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弔意2018. 12. 1. 09:18

2008년 겨울인가 학교에서 무슨 이벤트를 벌여서 할머니랑 찍은 사진을 보냈더니 저런 편지가 날라왔다. 편지 원본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진을 찍어두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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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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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7. 9. 11. 17:05

역사가라는 직업의 매력은 심오하다고 인정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평범한 수준에서 역사가 작동하는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고상하거나 사실주의적인 시야를 가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사물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 

폴 벤느, 이상길 김현경 옮김,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새물결, 2004), 178쪽. 


영역은 Mina Josephine Moore-Rinvolucri(1902-1991) 박사가 1984년에 했다. 고 무어-린볼루크리 여사는 리버풀, 켄싱턴 출신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했고, 1934년 툴루즈 대학에서 버나드 쇼 연구로 박사학위를, 1936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명예노동훈장 적색장(Medaille de vermeil)을 받았다. 전후에는 리버풀 대학에서 외국어교육학 학위과정을 만드는 과업을 수행했고, 이후에도 계속 연구와 강의를 병행했다. "그녀의 글쓰기에선 언제나 진중한 학문적 태도와 성찰이 배어 나왔지만, 동시에 그녀는 천부적으로 아주 친절하고 너그럽고 매력적이며 익살스러웠다. 그녀의 서평에 또는 그녀의 친구와 동료, 학생을 대할 때, 그들 일부에게는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보였을지라도, 악의적이거나 파괴적인 비판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높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불편한 경험이었다." 

부고는 <Compare> 22권, 1호 (1992)에 제리 보한(Jerry E. Vaughan) 박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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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6. 4. 22. 17:22


1904년, 연해주 태생. 

1929년, 우끄라이나 하리코프(Харьков, 현 하르키우)로 이주. 키에프 포병학교 수학 

1937년, 민족적 이유로 퇴학

~1941년, 오데사 주 노보아르한겔스크 구역에서 수학 교원 근무. 이후 우끄라이나에서 노농적군 징집. 계급 근위하사(Гвардии младший сержант). 제14포병사단 대전차포대. 이후 총예비본부 제1대전차사단 등지에서 근무. 우끄라이나,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해방전 참가. 베를린 함락전 참가. 오스트리아에서 대조국전쟁 일단락. 

1945년 9월, 제1원동전선 25군 참모부 첩보사단 소속으로 대일전("조선해방전") 참가. 


1945~57년, 북조선에서 근무, 평양 제6고중에서 수학 교원 및 선임 교사로 근무. 

1957년, 우즈벡 타슈켄트로 귀환. 

1997년, 노구에도 불구하고 "책과 신문을 열심히 읽으며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깊은 염원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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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6. 4. 11. 19:17




우끄라이나 끼에프 태생. 소련 영웅. 소령 전역. 

대조국전쟁 시기 저격병으로 복무하며 309명의 적 사살. 

쌀국과 영국 방문. 전후 끼에프 대학 복귀하여 졸업. 

이후 역사학자로 소련 해군에서 근무. 


팟쇼 300여 명을 처단한 저격병 출신 선생님과 세미나 하면 학습능률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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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6. 4. 11. 19:14


조선 이름 황호림.

1909년, 연해주 태생
1930년, 레닌그라드로 이주.
1933년, 적군 징집.
1937년, 레닌그라드 전투공병학교 졸업.
1945년 4~6월, 제1벨로루시전선 제1근위탱크군 제8근위기계화군단 제21근위기계화여단 공병지뢰매설 중대 지휘. 계급 대위.
1946~48년, 북조선에서 근무, 소련(우즈베키스탄) 복귀.

1978년, 우크라이나에서 사망. 정확한 날짜와 매장지 확인 불가.


관련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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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5. 11. 26. 07:02

* 동영상.


지식인, 非공산주의자.


한반도 방문 전 이미 한국어를 구사한 최초의 헝가리인. 1953년 최초의 한헝사전인 <웽조사전> 편찬. 1954~1956년, 북한 주재 헝가리 대사관 근무. 1958년, 북한에서 연구. 동영상은 부다페스트 페퇴피 샨도르 중고등학교(김나지움) 도서관이 그의 이름을 따 쇠베니 얼러다르 도서관으로 개칭되면서 만든 것. 6분 쯤 가면 쇠베니의 것으로 보이는 육필 원고가 나온다.


"쇠베니는 비록 공산주의체제와 소련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러시아어 공부는 싫어하지는 말라고 학생들에게 조언하였다. [...] 쇠베니는 푸시킨과 도스토예브스키의 작품의 언어를 소련과 연관시키지 말 것을 학생들에게 당부하였다."


"박사 학위와 관련해 문제는 러시아인 로조사전 편집자가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데 그 역시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오. 북한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논문 심사를 받은 후 박사 학위는 레닌그라드의 소련과학원에서 받게 될 것이오. 나는 여기에서 받고 싶소. [...] 부다페스트에서 박사 학위 때문에 문 앞에서 굽신거리고 싶지는 않소. 북한에서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소. 나는 연구를 하고 싶소" - 부인에게 쓴 편지, 1958년 10월, 평양.


초머 모세, <헝가리 최초의 한국학 학자 북한을 만나다>, 2015, nosv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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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5. 11. 9. 18:39


사진(동아일보, 1991년 5월 6일)


잊지말아야 할 사람,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朴昌洙).

1991년 5월 5일께 병원 치료 중 의문사. 민주당은 사건 진상조사단(단장 노무현)을 꾸려 현지에 파견하였다.7일, 노태우 정권은 박씨에 대한 강제부검 실시를 위해 물대포, 최루탄, 쇠망치 등을 이용해 영안실 진입, 유족 등을 강제연행하고 주검을 탈취했다.
7일, 노태우 정권은 박씨에 대한 강제부검 실시를 위해 물대포, 최루탄, 쇠망치 등을 이용해 영안실 진입, 유족 등을 강제연행하고 주검을 탈취했다.
10일, 박씨의 죽음에 국가안전기획부가 관련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안기부는 그에게 한진중공업노조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관련 회의에서 탈퇴하라는 압력과 회유를 가했다.
11일, 검찰은 주검을 유족에게 넘겨주었다. 의문제기와 항의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자연스레 연행과 탄압도 계속되었다.
28일 <한겨레>에는 "목숨 빼앗지 않는 정권을 바란다"라는 제호의 사설이 올라왔다. "강경대, 박승희, 김영균, 천세용, 박창수, 김기설, 윤용하, 김철수, 이정순, 정상순, 권창수, 김귀정. 91년 4월 26일부터 5월 25일까지 꼭 한 달 동안에 권력의 제도적 폭력에 사상 당한 사람들."
6월 6일, 검찰은 "수사 끝"을 선언하였다.
30일, 박씨의 장례식에 4,500여 명이 참석하였다.
7월 1일, 경남 양산군 하북면 솔밭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2003년 10월 17일,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지회장이 129일간 고공 농성을 벌이다 85호 크레인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30일, 곽재규 조합원이 도크 아래로 몸을 던졌다.
2011년 6~7월, 희망버스가 부산을 찾았다.
2012년 12월 21일, 최강서 조직차장이 손배가압류에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2014년, 한진중공업의 정규직 비율은 31.34%이다. (2014년 고용형태공시)

박점규, 2015, <노동여지도>,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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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5. 11. 6. 01:51

1948년.


 평양 사동비행장으로 야유회를 나간 협주단원 가운데 여자 무용수가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에게 강간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모든 사람들은 쉬쉬하며 모른 체했다.

 그때, 이청송은 권총을 빼어들고 분노했다.

"이제야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또 무슨 꼬라지임메. 놈들이 말하길 왜놈들이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했지만 이젠 노예적인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탕탕 쳤지 않음메. 또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고 자립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만들어놓았다는 포고문을 발표해놓고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임메까. 나는 참을 수 없다카이. 미제국주의자들과 소련군은 즉각 이 땅에서 물러가야 한단 말임메다!"

 권총을 손에 들고 발을 쾅쾅 구르던 이청송이 사동비행장으로 달려갔다. 누구도 그를 말리거나 붙잡을 수 없었다.


최태환·박혜강, 1989, 《젊은 혁명가의 초상》, 공동체, 54쪽.



재북소련임시대리대사 에쓰. 뻬. 라자레프(Лазарев С.П.)의 9월 9일자 일지에 따르면, "대담에서 사법부 부상 김택영은 남조선에서 공화국으로 송환된 전쟁포로들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겼던 2명의 소련계 조선인 박사현과 리천송이 귀환하였다고 전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북한관계사료집 73. 과천, 2013. 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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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5. 11. 1. 15:56



​Some point before he was el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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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弔意2015. 10. 13. 19:32

김호철(金浩哲) - 흑인인권운동에 몸소 가담한 조선인 공산주의자


본적.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리 205번지
1917~1920, 서호 사립동진학교
1920~1925, 평양 숭실중학 졸업
1925~1927, 숭실전문학교 문과 수료
1927~1932, 북미 시카고시 루이스대학 영문과 중퇴
미국공산당 지도 아래 미국 혁명작가동맹, 반제동맹 등 가입, 시카고 재류 조선인과 함께 '사회과학연구회' 조직, 이후 스캇보로 사건에 연루돼 체포, 옥살이, 추방
1932~1933,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조선으로 귀환
1933~1938, 징역
1945, 해방 이후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교육과장
1947, 함흥시 당부간부 야간학교

1948~1949, 북한 외무성 서구(西歐)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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