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현대사2014. 10. 23. 18:25

* 원문.

 

 1922년, 소련은 일본이 점령한 베르흐네우진스크(Верхнеудинск, 현 울란 우데Улан-Удэ)를 되찾고 같은 해 10월, 이 도시에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19일~28일)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목적은 초창기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큰 지류인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화해를 도모하고, 조선의 공산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더하여 이 대회엔 양파뿐만 아니라 국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재일본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등 약 150명이 참가했다. 조봉암은 국내의 조선인 대표로 참가했다. 참가자의 약 3분의 2를 상해파가 차지했고, 그들은 결의 원칙으로 다수결을 주장했다.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만장일치를 주장하였고, 국내와 일본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이르쿠츠크파와 행동을 같이 했다. 그러나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간부들은 상해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대회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민테른 본부는 양파의 대표들과 함께 조봉암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모스크바로 소환하여 진상을 규명하고자 했다. 조봉암은 "양파가 한 치의 앙보도 없이 종래의 주장을 반복했다"고 진술했고, 다른 이들도 각자 할 말이 있었다. <공산주의 ABC>를 쓴 바 있는 부하린(Н. И. Бухарин, 1888~1938)은 조선인 혁명가들의 말을 모두 듣고 난 후 (물론 러시아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양자가 다 같소. 당신들 가운데 그 누구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관한 진정한 사실들을 알고 있지 않소. 그대들은 사실상 다만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을 뿐이오."

 코민테른은 양파의 해체를 선언하고 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문제를 전담하는 꼬르뷰로(Корбюро, 고려국)를 설치했다. 조봉암에게도 꼬르뷰로의 참여가 권유됐으나, 그는 1921년에 세워진 동방노력자공산대학(КутВ)에서 수학하길 희망했다. 조봉암은 마침내 1923년 초 쿠트브(동문: 등소평, 유소기, 호지명, 주세죽, 방호산, 허정숙, 김용범 등)에 입학했고, 같은 해 여름, 속성과를 수료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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