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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17 카투사 이야기 - 5
  2. 2019.11.17 Voice from La La Land (3)
수필/카투사 이야기2019. 11. 17. 22:36

원래 이 꼭지에서는 카투사 훈련소에서 보낸 3주 과정을 기억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주제를 더 잊기 전에 적으려는 몸부림을 이곳에서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나는 분대장 훈련병이었다. 2분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3주 동안 여러 가지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선 일반적인 일과가 있다. 한 방에 침대 세 개가 있고, 그러한 방이 두 개가 모여 하나의 큰 방을 이룬다. 그러면 그 큰 방에 모두 여섯 명의 훈련병이 생활하는데, 그들이 공유하는 화장실과 욕실은 고작해야 한 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새벽 점호 때부터 다양한 곤란과 애로가 예상되기 때문에, 나는 우선 침대의 이불을 가급적 쓰지 않았고, 대신 대한민국 육군에서 지급 받은 점퍼를 입고 잤다. 이렇게 하면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와 침구의 각을 잡아야 하는 전근대적이고 비인간적인 일에 시간을 덜 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는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나서 수통(개중엔 분명 한국전쟁 때부터 쓰이던 것도 있었으리라)과 조악한 매트를 들고 나가서 오와 열을 맞춰 섰다. 나는 분대장 훈련병(PG; Platoon guide)이었기 때문에 내 분대의 훈련병들을 독려하곤 했다. 내 기억으로는, 4개의 분대가 모여 하나의 소대를 구성했는데, 그게 같은 기수로 뽑힌 카투사이고 한 두 명의 밀린 앞 기수 카투사가 우리랑 같이 훈련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들은 정말 부러웠던 게, 같은 훈련병이면서도 군생활을 나보다 무려 한 달이나 앞서서 끝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좌우간 성조기와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미육군가도 부르고 이것저것 하면서 의례를 마치고 나면 조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깅을 하고 나서 이런저런 운동도 하고, 매트를 이용해 바닥 운동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수통은 달릴 때는 들고 뛰는 게 아니고, 오와 열을 맞춰선 자리에 놓고 (매트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파악하는 방식이었다.

디팩 앞에서 왜 찍혔는 지는 모르겠지만 좌우간 나와 서전 유.

아침에 운동(PT; physical training)을 마치면 바삐 움직여 목욕을 하고 ACU로 갈아 입고 다시 오와 열을 맞춰 선다. 그러면 식당(D-FAC)으로 제식을 하며 걷는데, 이때 분대장 훈련병이 통솔을 한다. 논산에서 배웠던 '왼발, 왼발'이 아니고, 영어로 'left-your-left' 'left-right-your-left' 등을 불러 가며 발을 맞춰 이동한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신나고 즐거웠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캠프 잭슨을 공유하는 미측 분대장 훈련대(WLC; Warrior Leader Course--2019년 현재,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병사들 가운데 아프리칸 병사가 소울을 넣어서 구호를 외치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하였다. 영화 속 한 장면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았고, 좌우지간 국군 부대를 벗어날 수 있다는 즐거움과 짜릿함에 매일 매순간 행복했다. 그렇게 식당으로 가면, 식당 앞에서 오와 열을 맞춰 대기를 타고, 크게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서 이동한다. 내 기억으로는 아침은 식사 구성이 계란과 베이컨과 이것저것 등으로 전부 똑같았던 것 같고, 점심과 저녁은 이제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며 요리가 나오는 long cut, 햄버거나 패스트푸드가 나오는 short cut, 그리고 아무렇게나 들어 가서 롱컷도 숏컷도 아닌 taco bar를 선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크게 보자면 두 가지 선택지(롱컷, 숏컷)이지만, 타코바까지 합치면 세 가지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다른 훈련병들과 떠들거나 할 새는 없고, 영화에 나오는 미제국주의자 같은 중사들이 목청 높여 '빨리 먹고 나가라' 등의 말을 하도 해대서 신속하게 먹었다. 

식사 외 기억나는 주중 일과로는 전부 교실에서 이뤄지는 오전 군사 지식 훈련 수업과 오후 영어 수업이 있고,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있어 정자(gazebo)에 가서 잡담도 하고 시간을 때웠던 것 같다. 영어 수업 강사는 전부 민간인인데, 군무원이라고 하도 강조를 해서 자기네들이 무슨 전시에는 중위라나 뭐라나. 칙칙한 남자애들이 여자 강사라고 깔볼까봐 미리 선수를 치는 모양이던데, 훈련병들은 여자 선생을 괴롭히겠다는 생각은 적어도 내가 봤을 땐 단 1도 없었고, 그저 좋은 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고 싶은 일념 뿐이었다. 군사 지식 훈련 수업은 논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들로 그나마 기억나던 것은 총기 분해였는데, 원래 의도야 총기를 자유자재로 분해하고 조립하는 살인기계를 만드는 것이었겠으나 우리는 모두 평화를 사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과가 아닌 행사로는 이발(3주 동안 두 번), 사격, 체력장(3주 동안 두 번), 미국방성 영어 시험(이게 자대 배치에 영향을 준다는 말이 낭설이라는 소식은 훈련소 내에서도 파다했다), 한국군 원사 정훈, 훈련소 청소, 졸업식 연습, 대망의 졸업식 등이 기억난다. 이발은 캠프 잭슨 처음 들어왔을 때 하루인가 이틀 지나서 바로 받았던 것 같고, 사격은 2주차인가 3주차 때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k-2보다는 m-16체질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스무 발 중에 열여덟 발을 맞췄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것이 과연 의정부에서 달성한 기록인지, 아니면 자대 가서 성남으로 내 군생활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훈련을 나갔을 때 달성한 기록인지는 알 수 없다. 캠프 잭슨 내부의 사격장에서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 시험은 넓은 강당에 모여서 듣기와 이것저것을 봤던 것 같은데, 이 점수는 공개가 되었으나 자대 배치에는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중론이었기 때문에 별 관심 없었다. 체력장은 팔굽혀 펴기(push-up), 윗몸 일으키키(sit-up), 2마일 달리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점 300점을 획득하면 pt master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피티 마스터 엠블렘을 자신의 군생활 동안 체육복에 박아 넣을 수가 있다. 자대에 따라서 이들에게 pt 열외를 주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카투사 훈련소 때도 그렇고 군생활 내내 300점을 받아본 일은 없고, 최고점이 288인가 아무튼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제일 잘 했던 것은 2마일이고, 가장 약점은 팔굽혀펴기였던 것 같다. 

자대 배치야말로 카투사 훈련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자대 배치 행사 이전에 여러 부대에서 고참들이 와서 자신의 부대를 홍보(?)한다. 군사 기밀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내 기억으로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자신의 집과 가까운 부대나 아니면 서울의 용산(여기서 카투사로 복무하면 이른바 '용투사'가 된다)에서 근무하길 원했다. 나 또한 집이 서울 서대문구였고, 나보다 먼저 카투사로 입대한 친구가 용산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기에 용투사가 되길 희망했다. 자대 배치 행사 자체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한 명 한 명 호명해서 너는 어디, 너는 어디를 말해주는 건 아니고, 공정성을 기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카투사 몇 명을 단상 앞으로 불러 내서 전자 추첨식의 버튼을 누를 수 있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 일괄적으로 추첨이 완료되고, 그렇게 나의 군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행사가 끝나고,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은 역시 캠프 잭슨에서 이른바 '기간병'으로 일하는 카투사인데, 그가 훈련병들의 행선지 목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자대를 물으면서 "혹시 제가 용투사인가요?"라고 물어봤더니 그는 "응, 용투사긴 한데, 용인이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용인에 부대가 있는지도 몰랐다. 좌우간 실망 반, 기쁨 반(그래도 경기권이 아닌가)으로 다가올 군생활을 기대해 보았다.

졸업식을 버블짐에서 했는데, 지금도 이 버블짐이 남아있는 지는 알 수 없다. 훈련병 1명당 외부에서 최대 4명을 부를 수가 있었는데, 나는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친하게 지내던 대학 후배를 불렀다. 졸업식 자체는 별 일 없이 잘 끝났고, 나는 앞서 배정 받은 용인에서 고참들이 오길 기다렸다. 마침 나와 같은 기수에서는 K(2019년 현재 김앤장 변호사)와 J(뭐하고 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보다 8살 연상)가 나와 함께 용인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1년 8개월 동안 시간을 보낼 부대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운전병이었던 H와 선임병장으로 갓 부임했던 S(2019년 현재 국가외교공무원) 등이 기억난다. 다음 꼭지에서는 자대로 향하는 차 안에서부터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 소대장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좌우간 와델 하사는 좋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생과.
아버지도 카투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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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로 탈조선' 칼럼에 오랜만에 귀중한 외부 필진 선생님을 한 분 모시게 되었습니다. 언어학을 공부하시는 C 선생님이십니다. 한국에서 학사와 석사를 하셨고,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엔젤레스(UCLA)에서 박사 과정 중이십니다. 전진과 협력에 입각한 언어학 연구의 신기원을 개척하실 예비연구자의 흥미로운 탈조선 이야기, 정말 기대가 큽니다. 바로 읽어 봅시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에서 동아시아 언어학을 전공하고 있는 한국인입니다. 블로그 주인분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쓰게 되는 글입니다. 보다는 이 분의 가르침인 ‘전진과 협력’을 실천하고자 쓰는 글이라고 포장하겠습니다.


서두에서 보이듯이 저는 모두가 가볍게 읽으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쓰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대단하신 선생님들께서 이 블로그에 각자의 경험과 조언들을 써 주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엔 내세울 것도 없거니와 순전히 제 노력으로 왔다는 생각은 아직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눌 경험도 없고, 감히 조언은 할 수도 없기에 그냥 정말 가볍고 편하게 써보겠습니다.


저는 20대 중반까지 공부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야. 우리 같은 인생이 제일 답이 없어. 반에서 7~15등 하면 뭐든지 애매해. 좋은 학교를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하고 빠르게 취직하는 것도 아니고.” 이 말을 한 친구는 대학교에 진학한 후 열심히 공부하여 취직을 하였고 얼마 전 결혼을 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는 저 정도 하는 (2005년~2007년기준, 한 반에 40여 명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평범하며 놀고 잠자는 걸 좋아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떻게 비벼서? 서울권 대학 영어영문학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군 휴학 전까지는 그냥 먹고 놀고 자며 지냈습니다. 후회가 있다면 ‘아. 그 때, 더 놀 걸…’


그러다, 휴학을 마치고 3학년으로 학교에 복학하니, 이상하게? 공부가 좋아졌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1. 그냥 공부에 흥미를 느껴서.

2. 내가 한 질문, 과제, 그리고 내가 치룬 시험에 교수님들께서 극찬을 해주셔서. 인정받는 기분이라

3. 공부라도 해야지 나중에 가정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공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3학년 2학기에 당시 지도교수님께 ‘대학원’은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나도 갈 수 있는 곳인지? 거기 가면 나는 뭐가 되는 것인지? 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연구실로 찾아 뵈었습니다. 지금도 신기하지만, 처음 교수님의 오피스를 들어갈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야. OOO. 너 대학원 가고싶어서 왔지?!”

아직도 신기합니다. 저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날, 교수님과의 많은 상담 끝에 타 대학교 영어학과 석사과정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1년 후 대학원 면접을 치뤘고, 합격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때 조금 기뻤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나도 석사과정에 입학했다는 기쁨보다는, ‘내가 선택한 길에서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하는 마음이 저를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석사생활을 시작하며 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주로 학술지 편집 및 콜로퀴움 운영을 도왔습니다. 이 경험은 제가 미국 박사과정에 지원할 때 ‘여러 분야의 논문을 접할 수 있었다’라고 포장?하였습니다. 실제로도 제가 관심있던 분야 외에 다양한 분야의 논문을 읽었습니다 (편집상의 이유로). 또한 이 당시,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국가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제 능력이 너무 모자라 시간을 많이 빼았기는 바람에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학위를 마치지 않고 그냥 관둬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를 응원해주신 부모님을 비롯하여 교수님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못 할 짓이라고 생각하며 ‘오직 전진뿐’ (이럴 때 쓰는 표현이 맞죠? 블로그 주인장님)을 외치며 버텨나갔습니다.


고생 끝에 보람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번역 사업이 마무리 되어 갈 때 쯤 한 과목을 듣게 되었고, 이 과목에 매료되었습니다. 이 과목 교수님께 제가 ‘왜’ 이 과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걸’ ‘연구’하고싶은지 등에 대해 말씀을 드렸고, 감사하게도 저를 지도제자로 받아주셔서 이 전공으로 지금 유학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한국어 언어현상에 큰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저 역시도 그 영향을 받았으며 한국어의 여러 언어현상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에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통해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을 교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저의 결정을 너무 좋아해 주셨고 응원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지금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며, 본격적으로 어떻게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들에 비해 늦게 공부에 흥미를 가졌으나 (20대 중반) 이 때부터 공부를 하려면 미국에서 해야지! 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처음 석사과정 진학에 대해 지도 교수님께 상의를 드릴 때, 교수님께서도 바로 미국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든 것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겁이 많아서 국내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선택이 ‘틀리진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 평생의 은인이신 지도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2. 교수님을 따라 학회도 다니고 발표도 했으며, 석사논문을 편집하여 학술지에 투고하였다.

3. 진짜 공부를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은 돈으로 얻을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유학을 가고 싶었던 마음이 석사 1학기 때에도 역시 있었기에 여름 방학에 GRE 준비 차 강남의 한 어학원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번역과 조교 일로 몸과 마음이 상해있던 터라 학원에서 조느라 바빴습니다. 결국 ‘본격적’으로 유학을 준비를 한 건, 석사논문을 작성하면서 부터인 것 같습니다. 관심 있는 학교를 찾아보며 ‘아. 이 학교가서 박사과정 한다면 행복하겠지? 미국은 어떤 곳일까?’ 라는 상상과 함께 버텨나간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의 교육제도와 교수님들이 저에겐 너무나도 좋았고 과분하였지만, 그냥 ‘단순히’ ‘미국’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찾아보니 박사과정 지원에 있어서는 다양한 요구사항이 있었습니다. TOEFL은 79~100/120 정도의 커트라인을 요구하였고, 특정학교들은 speaking 영역 24~25/30이상의 점수를 요구하였습니다. GRE같은 경우는 SUNY Buffalo에서 ‘Verbal 과 Math 총 합 몇 점 이상. Writing은 몇 점 이상이 ‘선호 됨’’이라고 적혀있던 걸로 기억됩니다. 다행이게도? TOEFL speaking 커트라인을 요구하는 학교에선 제 관심분야를 다루지 않았기에, 저 정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고 GRE 같은 경우에도 ‘선호됨’이라고 하였기에 대충 할까 하다가, 괜히 긴장이 되어 먼저 유학간 사람들에게, 교수님들께 여쭤보았습니다.

“보니까 그냥 영어는 먹고 살 만큼은 하는 것 같고, 어학 점수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았는데 높아보이는 사람도 있고 낮아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그냥 요구 점수만 넘기면 학업계획서나 샘플페이퍼에 치중하는게 합리적인 듯? 근데 어학점수는 높으면 높을 수록 좋겠지. 고고익선!”이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빠르게 커트라인만 넘기자라는 마음으로 (핑계로) 나름? 열심히 하는 척을 하며 시험을 치루었고 각 학교에서 요구하는 커트라인을 넘겼습니다. 이 후에도 어학점수에 계속 아쉬움이 남았지만, 제 시간과 노력을 학업계획서와 샘플페이퍼에 치중을 하였습니다.

샘플페이퍼는 석사논문을 편집하여 학술지에 투고했던 논문 (약 25쪽?) 과 유학 준비 해에 학회에서 발표한 발표논문 (약 22쪽?)을 다시 학교 규정에 맞춰 편집을 진행하였습니다. 

학업계획서는 평소에 제가 가지고 있던 ‘언어’에 대한 짧은 생각과 어떠한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연구’하고 싶은지, 왜 내가 ‘거기’서 공부를 해야하는지 (Faculty와의 ‘연구 접점’) 등에 치중하여 쓴 것 같습니다.


저의 관심분야는 미국 전 지역에서 연구되는 학문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미국 서부쪽 (+유럽)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는 터라, 학교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교수님들과 먼저 유학간 선생님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많이 반영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UCLA, UC Berkeley, UC Santa Barbara, U. of Oregon, U. of Colorado 등 서부의 학교와 SUNY Buffalo 등 약 10 군데의 학교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준비를 하였습니다.

~10월- 어학시험 준비

10월~11월- 샘플페이퍼 재편집/ 교수님들께 추천서 부탁

10월~12월- SOP및 CV 작성 / 학교 리서치


이 중 UCLA에서 가장 먼저 좋은 조건으로 합격통지를 받게 되었고, 후에 SUNY Buffalo에서도 합격소식을 접하였습니다. (결국 2할 정도네요. 이런 제가 글을 쓴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저와 리서치 핏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 학교는 UCLA, UC Berkeley, UC Santa Barbara, U. of Colorado였습니다. 이 네 군데의 학교를 제외하고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아. 어디라도 가고싶다.’ 라는 생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물론 성격상의 이유로 그 어느 곳에도 사전연락 (contact)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리서치핏’이 ‘가장 잘 맞다고’ 생각한 학교에서 ‘가장 먼저’, ‘가장 좋은 조건’으로 연락을 받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제가 왜 뽑혔을까 하는 의문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1. 남들에 비해 낮은 어학성적

2. 남들에 비해 좋지 않은 학벌과 GPA

3. 남들에 비해 적은 연구실적 및 수상경력


합격통지를 받은 올해 1월부터 지금 11월까지 고민을 해 본 결과,

1. 나를 ‘정말 잘 알고 계시는’ 평생의 은사이신 교수님의 추천서

2. 나름 잘 맞은 리서치 핏.

3. 운

이 큰 작용을 하였다고 답을 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감히 주제넘게 제가 조언을 드리자면,

1. 지도교수님과 모든 걸 상의하시고,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 어떨까요?

2. 리서치 핏이 잘 맞는 학교를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상 글 마치겠습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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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ice from La La Land  (3) 2019.11.17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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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런데

    공부만으로는 부족 결국 탈조선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하는데 얼마정도 있어야하는지?

    2019.12.01 16:40 [ ADDR : EDIT/ DEL : REPLY ]
  2.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생활 할 수 있는 자금이요.

    2019.12.01 16:43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