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7. 8. 12. 01:19

가디언 고등교육 네트워크

 

일시: 2017811일 금요일

저자: 익명의 학자

주소: https://www.theguardian.com/higher-education-network/2017/aug/11/how-do-you-finish-a-phd-when-you-dont-feel-you-belong-at-university

 

당신이 노동계급의 학생으로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때 어떻게 박사과정을 마칠 것인가?


우리가 얼마나 격려를 받느냐에 관계없이 대학은 덜 특권적인 학생에게 험악할 수 있다.

  


나는 현재 박사과정 4년차이다. 내 펀딩은 두 달 안에 동이 난다. 제출할 논문도 없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 누구도 내게 박사과정이 적극성(assertiveness)의 시험장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아래서 설명하겠지만, 나는 쌀로 만든 푸딩만큼 적극적이다.

나는 학부 때 영어와 역사를 전공했다. 말년차 땐 거의 고장 난 기분이었다. 내 스스로가 대학에 있을 만하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시험을 잘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석사과정 때는 세미나가 소규모였고 강사들은 학생들의 이름을 알아야했기에, 나는 학부 말년차 때보다 더욱 고장 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판단한다는 압박감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지도교수는 내 석사논문이 박사과정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녀는 내게 장학금을 신청하게 했다. 나는 절대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원했다. 내 직감은 내가 아직 이를 위해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충분히 성숙하다거나 자신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장학금을 받자 내 가족은 무척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엄마는 박사 우리 딸이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23살의 나이로 4년짜리 연구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나는 운이 좋았고, 무서웠으며, 궁지에 몰린 기분을 느꼈다.

공교롭게도 불안해하던 내 직감은 정확했다. 박사논문은 내가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도의 적극성을 요구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왜인지에 대한 긴 목록이었다. 당신의 주제가 왜 중요한가? 이 주제를 연구하는 데 왜 당신이 최선의 연구자인가? 당신은 왜 특정한 방법으로 당신의 주제에 접근했는가? 당신은 왜 특정한 결론에 도달했는가? 딱히 잘못된 답이 있다기보다는, 당신의 답이 무조건 맞는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셈이다.

또한 박사과정을 할 때 필요한 체계성도 부족했다. 당신은 매일같이 당신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해야 하고 작업시간을 분명히 정해야 한다. 당신은 반드시 책상에 앉아 당신의 분야에 무언가 기여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시험을 마주쳤을 때 내가 어떻게 했겠는가? 내 지도교수가 장학금 신청에 유리하게 보일 특정한 방향을 내 연구에 제안할 때, 내가 감히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년이 지나도록 내 주제도 확실히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작업시간이 신성시되고 내가 박사과정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또는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박사과정 입학 제안을 받아들이는 일은 당신이 갑자기 이 업계에서 요구되는 모든 기술과 능력을 갖춘 전문적 학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학들은 당신에게 이러한 기술을 알아서 터득하길(osmosis)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사과정생으로서 당신은 반드시 가르치고, 학부 수업을 고안하고, 장학금 신청서를 작성하고, 논문을 쓰고, 학회와 워크숍을 조직하고, 온라인에서 학술적 경력을 쌓고, 국내외적 참여를 통해 당신의 연구 공동체에 일원으로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는 동시에 연구와 논문 집필을 해야 함은 물론이다.

만일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괜찮고, 도움을 청해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학계의 성원이나 실무 직원들이 이러한 기술들을 획득하도록 당신을 잘 도울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데도 일정 정도 이상의 적극성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나는 학부생 때, 대학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상담 서비스를 받았다. 이러한 도움 없이 내가 학부과정을 마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서비스는 극단적으로 바빠져서 이제 학생들은 오직 2번 정도의 상담만 받는다. 나는 학부 말년차에 총 16번의 상담을 받았다.

내가 대학에 있는 8년 동안, 학생들의 정신적 건강문제의 증가를 목격했다. 나는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그러한 학생들을 찾는 데 좀 더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고 느낀다. 도움은 요구에만 부응할 것이 아니라, 대학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학생들에게 은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나는 내 연구에 그리 열정적이지 않은데, 내가 다른 이들로 하여금 내 연구를 좌우하게 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의 노동계급 출신 학생이다. 나는 적극적이지 않은데, 사람은 권리를 가지고 있고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자라온 이들이 지닌 편안한 자신감이 내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안한 자신감은 대개 중간계급과 상층계급의 전유물이다.

혹자는 우리의 유동적이고 현대적인 사회에서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연적으로 확신에 차있고 느긋하다면, 그 사람은 출신에 상관없이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어찌하여 대학에 빠져들었고, 여기에 소속되어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운 좋게도 나는 강사들, 내 가족, 장학재단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악전고투중이다.

나는 4년 전에 이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과정 동안, 많이 배웠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지금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실패라는 유령에 영원히 사로잡힐 것인가, 아니면 장학금과 등록금 없이 언젠가는 내 불안감을 극복하고 논문을 써낼 방안을 어떻게든 찾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채 곡예 하듯 작업하고 연구하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내가 이 두 가지 중 뭐라도 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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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7. 8. 11. 06:36

116~127쪽.


공산당의 주도로 그리고 그 지도하에 공산주의의 자기-철폐는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한 사건이고, 이는 전쟁, 예컨대 냉전에서의 패배나 또는 공산주의에 복속된 인민들이 자유를 위해 싸운 결과로 아직까지도 일관되게 인식되기 때문에 종종 하찮은 것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 같은 매우 친숙한 설명은 하나도 정확하지 않다. 냉전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은유였고, 따라서 이는 오직 은유적으로만 패배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 소련은 난공불락이었다. 그리고 자유를 외치던 그 모든 단체들은 자본주의로의 이행 이전에 모두 수그러들었다. 러시아의 반체제 운동은 198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모두 끝난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폴란드의 연대(Solidarność)운동 또한 폴란드 계엄군에 의해 즉각적으로 종결되었다. 북경에서의 소요는 성공적으로 진압되었고 질서가 회복되었다. 정확히 바로 이러한 모든 내부적 반대의 총체적 패배와 어떤 가능한 외부적 간섭에 대해 완전히 자유로웠던 점이 소비에트 및 중국 지도부로 하여금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착수하게 이끌었다. 만일 지도부가 절대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더라면, 그렇듯 거대한 정도의 재건과 가속을 실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재건의 과정에서 소련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패배라는 인식에 기여하곤 하였다. 외부에서는 소련을 러시아 제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지배적이었고, 소련의 해체는 결과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여타 국가의 노력을 방해하는 러시아의 패배로 종종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러시아가 소련을 해체했다는 사실, 즉 옐친 행정부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및 벨로러시아와의 조약에 따라 소련에서 탈퇴한 사실은 망각된다. 따라서 다른 소비에트공화국들에 독립이 부과되었다. 이는 위에서부터, 그리고 중앙에서부터, 가만히 수동적으로 당하지 않고,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업을 부여 받았다는 신념 속에서 성장한 지도부의 주도하에 야기된 전환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자본주의가 경제적 가속을 위한 최선의 기제라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빈번하게 강조했고, ‘공상적 공산주의에 맞선 주장으로 활용했다.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 사회주의적 질서라는 틀 안에서 그리고 공산당의 통제 하에 자본주의를 길들이고, 도구화하고, 이를 일하게끔 만들겠다는 제안은 10월 혁명 이래 주요한 안건이었다. 이는 무척 많이 논의되었고, 때때로 그리고 아주 일관성 없게 실행에 옮겨진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공산주의지도부가 충분히 안정적이라고 느끼지 않았고, 이러한 실험이 행여 권력의 상실로 이어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결코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1980년대와 90년대, 지도부는 충분히 강하다고 느꼈고, 실험에 따른 위험을 감내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이 실패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여전히 확고하게 권력을 쥐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중앙의 통제가 약화되기보다는 계속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앞으로 시험대에 오를 것이고, 완전히 성공했음을 증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실상 스탈린이 소련 해체의 조건과 법리적 절차 양자를 고안하고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만하다. 이른바 1936년도 스탈린 헌법17조는 다음과 같다. “각각의 연맹공화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에서 자유롭게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한다.” 이 정식은 아무런 변경 없이 1977년도 소련 최후의 헌법에 72조로 채택되었다. 이 조항의 중요성은 미국 역사상 유일한 내전이 독립된 주들이 연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느냐 여부에서 발생된 것임을 기억할 때 무척 분명해진다. 대조적으로 개별 공화국들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탈퇴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다. 이는 스탈린이 애초부터 소련을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독립국들의 느슨한 연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헌법이 소련의 잠재적 해체를 사전에 기획하는 것이라는 반대는 당시 국제법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문제적인 조항을 수정하지 않고 유지하려는 스탈린의 결심은 굳건했다. 그 이유는 오직, 스탈린이 소련을 변증법적으로, 즉 국가인 동시에 비()국가로 규정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스탈린 헌법이 이러한 정의를 연맹 초기의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유지는 일국사회주의의 건설 가능성을 논한 스탈린 태제를 향한 비판, 특히 가장 유명한 것으로 트로츠키의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들어설 이 나라는 국가들의 연합이자 나라들의 무리, 즉 독자적이고 단일하며 고립된 국가라기보다는 자본주의국가들의 공동체에 대항하는 사회주의국가들의 공동체에 더욱 가깝게 표상되었다. 소련에서 이러한 국가들의 공동체 개념은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일관되게 수행되었다. 각 공화국은 고유한 정부와 의회, 행정기관과 언어를 가졌다. 한 공화국에서 다른 공화국으로 당과 국가 공무원들의 공식 방문이 있었다. 작가들의 대회가 조직되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문화축제나 전문가의 교환 등이 이뤄졌다. 국가 내부의 생활은 마치 국제무대에서처럼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모든 소비에트 공민의 여권에 나와 있는 민족’(nationality)이라는 범주가 맡았다. 이 범주의 기능은, 민족을 한 국가의 시민권으로 이해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단지 수수께끼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소련의 모든 공민들에게, 그리고 확실히 그들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때 민족은 한 성원의 종족적 기원을 의미했다. 개인은 그의 부모가 서로 다른 민족일 때만 자신의 민족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부모의 민족은 자녀에게 전해졌다. 모든 실질적인 사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직 시, 개인은 민족에 대해 질문을 받았고 종종 부모의 민족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았다. 소비에트 국제주의는 종족적 차이를 극복하고 지워버리는 일면적인 보편주의를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사회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국가들의 공동체인 소련의 건설과정에서 공민 그 누구도 그들의 출신에 대해 망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변증법적 이성을 체현한 공산당만이 어디서 민족이 끝나고 국제주의가 시작되는지, 또는 어디서 국제주의가 끝나고 민족이 시작되는지 결정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조직된 사유화 과정 또한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이었다.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의 완전한 철폐를 우선 사회주의, 이어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보았다. 오직 모든 사적소유에 대한 총체적 국가-사회화만이, 공산당이 사회에 대해 완전히 새롭고 비할 데 없는 형성적 권력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사회적 가소성(可塑性)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사적소유의 철폐는 과거, 그리고 심지어는 역사와의 급격한 단절을 수반했는데, 이는 역사가 대개 사적소유관계의 역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철폐는 자연, 즉 인간 본성(human nature) 등등의 자연에 앞서 술(, art)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만일 사적소유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 인간의 자연권이 철폐된다면, 그들의 혈통에 대한 자연적인끈이, 그것들의 유산 및 내재적인문화적 전통 또한 분리될 것이고 그때 인류는 스스로를 새롭게 완벽한 자유 속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인간만이 모든 사회적 실험에 자유롭게 뛰어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사적소유의 철폐는 자연적인 것에서 인공적인 것으로, 필요의 세계에서 (정치적으로 형성적인) 자유의 세계로, 전통적인 국가에서 총체적인 예술품으로의 이행을 표상한다.

이러한 기초 위에 사적소유의 재도입은 적어도 처음에는 공산주의 실험을 종결시키기 위한 동등하게 결정적인 전제 조건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적으로 통치하는 국가의 소멸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표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부들, 정치체제들, 권력관계들이 종종 사적소유에 대한 권리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변해왔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알고 있다. 이러한 예들에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삶은 심지어 정치적 삶이 급진적인 변화를 겪더라도 사적[소유] 법에 의거해 구조화된 채 남아있다. 대조적으로, 소련의 해체 이후에는 운동 중인 어떠한 사회계약도 더 이상 없었다. 거대한 영토가 버려졌고,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처럼 무법천지의 황무지들은 새롭게 구조화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그러한 땅들은 사적 전용을 위해, 그리고 실상 국가 지도부 스스로가 명령하는 규칙들에 의거해 구획되어야 했고, 분배되어야 했으며, 풀려야 했다. 이 경로를 따라 재화의 국가-사회화 이전에, 상속 철폐 이전에, 사적 재산의 기원과의 단절 이전에 존재했던 조건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가능성은 전무했다.

사유화는 이전의 사회화만큼이나 인공적인 정치적 구성물이었음을 궁극적으로 증명했다.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한때 사회화된 국가는 이제 자본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사유화되었다. 양자의 경우에서 모두 사적소유는 국가적 이유(raison d'état)에 종속되었고, 따라서 명백히 인공물, 철저히 계획된 경륜(經綸)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사적소유의 ()도입으로서의 사유화는 자연으로, 자연 상속과 자연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탈공산주의 국가는 공산주의적 선구자처럼 구성물이고, 단지 행정 권력인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탈공산주의적 상황은 자본주의의 인위성을 밝힌다는 사실에서 특징적인데, 이는 자본주의의 대두를 경제발전의 자연스러운과정으로서가 아닌 사회적 재구조화를 위한 순전한 정치적 기획으로 표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동구 국가들에서, 그리고 현저하게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건설은 경제적 또는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결과도 아니고, 피할 수 없으며 유기적인역사적 이행도 아니다. 오히려 사회를 공산주의 건설에서 자본주의 건설로 바꾸도록 정치적 결정이 취해졌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리고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완벽히 의거하여) 건설의 대들보 역할을 맡도록 사적소유의 주인 계급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과정은 사체, 즉 사회주의사회의 시체에 대한 폭력적인 훼손과 사적 전용을 포함했는데, 이는 민족 또는 부족의 구성원들이 신성시되는 동물의 사체를 공동으로 섭취하는 과거의 신성한 연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연회는 한편에서 각각이 사체의 사적인 조각을 조금씩 받는다는 점에서 신성시되는 동물의 사유화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정확이 이러한 사유화를 통해 부족의 초()개인 및 초사유(私有) 공동체의 기초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시체에 대한 유물론적 변증법은 자신의 오래도록 지속되는 효과를 증명한다.

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의 진정한 뻔뻔함은 바로 반()유토피아주의, 즉 소련에 기본적으로 이미 유토피아가 현실화되었다는 단언에 있다. 사회주의진영이 들어선 진정으로 실재하는 장소는 유토피아의 비장소(non-place)라고 공언되었다. 이러한 단언이 반사실적(反事實的)이고, 국가가 공식 전원시(田園詩)를 조작하고, 개인적인 생존이나 억압 및 조작에 저항하는 투쟁 또는 영구혁명을 위한 투쟁이든 간에 갈등과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나 통찰이 요구되지 않고, 당시에도 요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사실적 부정의와 단점들을 언급함으로써 이는 끝났다는 유명한 주장을 세계로부터 최종적으로 일축하는 것은 아트만(atman, 힌두교에서 개별적, 인격적 원리-역자 주)은 브라만(brahman, 힌두교에서 근본적 실재 또는 원리-역자 주)’ 또는 삼사라(samsara, 윤회-역자 주)는 니르바나같은 유명한 교리를 불식시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데, 이는 반유토피아와 유토피아, 지옥과 낙원, 영벌(永罰)과 구원의 역설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료되었다는 것은 마쳤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유롭게 반복될 수 있다.

그러한 반복이 역사적으로 유일무이하고 결정적으로 종결된 현상인 소비에트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언어를 통한 통치를 확립하려는, 즉 철학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추후의 시도는 개연성이 높고, 확실히 불가피하다. 언어는 돈보다 더욱 보편적이고 더욱 민주적이다. 게다가 이는 돈보다 더욱 효율적인 매개인데, 사고 팔리는 것보다 더욱 많이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적 권력관계의 언어화(linguistification; d. Versprachlichung)는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 권력, 운명, 삶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저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건네준다. 언어는 평등의 매개이다. 권력이 언어화된 상태에선, 권력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모든 화자의 평등이라는 조건하에서 권력이 작동하도록 강제된다. 만일 모든 화자에게 형식논리적으로 유효한 주장을 하라고 요구된다면, 분명히 언어의 평등은 왜곡되고 심지어 파괴된다. 그러나 철학의 과제는 정확히 그러한 형식논리적으로 유효한 언어의 억압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철학은 지혜에 대한 충족되지 않고 충족될 수 없는 사랑으로 규정되기에 일종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는 총체적으로 언어화된 욕망이며, 따라서 이것의 역설성(paradoxicality)은 투명해진다. 철학은 인간에게 자기모순 속에서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 바로 이 제도를 사회 전체로 확장하려는 바람은 전적으로 억압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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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7. 6. 15. 11:05

일시: 2017년 6월 14일

원문: 보기


오늘 런던 그렌펠 타워에서 일어난 끔찍한 화재는 몹시 불평등한 영국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매번 비극이 일어날 때마다, 당신은 사태를 "정치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먼저 책망하고 보는 논평자들에 의존할 것이다. 런던 서부의 그렌펠 타워의 화재와 함께 그러한 목소리는 즉각적으로 두드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참사는 명백히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에 속해 있는 가장 부유한 자치구에서 공공지원주택(social housing)에 사는 대다수 저소득층의 사람들이 미연에 방지하거나 신속히 진압할 수 있었던 화재로 인해 죽거나 다쳤다. 우리의 책무는 책임을 져야하는 이들로부터 다른 데로 책임을 돌린다거나 또는 이를 자연적인 것으로 보기 보다는,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묻는 것이어야 한다.

입주민들은 건물의 안전에 대한 심각한 염려를 관리 단체에, 지방 의회에, (최근 총선에서 패한) 국회 의원에게 수없이 보고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었고, 현장에서 만난 거주자 대다수는 내게 자신들이 가난하고, 주택고급화 계획(gentrifying project)의 일환으로 해당 지역을 사회적으로 청소하려고 계획된 부유한 자치구에 살았기 때문에 이번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했음을 말해주었다.

오늘 그렌펠 타워에서 일어난 화재는 정치의 바깥에 있지 않다. 이는 영국의 심원한 불평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120여 개의 방으로 구성된 건물은 400~600명의 사람을 수용했고, 일부는 아주 붐비는 환경에 노출되었다. 세입자들은 승강기, 비상등, 배선, 보일러 등 갖은 문제를 보고하였다. 아주 사소한 개선의 조치도 끊임없는 요구가 필요했다.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건,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는 자치구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도, 그들이 몸을 뉘일 집이라도 가진 행운아라는 메시지였다.

지난 11월, 입주민 단체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이는 진실로 끔찍한 생각이지만, 그렌펠 행동단(Grenfell Action Group)은 오직 참사만이 우리의 지주인 켄싱턴첼시세입자관리단체(KCTMO)의 부적합성과 무능력을 밝혀 줄 것이며, 위험한 거주 조건과 함께 그들이 세입자 및 임차인에게 부과하는 건강과 안전 규칙에 대한 소홀함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 그들과 켄싱턴첼시왕립구(RBKC)와 추악한 결탁은 미래에 벌어질 대형 참사를 위한 완벽한 방안이다.

그들이 예견한 참사의 결과는 분명했다. 새까맣게 그을린 골조가 런던 서부의 스카이라인에 드러난 것이다. 불은 아직도 타고 있으나 건물 안에 있던 모든 집은 전소되었다. 살아남은 자는 모든 것을 잃었다. 아직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실종 상태이며 사망자의 숫자는 치솟는 중이다. 화재 현장의 주변 거리에는 눈물을 참는 사람들로 가득하며, 많은 수의 봉사자들이 그들에게 물을 건네고 있다.

주택은 영국의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주택 소유자의 정도는 하락하고 있고, 임차는 증가하고 있다. 한편 보수당은 공공지원주택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동시에 임대주택(council homes)의 사적 매매를 부추겼다. 테레사 메이의 새로운 수석보좌관인 개빈 바웰(Gavin Barwell)은 그렌펠 타워 같은 초고층 아파트는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하는 보고서를 무시한 주택부 관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요구된 검토를 실행하는 데 실패하였다.

보수당은 그들이 영국의 주택 양극화에서 어느 편을 대표하는지를 결코 숨기지 않는다. 노동당이 정부의 작년 주택계획법안(Housing and Planning Bill)에 대한 개정을 제안하여 개인 지주로 하여금 그들의 주택을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게" 만들도록 하려고 했을 때, 72명의 구(舊)지주 토리(Tory)들은 해당 개정안을 반대하였다.

지난 주 열린 총선은, 영국에서 주택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자들과 하늘을 이불 삼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 간의 넓어지는 양극화를 보여주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핵심 지지자인 지주들에 기대를 걸며 그들의 성명서에서 주택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아꼈다. 대신 광범한 수의 유권자는 주택을 짓고 치솟는 집세에 제동을 걸겠다고 약속한 노동당에 투표하였다.

그렌펠 타워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안은 적절한 수준의 주거가 특권이 아닌 권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소득층은 그들의 생명을 가치있게 여기는 중앙과 지방정부를 가져야 마땅하다. 우리들의 집은 우리를 보호해야 하지, 우리 가족들을 위험으로 밀어 넣어서는 아니 된다.

마가렛 대처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이미 유명하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나 공공지원주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런던 서부와 같은 지역에서, 그리고 오늘 같은 날,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이 입증되었다. 지역공동체는 협력하여 머물 곳을 제공했고, 모금을 실시했으며, 자원을 협조하였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분노의 총량, 그리고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정치인들을 압박해 조사를 약속하도록 하였다. 이제 싸움은 이같은 분노가 변화로 바뀔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이다. 생존자들은 반드시 적절한 수준의 주거를 제공 받아야 한다. 화재를 방지할 수 있었던 자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전국에 걸쳐 그렌펠 타워와 비슷한 위험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급한 원조가 반드시 제공되어야 한다. 주택 위기에 반드시 맞서야 한다.

한 입주민이 내게 말했듯, 많은 이가 살아생전에 아무도 자신들의 안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 각자의 집에 갇혀 죽어갔을 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세계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행동을 통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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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7. 2. 17. 06:59

원문 링크.

* 이하 본문에서 대괄호 안의 설명은 역주임. 추가로 미국회도서관 소장 장학봉 옹의 수기를 참고할 것.


역사학에서 학생의 잠재력. 쿠르스크국립대 역사학과에서 고려사람[소련계 한인/조선인, 이하 고려사람으로 통일]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려는 시도.



역사적 조국에서 고려사람의 역사에 관한 쿠르스크국립대의 연구 프로젝트가 역사학과 학생들의 주의를 끄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전문성을 갖춘 역사학자 및 국제정치학자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 작업은 '국제관계의 역사'(지도교수 - 이.엔. 셀리바노프 교수) 프로그램에 소속된 대학원생 및 학부생 주축의 학술동아리인 '클리오'[역사의 신](지도교수 - 이.아. 코노레바 교수) 소속으로 장차 '역사'를 전공하려는 학부생이 수행하고 있다.

아래는 1945~1961년 북한에서 근무한 뒤 타쉬켄트에 정착한 고려사람의 친지들이 제공한 글과 사진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이다. 이반 골리코프, 나탈리아 모스칼렌코, 파울린 플라스키나가 작업하였다. 프로젝트의 다른 성원들은 조만간 다른 고려사람 여섯 명의 전기(傳記)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교수들은 이하의 자료가 고려사람 사이트를 찾는 방문객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고 새로운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서책 형식으로 <북한의 고려사람>을 간행하는 데 필요한 작업들이 계속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고려사람> 출판은 현재 쿠르스크국립대 역사학과에서 준비 중이다.

이리나 코노레바 - 쿠르스크국립대학 역사학과장 및 연구교육소장

이고르 셀리바노프 - 쿠르스크국립대학 일반사 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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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활

김영활은 연해주 태생으로 1910년 쇠락한 조선인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곧 아버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는 역사적 조국[조선]에 거주하는 형제에게 가던 도중 첩자로 의심을 받아 [조러]국경에서 매맞아 죽었던 것이다. 당시 김영활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지만, 생계를 위한 허드렛일과 학업을 성공적으로 병행하였다. 그는 극동국립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했는데, 친척의 증언에 따르면, 동양어(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노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1937년 고려사람 강제이주 당시, 그는 아스트라한으로 옮겨져 어육가공공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건너가 타쉬켄트 지역(oblast’)에 위치한 집단농장 '볼셰빅'에 부설된 학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41년 김영활은 전연방공산당(볼)에 가입하였다. 1944년 그는 당조직자로서 조선극장으로 이동하여 근무하게 되었으나, 곧 붉은 군대에 동원되어 일제의 점령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해 극동전선 제25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946년 그는 동원에서 해제됐고, 한국어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북조선에 통역원으로 잔류하였다. 1948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 김영활은 북한에 남아 <쏘베트 신보>에 취직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조선인민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조쏘친선>의 책임편집자직을 맡아 근무하였다. 1957년 김영활은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최용건의 비서를 맡았다.



1961년 김영활은 가족과 함께 타쉬켄트로 돌아왔으나, 곧 유즈노사할린스크의 [당기관지인] <레닌의 길> 신문사의 편집원으로 파견되었다. 1965년 그는 크즬오르다로 이사하였다. 새로운 곳에서 그는 <레닌기치> 신문사의 편집자가 되어 1968년까지 근무하였다.

1968년 이후 <레닌기치> 신문사의 언론인 김영활은 카라칼파크스탄 공화국 및 호레즘 지역의 통신원이 되었다.

1978년 사망했다.

가족에 대해서



김영활은 31세의 나이인 1941년 유가이 스베틀라나 막시모브나와 결혼했고, 그때 당시 이미 타쉬켄트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듬해 부부는 첫 자녀를 보았는데, 바로 딸인 클라라였다.

1946년 가족은 북조선 땅에서 재회하였다. 1950년에는 두 번째 자녀인 아들 아나톨리가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가족은 타쉬켄트 지역으로 대피하였다. 가족의 재회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가능했다. 1954년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비사리온이었다. 1961년 김영활은 가족과 함께 타쉬켄트 지역으로 돌아왔다.



딸 클라라는 지역경리전문학교를 나와 주택사업소에서 근무하였다. 아들 아나톨리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사업에 종사하였다. 둘은 현재 모두 은퇴한 상태이다. 차남 비사리온은 멘델레예프 명칭 모스크바 화학기술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뒤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같은 대학에서 부교수가 되어 교질화학(膠質化學)을 가르쳤다. 2005년에 사망했고 현재 타쉬켄트에 묻혀 있다.

자료 준비: 골리코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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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철

조영철은 1909년 12월 14일[장학봉은 13일이라고 썼다] 원동 포시예트 구역의 남촌[장학봉은 함경북도 길주군 화대명 하평촌이라고 썼다] 마을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소학교에서 공부한 뒤, 부모와 일했고 제재소(製材所)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30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 소재한 사범전문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인 1933년에는 원동주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브카 아조프 구역의 한 마을로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1937년 강제이주의 결과로 조영철은 종래의 교직을 포기하고, 아내인 유가이 나제즈다 일리니치와 타쉬켄트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도 조영철은 지식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즬오르다의 사범전문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마친 후, 그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와 타쉬켄트 지역 싀르다리야 구역의 고등중학교에서 선생님이 되었다.

1941년부터 조영철은 타쉬켄트 지역의 <새로운 길> 집단농장에서 근무하였다. 그의 삶은 1945년에 들어와 크게 바뀌었다. 붉은 군대에 징집돼 북조선으로 파견됐고, 거기서 그는 한국어로 발행되는 평양 신문인 <조선신문>의 문학교정원으로 근무하였다.



1942년부터 1947년의 기간 동안, 조영철과 아내 나제즈다 일리니치의 삶은 몇 번의 즐거운 사건으로 특징지어진다. 1942년 그들의 첫째 아들인 발렌찐 (이후 기술과학 박사)이 태어났고, 3년 후에는 차녀 벨라가 태어났다. 1947년에는 막둥이 로자가 태어났다.

조영철은 한국전쟁에도 참가하였다. 당초 그는 후방사령부 특별군정대표가 되었고, 1년 후에는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제6부[문화기재 담당]장에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조영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보건성 부상에 임명돼 1959년까지 근무하였다.



1960년 조영철은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왔고, 한동안 이르쿠츠크 지역 안가르스크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부소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1961년 그는 다시 거주지를 바꿨고 타쉬켄트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그는 키로프 명칭 공원 소장(1962~1963)으로 근무했고, 공화국에서 수여하는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기까지 7년간 쉬지 않고 근면하게 농업 부문에서 일하였다. 

수년간, 조영철은 "대일전 승리" 훈장, "조선해방" 훈장 등 소비에트 훈장을 수여받았고, 북한 국기 2급 및 3급 훈장과 함께 "자유를 위하여" 훈장을 받았다.

조영철은 1980년 사망했고, 타쉬켄트에 묻혔다.

자료 준비: 모스칼렌코 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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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 (유성걸[노어로는 "유성철"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오기이다. 유성걸과 兪成哲은 다른 인물이며, 유가이는 유성걸이다])

유가이 니콜라이 안드리예비치 (한국 이름 - 유성걸)는 원동 연해주 니콜스크-우수리스크[노어로는 노릴스크-우스릴스크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분명한 오기이다]의 노동자 가정에서 1920년 3월 20일[장학봉은 13일이라고 썼다] 탄생했고, 가족의 유일한 자녀였다.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유가이는 부모와 함께 타쉬켄트 지역 치나스에 정착했고, 거기서 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1942년 우즈베키스탄국립대학을 졸업하였다. [고등]교육을 받고 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에 유가이는 학업을 마친 후 양기율의 한 고중[제11호 고중]에서 노어노문을 가르치게 되었고, 동시에 교무주임을 겸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하였다.

1945년 2월 3일 유가이는 전연방공산당(볼)에 입당하였다. 바로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1945년 10월 유가이는 붉은 군대에 징집되었고, 곧바로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25군은 북조선에 주둔하였다. 한국어와 노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1945년 11월 9일 군사통역원으로 임명되었다.

1948년부터 유가이는 조선인민군 제11항공독립교도사단 정치부장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10월부터 1955년까지 소장 계급으로서 조선인민군 비행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10월부터 그는 평양외국어대학 부교장으로 지냈다.

1960년 4월 그는 가족과 함께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는 소련 국방부의 도움을 받아 소련군 소령 계급으로 타쉬켄트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우즈베키스탄공산당 고급당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였다.



1964년 [고급당학교] 졸업 후, 그는 타쉬켄트의 레닌 구역 내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88년 은퇴하여 연금생활에 들어갔다.


유가이와 아내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다. 유가이는 1994년 타쉬켄트에서 사망했다.

자료 준비: 플라스키나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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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6. 10. 6. 02:18

일시: 2016년 10월 4일

원문: 보기


 세계의 유권자들은 꽤나 근사한 한 해를 보냈다. 그들이야말로 콜롬비아의 평화 합의를 거부했고, 영국을 유럽연합으로부터 떼어냈으며, 민주주의를 줄여버린 태국헌법을 지지했고, 헝가리에서는 난민을 막는 정부의 계획을 뒷받침한 주역이었다. 하지만 정당한 결과를 위해 필요한 유권자의 수를 확보한 선거는 하나도 없었다.

 국민투표는 이러한 흐름의 세부를 결정하였다. 유권자들은 자국 정부의 계획들을 뒤엎었고, 각자의 권리를 약화시켰으며, 정치적 위기를 촉발시켰다. 하지만 이 국민투표들은 공통적으로, 많은 정치학자들이 국민투표를 지저분하고 위험한 것으로 여기는 이유를 증명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트리니티 컬리지 더블린의 정치학자 마이클 마쉬(Michael Marsh)는 국민투표가 과연 좋은 생각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대개는 결코 아니죠.”

 이같은 투표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대중적 통치로 표상되지만, 학계의 연구는 그러한 투표가 민주주의를 수행하기보다는 종종 전복시킴을 밝혔다. 투표는 변덕스러운 경향이 있는데, 이는 투표가 결정 그 자체의 가치뿐만 아니라 무관한 정치적 변화, 심지어는 콜롬비아처럼 날씨에도 달려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상대적으로 정보가 거의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결정을 내려야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정치적 메시지에 의존한다. 문제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가 유권자의 수중이 아닌 정치엘리트의 손아귀에 권력을 쥐어준다는 점이다.

 런던경제대학의 연구원인 알렉산드라 싸이런(Alexandra Cirone)이는 무척 위험한 도구인데, 정치인들은 그들이 이기리라는 생각 때문에 계속해서 이걸 쓰죠라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 자주 그들은 이기지 못하고, 국민투표는 정치적 문제를 해소한다기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창출한다. 투표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왜 수다한 전문가들이 회의적인지가 명백해진다.


어려운 대답에 대한 지름길

 어떠한 국민투표든지 간에 유권자들은 문제에 직면한다. 그들은 어려운 정책선택을 단순한 예 또는 아니오의 문제로 만들어야 하며, 심지어는 전문가들이 이해를 위해 수년을 투자해야 할 정도로 복잡한 결정의 결과를 예측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유권자들은, 정치학자 아서 루피아(Arthur Lupia)와 매튜 맥커빈스(Mathew D. McCubbins)지름길이라고 명명한 것을 찾는 방식으로 앞서의 문제를 해결한다. 유권자들은 신뢰할 수 있는 권위자의 지도를 따르거나, 또는 익숙한 서사에 선택을 맞춘다.

 토론토대학의 명예교수이자 정치학자인 로렌스 르뒤(Lawrence LeDuc)의 연구에 따르면, 정부가 국민투표를 제안할 때 국민은 지도층을 좋아할 경우엔 긍정적으로 투표하고 싫어할 경우엔 반대로 투표한다. 

 르뒤 교수는 2015년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요한 공적 문제와 관련을 맺어야 하는 투표는, 대신 특정 정당 또는 지도자, 정부의 실적, 또는 국민투표의 주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습의 문제 또는 사건에 대한 호불호에 관한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예컨대 콜롬비아에서 2014, 후안 마누엘 산토스(Juan Manuel Santos) 대통령에게 투표한 대부분의 지역은 역시 평화 합의에도 투표한 반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평화 합의 또한 거부했다.

 또한 유권자들은 복잡한 사안을 기존의 이념적 믿음 안에 구겨 넣는 방식으로 투표에 나름대로 대응하기도 한다.

 이러한 동학은 사실상 모든 국민투표에서, 특히 걸린 몫이 상당할 때 발생한다.


서사 부과하기

 정치인들 또는 권세가들은 대개 국민투표를 단순하고 적나라한 서사로써 제시할 것이다. 그 결과, 투표는 실제적인 정책문제와는 동떨어진 것이 되고, 추상적인 가치간의 경합, 또는 유권자들에게 더욱 호소력이 강한 서사간의 경쟁이 되어버린다.

 유럽연합 탈퇴를 두고 벌어진 영국의 논쟁, 또는 브렉시트정국에서 어느 한쪽도 연합의 회원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사실을 강조하지 않은 대신, 어떠한 가치를 강조할 것인가에 관한 선택으로 투표의 틀을 짰다. “잔류파는 유럽연합 회원 여부를 경제적 안정의 문제로 제시했고, “탈퇴파는 이민을 강조했다.

 이는 제대로 먹혔다. 잔류에 투표한 사람들은 경제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우려를 표출했으나 이민자에 관해서는 그다지 우려를 보이지 않았다. 탈퇴에 투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민에 관해 걱정이 많지만 경제에 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콜롬비아의 산토스 대통령은 국민투표를 평화에 관한 투표라고 제시했으나, 반대파는 이를 콜롬비아의 가장 큰 저항단체인 FARC, 즉 콜롬비아혁명군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가에 관한 선택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두 서사 중 어떤 쪽도 평화 합의가 가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고 완전히 묘사하지는 않았다.

 싸이런은 콜롬비아의 사례가 또한 국민투표가 역사적인 정치 사안을 다룰 때, 유권자들은 다가올 미래에 국가에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경험을 분리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지난 8, 태국에서는 군부가 이끄는 정부가 국민투표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고 민주주의의 요소를 대폭 제한하는 새로운 헌법을 승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또한 군부는 헌법이 통과되었을 경우에만 새로운 선거를 약속함으로써, 실제로는 반민주적 문건을 친선거적 선택이라고 속여 판매한 셈이었다. 조치는 통과되었다.


힘 있는 자들을 위한 도구로서의 민주주의

 국민투표는 국민의 수중에 권력을 쥐어주는 것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대개는 지도자들이 먼저 결정한 사안에 대해 민중적 정당성이라는 도장을 찍어주는 경향이 있다.

 “국민투표는 어떠한 사안이 국민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어요. 오히려 이는 문제를 국민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정치인들이 이득을 보는 것과 관련이 크지요.” 싸이런의 지적이다.

 예컨대, 지난 7월까지 영국의 총리였던 데이비드 카메론(David Cameron)은 연합에 남겠다는 그의 결정을 굳건히 함으로써 탈퇴를 원하는 영국 정치인들을 침묵시키려는 복안으로 유럽연합 탈퇴 여부에 관한 투표를 성사시켰다.

 태국 군부는 신헌법의 초안에 대한 뉴스보도를 제한함으로써,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할지도 모르는 대항서사를 애초에 차단시켰다. 국민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외양을 취함으로써, 군부는 실제로 이를 꺾어버렸다.

 헝가리의 총리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an)은 그의 반이민 정책에 대한 연합 내의 필연적 반대를 사전에 막고 국내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난민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유럽연합의 요구사항들을 거부할지에 관한 국민투표를 성사시켰다. 두 경우 모두, 힘을 강화하기 위해 투표를 도구로 쓴 경우였다.


평화에 대한 큰 위험, 큰 보상 투표

 그러나 이 민중적 정당성이라는 도장은 때로는 좋은 것일 수 있는데, 정치적 혼란이나 심지어는 무장충돌로까지 번질 수도 있는 국가적 분쟁을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위험이 높은 만큼 보상 또한 크기 때문이다.

 1998년 북아일랜드의 성금요일 평화 합의 이후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에서 각각 국민투표가 개최되었다. 그 투표는 두 지역에 참여의 감각을 제공했고, 계속 싸우길 원하는 사람들을 주변화 시켰으며, 충돌의 재발 가능성을 현격히 낮추었다.

 이는 일반적인 선거와는 달리 국민투표가 가진 중요성을 보여준다. 국민투표는 오직 국민이 투표가 민의를 반영한다고 인지할 때만 성공한다. 국민투표는 1998년 북아일랜드 투표에서 그랬던 것처럼, 투표자의 수가 많고, 한편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뒀을 경우 가장 잘 작동한다.

 그러나 콜롬비아에서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는 고작 38퍼센트였고, 거기서도 투표 결과는 완벽히 가운데를 기점으로 나뉘었다. 이는 수천 명의 사람이 전체 투표를 좌지우지하는 요소였음을 의미한다. 설령 국민투표가 통과되었어도, 평화 합의에 민중적 정당성이라는 옷을 입히지 못했을 것이다.

 싸이런은 국민투표의 구속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투표 참여자의 비중을 높이고 압도적인 승리를 요구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콜롬비아와 영국 가운데 어느 한쪽도 복잡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승리를 위해 절반 이상의 투표를 요구하지 않았다.

 콜롬비아의 경우처럼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의 숫자가 적은 상태에서 어느 한쪽이 완승을 거두지 못한 결과는 정치적 분규를 봉합하기보다는 심화시킬 위험이 크다. 지도층은 민중적 의지를 명백히 반영하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 결과를 거부하고 정치적 반발 또는 헌법적 위기를 감수할지에 관해 선택을 내려야 한다.


공화국에 대한 러시안 룰렛

 국가적 투표는 또한 극도로 불안정하여 사안 자체와 관련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에 의해 좌우된다.

 여론 조사는 종종 오도되게 마련인데, 이는 사람들이 투표 직전까지 그들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효과적으로 자주 그러한 견해를 버린다.

 트리니티 컬리지 더블린의 마쉬 교수는 몇몇 사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지어 바로 일주일 전의 사안에 대해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어떠한 주장도 기억하지 않고, 그들이 왜 예 또는 아니오에 투표하는지에 관해서도 실제로는 명확하지 않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투표는 정말로, 내게 영감을 주지 못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정치권 주변의 소음 또한 민중적 의지를 비틀 수 있다. 예컨대 한 당이 투표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의 여부, 투표와 관련된 당내 힘겨루기가 대중으로 전이되는지의 여부, 그리고 뉴스 매체가 관련된 사안을 어떻게 묘사하느냐 등은 모두 영향을 미친다.

 투표는 또한 날씨를 포함한 무작위적 요인에 의해 쉽사리 영향을 받는다. 콜롬비아에서 투표 전날 몰아친 허리케인은 몇몇 지역에서 사람들을 철수케 함으로써 국민투표 참여율을 낮췄을 수 있다.

 하버드의 경제학 교수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는 유럽연합을 탈퇴하려는 영국의 투표 직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언제든지 어떻게든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정이 반드시 민주적이라는 생각은 용어에 대한 도착(倒錯)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고, 단지 공화국에 대한 러시안 룰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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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6. 9. 11. 03:27

일시: 2016년 9월 9일

원문: 보기


북한의 다섯 번째 핵시험

- 꾸준히 증가하는 북한의 기세에 직면하여 세계는 우려스런 정도로 무능력하다.
2016년 9월 9일, 동경, 아시아

북한의 다섯 번째 핵폭탄 시험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김정은은 2011년, 부친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이래 핵폭탄과 탄도탄 시험의 속도를 증가시켰다. 올해 부과된 새로운 제재를 비롯하여 이번주 아세안 정상회의에서의 엄중한 회담은 평양을 전혀 기쁘게 하지 못했을 터이다. 따라서 김정은 총비서의 조부가 북한공산정권을 세운 기념일인 9월 9일, 북한은 다섯 번째 시험을 수행했다고 공표하였다.

시험의 폭발력은 최소 10킬로톤에서 최대 30킬로톤까지로 보이며, 이는 여태까지 북한의 시험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또한 시험은 강도 5.3의 지진파를 일으켰고, 남한 당국은 문제적 이웃인 북한이 이를 공표하기도 전에 사건을 알아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올해 1월 북한이 수행한 시험은 6킬로톤 정도로 예측되었다. (이전 시험은 각각 2013년, 2009년, 2006년에 이뤄졌다.)

상승하는 북한의 기세는 국제 사회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북한은 20여 개의 탄두를 비축하고 있으며, 매 6주마다 탄두 한 개를 추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월에 수행된 지하 폭발은 북한 당국의 주장대로 수소 폭탄은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이후 북한은 일련의 미사일 시험을 단행하였다. 아메리카로 미사일을 날릴 수 있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은 엄포에 불과하겠지만, 남한과 일본의 목표를 타격할 수 있다는 점은 거의 틀림없다.

가장 우려되는 문제는 북한이 미사일에 탑재 가능하도록 핵탄두를 소형화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대기권 바깥에서 안으로 돌아오는 궤적을 견디도록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 반면, 관측가들은 회의적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개발에서 빠른 진전을 이루고 있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대적으로 미약한 북한의 자원을 그의 부친 때보다 더욱 쏟아붓는 것으로 보이는 김 총비서에게 핵개발은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보인다.

일본 및 이웃 국가의 관료들은 젊은 김 총비서가 그의 부친보다 훨씬 더 예측하기 어렵다면서 초조해하고 있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이 부분적으로는 그가 정권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어서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다섯 번에 걸친 북한의 핵시험 중 세 번이 그의 5년 간의 통치 기간 수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대내적으로 위세를 보이려는 점을 보여준다. 그가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미국, 일본, 한국이 강경한 성명으로 대응한 것은 예상된 바였다. 북한의 우방에 가장 가까운 국가인 중국조차도 시험을 "결연히" 규탄한다고 말하였다. 미국 대통령 바락 오바마는 핵비확산과 군축을 금과옥조 비슷한 것으로 삼았고, 이란과의 핵 협상을 밀어 붙였으며 2차 대전 기간 미국이 핵폭탄을 투하한 두 일본 도시 중 하나인 히로시마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미국의 우방이 김 총비서를 제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우려스러울 정도로 적다.

국제연합은 북한의 1월 시험에 대응하여 3월,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였다. 북한의 주요 수출 자원 중 하나인 석탄과 다른 광물에 대한 약간은 누수적인 금지가 새로운 조치에 포함되었다. 미국은 구체적으로 김 총비서를 호명하며 7월, 북한에 대한 제재를 추가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들은 김 총비서의 행동을 나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다만 그를 분노케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일본, 한국의 주된 전략은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에 더 많은 압박을 가하도록 촉구하는 것인데, 이는 북한이 경제적 생존을 위해 중국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김 총비서에게 점차 실망하여 올해 국제연합의 제재에 투표를 하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조치를 항상 엄격하게 시행하지는 않았다. 중국은 김 총비서의 정권이 붕괴할 경우, 대량의 난민과 함께 미군이 국경으로 접근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우방과 중국의 관계는 현재 결코 최상의 상태가 아니다. 중국은 남한이 미국과 종말고고도지역방위(THAAD) 미사일 방어체계 설치에 동의한 데 기분이 상했으며, 계속해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다른 국가와 마찰을 빚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을 제지하기 위한 서구의 희망은 실낱같이 가느다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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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6. 6. 26. 19:40

일시: 2016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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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말년에 가서 “Was will das Weib?”(여자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유명한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라는 수수께끼 앞에서 느낀 혼란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브렉시트 투표와 관련하여 유사한 당혹감이 들었다.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

 

더 큰 역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브렉시트 투표의 본질적 이해관계는 명확해진다. 서유럽과 동유럽에서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의 장기적인 재배치에 관한 조짐들이 보였다. 최근까지 정치적 공간은 전체 유권자를 좌지우지하는 중도우파 정당(기독교민주주의자, 자유보수주의자, 포퓰리스트)과 중도좌파 정당(사회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이라는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지배했고, 군소 정당들(환경주의자, ()파시스트)이 그 밖의 미미한 유권자층을 대변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른바 지구적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두드러진 정당이 대두했으며, 이들은 대개 낙태, 동성애권, 종교 및 인종적 소수자 등의 현안에 관해 상대적으로 관용적이다. 또한 이러한 정당의 대척에는 강력한 반()이민 정서를 지닌 포퓰리스트적 정당이 있고, 이들의 주변부에는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신파시스트 단체들이 위치해있다.

 

폴란드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 공산주의자들이 퇴장한 이후 주요 정당으로는 총리를 지낸 바 있는 도날트 투스크(현재 유럽이사회 의장)-이념적중도자유주의 정당과 카친스키 형제(일란성 쌍둥이로, 한 명은 2005~10년 대통령을, 다른 한 명은 2006~07년 총리를 역임하였다)의 보수적 기독교당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급진중도(Radical Center)의 성패는 다음과 같다.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이 두 정당 가운데 누가 다른 당을 여전히 오래된 이념의 망령에 사로잡혀있다고 일축하고, 탈이념 시대의 비정치(non-politics)의 구현자로 현상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1990년대 초만 해도 이러한 작업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식은 죽 먹기였으나, 이후 자유주의적 좌파들이 우세를 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보수주의자들이 강세이다.


반이민 포퓰리즘은 정치에 다시 열정을 불러왔고, 적대라는 관점에서 우리와 타자를 나눠 호명한다. 좌파에게 무엇이 남았는가에 관한 혼란의 신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파로부터 이러한 열정적 접근을 취해야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지도자 마린 르펜이 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이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하여 좌파는 강력한 국민국가(nation-states)를 지지하는 것으로 선회하며 국민적 열정을 동원할 것이다. 이는 우스꽝스러운 투쟁이며, 앞서 패배한 싸움이다.

 

유럽은 관성으로부터 유럽을 끌어낼 능력이 없는 브뤼셀의 기술관료집단과 이러한 관성에 대한 민중적 분노, 즉 더욱 급진적인 새로운 좌파운동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우익 포퓰리즘에 의해 삼켜지는 분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악순환에 갇혀있다. 브렉시트 투표는 이러한 새로운 적대의 계선을 따라 움직였고, 이는 무언가 끔찍한 잘못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브렉시트 진영에 가담한 이상한 동반자들을 한 번 살펴보자. 이들은 극심한 노동계급적 분노로 버무려진 우익 애국주의자와 이민자 공포에 의해 촉발된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애국주의적 인종주의와 보통 사람들이 표출하는 분노의 혼합은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자라기에 이상적인 토양이지 않겠는가?

 

투표를 향한 감정적 투사의 강도(强度)가 우리를 기만해서는 아니 되지만, 주어진 선택지는 진정한 질문들, 예컨대 민중주권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자 새로운 빈곤과 이주를 낳을 생태적 재앙 및 경제적 불균형에 대한 통제를 불가능하게 할 범대서양 무역투자 동반자 협정(TTIP)와 같은 무역 협정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와 같은 진정한 싸움에 대해 브렉시트는 심대한 차질을 의미한다. 브렉시트를 구성하는 중요한 주장 중 하나가 난민 위협임을 명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브렉시트 투표는 이념(지나간 마르크스주의적 감성으로 말하자면 허위의식”)이 여전히 우리사회에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최고의 증거이다.

 

1920년대 말 스탈린은 우파와 좌파 중에서 어느 쪽의 정치적 변형이 더 나쁜지에 관해 질문을 받자마자 날카롭게 대꾸하였다. “둘 다 최악이오!” 바로 이것이 영국의 유권자들이 맞닥뜨렸던 선택이지 않았을까? 잔류는 유럽을 수렁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관성의 지속을 의미하기에 최악이었다. 그리고 탈퇴는 전혀 바람직해보이지 않는 변화를 의미하기에 최악이었다.

 

투표가 열리기 바로 며칠 전, 우리 매체는 다음과 같이 심오한 척 하는 생각을 유통시켰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유럽연합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고,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가 사실이다. 유럽의 관성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 유럽은 실현 불가능한 대규모의 정치적 기획을 계속해서 만들려는 유럽연합 국가들 간의 길고긴 협상들 속에서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잔류파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 잔류파는 충격 속에서 탈퇴파의 비합리에 관해 불평하며, 투표를 통해 명백해진 변화에 대한 간절한 필요를 무시한다.

 

브렉시트 투표의 기저를 이루는 혼란은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들에서 민주적 합의 제조하기가 처한 위기, 그리고 정치기구들과 민중적 분노-그 분노는 미국에서 트럼프와 샌더스를 낳았다-사이에서 점증하는 괴리라는 훨씬 더 커다란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혼돈의 징후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미국 의회에서 벌어진 총기 통제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민주당원들의 연좌농성으로 이어졌다. 지금이야말로 체념할 때인가?

 

마오쩌둥의 오래된 경구를 떠올려보자: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일대 혼란이다. 상황은 더할 나위 없다.” 위기는 진중하고 냉철하게 취급되어야 하지만, 또한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도 다뤄져야 한다. 위기는 고통스럽고 위험하지만, 전투를 벌이고 승리를 거둬야 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하늘에는 싸움이 없고, 또한 나뉘어져있지도 않은가? 다시 말해, 현재의 혼란이 급진적인 변화의 필요에 대하여 더욱 적절하게 반응할 유일한 기회를, 유럽연합 기술관료집단과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악순환을 깰 기획을 제공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사는 하늘에서 진정한 분리는 빈혈에 시달리는 기술관료집단과 민족주의적 열정 사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악순환과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도전에 해결책을 제시할 새로운 범유럽적 기획 사이에 놓여있다.

 

브렉시트 승리의 메아리 속에서 유럽연합으로부터의 또 다른 탈퇴 요구는 전 유럽에 걸쳐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현 상황이야말로 그러한 기획을 요청한다. 누가 기회를 붙잡을 것인가? 안타깝게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놀라운 능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결국 기회를 놓치는 기존의 좌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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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6. 3. 17. 09:29

일시: 20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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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편의 투표 양상에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즉 젊은이들이 장년층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벌이, 교육 또는 성별보다는 투표자가 속한 세대에 기반을 둔 이같은 거대한 단절은 벌써 시작된 듯 하다.

 

이 단절은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장년층과 젊은이의 삶은 현재 보이는 것처럼 확연히 다르다. 그들의 과거 또한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가진 전망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냉전은 젊은이들 일부가 어렸을 적이나 심지어는 태어나기도 전에 끝났다. '사회주의'와 같은 말은 더 이상 과거의 용법대로 쓰이지 않는다. 만일 '사회주의'란 말의 뜻이, 공공의 우려를 가차없이 다루지 않는, 즉 사람들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거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불과 20여년 전 또는 반 세기 전에 똑같은 이름[사회주의]을 지닌 실험이 실패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실험은 과거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따라서 과거의 실패한 실험이 새로운 실험[의 실패]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중상계급 장년층에 속했던 미국인과 유럽인은 좋은 삶을 누렸다. 그들이 막 노동시장에 진입 했을 땐 풍부한 보상을 제공하는 일이 그들을 반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물었지, 독립할 수 있는 조건의 일을 구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얼마나 같이 살아야 하는지를 묻진 않았다.

 

그 세대는 안정적인 직업, 젊었을 때 결혼, 주택 -아마 여름용 별장도- 구입과 함께 노후를 보장받는 은퇴를 기대했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부모님 세대보다 더 나아지길 기대했다.

 

오늘날 장년층은 종종 곤란과 맞닥뜨리긴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대개 이루어졌다. 그들은 노동보다는 자본수익과 부동산을 통해 많은 걸 얻었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을 분명히 이상하게 보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투기적 시장이 제공하는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적재적소에 구입한 공로를 왕왕 자신들에게 돌렸다.

 

오늘날 소득분배상의 어느 구간에 있는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의 기대는 정반대이다. 그들은 인생 전반에 걸쳐 직업 불안정에 직면한다. 평균적으로, 적지 않은 수의 대졸자는 직장을 찾기까지 수개월이 걸리며, 대개는 [그 전에] 하나 내지 두 개의 무급 훈련직(internship)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다행이라고 여기는데, 학교 성적은 좋았지만 경제적으로 빈곤한 동급생들이 수입 없이 한 두 해[동안 훈련직]를 버틸 수 없거니와 애초에 그런 훈련직을 얻을 끈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 대졸자들은 빚더미에 짓눌리는데, 가난할수록 더 많이 빌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직업을 고를지 묻지 않고, [적어도] 20년 또는 그것보다 길게 그들을 괴롭히는 학자금을 값을 수 있게 해주는 직업이 무엇인지를 묻게 돼버렸다.

 

이러한 몸부림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은퇴에 관해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은퇴에 관해 생각하는 순간, 밑바닥 금리가 당분간 지속되는 가운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을 넘어) 괜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돈을 모아야 하는지에 관한 공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세대간 공정함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중상계급 아이들은 막판에 가선 잘 할 것인데, 부모로부터 부를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한 [부모에의] 기댐을 좋아하지 않을 순 있지만, 대안, 즉 중상층의 생활기초로 간주된 것들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새로운 출발은 더욱 싫어할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결코 쉽게 해명될 수 없다. 젊은이들이 노오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공부에 시간을 많이 투자했고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모든 것을 옳게한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이다. 젊은이들이 금융위기를 초래한 은행가들, 경제에 끊임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면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상여금을 받으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바가 거의 없다고 봄과 동시에 사회적 불의, 즉 경제가 조작되었다는 느낌은 가중된다. 대규모의 사기가 발생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누구도 실제로 사기를 저지르지 않게 된 것이다. 엘리뜨 정치인들은 개혁이 유례없는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의 약속은 이루어졌지만, 단지 최상층 1%만을 위한 것이었다. 젊은이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유례없는 불안정이 덮쳤다.

 

유례없는 수준의 사회적 불의, 대규모의 불평등, 엘리뜨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라는 세 가지 현실이 우리의 정치를 아주 정당하게 규정한다.

 

같은 것을 늘리는 것이 답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유럽에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패배하고 있는 이유이다. 미국은 이상한 위치에 서있다. 공화당 대선후보들이 숙고를 거치지 않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제안들을 가지고 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반면, 민주당의 두 후보는 진정 변화를 불러올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만 있다면미래상을 제안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버니 샌더스의 개혁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미 충분히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들을 제물로 삼는 금융체제는 억제될 수 있다. 더군다나 두 후보는 모두 미국이 고등교육에 어떻게 재원을 대는지에 관한 심도 있는 개혁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증권시장의 변화와 0에 가까운 이자율이라는 조건 속에서, 계약금을 대줄 수 있는 부모가 없어도 주택을 소유할 수 있고 노후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이뤄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가 더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 젊은이들에게 구직시장으로의 진입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이다. 4.9%라는 미국의 공식실업률은 임금[상승]을 죄게 마련인 각종 실업률의 높은 수준을 가려버린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교정은 불가하다. 젊은이들은 [분명히] 인식한다. 젊은이들은 세대간 정의란 없음을 알고 있고, 정당하게 분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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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2015. 6. 8. 02:40
번역2015. 3. 1. 09:08

쿠리하라 야스시, 학생에게 임금을, 신평론, 2015.

栗原康, 学生賃金, 新評論, 2015.

 

글을 열며

 

欲進無才 将退有逼

進退両間 何夥歎息

(空海, 三敎指帰, 797)

 

학문을 하면 먹고 살 수 없게 된다. 최근 쿠카이(空海, 774~835)가 쓴 삼교지귀(三敎指帰)를 읽다가 다시 그렇게 생각했다. “나아가 사관(士官)코자하면 내게 재능이 없고, 물러나 조용히 있길 원하면 가난에 쫓기게 되네. 진퇴양난에 빠진 가운데 그저 새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이것은 쿠카이가 24살 때 자신의 괴로운 처지를 표현한 시다. 원래 쿠카이는 쿄토의 대학에서 유교를 배웠고,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던 중, 어쩌다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돼 대학을 그만두고 출가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불교는 철학이자 사상이었고, 국가와 관련된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쿠카이에게 기대를 가졌던 가족이나 친척은 실망했다. 그는 누구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했고 물려받을 절도 없었으며 홀로 산악수행에만 몰두했다. 전혀 먹고 살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었다. 그리고 31살까지 이러한 상태가 지속됐다. 유명한 쿠카이도 그랬던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도 먹고 살 수 없는 대학원생이나 연구자는 많지만, 삼교지귀797년에 쓰인 것이니까 일본에는 1,200년이나 똑같은 일이 이어져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재 35살이고, 연 수입은 80만 엔(), 빌린 돈은 635만 엔이다. 이 빚은 일본학생지원기구로부터 빌린 장학금이다. 이러한 수입은 나름 오른 것으로, 2009년에 대학원을 나왔을 때부터 작년(2013)까지의 연 수입은 10만 엔이었다. 먹고 살 수 없다. 나의 직업은 대학비상근강사[비전임 시간강사-역자 주]이다. 한 학기(半期)에 한 토막(コマ)의 일밖에 없었고, 그것을 늘리고 싶어 여러 대학에 응모해보았으나 모두 실패였다. 당연히 장학금은 갚을 수 없게 돼 유예하였다. 연 수입이 300만 엔 이하면 5년 동안은 유예해준다. 그러나 그 기한도 올해(2014) 9월로 끝난다. 6년 전, 재산압류 관련 재판은 연간 다섯 건 정도밖에 없었으나 오늘날에는 6,000건을 넘고 있는 실정이다. 정말 무섭다. 물론 빼앗기면 곤란한 수준의 저금 따위는 없지만, 그것마저도 압류당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예컨대, 올해부터 지인의 소개로 야마가타(山形)의 한 대학에서도 비전임 자격으로 수업 하나를 열기로 했으나, 교통비가 1회 왕복에 2만 엔 정도가 든다. 계좌를 압류당하면 대학에 갈 돈도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가난에 쫓기게 되어 그저 새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대학에 가고 싶다.

 

애초에 일본에서 연구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애물은 너무 높다. 돈 말이다. 우선 대학에 가는 것은 돈이 든다. 사립대학은 연간 90만 엔, ·공립도 55만 엔이 든다. 부모의 수입만으로 부족하다면 장학금밖에 의지할 데가 없지만, 일본의 공공(公的)장학금에는 빚밖에 없다. 게다가 대부분 이자를 내야 한다. 학부 4년 동안 돈을 빌리면 대체로 400만에서 500만 엔, 대학원에서 석사(修士), 박사를 하는 5년 동안 빌리면 600만에서 700만 엔이 된다. 양쪽에서 빌린 학생은 졸업까지 1,000만 엔을 넘어버리는 셈이다. 필자는 대학원 시절부터 빚을 졌고, 무이자이기 때문에 아직 좋은 편이지만, 이자를 내는 식으로 돈을 빌린 사람은 정말로 큰일이다. 변제가 밀려 이자만 해도 100, 200만 엔으로 늘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영리한 학생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할 연구가 있다 해도, 대개 대학원에는 진학하지 않는다. 더 이상 빚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원생이 돼도 똑같다. 먹고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도 수업의 지시에 따라버리거나,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인기 있고 취직이 될 것 같은 연구 분야를 선택한다. 이것은 일이며,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학의 전임강사가 된 후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인내한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눈치를 채고 나면 머리가 거꾸로 뒤집힌다. ‘교수에게 칭찬 받고 취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좋은 연구다, 그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독선적이고 어리석은 놈이다.’ 거꾸로다. 하지만 일단 빚에 데고 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돈을 갚기 위한 일에 묶여버린다.

 

요 몇 년간, 필자는 벗들과 함께 대학의 장학금 문제를 논하거나, 일본학생지원기구에 몰려가보거나, 문부성[일본 문부과학성-역자 주]에 구두로 항의를 하였다. 원래의 논거는 일본의 대학제도가 세계의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경우, 대학의 수업료는 단지 생활비가 부족할 때 장학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대출이 아니고, 받는 것이다. 부러울 따름이다. 덧붙여서, 수업료가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도 지급형의 장학금제도는 충실한 편이다. 일본은 유럽과 미국, 어느 쪽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세계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이상하다고 할 만큼 심각해진 것이지만, 최근 들어 문제는 더욱 간단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마우리찌오 라짜라토(Maurizio Lazzarato, 1955~)부채인간제조공장(The Making of the Indebted Man)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근본은 빚(借金)이다. 당연할지도 모르겠으나, 원래 사람은 사물과 달리 교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빚이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것은 배은망덕이며, 사람이 아니다. 잘게 썰리거나 무엇을 당하더라도 불평할 수 없고, 그것이 노예제의 기원이 되었다. 노예가 된다 해도 빚이 있기 때문에 거스를 수 없다. 오히려 자진해서 그에 따른다. 이러한 노예노동이야말로 사람이나 그의 행위를 돈으로 교환 가능하게 만든 것이고, 노동력 상품의 원형이 되었다. 빚은 자본주의를 움직인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본주의는 나쁘고, 빚도 나쁘다. 어라? 빚은 갚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닐까. 빌린 것은 갚을 수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해도 법률적으로 압류당한 것은 압류당한 것이지만, 바로 이 대전제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사상과 행동을 부채와 빚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200년 전, 젊은 날의 쿠카이는 입신출세의 길에서 벗어나 불문(仏門)에 들어섰다. 집안의 호된 꾸짖음을 당하고 어지간한 빚을 짊어진 것이다. 하지만 쿠카이는 전혀 굴하지 않는다. 산에 틀어박혀 때때로 도사(土佐)의 무로토 곶(室戸岬)에 들러 불경을 백만 번 외웠다. 그리고 집필한 것이 바로 삼교지귀. 이 책의 주제는 오직 하나다. 입신출세의 학문인 유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뒈져라, 유교여. 안녕, 행복이여. 반드시 깨닫고야말겠다. 어차피 영화(栄華)는 극에 달해 죽으면 썩어버려 벌레의 먹이가 되어 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고 싶다. 부처에게 빚이 있을 턱이 없다. 언제나 잠자리처럼 극락을 향해 나는 것이다. 마침내 잠자리가 혀를 내민다. 빌린 것은 갚지 않는다.

 

그럼, 이제부터 이 책에서 대학의 무상화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왜 대학은 공짜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왜 일본의 대학은 수업료가 비싸고 장학금은 빚밖에 없는 것인가? 그런 의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나갈 예정이다. 사람이 어떠한 빚에도 얽매이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표현하는 일은 가능할까. 의외로 평소에도 하긴 하지만, 그것을 힘껏 시켜주는 것이 바로 무상의 대학이다. 반대로 사람을 빚으로 얽어매 일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것이 학비(수업료+생활비)와 빚이다. 대학의 학비를 무료로 하여 갚지 않아도 되는 장학금을 만들자. 대학의 무상화는 진정한 자유를 손에 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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