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현대사2015. 6. 2. 21:21

​"당시 버마의 수도 랭군에 끌려간 전남 강진 출신의 金福善의 증언에 따르면, “랭군위안소라는 커다란 간판이 있었다. 여기에 방이 10칸, 廊下에 세정소가 있었다. 처녀들은 울었다. 그러자 헌병은 커다란 몽둥이로 때렸다. 절대 머리쪽은 때리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일본의 병대가 왔다. 사쿠를 가지고 오기도 하지만, 가지고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하였다"
(百萬人の身世打令編輯委員, ..百萬人の身世打令.., 東方出版, 1999, 523쪽.)

"버마지역에 온 대부분의 한인 여성들은 “우리들은 속았다. 동경의 군수공장으로 간다고 모집하였다. 나는 도쿄로 가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응모한 것”이라고 하였다"
(高崎隆治 編著,
慰安所·男のホンネ, 梨の木舍, 1994, 56쪽.)

"미군 전시정보국에서는 버마의 미엣치나(Myitkyina)에서 포로로 잡힌 한인 위안부 20명에 대해 포로로 심문을 하였다. 이 심문자료에 따르면, 한인 여성들은 1942년 8월 703명이 해상으로 버마에 와서 각각 20명 내지 30명씩의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눠 버마 각지에 분산 배속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일본군에서 운영한 위안소의 요금은 일반병사가 50전, 尉官급이 1원, 佐官계급이 1원 5전이었다. 병사들은 주 2일, 수요일과 일요일에 낮부터 위안소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버마지역에 끌려간 대부분의 일본군 ‘위안부’들은 하루 50명에서 70명을 상대하였다고 한다."
(吉見義明 편집·金淳鎬 번역, 자료집·종군위안부, 335~348쪽 참조.)

"일제 말기 한국인은 군사요원·비군사요원 할 것 없이 대부분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하 한국인에 대한 전시동원은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되었다는 점에서 ‘강제동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곧바로 동남아지역을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한인들을 이곳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초기에는 노무자, 일본군 ‘위안부’ 등 비전투 요원을 그리고 후기에는 군인과 같은 군사요원을 강제동원하였다. 일본 군내에서 한인 병사들은 일상적인 폭력과 민족적 차별을 받아야만 했고, 폭력과 차별은 내무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한인 청년들은 망국의 설움을 더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김도형, 2014, 일제 말기 필리핀·버마지역 한인 병사의 강제동원과 귀환.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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