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2018. 6. 12. 18:50

아까 낮에 중국어 기말고사를 끝으로 UCLA에서 박사과정 1년차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여러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15주씩 두 번 돌아가는 학기제와는 다른, 10주씩 세 번 돌아가는 쿼터제를 처음으로 마쳤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학과 수업coursework이라는 게 사람을 쉽게 지치게도 하지만, 박사논문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수업을 골라 들으면 그나마 유용하고 유익하겠다. 허나 나는 2, 3외국어 요건을 채우는 데 집중한 한 해를 보냈고, 이제 위에서 언급한 논문작성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수업은 2년차 때 본격적으로 들으려고 한다. 좌우간 정리 안 되는 생각을 주제별로 써보겠다.


1. 연구는 탈조선

서울에서 석사과정 및 석사학위 소지자로 보낸 3+1년을 전부 합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용하고 즐거운 9개월을 보냈다. 물론 서울에서 얻은 경험들과 인연이 여기서의 생활에 큰 활력과 도움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구를 진행하려면 탈조선 및 도미해야 한다. 


2. 탈조선엔 영어

영어가 진리의 언어는 아니지만, 세계어lingua franca이며 인류가 수행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작업언어working language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다. 영어로 써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으며, 자신 연구의 영향력을 더욱 늘릴 수 있다. 탈조선에 영어가 필수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3. 목표와 효율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할 공산이 크다. 박사과정에서 어떤 단기, 중기, 장기 목표를 세우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게 효율적으로 시간을 써야 한다. 나의 경우, 1년차에 언어 요건을 전부 완료했다. 2년차에 논문자격시험을 위한 다른 수업 요건을 채우려고 한다. 동시에 이번 여름에 논문 1.5편에 해당하는 글을 쓰려고 한다. 물론 영어로.


4. 끊임없는 혁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사'라는 필드를 조금만 벗어나면 주제와 방법론 측면에서 도무지 추격이 불가능한 정도의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를 모두 시야에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나 새로운 것에 대한 추격,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써놓고 나니 무슨 기업의 슬로건 같지만, 박사과정에 진학하기 전에 이를 분명히 해두어야 시간 낭비를 덜 한다.


5. 충분한 휴식과 강인한 체력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기계가 될 수도 없다. 힘들 때는, 쉬고 싶을 때는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한 번 죽는 인생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운동도 열심히 할 필요가 있다. 기계가 될 수 없는 연구자가 경쟁에서 승리하는 지름길은 체력과 지구력의 배양 및 보존이다. 슬프게도 이 지적은, 나같은 범인凡人에게는 참이다.


6. 이미 늦었다

박사과정에서 유학생, 그것도 나처럼 30대 초반에 유학을 나온 이들은 이미 세계적인 경쟁에서 한참을 뒤쳐져 있음을 보았다. 나와 동갑내기 미국인이나 중국인들, 인도인들 가운데에는 벌써 박사, 포닥, 교수들도 있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한시라도 빨리 탈조선 및 도미하는 게 중요하다.


7. 호전되는 남미북 관계

세 번째 쿼터는 역사적인 사건이 몇 개 있었다. 4.27 판문점 회담과 5.26 통일각 회담, 그리고 어제 기말고사 시험 준비를 포기하며 계속 봤던 6.12 싱가폴 회담까지. 한편으로 미국에 그 흔할 것 같은 '북한연구소'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8. 아름다운 사람들

한국에서처럼 여러 좋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부터 학과의 친절한 선후배들, 같이 학문적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동학들, 외국어 수업에서 만났으나 내게 과분한 호의를 보여준 미국인/중국인 학부생들. 나와 같이, 또는 나보다 먼저 유학을 나와서 내게 커다란 도움을 준 분들도 잊을 수 없다.


9. 쏜살 같은 시간

첫 번째 쿼터가 끝나자마자 학교 대학원에서 제공하는 소정의 펠로십을 받아 동부에서 자료 수집을 4일간 진행했다. 아울러 박노자 선생님께서 불러 주셔서 프로젝트 건으로 오슬로를 다시 방문했고, 그곳에서 오랜 노르웨이인 친구(지금은 일본에서 교수)를 만났다. 하버드와 MIT 관련자들은 내게 여행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었으며, 돌아와서는 훌륭한 선배 K의 호의에 힘입어 샌디에이고를 다녀왔다. 두 번째 쿼터에는 동생이 휴가를 왔었고, 로마 워크샵 합격 통보를 받았으며, 쿼터 종료와 함께 한국에 다녀왔다. 세 번째 쿼터에는 다시 여름 펠로십을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으며, 점차 무엇을 연구할지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정말 빨리 갔다. 앞으로 더 빨리 갈 것이다.


10. 오직 전진뿐

조선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고통 받는 여자와 소수자, 가난한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보면서, 이 세계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변화는 너무나 느리게 온다. 쌀국이 결코 낙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선보다는 거의 모든 측면에서 우수하다. 그러한 비참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직 전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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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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