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평/냉전연구2014. 10. 6. 09:09

연합국은 2차 대전에서 추축국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고, 미국은 사할린을 제외한 일본 열도를 석권한 뒤 수년간 군정(민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일본에서 1951, 샌프란시스코에서 맺어진 두 개의 조약[각주:1]이 이듬해인 1952년에 발효될 때까지 7년간 군정을 실시했고, 오키나와(沖縄)가 일본에 최종반환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20년이라는 시간을 더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일본의 미군정기는 오늘날까지도 미·일 각국의 공식역사서술뿐만 아니라 대중의 역사인식, 대외정책 입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울림을 주는 파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문이 언급하고 있듯, 부시 정권의 대이라크점령정책 입안·수행과정에서 대략 한 회갑 전에 만들어진 대일점령정책은 직간접적으로 끊임없이 참조됐다. 더하여 미측의 주장대로라면 일본은 미국이 再造한 국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미군정기(또는 점령기)’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염두에 둔 채 미국의 대일점령통치를 정보와 교육 기획(project)"이었다고 주장했고, 당시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을 면밀히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저자가 미국에서 집필한 박사학위논문을 日譯한 뒤 증보한 것으로, 미국과 일본 양국의 여러 공식/개인 자료(문서, 영화, 면담 등)를 근거로 삼고, 戰時에 수립돼 점령(戰後)기를 지나 강화가 달성된 이후에까지 입안·변용·실행된 미국의 對日문화전략의 구조와 양상을 역사주의적으로 살폈다. 저자는 시종일관 점령기 미국의 정책은 일본을 가르치려고(“재교육·재방향설정”) 했다라는 명제를 자신의 핵심주장으로 삼았고,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다른 주장들, 이를테면 미국의 점령정책은 과거로부터 강화 이후에까지 이어졌다라든가 ·일 양국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미국의 점령정책에 융합됐다등을 추가적으로 제기했다. 나아가 저자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서 수행된 기존의 대일점령연구들을 잘 정리하면서도,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종적한계, 즉 한 분야를 다른 분야와 제대로 연계하지 못하는 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저자가 내세우고 있는 미국학이라는 학제적 접근법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횡적인 연구방법을 표방하기 위해 연구의 시야를 일본사회의 모든 측면으로 넓히고자 한데 불과한 것은 아니었는지 등은 쉽사리 알기 어려웠다.

 

여태껏 살펴본 냉전문화연구는 분석의 범주를 크게 세 층위, 사상·이념/제도·정책·매체/소비·현상으로 나눠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연구들은 세 층위 중 한 곳에 주로 머물거나(남한과 대만의 국립대학 인문학부 편제), 성긴 논리로 서로 다른 층위를 무리하게 연결하고자 한다거나(원자탄과 재지역화의 균열들),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이론을 충분한 반성 없이 곧바로 연구에 도입(국문학자들의 푸코 원용)하는 등 부족함과 아쉬움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세 층위 모두를 나름대로 적절하게 다루었다고 할만하다. 그러면서도 특히 제도(조직·계통정책(정보·교육매체(영화)’ 층위에 주목했고, 대개의 문화연구가 보여준 방법론(역사적 총체성을 제시한 후 맥락 안에서 내용을 분석한다기보다, 몇 가지 생각만을 제시하는 식)과는 달리, 먼저 역사적으로 접근하여 자칫 사변적인 담론분석에 머물기 쉬운 문화연구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세부적인 문제(“횡적인 연구의 한계(22), 과연 새로운 시각인지?(49), CIE 영화에 집중 등)가 없지 않지만, ‘점령정책의 실시(점령기)’와 함께 점령정책의 입안주체와 조직·기관들 사이의 생각과 상호작용을 차분히 설명하며 점령정책의 도출과정(점령 이전)’점령정책의 계승(강화 이후)’를 보여준 점, ·일 어느 일방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지만은 않았다고 지적하여 양측의 주체성을 드러내려고 한 점, 모르는 부분은 솔직히 인정한 점 등은 당장에 문화연구자가 본받아야 할 방법론적 미덕이라고 여겨진다.

 

책의 2장은 당시 미국의 대일점령정책에 영향을 끼친 생각의 흐름을 세 갈래로 파악하고 있다. 그것은 블레이크슬리로 대변되는 친일파’, 보튼이 중심인 유도파(온건)’, 맥리쉬 등이 포함된 재교육파(강경)’로 서술돼있고, 삼자는 정계와 학계 등을 넘나들며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정책이 일본인의 적극적인 참가 속에서 실행됐다는 저자의 주장에서, 당시 대일점령정책을 두고 벌어진 미·일 양국의 일치단결과 동상이몽, 또는 3의 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러한 흐름들이 섞여 만들어진 대일점령정책의 일부가 대외정보·교육교류 프로그램(USIE)'으로 강화 이후에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4장과 5장의 주제는 점령 당시 육군성과 민간정보교육국(CIE)이 힘을 기울였던 다큐멘터리 영화(CIE 영화)이다. 두 장에 걸쳐 CIE의 설립경위 및 계통, CIE 영화의 기원, 육군성의 역할, 영화 내용분석 및 상영과 반응 등을 다뤘다.

 

1945827, 미태평양육군(USAFPAC)은 산하에 정보선전부(IDS)를 설립했고, 이 부서의 최고책임자는 전략사무국(OSS) 출신으로 육군무관과 심리전감을 맡았고 맥아더의 군사고문이기도 했던 펠러스(Bonner F. Fellers, 1896~1973) 준장이었다. 922, 맥아더는 IDSCIE로 개조한 후 102, GHQ/SCAP를 설치할 때 최초의 특별참모부서로 CIE를 다시 발족시켰다. CIE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가담했고, 전시의 심리전·선전의 기능을 계승했다. SCAP 일반명령 4(“모든 미디어를 통해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보급·선전하는 것”)CIE의 목적을 규정했다. 저자에 따르면, CIE는 본래 자문기구였으나, 워싱턴의 지침이 현지의 재량권을 크게 제한하지 않았으므로, 실제적으로 이 기구는 월권하여 미디어와 교육에 관한 모든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했다. 같은 기구는 또한 모든 도도부현에 <시청각 자료실>의 설립을 의무화했고, 영사기와 영화를 배포했다. 일본에서 CIE 조직은 19487월경에 이르러서야 CIE 정보과 영화연극계(MPTB) 산하의 교육영화배급부(EFU)가 영화를 지휘하는 형태로 안착됐고, 라디오, 신문, 출판 등 문화산업 전반과 교육 활동에도 종사했다.

 

55(일본인 시청자의 반응)CIE EFU에서 실시한 시청자 반응조사의 결과를 토대로 영화를 본 일본인의 반응을 정리했다. 19503월쯤부터 시청자에 대한 조직적인 반응조사가 실시됐고, 이 절이 근거하고 있는 자료는 19506~11월의 조사표 565장이다. 자료의 특징을 언급하자면, 가나자와(金沢)와 후쿠시마(福島)를 제외하곤 조사 장소를 알 수 없고, 상영회의 주최자가 시청자의 반응을 수합하여 요약하고 논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 자료는 시청자의 육성을 들려주진 못하지만, 경향을 파악하기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논평은 미국의 과학기술’, ‘스포츠(야구)’, ‘여가활동(스퀘어 댄스)’에 현저한 관심을 표명했고, 정치적·교육적 내용이 담긴 영화는 인기가 없었다. 표본이 가지고 있는 대표성 및 신빙성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를 통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미국의 원폭투하는 즉사인원만 대략 12만 명(7+5)이라는 가공할 피해를 남겼다.[각주:2] 헌데 조사가 실시된 년도는 1950년으로, 원폭이 투하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이 겪은 피해 수준과 과학(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인식 간의 괴리는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CIE 영화의 포장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과학(원자력)에 대한 불평을 조사표에서 배제시킨 것인지, 또는 역사에 대한 일본 민초들의 뼈저린 반성에서 나오는 것인지 의문이다.

 

2장에서 미국 대일점령정책을 만든 조직·계통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었다.

 

1942년 봄. 국무부가 특별조사부(SR) 설치.

1942년 가을. 블레이크슬리와 보튼이 SR 극동단에 배속.

19431. 블레이크슬리 무리가 SR 정치연구국 영토문제소위원회(TS, 의장 보우맨)에 배속, T-357a 작성. 아직까지 매체를 재교육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

19441. 국무부가 전후계획위원회(PWC) 설치, 블레이크슬리 무리는 국가지역위원회(CAC)의 하나인 부처간극동지역위원회(IDACFE, 의장 블레이크슬리)에 배속. 친일적 CAC-116과 이를 두고 수정을 요한 PWC-108b가 제안됨. 매체가 재교육수단으로 대두됨.

(IDACFE CAC PWC)

19443·4. PWC-108b를 두고 논의가 진행됨. 세 시기(엄격한 통제/주의 깊은 관찰/국제사회로 복귀) 구분.

19445. PWC-152b 승인.

19446. PWC-288(CAC-237)의 초안이 작성됨. 매체의 역할을 명확히 정의(PWC-288b).

194412. 삼부조정위원회(SWNCC) 설립.

19452. SWNCC가 극동소위원회(SFF, 의잔 두맨) 설치. 블레이크슬리 무리는 SFE의 작업단에 배속.

(작업단 SFE SWNCC JCS)

19457. SWNCC 해군성대표 게이츠가 SWNCC-162/D(“재교육·재방향설정이란 용어가 공식적으로 확립됨) 검토를 지시.

1945821. 블레이크슬리는 SWNCC-150(점령정책의 기본노선)SWNCC-162/D(SFE-116))을 결론 내려야한다는 IDACFE의 견해를 전달.

1945831. 국무성이 국제공보문화국(OIC)를 설치.

194596. SWNCC-150/4 승인. 불개입주의/개입주의를 각각 반영.

194597. “일본인의 재방향설정을 위한 특별위원회(위원장 보튼)” 조직됨.

19451226. SFE-116/4(일본인의 재방향설정) 완성.

194618. SFE-116/4가 맥아더에게 송부돼 민간정보교육국(CIE)의 활동 지침이 됨.

  1. 1951년 9월 8일, 연합국 48개국과의 다자적 평화조약(남한·북한·중공·대만·소련은 서명하지 않음)과 미·일간 안보조약을 일컫는다. 1952년 4월 28일자로 발효됐고, 같은 날 일본은 타이페이(臺北)에서 대만(중화민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다우어(John W. Dower)는 샌프란시스코체제가 일본과 아시아 주변국들 간의 화해와 재통합을 막고, 평화의 도래를 지연시켰다고 평가했다. [본문으로]
  2. 위키피디아. [본문으로]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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