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현대사2015. 4. 3. 23:46

 바야흐로 1923년 봄, 장덕수는 인촌과 고하의 지지를 받아 도미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는 조선말과 일본말에 능통했고 영어공부도 꽤나 착실히 한 편이었다. 만으로 29세, 조선의 독립과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그는 미국행 기선에 몸을 실었다. 애초의 목적지는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이었다.

 

 그런데 선상에서 만난 한 미국인이 장덕수의 회화를 듣고 나서 충심으로 다음과 같이 조언을 해주었다. “미스터 장, 컬럼비아 같은 명문대학에서 공부를 착실히 하려거든 영어 실력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고 학비를 낭비하게 됩니다.”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동포가 적고 조용한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 시로 진로를 바꾸었다. 당시 오리건 주립대학에는 신문학과 새내기 장덕수를 비롯하여 조선인이 고작 3명(윤홍섭, 필지성)이었다. 이제 장덕수에겐 '열공'할 일만 남은 셈이었다.

 

Posted by 사용자 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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