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2016. 3. 17. 09:29

일시: 20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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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편의 투표 양상에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즉 젊은이들이 장년층과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투표를 한다는 것이다. 벌이, 교육 또는 성별보다는 투표자가 속한 세대에 기반을 둔 이같은 거대한 단절은 벌써 시작된 듯 하다.

 

이 단절은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장년층과 젊은이의 삶은 현재 보이는 것처럼 확연히 다르다. 그들의 과거 또한 다르고, 당연히 그들이 가진 전망도 서로 다르다.

 

예컨대 냉전은 젊은이들 일부가 어렸을 적이나 심지어는 태어나기도 전에 끝났다. '사회주의'와 같은 말은 더 이상 과거의 용법대로 쓰이지 않는다. 만일 '사회주의'란 말의 뜻이, 공공의 우려를 가차없이 다루지 않는, 즉 사람들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거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불과 20여년 전 또는 반 세기 전에 똑같은 이름[사회주의]을 지닌 실험이 실패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실험은 과거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따라서 과거의 실패한 실험이 새로운 실험[의 실패]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중상계급 장년층에 속했던 미국인과 유럽인은 좋은 삶을 누렸다. 그들이 막 노동시장에 진입 했을 땐 풍부한 보상을 제공하는 일이 그들을 반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물었지, 독립할 수 있는 조건의 일을 구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얼마나 같이 살아야 하는지를 묻진 않았다.

 

그 세대는 안정적인 직업, 젊었을 때 결혼, 주택 -아마 여름용 별장도- 구입과 함께 노후를 보장받는 은퇴를 기대했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부모님 세대보다 더 나아지길 기대했다.

 

오늘날 장년층은 종종 곤란과 맞닥뜨리긴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대개 이루어졌다. 그들은 노동보다는 자본수익과 부동산을 통해 많은 걸 얻었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을 분명히 이상하게 보았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투기적 시장이 제공하는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적재적소에 구입한 공로를 왕왕 자신들에게 돌렸다.

 

오늘날 소득분배상의 어느 구간에 있는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의 기대는 정반대이다. 그들은 인생 전반에 걸쳐 직업 불안정에 직면한다. 평균적으로, 적지 않은 수의 대졸자는 직장을 찾기까지 수개월이 걸리며, 대개는 [그 전에] 하나 내지 두 개의 무급 훈련직(internship)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다행이라고 여기는데, 학교 성적은 좋았지만 경제적으로 빈곤한 동급생들이 수입 없이 한 두 해[동안 훈련직]를 버틸 수 없거니와 애초에 그런 훈련직을 얻을 끈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 대졸자들은 빚더미에 짓눌리는데, 가난할수록 더 많이 빌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떤 직업을 고를지 묻지 않고, [적어도] 20년 또는 그것보다 길게 그들을 괴롭히는 학자금을 값을 수 있게 해주는 직업이 무엇인지를 묻게 돼버렸다.

 

이러한 몸부림은 젊은이들이 그들의 은퇴에 관해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은퇴에 관해 생각하는 순간, 밑바닥 금리가 당분간 지속되는 가운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을 넘어) 괜찮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돈을 모아야 하는지에 관한 공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세대간 공정함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중상계급 아이들은 막판에 가선 잘 할 것인데, 부모로부터 부를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한 [부모에의] 기댐을 좋아하지 않을 순 있지만, 대안, 즉 중상층의 생활기초로 간주된 것들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새로운 출발은 더욱 싫어할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결코 쉽게 해명될 수 없다. 젊은이들이 노오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공부에 시간을 많이 투자했고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모든 것을 옳게한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이다. 젊은이들이 금융위기를 초래한 은행가들, 경제에 끊임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면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상여금을 받으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바가 거의 없다고 봄과 동시에 사회적 불의, 즉 경제가 조작되었다는 느낌은 가중된다. 대규모의 사기가 발생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누구도 실제로 사기를 저지르지 않게 된 것이다. 엘리뜨 정치인들은 개혁이 유례없는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의 약속은 이루어졌지만, 단지 최상층 1%만을 위한 것이었다. 젊은이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유례없는 불안정이 덮쳤다.

 

유례없는 수준의 사회적 불의, 대규모의 불평등, 엘리뜨에 대한 믿음의 상실이라는 세 가지 현실이 우리의 정치를 아주 정당하게 규정한다.

 

같은 것을 늘리는 것이 답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유럽에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패배하고 있는 이유이다. 미국은 이상한 위치에 서있다. 공화당 대선후보들이 숙고를 거치지 않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제안들을 가지고 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반면, 민주당의 두 후보는 진정 변화를 불러올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만 있다면미래상을 제안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버니 샌더스의 개혁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미 충분히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들을 제물로 삼는 금융체제는 억제될 수 있다. 더군다나 두 후보는 모두 미국이 고등교육에 어떻게 재원을 대는지에 관한 심도 있는 개혁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증권시장의 변화와 0에 가까운 이자율이라는 조건 속에서, 계약금을 대줄 수 있는 부모가 없어도 주택을 소유할 수 있고 노후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들이 이뤄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가 더 잘 돌아가지 않는다면 젊은이들에게 구직시장으로의 진입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점이다. 4.9%라는 미국의 공식실업률은 임금[상승]을 죄게 마련인 각종 실업률의 높은 수준을 가려버린다.

 

하지만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교정은 불가하다. 젊은이들은 [분명히] 인식한다. 젊은이들은 세대간 정의란 없음을 알고 있고, 정당하게 분노하고 있다.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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