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현대사2015. 7. 23. 03:28

러시아연방대외정책문서보관소(АВПРФ)

Ф. 102, О. 18, П. 93, Д. 5, ЛЛ. 1~189.

1962년 8월 10일~12월 24일


1962년 9월 1일 조선 주재 소련 대사 마스꼽스끼와 외국 대사들과의 대화록:


1) 베트남 인민공화국 수립 17주년을 기념해 베트남 공화국 대사관에서 개최한 리셉션에서 불가리아 대사 보그다노프와 헝가리 대사 꼬봐츠를 만났다.

[...]

불가리아 대사는 본국정부의 훈령으로 노동당 부위원장 김창만을 방문하고 소피아에서 불가리아 주재 북조선 대사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항의를 했다고 하였다.

항의내용은 4명의 북조선 유학생이 귀국을 거부하고 불가리아정부에 정치망명을 요청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북조선 대사와 대사관원들이 이들을 체포해 구타하고 대사관에 감금시킨 후 지금까지 석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불가리아 대사 보그다노프는 북조선 대사가 불가리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본국정부가 불쾌하게 생각하고 즉시 북조선정부에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강경한 항의를 전달하고 석방하지 않을 경우 불가리아 주재 북조선 대사를 추방하고 조선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겠다고 했다고 하였다. 불가리아정부의 항의는 마침 김일성과 외상이 평양에 없어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창만에게 전했다고 하였다.

김창만은 이 항의를 듣고 불가리아 주재 북조선 대사가 올바르게 처신했다고 두둔하며 조국의 배신자를 대사관에 억류하고 마르크스레닌 정신으로 교육시키려고 한 것이며 불가리아정부가 공연히 귀국하지 않으려는 자를 보호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외교관례를 적용해 그들에게 난민권을 제공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창만은 조선인 유학생들은 조선에는 일이 많고 살기가 어려워 귀국을 않겠다고 했다며 의지가 박약한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에 해롭다고 말하고 도리어 불가리아정부는 그들을 북조선으로 송환하는데 협조하라고 했다고 하였다.

불가리아 대사는 다시 한 번 김창만에게 본국정부의 성명을 밝히고 불가리아에서야 말로 마르크스레닌 정신으로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하고 왜 유학생을 억류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불가리아 대사는 내일 본국 정부로부터 소환을 받고 모래 북조선을 떠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본 대사는 4명의 유학생 문제로 불가리아 대사가 본국에 송환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1962년 10월 15일 조선 주재 소련 대사 마스꼽스끼의 일지:


불가리아 대리대사 스또이츠꼬프는 보그다노프 대사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통역도 없이 혼자 있게 되어 어려움이 많다고 하였다. 대리대사 스또이츠코프는 최근 신원을 알 수 없는 젊은 조선인들이 자기 뒤를 밟고 있으며 그 중 몇 사람은 불가리아에 유학을 했다고 하면서 면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스또이츠꼬프는 흥미 있는 한 불가리아 여성의 에피소드를 전해주었다. 이 불가리아 여성은 불가리아에서 유학한 조선인 학생과 결혼했는데 그 남편은 현재 평양에 있는 대학의 전기공학과 학장으로 있으며 그의 형은 인민군 대령이라고 하였다. 불가리아 여성은 침대, 책상과 의자 그리고 라디오 등을 구입했다. 즉 방을 유럽식으로 꾸미는 데는 필수적인 가구다. 그러나 형인 대령은 불가리아 여성의 남편인 학장과 형제의 의를 단절하고 조선인의 고유한 관습과 도덕을 어겼다고 비난하였는데 불가리아 여성이 외국 문학책과 라디오로 다른 나라의 소식을 듣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62년 10월 12일 조선 주재 소련 대사 마스꼽스끼와 중립국 휴전감시 대표단 폴란드대표단장과의 대화록:


폴란드 대표단장 프란찌쉐끄 무루즈 장군과 대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지난 10월 6일과 7일 양일간 미군 휴전선(판문점) 경비대장 윈 장군의 초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 힐레 장군과 또 그의 보좌관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었다고 하였다.

서울을 방문하게 된 동기는 여러 차례 스웨덴과 스위스 중립국 대표들에게 철의 장막을 치는 것은 사회주의국가 중립국 휴전감시단이 아니고 미국 대표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국가의 중립국 휴전감시단인 스위스와 스웨덴 대표들은 평양에 자유롭게 왕래하는데 사회주의국가 휴전 감시단은 서울을 왕래할 수 없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

서울 구경은 자유롭게 할 수 있었으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표가 원하는 모든 곳을 안내하고 아침과 점심은 유럽식으로 저녁은 한식으로 접대를 받았다고 하였다.

서울에 대한 인상으로 폴란드 대표 무루즈는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도시는 깨끗하고 가로수가 있으며 전쟁 후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 자동차가 대단히 많고 특히 버스가 많았다. 인민들은 옷을 잘 입고 있었으며 주로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여성은 가끔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기도 했으나 청년들은 전부 양복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밤에는 네온이 아름답고 밝았으며 상점에는 소비제품을 포함 옷, 식료품 신발이 아주 많았으나 가격은 묻지 않았다고 했다.

[...]

어느 날 식당에서 한국인 대령이 반 농담으로 미국인 대령에게 말을 걸었다. "제국주의자 미국인이 손님을 잘 모시지 않는군요." 미국인 대령은 농답으로 받아넘겼으나 그 후 더 우리를 잘 대해주었다고 했다. 이때 한국인 대령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장군에게 "보십시오. 이곳에 여러 성분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제국주의자 미국인 대령, 반공주의자 한국인 대령, 그리고 공산주의의 장군과 한 식탁에 앉아 식사하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모든 문제에 대해서 협의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폴란드 무루즈 장군은 대답하기를 당신들과 협의를 할 수 있으나 단 미국인 대령은 제국주의자가 아니고 제국주의자 대표로, 한국인 대령은 반공주의자가 아니라 반공주의자 대표자로 회담하자고 하면서 웃었다고 했다.


박종효 편역, <러시아연방외무성대한정책자료> 2권, 2010, 선인, 236~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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