는 편이 간명하다고 생각하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최갑수, 「역사 속의 혁명」, 6차 맑스 꼬뮤날레 3번 발제문, 2013, 179쪽. [본문으로]
  3. 홍석률, 「4월혁명 직후 정군(整軍)운동과 5.16 쿠데타」, 『한국사연구』 권158, 2012, 200쪽. [본문으로]
  4. “부르주아혁명”에 관한 역사, 즉 “혁명의 역사학”도 흥미롭다. 최갑수에 따르면 부르주아혁명관은 원래 운동권에서 제기한 것으로, 그것은 사회혁명론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특히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유럽사회의 자기전망이 변하면서 일부 국가에서는 학계의 주도적인 해석으로 자리 잡고 적어도 1960년대 말까지 혁명의 ‘고전’해석의 위치를 차지했다.” 또한 프랑스 학계의 경우 프랑스혁명을 기본적으로 부르주아혁명으로 파악하면서도, 농민과 귀족의 반혁명 노력 등 혁명의 여러 부차적 양상을 밝혀내 풍성한 혁명사를 서술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자유주의사가들이 만들어 낸 이 개념은 이후 마르크스가 차용했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분석적 개념으로 만들어냈다. 이제 부르주아혁명이란 개별 혁명을 논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사건들의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1968년에 벌어진 세계적 규모의 변화와 함께, 1990년대 초반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부르주아혁명론은 힘을 잃게 됐다. 더 이상 부르주아혁명론으로 개별 혁명들을 설명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최갑수, 앞의 논문, 187~188쪽 참고. [본문으로]
  5. 여기서 말하는 다섯 가지 부르주아혁명 시대의 전제조건은 ①봉건제의 위기, ②(생산력 발전을 위한)자본주의적 대안의 가능성, ③(자본주의 발달에 간여하는)前자본주의적 국가의 구조적 능력, ④혁명적 주체, ⑤혁명적 이데올로기이다. [본문으로]
  6. 저자는 자본주의국가가 수행해야만 하는 중요한 특정 행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①이중(수평적, 수직적)의 사회질서를 부과하는 것, ②‘생산의 일반적 조건’을 확립하는 것, ③각각의 자본주의국가가 ‘내부적’ 자본가 계급의 집단적 이해를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것. 이 중 ①은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해주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아야 하는 수평적 사회질서와, 노사관계가 항상 자본에게 유리한 쪽으로 귀결돼야 하는 수직적 사회질서를 포함한다. 다음으로 ②는 경쟁적 축적이 잘 일어날 수 있도록 하부구조(Infrastructure)를 창출해야함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③은 정책들이 자본가나 지배층 한 분파의 이익 속에 갇혀있지 않고, 세계시장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7. 홍석률 · 정창현, 「4월민중항쟁 연구의 쟁점과 과제」,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0, 13~46쪽 참고. [본문으로]
  8. 이재봉, 「4월혁명, 제2공화국, 그리고 한미관계」,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나남출판, 1996, 71~110쪽 참고. [본문으로]
  9. 한승주,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종로서적, 1983 참고. [본문으로]
  10. 이현진, 「전후 한국사회와 4 · 19」,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下』, 지식산업사, 2011, 421쪽. [본문으로]
  11. 이대근, 『解放後-1950年代의 經濟』, 삼성경제연구소, 2002, 517~518쪽. [본문으로]
  12. 이현진, 앞의 책, 429쪽. [본문으로]
  13. 정근식 외 편,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2010, 23~79쪽, 181~220쪽 참고. [본문으로]
  14. 허버트 P. 빅스, 「지역 통합 전략」, 『1960年代』, 거름, 1983, 208~250쪽 참고. [본문으로]
  15. 미국 국무부 전후 대외정책 자문위원회, 정치소위원회 50차 회의록(1943.04.03.).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18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6. 정용욱 외,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15~20쪽 참고. [본문으로]
  17. 박준식에 따르면 1960년대는 “근대적 의미의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대부분의 후진국이 노동시장 형성의 초기단계에는 엄청난 과잉인구의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더하여 당시 사회복지나 사회부조 같은 서구식 복지개념은 기대하기 힘들었고, 가족구성원 일부의 희생에 의존하여 가정경제가 작동하는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박준식, 「1960년대의 사회환경과 사회복지정책」, 『1960년대의 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1999, 160, 194~198쪽 참고. [본문으로]
  18. 공제욱, 「부정축재자 처리와 재벌」, 위의 책, 201~204, 252~255쪽 참고. [본문으로]
  1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4, 237쪽, 김광희, 『박정희와 개발독재』, 선인, 2008, 37쪽 각주 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0. 오유석, 「서울에서의 4월혁명」, 앞의 책, 2010, 21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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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대사2014. 9. 3. 19:05

* 2014년 9월 4일 아침 할머니와 얘기 하다가 생각이 떠올라 씀.

 

우리 할머니는 1945년 겨울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으로 시집을 오셨다. 그 땐 아직 해방이 되기까지 7달 정도가 남았을 때였다. 꽃다운 15~16살 즈음에 시집을 오신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시어머니(내 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하여 꽤나 많은 수의 가족과 함께 가축이며 살림살이 등을 전부 돌봐야했다. 이후 할머니의 삶은 그리스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아이게우스의 외양간을 치우는 것과 같은 천형(天刑)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할머니가 보고 느낀 바를 말씀해 주신 것에 기대고 있다.

 

동네에는 하급 중에서도 하급 공무원 신분(?)의 김 아무개가 살았다. 그는 일제 행정의 말단을 도맡았던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 중 하나였다. 오늘날 그를 두고 친일(親日)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닥 중요한 일은 아니다. 이미 돌아간 분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영향력은 동리(洞里)를 벗어나지도 않았고 다른 유명한 친일파와의 그것관 달리 해방과 함께 즉각 소멸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김 아무개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악랄했다고 한다.

 

전쟁은 애꿎은 인민들을 수탈한다. 아니나 다를까 일제는 할머니의 시집을 비롯하여 식민지의 가가호호에서 금속과 고무 등을 강제로 공출했다. 그렇게 사라진 놋그릇과 놋수저를 대체한 것은 사기그릇, "모지랭이" 숫가락, 나무젓가락이었다. "모지랭이"는 "모자란"으로 추정되는데, "부러지고 꺾여 제 구실을 하기 힘든" 숫가락을 의미한다. 물자를 앗아가는 일제의 모습이야 악랄함 그 자체였으나 할머니는 일종의 쾌(快)를 느꼈다고 한다. 식기세정제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놋제품은 설거지가 어렵다는 점을 기억하자.

 

김 아무개는 칠성면에서 자행된 일제의 만행에 앞장섰던 모양이다. 일제는 피륙마저 챙겨갔는데 당시 동네에서 키우던 좋은 "목화송이"는 물론이고 그것으로 만든 면제품은 모조리 수탈의 대상이었다. 메뚜기가 휩쓸고 지나가 황량해진 논밭에서 한톨이라도 더 주으려는 심정이 들게 마련이다. 동리 사람들은 저질 "목화송이"로라도 면을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김 아무개가 공출과정에서 불만족스러웠던 집의 "지하"에서 저질 "목화송이"가 면으로 바뀌는 광경을 적발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낫으로 그 면을 주욱 찢어버렸다. 당시 베틀을 다루던 아낙네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칠성면에서도 과거 추축국(즉 일본) 관리에게는 해방조선의 몽둥이찜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방 소식이 들려오자 동리 청년들은 너도나도 김 아무개를 "때려잡고자" 하였다. 그 원한과 복수심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김 아무개가 얼마나 눈꼴 사나웠겠는가? 하지만 김 아무개의 시집간 딸이 아버지를 구했다. 남편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김 아무개에게 찾아가 도망가라고 언질을 준 것이었다. 그 결과 김 아무개는 종적이 묘연해졌고 청년들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 그로부터 3년 후, 한반도에는 두 개의 분단정부가 들어섰다. 얼마전 김 아무개는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최근 사미르 아민(Samir Amin)의 글을 번역하면서 이 세계는 놀라우리만치 과거청산(淸算)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사권과 기소권은 물론이려니와 재판권까지 보유했던 "반민특위"가 반공주의라는 미명 하에 활동을 접어야했던 사건이 비단 우리네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도 반공주의(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을 선호한다)의 망령은 공산주의라는 유령보다 더욱 강고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는 "[대독]협력에 대한 처형 남용"이라는 명분을 들고 나온 비시주의자들이 과거 레지스탕스를 겨냥해 소송을 벌이기도 했단다.

 

곧이어 터진 전쟁은 이 글의 주제와 연관은 되지만 분량 문제상 추후로 미루도록 하겠다. 아무튼 칠성면의 조선청년들은 과연 나름의 복수에 성공했을까? 당장엔 모르겠다. 그렇다면 칠성면을 비롯하여 해방조선의 이른바 "복수"는 성공했을까? 전혀 아닌 것 같다. 그 전에 당시라는 맥락에서 "복수"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미완의 과제로 그친채 70여년이 흐른 오늘날, 그러한 "복수"의 기획은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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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현대사2014. 8. 27. 19:22

* 2014년 7월 9일 작성.

 

미(소)군정기(1945.09~1948.08?)는 흥미롭고 독특한 시기인 듯 하다. 반파시즘 전쟁에서 일제의 패망이 곧바로 새로운 조선의 건국(광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소의 야욕 쩖. 저 시기 조선은 탈식민기의 또다른 식민지 아니었을까?

여하튼 1946년 4월, 미군정은 학무국 산하에 영어학교(English Language School)를 창설했다. 도미유학 예정자를 훈련시켜 그들을 통해 1) 미군정의 통치를 보좌하게 하고, 2)본국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얻어내며, 3)천조국을 경험시켜주어 친미세력을 양성할 심산이었다. 문제는 교육 여건이 빈약하다 못해 엉망이었던 것. 당시 남한의 영어교육이란 제대로 된 교사가 없어 미군사병이 교육을 맡았고, 제대로 된 교재가 없어 [지옥 같은 문법과 괴랄 맞은 발음의 일제식]영어학습법을 고수하는 형국이었다. 미국을 다녀온 한국인 교육사절단은 이대론 노답이라는 우려를 미군정에게 올렸고, 그 결과 듣기와 말하기에 중점을 둔 영어교육이 대안으로 부상했다. 1946년 10월에는 이름도 좀 더 그럴싸한 영어학교(American Language Institute)로 바뀌었고, 오늘날의 명동 롯백 쪽으로 건물을 확장이전했다. 도미유학 예정자뿐만 아니라, 군정직원이나 일선의 영어 교육자들도 "문명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와 영어학교는 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영어학교 교내에서 한국어는 쓸 수 없었고, 오직 영어로만 얘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예산이 궁핍하자 학무국 내에서는 부담스러운 영어학교를 폐지(서울대 영문과로 이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에 크게 놀란 남한 '지식인들'은 오히려 영어학교의 필수불가결함을 강하게 주장하며 미측을 압박했다. 1947년 4월, 자그마치 200여 명이 연서를 돌려 영어학교 폐지를 반대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우리네 지식인(?)의 정성(?)을 갸륵히 여겨 영어학교를 당장 폐지하진 않았다. 한편 미국무부는 남미의 영어학교완 달리 남한의 영어학교에는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고, 영어학교 출신들이 미국 본토나 미군정에서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돈줄이 마르자 영어학교는 1948년 5월부터 학비를 받기 시작했고, 8월 남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학무국의 일은 문교부(안호상 장관)가 맡게 됐다. 문교부는 미국무부의 지원을 받아 영어학교를 존속시킬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정작 국무부는 이를 지원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고 영어학교는 1948년 9월 30일에 사실상 문을 닫았다.

오늘날 격차교육이나 특권교육, 영어 등의 교육문제는 저때도 다를바 없던 것 같다. 2014년에도 여전히 듣기와 말하기가 중요한 것처럼...

 
* 윤종문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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