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4. 11. 2. 23:06

* 다음은 Neil Davidson, How Revolutionary Were the Bourgeois Revolutions?, Chicago: Haymarket Books, 2012의 A Note On the Reproductions(출간에 부쳐)를 번역한 것이다.

 

 

   

          

           Liberty Guiding the People               What Courage!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대단한 용기!>

 

 

그림에 대한 주석

 

부르주아 혁명을 생각할 때 어떤 인상이 먼저 떠오르는가? 우리는 대개 프랑스와 반란의 와중에 있는 인민, 아마도 바스티유를 기습하거나, 또는 파리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인민을 떠올린다. 후자의 인상을 그 어느 것보다 효과적으로 포착한 그림은 앞표지에 자세히 드러나 있는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31)이다. 에릭 홉스봄(Eric Habsbawm)은 이 작품이 구현한 혁명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과 혁명적임에 대한 낭만적인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 모자를 쓰고 수염 난 음울한 젊은이들, 셔츠바람의 노동자들, 솜브레로 닮은 모자 아래로 늘어뜨린 머리의 호민관들이, 삼색기들과 프리기아 모자에 둘러싸인 채, 대륙의 모든 도시에 바리케이드를 쌓으며, 1789년의 온건했던 혁명이 아닌, 혁명력 2년의 영광을 재창조한다.” 그림의 원제는 <728: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었고, 이는 1830년의 프랑스 혁명 도중 728일에 일어난 실제 사건, 즉 아르콜 다리에서 스위스 근위대를 무찌르려는 반란군의 마지막 시도를 나타낸다. 이 그림은 신화적이다. 자유의 여신은 그녀가 바리케이드 너머로 이끄는 민중의 여인이자, 용기, 대담함, 지도력 같은 관념적인 혁명적 덕성의 전형으로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1792년 이래 대혁명과 공화국, 그리고 프랑스 그 자체의 상징인 마리안의 재현이다. 자유의 여신이 반-신화적인 여신 외에 다른 방식으로 그려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여성이 혁명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확실히 바리케이드에는 다른 어떤 여성이 묘사돼있지 않다. 들라크루아가 자세히 그리고 있는 4명의 남성 중 오직 한 명만이 부르주아인데, 그의 모자, 조끼, 삼각건, 그리고 화승총을 휘두르는 평민들에 비추어 알아볼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사태의 진행 과정이 정확히 노동계급투쟁의 형성단계들과 겹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부르주아 혁명의 영웅적인 구상을 봉안(奉安)했다. 그들이 쌓은 바리케이드에 넘치던 이 혁명적 대중들은 부르주아 질서의 경계 또한 넘고 있었는가? 결국 인민은 1830년대의 목격자일 사람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다. 이 목격자란 반혁명 세력의 관점에서 위 작품을 응시했을 미술관의 부르주아 단골로서, 작품이 처음 전시됐을 때 그것이 상대적으로 인기 없던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애매모호한 점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유의 여신은 민중을 이끄는 동시에 그들을 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혁명에 대한 들라크루아 자신의 양면성을 시사한다.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1789-1815 연간의 첫 번째 프랑스대혁명 기간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균열선 중 하나를 암시한다면, 그보다 앞선 작품 하나는 좀 더 어두운 면모를 그리고 있다. 책의 속표지를 맞대고 있는 삽화는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대단한 용기!>이다. 이 판화는 <전쟁의 참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85개의 작품 중 7번째 작품이다. 고야는 1820년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참상>을 제작했으나, 해당 작품들은 그의 사망 35년 후인 186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개되었다. 자유의 여신처럼, 고야 그림의 주인공도 시체더미 위에서 싸우는데, 이것이 사실상 들라크루아 그림과의 유일한 비교점이다. 고야는 확실히 여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녀는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아구스티나 사라고사 도메네크라는 역사적 인물로, 1808년 사라고사 지역의 수도 방어 때 활약하여 아라곤의 아구스티나로 알려져 있다. 고야는 영광이 아닌 비극을 강조한다. 같은 사건을 감상적으로 표현한 <사라고사 방어>(1928)를 그린 스코틀랜드 화가 데이비드 윌키(David Wilkie)와는 달리, 고야는 적을 향해 돌린 아구스티나의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등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전쟁으로 황량해진 풍경 속 유일한 인물로 대포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리고 적은 누구인가? 역설적인 것은 그녀가 프랑스군을 상대로 도시를 방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는 제정 독재의 중심이었으나, 국외에서 그들은 총검의 끝을 들이대며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을 강요했다. 그러나 적어도 에스파냐에서는 비교적 부유하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소수의 인구만이 프랑스군을 반겼다. 에스파냐 사람 대다수는 교회와 왕의 깃발 아래서 침략자와 침략자를 돕는 지방 세력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전쟁의 참상>은 들라크루아가 기념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민중의 다른 측면, 즉 무지하고 짐승 같으며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프랑스는 에스파냐 사람들의 대응보다 더욱 야만적인 잔혹행위를 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의 참상>이 보여주는 전부는 아니다. 사라고사 방어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민중봉기도 전적으로 반동적일 수 없었다. <전쟁의 참상> 작품들 중 <대단한 용기!>만이 에스파냐 저항군의 영웅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 또한 여성들, 즉 아구스티나의 이름 없는 자매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작품의 제목들은 고야의 입장이 가지는 모호성을 전달해준다. <여인들 용기를 북돋우다>가 선언적이라면, <그리고 그들은 야수 같다>는 몸서리쳐진다.

 

각자가 발생하는 국가적 맥락이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고야의 판화는 모두 공통적인 부르주아 문화의 일부로 파악이 가능한데, 그것은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위대함의 절정에 다가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물론 부르주아 예술의 위대함은 이 지점에서 그치지 않았으나,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또는 부르주아 세계관의 대표이기를 멈추었다. 부르주아의 존재조건들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대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부 근대주의적 아방가르드의 발생은, 잠재적이기 보다는 실제적 지배계급으로서 부르주아 통합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을 것이다. 혁명에 대한 다소 엇갈리는 애증을 지닌 예술가가 승리의 즉각적인 여파에서 성공적으로 압축할 수 있었기에 동정어린 자화상을 갖게 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성공적인 아래로부터 부르주아 혁명의 절정을 보여준다. <대단한 용기!>는 비슷한 영웅적 순간을 묘사하지만, 이는 반갑지 않은 위와 바깥으로부터의 부르주아 혁명의 패배를 다뤘고, 자신이 지녔던 국민적 자부심과 계몽주의적 원칙이 양립할 수 없어 보였던 반동의 시기에, 양자 사이에서 망설인 예술가가 그린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극단의 반대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혁명과 <전쟁의 참상>의 반혁명은 한 가지 주제를 공유한다. 바로 부르주아라는 혐의이다. 노동계급이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 세력으로서 출현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사례에서, 이러한 혐의는 부르주아 의도에 대한 의심의 시작이었고, 국민적 단결이라는 수사가 타협 불가능한 계급 분화를 숨겼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의 부상이었다. 노동계급이 거의 형성되지 못했던 에스파냐의 사례에서는, 이것이 부르주아가 민중 대다수와는 다른 경제적 이익을 가졌을 뿐더러, 국가를 외국의 침략자에게 넘김으로써 민중을 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이미 확고해진 신념이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는 군주제에 충분히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 반면, 에스파냐에서 부르주아는 군주제를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르주아의 명칭을 갖는 혁명들과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가 지니는 모순들에 대한 부르주아의 양면성은, 앞서의 두 그림 모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탐구한 주제이자, 또한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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