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5. 1. 6. 17:55

필자: Terry Eagleton

일시: 20101217(금요일)

출처: http://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0/dec/17/death-universities-malaise-tuition-fees

 

제목: 대학의 죽음(The death of universities)

부제: 학계는 현상유지를 위한 종복이 되었다. 그 문제는 수업료 문제보다 훨씬 심원하다.

 

우리 대학에서 인문학은 곧 사라질 것인가? 이러한 문제제기는 사실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는 술집에서 알코올이 곧 사라질지, 또는 할리우드에서 자기중심주의가 곧 사라질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알코올 없는 술집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 없는 대학도 존재할 수 없다. 만일 역사와 철학 등이 학계에서 사라진다면, 그 빈자리를 기술훈련소나 기업연구재단이 차지할 터이다. 그러나 이는 고전적인 의미의 대학은 결코 아니며, 그것을 ‘대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만이다.

 

인문학이 다른 학제들로부터 고립됐을 때도, 대학은 그 이름값을 충분히 할 수 없다. 인문학과를 평가 절하하는 가장 빠른 길은 - 모두 폐기하는 것 외에 기분 좋은 상여금 정도로 존재를 내리깎는 것이다. 사상이나 가치는 나약한 이들의 것이고, 진정한 사람은 법이나 공학을 공부한다는 식으로. 어느 대학이든 대학으로서 제값을 하려면 중심에 인문학이 자리해야 한다. 예술과 문학을 동반한 역사와 철학 공부는 비단 변호사와 공학자뿐만 아니라 교양학부에서 학습하는 이들의 것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인문학이 위와 같이 절체절명의 위협에 처해있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인들이 인문학을 고등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이 18세기의 변화 가운데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 이른바 인륜(humane disciplines)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했다. 그것의 목적은 속물적인 사회질서가 지극히도 신경 쓰지 않은 가치들을 기르고 지키는 것이었다. 대개 현대 인문학과 산업자본주의는 애초부터 결부됐다. 포위당한 일련의 가치와 사상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대학이라는 기관이 일상생활과는 거리를 두고 세워져야 했다. 바로 이 거리감은 인문학(humane study)이 애처롭게도 효과가 없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인문학은 관습적 지혜를 비평할 수도 있었다.

 

영국의 1960년대 말과 지난 몇 주가 그랬던 것처럼, 비평은 이따금씩 가두시위에 나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대면시킬 터이다.

 

오늘날 우리는 비평의 중심으로서의 대학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 마가렛 대처 이래로 학계는 정의, 전통, 상상, 안녕, 또는 자유로운 사상이나 대안적 미래의 이름으로 현상을 지양하려고하기보다는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단순히 인문학에 대한 국가 지원을 늘리는 방식으로는 상황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사람의 가치와 인륜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이, 단순히 렘브란트 또는 랭보를 공부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상황을 바꿀 것이다.

 

결국 인문학은 자신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지를 강조함으로써만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문학이 열악한 대우, 이를테면 인문학은 대학에 두기에 비용이 적게 든다는 사실에 저항하기보다는, 학계의 모든 사안에 대하여 스스로의 필수적인 역할을 고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는 실제로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재정적으로 말해보자면, 불가능하다. 정부가 인문학을 늘리기보다는 줄이려고 하니 말이다.

 

셸리[19세기 초 영국 시인]를 가르치는데 대한 과도한 투자가 국제적인 경쟁에서 뒤로 밀려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을까?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질문 없이는 대학도 없고, 이는 대학과 선진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같이 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수업료 문제보다 훨씬 더 심원하다.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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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년의 노래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48142#1731149

    인문학에 대한 불신은 결국 '성찰의 부재'와 맞닿아있지 않나 합니다.

    2015.02.27 05:26 [ ADDR : EDIT/ DEL : REPLY ]
    • 안녕하세요. 써주신 주소의 모든 (댓)글을 읽진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주제이고요. 이글턴의 글은 모종의 계기로 번역을 하게 된 것이지만, 제 자신은 이 글에 대해 어떤 특정한 입장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 든 생각이기도 한데, '인문학'이란 무엇일까요? 엄청나게 많은 논점과 주장을 담고 있는 저 단어는 과연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성찰의 부재'와 맞닿아있지 않다는 데는 일단 동의합니다. 그런데 누가 성찰을 해야 할까요? 누가? 예컨대 저는 항상 성찰을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모르겠군요..

      한편으로, 돈의 문제(자본의 문제?)가, 그 싸움의 계선이 더욱 분명해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뉴스 따위를 보면, '인문학(과)'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공세(통폐합과 그에 따른 인센티브 등)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묘사되는데, 정작 반대편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주장할 뿐 이렇다할 대응을 못하고 있지요.

      말씀해 주신대로 성찰, 해야지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의 기능이 애초에 무엇이었으며, 지금은 무엇으로 바뀌었는지도 궁금하고, 그걸 안다한들 어떤 식으로 어떻게 맞대응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전 무지합니다. 결론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2015.02.27 20:26 신고 [ ADDR : EDIT/ DEL ]
  2. 소년의 노래

    '인문학이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할 깜냥은 못 됩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링크밖에...

    http://wallflower.egloos.com/1471671

    중요한 건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2015.02.27 20:55 [ ADDR : EDIT/ DEL : REPLY ]
    • 링크 고맙습니다. 소개해주신 블로그의 마지막 문단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좀 모호하지만 그럼에도 인용할만 하군요. 극단적인 양극화를 암시하는 것도 같고.

      "위기는 이처럼 부르주아 주체의 위기이자 동시에 이를 지지했던 중간계급 이데올로기의 위기이다."

      말씀해 주신대로라면, '인문학'을 정의내리지 않고 얘기하는 것이라서 쓰기 조금 두렵지만, 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데, 저는 조금 다르게 질문해보고자 합니다.

      '인문학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또 그런 사회는 이 시점에 남한에, 또는 지구 위의 어떤 곳에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러한 기획이 함축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서로간에 긴밀함이 떨어지는 질문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세 번째 질문이 가장 궁금합니다.

      저는 차라리 '인문학'의 자리에 노동자나 인간을 넣어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중요한 건 인문학이나 인문학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보다는 노동자가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닐지요? 물론 '노동자가 존중받는다'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구체화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오늘날 남한의 노동현실만 보더라도 제가 제시한 명제는 이내 필요성을 얻을 수 있겠지요.

      '인문학' 얘기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은데,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현실과 그 안에서 사람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인문학이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에 써본 것입니다.

      2015.02.27 21:09 신고 [ ADDR : EDIT/ DEL ]
  3. 소년의 노래

    훌륭하십니다. 아마 링크한 글과 엇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인문학으로 향하길 바라지 말고 인문학이 사람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겠죠.



    2015.02.27 22:35 [ ADDR : EDIT/ DEL : REPLY ]
    • 과찬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야기 나누길 바라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마저 잘 보내세요.

      2015.02.28 00:45 신고 [ ADDR : EDIT/ DEL ]

번역2014. 11. 4. 19:38

A link to the original text is here.

또 다른 링크: http://www.redian.org/archive/80140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43, No. 1, November 3, 2014.

 

홍콩의 세 가지 지역의식[각주:1]

 

훙호펑(孔誥烽, 존스홉킨스대학)

 

첸관중(陳冠中), 중국의 천하주의와 홍콩(中國天朝主義與香港), 홍콩: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2012.

첸윈(陳雲), 도시국가 홍콩에 대하여(香港城邦論), 홍콩: 인리치(Enrich) 출판사, 2011.

챵시공(强世功), 중국의 홍콩: 문화와 정치의 관점(中國香港文化與政治的視野), 홍콩: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2008.

 

최근 홍콩은 혼란스러웠다. 2003년 시위에는 50여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여 23조 반()전복 활동법의 입법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각주:2] 2012년에는 13만 명이 시위를 벌임과 동시에 학생들이 총파업으로 위협함으로써 베이징은 홍콩의 학교에 대한 국가교육과정 시행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시위는베이징이 중국 본토(이하 본토’)에서 되풀이하듯 홍콩의 이의제기를 손쉽게 엄단(嚴斷)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저항의 승리는 홍콩의 반대세력과 베이징이 근본문제에 관해 기꺼이 타협하도록 만들었다기보다, 오히려 양측을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2012년 중국정부는 전통적으로 베이징에 협력하는 일부 홍콩 토호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경파인 렁춘잉(梁振英, 1954~)을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홍콩의 상대적 자율성을 옹호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중국정부가 이를 다루기 위해 더욱 가혹한 수단을 쓸 준비를 마쳤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연례적인 71[홍콩 반환일-역자 주] 시위와 201211일 시위에서 영국 깃발 또는 영국령 홍콩 깃발이 등장했고 이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깃발에는 본토의 관광객들을 공격하는 표어가 실렸고, 때로는 중국인 식민주의자들이라는 문구도 있었다.

 

베이징과 친()정부 성향의 관측자 대다수는 강한 지역적 정체성, 심지어는 친독립적 성향이 대두했다고 느꼈다. 베이징의 통치를 분명히 거부하는 정치적 선언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의자와 반중(反中) 청년들 또한 직접적이고 전투적인 행동을 주도하였다. 일례로, 지역의 일상용품과 그 중에서도 유아용 유동식(流動食)의 공급을 지켜내기 위해 본토 관광객의 밀반출을 방해하는 시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에드워드 톰슨(E. P. Thompson)의 저명한 논문인 “18세기 영국 군중의 도덕경제에 나타난 근대초기 유럽의 식량 폭동을 떠올리게 한다.[각주:3] 지역주의적 시위는 또한 홍콩정부를 압박하여 공공병원체계에 부담을 주는 본토발() 출산 여행을 제한하게 하였다.

 

최근의 여론 조사 결과는 홍콩 거주민,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급증한 반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음을 보여주었다.[각주:4] 홍콩 지역의식 급격한 분출은 베이징을 거슬리게 하지만은 않았다. 이러한 지역의식은 또한 1980년대 이래 홍콩을 중국식 자유화와 민주화의 화신(化身)으로 보는 담론, 즉 홍콩의 반대운동을 역사적으로 지배했던 중국식 민족주의담론에서도 벗어나는 중이다.

 

챵시공(强世功첸관중(陳冠中첸윈(陳雲)은 최근 저서에서 각각 베이징, 중국의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 홍콩의 지역 젊은이의 관점에 입각하여 홍콩의 지역의식 문제를 살폈다. 챵시공의 책은 제국의 중심부인 베이징이 중국인 엘리트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국가주의 및 민족주의의 핵심으로서의 홍콩에 대하여 점차 발언을 늘려가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줬다. 첸관중과 첸윈의 책은 챵시공의 명제에 명백히 이의를 제기하며 홍콩에 대한 베이징의 신제국주의적 자세를 강하게 반박하였다. 첸관중의 작품이 본토의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견지에서 쓰였다면, 첸윈의 대답은 홍콩 자체의 관점을 천착하며 밀물처럼 거세지는 홍콩의 지역주의적 이념과 행동을 반영하였다.

 

제국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1990년대 미국의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중국의 신좌파는 최근 수년간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사상,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및 나찌의 법 이론가 칼 슈미트(Carl Schmitt), 유교 등 서로 명백히 상충되는 지적 계보의 결합을 옹호하는 기이한 지적 대형(隊形)을 갖추게 됐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지식인 연합체가 점점 더 억압적으로 바뀌어가는 당국(黨國)체제와 공모하거나 공공연히 협력했다고 비판하였다.[각주:5]

 

챵시공은 바로 이 연합체에 속한 지식인 중 하나이다. 그는 신()마오주의자로,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을 맹렬히 비판함과 동시에 문혁 기간 수행된 ()민주주의의 실험을 그르게 비난하고, 민주주의에 관한 중국 고유의 담론을 박탈하며 부르주아민주주의를 홍보하는 서구 앞에서 벙어리가 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조바심을 쳤다. (챵시공, 2008: 187~8) 동시에 그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실천 및 주권의 절대적 결정이며, 그것들은 또한 법리적 권위와 입법적 권위에 앞선다고 본 칼 슈미트의 법철학을 소개한 핵심 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챵시공은 2004~2007년의 기간 동안 홍콩 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사실상의 본부인 중앙인민정부 주홍콩연락판공실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홍콩에서의 근무 중일 때와 그 이후에도 홍콩 문제 및 부흥하는 유교제국 중국에 대하여 홍콩이 가지는 중요성에 관해 논한 일련의 글을 베이징의 월간 잡지 독서(讀書)에 냈다. 앞서의 책 중국의 홍콩: 문화와 정치의 관점은 그의 글들을 모아 펴낸 것이다. 그의 견해는 신좌파 가운데서 그렇게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북경대 법학대학 부학장(Associate Dean)이면서 동시에 주홍콩연락판공실에서의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의 중심부인 당과 긴밀한 관련 속에서 홍콩 문제에 관해 세간의 이목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챵시공은 일국양제(一國兩制)” 정책이 1997년 홍콩의 반환을 가능케 한 뛰어난 방식이었으나, 막상 이 정책은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 문제 중 가장 중요한 사안, 즉 홍콩 사람의 정체성 문제를 다룰 순 없다고 주장하였다. 챵시공은 홍콩 사람의 정체성 문제에 관해서는 법리적 수단보다는 정치적 수단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며, 베이징은 홍콩 거주민을 진정한 중국의 애국자로 변모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일국양제라는 틀 너머를 사고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렇지 않는 한, 홍콩에 대한 중국의 주권은 공식적일뿐 결코 실질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챵시공은 홍콩 사람 대다수가 1950년대 이래 사회주의 모국을 받아들였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심지어는 영국에 협력한 홍콩계 중국인들마저 본질적으로는 애국적이었는데, 이는 몇 세대 뒤로 거슬러 올라가는 본토와의 가족적 유대 때문이다. (챵시공, 2008: 142~45) 그렇다면 중요한 과업은 바로 홍콩계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애국주의를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식민통치 기간 영국인들이 기민히 움직여 홍콩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얻게됐는데, 챵시공은 베이징은 이러한 영국의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챵시공이 마음과 정신을 얻다세뇌영심(洗腦迎心)”, 즉 문면 그대로 뇌를 씻고 마음을 얻는다로 옮기면서 영어 원문의 본뜻을 탈각시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챵시공, 2008: 31) 챵시공의 명제는 모든 홍콩계 중국인들이 본질적으로 즉자적 애국자이면서 베이징의 애국적 전위대를 통하여 대자적 애국자로 변모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주장에 버금간다. 이 명제는 홍콩에서 베이징의 이념 공작이 지역적 정체성을 극복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제안한다. 돌이켜보면, 챵시공의 진단은 그의 홍콩 부임 이후 나온 베이징의 2012년 안건, 즉 홍콩의 모든 학교에 강제적인 국가교육과정을 도입하려는 시도와 잘 맞아 떨어진다.

 

챵시공은 일국양제방식은 그 기원이 1951년 티베트를 두고 베이징과 달라이 라마 정부 사이에 체결된 십칠조협의(十七條協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는 홍콩의 반환을 예측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제국 중국의 부흥의 전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챵시공, 2008: 123~58)[각주:6] 챵시공에 따르면, 중화제국은 청조(淸朝, 1644~1911) 때 절정에 도달했고, 유교문명의 진원지이자 주변부를 끊임없이 핵심부로 통합하고 변모시키는데 기반을 두었다. 청 황제는 새로이 통합한 지역의 엘리트에게 독특한 관습과 지도권을 보장하고 지역적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물론 그것은 영구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제국의 중심부로 통합되고 문화적으로 동화되면서 지역적 자율성을 폐기할 터였다. 그 후 제국은 새로운 지역의 합병에 나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의 홍콩 통합과 함께 장래에 있을 홍콩의 동화와 종국에 가서 타이완의 통합 및 동화는 과거 중화제국의 팽창주의와 비슷한 21세기의 팽창주의적 감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챵시공이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정책은 단지 전술적이고 과도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홍콩을 기다리는 것은 1959년 이래 티베트가 처했던 운명, 즉 베이징이 주도하는 무력에 의한 흡수와 직접적이고 엄격한 통제라는 것이다.

 

챵시공은 책 전반에 걸쳐 제국이라는 용어에 긍정적인 함축을 담아 쓰길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되살아난 중화제국은 영국제국의 통치술에서 배워야 한다고 규정하기까지 하였다. 챵시공이 홍콩을 논하면서 마오쩌둥사상, 유사 파시즘, 제국주의를 한꺼번에 수용하는 것은 결코 이례적이지 않다. 이는 오히려 홍콩에 대하여 발언을 늘려가는 중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첸관중의 중국의 천하주의와 홍콩은 홍콩을 바라보는 챵시공의 견해에 대한 명백한 응답이다. 이 책에서 첸관중은 홍콩의 역사 및 홍콩·중국 간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책의 반절을 할애하여 챵시공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첸관중은 챵시공의 견해가 수년간 중국인 관료들 사이에서 오갔으나 결코 공개적으로 정식화되지는 않았다고 올바르게 관측하였다. 그는 그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챵시공의 시도를 환영했는데, 이는 중국의 대()홍콩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따져 물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첸관중은 홍콩 베이비 붐(baby boomer) 세대의 상징적인 문화비평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상하이 출생으로 홍콩에서 교육받았으며, 1976년에는 홍콩의 문화적 사안을 다루는 전위적인 잡지 호외(好外)를 창간하였다. 그는 10년 전에 홍콩에서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곳에서 중국 내의 자유주의나 정치개혁에 관한 논쟁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홍콩의 주류 온건 민주주의자들의 노선과 견해를 같이 하고, 베이징이 설정한 한계 내에서 점진적인 민주적 개혁을 옹호한다. 챵시공에 대한 첸관중의 비판은 홍콩의 관점과 중국 자유주의의 관점을 고루 반영한다. 그는 챵시공이 문혁을 대민주주의의 사례로 끌어안고, 슈미트적인 정치관을 견지하며, 중화제국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충격적이라고 파악하는데, 이는 챵시공을 비롯하여 신좌파, 또는 첸관중의 용어를 빌려 우파 마오주의자들가운데 챵시공의 지적 동반자들이 파시스트적인 경향을 몸소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관중, 2012: 118~22) 첸관중은 챵시공이 홍콩의 역사를 오독하고 왜곡하는 모습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는 1950~60년대 홍콩계 중국인들이 중국을 따스한 마음으로 맞았다는 챵시공의 묘사를 순전한 날조라고 파악하였다. 사실 전후(戰後) 홍콩 인구의 다수를 구성한 본토의 중국인 이민자들은 공산주의 통치를 피해 도망 온 사람들이었다. 홍콩 사람들은 대약진운동의 기근과 문혁 기간 동안 동포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했고, 따라서 그들은 결코 자연스레 중국을 애호할 수 없었다. (첸관중, 2012: 7~10; 58~61)

 

첸관중은 홍콩이 중국의 문화·정치적 발전에 대하여 단지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참여자라고 지적하였다. 첸관중은 챵시공을 비판함과 동시에,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이뤄진 중국의 자유주의적이고 입헌적인 개혁에 대한 홍콩의 기여를 개괄하였다. 19세기말 홍콩의 영향력 있는 신문 순환일보(循環日報, Universal Circulating Herald)를 창간한 지식인 왕타오(王韜, 1828~1897)는 홍콩과 본토의 문인들에게 개혁주의적인 생각을 고취시켰고,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가 이끈 19세기말의 입헌군주제적 개혁운동을 직접적으로 도왔다. 한편 캉유웨이는 일찍이 홍콩을 여행했는데, 그는 그곳의 영국 식민당국을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통치체라고 본 바 있다. 1898년 개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홍콩은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피난처가 되었다. 중화민국을 세운 쑨원(孫文, 1866~1925) 박사의 부친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혁명가들이 홍콩에서 교육받았고, 유럽의 혁명적인 이론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다. (첸관중, 2012: 14~21)

 

바로 다음 세대의 중공 지도부는 홍콩을 본토로부터 분리했을 때의 효용을 인지하였다. 중공은 일찍이 1946년부터 홍콩을 돌려받지 않는다는 정책을 채택했고, 미래의 사회주의 중국에게 홍콩이 세계로의 창구 및 영국과의 외교 수단으로써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첸관중, 2012: 42~46) 중공은 심지어 마오 시기 동안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 식량과 식수를 조달하는 등 홍콩의 안정과 생존을 유지하는데 조력하였다. 첸관중은 그러한 정책을 통해 영국이 중국으로 기울 것이고, 따라서 냉전 기간 중국을 포위하고 있던 영·미 동맹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마오의 주장을 언급하였다. 홍콩은 또한 중국정부가 외화(外貨)와 세계의 정보를 흡수하는 통로로써 기능하였다. 중공에 대한 홍콩 사람의 혐오감을 제외하더라도, 쟝시공은 마오 시대의 중국에 홍콩이 매우 중요했다는 냉혹한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인식하길 거부한 셈이었다. (첸관중, 2012: 42~61)

 

덩샤오핑이 홍콩 문제를 풀기 위해 일국양제모형을 택한 것은 주권 이양 문제를 뛰어넘어 중국의 발전이라는 틀 안에서 홍콩의 특수한 역할을 연장하려는 시도였다.

 

첸관중은 그러한 방식이 의도치 않게 중국의 정치적 개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홍콩반환협정(中英聯合聲明)과 기본법(香港基本法)에 쓰여 있는 일국양제방식은 중국 영토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진정한 입헌주의 및 법치의 사례였다. 따라서 홍콩의 실험이 내포하고 있는 입헌주의적인 속뜻은 지켜져야 하며, “일국양제방식의 입헌주의적인 성격을 실용적이며 임시적이라고 폄하하는 챵시공의 신제국주의적인 이론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첸관중에 따르면, 홍콩의 자율성을 지키는 일은 중국 내의 자유주의자와 보수적 국가주의자 사이의 거대한 싸움에서 하나의 전장(戰場)이나 다름없다.

 

첸관중은 1997년 이후 중국에 대한 홍콩의 경제적 가치에 관해서 이 도시가 중국 내 다른 도시들에 비하여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베이징의 주류적인 설명에 동조하였다. 첸관중은 홍콩이 중국 내 다른 지역과의 통합을 심화해야 하고, 경제적 소외를 피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5개년계획에 포함돼야 한다는 관변의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첸관중, 2012: 70~77) 첸관중은 중앙정부가 심지어 본토의 후진적인 도시와 성()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쉽게 폐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홍콩이 예전과 같은 경제적 특수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은 여전히 일국양제모형을 가볍게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홍콩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홍콩의 주권에 대한 베이징의 철의 결단(決斷)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홍콩 사람들은 베이징이 설정한 제한된 공간을 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의 권리와 자율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첸관중, 2012: 70~82)

 

국가주의자들의 맹공에 맞서 입헌주의를 자유주의적으로 받아들여 지키는 식으로 일국양제모형을 방어하는 첸관중의 논변에 중국 내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상당히 공명(共鳴)할 법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 일부는 명백한 모순이고, 현실이라는 시험 앞에서 유효하지 않다. 첸관중은 일국양제를 새로운 중화제국이 확장됐을 때 즉각 폐기될 우발계획 정도라고 폄하하는 챵시공의 입장이 베이징에서 세를 얻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지난 몇 년간 홍콩의 선거·매체·학계에 베이징이 직접적으로 간여한 결과, 베이징이 애초에 홍콩에 설정했던 자율성의 경계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홍콩 사람들은 중국의 영향 하에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공간에 얌전히 머무른 채로 계속 그들의 자율성을 지키고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 공간은 줄어들고 있지만, 우리는 그러한 경계가 첸관중이 경고하듯 철갑(鐵甲)처럼 두텁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홍콩 사람들은 분명히 기본법이라는 틀에 반항하고 있지만, 베이징은 아직 홍콩에 대한 명시적 억압을 꺼려하고 있다. 일례로, 홍콩이 기본법 하의 헌법상 시행해야만 했던 23조 반전복 활동법의 경우를 들 수 있다. 2003년의 군중시위 이후 베이징은 홍콩정부가 23조의 입법을 무기한으로 보류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한 저항은 베이징이 설정한 엄격한 경계를 위반하였는가? 그렇다면 첸관중은 그가 경고한 베이징의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가 그러한 위반을 용인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의 책에는 23조 반전복 활동법에 관한 논의뿐만 아니라 1989년 중국의 민주화운동에 홍콩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는 빠져있다. 또 다른 사례로, 2012년 베이징의 국가교육과정 시행에 대하여 첸관중의 책이 출간된 직후 발생한 성공적인 대중저항을 들 수 있겠다. 홍콩에서의 시위가 견인력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주류 민주주의자들은 홍콩 사람들에게 국가교육과정을 반대하지 말고 차라리 이를 받아들인 후 개선하는데 집중하라는 식으로 첸관중의 감상만을 되풀이하였다.

 

베이징이 계속 23조의 입법의 무기한 유예를 용인하는 사실은 홍콩이 보통의 중국 도시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는 첸관중의 주장과는 달리, 중공의 통치 하에서 홍콩의 자율성 및 일국양제가 여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상 중국이 인민폐(人民幣, )의 국제화를 통해 미국 달러에의 의존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홍콩의 독특한 역할은 중국의 금융 분야도 인정하고 있다. 1950년대 미국이 달러를 국제화하고 지배적인 화폐로 만들기 위해 런던의 유로달러(Eurodollar)를 필요로 한 것처럼, 중국은 점차 강해지고는 있지만 아직 태환성(兌換性)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 인민폐를 국제화하기 위해서 역외시장을 필요로 할 터이다. 은퇴한 금융관료와 중국의 주요기업 및 국제적인 금융회사의 분석가들로 구성된 중국의 두뇌집단인 금융사십인논단(金融四十人論壇, China Finance 40 Forum)은 최근 발행한 보고서에서, 홍콩은 법치, 정보의 자유, 중국으로부터의 입헌적 분리 등이 보장될 때만이 대규모 역외 인민폐 시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각주:7]

 

실증적인 증거들은 홍콩이 보통의 중국 도시로 바뀌었고, 상하이나 다른 도시들에 밀린다는 얘기가 대부분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담론은 정치적 동기가 개입된 수사이거나, 또는 베이징이 국영기업과 인민폐의 국제화를 촉진시키는 역외시장의 중심으로서 홍콩을 이용하려는 필요에 지나지 않는다.[각주:8] 쟝시공의 제국주의담론에 대한 첸관중의 비평은 탁월하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권 행사에 맞서서 홍콩 사람들에게 그가 제안한 저항의 방식은 쟝시공의 수사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홍콩 사람의 입장에서 홍콩 바라보기

 

첸관중의 책이 중국의 입헌주의적인 개혁에 관해 홍콩의 자율성이 갖는 효용을 강조하는 동시에 쟝시공의 담론을 비판했다면, 첸윈의 도시국가 홍콩에 대하여는 홍콩이 홍콩 사람에게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쟝시공에게 대답하였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열띤 공개토론을 촉발시켰고, 광범한 인기를 누렸다. 이 책은 라디오텔레비전홍콩(香港電台網站)이 주최한 홍콩 서적박람회에서 2011년 올해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됐고, 같은 해 말 출간된 이래 모든 주요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재됐다. 저자 첸윈(본명은 첸윈근陳雲根)은 독일의 괴팅겐대학에서 민족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1997~2007년 동안 홍콩특별행정구정부의 문화·예술·민사 관련 선임 고문을 맡았으며, 도시재개발 열풍이 불러온 지역공동체와 역사적 건축물의 파괴에 저항하는 선도적인 비판적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첸윈이라는 필명을 쓰는 그는 여러 편의 신문 기고를 통해 홍콩과 중국의 부동산 토호 및 베이징의 홍콩 개입에 전투적으로 저항하는 젊은 급진주의자들을 열성적으로 지지하였다.

 

첸윈의 견해에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홍콩이 중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보다 더욱 중국이 홍콩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이러한 사실이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사실이라는 점이다. 식민지기에는 필수적인 식량 때문에, 탈식민기에는 자본과 고객 때문에 홍콩이 중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했다는 식의 이해는 베이징의 홍콩 사람들의 자신감을 파괴하고자 선전으로 보인다. 식민지 홍콩은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봉쇄 속에서 중국이 외화를 흡수하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였다. 홍콩이 식수를 공급받는 대가로 중국에 지불한 금액은 싱가포르가 자국의 식수 공급을 책임지는 기술이기도 한 담수화(淡水化)의 비용보다 훨씬 더 비쌌다. 시장경제로의 이행기와 경제의 국제화 기간을 통틀어 중국이 홍콩의 투자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현재, 중국에 대한 외국의 모든 직접투자유입 중에 홍콩의 투자비율은 놀랍게도 64%나 된다. (첸윈, 2011: 112~127; 135~140)

 

1997년 이전까지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나, 홍콩정부는 지역의 영국인·중국인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결탁하여 런던의 영향에서 벗어나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고, 사실상 도시국가의 지위를 유지하였다.[각주:9] 첸윈은 1997~2003년의 기간 동안 베이징이 홍콩의 도시국가적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과도한 간섭을 참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은 23조의 입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홍콩전략을 급격히 바꾸었다. 아직까지 베이징은 전면적인 단속을 실시할 순 없으나, 경제회복 및 홍콩과 중국의 사회경제적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도시국가로서의 홍콩의 경계를 침식하기 시작하였다. (첸윈, 2011: 112~127; 145~63)

 

이 계획의 핵심 정책 중 하나는 바로 본토발 홍콩 관광객을 대규모로 허용하는 것이다. 홍콩을 찾은 본토 관광객들의 숫자는 크게 증가했는데, 2012년 현재 홍콩을 찾는 연간 본토 관광객의 숫자는 35백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약 7백만 명에 달하는 전체 홍콩 인구의 다섯 배에 이르는 규모이다. 홍콩정부는 중국정부가 발행한 홍콩 여행증을 소지한 본토 관광객을 거부하거나 규제할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본토 관광객이 급작스럽게 증가하자 홍콩 거주민과 본토인 사이의 갈등과 긴장도 증가하였다. 홍콩의 사치품점이나 일상용품점이 모두, 본토에서는 살 수 없거나 또는 홍콩보다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구입(수입관세 때문에)해야 하는 물품들에 대하여 더욱 많은 돈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는 본토 관광객 소비자를 우선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8년 본토에서 오염된 우유와 관련된 추문(醜聞)이 돈 후에, 중국으로의 조제유(調製乳) 밀반출은 본토 방문객 대다수의 부업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홍콩의 몇몇 구역에서는 식료품과 의약품이 동나기도 하였다. 홍콩 사람과 본토인을 구분하는 사회적 관습의 차이(군데군데 일어나지만 이미 잘 알려진 새치기라든가 공공장소에서 용변 보기 등)는 논쟁의 주제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지역의 중공 산하 단체들 또한 본토의 이주민들 - 이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일일 150명 수준으로 편도 사증(査證)”을 편무적으로 발급 받으며(공식적으로는 가족의 재회라는 목적으로), 홍콩정부의 사전 심사를 거치지 않는다 - 을 충성스러운 유권자 집단으로 조직하는 노력을 확대하였다. 1997~2012년 사이에 홍콩으로 이주한 새로운 본토 출신 이민자들은 전체 홍콩 인구의 약 10%를 구성하였다. 친정부 성향 문회보(文滙報)의 편집자였던 언론인 청샹(程翔, 1949~)은 중공이 그러한 이주 기획을 통해 홍콩사회의 각계각층에 요원을 보냈으며, 남아있는 이주 한도는 종종 부패한 본토 관료들에게 판매된다고 쓴 바 있다.[각주:10] 홍콩 야권의 오랜 지도자 마틴 리(李柱銘, 1938~)는 그러한 이주 정책이 홍콩에서 자랐고, 홍콩의 핵심가치를 체화한 홍콩의 원주민을 소수로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홍콩을 티베트화 할 것이라고 보았다.[각주:11] 2005~2012년의 기간 동안 홍콩의 행정장관을 역임한 도널드 창(曾蔭權, 1944~)과 그의 두뇌집단은 홍콩이 인구의 수혈을 필요로 하며, 지역민을 본토의 이주민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제안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중공(홍콩 내에 법적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이 표를 매수하고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선거 전략을 통해 우호적인 후보에 대하여 새로운 이주민들의 표를 꽤나 성공적으로 확보했다는 사실 또한 널리 보도된 바 있다.

 

첸윈은 본토의 관광객 및 이주민들의 대거 유입이 홍콩에 있는 기존의 제도나 사회적 관습에 심대한 위협을 제기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홍콩정부가 다른 모든 국가 출신 이민자에게 하듯이, 그리고 세계의 모든 정부가 그렇게 하듯이 본토발 이주민을 심사할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본토의 관광객 숫자가 반드시 축소돼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낙심천만하게도 홍콩의 반대운동은 이러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본토의 관광객이나 본토발 이주민을 심사할 수 없는 홍콩의 권한부족에 대한 불만을 외국인 공포증이라고 낙인찍었다. 심사권한이 없는 홍콩의 상황은 본토 출신 정착민들로 구성된 식민지와 흡사한데도 말이다. (첸윈, 2011: 150-63)

 

친웬은 홍콩의 반대파가 홍콩과 중국 간의 경계 수호를 불편해하는 이유로 그들의 중국식 민족주의이념을 꼽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홍콩의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중국을 꿈꿨다. 그들에게 홍콩의 민주화운동은 중국 내의 민주화운동에 부수적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콩의 반대파는 홍콩을 식민화하려는 베이징의 기획을 의도치 않게 지지하게 된다. (첸윈, 2011: 175-79; 51-54) 첸윈은 그의 책에서, 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홍콩보다 중국을 우선시하는 풍조에 대한 답으로 아주 논쟁적인 의견, 즉 중국 내의 민주화는 절망적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민주화는 오로지 파시즘을 초래할 것이며 홍콩을 해친다는 것이다. (첸윈, 2011: 36-56)

 

중국의 민주화를 바라보는 친웬의 음울한 시각은, 60년에 걸친 공산통치와 지난 30년 동안 지속된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적 호황 이후 과거 중국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며 인민들 사이에서는 신뢰를 북돋아준 크고 작은 전통들이 전멸했다는 관찰에 기초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국가가 무너진 후 남을 원자화(原子化)된 사회는, 적어도 그러한 붕괴 직후의 여파 속에서 건전한 민주적 제도를 함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풍경은 노골적인 파시스트 정치가 흥기할 수 있는 온상일 터이다. 따라서 친웬은 주류 민주주의자들이 개진하는 중국 우선중국과 홍콩의 통합대신에 홍콩 우선홍콩과 중국의 분리를 옹호한다. 그에 따르면, 홍콩을 겨냥한 중국의 신제국주의적인 접근에 맞서는 일과 홍콩의 반대운동을 중국의 민주화라는 더 큰 투쟁에 복속시키려는 중국 자유주의자들을 거부하는 일은 홍콩이 진정으로 민주적일 수 있는 조건인 유사 도시국가로서의 자율성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데 똑같이 중요하다.

 

홍콩에 관한 세 권의 책과 세 가지 미래

 

사상의 전쟁은 언제나 지상의 정치 투쟁과 함께 간다. 쟝시공, 첸관중, 첸윈의 시각은 각각 (1) 한시라도 빨리 홍콩을 동화시키고 그곳에 본토와 같은 권력행사 기제를 심으려는 베이징, (2) 홍콩 사람의 투쟁보다는 중국의 불투명한 민주적 개혁에서 그들의 희망을 거는 홍콩의 주류 민주주의자, (3) 베이징을 거부하고 홍콩 민주주의를 촉진시킬 준비가 된, 지역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신생 운동을 대표한다.

 

홍콩에 대한 베이징의 공세적 압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한편, 주류 민주주의자 및 그들의 사회적 기반인 나이 들고 재산도 넉넉한 중산계급은 직선제로 선출된 입법회(立法會)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주류 매체의 지원을 누리면서도 여느 때보다 소심해져있다. 청년 중심의 지역주의적 운동은 여전히 분열상을 보이고 주변화 돼있지만, 1997년 이후 등장한 젊은 세대 가운데서 인기가 높다. 또한 그들은 주류 민주주의자들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국가교육과정의 시행을 막거나 조제유 밀반출과 출산 관광을 단속하게끔 정부를 압박하는 등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둔바 있다.

 

2014년 홍콩 시민들은 다시 한 번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홍콩의 미래는 전적으로 앞서 언급한 세 세력 간의 상호작용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에 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한편 세 책의 인기를 비교했을 때, 지역주의적 시각이 세를 얻고 있음은 확실하다. 중국 자유주의자들이 좌절에 좌절을 겪고 있고, 어떠한 주류 정치세력도 여론조사를 통해 꾸준히 드러나는 홍콩의 지역적 정체성을 이해하거나 결집시키려고 하지 않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앞서의 관찰은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그러한 홍콩 지역주의의 흐름이 계속 증가하여 대만 민족주의의 수준에 도달하고, 더욱 전투적인 반대운동의 밑거름이 될지는 장차 두고 볼 일이다. 

 

훙호펑은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사회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로 동아시아에 초점을 맞춰 지구정치경제, 저항운동, 국민국가의 형성, 사회이론 등을 공부한다. 그는 중국적 특징을 가진 저항: 청(淸) 중기의 시위, 폭동, 탄원(Protest with Chinese Characteristics: Demonstrations, Riots, and Petitions in the Mid-Qing Dynasty)의 저자이며, 중국과 지구적 자본주의의 변환(China and the Transformation of Global Capitalism)의 편집자이다.

 

이 글을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이 출처를 밝혀줄 것을 권고함. Ho-fung Hung, "Three Views of Consciousness in Hong Kong",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2, Issue 43, No. 1, November 3, 2014.

 

  1. 이 글은 9월말 터진 우산혁명(雨傘革命)의 전야에 『비평』(Critique) 807-808호, 2014년 8-9월자에 “Trois visions de la conscience autochtone à Hong Kong”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불문(佛文)을 손 본 것이다. [본문으로]
  2. 홍콩정부가 제안한 법은 다음과 같다. “홍콩특별행정구정부는 중앙인민정부(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대한 반역, 분리 독립, 선동, 전복 등의 활동, 또는 국가비밀의 사취(詐取)를 막고, 해당 지역에서 외국의 정치기관이나 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하며, 정치기관 또는 단체가 외국의 정치기관 또는 단체와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방지하는 법을 제정한다.” 그러나 이 법안은 보류됐다. [본문으로]
  3. 『과거와 현재』(Past and Present) 50(1), 1971, 71~136쪽. [본문으로]
  4. 주민에 대한 민족적 정체성 조사, 여론 프로그램, 홍콩대학. [본문으로]
  5. Lilla, Mark, 「베이징에서 스트라우스 읽기」(Reading Strauss in Beijing), 『새로운 공화국』(The New Public), 2010년 12월 10일자; 마준(馬駿), 슈지안쟝(徐劍剛), 『인민폐의 국제화를 위한 방안: 역외시장 발전과 자본 개방』(人民幣走出國門之路: 離岸市場發展和資本項目開放), 홍콩: 커머셜(Commercial) 출판사, 2012. [본문으로]
  6. 1951년 협정의 전문은 중국어, 티베트어, 영어로 이용 가능하다. [본문으로]
  7. 마준(馬駿), 슈지안쟝(徐劍剛), 앞의 글, 2012. [본문으로]
  8. 일례로, 「왜 홍콩은 여전히 중국경제에 필수적인가」(Why Hong Kong remains vital to China's economy),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2014년 9월 30일자를 보라. [본문으로]
  9. Yep, Ray, 「대중화권에서 자율성 협상하기: 1997년 전후의 홍콩 및 주권」(Negotiating Autonomy in Greater China: Hong Kong and its Sovereign Before and After 1997), 코펜하겐, 덴마크: 니아스(Nias) 출판사, 2013. [본문으로]
  10. 청샹(程翔), 「18회 당대회를 통해 본 홍콩 내 중공 지하단체의 규모」(從十八大看香港地下黨規模), 『명보』(明報), 2012년 11월 7일자. [본문으로]
  11. Lee, Martin, 「홍콩의 티베트화」(香港西藏化), 『넥스트』(Next Magazine), 2012년 9월 29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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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11. 2. 23:06

* 다음은 Neil Davidson, 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Chicago: Haymarket Books, 2012의 A Note On the Reproductions(출간에 부쳐)를 번역한 것이다.

 

 

   

          

           Liberty Guiding the People               What Courage!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대단한 용기!>

 

 

그림에 대한 주석

 

부르주아 혁명을 생각할 때 어떤 인상이 먼저 떠오르는가? 우리는 대개 프랑스와 반란의 와중에 있는 인민, 아마도 바스티유를 기습하거나, 또는 파리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인민을 떠올린다. 후자의 인상을 그 어느 것보다 효과적으로 포착한 그림은 앞표지에 자세히 드러나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31)이다. 에릭 홉스봄(Eric Habsbawm)은 이 작품이 구현한 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과 혁명적임에 대한 낭만적인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 모자를 쓰고 수염 난 음울한 젊은이들, 셔츠바람의 노동자들, 솜브레로 닮은 모자 아래로 늘어뜨린 머리의 호민관들이, 삼색기들과 프리기아 모자에 둘러싸인 채, 대륙의 모든 도시에 바리케이드를 쌓으며, 1789년의 온건했던 혁명이 아닌, 혁명력 2년의 영광을 재창조한다.” 그림의 원제는 <728: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었고, 이는 1830년의 프랑스 혁명 도중 728일에 일어난 실제 사건, 즉 아르콜 다리에서 스위스 근위대를 무찌르려는 반란군의 마지막 시도를 나타낸다. 이 그림은 신화적이다. 자유의 여신은 그녀가 바리케이드 너머로 이끄는 민중의 여인이자, 용기, 대담함, 지도력 같은 관념적인 혁명적 덕성의 전형으로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1792년 이래 대혁명과 공화국, 그리고 프랑스 그 자체의 상징인 마리안의 재현이다. 자유의 여신이 반-신화적인 여신 외에 다른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성이 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확실히 바리케이드에는 다른 어떤 여성이 묘사돼있지 않다. 들라크루아가 자세히 그리고 있는 4명의 남성 중 오직 한 명만이 부르주아인데, 그의 모자, 조끼, 삼각건, 그리고 화승총을 휘두르는 평민들에 비추어 알아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사태의 진행 과정이 정확히 노동계급투쟁의 형성단계들과 겹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부르주아 혁명의 영웅적인 구상을 봉안(奉安)했다. 그들이 쌓은 바리케이드에 넘치던 이 혁명적 대중들은 부르주아 질서의 경계 또한 넘고 있었는가? 결국 인민은 1830년대의 목격자일 사람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다. 이 목격자란 반혁명 세력의 관점에서 위 작품을 응시했을 미술관의 부르주아 단골로서, 작품이 처음 전시됐을 때 그것이 상대적으로 인기 없던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애매모호한 점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유의 여신은 민중을 이끄는 동시에 그들을 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혁명에 대한 들라크루아 자신의 양면성을 시사한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1789-1815 연간의 첫 번째 프랑스대혁명 기간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균열선 중 하나를 암시한다면, 그보다 앞선 작품 하나는 좀 더 어두운 면모를 그리고 있다. 책의 속표지를 맞대고 있는 삽화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대단한 용기!>이다. 이 판화는 <전쟁의 참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85개의 작품 중 7번째 작품이다. 고야는 1820년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참상>을 제작했으나, 해당 작품들은 그의 사망 35년 후인 186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개되었다. 자유의 여신처럼, 고야 그림의 주인공도 시체더미 위에서 싸우는데, 이것이 사실상 들라크루아 그림과의 유일한 비교점이다. 고야는 확실히 여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녀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아구스티나 사라고사 도메네크라는 역사적 인물로, 1808년 사라고사 지역의 수도 방어 때 활약하여 아라곤의 아구스티나로 알려져 있다. 고야는 영광이 아닌 비극을 강조한다. 같은 사건을 감상적으로 표현한 <사라고사 방어>(1928)를 그린 스코틀랜드 화가 데이비드 윌키(David Wilkie)와는 달리, 고야는 적을 향해 돌린 아구스티나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등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전쟁으로 황량해진 풍경 속 유일한 인물로 대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적은 누구인가? 역설적인 것은 그녀가 프랑스군을 상대로 도시를 방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는 제정 독재의 중심이었으나, 국외에서 그들은 총검의 끝을 들이대며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을 강요했다. 그러나 적어도 에스파냐에서는 비교적 부유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소수의 인구만이 프랑스군을 반겼다. 에스파냐 사람 대다수는 교회와 왕의 깃발 아래서 침략자와 침략자를 돕는 지방 세력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전쟁의 참상>은 들라크루아가 기념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민중의 다른 측면, 즉 무지하고 짐승 같으며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프랑스는 에스파냐 사람들의 대응보다 더욱 야만적인 잔혹행위를 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의 참상>이 보여주는 전부는 아니다. 사라고사 방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민중봉기도 전적으로 반동적일 수 없었다. <전쟁의 참상> 작품들 중 <대단한 용기!>만이 에스파냐 저항군의 영웅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 또한 여성들, 즉 아구스티나의 이름 없는 자매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작품의 제목들은 고야의 입장이 가지는 모호성을 전달해준다. <여인들 용기를 북돋우다>가 선언적이라면, <그리고 그들은 야수 같다>는 몸서리쳐진다.

 

각자가 발생하는 국가적 맥락이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고야의 판화는 모두 공통적인 부르주아 문화의 일부로 파악이 가능한데, 그것은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위대함의 절정에 다가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물론 부르주아 예술의 위대함은 이 지점에서 그치지 않았으나,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부르주아 세계관의 대표이기를 멈추었다. 부르주아의 존재조건들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대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부 근대주의적 아방가르드의 발생은, 잠재적이기 보다는 실제적 지배계급으로서 부르주아 통합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을 것이다. 혁명에 대한 다소 엇갈리는 애증을 지닌 예술가가 승리의 즉각적인 여파에서 성공적으로 압축할 수 있었기에 동정어린 자화상을 갖게 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성공적인 아래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의 절정을 보여준다. <대단한 용기!>는 비슷한 영웅적 순간을 묘사하지만, 이는 반갑지 않은 위와 바깥으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의 패배를 다뤘고, 자신이 지녔던 국민적 자부심과 계몽주의적 원칙이 양립할 수 없어 보였던 반동의 시기에, 양자 사이에서 망설인 예술가가 그린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극단의 반대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혁명과 <전쟁의 참상>의 반혁명은 한 가지 주제를 공유한다. 바로 부르주아라는 혐의이다. 노동계급이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 세력으로서 출현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사례에서, 이러한 혐의는 부르주아 의도에 대한 의심의 시작이었고, 국민적 단결이라는 수사가 타협 불가능한 계급 분화를 숨겼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의 부상이었다. 노동계급이 거의 형성되지 못했던 에스파냐의 사례에서는, 이것이 부르주아가 민중 대다수와는 다른 경제적 이익을 가졌을 뿐더러, 국가를 외국의 침략자에게 넘김으로써 민중을 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이미 확고해진 신념이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는 군주제에 충분히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 반면, 에스파냐에서 부르주아는 군주제를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르주아의 명칭을 갖는 혁명들과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가 지니는 모순들에 대한 부르주아의 양면성은, 앞서의 두 그림 모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한 주제이자, 또한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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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10. 23. 18:39

필자: 사미르 아민(Samir Amin)

출처: 『월간 비평』(Monthly Review) 664(20149)

영역(英譯): James Membrez가 불어 원문을 옮김.

출처: http://monthlyreview.org/2014/09/01/the-return-of-fascism-in-contemporary-capitalism/

 

이 글의 저자 사미르 아민(سمير أمين‎, 1931~)은 이집트 출신의 저명한 맑스주의 경제학자이다. 194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학문적 여정을 시작한 이래 그는 오늘날까지 중동, 아프리카, 유럽의 학계와 정계, 시민사회를 종횡으로 넘나들며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체제론(World System theory)과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은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지구를 석권(席卷)한 금융자본주의체제와 그 안에서 운동하는 다양한 힘의 작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얼마 전 이른바 일베가 자기네들의 민낯을 광장에서 드러내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도 진상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세월호 참사 피해자의 유족 앞에서 치킨을 뜯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를 한국형 파시즘의 귀환 또는 그 서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사미르 아민이 우리에게 일러주듯, 파시즘은 대개 폭력적이고 심원한 위기의 특정 국면에서출현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어떠한 국면에 놓여있는지 묻는 작업은 다시 파시즘을 퇴치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 방법은 역사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1부2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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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10. 23. 18:00

필자: 이안 앵거스(Ian Angus)가 쓰고 존 리델(John Riddell)이 싣다.

일시: 20141021

출처: http://johnriddell.wordpress.com/2014/10/21/the-origin-of-rosa-luxemburgs-slogan-socialism-or-barbarism/

링크: http://www.redian.org/archive/79520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어인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기원

 

난제 해결: 이안 앵거스(Ian Angus)가 중요한 사회주의 표어의 예기치 못한 출처를 추적하다.

 

"사회주의의 역사 속 자그마한 문제를 제가 푼 것 같습니다." 이안 앵거스의 말이다.

 

Rosa Luxemburg

<기후와 자본주의>(Climate & Capitalism)의 표어인 "생태사회주의냐, 야만이냐: 3의 길은 없다"는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제기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표어에 기초한 것이다. 이 표어는 1차 세계대전 기간과 뒤따른 독일혁명에서 엄청난 파급을 불러왔고 이후 수다한 사회주의자들이 이를 차용했다.

 

문제는 이 개념의 유래이다. 룩셈부르크 자신의 설명이 맞지 않는 데다가, 그녀의 설명이 가지고 있는 혼란을 설명(또는 논파)하려는 좌파 학자들의 시도 또한 그렇게 아귀가 맞진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수감 중이던 1915년에 쓴 강력한 반전(反戰) 책자에서 인류는 사회주의의 승리나 문명의 종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 박해를 피하기 위해 그녀가 쓴 필명을 딴 <유니우>(Junius Pamphlet)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는 독일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 내의 전쟁을 지지하는 지도부에 대항하여 혁명적 좌파를 교육하고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룩셈부르크는 이 개념을 근대사회주의의 창설자 중 한 명의 것으로 돌렸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부르주아사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냐, 야만으로의 퇴보냐 하는 교차로에 서 있다.’ (중략) 여태껏 우리 모두는 아마도 별다른 생각 없이, 구절이 지닌 무시무시할 정도의 심각함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읽고 반복했을 것입니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미 한 세대 전에 정확히 예견한 문제에 직면해있습니다. 그것은 즉 제국주의의 승리와 그에 따라 모든 문명이 고대 로마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붕괴하고, 인구가 감소하며, 황폐화되고, 퇴보되는 즉 거대한 묘지가 될지, 아니면 제국주의 및 그들의 전쟁 수단에 맞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이고 활발한 투쟁을 의미하는 사회주의의 승리가 올지 간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출간된 저작과 출간되지 않은 수고들을 주의 깊게 두루 살펴보았으나 위에서처럼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말했다는 구절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먼저 우리는 영역(英譯)본이 룩셈부르크가 엥겔스를 지목하는 문장을 옮길 때 인용부호를 부정확하게 썼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저 부호들은 로자가 쓴 독일어 원전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이는 그녀가 직접적으로는 인용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며, 우리는 엥겔스의 저작에서 동일한 문구가 나오길 기대할 수 없다. 더욱이 그녀는 사회주의 서적을 제대로 접하기 힘든 감옥 안에서 글을 썼으므로, 우리는 그러한 기억상의 오류를 감안해야만 한다.

 

이제 앞서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룩셈부르크가 엥겔스의 것이라고 생각한 "부르주아사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냐, 야만으로의 퇴보냐 하는 교차로에 서 있다."라는 구절에서 가졌을 법한 생각에 관해 세 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세 가지 설명

 

<로자 룩셈부르크 읽기>(The Rosa Luxemburg Reader)의 공편자인 피터 후디스(Peter Hudis)와 켈빈 앤더슨(Kevin B. Anderson)은 다음과 같이 썼다. "룩셈부르크는 아마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 이하 <선언>)에서 '사회 전반의 혁명적 제헌 또는 대립하는 제()계급의 공멸'을 초래하는 계급투쟁을 언급한 구절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물론 위의 언급은 관련된 생각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것이 룩셈부르크의 표현이라는 주장은 세 가지의 진지한 반대에 맞부딪힌다. 첫째, 그녀의 표현방식은 <선언>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라서, 심지어 기억만으로 인용을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잘못 인용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둘째, 그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장 잘 알려진 공동작업의 한 소절을 엥겔스에게만 돌리진 않았을 것이다. 셋째, 위에서 필자가 인용한, 후디스와 앤더슨도 사용하는 표준적인 영어 번역은 독일어 원문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미 한 세대 전에 정확히 예견한뒤에 나오는 중요한 세 단어인 “vor vierzig Jahren[“40년 전에”-역자 주]”을 생략했다. 1915년의 시점에서는 그 누구도 <선언>이 출간된 1848년을 “40년 전이라고 지칭하진 않을 것이다.

 

40년 전이라면 1870년대 중반을 가리킬 것이다. 그 때는 엥겔스가 1877~1878년에 걸쳐 연재 형식으로 그리고 1879년에 책으로 <반듀링론>(Anti-Dühring)을 내놓았을 때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운동의 창설자 중 한 명이 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언명이었기 때문에, 룩셈부르크가 엥겔스에게로 돌리는 표현과 유사한 인용구를 찾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다른 두 학자는 바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했다.

 

노만 제라스(Norman Geras)<로자 룩셈부르크의 유산>(The Legacy of Rosa Luxemburg)에서, “아마도로자가 역사에서 지배적인 요소는 경제발전이 아닌 힘이라는 듀링의 주장에 대한 엥겔스의 논박을 언급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경제적 진보를 힘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좀 더 야만적인 정복자들이 정복한 나라의 주민을 전멸시키거나 몰아내버리며, 그들이 사용할 줄 모르는 생산력을 낭비하거나 황폐화시켜 버리는 극소수의 예외”(프리드리히 엥겔스, 김민석 옮김, <반듀링론>, 중원문화, 2010, 195~196쪽) 몇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항상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일례로, 그는 기독교도 침략자들이 에스파냐에서 회교도의 지배를 끝장낸 후에 진보된 관개(灌漑) 체제를 쇠퇴하게 놔둔 사례를 인용한다.

 

그 구절은 문명(회교도)과 야만(기독교도) 사이의 처참한 충돌과 후자의 승리를 논하지만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며, 엥겔스 또한 룩셈부르크가 그에게 공을 돌린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 또한 괜찮은 시도였으나 정작 설명한 바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마이클 로위(Michael Löwy)는 최근 논문에서 룩셈부르크는 아마도 <반듀링론>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언급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근대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창출한 생산력과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재화의 분배체계가 생산양식 그 자체와 모순되게 되고, 그 모순이 갈수록 격화되어 근대사회 전체의 파국을 면하려면 (중략)생산양식과 분배양식의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김민석 옮김, <반듀링론>, 중원문화, 2010, 169쪽.

 

다시 이러한 설명은 비슷한 개념을 표현하나, 로위가 단호히 지적하듯 이 구절은 룩셈부르크가 엥겔스에게 돌리는 인용문과 비교했을 때 글귀와 의미가 꽤나 다르다”. 로위는 룩셈부르크 표어의 원천을 찾는 작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사실 20세기의 도정(道程)에서 그토록 커다란 충격을 건넨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표현은 그 단어의 강력한 의미에 있어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만든 것이다. 그녀가 엥겔스를 초들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상당히 이단적인 명제(命題)에 정당성을 더 부여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은 합당한 결론이지만, 필자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하나만 들어보자면, 1915년에 룩셈부르크가 저 표현을 창안했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는 아마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읽고 반복했을 것입니다.”라는 그녀의 주장과 모순된다. 그녀는 독자들에게 앞서의 구절이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새롭고 낯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는 제3의 원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구두구두구[북소리-역자 주], 부탁합니다.

 

원천

 

엥겔스의 저작에서 룩셈부르크의 인용구를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릇된 인용이 아니라 그릇된 귀인(歸因)이다.

 

룩셈부르크가 인용한 문장 및 전반적으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개념의 원저자는 엥겔스가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후 가장 권위 있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인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였다.

 

Karl Kautsky

독일 사민당(SPD)1875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페르디난트 라살레(Ferdinand Lassalle)의 추종자들이 모여 세웠고, 마르크스주의적이지는 않고 대개 사회주의적이었던 강령(綱領)을 채택했다. 1891년 카를 카우츠키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은 마르크스주의적 강령의 초안을 작성했고, 카우츠키는 공개 토의 후에 이를 고쳐 썼다. 같은 해에 이 강령은 에어푸르트(Erfurt)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채택됐다. 에어푸르트 강령으로 알려진 이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사민당의 공식적인 강령이었고, 여러 국가의 사회주의정당은 이를 전범(典範)으로서 널리 사용하였다. 일례로 레닌은 이 문서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1896년 강령 초고의 기초로 썼다.

 

이 강령 자체는 의도적으로 소략하고 영역하면 고작 1300 단어를 웃돈다 설명이나 주장 또한 적은 편이라서, 카우츠키는 이 강령을 설명하고 사회주의를 변론하는 책 한 권 분량의 유명한 해설서를 썼다. <에어푸르트 강령: 원리의 논의>(Das Erfurter Programm in seinem grundsätzlichen Teil erläutert)1892년에 출간됐다. 역사가 도널드 사순(Donald Sassoon)은 이 강령이 유럽에 걸쳐 사회주의 활동가들에게 가장 널리 읽힌 책 중 하나가 됐고”, 카우츠키의 해설서는 “1914년 이전까지 16개국 언어로 번역됐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마르크스주의의 백과사전(popular summa)가 됐다고 서술했다.

 

1880년대 폴란드와 독일의 사회주의운동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분명히 카우츠키의 책을 읽었고, 그의 사상이 회자(膾炙)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 4()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만일 사회주의 연방(commonwealth)이 확실히 불가능하다면, 인류는 모든 차후적 경제발전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다. 그 속에서 근대사회는, 2천여 년 전 로마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부패할 것이며 종국에는 야만으로 전락한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자본주의문명은 존속할 수 없다. 우리는 반드시 사회주의로 전진하든지 아니면 야만으로 물러나야 한다.”

  

이 구절과 <유니우>에서 인용한 위의 구절 사이의 동일성은 명백하다. 카우츠키의 핵심적인 마지막 절()은 룩셈부르크의 엥겔스 인용의 그것과 사실상 동일하다.

 

※ 카우츠키 1892: 우리는 반드시 사회주의로 전진하든지 아니면 야만으로 물러나야 한다 (es heißt entweder vorwärts zum Sozialismus oder rückwärts in die Barbarei)

 

룩셈부르크 1915: 사회주의로의 이행 아니면 야만으로의 퇴보 (entweder Übergang zum Sozialismus oder Rückfall in die Barbarei)

 

룩셈부르크가 동사 대신 명사를 사용한 사실을 제외하면 양자는 똑같다.

 

더욱이 양자가, 전진하는데 실패하여 퇴보한 사회의 사례로 로마제국의 몰락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룩셈부르크의 어구가 카우츠키의 저작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로위는 이 주제를 “그렇게 연관돼있진 않다고 일축했다.

 

그렇다면 왜 로자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관념을 카우츠키 대신 엥겔스의 것으로 돌렸을까? 확실히 알긴 어렵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서 카우츠키의 저작이 담고 있는 많은 개념 및 표현방식이 20여년 넘게 사회주의 모임(circle) 내에서 공통 화폐처럼 널리 쓰이면서, 어구들이 원래의 구체적인 기원으로부터 분리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많은 인용구를 생각해본다면, 카우츠키의 문장이 어떻게 엥겔스의 것이 됐는지에 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5년 감옥 안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인용했을 때, 그녀는 박식한(그러나 잘못된) 추측을 통해 <반듀링론>이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40년 전이라는 참고를 덧붙였다. 그녀의 책자는 스위스에서 인쇄된 후 독일로 불법적으로 들어와야 했기 때문에 출처에 대한 세밀한 검사는 잘 이뤄질 수 없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표현이 카우츠키의 것임은 이전에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필자는 그가 볼셰비키(Bolshevik)혁명을 비난한 후에 사회주의자들이 카우츠키를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혹자의 농담처럼, 대다수는 레닌 덕분에 카우츠키란 이름을 변절자(Renegade)와 동일시했다. 그의 대다수 저작들은 현재 절판된 상태이거나 연구자용의 값비싼 독어본으로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듯, 도외시(度外視)는 룩셈부르크를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만일 필자가 정확하다면,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표현은 그 단어의 강력한 의미에 있어서룩셈부르크가 만든 것이다.”라는 마이클 로위의 주장은 옳지 않다. 오히려 로자는 우리 모두는 그것을 읽고 반복했을 것입니다.”라고 썼는데, 그것은 단순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카우츠키의 저작이 널리 읽힌 결과, 독일의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인류가 반드시 사회주의로 전진하든지 아니면 야만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관념이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위대한 공헌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원저자가 의도한 것보다 더욱 즉각적이고 심원한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 문구를 만든 사람은 카를 카우츠키지만 그것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이안 앵거스는 생태사회주의 잡지인 <기후와 자본주의>의 편집자이다.

 

관련 읽기자료:

 

이안 앵거스, <21세기 야만이라는 유령>(The Spectre of 21st Centry Barbarsim)

 

참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니우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영어본독어본이 마르크스주의 누리망 기록보관소(Marxist Internet Archive, 이하 MIA)에 올라와있고, 인쇄된 많은 선집(選集)에서 이용 가능하다. 필자가 확인한 모든 영역본은 앞에서 서술한 오류와 생략을 모두 저질렀다.

 

카를 카우츠키의 Das Erfurter Programm in seinem grundsätzlichen Teil erläutert독어본MIA에서, 영어본<계급투쟁>(The Class Struggle)이라는 제호로 이용할 수 있다. (참고: <레닌의 재발견>(Lenin Rediscovered)에서 역사가 라스 리(Lars Lih)는 영역본을 불온한 부분을 삭제한 축역본이라고 서술한다.)

 

아인슈타인의 것이라고 부정확하게 인용되는 몇몇 사례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인용한 다른 자료

 

프리드리히 엥겔스, <헤르 오이겐 듀링의 과학에서의 혁명(반듀링론)>, Progress Publishers, 1969. 또한 MIA에 있는 <마르크스엥겔스전집>(Marx Engels Collected Works) 25.

 

노만 제라스,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산>, NLB Books, 1976 Verso Books, 1983.

 

피터 후디스와 케빈 B. 앤더슨, <로자 룩셈부르크 읽기>, Monthly Review Press, 2004.

 

마이클 로위, “행동의 불을 붙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고 속 실천철학(The spark ignites in the action the philosophy of praxis in the thought of Rosa Luxemburg)”, <국제적 관점>(International Viewpoint), 20115.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MIA 및 무수히 많이 인쇄된 판본들.

 

도널드 사순, <사회주의 1백 년>(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New Press, 1996.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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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8 10:07 [ ADDR : EDIT/ DEL : REP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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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8 21:28 [ ADDR : EDIT/ DEL : REPLY ]

번역2014. 9. 21. 10:16

필자: 길스 트레믈렛(Giles Tremlett)

일시: 2014년 9월 18일(영국 시간으로 오전 6시)

출처: 가디언(The Guardian)의 길게 읽기(The long read) 연작.

 

호세 무히까: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대통령?

(José Mujica: is this the world’s most radical president?)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까는 대통령궁보다는 아주 작은 집에서 지내고, 월급의 9할을 기부한다. 그는 대마초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커다란 유산은 혁명적인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다.

 

 

에모 마니세(Emo Mannise)는 열여섯 살 때 현재 우루과이 대통령인 호세 무히까(José Mujica)를 처음으로 만났다. 1969년의 어느 봄날 마니세와 그의 누이 베아트리즈(Beatriz)는 몬테비데오의 아파트 집에 있었고, 마침 미래의 대통령은 손에 권총을 들고 승강기에서 나와 그들의 펜트하우스(penthouse)로 들이닥쳤다. 그는 고함쳤다. “돌아서서 입 닥치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마니세는 곧장 그들, 즉 대담하고 격렬한 투파마로스 중 가장 악명 높은 이의 파리한 눈매와 굵으면서도 물결치는 갈색 머리칼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마니세는 처음의 공포감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상할 정도로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필자가 이제는 62살의 여행사 직원인 마니세를 그가 즐겨 찾고 거대한 라플라타 강의 탁한 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몬테비데오의 한 서점에서 만났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거기 있던 젊은 총잡이가 걱정하지 말라고,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 모습이 기억나는군요.” 그들은 소아마비를 앓아 바퀴의자를 썼던 마니세의 누이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무히까는 그녀에게 걱정 마세요, 비에히따(viejita). 괜찮을 겁니다. 이 일은 당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다정다감한 말투의 비헤이따, 아담한 노부인이란 말은 전형적인 무히까의 느낌이었다.

 

마니세의 양아버지인 호세 페드로 푸르푸라(José Pedro Púrpura)는 우루과이의 극우 및 무기거래와 연계돼있던 악명 높은 판사였다. 강도들이 문서와 무기를 탈취하여 떠났으나 정작 마니세가 화가 났던 이유는 학교숙제를 하기 위해 자기가 쓰던 타자기를 투파마로스가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음날 전화가 울렸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어제 찾아갔던 이들이오라고 말했다. 갑자기 마니세는 다시 두려워졌다. 왠지 강도들은 타자기에 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목소리는 마니세에게 타자기를 되찾고 싶으면 근처 건물의 로비(lobby)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타자기는 정말 거기 있었어요. 그들은 내 양아버지에게 보내는 활자로 된 전갈도 놔두었어요. 거기엔 박사, 조심하시오. 우리가 보고 있소.’라고 적혀 있었지요.” 이듬해 투파마로스는 푸르푸라 박사를 암살하고자 건물에 기관총 포화를 퍼부었다.

 

마니세는 5년 전 열린 우루과이 대선에서 무히까와 그가 속한 광역전선(Broad Front)에 투표했다. 광역전선은 우루과이 좌파정당들의 연합체로 지난 2005년 무히까의 선임자이자 온건성향의 타바레 바스케즈(Tabaré Vázquez)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이전까지 정국을 지배했던 콜로라도당과 국민당을 처음으로 뒤엎은 바 있다. 마니세는 필자에게 무히까에게 씁쓸함을 느낄 거라고 기대했을지도 몰라요.”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이야말로 언행일치의 유일한 사례죠.” 왕년의 혁명가는 여전히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을 고수하지만, 우루과이 정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유례없는 경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무히까의 인기는 높지만, 대통령은 연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용적인 좌파정부는 올해 1026일 치러질 대선에 출마할 것이다.

 

무히까는 신랄한 어조로 진실을 말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2012년 리우+20 정상회의에서와 이듬해 뉴욕의 국제연합에서 만연한 소비주의를 통렬히 질타하는 연설은 유튜브(YouTube)에서 3백만이 넘는 시청 수를 기록했다. 그는 리우에서 청자들에게 독일 가정이 보유한 자동차의 수와 같은 수만큼의 차를 인도인들이 가지게 된다면 지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산소는 얼마큼 남게 될까요?” 국제연합에서는 각국 대표단에게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는 낭비적이고 비싼 정상회의에 가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혹자는 13년에 걸친 그의 옥살이를 떠올리며 그를 라틴아메리카의 넬슨 만델라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대마초 관련 법률과 함께 동성결혼 및 합법적인 낙태를 통과시킨 공전(空前)의 사회자유주의자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진 가장 큰 요인은 바로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대다수 우루과이인들이 엘 페페(El Pepe)라고 부르는 이 남자는 25년 된 폭스바겐 비틀 자동차를 몰고, 전원(田園)의 작은 집에서 살며, 월급의 9할을 기부하는데 쓴다. 의도적으로 거칠고 실용적인 무히까식() 정치는 우루과이의 빈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했을 뿐더러, 중간계급의 일부에게마저 그 효과가 먹혀들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위대한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를 초드는 라틴아메리카의 여타 포퓰리스트(populist) 지도자들은 유독 실패하는 묘기나 다름없다. 무히까의 비판자들은 그가 본질보다는 형식, 즉 총과 혁명적인 사상을 한쪽으로 치워놓은 매력적인 노인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대안적인 좌파정부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큰 실험실로 거듭난 라틴아메리카대륙에서 각자는 서로가 마법의 공식을 찾았다며 아옹다옹하는 중이다. 동시에 대다수는 무히까가 영웅인지 아니면 변절자인지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

 

1969년 여름 한 경찰관이 몬테비데오에 있는 작은 투자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그 은행은 한 정부각료가 부분적으로 소유하던 것이었다. 직원은 경찰관을 안으로 들였고, 곧 그가 투파마로스 대원임을 알게 됐다. 몇 명의 유격대 동료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오늘날의 가치로 10만 불()에 상당하는 돈을 가져갔고, 은행계정 원장(元帳)을 요구했다. 직원 중 한 명이었던 루시아 토폴란스키(Lucía Topolansky)투파스에게 은행이 불법적인 외환거래를 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마리아 엘리아(Maria Elia)는 은행을 습격한 유격대원 중 한 명이었다. 투파마로스는 원장을 검사의 집 앞에 갖다놓았고, 곧이어 불법거래에 연루됐던 몇 명이 수감됐다. 이는 투파마로스의 특징인 무장 선전(宣傳)”의 전형이었다. 즉 폭력은 나쁘지 않았으며, 좋은 일로 드러났다면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토폴란스키 자매는 상류충들이 모여사는 포시토스(Pocitos) 구역의 한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재 우루과이 선임 상원의원인 루시아는 몬테비데오에 위치한 국회의 사무실에서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우루과이에 리퀴요(riquillos), 즉 넉넉하지만 부자는 아닌 사람들은 있지만 리코(ricos)는 없어요.” 그녀는 은발에 밝은 갈색 눈매의 소유자로 탈옥한 후 모습을 바꾸기 위해 투파마로 외과의가 그녀의 코를 성형하기도 하였다. 루시아는 무히까와 20여년에 걸친 동거 및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돼 13년간 떨어져 생활한 끝에 마침내 2005년 그와 결혼했다. 무히까가 대통령이 됐을 때, 그녀는 남편에게 취임 선서를 하도록 시켰다. 그녀는 우리 둘을 체포했던 군 연대(聯隊)는 입법회의건물의 보초를 서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 때 우리의 친구들은 웃고 떠들었죠. ‘이제 군대가 당신을 예우할 시간 이예요!’라면서요.”

 

토폴란스키의 어렸을 적 별명은 라 플라카(말라깽이)였으나 원체 강인했기 때문에 투파마로스는 그녀를 라 트론카(그루터기)라고 불렀다. 무히까는 아내와 비슷하게 강인한 의지를 지녔던 여성이었던 어머니 도냐 루시(Doña Lucy)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무히까가 고작 8살이었을 때 작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가계를 돕기 위해 시골과 같은 파소 데 라 아레나(Paso de la Arena)의 빵집에서 배달 일을 했고, 집 뒤의 개울에서 칼라(Arum lilies)를 채집해 내다팔았다. 우루과이는 전쟁으로 찢겨진 유럽에 양모와 소고기를 수출하며 찬란한 20세기를 시작했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1인당 소득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국토는 작았으나 하루 8시간 노동과 출산 휴가 등 진보한 사회입법의 혜택을 누린 나라가 바로 우루과이였다. 혹자는 이를 두고 라틴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1930년과 1950년에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도 했으나, 인구는 결코 350만을 넘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무히까가 자라나면서 기적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청년 무히까는 인기 있던 좌익 정치가인 엔리케 에로(Enrique Erro)의 밑에서 일하였다. 에로는 혁명 이후의 쿠바에서 체 게바라를 만나 정치적 입지를 높인 바 있다. 한편 라틴아메리카의 대다수가 위기와 쇠퇴의 피해자로 전락하자 우루과이인 작가였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Eduardo Galeano)라틴아메리카의 절개된 정맥(The Open Veins of Latin America)를 썼고 이는 라틴아메리카대륙 좌익의 새로운 성서로 거듭났다. 갈레아노는 1971빈곤으로 인한 라틴아메리카의 인간 살해는 비밀이라고 썼다. “이제는 이를 꽉 물며 고통에 익숙해진 공동체 위로 매년 히로시마에 떨어트린 폭탄 3발이 소리 없이 터진다.” 만연한 인플레이션과 정체된 경제로 인해 우루과이가 고통 받자 무히까와 그의 동지들은 쿠바의 사례를 따라 옛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일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았다. 우루과이에는 숨어들어갈 산지가 거의 없었고, 몬테비데오시() 주변에는 양들과 헤리퍼드(Hereford)종의 가축으로 가득 찬 비옥한 평야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18세기 페루의 혁명가였던 투팍 아마루 2(Túpac Amaru II)의 이름을 딴 도시유격대로 거듭났다. 투파마로스는 한편에서 사제도 가담해 싸우는 실로 광범한 운동이었고, 대가가 컸을 때에도 결코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역사는 곧 교조보다는 시험 및 오류의 역사였다. 그들은 여전히 그러하다.

 

그들은 곧 대담한 연출로 명성을 얻었다. 판도(Pando) 마을을 습격할 때에는 장례행렬로 위장하여 시내의 중심가를 걸었고, 안락한 휴양마을인 푼타 델 에스테(Punta del Este)의 산 라파엘(San Rafael) 카지노를 털고 나서는 카지노 직원들에게 사례금(tips)을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타임(Time)은 그들에게 로빈 후드(Robin Hood) 유격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총잡이들은 결국 총 쓰기를 그만두게 됐다. 판도 습격에서 6명이 사망했다. 19703월 무히까는 술집에서 경찰에게 신원이 들통 났다. 엘 페페는 권총을 뽑았다. 경찰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무히까는 6번이나 총에 맞았다. 그는 이후 몬테비데오 최남단 지점에서 라플라타 강을 면해 있는 현란한 상점가(mall)로 바뀌게 되는 푼타 카레타스(Punta Carretas) 교도소로 이송됐다. 무히까는 이곳에서 두 번이나 탈출했다. 오래도록 주변 지역 중에서 가장 고요하고 온건한 나라로 간주되던 곳에 시위가 번지자 마니세 같이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들은 학생시위에 합류했고 경찰에게 짱돌을 던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못 흘러갔다. 납치와 포격, 냉혹한 처형은 투파마로스의 낭만적인 명성을 갈가리 찢었다. 군 병력이 소집됐고, 투파스는 1년이 채 안 돼 궤멸됐다. 19728월 무히까는 우지(Uzi) 기관총과 외투 안쪽에 수류탄을 단 채 한뎃잠을 자다가 군에게 잡혔다. 19736월 콜로라도당의 권위주의적인 목장경영자 대통령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Juan María Bordaberry)는 민·군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주주의를 종식시켰다. 많은 이들이 투파마로스를 탓했다.

 

9명의 투파마로 지도부는 감옥에서 군부대로 옮겨졌고, 투파마로스 단체가 다시 나타나면 처형될 인질의 신세가 되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였던 마우리시오 로센코프(Mauricio Rosencof)는 무히까가 수감된 바로 옆의 조그만 감방에서 11년을 복역했다. 로센코프는 필자에게, 인질들은 수년간 오직 벽을 두드려서 모스부호를 보내는 식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었다고 말해주었다. 화장실은 하루 한 번만 허락됐기에 그들은 물병에 소변을 보았고, 물 또한 귀했기 때문에 침전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나머지를 마시곤 하였다. 총상으로 내장을 심각하게 훼손당한 무히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독방생활은 그들을 반미치광이로 몰아갔다. 페페는 천장에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상상속의 잡음은 그의 귀를 멎게 했다. 이제 81살인 로센코프는 필자에게 그는 비명이 나오지 않도록 입에 돌을 물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무히까는 그가 간절히 원하던 하나의 물건, 즉 요강을 얻기 위해 싸웠다. 인질들에게는 왕왕 가족들의 면회가 허락됐고 어머니 도냐 루시는 그에게 요강을 가져다주었으나 간수들은 결코 전달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간수들을 위한 연회가 베풀어졌을 때 무히까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손님들 앞에서 무안해진 교도소장은 결국 그에게 요강을 건네주었다. 그들이 새로운 군부대로 이송될 때마다 무히까는 그의 유일한 소유물이자 옥리들을 상대로 거둔 승리의 상징을 고수했다. 로센코프는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그는 요강을 문질러 닦지 않았어요. 우리 모두는 그 때 얻은 경련(tics)을 가지고 있죠. 페페가 석방됐을 때 그는 모든 짐을 가지고 나왔어요.”

 

***

 

몬테비데오에서 나와 무히까의 차크라(chacra), 즉 전원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를 따라가면서 당신은 교외 공업단지와 오염된 강, 작고 땅딸막한 집들이 모여 있는 평평하고 넓게 툭 트인 땅을 지나게 된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노쇠하진 않았다. 세기 초에 세계적인 부채위기는 많은 이들을 극빈으로 몰아갔으나, 이곳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을 괴롭히는 아릴 정도의 빈곤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난다. 늙은 말들은 노변에 묶여있고, 넓은 녹지의 가에서 풀을 뜯는다. 돌개구멍이 나 있는 아스팔트길 옆에 있는 거칠게 손수 칠한 주석판자 표지판이 진흙길 너머 농장으로 안내한다. 신난 개들이 방문객을 맞기 위해 달려 나왔으나 이내 가스통을 배달하는 유개 화물차의 뒤를 쫓아 질주한다. 근처의 밭에서는 수탉이 울고 자고새가 걸어 다니는데 모두 은밀히 움직이는 농장 고양이의 밥이다. 하얀 고무장화를 신은 남자는 농장에 딸린 밭에서 근대를 자르고 있었다.

 

무히까는 새끼 사슴의 털로 만든 플리스(fleece)와 회색 바지, 양말에 샌들 차림으로 그의 작은 집에서 나왔다. 그에게 플리스는 분명한 개선이었는데, 2009년 그에게 누더기가 된 작업용 상의를 그만 입게 한 무히까 대선 팀(team)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는 그의 눈매 주위를 더욱 파리하게 했고 몸의 선에는 살집을 더해주었다. 두껍고 부스스 헝클어진 은발 머리는 단정히 빗질돼있었는데, 그것은 대선에서 얻은 또 하나의 습관이다. 다리 3개의 개(mutt)인 마누엘라가 투지를 보이며 뛰어댔다. 무히까의 단층집은 나뭇잎에 때문에 반쯤 가려져 있었고, 온갖 칙칙한 상자와 항아리로 가득한 좁은 시멘트 통로 주변으로 기둥이 세워져 골이 진 금속제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겨울비가 군데군데 있는 회반죽 작업을 돋보이게 했다. 대통령은 경고로 필자를 반겨주었다. “진흙을 조심하세요!” 좁고 기다란 거실에는 싸구려 사무용 의자와 책상, 책장, 나무로 뒤를 댄 불편한 의자 2개와 작은 탁자, 포효하는 통나무땔감 난로와 아주 오래됐지만 흠결하나 없이 복원된 푸조(Peugeot) 자전거가 있었다. 그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난 저 자전거를 60년 동안이나 가지고 있었지요.”라며 비전문가 경주자였을 때를 상기했다. 집 안의 다른 두 방은 유튜브에서 봤던 우루과이인들에게는 친숙한 것이었다. 일전에 대통령은 한국에서 온 텔레비전 촬영팀에게 조니 워커(Johnny Walker)와 우루과이산() 사탕수수 증류주를 대접하기 전에 그가 손수 제작한 침대와 오래된 냉장고 안의 내용물을 보여준 바 있다. 우리의 머리 위로 죽은 파리로 가득한 거미줄이 매달려있었다. 무히까는 사무용 의자에 벋정다리로 앉아 관절을 풀어주며 필자와의 논전(論戰)을 준비했다.

 

무히까는 프라도(Prado) 구역에 있는 백년이나 된 대저택인 대통령궁에 살 수 있었으나 이곳을 선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개인적 자유를 위한 투쟁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물질적인 의미에서 삶을 너무나 복잡하게 만든다면 그걸 유지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들어갈 겁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4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같은 이웃 속에서 같은 사람들, 같은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대통령이라고 해서 보통사람이길 그만둘 순 없는 노릇이죠.”

 

무히까는 검소함에 걸맞은 입담을 지녔다. 바로 전날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노동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청중들은 그가 감옥에서 배웠다고 단언하는 상스러운 어구들의 속사포를 견뎌야만했다. 무히까가 에즈 라 호다(씨발)!”라고 하자 필자 뒤에 있던 한 여인은 기뻐 꽥꽥거리기도 했다. 그는 필자에게 우리 인민들이 어떤지는 제가 압니다.”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교양 있는 몇몇 이들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대통령 각하(el señor)라면 완전히 기력이 없는 무슨 조각상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과 도무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나는 신경과 심장, 살과 뼈로 이뤄진 노인입니다. , 물론 내가 이것저것 손을 대긴 하지만, 항상 선의를 지니고 합니다.”

 

그는 내가 투파마로였기 때문에 대통령으로 뽑힌 건 아닙니다.”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래, 내 과거를 숨기면서 하진 않았어요.” 심지어 유격대 시절에도 그는 폭력을 최소화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그는 공공연히 현대전을 미워하지만, 또한 행복한 평화주의도 경멸하며 폭력으로 얼룩진 그의 과거에 대해 후회를 보이려 하진 않았다.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때 당시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무히까는 구원(舊怨)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를 투옥하고 고문했던 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수중에 있던 도구였다. 우루과이인들은 그네들의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여러 모순들 중 한 가지를 던져버리면서도, 무히까를 대통령으로 뽑은 날에 국가적 억압에 연루된 많은 이들을 보호해주는 사면법을 존속시키는데도 표를 던졌다. “난 고통 받았어요, 하지만 증오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한 나날들을 살아내지 못했더라면 난 지금의 내가 아니었을 거예요.”

 

무히까의 전원 주변에는 작은 집들이 점점이 놓여있었고, 대개는 노인인 14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대통령은 집세를 받지 않았다. “우리는 나이든 친구들의 집 같은 겁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무정부주의자 아니면 그가 말하듯, 좌익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였다. “나는 절반의 또는 상당한 자유지상주의자입니다. 꿈이자 이상향(utopia)인 셈이죠. 고대인들이 스스로를 다스렸다면 아마도 미래의 언젠가 사람들은 다시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 겁니다.” 투사로서 일평생을 보낸 79세의 대통령은 좌파진영 비판자들의 실망에 대해서도 이상주의와 실용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세계에 대한 좌익의 전망은 미래의 이상향을 상상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권리는 없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오늘날을 더욱 낫게 만드는 싸움을 중심적인 과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

 

우루과이 국기의 색인 담청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새겨진 대통령의 현장(懸章)이 훌리오 마리아 산기네티(Julio María Sanguinetti)의 책으로 가득한 서재 가운데 있는 유리로 씌운 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참으로 푼타 카레타스 근처 조용한 거리에 있는 집안의 침울한 공부방이라 할만 했다. 소맷동 단추와 빛나는 블레이저(blazer) 단추 그리고 파스텔풍 녹색의 비단 넥타이(tie)는 말없고 귀족적으로 세련됐다는 인상을 더해주었다. 그의 집사가 우리를 위해 커피를 가져다주었을 때 산기네티는 필자에게 나는 임기를 두 번 보낸 세 명의 우루과이 대통령 중 한명이지요.”라고 일러주었다. 그의 콜로라도당은 구()투파마로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좌경 기독교민주주의자들이 뭉친 무히까의 광역전선에 다수의 유권자를 내어주며 패배했다. 산기네티는 어안이 벙벙해졌고 결국 격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독재는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러나 독재의 계기는 바로 투파마로스였습니다. 무히까가 쏜 모든 총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산기네티는 독재기간 동안 정치에서 배제됐으나, 결국 1984년 군부와의 협상을 도울 수 있었다. 이듬해 산기네티 집권 1년차에 인질들이 풀려났다. 석방에 즈음하여 무히까는 자신의 요강을 작은 천수국(千壽菊)의 정원으로 바꿔놓았다. 로센코프는 무히까가 그의 요강을 자랑스럽게 들고 감옥에서 나와 지지자들이 흔드는 국기(國旗)의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기억했다.

 

1980년대와 90년대 산기네티의 콜로라도당과 그들의 오랜 경쟁자인 국민당이 이끌었던 우루과이 정부는 옅은 수준의 신자유주의적(neoliberal)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온건한 우루과이인들은 적어도 적당한 보증 없이는 국영기업이 사유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국민투표에서 다음과 같이 의사를 표현했다. ‘국영기업은 여전히 공공의 것이다.’ 가장 실험적이었던 투파마로스는 폭력적인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리하여 그들은 1989년 광역전선에 합류하여 좌파의 목소리를 드높였고 중도주의(centrism)의 악폐에 대해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그들 대다수는 신자유주의적 라틴아메리카의 썩어빠진 구조가 붕괴할 것이라고 믿었고, 다시 한 번 무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투파마로스의 선거정치로의 놀라운 이행을 연구한 정치학자 아돌포 가르체(Adolfo Garcé)는 필자에게 구혁명가들이 양면적인 방식, 즉 필요할 경우 지하로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도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투파마로스는 아마도 언제든 지하로 들어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된 조직이었다고 하는 편이 최선의 설명방식일 겁니다.”

 

우루과이의 투표방식은 복잡한 편이다. 유권자들은 단순히 정당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정당 내의 계파를 선택해야 한다. 즉 양원(兩院)과 대통령을 뽑는 것에 더하여 종종 특정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동시에 진행하는 식이다. 1994년 선거에서 광역전선이 승리에 필요한 오직 몇 점만을 남겨두고 있었을 때, 투파마로스가 이끄는 계파는 여전히 규모가 작았고 99석 중에서 오직 2명의 대표만을 보유했다. 무히까가 바로 그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일상적인 옷을 입은 채 낡은 베스파(Vespa) 오토바이를 타고 국회에 출근했고, 발언할 때는 항상 비속어를 섞어 썼다. (“그는 명민한 문장을 생각해내곤 했지만 언어 자체를 파괴했지요.” 산기네티의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차크라의 작은 집에 살았고, 꽃을 기르며, 외양이나 재산 또는 몬테비데오 술집의 계산대에서 말싸움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에는 크게 관심없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민중의 영웅 무히까는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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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가 페페에게 대통령 취임 선서를 시켜야 했던 날, 무히까의 공보담당관인 판초 베르나짜(Pancho Vernazza)는 오전 8시에 그를 만나 연설을 검토하기로 약속했었다. 몬테비데오의 혈기왕성한 광고책임자인 베르나짜는 약속한 시각보다 몇 분 늦게 도착했고, 초조해진 무히까가 이미 자리를 떠났음을 알게 됐다. 베르나짜는 필자에게 그는 자신의 트랙터로 한 바퀴 운전을 하러 나간 것이었죠.”라고 말해주었다. 무히까는 광역전선 내 경선에서 (결국 무히까 정권의 부통령이 되는)온건한 사민주의자인 다닐로 아스토리(Danilo Astori)에 맞섰을 때부터 베르나짜와 함께 했고, 기업친화적인 정권을 운영하겠다고 밝혀 결국 경선에서 승리했다. 베르나짜는 그 경쟁이 우익 무정부주의자와 좌익 무정부주의자 간의 회동이었다고 농담 삼아 말했다. 사업을 하는 지인들은 만일 무히까가 선거에서 이길 경우 나라를 뜨겠다고 위협했다. 베르나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고업에 40년간 몸담고 있으면서도 그처럼 배우는 능력과 유연함을 갖춘 사람을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무히까는 내가 아는 어떠한 정치인들 중에서도 가장 탈권위주의적인 인물입니다.” 베르나짜는 또한 그가 혼란스럽고 체계적이지 않으며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고 보았다. 하지만 토박이 출신으로 정계에 지식을 갖고 있으며 즉흥의 달인인 그는 무히까가 찢어진 옷을 입은 반역자에서 진지한 대통령 후보로 재빨리 변모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말을 입에 달고 의치(義齒)를 하지 않으며 헝클어진 머리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자를 덜 두려워하게 만들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페페는 스스로를 팔았다. 투파마로스는 항상 자기네들을 판촉 하는데 날카로운 감각을 지녔고, 무히까의 번뜩이면서도 야단스러운 기지(機智)는 완벽히 효과적이었다. 베르나짜는 무히까는 그 자신의 형상화에 빠진 꼴이었죠.”라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는 개성마저도 바꾸어버렸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유연하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머리는 빗겨졌고 치아는 제자리를 찾았다. 무히까는 대통령이 되었고, 토폴란스키가 이끄는 그의 계파는 광역전선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거듭났다.

 

무히까의 진보적인 사회 개혁정책은 국제적으로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지만, 그 자신은 오히려 그의 추종자들보다 그러한 소식에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유감과 인권에 맞는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가장 기본적인 문제, 즉 계급차이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활동가들은 그가 타고난 사회적 진보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한 성(보건 활동가는 그는 좀 크로마뇽인 같아요, 정말로.”라고 말했으나, 임신 첫 12주 내의 낙태를 합법화한 것에는 감사해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바스케즈 전 대통령 또한 이전에 광역전선이 집권했을 때 유사한 법에 투표했다. 하지만 작년 동성결혼에 성공한 첫 번째 연인인 세르히오 미란다(Sergio Miranda)와 로드리고 보르다(Rodrigo Borda)는 무히까에게 가장 큰 공로를 돌리지는 않는다. 미란다는 그들 내외가 동성애자 관광사업을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필자에게 많은 이들이 동성결혼을 위해 수년간 싸웠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입장에서 대통령은 아직 남자 동성애자와 여자 동성애자를 성적으로 양면적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무히까는 우리가 하는 일은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무언가를 인정하는 것이죠.”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게 최선입니다.” 그는 빈곤과 불관용으로 인해 벌을 이중으로 받게 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라고 보았다. “성적으로 양면적인 분들이 만일 가난하기까지 하다면 정말로 큰 문제를 갖게 되는 것이죠. 만일 그들이 부유하다면 사회는 그들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잔혹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이 내가 보는 한 진실입니다.”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가장 차별받는 여자들은 대개 빈곤한 처지입니다.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행태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 가장 공격적이죠. 우리 사회는 가난한 소녀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습니다. 많은 자녀와 함께 버려진 처지에 이르게 된 여자들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평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입니다.” 대선운동 기간 중에 그는 자신들이 탄압받고 있다고 여기는 지적인 여성들,” 진짜 하인 처지의 여자 청소부에게 동지(compañera)”라고 부르는 자들에 대해 불평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그는 급료의 거의 9할 모두를 편모(偏母)들에게 기부한다.

 

무히까는 결코 대마초를 피우진 않았으나, 거의 중독 수준의 애연가이다. 방문객들은 대통령과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루시아가 모는 차의 경적 소리에 허둥지둥 담배를 끄는 광경을 종종 연출한다. “금지법 자체는 놀랄만한 실패였습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같은 걸 하면서 할 순 없죠. 우리는 대마초의 판매를 조절하기로 선택했고, 그것은 당연히 국가가 떠맡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마초 흡연자를 양지로 불러내어 당신은 과도한 편이예요. 스스로 대마초 문제와 맞서야 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싶은 겁니다. 이는 정도를 제한하는 문제이지요.” 야당들은 무히까의 이러한 실험이 선거에서 광역전선의 체면을 일거에 날려버릴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부분의 우루과이인들은 이 법을 좋아하지 않는 실정이고, 다시 대표로 출마하는 바스케즈가 다음 달 열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같은 법은 퇴장당할 것이다.

 

대마초법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파소 데 라 아레나 안의 무히까의 고향 근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곳은 아스팔트길이 진흙길로 바뀌는 곳이며 집들은 대개 작고 가난하다. 젊은이 무리가 저녁 어스름의 가운데에 서있다. 추적보도원이면서 공사장 인부의 아들인 왈테르 페르나스(Walter Pernas)는 우리가 뒷길에 다다르자 파스타 재료(pasta base)의 아이들이 나타날 때로군요.”라고 설명했다. 파스타 재료란 코카인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산출되는 독성의 물질로 분해 코카인(crack cocaine)과 유사한 효과를 가지며,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려는 무히까의 시도를 망치는 주범이다. 이는 거의 틀림없이 우루과이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이자 빈곤을 악화시키면서 범죄를 부추기고 있다. 몬테비데오시 거주자의 1푼 이상[약 만 삼천 명 이상-역자 주]이 파스타 재료를 이용한다. 그 숫자는 가난한 주변부 구역(barrios)에서 증가하고 있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는 밤이 되면 보카(bocas), 즉 마약 시장이 성행한다. 무히까는 대마초에서 나는 이윤을 밀수업자로부터 거둬들이면서도 경찰 자원은 늘이고 있다. 우루과이처럼 극적인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더 이상 직장, 빈곤 또는 경제 자체보다는 폭력과 불안, 파스타 재료를 걱정하게 마련이다.

 

잃어버린 세대지요. 그들은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일자리를 유지할 만큼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페르나스의 말이다. 폭력의 공포는 실재하고 증가하는 중이다. 밤에 길거리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렸던 사람들은 이제 아침까지 기다린다. 한때는 사람들이 너무 배고파져 쓰레기통을 뒤지게 되자 주부들은 남은 음식물을 분리된 봉투에 잘 싸서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파스타 재료 중독이 그들을 덮친다. 무히까가 어렸을 적 일했던 빵집의 주인인 후안 아바테(Juan Abbate)는 언제 한 번은 십대 파스타 재료 불량배들에 의해 배달을 하지 못했을 때를 묘사했다. “그 녀석들은 내 차에 돌을 던졌고 난 어쩔 수 없이 거기서 벗어나야 했어요.” 10월에 열릴 다음 선거에서 우루과이인들은 성인범죄가 적용되는 나이를 현행 18세에서 16세로 낮추는 사안에 관해 투표할 것이다. 무히까가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부유해졌지만 동시에 약해진 사회를 볼 것이다. 이는 땔나무를 모으고 꽃을 팔고, 시내에서 물고기를 쫓으며 보낸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노인의 탄식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소비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그가 정신의 빈곤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해 반대하는 그의 담론이기도 하다. “우리네 삶은 더욱 쉬워졌지만, 그것은 동시에 창의성을 앗아갑니다.”

 

무히까의 농가 안에 있는 책꽂이에서 흉상(胸像)의 체 게바라는 담담하게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혁명가였지요.” 대통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내 젊은 시절에 깊숙이 각인됐어요.” 그러나 게바라에게서 영감을 얻어 한 때 외국인이 소유한 공장을 폭파시켰던 남자는 이제 그들에게 세금우대조치를 제공한다. “나에겐 자본주의가 잘 작동해야 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야 하거든요. 너무나 급작스레 자본주의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은 당신이 싸우는 이유인 바로 그 사람들에게 고통을 선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 많은 빵 대신 더 적은 빵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모든 투파마로스가 무히까의 부드럽고 실용적인 사회주의로의 여정에 동행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인질로 잡혀있었던 호르헤 자블라자(Jorge Zabalza)는 최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그들은 감옥에 이상을 두고 나왔다.” 대통령은 말을 이어나갔다. “몇몇 나이든 동지들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람들이 매일 직면하는 문제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해요. 삶은 결코 이상향이 아니거든요.”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경기호황은 대체로 중국의 식량에 대한 필요가 증가한데 기인했다. 이를 통해 많은 수가 빈곤에서 벗어났고, 그 비율은 지난 10년 동안 인구의 4할에서 12푼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같은 기간 동안 극심한 빈곤도 열배 가까이 줄어들었다. 호황은 무히까 및 바스케즈의 임기와 겹쳤고, 경제는 75푼 증가했으며, 공공지출도 5할 가량 증가했다. 우루과이의 빈부격차 또한 좁혀졌는데, 이는 특히 바스케즈 정부가 우루과이 역사상 최초로 소득세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을 겨냥한 사회복지비 또한 급증했다. 우루과이의 모든 초등학생은 무료 휴대용컴퓨터를 가지게 됐으나, 학교제도 일부는 여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우루과이의 기본적인 사회구조 또는 정치구조에서 급격한 변화는 없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복잡한 제도 자체가 그러한 변화를 막는데 기인한다. 예를 들어, 무히까가 제안한 토지세는 법원에서 기각됐다. 정치학자 가르체의 설명에 따르면, 우루과이의 민주주의는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가 많아서 대통령이라도 반드시 대화를 통해 통치해야 한다. 이는 또한 라틴아메리카대륙의 다른 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대중영합주의(populism)를 미연에 방지하는 국가적인 예방접종과도 같은 것이다.

 

새로운 실용주의자로 거듭난 무히까는 더 이상 중국인의 저녁식사와 우루과이인의 농장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세계화에 맞서지 않는다. 세계화는 무히까가 성취한 놀라운 변화에 자금을 대기 때문이다. 그는 필자에게 이것은 꼭 내가 거울에서 나의 주름을 보는 것과 같죠. 난 주름에 동조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난 가능한 한 주름을 관리하기 위해 싸워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기처럼 울기 시작한다면 주름을 바꿀 순 없을 테니까요.”라고 말해주었다. 무히까는 세계화가 불러일으킨 두드러진 실패는 정치적 감시의 부족이라고 말했다. “세계화는 오로지 시장에 의해서만 다스려지기 때문에 나쁜 것입니다. 거기엔 정치도 정부도 없는 셈이죠. 각국 정부는 오로지 다음 선거만을 걱정합니다만, 실상 아무도 대처하지 않는 일련의 지구적인 문제들이 존재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승리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이 세상이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믿지 않는 것과 같아요. 사람은 물론 많은 결점을 지니고 있으나 깜짝 놀랄만한 능력도 갖추고 있는 동물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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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히까는 여전히 계급 간의 전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이지요. 이것은 참으로 전쟁입니다.”) 그러나 혁명을 앗아가고 현실에 의해 엉망이 된 바로 그 전쟁은 현재 대단히 좁은 전장(戰場)에서 치러지고 있다. 봉급 및 노동조합의 권리는 그를 가장 신나게 하는 요소이다. 가르체는 필자에게 무히까가 광역전선에서 자기 계파의 소수자적 위치로 인해 방해를 받았었다고 일러주었다. “기이한 사실은 바로, 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던 일군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제는 유권자를 찾는 일의 전문가로 모습을 바꿨으나 결국 체제개혁은 최소한도로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히까가 재임하는 동안 최저임금은 5할 이상 인상됐고, 이는 장차 그의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성큼 다가가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개혁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필자가 우루과이인들에게 무히까가 얼마나 나라를 바꿔놓았는지 물었을 때, 일부는 우루과이가, 그리고 이 나라의 전통인 중용과 대화가 그를 바꿔놓았다고 답했다. 경제학자 에르네스토 탈비(Ernesto Talvi)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히까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입니다.”

 

필자가 만난 왕년의 투파마로스는 돈키호테를 자주 언급했다. 무히까는 필자에게 체 게바라야말로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광인이자 영예에 사로잡힌 협객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말했다. 어떤 한 젊은 작가는 심지어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현대판 돈키호테로 광고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히까의 단순한 전원에서의 삶이 예증하듯, 개인적인 영예를 위해 영합하길 거절하는 그의 행동에 확실히 들어맞는다. 이상향적인 꿈을 지니고 종국에는 헛된 폭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사랑했던 투파마로스는 풍차를 상대로 싸우는 것의 무모함에 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험적인 정신을 유지하려고 한 무히까는 그의 이상주의와 실용주의를 일치시킬 수 있었다. 이른바 긴축이 외부에서보다 대통령의 집안에서 시행되고 있는 곳에서 변절이라는 비난은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대화가 끝난 후 대통령은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나서 필자에게 농장의 건물들을 보여주었다. 먼지투성이 차고에는 녹이 슨 판금으로 된 문이 달린 연청색 폭스바겐 비틀이 주차돼있었다. “이 차는 거의 부서지지 않아요. 그들은 예비품을 거저나 다름없이 줍니다. 보험도 싸고요.” 공직 생활이 끝난 후 대통령의 꿈은 전원 주변의 빈 곳간에 젊은이들을 위한 농업교실을 여는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뜯어고치는데 전념했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았어요.” 그곳을 나오면서 필자는 근대를 수확하는 사람에게 대통령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지요.” 이는 마치 칭찬처럼 들렸다.

 

이 기사는 2014918일에 수정됐음. 이전 기사에서는 에르네스토 탈비의 성을 칼비(Calvi)라고 오기(誤記)했음.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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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 허락을 구하려 했으나 답장을 못 받은 채 올려 공개하는 글이다. 문제가 될 경우, 바로 삭제하겠다.

    2014.09.28 10:1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번역2014. 9. 17. 10:11

출처.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Amnesty International Briefing)

 

201498

AI 색인(Index): EUR50/040/2014

 

우크라이나: () 루간스크 지역에서 자행된 아이다르 대대(Батальйон Айдар)의 폭력 남용과 전쟁범죄 (Ukraine: Abuses and war crimes by the Aidar Volunteer Battalion in the north Luhansk region)

 

이곳은 유럽이 아닙니다. 이곳은 조금 다릅니다... 여긴 전쟁 중입니다. 법은 바뀌었고 절차는 단순화됐습니다... 내가 그러기로 한다면, 난 당신이 분리주의자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당장에라도 체포하여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씌운 후 감옥에다가 30일 동안 처박아둘 수 있습니다.” - 아이다르 대대장이 국제사면위원회 조사원에게

 

 

북 루간스크 지역에서 활동하는 아이다르 영토방위대대 소속 군인들은 최근 납치, 비법적인 구금, 학대, 절도, 강탈 그리고 처형까지도 포괄하는 광범한 폭력의 남용에 연루됐다.

 

아이다르 대대는 2014년 우크라이나 분쟁이 터진 이후에 대두한 30여개 이상의 이른바 의용대(volunteer battalions),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공안 구조에 느슨히 통합된 부대이다.

 

국제사면위원회(이하 엠네스티”) 조사원은 이 지역에서 2주 간의 연구임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명의 피해자와 사건의 목격자, 지방 관리, 해당 지역의 군 지휘관과 경관 그리고 아이다르 대대의 대변인 등을 면담하였다.

 

우리의 조사 결과, 아이다르 대대는 공식적으로는 이 지역의 우크라이나의 통합치안사령부가 관할하지만 사실상 그들에 대한 감독이나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역 경찰들은 아이다르 대대의 폭력 남용에 관해 쉬쉬하거나 또는 언급할 수 없었다.

 

아이다르 대대가 저지른 범죄 중 일부는 전쟁 범죄에 견줄 만하고,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나 아마도 지휘관은 국내법과 국제법 하에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예를 들어 셰볘로도네츠크(Сєвєродонецьк)를 포함하는 광역권이나 리시찬스크(Лисичанськ), 루비즈네(Рубіжне), 샤스쨔(Ща́стя) 등 현재 아이다르 대대가 작전을 펼치고 있는 지역은 지난 5월 중순부터 7월말까지 이른바 루간스크 인민공화국(LNR)의 분리주의자 세력의 통제 하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분리주의자 세력이 민간인을 상대로 납치, 절도, 살인 등 광범위한 폭력을 저질렀다는 보고가 있었다. 엠네스티는 다른 지역에서 무장 분리주의자 단체가 자행한 폭력에 대해서도 기록한 바가 있다.

 

아이다르 대대는 지난 7월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공세와 그 중에서도 특히 루간스크시() 북방 24킬로미터에 위치한 샤스쨔를 탈환할 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이다르 대대는 전투를 벌이는 동안 많은 수의 전투원을 잃었다. 201496일자로 정전(停戰) 발표가 난 이후 샤스쨔 남쪽에서 벌어진 기습공격에서 수십여 명이 사망하였다.

 

아이다르 대대는 국가적으로는 헌신적인 병력이라고 칭송을 받는 반면, 지역적으로는 잔혹한 복수, 절도, 구타, 강탈 등으로 악명을 얻었다.

 

엠네스티는 우크라이나 당국에게 아이다르 및 여타의 지원대대를 실효성 있는 지휘통제 아래 위치시키고, 폭력 남용에 관련된 모든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조사를 촉구했으며, 책임자에게 책임을 지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그들이 수복한 지역에서 이전에 분리주의자들 치하의 지역에서 만연했던 비법성이나 폭력의 남용을 방치할 입장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지원대대가 저지르는 폭력 및 전쟁 범죄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 동부의 긴장상태는 극도로 악화될 것이고, 신생 우크라이나 정부가 더욱 광범하게 법치를 강화하고 유지하겠다며 선언한 정신은 훼손될 것이다.

 

아이다르 대대가 저지른 폭력 남용

 

엠네스티는 지난 7월말부터 8월말까지 노보아이다르 구(, Новоайдарський район), 스타로블리스크(Старобельск), 셰볘로도네츠크, 리시찬스크, 샤스쨔에서 아이다르 대대원들이 자행했다고 알려진 수십여 건의 폭력 남용 사례를 기록으로 남겼다.

 

일반적으로 전투원들은 지역 민간인, 그중에서도 사업가 또는 농부들을 분리주의자들과 협력했다고 누명을 씌운 후에 납치하여 임시로 제작한 구금시설에 가두고, 이후 그들을 풀어주거나 또는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SBU)에 넘겼다.

 

엠네스티가 기록한 거의 모든 사례에서 피해자들은 납치될 때 그리고/또는 심문을 받을 때 구타를 당했고, 석방을 위해 돈을 냈거나 아니면 대대원들에게 돈, 차량, 전화기 및 여타 값진 것들을 빼앗겨야 하였다. 엠네스티가 접근한 많은 수의 목격자들과 피해자들은 아이다르 대대원의 복수가 무서워 폭력 사건을 자세히 언급하길 꺼려하였다. 다음의 사례에 나와 있는 피해자들 및 목격자들의 이름은 바뀌었다.

 

- 825~27, 아이다르 대대원들은 리시찬스크 북쪽의 조그마한 도시인 노보드루졔스크(Новодружеск)에서 광부 4명을 납치하였다. 그 중 한명인 안드릐”(실명이 아니다)는 폐암 때문에 화학치료를 받고 있었다. 안드릐는 엠네스티에게 27일 오후 3, 그가 집 바깥에 있을 때 일군의 아이다르 대대원들이 소형버스를 타고 왔다고 말해주었다. 자동화기를 소지했고 위장 제복을 입었던 두 명이 안드릐에게 오더니 땅바닥에 엎드리라고 하였다.

 

그들은 내 턱을 깨뜨렸어요... 그들이 바닥에 엎드려!’라고 소리쳤고 난 바닥에 엎드렸지요, 한 녀석이 저를 발로 차더군요... 그들은 테이프로 내 눈과 손목을 동여맸어요.”

 

그들은 저와 제 이웃을 소형버스에 집어넣었어요... 그들은 20여분을 운전하더니, 일종의 방 같은 곳으로 절 데려왔죠. 제 눈은 테이프로 가려져있었기 때문에 저는 그곳이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볼 수 없었어요... 그들은 저를 그곳에 하루 동안 두었죠. 그들은 물과 비스킷 한 조각을 가져다주었고, 제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절 데려다줬어요.”

 

그곳엔 12~15명가량의 다른 구금자들도 있었어요. 우리는 서로 말할 수 없었죠... 전 두 번이나 심문 당했습니다. ‘너는 어디 있었는가? 무엇을 했지?’ 그들은 더 이상 때리진 않았어요. 그러나 전 바로 옆방에서 누군가가 맞고 있는 소리를 들었죠.”

 

안드릐는 포획자들이 그를 셰볘로도네츠크의 한 경기장에서 여전히 눈가리개를 한 채로 풀어주었다고 말하였다. 안드릐의 아내는 지역 경찰을 찾아갔고, 안드릐가 포획자들에게 빼앗겼던 여권 두 개와 전화기는 돌려받았으나 결국 차량 문서, 운전면허증, 열쇠, 지갑, 은행카드 등은 돌려받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안드릐 내외는 이를 형사 사건으로 만들지 않았다. 828일에는 안드릐의 은행카드에서 누군가가 돈을 인출하려고 하였다. 엠네스티는 안드릐의 휴대전화에 그러한 시도를 알려주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것을 보았다.

 

구금된 다른 남자 두 명의 가족들은 828일 피랍자의 소재지를 알고 싶어서 셰볘로도네츠크의 경찰서를 찾았다. 그들은 엠네스티에게, 리시찬스크의 경찰 및 군인들이 그들에게 셰볘로도네츠크에 있는 비밀 구금시설에 관해 말해주었으나, 셰볘로도네츠크 경찰은 그러한 시설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경찰은 엠네스티에게도 시설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같은 곳으로부터 갓 풀려나온 어떤 이는 예의 두 명 중 한 명을 알아보았고, 구금자들이 우크라이나의 국가(國歌)를 암송해야 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 두들겨 맞았다고 일러주었다.

 

- 825일 오후 4시경, 아이다르 대대원들은 스타로블리스크 외곽 텔레비전 송신탑 근처에서 31살의 지역 사업가인 예벤을 납치하였다.

 

예벤은 엠네스티에게, 복면차림의 세 남자가 검은 바즈(VAZ)차를 타고 도착했고, 자신이 폐기된 주유소 화장실에 들르려고 잠깐 멈춘 새에 그에게 접근하여 차를 수색했으며, 30,000 흐리브냐(대략 1,700 유로)를 챙기고 분리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웠다고 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들은 내 머리에 복면을 씌우고 20여 분간 날 태워 어디론가 갔어요. 그들은 차고 같은 곳으로 날 데려가더니 심문하기 시작했고, 내가 분리주의자라고 고백하길 요구했어요.”

 

그들은 나를 세 번 심문했습니다. 매번 저를 두들겨 팼죠. 총열로 패기도 하고, 도끼의 뭉툭한 끝으로는 신장을 가격했으며, 다른 것들을 이용하기도 했어요. 그들은 나를 끌고 나가 처형하겠다고 위협했죠.”

 

하루가 지난 후에 그들이 돌아와 말하길, 아이다르 대대가 나를 구금했었으나 이제는 알파’[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에 소속된 부대]로 내 신변을 넘긴다고 했죠. 하지만 난 그들이 같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어요.”

 

예벤은 결국 포획자들이 그에게 석방을 위해 얼마를 낼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고, 그가 이미 가진 걸 전부 빼앗겼다고 하자 풀어주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 사건을 경찰에 넘겼으나 돈, 차량, 휴대폰 2, 귀금속 등 빼앗긴 소지품을 되찾을 수 없었다.

 

- 823일 오후, 아이다르 대대원들은 셰볘로도네츠크 근교에 있는 올레한드리브카(Olexandrivka) 마을의 올레나의 집을 급습하였다.

 

82살의 올레나는 엠네스티에게 그녀가 딸과 사위, 손자와 함께 집에 있었다고 말하였다. 가족은 총성을 들었고 차량 몇 대가 자택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안카메라를 통해 보았다. 올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문을 열자마자 그들은 내게 달려들었어요. 두려움에 문을 놓자 자동으로 닫혔지요. 그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한 명은 차 위로 훌쩍 뛰었죠. 나는 차고 안으로 달려갔어요. 그들은 계속 쏘았죠. 자동화기의 파열음이 들렸어요. 소음이었죠. 타다다다.”

 

차고 안에서 이미 난 총에 맞은 상태였죠... 나는 문으로 기었고 소리를 지르며 문턱에서 넘어졌어요. 내 딸이 나오면서 소리를 지러더군요. 뭐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머니, 뭐하시는 거예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라... 피가 계속 흘렀죠. 내 딸이 지혈해주었어요.”

 

올레나는 엠네스티에게 무장한 남자가 집을 뒤졌고, 손자에게 분리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워 구금하길 원했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어찌어찌하여 손자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성공했으나, 그들은 집안에서 발견한 얼마간의 돈과 손자의 사륜차를 가져갔다.

 

올레나는 택시로 셰볘로도네츠크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의사는 엠네스티에게 그녀가 7시간의 수술을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파편으로 인해 복부를 심각하게 다쳤다. 그녀는 결장(結腸)을 절단해야 했고, 바스러진 늑골 두 개를 제거해야 하였다.

 

당국의 반응

 

엠네스티는 아이다르 대대원들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하여 셰볘르도네츠크 및 루비즈네의 지휘관에게 직접적으로 우려를 제기했다. 지휘관은 대대가 단순화된구금절차를 따랐음을 확인했고, 셰볘르도네츠크 지역에 구금자들을 가둬두는 자체 시설을 확실히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체포 중에 구타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구금된 동안 구금자들이 눈이 가려진 채로 있었다는 점, 자기네 병력이 안드릐를 붙잡았던 점, 그가 안드릐의 문서가 담긴 가방을 경찰에 넘겨준 것을 개인적으로 감독했다는 점 등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대대원들이 저지른 절도 행위에 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러한 행위를 다룰 어떠한 조지의 도입도 필요치 않은 것으로 보았다. 그는 휘하 병력들이 올레나의 손자의 차를 일시적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에 가져간 사실을 인정했고, 그것을 돌려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올레나의 가족은 이후 엠네스티에게 트로이츠크(Тро́ицк, 루간스크 지역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있음) 경찰이 그 차가 명백히 불법적으로 팔린 후에 차와 차를 몰던 남자를 가두었다고 알려주었다.

 

셰볘르도네츠크 경찰과 군 당국은 엠네스티에게 아이다르 대대원들에 의해 자행된 일들에 대한 형사 사건이 38건이나 되며, 대부분은 절도사건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러한 빈발하는 범죄 관련 보고는 국방장관과 내무장관에게 까지 올라가나, 현재까지 확실한 결과는 없는 실정이다. 지역 경찰은 엠네스티에게 자기네들은 아이다르 대대원들이 저지르는 만연한 범죄에 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으나 형사 사건으로 등록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이 지역의 고위 군관은 엠네스티에게 국방장관이 자신의 보고를 받은 이후에 아이다르 대대를 검사하라고 8월초 두 명의 특별위원을 보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아이다르 대대의 재편성과 절차의 체계화를 위한 그들의 권고는 아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권고

 

엠네스티는 우크라이나 당국에게 다음을 촉구한다.

 

- 아이다르 대대 및 여타 지원대대의 법적 상태를 명확히 하고;

 

- 지원대대를 분명한 명령체계, 통제, 책임 아래 통합시키며;

 

- 지원대대원들이 자행한 폭력 남용에 관한 모든 혐의, 구체적으로는 북 루간스크 지역에서 아이다르 대대원들이 저지른 폭력 남용에 관한 모든 혐의에 대해 즉각적이고 빈틈없으며 불편부당하고 실효성 있는 조사를 수행하고;

 

- 조사를 받고 있는 범죄의 피해자 및 목격자들을 보복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지키며;

 

- 지원대대원들을 포함하여 군() 및 법을 집행하는 작전과 관련 있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행동 및 어겼을 경우 개인책임과 지휘책임에 관련된 국내법과 국제법의 조항들을 숙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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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9. 1. 16:35

* 2014년 5월 12일 작성.

 

필자: Slavoj Žižek

일시: 201448

출처: http://inthesetimes.com/article/16526/what_europe_can_learn_from_ukraine

사진: 201311, 키예프(Kiev)에서 일어난 시위는 결국 대통령(Prime Minister)을 축출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어떻게 서유럽과 합칠지에 관한 결정에 직면하고 있다.

 

제목: 유럽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What Europe Can Learn From Ukraine.)

부제: 유럽 좌파들은 우크라이나 시위대를 가르치려드는데 너무 조급하다. (European Leftists are too quick to patronize Ukrainian Protesters.)

 

 5월 말로 예정된 유럽의회 선거가 가까워오는 지금,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최근의 사건들을 기억해야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럽연합으로의 통합보다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우선순위로 두어 시위를 촉발시켰고, 그것은 2월 말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 대통령(Prime Minister)과 그의 졸개들을 무너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좌파들은 가련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려드는 방식으로 대규모 시위 소식에 반응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지속적으로 유럽을 이상화(理想化)하고, 바로 그 유럽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할 정도로 얼마나 착각에 빠져 있는가! 그들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우크라이나를 서유럽의 경제식민지로, 오늘날의 그리스와 같은 처지로 만들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좌파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유럽연합의 실상에 관해 전혀 무지하지 않다는 사실은 도외시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유럽연합이 노정하는 갖가지 문제와 격차를 매우 잘 알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전하고자 하는바는 간단히 말해, 그들이 처한 상황은 더욱 엉망이라는 것이다. 유럽의 문제(경제적 불안전과 가차 없는 실업)는 여전히 부유한 자들의 문제이다. 그리스가 처한 끔찍한 곤궁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난민들은 여전히 대규모로 그곳을 찾고 있으며, 우파 애국자들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훨씬 더 중요한 문제는 우크라이나 시위대들이 언급하는 유럽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다. 유럽은 어떤 단일한 전망(展望)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는 내셔널리스트(nationalist)적이고 심지어 파시스트(Fascist)적인 요소부터 오늘날 유럽의 기관들이 그것을 더욱더 배반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지구적인 정치적 상상에 유일무이하게 기여한 사상이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평등자유(égaliberté), 즉 평등 속의 자유(freedom-in-equality, *진태원에 따르면, 발리바르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이론적 핵심을 이루는 두 축을 인간=시민명제와 평등=자유명제라고 제시한다.)라고 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 범위에 걸쳐있다. 이러한 두 극() 사이에서 오직 순진무구한 자들만이 자유민주주의적(liberal-democratic) 자본주의에 그들의 믿음을 건다. 그러므로 우크라이나의 시위에서 유럽이 봐야할 것은 그 자신의 최선과 최악이다.

 

 우크라이나 우파의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새로워진 반()이민, ()종교적 포퓰리즘(populism)의 일부로, 그들은 스스로를 유럽의 방위라고 표현한다. 한 세기 전, 체스터턴(Gilbert K. Chesterton, 1874~1936)은 이 새로운 우파의 위험을 분명히 감지했고, 그가 쓴 정통(Orthodoxy)에서 종교 비판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근본적 교착상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자유와 인간성을 구하기 위해 교회와 싸우기 시작한 사람은 교회와 싸우기만 하다가 결국 자유와 인간성을 내팽개치게 된다.” 이러한 설명은 종교 옹호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가? 많은 광신적인 종교 수호자들이 현대의 세속적인 문화를 맹렬히 공격하면서도 결국 어떤 유의미한 종교적 경험도 저버리지 않는가? 또한 이는 이민이라는 위협에 맞서 유럽의 수호자들이 최근에 대두하는 것에도 적용되지 않는가? 유럽의 기독교적 유산을 보호하겠다는 그들의 열망 속에서, 새로운 광신자들은 그 유산의 참된 핵심을 저버릴 준비가 돼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주류 자유주의자들은 인종적 또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들을 위협할 때에 우리는 문화적 관용이라는 자유민주주의적 안건을 배경으로 모두 뭉쳐야 하고, 구할 수 있는 것은 구해야 하며 더욱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의 꿈은 제쳐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한편 우크라이나 시위대가 그토록 맹렬히 옹호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유러피언 드림은 어떠한가? 어느 누구도 유럽연합 안의 무엇이 우크라이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그 정책묶음에 긴축 수단이 포함될 것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모두 지난 세기 소련에서 나온 잘 알려진 이야기이자 다른 나라로 이주하길 원하는 유대인인 라비노비치(Rabinovitch)에 관한 농담을 알고 있다. 소련 이주국(移住局)의 관료가 왜냐고 물었고, 라비노비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이 두려운데, 소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잃을 것이고, 새로 등장한 권력은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짓의 죄과를 모두 우리 유대인들에게 떠넘길 것이며, 다시 반()유대 계획(program)이 나타나날 것이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료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당신의 말은 순전한 헛소리야.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고, 공산주의자들의 권력은 영원할 것이다!” 라비노비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 바로 그게 둘째 이유입니다.”

 

 우리는 위와 비슷한 대화를 비판적인 우크라이나인과 유럽연합의 재정관 사이에서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이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당황해하는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이 두려운데, 유럽연합이 러시아의 압박에 우리를 간단히 넘겨줄 것이고, 우리의 경제가 붕괴되도록 놔둘 것이며유럽연합 재정관이 그를 가로 막는다. “하지만 당신네는 우리를 믿을 수 있어. 우리는 당신네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당신네들을 단단히 통제하고, 무엇을 할지 조언할 거야!” 그 우크라이나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 그게 바로 둘째 이유입니다.”

 

 그렇다. 키예프의 독립광장(Independence Square)에서 싸웠던 마이단 시위대들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싸움, 즉 새로운 우크라이나가 어떤 모습이 될지를 두고 벌이는 싸움은 이제야 시작됐다. 그리고 이 싸움은 푸틴의 간섭에 대항하는 싸움보다 훨씬 더 고될 것이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값하고,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족한지의 여부가 아니라, 오늘날의 유럽이 우크라이나인들의 심원한 열망에 값하는지의 여부이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과두집단이 뒤에서 조종하는 형태로, 인종적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뒤섞인 비빔밥처럼 된다면, 우크라이나는 오늘날의 러시아(또는 헝가리)만큼 유럽적이게 될 것이다. 정치적 논평가들은 유럽연합이 러시아와 갈등하는 우크라이나를 충분히 지원하지 않았고, 러시아의 크림 반도 점령과 합병에 대해서도 건성으로 대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다른 종류의 지원이 심지어 엄청날 정도로 빠져있다.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사회경제적 교착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실현가능한 전략을 제공받은 적이 결코 없다. 그러한 지원을 하기위해서라도, 유럽은 우선 자신을 변모해야 하고, 스스로의 유산이 담고 있는 해방적 핵심에 다시금 헌신해야 한다.

 

 걸출한 보수주의자 엘리엇(Thomas S. Eliot, 1888~1965)은 그가 쓴 문화의 정의에 관한 단상(Notes Towards a Definition of Culture)에서 유일한 선택이 종파주의(宗派主義)와 믿지 않음(non-belief) 사이에서 내려야 하는 선택이 되고, 종교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원래의 송장으로부터 종파적 분리를 수행하는 것이 되는 계기들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유일한 기회이다. ()유럽의 썩어가는 송장으로부터 종파적 분리를 수행하는 방식만이 우리가 평등자유라는 유럽적 유산을 살아있게 할 수 있다. 그러한 분리는 우리가 우리의 숙명이자 협상할 수 없는 곤경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바로 그 전제, 다시 말해 주로 지구적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로 명명되는 현상과 근대화"를 통해 우리를 그 질서에 순응시켜야 할 필요성 양자를 문제적으로 만든다. 직설적으로 말해, 대두하는 신세계질서가 우리 모두에게 협상할 수 없는 숙명일 때 유럽은 패배한다. 따라서 유럽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의 숙명이라는 주문을 깨트리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그렇게 나온 새로운 유럽 안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유럽으로부터 배워야 할 사람은 우크라이나인이 아니고 유럽 자신이다. 유럽은 반드시 마이단 시위대에 동기를 부여한 그 꿈을 포함하기 위해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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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9. 1. 16:32

* 2014년 3월 4일 작성.

 

필자: 블라디미르 이셴코(Volodymyr Ishchenko)

일시: 2014년 2월 28일(GMT 1532)

출처: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4/feb/28/ukraine-genuine-revolution-tackle-corruption

사진: 지난 금요일, 친러 코사크인들이 크리미아 공화국 의회건물 바깥의 전쟁기념물 근처에 모여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관해 흔히 두 가지 수식이 뒤따른다. 하나는 이것이 민주혁명, 심지어 사회혁명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것이 우익쿠데타, 심지어 네오나찌의 쿠데타라는 것이다. 사실 앞서의 두 성격규정은 모두 틀렸다. 다만 지금껏 우리가 목격한 것은 우크라이나 서부와 중부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나 동부와 남부 지역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대중봉기이며, 그 결과 정치 엘리트세력 간의 교체는 이뤄졌다. 그러나, 최소한 현정권 밑에서 민주적이고 급진적인 변화의 전망은 굳게 닫혀있다.


 우크라이나의 현 '혁명'이 왜 사회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가? 마이단(Майдан; 광장) 운동이 주장한 몇몇 요구는 관철됐다. 일례로, 사망한 시위대 중 대다수를 죽인 악명높은 베르쿠트(Бе́ркут) 전투경찰대는 해체됐고, 야누코비치 행정부의 가장 악랄했던 관료들도 파면됐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구조적인 민주적 변화의 시작을 의미하거나, 새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만연한 부패, 즉 가난과 불평등을 뿌리채 뽑을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더욱이 새정부는 그러한 문제들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고, 경제위기의 부담을 부유한 과두세력이 아닌 가난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고스란히 지울 것이다.


 새정부는 마이단 운동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신자유주의적 안건과 맞바꿨다. 지난 목요일 인준을 받은 새정부의 각료는 주로 신자유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의회에, 가격과 관세에 관한 "반민중적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을 강변했고,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돈을 빌려올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갖출 준비가 돼있다고 공표했다.


 임금을 동결하고 가스값을 대폭 인상하라는 국제통화기금의 요구는 우크라이나의 이전 정부가 유럽연합과의 연계 합의에 관한 협상을 유예한 이유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새정부를 "자살자 정부"라고 부를만 하다.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트릴 이러한 반사회적 정책과 통화붕괴에 대한 대중들의 실망을 예측하기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극우세력은 새정부 내에서 주요한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몇몇 논자들은 우크라이나 새정부 내의 극우세력의 준동이 유럽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경고했다. 현재 부수상, 국방장관, 생태장관, 농업장관, 검찰총장의 자리를 국수적인 자유당(Свобода)이 쥐고 있다. 조국당(Батьківщина) 온건파에 뒤늦게 가담해 마이단의 자위대세력을 효율적으로 지도한 안드리 파루비(Andriy Parubiy)는 우크라이나 사회국민당의 창립자 중 한 명이자 준군사적 청년단체의 전 지도자였고, 지금은 국방안보회의의 수장이다.


 동시에, 시위에는 잘 기획된 무장 쿠데타라는딱지가 붙게 됐다. 정당들은 마이단 운동, 특히 준군사적 무장대를 거의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실상 이 정당들은 정기적으로 마이단 운동을 고무하고 있고,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야누코비치와의 타협을 촉구하고 있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새정부가 악명높은 우파지구(Right Sector)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파지구원들은 이제 대중적인 영웅들이고, 승리한 "혁명"의 전위대이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서 경찰들로부터 총기를 강탈했고, 야누코비치가 실각한 지금은 "부패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 혁명이 계속 진행돼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이단 운동에서의 단호함과 핵심적인 역할을 자찬한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우파의 반동적 생각을 목도하고 있다. 최근 우파지구의 공보비서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유럽이 갈 바른 길을 말해야 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가지 않고 여자 동성애자나 남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의 권리를 용인하는 "완전한 자유주의"라는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유럽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파지구가 새정부에 맞서 움직이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파지구는 급격하고 깊어지는 경제위기 속에서 새로운 반란을 주도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에 강한 좌파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우익 대중주의자들은 사람들의 사회적 고충을 들쑤셔 놓을 것이다.


 동시에, 잠정적인 새 "사회적 마이단 운동" 에서 급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적 역할은 지배계급에 맞서는 어떠한 전국적인 운동도, 문화적으로 쪼개진 우크라이나의 동부와 남부의 대중참여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더욱이 그러한 급진 민족주의자들은 심지어 분리주의적 성향을 증폭시키고, 현재 크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친러적 도발을 기도한다. 불가피하진 않겠지만, 현재 전면적 내전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방측에게 가장 최선은 우크라이나의 지역간 갈등을 봉합할 평화적 해결책을 고수하고, 극우세력의 새정부 참여와 길거리의 통제받지 않는 우익 준군사조직을 강하게 반대하는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서방측이 우크라이나의 외채를 탕감해줌으로써 무조건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외채탕감은 전세계의 많은 진보적 운동들이 제기하는 민중적 요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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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4. 9. 1. 16:26

* 2014년 1월 30일 작성.

 

출처는 여기.


 

 

 오바마 대통령은 2014년 1월 28일, 악화일로의 생활 수준이 나아질 징조를 찾는 수백만의 미국인 청취자에게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교서에서 오바마는 아주 부유한 자와 그 나머지 사이에 벌어지는 공전의 빈부격차에 대해 언급했고, 연방최저임금을 시간당 7.25불(USD)에서 10.10불로 인상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대안사회주의(Socialist Alternative) 소속이자 시애틀(Seattle) 시의회 의원인 크샤마 사완트는 곧바로 연두교서에 대해 위와 같이 답했다. 그녀는 대통령과 민주당의 조치가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를 다루기엔 부적절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시간당 10.10불로 인상하는 조치를 진전이라고 환영했으나, 또한 같은 조치는 생활비용이 치솟는 중인 대도시 거주 노동자들에게는 충분하지 않다고 논박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대한 답

 

크샤마 사완트, 대안사회주의, 시애틀 시의회

2014년 1월 28일 화요일

 

오늘밤, 오바마 대통령은 깊어지는 불평등에 관해 얘기했다.

 

그러나 그 불평등은 바로 오바마식 정치의 증거이다. 기업정치 및 전쟁선동과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근본적인 변화를 진지하게 갈망하며 그에게 표를 던진 수천만 인민들의 희망을 배반한 바로 그 정치.

 

오늘날 빈곤은 기록상 가장 높은 수치이고, 이른바 구제(recovery) 기간 동안 생산성 증가분의 95프로가 상위 1프로에게 가고 말았다.

 

대통령이 소득 불평등에 주목한 것은 그의 정책 실패를 인정한 것이다.

 

최저임금 15불을 요구하는 패스트푸드 노동자 및 저임금 노동자들의 집회, 시위, 파업은 대통령의 정책실패를 인정하게끔 만들었다. 초부유한 자들과 사회적 부를 창조하기 위해 일하는 우리들 사이의 넓어지는 간극에 대한 분노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한 몫 거들었다.

 

월가의 범죄자들이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반면,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같은 용감한 내부고발자들은 사냥감으로 전락했고, 그들에 대한 비헌법적 행위들은 법의 저촉없이 계속 되고 있다.

 

오바마는 기본적인 헌법적 권리를 노골적으로 완벽히 위반하여 수천만의 평범한 인민들을 대상으로 간첩활동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 앱('앵그리 버드' 같은 게임)을 이용하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두 전쟁(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역자 주)을 끝내겠다고 했으나, 정작 그는 여러 국가에서 드론(drone)을 이용한 잔혹한 전투를 계속 강화하며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상했고, 평생토록 병원에 가야하는 처지로 돌아온 미군 병사들의 곤란과 참전용사 예우가 줄어든 것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의 부서진 웹사이트는 지불가능한 건강관리를 약속한 그를 믿은 수백만 명의 부서진 희망을 상징한다.

 

"기후 변화는 사실이다"라고 오바마는 말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있다. 그가 보기에 기후 변화는 갈수록 악화된다. 그리고 석탄이나 수리학적파쇄(fracking) 같은 엄청나게 파괴적인 행위들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재앙이나 다름없는 키스톤 XL 관로를 멈추려는 지도력은 오바마나 미의회가 아닌, 그것을 멈추기 위해 조직하고 직접 행동을 취한 수천 명의 용감한 인민들로부터 나왔다.

 

오바마는 "우리의 망가진 이민 체제를 수리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기록적인 추방 횟수를 보유한 대통령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이러한 문제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고도 아니다.

 

노동자들은 거의 40년에 걸쳐 임금 정체와 치솟는 소득 불평등에 직면했다.

 

네 명의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과 세 명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이 통치했던 40년. 지난 40년은 공화당과 민주당 중 어떤 당도 이러한 문제들을 풀 수 없으며, 두 당 모두 근본적으로 같은 이해, 즉 초부유하고 거대한 기업의 이해를 대표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는 오직 근본적, 체제적 변화에 기반 해야만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월가와 '미국이라는 기업'의 정책들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자본주의는 99프로를 실패하게 만들었다.

 

두 당 모두 자유시장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주인 기업들의 이해에 충성스럽게 복무한다. 두 당의 차이는 오로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정치체제는 완벽하게 불통이고, 부서졌다. 기업의 현금에 압도된 것이다.

 

노동자, 젊은이, 유색인, 여성, 노인, 장애인, 이주민, 즉 '99프로'는 목소리를 내거나, 대표할 누군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 고유의 정당을 필요로 한다. 대기업과 관계없고, 대기업을 대표하는 당들과 관계없는 그런 정당을.

 

누군가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애틀 시의회에 도전한 나의 경우를 보라. 난 공개적으로 사회주의자임을 천명했다. 난 기업으로부터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평범한 노동자들이 내 선거운동을 위해 14만불을 모아줬다. 난 자본주의적 기성체제를 겨냥하는 독립적이고 노동-계급의 도전자로서 경선에 임했다.

 

나는 최저임금 15불, 부자들에게 과세하여 대중교통 및 대중교육 지원과 지불가능한 주택정책 실현, 집세 통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나는 시애틀 및 미의회의 정치인들이 나머지 우리들 삶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동안 평균적인 노동자들의 임금을 의제로 취했을 뿐이다.

 

우리는 450여 명이 넘는 풀뿌리 운동을 설립했다. 나는 약 10만 표 가량으로 당선됐고, 이는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적인 사회주의자가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경우였다.

 

미국인들은 다른 무언가에 굶주려 있다. 그리고 단지 시애틀만 이러한 것은 아니다. 최근의 투표는 미국인의 60프로가 세 번째 정당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최저임금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오바마는 "어떠한 전일제 노동자라도 빈곤 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해결책은? 3년 이상 최저임금을 10.10불로 인상하는 것이다.

 

나는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어떠한 진전도 절대적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그러한 진전을 가로막는 공화당의 행태는 언어도단이다.

 

그러나 양심에 손을 얹자. 3년 이상 시간당 10.10불(또는 전일제 일거리를 구할 정도로 운이 좋다면 연봉 2만불)은 노동 가족이 빈곤에서 빠져 나오는 표가 아니다.

 

패스트푸드 노동자들과 월마트(Walmart) 노동자들은 지난 수년 간 시간당 15불을 위해 나라 곳곳에 있는 도시들에서 파업에 돌입했고 강력한 시위를 선보였다. 오직 그것만이 지금 정치인들이 최저임금 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시택 공항(SeaTac)이 실시한 시간당 15불의 예를 보라. 최저임금 시간당 15불 발의가 투표 용지에 기입됐고, 승리했다!

 

오바마는 "올해를 행동하는 해로 만들자"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우리에겐 더 높은 임금과 최저임금 시간당 15불을 위한 노동자들과 빈곤한 자들의 행동이 필요하다. 평생 그들을 옭아매는 수업료와 빚에 맞서는 젊은이들의 행동이. 전염병과 같이 확산되는 가택압류에 맞선 주택보유자들의 행동이. 반노조법에 대항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노조원들의 행동이.

 

조직하라!

 

당신의 노조 내에서 활동하라. 지역차원의 운동에서 활동하라. 환경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가담하라.

 

대기업에 도전하고 자본주의와 싸우기 위해 나와,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인 대안사회주의에 참여하라.

 

2014년 반격의 진원지는 '15투쟁(Fight for Fifteen)'이다. 당신에게 이 투쟁의 일부가 돼달라고 촉구한다. 15Now.org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 서명하여 가담하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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