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현대사2018. 4. 13. 21:36


An expelled Nazi party member, he allegedly refused to give a Nazi salute. Why did he do so? From my perspective, this picture, above all, shows the two things: there are by no means ways to know the mind of the people and there will always be a hope, only a dim one, in times of darkness.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8. 4. 3. 00:09

강요배, <하산민> (1989)


43.1.pdf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8. 2. 5. 17:11

이하의 번역은 원 글의 일부만 번역한 것입니다. 나머지 내용에 대한 추가 번역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以下の翻訳は、文章の一部だけ訳したものです。 残りの内容に対する追加の翻訳が必要な場合には連絡してください。



해설 새조선과 그 시대 (『セチョソン』地方版)

정영환(鄭栄桓

 

들어가며

 

 『새조선-‘새로운 조선을 의미하는 이 신문에는 발행처나 인쇄소, 발행인, 편집담당자 등 원래 쓰여 있어야 할 발행주체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대체로 적혀있지 않다. 다만 제목 아래 조국방위전국위원회기관지라고 적혀있을 뿐이다.

 조국방위전국위원회란 무엇인가. 1950625일의 한국전쟁[원문-조선전쟁]의 발발에 맞춰 재일조선인은 전쟁에 대응할 여러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머지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역자 주-이하 북한]을 지지했던 구() 재일조선인연맹계의 사람들이 결성한 것이 바로 조국방위중앙위원회(이후 조국방위전국위원회. 이하 조방위’)와 조국방위대(이하 조방대’)이다. 조방위는 북한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미국과 일본의 한국전쟁 참가에 반대하고, 반기지투쟁과 반재군비투쟁, 한반도[원문-조선]로 보내는 무기제조 및 수송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새조선은 기관지로서 북한정부와 조방위의 입장을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에게 전달하고, 또 그 구체적인 활동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점령하의 일본에서 이러한 활동은 합법적으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방위는 공공연하지 않고 비합법적인활동을 부득이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새조선의 발행주체에 관하여 구체적인 정보가 적혀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자료집은 조국방위전국위원회기관지 새조선가운데, 새로이 발견된 조방위의 지방위원회 발행판(이하, ‘지방판’), 전국위원회 발행판(이하, ‘전국판’) 등 기간(旣刊)된 자료집에 실리지 않은 미간행 자료와 아울러 관련된 신문을 수록·공간한 것이다. 수록된 기관지·신문은 다음과 같다(모두 제1권에 수록).

새조선(조국방위전국위원회기관지. 이하, 전국판)

새조선(조국방위전국위원회기관지 서일본판. 이하, ‘서일본판’)

새조선(조국방위중일본위원회기관지. 이하, ‘중일본판’)

새조선(조국방위전국위원회기관지 구주(九州). 이하, ‘구주판’)

새조선(조국방위동경[이후 동경부]위원회기관지. 이하, ‘동경판’)

새조선(조국방위대판부위원회기관지. 이하, ‘대판판’)

해방조선(해방조선사 히로시마시 이나리(稲荷) 4)

조선신문(조선신문사 동경부 스기나미(杉並)구 아사가야(阿佐) 3-2)

새조선(발행인 불명. 토호쿠(東北)판이나 미야기(宮城)판으로 추측됨)

조선신문(동경도 시바()구 신쿄(新橋) 7-12번지(産別内))

정책시보(발행인 불명. 일본공산당 계열의 기관지로 추측됨)

 한국전쟁 당시 재일조선인운동에 관한 사료(史料)는 다른 시기와 비교할 때도 현저히 부족하지만, () 박경식(朴慶植) 씨의 생애에 걸친 노력으로 말미암아 새조선전국판은 그 대부분이 수집·공간되었다. 그러나 지방판은 치안당국의 신고 등으로 지적돼 박경식 씨가 1983년에 편찬·간행한 조선문제자료총서(朝鮮問題資料叢)(이하, 총서) 10권에 구주판(94)과 동경판(29, 33)이 수록돼있을 뿐이었다.

 『새조선지방판은 이렇듯 오래도록 환상의 존재였으나, 이번 고서점(古書店)으로부터 전국판, 각지방판, 관련 신문자료가 한 책으로 제본된 것을 입수한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회학부의 이타가키 류타(板垣竜太) 교수의 후의에 힘입어 자료집 형태로 공간될 수 있었다. 이 지면을 빌려 감사를 드린다. 또 이 자료집의 간행에 맞춰, 지방판의 기사 목록은 물론, 전국판의 모든 기사목록과 지명색인을 첨부해 독자·연구자의 편의를 도모했다(2권 수록).


2. 새조선과 그 시대

(1) 새조선이전의 재일조선인운동

(2) 조국방위전국위원회와 새조선

(3) 새조선과 현대사 연구

 

3. 수록 자료에 관하여

 

참고문헌

 

1 새조선전국판 호수·발행 년월일 등 대조표

2 새조선서일본판 호수·발행 년월일 등 대조표

3 새조선구주판 호수·발행 년월일 등 대조표

4 새조선동경판 호수·발행 년월일 등 대조표

5 기관지 입수현황 일람표(새조선, 1951626일 현재)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8. 1. 21. 19:52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7. 11. 8. 11:50

러스킨 워크숍: "역사와 정책: 러시아의 사례를 가지고" (Luskin Workshop: "History and Policy: The Russian Case" featuring Arch Getty and Tom Lifka)

Date: 11 Oct 2017

Place: 6275 Bunche Hall

More


게티 (A. Getty)

러시아의 역사 - 끊임없이 침략을 받은 역사

정책: 역사 - 무엇이 미국의 이해에 가장 잘 부합하는가?

강한 러시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제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러시아 경제의 다양성만 증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협상이 필요하다.

악마화(demonize)가 어느 수준에서 도움이 되는가? 이는 정책이라고 할 수 없다. 협상 외에 다른 방안은 [미국이 원하는] 반대 방향의 결과만을 초래할 것


협력이 필요하다.

테러리즘, 국제적 안보불안(insecurity), 핵확산 등 여러 사안에 걸쳐.


역사에서의 생략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알려주는 것도 없음.


역사지리학적 측면. 평원은 침략을 부른다. 러시아의 광활한 동부 평원. 러시아는 이러한 조건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한 조건은 무엇이며, 그들은 그러한 조건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리프카 (T. Lifka)

역사적 유추; 특히 미국 정책에서는 나치와의 경험이 정책 형성에 언제나 영향을 끼쳤다. 

뮌헨 ... 한국전쟁 ... 베트남전쟁 ... 그리고?

트루먼은 고립주의적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나치와의 (실패) 경험을 초들기도 했다. 당대 지성들 또한 이러한 역사적 비유를 옹호했다.


질의응답

사회적으로 만연한 인상 또는 분위기 [=러시아 악마화 등]를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언론의 어마어마한 힘.

- 러시아 악마화는 아무 도움 안 됨. 그들은 미국을 좋아함. 그리고 러시아는 일괴암적(monolithic)이지 않음, 여러 이해 집단이 푸틴을 둘러싸고 있음.

소련은 실제로 영토를 획득하려고 했다? 공격성?

- 1979년 아프간 이전에 그러한 경우는 없었음.

정책이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만드는가?

- 엘리트들, 정부.

인문학, 사회과학에 다시 투자해야 한다고? 이미 그렇게 해오지 않았는가?

- 그나마라도 투자를 했기에 다행이지, 안 했더라면 상황은 더욱 나빠졌을 것. 투자가 많아야 영향력도 따라서 증대됨.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6. 12. 2. 23:06

한국러시아사학회 (2016123, 이화여자대학교 학생회관 206)


발표자: 류한수

 

1920년대 전간기 바이마르-소련 군사교류 활발. 합동훈련을 하기도 함. 장교 사이에 교류가 일어남. 장교에 따라 붉은군대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 전반적으로 소련군에 우호적인 관점을 가진 독일군 장교는 소수. 보수, 국수주의, 반공주의, 엘리트의식이 배인 독일군 장교가 많았음. 1930년대 투하쳅스키가 독일 방문했을 때 모욕적인 평가. 군사적으로는 교류를 했으면서도, 독일군들은 시혜를 베풀었다는 식으로 기록. 시혜적 시각은 독일군을 얼마나 깔보았는지 잘 보여준다.

독소전쟁이 끝난 1945년 봄, 독일의 패배.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기 서방세계에서 패자의 역사가 우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음. 노경덕 선생님의 말: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었음 (냉전기 서방의 역사 인식). 독일은 오로지 수에서, 추위에 밀려서 진 비운의 군대로 인식되었음.

1943년까지 쾌속진격, 승리. 1943년 이후 처절한 방어와 승리 등이 서방세계의 인식을 지배했음. 전쟁이 끝나고,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트루먼이 소련을 동반자라기보다는 적으로 인식. 냉전기 소련은 미국의 동맹이 아닌 적. 소련군과 싸우려면 소련군을 알아야 했기에, 소련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독일국방군, 장군들을 대거 기용. 이들에게 2차 세계대전 군사사 서술을 맡김. 독일측의 시각이 강해짐. 독일 장군들이 책임을 히틀러에게 떠넘김.

싸움터에서 붉은군대와 실제로 싸운 독일 장군들은 귀중한 정보의 원천. 중형을 받더라도 금새 사면. 328명 독일 장군 포로가 미국국방부에 배치돼 각양각색의 역사서 서술. 프란츠 할더, 15년 동안 일하면서 역사 서술을 감독. 독일 장군들이 회고록을 작성, 미국에서 출간. ‘자기들은 잘 싸웠는데 히틀러가 끼어들어 패배. 소련군은 저열한 군대.’ 독일의 전격전은 허위에 가까움. 포위섬멸에 가까움. 전통적인 독일군의 교리에 입각하여 싸웠음.

소련군의 전쟁교리는 제정러시아 때부터 내려온 것에 내전을 거치면서 스스로 만든 것.

 

드는 생각: 전후 제국일본군 장교들에 대한 처우와 비교하면 재미있을 듯. 미국방부에서 나온 자료 가운데 만주전략공세 작전에 관한 연구를 일본군 장교에게 맡김. 미국과 전범 장군들의 이해관계가 아주 잘 맞아떨어짐. 전쟁, 전범 회피의 문제. 지구적 반공/반소주의. 독일/일본 장군들 전후 비교한 연구가 있는지?

 

 

발표자: 고가영

 

이슬람이 생기자마자 중앙아로 전파. 현재까지 사회의 모든 조직에 다대한 영향력. 반면 러시아는 19세기 이 지역으로 들어왔고, 정교회를 표방했음. 소비에트는 무신론을 표방했음. 중앙아의 이슬람은 제정과 소비에트를 모두 견뎌냈음. 20169월 사망한 우즈벡 까리모프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헌법에 선서한 다음에 바로 꾸란에 선서했음. 신생국가의 정체성 확립 도구로 쓰겠다는 의지를 표명.

발트 삼국에 점령박물관이 있음. 나치와 볼셰비즘 양자에 의해 수탈을 당했다는 인식. 이와 유사한 선상에서, 오늘날 중앙아시아에서는 소련의 이슬람 탄압을 부각시킴. 탄압에 대한 이슬람의 저항, 지하드? 소비에트 시기 정부와 이슬람의 관계가 이렇게 대립적인 구도였는가?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소비에트 시기 정부의 대()이슬람 정책은 때마다 변화가 있었음.

공인/생활/극단 (와하비즘) 이슬람. 여기서 공인을 선택했음. 종무원.

러시아혁명 이후 대조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종무원의 변천.

 

김남섭: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았던 시기: 아프간전쟁기. 회고-“매일 라디오에서 무슬림이 얼마나 나쁜 종교인지 선전선동.”

이슬람 외에 중앙아시아 (우즈벡)를 표상하는 정체성이 있는가? 타지키스탄 내전, 종파끼리의 전쟁, 이슬람만 가지고는 구분도 힘듦. 점점 이슬람을 버리고 티무르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밀면서 역사를 부흥시키려고 함. 기독교 선교사보다 와하비즘 선교사를 더욱 경계함. 까리모프 정부는 우즈벡을 무슬림의 나라지만 이슬람 정부는 아니라고 표방.

양승조: 제정 시기 이슬람정책을 쓰면서, 예카테리나 시기 만들어진 종무청을 만드는 과정을 공부하면서, 소비에트정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오렌부르크 무슬림의 경우, 무크티로 선출된 자가 카자흐 가서 적극 제정 선전을 했음. 사둠은 어떠했는가? 이원적 (공인/비공인)인 관계가 생겼음. 까리모프의 통치를 우즈벡 공인 무슬림들이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이익을 취함. 종무원은 국가에 충성스러웠을 텐데, 오히려 종무원이 이슬람 사회 내에서 얼마나 지지를 받는지, 또는 어떠한 위상인지가 더욱 연구되어야 할 부분.

김병호 (전 대사)

류한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에서 아편이 오늘날 마약과 같은 의미인가? 마르크스가 이 아편을 썼을 때, ‘보다는 진통제또는 치료제의 의미로 썼을 터. 레닌이 썼을 때는 어떤 의미?

한정숙: 지하우진의 딸 지하부지노바. 어떻게 된 것인가? 우즈벡어가 노어로 바뀌면서?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6. 7. 27. 07:20

 휴전이 조인된지 63주년인 밤이다(우리 할머니께서 25살이었을 때). 김선호 선생님 언급을 듣고 적는다. 전쟁, 참 무섭다. 증언을 들어보면 공포가 이내 육박한다. 그래서 오늘날 "여차하면 쓸어버리자"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 "비례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등 전쟁을 옹호하는 수사는 악랄하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선에 설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나같은 예비군도 안 끝난 젊은이들이 가장 먼저 징집돼 총대를 맬 것이다. 오로지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전쟁이 연일 벌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시리아, 이라크, 아프간, 우끄라이나 등 주변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전과 독일, 프랑스 등 중심부에서 터지는 테러공격 등. 전쟁은 결코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너무나 많은 수가 죽는다. 동시에 전쟁이 왜 일어나는지는 반드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렵긴 하다.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일'이 곧 전쟁의 이유를 옹호하는 것으로 들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도차이나와 알제리 인민들의 싸움에 대하여 "전쟁은 안되는데"라며 손사래를 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피착취인민의 투쟁을 마냥 지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선 결국 원인인 (신)제국주의에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러한 대처는 무의미하거나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무섭고 노답이다. 63년 전 오늘 휴전이 조인된 625전쟁은 북한의 명백한 남침이다. 지난 63년 동안, 개전을 명령한 김의 죄과는 한국에서 철저하게 물어져왔다. 한편 그가 왜 그러한 전쟁을 벌였는가에 관해서는 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해=변호'라는 틀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속에서 한반도 최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수장이 그렇게 쉽게 국민과 수도를 내팽개치고 전광석화와 같이 도망간 사실 그리고 그 책임 또한 금기에 붙여졌다. 최근에 와서 일각에서 國父로 격상된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사회적 스트레스 수치가 거의 안면마비급으로 온 현재, 평화교육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때의 평화교육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수행되어야 할까? 국내의 자본가계급과 국가가 결탁해 최저시급을 6,000원대로 유지하면서 국민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분할통치를 실시하는 가운데 어떤 평화를 상상하고 실천해야 할까? 내가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며 보았던 미군들은 전체 미군에 비해 극히 적은 숫자이지만, 대부분 경제적으로 열악한 계층이었다.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한반도에 지원한 백인 청년이 쉬는 시간에 엘프어를 공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위대도 연봉을 중소기업 회사원 초봉 이상으로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시아도 몇년 전부터 군대가 차지하는 사회적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힘쓴다고 들었다. 중국/북한은 세계 병력규모 1위와 4위를 도맡고 있다. 도무지 모르겠다.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5. 8. 19. 07:09

정세로 말하면 동북 3성 방면에 우리 독립군은 벌써 자취를 감추었을 터이나, 신흥학교 시절 이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히려 김일성 등 무장부대가 의연히 산악지대에 의거하여 엄존하고 있다.


중경임시정부 주석 김구


김구, 2002, 백범일지, 돌베개, 315쪽.

김광운, 2003, 북한 정치사 연구I, 선인, 103쪽, 각주 196번에서 재인용.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5. 7. 23. 03:28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

Ф. 102, О. 18, П. 93, Д. 5, ЛЛ. 1~189.

1962년 8월 10일~12월 24일


1962년 9월 1일 조선 주재 소련 대사 마스꼽스끼와 외국 대사들과의 대화록:


1) 베트남 인민공화국 수립 17주년을 기념해 베트남 공화국 대사관에서 개최한 리셉션에서 불가리아 대사 보그다노프와 헝가리 대사 꼬봐츠를 만났다.

[...]

불가리아 대사는 본국정부의 훈령으로 노동당 부위원장 김창만을 방문하고 소피아에서 불가리아 주재 북조선 대사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항의를 했다고 하였다.

항의내용은 4명의 북조선 유학생이 귀국을 거부하고 불가리아정부에 정치망명을 요청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북조선 대사와 대사관원들이 이들을 체포해 구타하고 대사관에 감금시킨 후 지금까지 석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불가리아 대사 보그다노프는 북조선 대사가 불가리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본국정부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즉시 북조선정부에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강경한 항의를 전달하고 석방하지 않을 경우 불가리아 주재 북조선 대사를 추방하고 조선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겠다고 했다고 하였다. 불가리아정부의 항의는 마침 김일성과 외상이 평양에 없어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창만에게 전했다고 하였다.

김창만은 이 항의를 듣고 불가리아 주재 북조선 대사가 올바르게 처신했다고 두둔하며 조국의 배신자를 대사관에 억류하고 마르크스레닌 정신으로 교육시키려고 한 것이며 불가리아정부가 공연히 귀국하지 않으려는 자를 보호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외교관례를 적용해 그들에게 난민권을 제공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창만은 조선인 유학생들은 조선에는 일이 많고 살기가 어려워 귀국을 않겠다고 했다며 의지가 박약한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에 해롭다고 말하고 도리어 불가리아정부는 그들을 북조선으로 송환하는데 협조하라고 했다고 하였다.

불가리아 대사는 다시 한 번 김창만에게 본국정부의 성명을 밝히고 불가리아에서야 말로 마르크스레닌 정신으로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하고 왜 유학생을 억류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불가리아 대사는 내일 본국 정부로부터 소환을 받고 모래 북조선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본 대사는 4명의 유학생 문제로 불가리아 대사가 본국에 송환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1962년 10월 15일 조선 주재 소련 대사 마스꼽스끼의 일지:


불가리아 대리대사 스또이츠꼬프는 보그다노프 대사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통역도 없이 혼자 있게 되어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다. 대리대사 스또이츠코프는 최근 신원을 알 수 없는 젊은 조선인들이 자기 뒤를 밟고 있으며 그 중 몇 사람은 불가리아에 유학을 했다고 하면서 면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스또이츠꼬프는 흥미 있는 한 불가리아 여성의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이 불가리아 여성은 불가리아에서 유학한 조선인 학생과 결혼했는데 그 남편은 현재 평양에 있는 대학의 전기공학과 학장으로 있으며 그의 형은 인민군 대령이라고 하였다. 불가리아 여성은 침대, 책상과 의자 그리고 라디오 등을 구입했다. 즉 방을 유럽식으로 꾸미는 데는 필수적인 가구다. 그러나 형인 대령은 불가리아 여성의 남편인 학장과 형제의 의를 단절하고 조선인의 고유한 관습과 도덕을 어겼다고 비난하였는데 불가리아 여성이 외국 문학책과 라디오로 다른 나라의 소식을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62년 10월 12일 조선 주재 소련 대사 마스꼽스끼와 중립국 휴전감시 대표단 폴란드대표단장과의 대화록:


폴란드 대표단장 프란찌쉐끄 무루즈 장군과 대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지난 10월 6일과 7일 양일간 미군 휴전선(판문점) 경비대장 윈 장군의 초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 힐레 장군과 또 그의 보좌관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었다고 하였다.

서울을 방문하게 된 동기는 여러 차례 스웨덴과 스위스 중립국 대표들에게 철의 장막을 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 중립국 휴전감시단이 아니고 미국 대표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국가의 중립국 휴전감시단인 스위스와 스웨덴 대표들은 평양에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사회주의국가 휴전 감시단은 서울을 왕래할 수 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

서울 구경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으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가 원하는 모든 곳을 안내하고 아침과 점심은 유럽식으로 저녁은 한식으로 접대를 받았다고 하였다.

서울에 대한 인상으로 폴란드 대표 무루즈는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도시는 깨끗하고 가로수가 있으며 전쟁 후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자동차가 대단히 많고 특히 버스가 많았다. 인민들은 옷을 잘 입고 있었으며 주로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여성은 가끔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으나 청년들은 전부 양복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밤에는 네온이 아름답고 밝았으며 상점에는 소비제품을 포함 옷, 식료품 신발이 아주 많았으나 가격은 묻지 않았다고 했다.

[...]

어느 날 식당에서 한국인 대령이 반 농담으로 미국인 대령에게 말을 걸었다. "제국주의자 미국인이 손님을 잘 모시지 않는군요." 미국인 대령은 농답으로 받아넘겼으나 그 후 더 우리를 잘 대해주었다고 했다. 이때 한국인 대령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장군에게 "보십시오. 이곳에 여러 성분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제국주의자 미국인 대령, 반공주의자 한국인 대령, 그리고 공산주의의 장군과 한 식탁에 앉아 식사하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모든 문제에 대해서 협의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폴란드 무루즈 장군은 대답하기를 당신들과 협의를 할 수 있으나 단 미국인 대령은 제국주의자가 아니고 제국주의자 대표로, 한국인 대령은 반공주의자가 아니라 반공주의자 대표자로 회담하자고 하면서 웃었다고 했다.


박종효 편역, <러시아연방외무성대한정책자료> 2권, 2010, 선인, 236~242쪽.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자료/현대사2015. 7. 22. 23:03

조선신문 <선봉>의 노동기자들에게


1928년 9월 8일 모스크와


귀중한 동무들!


당신들의 친절한 편지에 대하여 나는 즐겁기 그지없으며 정다운 축원에 대하여 당신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당신들의 흥미를 끄는 론문을 내가 수정하는 중인데 속히 소책자로 출판될 것입니다. 그것을 내 당신네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역시 나도 당신네게 요청하는 바는 내게 후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쓰크와에서 내가 잠시 <우리의 성과>를 조직합니다. 이 잡지의 목적은 이러합니다. 독자 대중에게 쏘베트동맹에서 실시되는 전체 문화사업의 원만한 그림을 보여주며 전체 근로자들에게 새 국가 건설사업에서의 그들의 성과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잡지는 과학, 공업, 농업 방면에서의 성취에 대하여 또는 풍습에서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것을 창조하는 그 변화에 대하여 말할 것입니다.

당신네 조선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 무엇을 달성하겠는가, 당신들한테서 새것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하는데 대하여 쓰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네를 흥분시키며 즐겁게 하는 온갖 것에 대하여 항상 쓰십시오.

편지들을 다음 번지로 보내십시오:

모쓰크와, 국립출판사, 엠. 고리끼에게.

당신들에게 나의 열정적 축하를 드립니다.

엠. 고리끼

8. IX. 28


<씨르다리야의 곡조>(1975)의 머리말에 실린 우가이 블라디미르의 글 "시월이 낳은 문학"에서 인용.

김필영, 2004,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사(1937~1991), 62쪽.

Posted by 사용자 Л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