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현대사2016. 12. 2. 23:06

한국러시아사학회 (2016123, 이화여자대학교 학생회관 206)


발표자: 류한수

 

1920년대 전간기 바이마르-소련 군사교류 활발. 합동훈련을 하기도 함. 장교 사이에 교류가 일어남. 장교에 따라 붉은군대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 전반적으로 소련군에 우호적인 관점을 가진 독일군 장교는 소수. 보수, 국수주의, 반공주의, 엘리트의식이 배인 독일군 장교가 많았음. 1930년대 투하쳅스키가 독일 방문했을 때 모욕적인 평가. 군사적으로는 교류를 했으면서도, 독일군들은 시혜를 베풀었다는 식으로 기록. 시혜적 시각은 독일군을 얼마나 깔보았는지 잘 보여준다.

독소전쟁이 끝난 1945년 봄, 독일의 패배.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기 서방세계에서 패자의 역사가 우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났음. 노경덕 선생님의 말: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었음 (냉전기 서방의 역사 인식). 독일은 오로지 수에서, 추위에 밀려서 진 비운의 군대로 인식되었음.

1943년까지 쾌속진격, 승리. 1943년 이후 처절한 방어와 승리 등이 서방세계의 인식을 지배했음. 전쟁이 끝나고,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트루먼이 소련을 동반자라기보다는 적으로 인식. 냉전기 소련은 미국의 동맹이 아닌 적. 소련군과 싸우려면 소련군을 알아야 했기에, 소련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독일국방군, 장군들을 대거 기용. 이들에게 2차 세계대전 군사사 서술을 맡김. 독일측의 시각이 강해짐. 독일 장군들이 책임을 히틀러에게 떠넘김.

싸움터에서 붉은군대와 실제로 싸운 독일 장군들은 귀중한 정보의 원천. 중형을 받더라도 금새 사면. 328명 독일 장군 포로가 미국국방부에 배치돼 각양각색의 역사서 서술. 프란츠 할더, 15년 동안 일하면서 역사 서술을 감독. 독일 장군들이 회고록을 작성, 미국에서 출간. ‘자기들은 잘 싸웠는데 히틀러가 끼어들어 패배. 소련군은 저열한 군대.’ 독일의 전격전은 허위에 가까움. 포위섬멸에 가까움. 전통적인 독일군의 교리에 입각하여 싸웠음.

소련군의 전쟁교리는 제정러시아 때부터 내려온 것에 내전을 거치면서 스스로 만든 것.

 

드는 생각: 전후 제국일본군 장교들에 대한 처우와 비교하면 재미있을 듯. 미국방부에서 나온 자료 가운데 만주전략공세 작전에 관한 연구를 일본군 장교에게 맡김. 미국과 전범 장군들의 이해관계가 아주 잘 맞아떨어짐. 전쟁, 전범 회피의 문제. 지구적 반공/반소주의. 독일/일본 장군들 전후 비교한 연구가 있는지?

 

 

발표자: 고가영

 

이슬람이 생기자마자 중앙아로 전파. 현재까지 사회의 모든 조직에 다대한 영향력. 반면 러시아는 19세기 이 지역으로 들어왔고, 정교회를 표방했음. 소비에트는 무신론을 표방했음. 중앙아의 이슬람은 제정과 소비에트를 모두 견뎌냈음. 20169월 사망한 우즈벡 까리모프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헌법에 선서한 다음에 바로 꾸란에 선서했음. 신생국가의 정체성 확립 도구로 쓰겠다는 의지를 표명.

발트 삼국에 점령박물관이 있음. 나치와 볼셰비즘 양자에 의해 수탈을 당했다는 인식. 이와 유사한 선상에서, 오늘날 중앙아시아에서는 소련의 이슬람 탄압을 부각시킴. 탄압에 대한 이슬람의 저항, 지하드? 소비에트 시기 정부와 이슬람의 관계가 이렇게 대립적인 구도였는가?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소비에트 시기 정부의 대()이슬람 정책은 때마다 변화가 있었음.

공인/생활/극단 (와하비즘) 이슬람. 여기서 공인을 선택했음. 종무원.

러시아혁명 이후 대조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종무원의 변천.

 

김남섭: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았던 시기: 아프간전쟁기. 회고-“매일 라디오에서 무슬림이 얼마나 나쁜 종교인지 선전선동.”

이슬람 외에 중앙아시아 (우즈벡)를 표상하는 정체성이 있는가? 타지키스탄 내전, 종파끼리의 전쟁, 이슬람만 가지고는 구분도 힘듦. 점점 이슬람을 버리고 티무르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밀면서 역사를 부흥시키려고 함. 기독교 선교사보다 와하비즘 선교사를 더욱 경계함. 까리모프 정부는 우즈벡을 무슬림의 나라지만 이슬람 정부는 아니라고 표방.

양승조: 제정 시기 이슬람정책을 쓰면서, 예카테리나 시기 만들어진 종무청을 만드는 과정을 공부하면서, 소비에트정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오렌부르크 무슬림의 경우, 무크티로 선출된 자가 카자흐 가서 적극 제정 선전을 했음. 사둠은 어떠했는가? 이원적 (공인/비공인)인 관계가 생겼음. 까리모프의 통치를 우즈벡 공인 무슬림들이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이익을 취함. 종무원은 국가에 충성스러웠을 텐데, 오히려 종무원이 이슬람 사회 내에서 얼마나 지지를 받는지, 또는 어떠한 위상인지가 더욱 연구되어야 할 부분.

김병호 (전 대사)

류한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에서 아편이 오늘날 마약과 같은 의미인가? 마르크스가 이 아편을 썼을 때, ‘보다는 진통제또는 치료제의 의미로 썼을 터. 레닌이 썼을 때는 어떤 의미?

한정숙: 지하우진의 딸 지하부지노바. 어떻게 된 것인가? 우즈벡어가 노어로 바뀌면서?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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